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구(龍山區)
-『증보문헌비고』에는 '용이 나타났고 해서 용산(龍山)이라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양화나루 동쪽 언덕의 산형이 용이 있는 형국이라 생긴 이름'이라고 되어 있다.
남영동(南營洞)
-서울 남쪽에 군영이 있었던 것에서 연유
-조선시대 한강변에서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병영을 설치하였다고는 하지만 이를 입증할만한 자료는 없다.
-남영동은 일제가 들어오면서 부근에 연병장이 설치되고 일제식 동명 연병정이 생긴 것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광복후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용산구 남영동이 되었다.
보광동(普光洞)
-신라 진흥왕때 보광국사가 세운 절이 있던데서 유래된 동명.
-이 절은 조선말까지 존속했다고 전해진다.
서빙고동(西氷庫洞)
-조선 초기부터 나라안에서 사용하는 얼음을 저장해두는 창고가 있어 유래된 동명으로 아랫굴이라고도 하였다.
용문동(龍門洞)
-광복 후 용산의 ‘용’자와 동문외계의 ‘문’자를 각각 따서 불리게 된 이름
용산동(龍山洞)
-글자 그대로 용같은 형체의 산
-지금의 용산동 1·2가동은 해방촌이라 부르는데 8.15 해방과 더불어 해외에서 돌아온 동포들과 월남민들이 이 부근 산자락에 임시 거주처를 마련하고 많이 살게된데서 유래된 명칭이다.
원효로동(元曉路洞)
-통일신라시대 고승 원효대사의 이름에서 연유되었다.
-원효대사가 배편을 이용하기 위해 원효로를 거쳤거나 육로로 요동까지 왕복길에 들렀는지 북한산 등 강북의 명산을 돌아보는 길에 들렀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이 지역이 교통상이나 거주지역으로 활동 장소였음을 의미한다.
이촌동(二村洞)
-‘동국문헌비고’에 따르면 본래 사평리진, 사라진이라 했고 속칭 사리·사촌·사리마을이라고 하였다.
-영조 27(1751)년 한성부 서부 용산방 사촌리계·신촌리계
-갑오개혁이후 1895년 5월 26일 한성부 서서 용산방 사촌리계의 사촌리, 신촌리예의 신촌동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와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한지면 신초리와 용산면 신촌리, 사촌리를 통합하여 경성부 이촌동으로 칭하였다.
-광복후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용산구 이촌동이 되었다.
이태원동(梨泰院洞)
-조선시대 이태원이라는 역원(숙소)이 있어 붙여진 동명
-조선시대에 이태원에서 공용자에게 숙식을 제공하였다.
-이 마을에 배나무가 많이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청파동(靑坡洞)
-청파(靑坡)란 푸른 야산의 언덕이 많았던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조선초 세종 때 이름난 신하(名臣)인 청파(靑坡) 기건(奇虔)이 살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한강로동(漢江路洞)
-한강으로 나가는 주요한 길목인데서 유래되었다.
한남동(漢南洞)
-남쪽에 한강이 흐르고 서북쪽으로 남산이 있으므로 한강의 '한'자와 남산의 '남'자를 합성해 만든 지명이다.
효창동(孝昌洞)
-조선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의 묘원이었던 효창원에서 유래되었다.
후암동(厚岩洞)
-두텁바위라 불리는 둥글고 두터운 큰 바위가 있었던데서 유래되었다.
-후암동은 ‘정성세’로도 불렸는데 후암동 270번지에 조선초기부터 소, 양, 돼지 등을 맡아 기르던 관청인 전생서가 있어
이 부근을 전생서 마을로 부르던데서 유래되어 전생서가 변하여 ‘정성세’로 불렸다고도 한다.
http://www.yongsan.go.kr/pms/contents/contents.do?contseqn=943&decorator=pmsweb&menucdv=04020500&sitecdv=S0000100
문제시 호다닥 수정~!
첫댓글 한남동 정말 강과 산 합쳐져서 뜻이 좋네
청파동 이름 예쁘다
이태원이 조선시대 역원 이름이었구나
청파 발음해보면 되게 청량함!!! 용산구 한남동... 한남이 용산구인거 되게 당연한건데 왜케 새삼스럽짘ㅋㅋㅋㅋ한남탈트붕괴(?) ㅋㅋㅋ 후암동은 종로라고 생각했는데 여태..... 이 글 보고 알았어 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