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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5일 오늘의 역사
2022년 미국 혹한 및 폭설로 180만가구 정전 18명 사망
미국 중서부에서 형성된 '폭탄 사이클론'으로 혹한과 폭설이 닥치면서 지난 21일부터 최소 18명이 사망했다 몬태나주에서는 기온이 영하 45.6도까지 떨어졌고. 뉴욕주 버펄로에서는 28인치(약 71cm)의 눈이 쌓이고, 눈보라로 가시거리가 제로에 가까운 '화이트아웃' 현상이 벌어졌다. 뉴욕주는 폭설로 인해 버펄로 나이아가라 공항도 26일까지 폐쇄 조치했다.
오하이오에서는 폭설로 차량 50여 대가 연쇄 추돌하는 사고가 발생해 4명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쏟아졌다. 캔자스시티에서는 눈길에 차량이 미끄러지면서 3명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노스캐롤라이나, 켄터키, 펜실베이니아, 테네시 등 미국 전역에서 70만 가구에 전기 공급이 끊겼다. 뉴잉글랜드 6개 주에서는 최소 27만 3천여 명이 정전 피해를 겪고 있다. 항공 정보 추적사이트 플라이트어웨어에 따르면 미국 전역에서 모두 2천360편 넘는 항공이 취소됐고, 5천700편이 연기됐다. 미국을 덮친 이번 한파와 폭설은 북극 주변을 맴도는 '극소용돌이'(Arctic blast) 때문이다. 평소에는 제트기류에 갇혀 북극에 머물지만, 제트기류가 약해지면서 미국으로 남하한 것이다.
2022년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 조세희 작가 사망(80세)
2022년 오스트리아 스키장 눈사태로 스키어 10여명 매몰
2021년 제임스 웹 인류 최대 우주망원경 발사 성공
2021년 민주콩고 동부에서 폭탄 테러…최소 7명 사망
2018년 천막 제조회사 파인텍 노동자 2명(홍기탁 박준호) 굴뚝(목동 열병합발전소) 농성 409일로 세계최장기고공농성기록 경신
2016년 ‘암흑물질’의 존재 입증한 미국 천체물리학자 베라 쿠퍼 루빈(여 88세) 세상 떠남
2010년 프로농구 서장훈(인천 전자랜드) 통산 1만2000득점 4,800 튄공잡기 첫 달성
2008년 기니 쿠데타 성공
2008년 12월 25일 아프리카 기니에서 군사 쿠데타가 성공하고 무사 다디스 카마라 육군 대위가 정권을 장악했다.
지난 2008년 12월 22일 란사나 콩테 대통령이 사망한 직후 카마라의 주도로 벌어진 쿠데타는 카마라가 임시 국가수반임을 공식 선언하고, 이어서 25일에 은신 중이던 아흐메드 수아레 총리가 투항함으로써 사실상 마무리됐다.
카마라는 스스로를 새 대통령으로 추대했으며 2010년까지 대통령 선거를 연기했다. 코나크리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뒤 1990년 군에 입대한 것 외에 그에 대한 자세한 이력은 알려지지 않았다.
1958년 프랑스 식민지에서 독립한 기니는 인구 940만명의 소국이지만 알루미늄의 원료인 보크사이트 생산량 1위인 자원부국이다. 그러나 콩테 대통령이 지난 24년간 집권하는 동안 부정부패를 일삼아 국민들은 하루 생계비 1달러 미만의 궁핍한 삶을 유지하고 있다.
기니 현지에서는 오랜 독재에 환멸을 느낀 국민들이 쿠데타를 환영하는 분위기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시민들은 쿠데타 지도자인 카마라를 ‘오바마 주니어’라 부르며 반기고 있다.
2008년 제주국제훈련원 5000일(2001.8.6~2015.4.18) 기도중 2700일 기도회향
2006년 과학기술부 첫 우주인 후보 남녀과학자 고산/이소연 선발
2003년 원불교 천안교당(교무 고진여)에서 원불교예술인의 모임인 ‘일원예술원’을 개설.
2002년 시베리아 철도, 전철화 완공
세계 최장 철도인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의 전철화 작업이 완공됐다. 지난 1929년 착공한 뒤 73년 만의 일이다. 러시아 철도부는 2002년 12월 25일 극동 루지노역에서 기념행사를 갖고 “극동 지역 일부 구간의 전철화가 끝나, TSR 전 구간 전철화 사업이 완료됐다”고 선언했다.
TSR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총연장 9288km이며, 동쪽 태평양에서 서쪽 발틱해까지 광활한 대지를 관통하는 세계 최장 단일 철도시스템이다. 지난 1891년 제정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3세 칙령으로 시작된 TSR 건설은 경제·군사적 목적이 강했다. TSR은 1901년 만주횡단을 통해 완공됐지만, 러시아 국경만을 거치는 노선은 1916년 완성됐다. 아무르강을 따라 건설된 하바로프스크~블라디보스토크 구간은 죄수들을 투입, 중장비 하나 없이 맨손으로 부설됐다.
철도 완공은 시베리아 혁명, 즉 시베리아 개발·이주·정착 등 산업화를 가져왔다. 현재 러시아 인구의 5분의 1(약 3100만명)이 TSR 주변 도시를 중심으로 살고 있으며, 러시아 경제의 70% 이상이 TSR을 기반으로 움직인다. 전철화로 동북아·유럽을 잇는 철도 현대화 작업이 완성됐으며, 러시아가 갈망해온 한반도 종단철도를 위한 기반이 확보됐다. 러시아 철도부 겐나디 베데르니코프 대변인은 “전철화로 열차 1회의 수송량이 두 배(6000t)까지 늘어나게 됐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 서부 국경 지역까지 시속 120km로 달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1995년 장기려 박사 별세
장박사는 1909년 평북 용천군 양하면 입암리에서 태어나 서울대 의대 전신인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월남하기 전인 1950년까지 경성의전 교수, 평양도립병원장 등을 지냈다. 6·25가 발발한 1950년 12월 2남인 가용씨(60·서울대의대 교수)만 데리고 야밤에 집을 떠난 것이 북에 두고온 부인 김봉숙여사(84)와 5자녀와의 이별이었다.
월남 이후 장박사는 부산에 정착, 1951년 1월 부산 영도에 현 고신의료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을 세웠다. 그는 이곳에서 피난민 등을 무료진료하면서 인술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58년에는 부산 서구 토성동에 있는 지금의 부산대병원 뒤쪽에 행려병자 진료소를 차려놓고 2∼3년간 무료치료를 해주기도 했다.
1968년에는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창설, 영세민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했다. 1976년에는 부산 동구 수정동에 청십자병원을 설립, 무료진료에 나서 최근까지 중풍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어려운 이웃의 건강을 보살폈다. 장박사는 서울대의대, 가톨릭의대, 부산대의대, 부산인제대 등에서 강의를 하며, 후진을 기르고 1959년 국내 최초로 간대량절제술에 성공하는 등 국내 의학계 발전에도 기여했다
1994년 자일 싱 전 인도대통령 사망
1991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연방 대통령 활동 중단 선언
옛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연방대통령이 1991년 12월 25일 소련(USSR)연방 대통령으로서 활동을 중단한다고 선언, 연방대통령직 사임을 공식 발표했다.
이로써 소비에트사회주의 공화국연방(USSR)의 해체와 더불어 11개 공화국의 독립국공동체(CIS) 탄생과 옛 소련 최고지도자인 연방대통령직의 소멸이 공식화됐다.
소련의 8번째 지도자인 고르바초프는 소련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방대통령`에 재임, 6년9개월 동안 소련을 이끌어왔다.
이날 전 세계에 생중계된 모스크바의 중앙TV 뉴스 시간에 연설 형식으로 사임을 발표한 고르바초프는 연설에서 소련 연방을 해체하고 그것을 11개 공화국 독립국 공동체로 대체한 것은 우리 국민들과 세계공동체에 중대한 위협을 부과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1989년 타임지,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을 '80년대의 인물'로 선정
1989년 루마니아인민공화국 대통령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총살형.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대통령과 부인이 특별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1989년 12월 25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차우셰스쿠 정권은 비밀경찰을 이용해 완벽한 언론통제를 해와 부인을 제1부수상으로 하는 등 권력을 남용해왔다.
헝가리계 주민의 인권옹호에 적극적인 한 목사를 연행하려는 정부방침에 헝가리계 주민이 반발하자 정부는 진압부대를 파견, 반정부운동을 하는 1만명 이상의 시민을 학살했다.
이것이 계기가 돼 1989년 동구권에 불어닥친 자유화 물결에 루마니아도 독재타도와 민주화을 요구하는 시민봉기가 일어났다. 봉기는 수도 부카레스트에도 파급돼 치안부대와의 충돌로 다수의 민중이 사상했지만 군대가 시민편에 서자 차우셰스쿠는 12월 22일 해외망명을 시도했으나 루마니아군에 의해 체포됐다
1986년 이라크 보잉737여객기 사우디공항 비상착륙 중 납치범 폭탄테러. 승객 62명 사망
1982년 화가 오지호 세상 떠남
1979년 소련 아프가니스탄 침공
1978년 축구선수 차범근 한국선수 최초로 서독 프로구단 입단 계약
1977년 베긴-사다트 2차 평화회담
1977년 찰리 채플린 사망
흑백 무성영화시대의 전설적 스타 찰리 채플린이 1977년 12월 25일 오전 4시 스위스 로잔 자택에서 88세로 영면했다. 채플린은 영화 1백년 역사상 대중들로부터 가장 폭넓은 사랑을 받은 배우이자 감독, 그리고 제작자였다.
첫 장편 연출작 ‘키드’(1920)에서 후기 대표작 ‘라임 라이트’(1952)에 이르기까지 그는 같은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에게 영화보는 재미와 멋을 알게 해준 영화예술가였다. 배우출신의 알콜중독자인 부친과 정신병원을 전전한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어린시절은 늘 불우했다. 채플린이 뉴욕 연극무대를 거쳐 헐리우드에 진출한 것은 헐리우드가 영화도시로서의 틀을 갖춰가던 1913년이었다.
‘키드’ 와 ‘시티라이트’(1931)에서 따스한 인간애의 중요성을 강조한 채플린은 전체주의가 휩쓸던 1940년 ‘위대한 독재자’ 를 통해 시대의 잘못된 조류에 정면으로 대항했다. 채플린의 영화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모던 타임스’(1936)이다. 이 영화는 컨베이어 벨트에 얽매인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시계에 지배되는 현대 자본주의 문명 속에서 인간이 겪는 소외를 날카롭게 파헤친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2차대전이 끝난뒤 냉전 분위기속에서 공산주의자로 몰려 1952년 미국에서 추방되었으나 1972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아카데미 특별상을 수상했다.
1976년 중국 예술인 창작활동 재개
1971년 동국대유적조사단 인류 가장 오랜 고래잡이그림 반구대(울주)암각화 발견(국보285호)
1971년 서울 대연각호텔 화재사고.
1971년 12월 25일 성탄절 아침 9시50분, 서울 충정로 1가 대연각호텔 2층 커피숍에서 LPG 가스폭발로 불이 나 지하 2층, 지상 21층의 빌딩을 몽땅 불태워버렸다.
32m 길이의 국내최고 사다리차를 뻗쳐 진화작업에 나섰으나, 7층까지밖에 미치지 못해 인명 구조용으로만 쓰여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불은 8시간만인 오후 5시반경 모두 진화됐다. 이 불로 2백22개의 객실에 들어있던 1백67명의 투숙객들이 불타 숨지거나 질식사 또는 떨어져 죽었으며 64명의 부상자를 냈다. 사망자 가운데는 주한 터키 대사관 무관 1명을 포함, 외국인이 13명으로 확인됐으며 일본인 3명은 실종됐다. 피해액만도 8억5천만원에 달해 세계 호텔화재사상 대규모의 화재로 기록되며, 이후 헐리우드 영화 타워링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경찰은 주방 안의 LPG 가스가 폭발, 주방옆에 있는 비상통로와 환기창을 통해 불길이 삽시간에 위층으로 번졌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 이후 대형건물에 스프링쿨러 화재진압 시스템이 의무 설치되고, 고층건물 옥상에 헬리패드 의무 확보가 시행되는 등 소방장비의 개선이 이루어졌다.
1968년 10.5구락부와 무소속 정우회 발족
1963년 키프러스내 그리스 터키 양군, 4일간 전투후 휴전협정
1963년 12월 키프로스의 수도 니코시아에 시민들 사이의 유혈충돌 사태가 악화됐다. 지중해의 동안 바로 터키의 남쪽 바다에 위치하는 섬나라 키프로스는 독립 3년 만에 다시 위기를 맞았다. 이 나라 내분의 근본원인은 2개 민족으로 형성된 1개 국가라는 데 있었다. 58만인구의 80%를 차지하는 카톨릭교인 그리스계 국민과 나머지 회교도인 터키계 국민의 반목은 이미 병폐화 돼 있었다.
따라서 이 나라의 헌법 또한 대통령은 그리스계 부통령은 터키계, 국회의원은 70%는 그리스계, 나머지는 터키계 등으로 공평히 분배하도록 지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리스계의 마카리오스 대통령의 헌법개정을 꾀하게 됐고 이에 터키계 주민들은 이 개정안이 터키계 세력을 축소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게 되고 총격전으로까지 번져갔다.
이에 터키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와 주둔군을 수도 니코시아로 이동시키고 25일에는 제트기가 정탐비행을 했으며 해군까지 동원했다. 그리스도 이에 대항하여 주둔군을 이동시켜 키프로스의 내전은 그리스-터키 전으로 번져갈 기세를 보였다. 사태가 악화되자 독립전후를 통하여 이 나라에 영향을 주고 있는 영국, 그리스, 터키 3국이 사태수습에 나섰다. 결국 30일 유혈충돌을 마치고 그리스 및 터키계간의 중립지대를 니코시아에 설립할것에 합의·조인했다.
1962년 차범석 원작 ‘산불’ 초연
차범석은 전남 목포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13세 때인 1937년 목포 평화극장에서 본 최승희의 춤사위는 그의 예술 의지를 자극했다. 1942년 광주고보 졸업 후 일본의 명문 고교 입학시험에 낙방하자 2년 동안 도쿄에서 백수로 생활하며 연극과 영화에 심취하고 각종 문학작품을 탐독했다. 1946년 22살의 늦은 나이에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해 교내에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고 1949년 10월 제1회 전국대학연극 경연대회에서 그가 번역·연출한 ‘오이디푸스왕’으로 연출상을 차지하는 등 해방공간에서 연극에 심취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고향 목포로 낙향해 중학교 교사 생활을 하고 1951년 봄에는 목포의 한 예술제에 그가 각본·연출·주연한 ‘별은 밤마다’로 비공식 데뷔했다. 그의 이름이 중앙무대에 알려진 것은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밀주’가 가작으로 입선하고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귀향’이 당선되면서였다.
그는 6·25전쟁을 겪은 전후문학 세대로서 사회 현실에 대한 풍자와 비판의식이 강한 작품을 주로 발표했다. 특히 전쟁의 상처로 절망 속에 살아가는 인간상을 그린 ‘불모지’(1957)와 이념의 허구성과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산불’(1962)은 6·25의 비극을 부각시키고 반전 의식을 일깨운 전후 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았다.
‘산불’은 이진순의 연출로 1962년 12월 25일부터 29일까지 국립극장 무대에 올려져 대호평을 받았다. ‘산불’은 6·25전쟁 중 남자들이 다 전쟁터로 나가고 여자들만 남은 한 과부마을에 빨치산이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인간 본연의 욕망과 이데올로기를 다룬 작품으로,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실주의 희곡의 교과서로 평가받고 있다. ‘산불’은 한국 사실주의 희곡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작답게 영화, TV드라마, 오페라로도 만들어졌다.
1960년 부산 국제시장 화재, 234개 점포 손실
1952년 독일 TV가 규칙적인 정규방송을 개시하다.
1951년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
크리스마스고지 전투는 휴전회담에서 군사분계선 문제가 쌍방간의 합의에 의해 가조인되어(1951.11.27.) 1개월간의 유예기간을 두고 타 의제에 대한 타협점을 모색하고 있을 때 1951.12.25. 한국군 7사단이 주준하고 있던 강원도 양구군 1090고지에 중공군 제204사단이 400여발의 포탄을 발사하면서 교전을 벌이게 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 제7사단은 크리스마스 휴일을 이용한 중공군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아 크리스마스고지라는 별칭이 붙은 1090고지에서 4일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며 방어에 성공하였고 교착된 전선에서 고지 쟁탈전의 치열함을 보여준 전례로 남았다
1949년 맥아더 장군, 일본전범에 특사
1949년 북한, 소련과 영사협정 체결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일본군, 영국령 홍콩을 점령
1932년 한중연합 토일(討日)군 (한국측 이청천 황학수, 중국측 채세영)
1926년 히로히토(裕仁) 제124대 일왕으로 즉위
1926년 12월 25일, 히로히토(裕仁) 제124대 일본 왕이 25세 나이로 즉위했다. 원호(元號)는 ‘쇼와(昭和)’. 히틀러·무솔리니와 함께 2차 대전 3대 전범으로 꼽히는 히로히토는 왕이 되기 전부터 군국주의적 교육과 환경 속에서 뼈가 굵었다. 어린시절 다닌 귀족학교 교장부터 골수 천황파이자 군국주의자로 유명한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였다. 히로히토는 미국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런 노기를 거리낌 없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군국주의자 히로히토의 얼굴은 종전후 극적으로 바뀐다. 일제의 침략전쟁을 총지휘한 현인신(現人神)이던 그가 ‘군부의 희생양’ ‘해양생물학자’ ‘타고난 평화주의자’로 미화됐다. 이런 변신은 맥아더의 정치욕과 미소냉전 개막, 히로히토의 비굴한 생존전략에서 비롯됐다.
히로히토가 총애한 도조 히데키조차 전범재판에서 “일본 사람 누구도 천황이 시키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고 증언했지만, 맥아더와 재판관들은 귀를 막았다. 그러나 2000년 12월 ‘일본군 성노예 전범 국제법정’은 히로히토에 대해 “인간의 노예화·고문·살인·인종차별 등 인도(人道)에 관한 죄를 범했다”고 사후에나마 단죄했다.
1923년 프랑스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 출생
1922년 대전 세천역(細川驛)이 영업개시했으나, 1977년 5월 16일 여객취급을 중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국제연맹 창립 결의
1915년 중국 진남에 제정반대의 혁명군 봉기. 제3혁명 개시
1898(조선 고종 35) 서울에 처음으로 전차 등장(서대문-청량리)
1898년 독립협회 강제 해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회정치단체 독립협회가 1898년 12월 25일 고종의 만민공동회 금지령과 함께 사실상 해산됐다. 독립협회가 출범 초기와는 달리 점차 급진적 정치단체로 선회하자 고종이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독립협회는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이 11년 만에 귀국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적 개혁사상으로 민중을 지도, ‘자주독립의 완전한 국가’로 만든다는 취지로 1896년 7월 2일 창립됐다. 명분은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이었다.
초기엔 개혁인사와 고급관료들의 사교모임 수준이었으나, 점차 개혁파 관료와 지식인층이 주도하는 민중적 사회단체로 변모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 개최를 시작으로 민중이 국왕과 정부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민권투쟁기로 접어들자, 보수세력은 이상재·남궁억 등 독립협회 요인 17명을 체포했다. 독립협회는 회원들을 총동원하며 석방을 요구했으나 정부는 어용단체인 황국협회를 시켜 보부상 수천 명을 서울로 불러들여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테러를 가해 유혈사태를 빚었다.
결국 고종은 독립협회 활동을 반체제운동으로 단정, “처음에는 충군한다, 애국한다 하여 그 뜻이 좋았으니 결국 패륜하고 난국함에 의구심이 생겼다”는 칙어와 함께 민회금압령을 내려 협회 활동을 중단시켰다.
1888(조선 고종 25) 국어학자 이윤재 태어남
1524년 인도항로 개척한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 세상 떠남
1000년 헝가리 왕국이 성립되다.
800년 교황 레오3세가 카롤루스 황제에게 왕관을 씌우다(신성 로마 제국의 성립)
336년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 기념일 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