2026. 3. 30. 큐티
예레미야 애가 4:14 ~ 22
우리의 종말이 이르렀도다
관찰 :
1) 거짓 지도자들의 인도함을 받는 민중이 받은 화
- 14절. “그들이 거리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함이여 그들의 옷들이 피에 더러워졌으므로 아무도 만질 수 없도다”
a. 14 ~ 16절에서 “그들”이 누구를 가리키느냐하는 것은 난제입니다. “그들”을 거짓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면 13절에서는 문맥상 자연스러운데, 16절과는 부딪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그들”은 거짓된 지도자들을 따른 민중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맞습니다.
b. 거짓된 지도자들에 의해 인도함을 받은 이들은 “맹인 같이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선지자들의 피를 그들의 옷에 묻혔던 것입니다. 의인들의 피를 흘렸기에 그들은 부정하게 되었고, 그들을 만져서는 안되는 부정한 존재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 15절. “사람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기를 저리 가라 부정하다, 저리 가라, 저리 가라, 만지지 말라 하였음이여 그들이 도망하여 방황할 때에 이방인들이 말하기를 그들이 다시는 여기서 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a. 의로운 선지자들의 피를 흘린 거짓된 지도자들에게 미혹된 백성들은 나라를 잃게 되고 이방인에 의해서 징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b. 그들은 동족에게도 부정한 자로 취급되고, 또한 이방인들에게서도 배척을 받게 되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 16절. “여호와께서 노하여 그들을 흩으시고 다시는 돌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제사장들을 높이지 아니하였으며 장로들을 대접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a. 하나님 여호와께서 유대인들을 이방인들에게서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하셨습니다.
b. 그 이유는 그들이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증거하는 제사장들을 높이지 아니하고, 장로들을 대접하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순복하지 않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2) 바벨론 침공으로 유린되는 유다의 모습
- 17절.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의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
a. 예레미야는 유다 민족의 죄악을 자신을 포함한 “우리”의 죄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b. 사실 예레미야는 애굽에 도움을 구하는 것에 대해서 처음부터 반대했던 존재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징계를 받아 바벨론에 가서 그곳에서 집을 짓고, 그곳에서 경제활동을 하며, 그곳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기다려야 함을 누누이 강조했던 선지자였습니다.
c. 그런데 예레미야는 애굽에 도움을 구하는 헛된 행동을 자신을 포함한 “우리”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도움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그릇되고 잘못된 것인지 알았지만 백성들이 하나님을 구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그는 이렇듯 공동체적인 문제로 여기고 그에 대해서 슬픔의 노래로 자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 18절. “그들이 우리의 걸음을 엿보니 우리가 거리마다 다 다닐 수 없음이여 우리의 끝이 가깝고 우리의 날들이 다하였으며 우리의 종말이 이르렀도다”
a. 바벨론이 유다에 침공하고 예루살렘에 들어왔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고사작전을 전개한 그들은 이제 성문을 깨고 들어온 것입니다.
b. 포위된 성 안에서 굶어죽고 공포에 미쳐버리던 유다 백성들은 거의 저항다운 저항을 해보지 못하고 처절한 유린을 당하며 그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두려움이 심해서 거리로 도망도 하지 못하고, 예루살렘 성을 뛰쳐나가 도망할 수도 없는 지경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 19절. “우리를 뒤쫓는 자들이 하늘의 독수리들보다 빠름이여 산 꼭대기까지도 뒤쫓으며 광야에서도 우리를 잡으려고 매복하였도다”
a. 바벨론의 군대는 민첩하게 유다의 백성들을 잔멸하고 붙잡았습니다. 그들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빠르고 정확한 곳에 매복하여 포로로 사로잡거나 반항하는 자들을 모조리 도륙해 버렸던 것입니다.
- 20절.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a. “우리의 콧김”(רוּחַ אַפֵּינוּ, 루아흐 압페누)의 ‘콧김’이란 ‘호흡’이라는 뜻이며, ‘호흡’은 생명을 의의합니다. 즉, ‘우리의 생명처럼 귀중한 존재’인 ‘우리의 왕’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를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시드기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b. 유다 백성들은 시드기야 왕의 혜택으로 말미암아 장차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서 나라를 유지하면서 살게 될 것이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고, 애굽을 의지했으며,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은 그릇된 행위였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제아무리 방비를 잘했어도 감당하지 못할 방법으로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침공했고, 속수무책으로 망하게 된 것입니다.
c. 시드기야를 “우리의 콧김”으로 표현한 것은 유다 백성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던지에 대한 자조적인 의미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의지한 인간 왕인 시드기야가 이제 유다의 20대 왕으로 마지막 왕좌에서 끌려나와 두 눈이 뽑혀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된 것입니다.
3) 그러나 유다의 원수는 망하게 되고 유다는 회복될 것이다.
- 21절. “우스 땅에 사는 딸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라 잔이 네게도 이를지니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라”
a. “에돔”은 유다 민족의 원수를 대표하는 민족입니다. 유다 민족의 원수는 멸망을 당하고 유다는 하나님에 의해서 정한 기간이 끝나면 회복해 주실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b. 여기서 에돔에게 주어지는 잔은 멸망의 잔이고, 심판의 잔입니다. 그들에게 기뻐하라는 것은 역설적인 의미로서의 기쁨이고, 유다에게 있어서의 기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22절. “딸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아니하게 하시리로다 딸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
a. 하나님이 정하신 바의 형벌이 끝이 있다는 것을 예레미야는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진노와 그 형벌이 너무나 무겁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 민족의 아픔을 그렇게 아뢰었던 것입니다.
b. 그러나 죄악의 형벌이 다 하였다면, 그래서 다시는 망하게 하시지 않으시기로 하나님이 작정하셨다면, 그것은 가장 확실한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도래하는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는 신약의 교회를 통해서 주어지는 약속입니다.
c. 교회가 세상에서 계속적으로 핍박을 받게 되고 위험에 처하게 되더라도 결국은 완전한 구원을 얻게 될 것임을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유다의 멸망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가르침 :
1) 거짓 지도자를 따르는 것은 크나큰 결과를 초래합니다. 거짓 지도자가 하나님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잘못된 지도자를 따름으로 인해서 무분별하게 한 행위에 대해서 거짓 지도자를 따른 백성들에 대한 책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동일하게 형벌을 받고, 고통을 받고, 재앙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서 참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인 그들의 핏 값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 바벨론 침공으로 유린 당하는 유다는 잘못된 것을 좇은 결과입니다. 그들이 시드기야를 구세주와 같은 존재로 여기고 애굽을 좇은 결과는 파멸이었던 것입니다.
3)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 자신의 백성을 완전히 버리고자 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형벌을 다하시면 회복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언제나 자신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적용 :
1)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것은 그 징계의 과정은 견딜 수 없는 아픔과 고통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나면, 하나님은 분명히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그 모든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변하여 기쁨과 감사와 은혜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힘들고 어려운 일이 좀 있다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언제나, 또 언제나.
2) 고통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결국 선한 것을 이루신다는 확신이 전제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만이 아니라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연관하여 해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임한 고통도 그렇게 바라보고자 합니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고통이 있지만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더 크고 놀랍고 귀한 것임을 고백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