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 현교인 중관학파 글을 여러 번 썼었는데, 테라와다에 속하는 쉐우민 수행처 법문 중 중요한 얘기들이 보여서 일부를 올립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쉐우민 수행의 장점 중 하나가 법문을 포함해서 이해하기가 굉장히 쉽고 직관적이라는 것입니다. 꾸준히 하는 게 관건이지만 실천수행에서도 그렇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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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수행 중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의 의도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몸은 마음의 의도에 의해 움직인다. 팔, 다리, 몸을 움직이는 것은 심지어 눈썹 한번을 깜빡거리는 것도 마음의 의도 없이 되지 않는다.
몸은 마음의 의도 없이 움직일 능력이 없다. 모든 몸의 움직임에는 의도가 있지만, 의도를 알아차리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우리들은 습관적으로 너무 빠르게 행동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지된 동작에서 움직이려고 할 때부터 하나씩 의도를 알아차려 나가야 한다. 예를 들면 경행 중에 서 있다가 돌 때, 돌려는 의도를 알고, 돌고, 돌고 나서 서 있다가 앞으로 나갈 때 나가려는 의도를 알고 나가고 이렇게 정지된 동작에서 움직이기 시작할 때 하나씩 알아차려 나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차츰 대상을 넓혀 나간다. 의도를 많이 보는 것은 사띠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중요한 노력이다. 의도을 많이 보면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나고 사띠가 끊어지지 않아 사마디가 생긴다.
의도는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알 수가 있지 산란하거나 분주한 마음일 때는 볼 수가 없다. 의도는 언제나 있는 것인데 항상 놓치기 때문에 모르고 지나치는 대상이다.
그러나 보는 힘이 없는데 지나치게 의도를 보려는 것에 집착하면 오히려 장애가 된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증장 되도록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몸은 마음에 의하여 움직이고 마음은 다시 “眼/耳/碑/舌/身”의 다섯 가지 물질과 “意” 한가지의 마음에 의해 일어난다.
요약하면, 마음은 다시 육근의 물질과 마음에 의해 일어난다. 이처럼 물질과 마음의 관계가 모두 원인과 결과의 관계이며 여기서 하나씩 의도를 알아차려 나갈 수 있다.
⑥ 아는 마음을 아는 상태로 봐야 한다. 아는 마음을 아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사띠가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
사띠 챙기기에도 급급한 상태에서는 되기가 어렵다. 이것은 사띠를 챙기고 있을 때 다시 새록새록 일어난 마음이 사띠를 챙기고 있는 그 대상을 보는 것이다.
아는 마음을 다시 지켜보게 되면 대상을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고 사띠가 끊어지지 않게 한다.
그래서 마음이 달아나 망상을 하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이때 대상에 명칭을 붙이게 되면 아는 마음을 다시 알 수가 없다. 그때는 이미 그럴 여유와 능력이 생기기 않는다.
또한 아는 마음을 다시 아는 것은 항상 새로운 마음이 새록새록 일어나서 다시 보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보는 것이 아니고 단지 새로운 마음이 본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래서 무아를 알 수 있다.
⑦ 오력(사띠/사마디/위리아/믿음/지혜)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사마디는 고요함의 상태이다. 경행 중에도 사띠가 이어지면 순간 사마디가 생기며 이 사마디는 좌선에 좋은 영향을 준다.
사마디가 생겼을 때 주의해야 할 것은 고요함의 상태이기 때문에 거기에 빠져 사띠를 놓치게 될 수가 있다. 사마디는 사띠가 없으면 안 된다. 고요해진 만큼 더 섬세한 사띠가 필요하다.
이때 섬세한 사띠를 두지 못하기 때문에 수행의 발전을 보기가 어렵다. 사띠가 없는 사마디은 혼침에 빠지며 상상으로 만들어낸 대상에 가공의 현상을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지혜 없는 사마디는 아주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더 섬세하고 강한 사띠를 두기 위해서는 위리아(바른 노력)가 필요하다. 알아차림 하는 대상이 많을수록 좋고 多多益善이다.
그러나 사마디가 지나치면 혼침에 빠지고 또 위리아가 지나치면 마음이 산란해진다.
또한 삿다(바른 믿음)가 지나치면 맹목적 신앙에 빠진다. 그래서 사띠와는 모든 것이 알맞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특히 위리아가 지나치면 마음이 들뜨고 산란해져서 대상을 알아차릴 수가 없다.
하고자 하는 의욕이 넘치면 마음이 앞서고 바라는 마음이 생겨서 몸이 긴장한다. 몸이 긴장하면 아무리 대상을 보려고 해도 대상을 알아차리기가 힘들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는 특별한 목적을 가진 기도나 주문을 권장하지 않는다. 자비관을 하는 것조차도 크게 권장하지 않는다.
언제나 알아차리는 것만이 최상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공양을 할 때나 절을 할 때조차도 오직 알아차리는 것만을 말하지 특별한 기도나 존경심을 요구하지 않는다.
믿음은 지혜가 균형을 받쳐 주어야 한다. 믿음과 지혜가 서로 균형을 잡고 그 중간에 사띠, 사마디, 위리아가 항상 조화를 이루어야 이상적인 상태의 수행을 할 수가 있다.
이렇게 수행을 해나가면 환희심이 생긴다. 환희심이 일어날 때 환희심으로 수행의 절정으로 오해하는 수가 많고 그때 특별한 능력도 생길 수 있지만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낮은 단계의 현상이다.
이 단계에서는 환희심이 생기고, 빛이 나타나고 하는데, 이때의 빛은 관념일 뿐이다. 환희심이 생길 때마다 알아차려서 빠지지 않으면 그 단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계 속)
첫댓글 법을 알고, 마음을 알고, 일어나는 일체를 안다는 것보다 아름다운게 어디 있을까요.
법. 마음. 형성되는 모든 것이
바로 너이고, 나이고, 세상이죠.
잠시 왔다 떠나는게 우리들의 모습인데
그 모습을 알고 살아가는 것과, 무지의 삶으로 지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계이겠지요.
열심히 배우고 익히고 수행하여, 자연의 부분으로서의 내가 전체 자연의 섭리를 통달하고 받아들이는 경이로움 속으로 들어가게 되길 빕니다.
열심히 공부하시는 법무아님을 찬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