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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托鉢)에서 돌아와 공양(供養)을 마치신 다음,
스승께서는 의발(衣鉢)을 치우시고 발을 씻으시고 그 분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는 몸을 곧게 펴고 앞 쪽에 주의를 집중하고 앉으셨다.
불교경전이 처음으로 서양에 번역되었을 때,
서양의 번역자들은 다소 당황했다.
왜 이렇게 사소한 일들에 대한 묘사가 끝없이 반복되는가?
그들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것을 단순히 반복이라고,쓸데없는 중복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 이것은 불필요한 일이었다.
도무지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핵심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난다가 말하려는 것은,붓다가 큰 일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것 처럼
사소한 일에 대해서도 똑같이 주의를 쏟는다는 것이다.
붓다에게는 사소한 일도 없고 큰 일도 없다. 모든 일이 한 가지이다.
그는 밥그릇을 들 때에도 신을 대하듯이 정중하게 대한다.
가사를 걸치거나 옷을 입을 때에도 그는 매우 주의깊다.
그는 전적으로 깨어있다.
그는 기계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대는 옷을 입을 때 기계적으로 입는다.
그대는 옷 입는 방법을 기계적으로 터득하고 있다.
주의를 기울일 필요도 없이 기계적으로 옷을 입는다.
그대의 마음은 계속해서 이 방향 저 방향으로 달음박질친다.
목욕을 할 때에도 그대는 목욕을 무례하게 대한다.
그대는 거기에 있지도 않다.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다.
음식을 먹을 때 그대는 음식을 무례하게 대한다.
그대는 거기에 없다.
그대는 다만 음식을 입 안으로 밀어넣고 있을 뿐이다.
그대는 모든 일을 습관적이고 기계적으로 행한다.
그러나 붓다는 어떤 일을 할 때 전적으로 거기에 있다.
그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다.
탁발에서 돌아와 공양(供養)을 마치신 다음,
스승께서는 의발(衣鉢)을 치우시고
발을 씻으시고 그 분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는
몸을 곧게 펴고 앞 쪽에 주의를 집중하고 앉으셨다.
이렇게 자잘한 일들도 기록할 가치가 있다.
그 모든 일이 깨달음이라는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붓다는 매 순간 각성된 의식으로 산다.
무슨 일을 하든 관계없다.
무슨 일을 하든 그는 매 순간 그 일에 주의를 기울인다.
어떤 몸짓을 할 때,그는 그 몸짓 자체가 된다.
미소 지을 때,그는 전체적으로 미소짓는다.
말할 때,그는 그 말 자체가 된다.
그리고 침묵할 때에는 완벽하게 침묵한다.
붓다와 같은 이를 지켜보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축복이다.
그의 걸음걸이,앉음새,몸짓,
그리고 어떻게 그대를 바라보는지 지켜보는 것 자체가 커다란 은총이다.
그때에는 매 순간이 빛나는 각성의 순간이다.
그래서 아난다는 이토록 자잘한 일들까지 전하는 것이다.
붓다가 들어와 옷을 정돈하고,발을 씻고,
그를 위해 마련된 자리에 앉아 몸을 곧게 펴고,
앞쪽에 주의를 집중하고 앉았을 때,거기에는 거대한 침묵이 있었을 것이다.
이 '앞 쪽에 주의를 집중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것은 불교의 특수한 수행법으로
'아나판사티요가(anapansatiyoga)'라고 불린다.
들숨과 날숨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
이것이 앞 쪽에 주의를 집중한다는 말의 의미이다.
붓다는 어떤 일을 할 때-예를 들어,옷을 입을 때에도 그 행동에 주의를 기울인다.
걸을 때,그는 걸음에 주의를 쏟는다.
그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에는 들숨과 날숨에 주의를 집중한다.
그는 언제나 주의깊다. 심지어 잠자는 동안에도 주의깊다.
한번은 아난다가 붓다에게 물었다.....
아난다는 십년동안 붓다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붓다가 밤새도록 똑같은 자세를 유지한 채 자는 것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붓다는 손을 어딘가에 놓으면 밤새도록 손을 그 곳에 놓고 잤다.
아난다는 밤중에 여러 차례나 살금살금 다가가
붓다가 어떻게 자는지 지켜보았을 것이다.
붓다와 같은 이가 어떻게 자는지 지켜보는 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아난다는 붓다가 자는 모습을 지켜보고 깜짝 놀라고 당황했다.
붓다는 밤새도록 똑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난다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서 어느 날 붓다에게 물었다.
"밤중에 일어나서 스승님을 주무시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인줄은 압니다.
하지만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서 남몰래 스승님의 주무시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매우 당황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밤새도록 똑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계셨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신겁니까,아니면 내내 깨어계신 것입니까?"
붓다가 말했다.
"잠은 육체에 일어나는 일이다.
나는 잠을 자는 동안에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다.
서서히 잠이 밀려온다.
어느 덧 잠이 내 육체에 도달하여 자리를 잡는다.
이제 몸이 이완되고 팔다리가 느슨해진다.
그러나 나는 밝게 깨어있다."
명상은 하루 24시간 내내 일어나는 일이다.
명상은 하루에 한번하고 끝내는 일이 아니다.
명상은 그대의 향기가 되어야 한다.
명상은 그대의 분위기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대가 어디에 있건,무엇을 하건 명상이 그대를 둘러싸고 있어야 한다.
.....앞 쪽에 주의를 집중하고 앉으셨다.
그 때에 많은 비구(比丘)들이 스승이 계신 곳으로 다가섰다.
그들은 스승의 발 밑에 머리를 조아려 경의를 표하고는
스승의 주변을 오른 쪽으로 세번 돈 다음에 한 쪽에 가서 앉았다.
붓다와 같은 이에게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대답을 얻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붓다가 대답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대가 무례한 태도로 물어도 붓다는 대답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 대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정중한 태도를 지녀야만 붓다가 대답을 줄 것이라는 문제는 없다.
어떤 경우에도 붓다는 대답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매우 정중하지 않다면, 매우 겸손하고 여성처럼
수용적이지 않다면,그대는 그 대답을 놓칠 것이다.
어떤 자세로 묻느냐에 따라
그대는 대답을 얻을 수도 있고,못 얻을 수도 있다.
질문할 때 그대는 어떤 자세로,어떤 마음으로 묻는가.....그대는 수용적인가?
단순히 호기심때문에 묻는 것은 아닌가?
그 질문이 마음속에 축적된 지식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그대의 질문은 순수한가?
또는 이 사람이 아는지 모르는지 시험하기 위해 묻고 있지는 않은가?
그대는 이미 마음 속에 어떤 지식을 갖고 묻고 있지는 않는가?
진정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묻고 있는가?
그대는 겸손하게 모든 것을 내맡길 준비가 되어 있는가?
만일 대답이 주어진다면 그것을 값진 선물로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는가?
그대는 문을 활짝 열고 그것을 환영할 것인가?
그것을 가슴 속 깊이 받아들일 것인가?
그것이 그대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 하나의 씨앗이 되도록 허용할 것인가?
붓다와 같은 이에게 묻는 것은 대학교수에게 묻는 것과 다르다.
붓다에게 묻기 위해서는 그대 안에 어떤 특성이 필요하다.
그런 특성이 있어야만 그 대답에 의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 때에 많은 비구(比丘)들이 스승이 계신 곳으로 다가섰다.
그들은 스승의 발 밑에 머리를 조아려 경의를 표하고는
스승의 주변을 오른 쪽으로 세번 돈 다음에
한 쪽에 가서 앉았다.
세 바퀴 도는 것은 세 개의 육체에 대한 상징이다.
첫번째 도는 것은 물질적 육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고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육체를 위함이다.
붓다의 물질적 육체 또한 아름답다. 그것은 신이 거주하는 사원이다.
그러므로 첫번째 도는 것은 첫번째 육체,물질적 육체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다.
그리고 두번째 도는 것은 지복의 육체,그 두번째 육체를 위함이다.
세번째 도는 것은 붓다의 육체,진리의 육체를 위함이다.
이렇게 세 바퀴를 도는 것은 또 다른 것을 상징한다.
불교에는 삼귀의(三歸依)라는 것이 있다.
나는 붓다에게 귀의합니다.
나는 붓다의 공동체에 귀의합니다.
나는 붓다의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붓다에게 어떤 것을 물으러 오는 사람은 이렇게 귀의해야 한다.
그는 이런 마음상태를 가져야 한다.
"나는 붓다와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나는 붓다와 같은 파장으로 물결칠 준비가 되었습니다.
나는 붓다에게 귀의합니다. 당신은 나의 귀의처입니다.
나는 제자로서 여기에 왔으며,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압니다.
나는 순진무구한 마음으로 여기에 왔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엎드려 절합니다.
나는 당신은 알고 있으며 나는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이 내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상가(sangha)에,붓다의 공동체에 귀의합니다."
왜냐하면 한 명의 붓다는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붓다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한 명의 붓다는 모든 붓다에게 들어가는 문이다.
그대는 붓다를 그리스도라 부를 수도 있고,크리슈나라고 부를 수도 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것은 여러 다른 전통에 의해 주어진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 모두가 붓다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첫번째 귀의는 바로 그대 앞에 있는 이 붓다에 대한 것이다.
두번째 귀의는 모든 붓다,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붓다들의 공동체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 귀의는 담마(Dhamma),인간을 붓다로 만드는 본질적인 진리에 대한 것이다.
각성의 예술이 담마,즉 종교의 본질이다.
그때에 장로 수부티(須菩提)가 그 대중들 곁으로 와서 앉았다.
수부티는 다의 위대한 제자들 중 한명이다.
그 다음에 그가 자리에 일어나.....
생각해 보라.
뿌리의 99퍼센트가 사라진 나무를 상상해 보라.
단 1퍼센트의 뿌리만 남았다.
그 나무가 지금 이렇게 묻고 있다.
"이제 나는 어떻게 서 있어야 합니까?
나는 곧 쓰러지려 합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좀더 지탱할 수 있다면 사람들에게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며,
그들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나 또한 도움이 필요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당신께서 나를 도와 주었습니다.
이제 다른 사람들이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나는 그들을 도와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스승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스승은 그대를 도와 주었다.
그런데 스승은 도움이 필요없다.
그러니 스승에게 진 빚을 어떻게 갚아야한단 말인가?
무엇을 해야만 그 빚을 갚을 수 있는가?
스승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직도 어둠 속을 헤매며 좌충우돌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그것이 그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스승이 그대에게 했던 모든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라.
그러면 그대는 빚을 갚는 것이다.
수부티는 "이쪽 기슭에 어떻게 서야 합니까?"하고 묻는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수부티는 말한다.
"어덯게 나아가야 하며,사람들을 돕기 시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불행이 모두 허구라는 것을 압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다만 악몽에 시달리고 있음을 압니다.
그들의 불행은 실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이 새끼줄을 뱀으로 생각하며 벌벌 떨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돕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 또한 과거에 그런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한때 무서워서 벌벌떨고 울부짖고 비명을 지른 적이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그 모든 것이 한낱 꿈이고 환상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우리도 한때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 적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라. 상대방이 말도 안되는 소리를 떠들고 있는 것을 안다면,
그에게 아무 상처도 없다는 것을 안다면.....
한번은 어떤 남자가 나를 만나러왔다.
그는 자기 뱃 속에 파리 두 마리가 들어가 있다는 환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입을 벌리고 자는 버릇이 있는데,
그 틈에 파리가 뱃속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파리는 그의 뱃속에서 윙윙거리며 날고 있었다.
그는 줄곧 걱정에 시달리는 나머지,
한 자세로 가만히 앉아있을 수도 없었다.
그는 계속 이쪽 저쪽을 왔다갔다하며 "그 놈들이 이쪽으로 왔습니다.
이젠 저쪽으로 갔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는 거의 미칠 지경에 있었다.
그는 여기저기 의사를 찾아가 보았지만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웃음을 터뜨리며 "그것은 당신의 상상일 뿐입니다."하고 말했다.
그러나 불행한 상상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못된다.
왜냐하면 그는 실제로 고통받고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상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것이 상상이든 현실이든 아무 차이도 없다.
그는 현실과 똑같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의 배를 만지며 말했다.
"그렇군. 그 놈들이 여기에 있다."
내 말을 듣고 그는 매우 기뻐했다.
그는 나의 발을 만지며 경의를 표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제 고충을 알아주는 유일한 분입니다.
지금까지 용하다는 의사는 거의 다 만나보고
아유르베딕(ayurveydic),대증(對症)요법,동종 (同種) 요법 등 다 써보았지만
그들 모두가 어리석었습니다! 그들은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약이 없으면 없다고 말하시오!
왜 자꾸 내가 환상에 빠져있다고 말하는 것이오?'
이제 제 고충을 알아주는 분을 만났습니다. 당신은 아시지요?"
내가 말했다.
"나는 알 수 있다.
분명히 파리가 그대 뱃속에 있다.
나는 이런 문제를 다루는데에는 전문가이다.
그대는 사람을 제대로 만난 것이다.
나는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를 다루는데 전문가이다.
그것이 내가 하는 모든 일이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자,여기에 누워 눈을 감아라.
내가 그대에게 눈가리개를 하고 그 놈들을 꺼낼 것이다.
입을 벌려라.그러면 내가 주문을 외워 그 놈들을 불러낼 것이다."
그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가 말했다.
"진작 이런 조치가 취해져야 했습니다."
나는 그의 눈에 가리개를 씌우고 입을 벌리라고 말했다.
그가 매우 행복해 하며 자리에 누웠다.
그는 파리가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그런 상태로 놔두고 나는 재빨리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파리 두 마리를 잡기 위해서였다.
내게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전에 나는 한번도 파리를 잡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가까스로 파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나는 병 속에 갇힌 파리 두 마리를 보여 주었다.
그가 말했다.
"이 병을 제게 주십시오.
그 바보들에게 가서 보여 주어야겠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돕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진짜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들이 처한 곤경이 모두 허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수부티가 묻는다.
"스승이시여,먼저 우리에게 이 곳에 어떻게 서야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의 뿌리가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나아가야하며,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일러 주십시오.
사람들은 불행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의 모든 불행은 거기에서 기인합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이 허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일해야 합니까?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생각을 다스려야 합니까?"
그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생각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쳐 달라니?
보디사트바에게는 생각이 없다.
그대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이제 단 하나의 생각이 남았다.
그것은 저쪽 기슭에 대한 생각이다.....
저쪽 기슭이 끊임없이 그를 부른다.
문이 활짝 열려 있다.
그는 언제라도 전적인 지복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문이 활짝 열려 있는데 그는 문간에 자기를 잡아두고 있다.
먼저,그는 수 많은 생동안 윤회를 거듭하며 문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왔다.
그 다음에는 문을 발견하고,수 많은 생 동안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이제 문이 활짝 열렸다. 그런데 붓다가 이렇게 말한다.
"기다려라. 문 밖에 남아 있으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지 않느냐?"
자연히 문으로 들어가고 싶은 커다란 욕망이,
저 너머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열망이 끓어오를 것이다.
지금 수부티는 그것에 대해 묻고 있다.
이 말을 듣고,스승께서 수부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니 수부티여,주의를 기울여 잘 들어라.
보디사트바의 길에 뜻을 둔 사람은 이와 같이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
영어 번역은 썩 훌륭해 보이지 않는다.
영어로는 '이와같이 생각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어있다.
이에 대응하는 산스크리트어는 '치토파드(chittopad)'이다.
그대는 이와 같이 결의해야 한다.
위대한 결정을 결정을 내려야 한다.
치토파드,이와 같이.....
'무릇 생명체의 세계(衆生界)에 속하는 모든 것들,
존재하는 이 모든 중생을
나는 열반의 세계로 인도해야 한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수부티여,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남자,여자,동물,새,나무,바위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다.
"나는 그들 모두를 열반으로 인도하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보디사트바의 길에 뜻을 둔 사람은 이와 같이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
'무릇 생명체의 세계에 속하는 모든 것들,
존재하는 이 모든 중생을
나는 열반의 세계로 인도해야 한다.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세계로 인도해야 한다.
그러나 무수한 중생을 열반의 세계로
인도했다 하더라도
실은 어느 것 하나 열반으로 인도되지 않았다.'
이것을 잊지 말고 명심해야 한다.
그렇지않으면 다른 존재를 인도하다가
그대는 다시 무지의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질 것이다.
그대는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저쪽 기슭,피안의 세계로 인도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불행은 허구라는 것을,
따라서 그대의 구원도 허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에게도 자아가 없으며 그대에게도 자아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 잊지 말고 가슴에 새겨라.
그대가 사람들을 돕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대자신을 위대한 구조자로 생각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다시 굴러떨어질 것이다.
다시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두 가지 사실을 잊지 말고 명심하라.
그대는 커다란 결의를 굳히고 이 쪽 기슭에 남아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쪽 기슭로 끌려가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한편,이 세상에 다시 뿌리를 내리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자신을 파괴할 것이고,다시 꿈 속에 빠질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만일 보디사트바가 '중생(衆生)'이라는 관념을 가지면
그는 진실로 보디사트바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째서일까?
만약 그에게 자아라는 생각,중생이라는 생각,
생명있는 영혼이라는 생각,
또는 개아(個我)라는 생각이 있으면
그는 보디사트바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부티여,이 두 가지를 명심하라.
먼저,그대는 살아있는 모든 중생을 저 피안의 세계로 데려가야 한다.
그러면서도 아무도 중생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도 그대도 중생이 아니다.
모든 에고는 허구이며 환상이다.
항상 이것을 명심하고 커다란 결의로 나아가라.
사람들을 도와 건너편 기슭에 대해 눈 뜨게 하라.
그들은 이미 그 곳에 있다.
그대는 다만 그들을 일깨우고 주의를 기울이게하면 된다.
그러나 그 일에 휘말리지는 말라.
구세주가 되지 말라.
이 두 가지를 항상 잊지 말라.'
이 경전에서 붓다는 보디사트바의 길에 대해 계속 되풀이하여 언급할 것이다.
나는 그대들 모두가 보디사트바가 되기를 바란다.
출처 : 명상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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