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 출현하기까지의 고대 근동 역사
입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역사의 여명'은 문자가 발명되고 사회, 정치, 경제적 조직이 국가톹제주의 형태를 취하는 것으로 찾아들었다.
이 두 가지가 발달되는 시기는 통상 기원전 3000년경으로 잡는다.
이 연대는 이 지역 전체에서 청동으로 만든 무기와 도구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는 시기와 맞아떨어지는데, 고고학자들은 이때 이후 2천 년의 세월을 세분화하여 초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3000-2000년), 중기 청동기시대(기원전 2000년-1500년), 후기 청동기시대(기원전 1500년-1200년)로 나눈다.
역사가들은 왕궁과 신전 무서고에서 발견되 대량의 기록과 한 세기 반에 걸친 고고학적 탐사 결과를 바탕으로 정치사를 상당한 깊이까지 파헤쳤을 뿐 아니라 고대인들의 생활과 문화를 세부적으로 그려냈다.
국가통제주의 형태의 사회, 정치, 경제 조직은 초창기 역사에서 초점이 되는 이집트의 나일 강 계곡과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계곡에서 대부분의 지역으로 퍼져 지배적 조직 형태로 자리 잡았다.
가장 규모가 작은 지역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독립 지역들이 자체젹인 임금과 관료와 군대를 갖추었다.
그러면서 저마다 마련한 사화, 경제, 정치적 장치에 합법성을 부여할 목적으로 공식 종교 이념을 구축해 냈다.
각 국가는 신들의 뜩과 보호 아래 태동하고 존속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국가의 후원 아래 지역 신전에서 거행되는 성대한 제사 의식은 흔히 지배 엘리트의 통치를 강화하고 용이하게 만들었다.
고대 세계에서 계승된 정치 발전을 왕궁과 신전 문서고에서 나온 문헌을 토대로 재구성해 보면, 정복 전쟁과 체제 변화와 제국의 흥망은 때로 혼란스런 양상을 보인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아래로부터의 관점'을 제구성한다면, 엘리트와 권력자들 사이의 갈등과 대립까지 뒤엉킨, 훨씬 복잡한 상황을 그려보는 일도 가능하다.
사실 '공식' 역사는 사회, 경제, 문화, 종교 자료를 통해 보완하면서 조망할 필요가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보편적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의 정수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라는 중요한 두 중심 역사 속에 이어져 왔고, 이 두 중심 국가들은 '중간에' 위치한 시리아 팔레스티나 지역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고대로부터 보존되어 오면서 서수 세계의 성격과 형성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문헌이 바로 '중간' 지대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이는 다름 아닌 히브리어 성경이다.
이 가운데 많은 부분이 먼저 이스라엘 내부, 다음에 유다 민족의 지배 집단들이 최종 형태로 작성한 '공식' 역사를 대변한다.
그럼에도 이것은 이스라엘 선조들의 이야기 속에 국외자들의 기억과 전승도 수록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진짜' 역사를 기록하던 이들이 보기에 주변적이고 보잘것없었다.
이스라엘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때는 후기 청동기 시대 말에 해당하는 기원전 1200년경으로, 이 무렵 철이 널리 보급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상대적으로 뒤늦게 역사의 무대에 출연했다.
고대 세계 전체의 역사에서 보면 그들은 중반을 한참 넘긴 다음에야 무대에 등장했다.
이스라엘이 무대에 나타나기 이전에 온갖 고대 근동 문화가 발흥하여 나름대로 고전적 표현을 발전시켰으며, 그중에는 이미 쇠퇴하여 사라진 것도 있었다.
우리는 이 민족에게 시선을 집중하기에 앞서 미리 배경을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가들이 발굴된 유적과 기록을 토대로 재구성해 놓은 대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티나는 중요 중심 국가들의 정치사를 간략하게 살펴 보아야 한다.
이집트
삼면이 사막으로 둘러싸이고 한 면은 바다에 접해 있는 고립된 지형 덕분에 이집트는 다른 중심 지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치와 문화의 발당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집트는 오늘날까지도 아주 색다른 두 개의 지역, 곧 북부의 삼각주 지역(저지대 이집트)과 남부의 나일계곡(고지대 이집트)으로 구별되어 있다.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4천 년대가 끝날 무렵 통일을 향한 점진적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두 개의 왕국이 출현했다.
그리고 역사의 여명기에 이르러 최초로 통일된 이집트를 지배한 임금 또는 파라오가 무대에 등장한다.
예를 들면 초상화에 나타난 파라오 나르메르는 남부의 하얀 관과 북부의 붉은 관이 결합되 이층관을 쓰고 있다.
나르메르가 권력을 장악하고 최초의 세 왕조가 뒤를 이어 등장하면서 이집트는 역사 시대를 맞이한다.
우리에게 문자 기록이 남겨진 것도 바로 이 시점부터다.
역사사들이 말하는 '구왕국'은 세 번째 왕조의 파라오들이 창건했고 기원전 29세기에서 23세기까지 존속함으로써 기원전 3천 년대를 관통하다시피 한다.
이집트의 사회, 문화가 2500년 동안 변함없이 간직한 특징을 확립한 것도 구왕국 시절이다.
예를 들면 피라미드가 세워진 연대가 이 시대에 해당한다.
'중왕국' 시대(기원전200-1750년경)와 '신왕국' 또는 제국시대(기원전1550-1100년)는 각각 중기와 후기 청동기 시대와 맞아떨어진다.
이집트의 제국주의적 야심이 아시아로 황대되는 것도 바로 이 시기다.
따라서 이집트는 기원전2천 년대의 상당 기간 동안 팔레스티나를 직접 통치했거나 최소한 지배했다고 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앞에서 문자의 발명과 국가로 알려진 사회 조직 형태의 창설을 특징으로 하는 '역사의 여명기'를 이야기 하면서, 메소포타미아의 정치사가 발전하는 윤곽을 대략적으로나마 제시했다.
이 같은 사건들은 주로 티그리스 강 계곡과 유프라테스 강 계곡의 남쪽에서 이루어졌는데, 이곳 지명은 수메르(창세기 11,2의 바벨탑 이야기에 나오는 상아르 지방)다.
수메르 주민들은 서구 문명 속에서 최초의 문자 체제, 최초의 학교, 최초의 법전, 최초의 기록 문학 등 다방면에 걸쳐 '최초'를 기록한다.
이른바 수메르 문화의 초고 전성기는 기원전 3천 년대 전반기, 곧 기원전 29세기에서 26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여러 도시 국가(우룩, 와르카, 에리두 등)는 정치적으로 결합되지는 않았지만 언어와 문학, 종교와 예술, 사회, 경제, 정치 체제 등에서 비슷한 문화를 공유했다.
3천 년대 후반기에는 두 가지 중여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첫째는 수메르인의 지배력이 쇠퇴한 것이고, 둘때는 북부 시리아에서 에블라가 출현한 것이다.
스메르 문화는 3천 년대 초에 태동하여 꽃피고 시들었다.
그 후 지배권은 메소포타미아 중앙 지대인 아카드를 중심 도시로 한 까닭에 아카드인이라 알려진 동부 셈족한태 옮겨졌다,
이 민족은 사르곤의 영도 아랴 '제국'이라는 사례를 후대 역사에 제공했다.
사르곤은 아카드인을 이끌고 메소포타미아 댜부분을 장악했다,
인류 역사에서 다양한 주민들이 거주하는 거대한 영토를 단일 집단이 다스리는 최초의 제국으로 건설했다,
그리한 이후 세대와 집단들은 사르곤 하면 제국의 야망과 업적을 대변하는 원형으로 간주했다.
1974년까지만 해도 학자들은 시리아 팔레스티나가 문화 활동과 정치 권력의 커다란 두 중심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사이에서 상업과 교통의 가교 구실을 했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1974년과 1975년 북부 시리아의 텔 마르딕에서 1만 6천 장의 점토판과 점토판 조각들이 발견되면서, 에블라가 기원전 3천 년대 후반기에 이미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거점 도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주요 남부 문화 도시요 교역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밝혀졌다.
점토판들이 대부분 수메르어로 쓰인 설형문자 체계를 갖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지역 언어인 에블라어의 영향을 반영했다.
서부 셈족 방언의 하나로 밝혀진 이 언어는 가나안어의 초기 형태이며 성경에 쓰인 히브리어의 조상으로 볼 수 있다.
초기 보고서들은 이 점토판들에 나오는 이름과 문화적 특징이 성경에도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기원전 2천 년대에는 아시리아 세력이 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지배권을 장악했다.
아수르를 중심 거점을 발흥한 이 민족은 광범한 교역망을 구축하면서 거칠고 호전적인 싸움꾼으로 이름을 날린다.
이 지역 가운데 남부는 중심 도시 바빌론의 이름을 따서 바빌로니아로 불리면서, 함무라비 임금(기원전 1732-1680)과 그 후계자들의 영도 아래 전성기를 구가했다(기원전 1750-1550).
그러나 2천 년대 말기(기원전1550-1150) 동안에는 카사이르이라 불리는 외국인 통치자들의 왕조가 이 지역을 지배했다.
시리아 팔레스티나
팔레스티나는 고대 세계에서 가나안으로 불리던 지역의 남부를 형성한다.
지중해 동부 연안 전체를 망라하는 가나안은 북쪽으로 터키와 맞닿고 남쪽으로는 이집트와 접경하면서, 현제의 시리아 북부 또는 해안 지대와 레바논, 오늘날의 이스라엘 국가와 그 '점령 지구' 전채를 포괄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이처럼 광활한 가나안은 기원전 3천 년대와 2천 년대에는 정치적 통합을 실현한 적이 없지만, 문화와 언어적인 면에서 한 동아리를 이루었다.
고고학 덕분에 가나안의 생활상과 문화의 모습이 하나하나 맞춰졌다.
특히 2천 년대에는 고대 우가릿 문헌이 주된 역활을 했다.
시리아 해안에 자리 잡은 항구이자 무역 중심지인 이 도시는 1928년에 발견되어 1929년에 발굴이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엄청난 양의 문헌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많은 것이 성경 언어인 히브리어와 아주 가까운 북부 가나안어를 사용했다.
이 점토판들에는 여러 상업문서와 외교문서 외에도 신화와 서사시와 히브리어 성경에 나오는 다양한 종교 언어와 시적 표현, 그리고 사고 세계를 통찰하게 하는 종교 의식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대 우가릿은 청동기 시대 2천 년 동안 가나안이 나뉘어 산재하던 작은 도시국가들 가운데 가장 큰 축에 속했다.
이 민족들은 지명에서 드러나듯 대부분 셈족이었다.
그들은 큰 강 계곡들에서 발달한 국가 통제주의의 사회, 경제, 정치적 조직 양식을 소규모 형태로 응용했다.
그들은 고대 세계 구석구석으로 이어지는 주요 교역로들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전략적 위치 때문에 주로 무역과 상업에 종사했다.
기원전 2천 년대 대부분 남쪽의 이웃 강국 이집트에 의해 통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