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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산남구정보센터 원문보기 글쓴이: 참기름
중2 때 "세계 다니며 선교하는 목사가 되겠다"
김의철 송도가나안교회 목사가 1975년 장목중학교 2학년 시절
경남 거제 송진교회 앞에서 촬영한 기념사진.
당시 김 목사는 세계선교를 펼치는 목회자가 되겠다며 기도했다.
목회는 고난의 연속이다. 많은 목회자가 바윗덩이처럼 묵직한 고난의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적당히 타협하거나 주저앉는다. 문제를 합리화하거나 잘못을 성도나 외부 탓으로 돌린다. 미워하고 증오하며 원수를 갚으려 하면 목회는 더욱 어렵게 된다. 지난 35년간 목회에서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험난한 가시밭길에서 길어 올린 진리는, 고난의 압력을 이겨낼 힘은 오직 무릎 꿇고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목회자가 영권(靈權)을 가지려면 인본주의를 멀리하고 자신의 야망을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함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2009년 인천 송도에 교회를 개척한 지 10년 만에 2000명이 넘는 성도들이 모였다. 11차례 ‘50일의 기적’ 기도회를 진행하며 전국 중소형교회에 영적 활력을 불어넣고 목회 희망을 제시하게 된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1960년 경남 거제도 송진포리에서 태어나 7남 2녀, 9남매 중 일곱째로 자랐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보건소장을 지냈다. 광복 후엔 미군정사령관 존 하지 중장의 통역을 했고 6·25전쟁 때는 야전병원 원장으로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아버지는 격변의 시대를 거치며 고향 거제도에 정착했지만 가정적이지 못했다. 신앙생활도 게을리 했다.
어머니는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하신 마산 문창교회에서 훈련받았다. 매일 밤을 기도로 지새우곤 했다.
어린 나는 매일 어머니를 따라다녔다.
내가 출석한 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소속 거제 송진교회였다. 초등학생 때 밤이 되면 교회 뒷동산에 올라가
소나무 사이로 비치는 달과 별빛을 보며 세상을 비추는 목회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장목중학교 2학년 다닐 때 갑자기 교회에서 반주를 맡았다. 반주자가 도시로 떠난 것이다. “철아, 니가 반주해라.”
풍금을 만지고 놀던 나는 “예”하고 무조건 순종했다.
쉬운 찬송가 3곡을 골라 열심히 연습하니 기적같이 4부로 칠 수 있게 됐다. 문제는 주일날 발생했다. 어설프지만 연주가
가능한 3곡을 목사님께 드렸는데, 그만 다른 찬송을 부르시는 게 아닌가.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매일 풍금 연습을 했다. 1개월간 열심히 기도하며 연습했더니 놀랍게도 대부분의 찬송가를 칠 수 있게 됐다.
그때부터 주일학교와 학생회 예배, 대예배 풍금연주를 도맡아 했다.
그러던 중 목사님이 외지로 나가시고 후임자로 당시 부산 고신대 신학생이었던 김철봉 전도사님이 주말마다 오셨다. 그분은 난생처음 보는 세계지도를 펼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철아, 니는 지금 산으로 둘러싸인 동네에 살고 있지만 봐라, 세상 넓데이. 저 바다를 건너면 큰 도시도 있고, 비행기를 타고 가면 다른 나라도 있데이. 너는 세계를 꿈꾸며 살아야 한데이.”
그때부터 나는 세계를 다니며 선교하는 목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안타깝게도 김 전도사님은 신학교를 마친 뒤로는 거제도에 오시지 않았다.
외롭고 힘든 시간이 시작됐다. 청소년 시절 산과 바다밖에 없는 그곳에서 매일 밤 끝이 보이지 않는 적막감 가운데 울며 기도했다. 그곳에선 중·고등학교를 마치면 어부나 농부가 되는 길밖에 없었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 19세가 될 때까지 거제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을 정도로 낙후된 마을이었다.
공부를 마치면 산에 소를 풀어 놓고 소나무를 바라보며 내 맘대로 영어설교를 한다고 외쳤다.
비가 오는 날엔 한 손에 소고삐와 우산을 잡고, 한 손엔 영어단어장을 들고 공부했다.
그러나 내게 신학교에 갈 수 있도록 안내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상가상 아버지의 병환으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아, 어떻게 하면 신학교에 갈 수 있을까.’ 나무를 하러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가면 풀밭에 주저앉아 주르르 눈물만 흘렸다.
“하나님, 이 작은 자를 기억해 주이소. 목사가 되고 싶은데 길이 없다 아임미꺼.” 그렇게 한참을 기도하는데 나를 찾는 방송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 김의철 담임목사님의 "목회는 영권(靈權)이다"는, 2019년 4월 11일부터 동년 8월 29일까지 국민일보에 게재된 총 20부작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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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영권이다<2> 주님만 의지하고 따른다는 믿음으로 역경 버텨
주님만 의지하고 따른다는 믿음으로 역경 버텨
김의철 송도가나안교회 목사가 1980년 2월 교육전도사 시절
서울 상록장로교회 중·고등부 수련회를 인도하고 있다.
"철아, 서울 사는 이모라 카더라. 30분 뒤에 전화가 올 끼다. 늦지 않게 오그라." 마을 이장댁에서 수화기를 들었다.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이모가 서울로 올라오라 했다.
그렇게 1978년 난생처음 거제도를 벗어나 배를 타고 마산까지 간 뒤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철아, 서울 가면 사람들이 코 베어 간다 카더라. 조심해라이." "예, 알겠습니더." 어머니 말씀대로 나는 정말 사람들이 다가오면 코부터 잡았다.
서울에서의 삶은 모든 게 생소했다. 밤이 되니 자동차와 냉장고 소리가 났다. 신기했다. 창동 근처 하평교회에 출석했는데
청년 중 신학생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자신이 다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한신 교단 소속 직영신학교인 한양신학교에 나를 소개했다.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등록금으로 쓰라며 돈을 부쳐주셨다. 어려워진 가정형편에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만든 돈이었기에
쓸 수 없었다. 돈을 돌려보내며 편지를 썼다.
"어머니, 저는 목사님이 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보내셔서 엘리야를 먹이셨듯 학비도 주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독학이 시작됐다. 당시 신학교 교무처장인 김갑수 목사님을 찾아갔다. "목사님, 지금 당장은 등록금이 없습니다.
일단 입학을 시켜주시면 갚겠습니다. 주님께서 불러 주셨으니 반드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과연 선지학교였다. 피아노와 영어가 가능했던 나는 김 목사님이 사역하던 성북교회 교육전도사로 특채됐다.
신학교 옆에 기숙사도 있었다. 주변의 사랑의 손길로 생활했다.
한양신학교 2학년 때 입대를 했다. 경기도 파주에서 군 생활을 했는데 연대 군종병으로 밤낮없이 복음전파에 힘썼다.
제대 직전 결혼했다. 아버지가 많이 아프시고 어머니를 비롯해 모든 가족이 서울에 온 상황이었다.
요즘은 신학대학원을 졸업해야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지만, 당시는 3년 단독목회를 하면 가능했다. 졸업하자 의정부의 한 교회에서 담임목회자 청빙이 들어왔지만 개척을 선택했다.
1986년 개척지를 찾기 위해 서울 변두리를 걷고 또 걸었다. 버스 탈 돈도 없었다. 당시엔 ‘교회 개척을 하려면 100군데 이상은 돌아봐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렇게 무작정 돌다가 상계동 들판까지 갔다.
낡은 옛집이 즐비했다. 쓰레기장 같은 빈터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터를 아주 싸게 빌렸다. 추운 겨울 눈을 맞아가며 보름간 쓰레기를 치웠다. 문제는 천막이었다. 기도 중 선배 목사님이 자기 교회에 와서 간증하라고 했다. 간증을 마쳤더니 5000원을 주시면서 교회개척에 보태라고 했다.
그 돈으로 천막을 샀다. 그리고 손수 천막을 치고 세계선교교회라는 간판을 달았다. 입당하는 날 목사님들이 오셔서 "세계선교교회가 아니라 빈민교회라고 해야겠다"고 했다. 그곳에서 1년간 고생하면서 목회하는데 상계동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교회는 결국 철거됐다.
그때 교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상가로 갈 전세금을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상가를 계약했다. 하지만 그는 돈을 주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는 돈도 없으면서 자기를 과시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계약은 파기됐고 빌려서 충당한 계약금마저 갚아야 했다. 방법이 없었다. 전세금을 뺐다. 신혼살림은 상계동 길바닥에 내놨다. 아내는 처가로 가고 나는 거리를 헤매는 신세가 됐다. 정말 사는 게 힘들었다. 그렇게 교회 문을 닫고 나니 돈 걱정 안 하는 목회를 하고 싶었다.
1987년 목회지를 수원으로 옮겼다. 보증금 100만원에 월 6만원 하는 지하 33㎡(10평) 공간을 빌려 예배를 시작했지만, 주님만 믿고 따라가야 한다는 철학은 바뀌지 않았다. 자립할 때까지 생활비를 지원하겠다는 교회가 있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목사님, 생활비를 신경 써 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주님만 믿고 한번 살아보겠습니다."
간이의자 10개를 놓고 시작한 교회에 1년 만에 10여명이 모였다. 2년 차엔 그 옆 새로운 건물 132㎡(40평)로 옮겨갔고, 3년 차엔 50명이 모였다. 개척 5년 차엔 전세 7000만원 하는 2층 공간을 단독으로 쓰게 됐다. 그러나 더 큰 고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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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영권이다<3> 무리하게 결정한 교회 건축으로 엄청난 시련
무리하게 결정한 교회 건축으로 엄청난 시련
김의철 송도가나안교회 목사가 1991년 5월 경기도 수원 인계동으로
예배당을 옮긴 뒤 이전예배를 드리고 있다.
목사였지만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했다. 빨리 안정된 삶을 살고 싶었다. 아들과 딸 두 아이가 있지만, 인형 하나 사 주지 못하고 키웠다. '이러다가 아이들 대학이나 보낼 수 있을까' 두려움이 몰려왔다. 빨리 성공해 그 힘으로 선교하는 목사가 되고 싶었다. 교회를 건축하고 싶어 부지를 달라고 기도하며 땅을 찾아다녔다.
교회개척 8년 차인 1996년 경기도 수원 영통에 991㎡(300평)을 매입하고 교회 건축에 들어갔다. 지하 1층, 지상 1층의 509㎡(154평)짜리 건물이었다. "수없이 이사했는데 이젠 내 교회가 생겼으니 이사 안 가도 된다. 세를 올려 주지 않아도 된다!" 매일 교회 주변을 돌았다.
성도도 100여명 모이고 번듯한 교회건물을 가졌다. 하지만 내 영은 지쳐가고 있었다. 너무 힘들게 살아왔기 때문일까. 이해되지 않는 우울증이 찾아왔다. 기도해야 하는데 기도가 되질 않았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불안하고 초초했다. '아, 내가 이걸 얻으려고 교회를 세웠나. 여기까지 힘들게 왔는데 이것을 지켜내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이런 마음이 드니 영성이 점점 흐릿해졌다.
교회 건축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 토지 잔금을 치렀지만, 토지주가 근저당을 풀어주지 않았다. 땅을 분할해 우리 교회와 빌라건축업자에게 매매했기 때문이었다. 잔금을 받아 다른 곳에 쓰느라 근저당을 못 풀어 준다고 했다.
교회도 교회지만 빌라건축업자는 근저당에 걸려 빌라를 팔지를 못하고 부도가 날 상황이었다. 그래서 빌라건축업자와 땅주인이 찾아와 애원했다. "목사님, 교회 옆에 붙어있는 땅까지 사 주시면 근저당을 풀어드리겠습니다. 싸게 팔게요."
돈이 없었지만, 그 방법 외에는 근저당을 풀 길이 없었다. 싸게 준다는 말에 땅 욕심도 생겼다. 성도의 집을 담보로 돈을 대출받아 495㎡(150평)를 당시 9000만원에 매입했다.
기도도 깊이 못 하고 영적으로 바닥 상태에서 내린 결정은 훗날 엄청난 시련으로 다가왔다. 교회 재정이 부족해 은행 이자가 밀리기 시작했다.
그런 차에 성도들이 시험에 빠졌다. 교회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교인의 선행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목사님, 제가 돌침대 대리점을 하는 사람한테 돈을 빌려줬는데 돈을 갚지 않아 돌침대 3개를 가져왔습니다. 허리도 안 좋으신 것 같은데 하나 드리겠습니다." 처음에는 미안해 사양했지만, 허리가 많이 아픈 차에 반복해서 권유하니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런데 여집사 한 분이 교회 옆 사택에 왔다가 돌침대를 보고는 시험에 들었다. "교회가 어려운데도 목사님이 비싼 돌침대를 사고 재정을 흥청망청 쓴대." 성도들도 그때부터 시험에 들기 시작했다.
급기야 담보를 내준 성도들은 불안하니까 담보를 풀어달라는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믿음 없는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갔고 교회 내에 분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다. 정말 그곳이 싫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었다. 교회를 매각해 부채를 갚는 길뿐이었다. 그래서 성도들과 의논해 교회건물을 매각하기로 했다. 아는 목사님께 이런 사실을 이야기했다.
"오, 김 목사. 마침 내가 아는 목사님이 교회건물을 사려고 준비하고 있었어. 그분을 소개시켜주지." 얼마 후 그 목회자와 교회 건물 매매계약을 했다. 계약 조건은 계약금만 받고 잔금은 교회 땅과 건물을 담보로 돈을 빌린 뒤 받는 것이었다. 부채는 건물에 들어올 목회자가 책임지기로 했다.
계약이 체결된 뒤 재정을 맡고 있던 모 집사가 찾아왔다. "목사님, 저한테 돈 좀 빌려주십시오. 제 형편이 무척 어렵습니다."
참으로 당황스러웠다. 안타까운 심정에 계약금 중 일부를 빌려줬다. 그랬더니 며칠 후 그 집사가 또다시 찾아왔다. "목사님, 사정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조금 더 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집사님,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이 돈은 하나님의 성전을 내놓고 받은 돈입니다. 부채를 갚고 남은 돈으로 다른 성전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 돈은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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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영권이다<4> 교회도 돈도 빼앗기고 절망뿐이던 '눈물의 2년'
교회도 돈도 빼앗기고 절망뿐이던 '눈물의 2년'
김의철 목사가 1997년 경기도 수원에 교회를 건축한 후 가족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그러나 교회건축의 기쁨은 잠시였고 건축과정의 문제로 우울증이 찾아왔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한 재정 집사가 나 몰래 교회를 매입한 목회자를 찾아갔다고 한다.
교회를 넘겨받은 목사는 잔금을 내게 주지 않고 재정 집사에게 주기로 약속했다는 게 훗날 경찰 조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순진하게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교회 담보대출로 수표를 받고 등기 이전을 해주기 위해 법무사 사무실로 갔다. 등기 이전에
필요한 서류를 넘긴 뒤 수표를 받았는데 교회를 매입한 목회자가 입을 열었다. "수표 좀 볼 수 있을까요." 아무 생각 없이 보여줬는데, 그만 수표를 받아 채더니 문 앞에 대기시켜 놓은 차를 타고 도망쳐 버렸다. '아니, 목회자라는 사람이 지금 무슨 해괴한 짓을 한 거야.'
법무사 사무실의 등기 이전 절차를 중단했다. 그리고 서류를 가져왔다. 이런 사실을 노회에 보고했다. "김 목사, 당장 고소를 하시오." 며칠 후 수표를 뺏어간 목사를 절도죄로 고소했다. 경찰 조사가 시작되자 그는 수표를 돌려주겠다고 했다. 노회도 문제를 잘 풀어보자며 중재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상황은 전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교회를 넘겨받은 목사가 돈을 빌려주지 않아 불만을 품은 재정 집사를 접촉한 것이다. 그 후부터 수표를 돌려주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않고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노회도 중재한다고 했지만, 재산 욕심 때문인지 일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어느 날 노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 목사, 교회를 매입한 목사와 이야기가 다 됐소.
수표와 교회 이전 서류를 교환하는 자리를 만들 테니 수원 모 대학 주차장으로 오시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하니 법무사 사무실이나 은행이 낫지 않겠습니까." "어허, 그러면 일 처리가 복잡해져요. 나만 믿고 나오시오." "그럼 교회 열쇠와 서류를 가져갈 테니 뺏어간 수표를 꼭 가져오라고 해주십시오." "걱정하지 말고 서류와 열쇠만 가져오시오."
주차장에 도착하니 노회 임원들이 한쪽에 서 있었다. 교회를 넘겨받은 목사가 다가왔다. "교회 열쇠와 서류를 가져왔소?" "네, 여기 있습니다. 이제 뺏어간 수표를 주십시오." 하지만 그는 돈은 주지 않고 숲 쪽으로 갔다. 또다시 당할 순 없었다. "다 드렸으니 돈을 주셔야 할 게 아닙니까. 세상에 이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때였다. 갑자기 내게 돈을 요구했던 재정 집사와 불만을 품고 교회를 이탈한 몇몇 신도가 뛰쳐 나왔다. 교회를 넘겨받은
목사가 돈을 꺼냈다. "자, 김 목사. 돈 여기 있소." 재정 집사가 나를 향해 돌을 들고 위협하더니 돈을 낚아챘다. 그리고 교회를 넘겨받은 목사도, 재정 집사도 황급히 사라졌다. 혼자 나오라고 했던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됐다.
다리가 풀렸다. '아, 도대체 이게 무슨 망조란 말인가.
교회 건물과 열쇠는 저 사람에게 넘어갔고 돈은 재정 집사가 가져갔다. 이제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목사가 됐다.'
수치스러웠다. 죽고 싶었다. 그때부터 빈털터리 상태에서 2년간 눈물 흘리며 경찰서와 검찰청을 오갔다. 속이 타들어 갔다.
그 과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돈을 사랑하며 안정된 삶을 위해 목회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말이다.
내 잘못을 절대 인정하기 싫었다. 그래서 주님께 항의했다. "주님, 왜 제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제가 잘못한 게 있단 말입니까.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 정말 제게 이러셔도 되는 겁니까!"
어둠의 터널이 계속됐다. 한 달이면 끝나겠지 하며 보낸 시간이 2년이나 흘렀다. 내가 경멸스러웠다.
사방이 온통 어두움뿐이었다. 모든 게 싫었다. 빨리 죽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광야에 던져진 존재처럼 모든 희망을 잃은 상황에서 마음 한구석에서 그럴싸한 생각이 떠올랐다. '20일 금식기도를 하면서
죽자.' 경기도 수원 칠보산기도원으로 들어갔다. 정말 죽으려고 금식기도에 돌입했다. 마음의 분노 때문에 기도는 뒷전이었다. 혓바닥이 갈라지더니 기력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몸이 축 처졌다.
금식 17일째 되던 날이었다. 얼굴을 찡그린 채 힘없이 소나무길을 걷는 중이었다.
갑자기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김 목사, 네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하는지 아느냐?"
† 김의철 담임목사님의 "목회는 영권(靈權)이다"는,
2019년 4월 11일부터 동년 8월 29일까지 국민일보에 게재된 총 20부작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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