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추자 '님은 먼 곳에' (1970)
김추자 '님은 먼 곳에' (1970)
그녀의 등장은 가히 돌풍이라고 할 만큼 한국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으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찰삭 달
라붙는 판탈롱 바지에 마약에라도 취한듯한 뇌쇄적인 눈빛. 그리고 그보다 더 농염한 노골적 섹스어필
의 몸짓. “노래는 무릇 얌전하게 부르는 것”이라는 명제가 통용되던 시기에 모든면에서 파격일색이었던
김추자의 등장은 대중음악계를 통째로 뒤집어놓은 혁명이요 대사건이었다.
이후 그녀는 정말 큼직한‘사건’들을 연이어 몰고 다녔는데, 그런 이미지로 각인된 데는 무대 내외에서 벌
어졌던 해프닝들(이를테면 부산 리사이틀 당시에 김세레나와 벌인 헤게모니 전투나 구혼을 거절당한 매
니저가 깨진 소줏병으로 그녀의 안면을 난장판으로 만든 폭행 사건,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했던 여러 차례의 성형수술, 대마초 파동, 간첩설, 노팬티설 등등등..)이 출처불명의 의심스런 마타도어
와 뒤섞여 재생산 되면서 암울하던 시절의 사회면을 도배질(일설에는 사회적 관심을 정치에서 벗어나게
하기위한 정치적 공작설도 있었다.)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김추자에 대한 평가는 좀 더 냉철하게 좀 더 음악적 측면에서 주시해볼 필요가 있
다. 그것이 그녀의 대표곡 ‘님은 먼 곳에’를 이 자리에서 꺼내는 이유다.
불후의 명곡 ‘님은 먼 곳에’는 1969년 11월 첫 방영된 동양방송(TBC)의 주말연속극 주제곡으로 먼저 공
개되었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 신중현 컴필레이션 음반에 공식적으로 발표된 노래다.
공교롭게도 노래를 처음 부탁받은 이는 김추자가 아니고 당대 최고의 스타 패티김이었다. 그러나 '스탠
더드 팝 발라드 스타일'을 지향했던 패티김은 당연히 방송사의 제의를 고사했다(결과적으로 두 사람 모
두에게 잘된 선택이었다고 본다). “명마의 임자는 따로 있다”는 속설처럼, 그렇게 노래는 김추자의 품으
로 돌아갔고 노래는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나 승승장구 일기당천했다.
신중현이 곡을 쓴(작사 역시 신중현이 했다고 알려졌으나, 2006년 법원은 저작권 공방 끝에 드라마작가
유호의 손을 들어주었다.) 드라마틱한 구조의 소울 클래식 ‘님은 먼 곳에’는 전국을 들썩이게 만들었고,
‘늦기 전에’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로 톱가수의 지위를향해 전력을 다해 바람몰이 중이던 신예가수
김추자는 이 한곡의 노래로 당시의 젊은 대중들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불멸의 디바..대형가수로 각
인 되기에 이른다.
1971년 대한민국, 그리고 베트남전쟁(1960~1975)
<님은 먼곳에>의 시간배경인 1971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정치사적인 의미가 있는 시기다.
1968년 1.21 무장간첩 침투와 그것에 대응하여 만들어진 이른바 684부대 혹은 실미도 부대. 그런 정
세에서 감행된 1969년 3선 개헌과 1971년 박정희의 대선출마와 당선 및 비상사태선포. 1970년부터
전국적으로 실시된 '잘 살아 보세'의 새마을운동.....
이 같은 회오리정국의 대미를 장식하는 사건이 1972년에 단행된 '시월 유신'이었다. 그렇다면 베트남전
쟁과 1971년은 그렇게 긴밀한 상호관계가 없는 듯 보인다. 왜냐면 이미 8년 전인 1963년에 박정희가
케네디에게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자청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시간적으로 볼 때 베트남전쟁은 1970년대 한국인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상이었다.
오늘날 일부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한국과 베트남의 우호증진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우
리는 지금도 베트남전쟁의 전모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한국군이 수행한 수많은 전투와 살육의 전반적
인 반성과 실체적 도덕적평가를 놓치는 통한의 과오를범하고 있다.
이에 관한 부분적인 정보를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저작 <대한민국史2>에서 찾을 수 있다.
"파병된 한국군 가운데 총 5천여 명의 죽음, 1만 명의 부상자, 2만여 명의 고엽제 환자가 양산되었다.
파병기간에 한국군은 5만 명의 베트남인들을 살해하였다. 당시 한국군 소장이 미국으로부터 받은 월급
은 354달러인 반면, 필리핀군과 타이군 소위는 각각 442달러와 389달러를 받았다.
지금의 북한꼴이었던 가난뱅이 한국은 베트남에 참전한 대가로 모두 10억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오늘날의 경제적 풍요의 바탕이 사막과 전장에 피와 땀을 판 댓가였음을 어리석은 우리들은 애석하게도
겨우 반세기가 채 못되는 시간의 흐름에 최면당했음인가...
오늘도 내일도 씰데없이 바쁘기만한 우리모두는 참으로 되새겨봐야할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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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하셨어요 고마어요
추억의노래 넘 좋으네요..
이분도 이젠 중년을넘어셨으리라요
환갑하고도 몇년(?) 더...*^^*
역시 '추자'님의 목소리입니다. 아마 1951.1월 춘천 출생, 69학번!
김추자(金秋子, 1951년 1월 2일 ~ )는.
1951년 1월 2일 춘천에서 5녀 중 막내로 출생. 춘천여자고등학교 졸업.
고등학교 때에는 응원단장, 강원도 배드민턴·기계체조 선수.
춘천향토제에서 전통 창인 〈수심가〉를 불러 3위에 입상했으며.
1969년에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하였다.-다음 블로그검색-
아직도 음악~좋네요
~잘 듣고 갑니다
명곡 감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