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에 외따로 있는 작은 산’, 시민의 사랑 한 몸에
황성공원(隍城公園) ‘독산(獨山)’
↑↑ 경주의 구도심권과 황성동 신도심권을 양측에 두고 있는 황성공원은 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황성공원에서 가장 높은 ‘독산(獨山)’정상에는 김유신 장군 동상이 보인다.
ⓒ (주)경주신문사
휘날리는 말 꼬리에서조차 힘찬 기상이 넘쳐흘렀다. 김유신 장군이 진격을 외치는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했다. 황성공원 정상에 위치한 독산(獨山)의 김유신 장군 동상은 그렇듯 위풍당당했다.
‘독산(獨山)’. 아직도 시민들에게조차 생소한 이름. 지난 3일,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독산 정상은 평소보다 더욱 고즈넉했다. 멀리 경주 예술의전당이 보이고 새롭게 들어선 아파트 단지를 비롯해 시립도서관 등 정겨운 경주시가지가 나지막히 내려다 보였다.
이 비가 그치면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는 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황성공원 숲이 있다. 숲에는 싹들이 움틀 것이고, 속도와 능률만능으로부터 나무와 숲과 교감하려는 시민들이 이곳, 황성공원을 찾을 것이다. 우리들의 거칠었던 일상을 위로하는 황성공원에서 곧 울창해질 초록 숲의 향연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독산에 한 번 올라가볼 것을 제안해본다.
↑↑ 보물 제1585호 영남지도 중 경주부(조선후기)에는 황성공원 일대가 ‘고성수(사진의 점선 처리 부분)’라고 표기 돼 있다. (주)경주신문사
-황성숲..‘고양수’, ‘고성수’, ‘고성숲’, ‘논호수’ 로도 불려
경주의 구도심권과 황성동 신도심권을 양측에 두고 있는 황성공원. 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황성공원은 경주시민들에게는 고성숲이라는 명칭이 더 와 닿는 곳이다.
옛 문헌에는 고양수, 고성수, 고성숲, 황성숲, 논호수로도 불려졌다고 한다. 고성숲은 1975년 도시근린공원으로 지정됐으며 이후 시민운동장, 씨름장 등 부대시설이 들어서면서 황성공원으로 불리고 있다.
고성숲은 동쪽으로는 소금강산(백률사가 있는 곳)과 맞닿아 지금은 개발이 되어 사라진 임정수와 강변도로가 생겨 없어진 서북쪽의 유림(柳林)과 연결되어 있는 숲이었다. 동경잡기와 경상도읍지에 의하면 재부북4리는 논호수라 임정수와 연결된다고 했다.
보물 제1585호 영남지도 중의 경주부(조선후기)에는 황성공원 일대가 ‘고성수’ 라고 표기 돼 있다. 전국 각도의 숲과 삼국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숲에 대한 내용을 담은 ‘조선의 임수’ 기록에서 ‘임정수’는, 경주군 천북면 황성리, 용강리, 동천리 소재로 면적이 약 2만7000여평으로 경주읍내 동북방 2km 북천의 북안에 위치한 고양수 독산의 동쪽, 소금강산의 서쪽 산기슭 중간에 위치한 평탄지에 위치한다고 했다.
‘유림’은 경주군 천북면 황성리 소재의 하천변 평지로 동쪽에 용수로를 설치해 황성리 농경지와 연결했다고 한다. 유림에는 팽나무, 왕버들 등 거목(巨木)이 있었다.
-독산(獨山)
2006년 발행한 ‘경주풍물지리지(김기문 편저)’ 기록에는 ‘고성의 서북쪽 외따로 있는 높이 27m의 작은 산이다. 신라 때 도읍의 북쪽이 허하다고 하여 이것을 방비하기 위해 사람들이 쌓아 만들었다고 하며 일대에 나무를 심었는데 삼국유사에 독산, 독봉(獨奉), 독산성(獨山城)이라고도 한다. 아직도 깨어진 기와와 그릇 등이 나온다고 한다.
산위에는 김유신장군 동상이 있다’고 했다. 기록으로 미루어 독산은 신라시대부터 서라벌의 지형적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었던 조산(造山)일 가능성이 높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독산의 둘레는 약 400m 정도이다.
삼국유사에서 원성왕(785~798)때 고성숲 서남쪽에 창건한 호원사 전설속에 ‘독산 기슭의 숲 속’이란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독산 주변에 숲을 조성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해 왔음을 볼 때 풍수적 개념인 비보(풍수상의 흠이나 부족한 점을 인위적 조작으로 보완한다는 개념)의 역할을 강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독산 동쪽 아래로는 고성 마을이 있었는데 황성공원 개발로 1980년대 길 건너로 고성마을 주민들이 이주하게 된다. 경주 분지에서 이러한 동산이 있는 것은 이곳이 유일하다. 독산 아래서 계단을 치켜보면 만만치 않은 높이가 느껴진다. 황성 공원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인근에서 오래 산 어르신들은 독산이라 부르지 않고 ‘동매’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독산의 서쪽편에는 ‘임해전’이던 기와집건물이 안압지 물가에서 이건되어 호림정(虎林亭)이란 당호를 붙이고 활을 쏘는 궁사들의 정자로 쓰여지고 있다. 독산에서 내려다보는 동편에는 황성동 주민들의 민원행정기관인 동사무소가 있고 나란히 경주시립도서관이 있으며 주변에는 비닐하우스와 화원, 조경수목원, 분재 농원 등이 있다.
특히, 이곳 독산 주변 숲에는 여름철이면 후투티(일명 인디언 추장새)가 날아와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고 있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수년 전부터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몰려들어 주목받는 곳이기도 하다.
↑↑ 황성공원 전경 항공사진으로 빨간선 표시부분이 독산이다. ⓒ (주)경주신문사
-삼국사기 ‘독산’에 대한 기록
‘내물 이사금 38년(393) 여름 왜인이 와서 금성을 포위하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지금 적들이 배를 버리고 깊숙이 들어와 사지에 있으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다’고 말하고 이내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 성과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00명을 먼저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000명을 보내 독산까지 추격하여 합동으로 공격하니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실성 이사금28년(444)4월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이 기병을 이끌고 독산의 남쪽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두 번 싸워 그들을 격파해 3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성공원 일대에서는 신석기 유물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고분군과 제철 유적, 통일신라시대 고분 등 시대적으로 골고루 발굴이 되고 있어 이 일대는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살아 온 곳이라고 유추 할 수 있다고 한다.
-독산 정상에 있는 김유신장군 동상
옛 호원사 절터의 북쪽에 접한 독산에는 김유신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호원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며 김현(金現)이 그가 관계했던 호랑이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서천가에 세운 절이다. (김현과 호랑이의 설화는 본지 1179호 경주재발견 참고) 역시 ‘경주풍물지리지’에 따르면 ‘김유신장군 동상은 1966년 4월 11일 가락 종친회와 경주시민의 성금에 의해 세워졌다.
동상은 독산 위에 있는데 높이 5.76m, 받침돌 높이 4.33m, 너비 6.33m로 전체 높이가 10m이다. 조각은 故 수월 김만술(水月 金萬述) 선생과 시몽 현성각(時夢 玄聖珏)이 했다’고 적고 있다. 글은 이은상, 정면의 휘호 글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다. 늠름한 장군의 모습에서 웅혼한 기상과 함께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용을 본다. 장군이 높이 치켜세운 칼에는 ‘진격하라’는 외침이 그대로 들리는 듯 같았다.
건립 당시 이 동상은 동북쪽을 보는 듯 서 있었으나 천마총의 발굴에 따른 새로운 고증으로 기마형상의 잘못된 수식을 바로잡았다.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77년에 수월(水月) 김만술(金萬述)선생의 조각으로 북서쪽 방향을 향하도록 새롭게 건립됐다고 한다.
선애경 기자
출처 : http://www.gjnews.com/default/index_view_page.php?part_idx=378&idx=42204
첫댓글 여담으로.....
수월 김만술 선생님과 제친정 부친이 지인관계인지라 동상 제작 당시 수월선생님께선 김유신장군 동상의 얼굴을 부친을 보고 조각하셨다고...
부친께서 김유신장군님의 얼굴모습과 닮어셨는가 봅니다,ㅎㅎㅎ
경주가 고향이시라 고향 경주를 자랑삼아 소개하시는듯,ㅎㅎㅎ
동기 강영주집앞이라 여기 가봤어요어째 동상이 친근 하더니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