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3. 31. 큐티
예레미야 애가 5:1 ~ 14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
관찰 :
※ 예레미야 5장도 22개의 히브리어 알파벳 숫자인 22절로 이루어져있습니 다. 그러나 알파벳 순서대로 배열되는 답관체의 형식은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유다가, 예루살렘이 당하는 비참한 상황을 하나님께 아뢰면서 가슴이 너무 아프고 북받쳐 올라 시의 정형을 유지할 수 없었던 예레미야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 유다가 받은 치욕들
- 1절.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
a. 예레미야는 다시금 유다가 받은 치욕들에 대해서 정리해서 하나님 앞에 아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기억하시고 살펴보시라는 것입니다.
b. 이것은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고통에서 이제는 벗어나게 해 달라는 하나님을 향한 간구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일해 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은혜인 것은 소망이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 2절. “우리의 기업이 외인들에게, 우리의 집들도 이방인들에게 돌아갔나이다”
a. “우리의 기업”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상속 받았던 가나안 땅을 의미합니다. 그 땅을 빼앗겼기에 그 땅에 세운 집들도 이방인들에게 빼앗겼습니다. 이제 유다는 갈 곳이 없게 된 것입니다.
- 3절. “우리는 아버지 없는 고아들이오며 우리의 어머니는 과부들 같으니”
a. 유다가 버림받은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는 성경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로 언제나 보호해 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이들이었습니다.
b. 이제 예레미야는 자신과 자신의 민족이 고아와 과부와 같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외면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였고,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이미 여러 차례 고백을 했던 바입니다. 물론 여기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적절한 묘사일 뿐입니다. 버림받은 유다의 사정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소망하는 애절한 표현입니다.
- 4절. “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며 값을 주고 나무들을 가져오며”
a. 이 상황은 1년 6개월 동안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의 상황이 아닙니다. 이미 성벽이 다 무너지고 바벨론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b. 바벨론은 온 유다에 강한 세금 정책을 펼침으로 물도 돈을 주고 마셔야 했고, 나무도 세금을 내고 주워 와야 하는 상황이 펼쳐졌던 것입니다.
c. 포로는 편안한 삶이 아니라 극심한 고난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정에도 하소연 할 곳이 없는 것이 그 때의 현실이었습니다. 식민지 백성의 설움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 5절. “우리를 뒤쫓는 자들이 우리의 목을 눌렀사오니 우리가 기진하여 쉴 수 없나이다”
a. 고대의 전쟁에서 승리자는 패배자의 목을 밟아 누르며 승리를 외치곤 했습니다. 마치 그러한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b. 실제로 바벨론은 유다인들에게 멍에를 메게하여 숨이 가쁘게 하듯이 여러 세금과 불의한 압제로 기진하게 만들게 하곤 했던 것입니다. 거의 죽지 못해 사는 형편이었음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2) 다시 정리하는 유다의 범죄
- 6절.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
a. 예레미야는 자신과 유다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들이 살 길을 자신들이 찾고자 했음을 자백하고 있습니다.
b. 유다 지도자들은 이집트와 손잡기를 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벨론에 의해 망해버린 앗수르 유민들과 손잡고 바벨론에게 대항하고자 했습니다.
c. 하나님은 이사야, 예레미야 등의 선지자들을 두루 보내셔서 회개를 촉구하셨고, 그렇지 않으면 바벨론에게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회개도 하지 않고, 바벨론에게 대항하는 길을 택하게 되었기에 자신들이 그렇게 철저하게 멸망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 7절.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a.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유다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죽어 떠나갔지만, 그 후손들은 선진들의 죄악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b. 히스기야가 자신이 잘못한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고 할 때,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후손들이 심판을 받는다고 하자, 자기가 받지 않으면 되었다고 한 바로 그러한 죄악으로 인해서 지금의 후손인 예레미야 때에 이렇게 처절한 심판을 받고 있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c.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 모든 것을 공동체적인 죄악으로 여기고, 그것이 또한 자신의 죄악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3) 다시 설명하는 남겨진 유다 백성들의 핍절한 상황
- 8절. “종들이 우리를 지배함이여 그들의 손에서 건져낼 자가 없나이다”
a. “종들”은 바벨론에서 파견한 하급 관리들을 말합니다. 자신의 왕을 섬기지 못하고, 바벨론의 관리들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유다의 형편을 고하고 있습니다. 이들 바벨론의 하급 관리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하소연 할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러한 상황에서 공법과 정의가 시행되는 것은 바랄 수 없는 바였을 것입니다.
b. 그러한 자들의 손에서 건져낼 도움을 찾을 수 없는 비참한 상황을 하나님이 알아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 9절. “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사오니”
a. “칼”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약탈을 일삼는 도적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막의 기근’입니다.
b. 국토의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고, 또한 도적들로 인해서 그곳에서의 농사마저도 약탈을 당하는 상황으로 인해서 얼마나 궁핍하고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짐작하게 됩니다.
- 10절. “굶주림의 열기로 말미암아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이다”
a. 극심한 영양 실조에 처하게 되면 가죽만 남고 남은 피부는 마치 햇빛에 검게 그을리듯이 검게 변하게 됩니다. 이것을 예레미야는 “굶주림의 열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b. 유다에 남은 백성들이 그렇게 극심한 영양 실조에 시달리고 있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 11절. “대적들이 시온에서 부녀들을, 유다 각 성읍에서 처녀들을 욕보였나이다”
a. 바벨론 군사들이 유다를 점령하고, 그곳에서 부녀들을, 처녀들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겁탈한 치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b. 이미 모세의 글(신 28:30, 32), 예레미야의 글(렘 6:12)에서 예언한 바였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영적 순결성을 거부한 이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c. 시온은 성전이 있는 곳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곳입니다. 하지만 육체적인 겁탈이 일어나기 전에 영적인 음란이 그곳에서 자행되었던 것을 염두에 두고 보면 예레미야는 의도성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12절. “지도자들은 그들의 손에 매달리고 장로들의 얼굴도 존경을 받지 못하나이다”
a. 유다의 지도자들이 나무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는 형벌을 받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형벌이 장차 십자가형으로 발전되었습니다.
b. 수치를 상징하는 형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존경받아야 하는 어른들인 장로들도 존경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 13절. “청년들이 맷돌을 지며 아이들이 나무를 지다가 엎드러지오며”
a. “청년들이 맷돌을”(בַּחוּרִים טְחֹון, 바후림 테혼)에서 ‘청년들’이란 아직 미혼의 젊은이들을 의미합니다.
b. 맷돌질은 연자맷돌을 굴리는 것으로 노예들이 하는 노동이었습니다. 유다의 장래가 되는 유다의 젊은 이들이 바벨론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c. 어린 아이들은 힘에 지나는 나무를 짊어지다가 엎어지게 되는 안타까운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의 소망이 사라지는 아픔을 비통하게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 14절. “노인들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며 청년들은 다시 노래하지 못하나이다”
a. 장로들이나 재판장이 성문에 앉아서 재판을 주도하던 전통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성문이 다 파훼되었고, 장도들이나 재판장의 권위도 상실되었습니다.
b. 청년들은 더 이상 즐겁게 노래할 주제를 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암담한 현실을 이렇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가르침 :
1) 예레미야는 망하는 이야기에 집중했습니다. 그가 쓴 것으로 추정하는 열왕기상하와 예레미야서에서도 이스라엘과 유다가 망하는 이야기를 세세하게 기록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망하고 유다가 망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민족신이 아니라 온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레미야는 당당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여기 예레미야 애가에서도 그러한 예레미야의 관점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자신들이 경험한 너무나 아프고 쓰라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아뢰는 것을 통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죄악을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 차마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지경이지만, 자신들의 처지를 통해서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실 것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이 돌이켜 주시면 그 어떤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소망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역설이 담겨져 있습니다.
2) 예레미야는 그렇기에 자신들의 절망적인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노래하고 있습니다. 슬프고 또 슬픈 노래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면 이런 좌절과 절망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의 노래이며, 불꽃같은 믿음을 구사하는 믿음의 노래이기도 한 것입니다.
적용 :
1) 예레미야 애가는 슬픔의 노래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모든 상황이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의 노래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살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아무리 잘 나가는 상황인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관점이요, 하나님만 의지하는 참된 믿음입니다.
2) 예레미야 선지자의 고통의 노래, 슬픔의 노래는 역설적으로 소망의 노래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의 슬픔을 들으심으로 그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바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슬픔, 성도의 고통이 그 길에서 돌이켜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갈수만 있다면 그것은 기쁨의 길을 향한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여정이 내 뜻이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항나님의 기쁨이 되는 길이 되길 바랍니다. 그 과정에서 겪는 고통과 슬픔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님께서 공급해 주실 것임을 믿습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