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게
이게집(二偈集)
121.<Uttarat thera>
유(有)에는 항상 머무는 것 없고
행(行)에는 항상됨이 없나니
이 모든 온(蘊)은 일어났다가
차례를 따라 부서져 없어진다.
122.<Uttarat thera>
이런 근심과 괴로움을 알아
나는 생유(生有)를 구하지 않고
모든 욕심에서 멀리 떠나
나는 번뇌의 다함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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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고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 화엄 식구들은 이런 게송을 암송하며, 가슴 속에서 깊은 울림을 경험하시리라 생각됩니다.
법을 이해하고 실천하시는 분들이기에 이러한 가르침이 더 큰 의미로 다가오리라 생각됩니다.
저 또한 위의 게송들이 의미하는 바의 무상. 고. 무아 가르침을 통해,
많이 감화 되었고, 세상을 그리고 자신을 그러한 기반 하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에 더해서, 현대는 과학의 언어로 문명화 되고 과학적 사고의 합리성을 의심하지 않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 처럼 저 또한 일반 상식 수준의 과학적 사고를 즐기고 있습니다.
특히, 붓다의 법음을 가슴에 품고 그 기반에서 물리학적 생화학적 그리고 진화적 바탕의 이론을 통해 무상 고 무아의 이치를 강화하여 받아들이는 일은 깊은 울림을 주죠.
과학적 사고와 붓다의 가르침은 서로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 조화롭게 결합되어 삶의 진리를 더 분명히 깨닫게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경로를 통해 수긍되는 무상 고 무아의 이치가, 내 가슴에 울림으로 다가 왔다고 한들..
나는 정말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나?
아니요.
나는 여전히 후회하고 불안해하고 화내고 욕망을 품고..
나는 내 주변 친지들이 살아가는 고통을 보면 너무 안타깝습니다.
내 고통의 문제에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주제에, 내 주변 피붙이들의 어려움에 화가 나고 가슴이 저린건 어쩌자는 건지요.
그나마 나 스스로의 고통은 감내를 미덕으로 알겠으나, 내 이웃들의 고통에 대한 것은 내 마음의 감내로 해결되는게 아니죠.
사실 이웃들의 고통을 보며 아파한다고 말하면, 니까짖게 무슨 자비심이라도 있는척 하느냐 모두 웃겠지만.
나의 이웃이란 혈연으로 이어진 좁은 바운다리입니다.
가족이라는 구성원 내에서 유전자의 공유관계가 돈독한 이웃들일 뿐이니
내 슬픔의 영역은 확장된 나라고 해야할까요?
어쨌든..
내 욕망은 나를 넘어, 유전자로 얽혀있는 확장된 나인 친인척들의 삶의 문제까지로 확장되어 나를 휘둡니다. ㅠ
세속적 욕망 말이죠.
그애가
가난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 언니가
아프지 말아야 하는데
그 동생이
사업 잘 돼야 될텐데..
세상을 헤쳐나가는 길은 험난할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 어깨에 나눠 짊어져주고 싶은 말도 안되는 욕망들로 마음이 바쁩니다.
뻔하잖아요..
마음 뿐이지. 지 앞가림도 버거운 주제에, 세상 걱정까지 끌고와서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는 내 모습이라니...
게송을 외우며 가슴 뭉클하고 마음 숙연해지는 점은 분명한데..
그러함에도 나는 붓다를 만나지 않은 사람들과 별반 차이없지 않은가?
이건 분명 잘못 돼있는 거다.
사띠. 사마타 수행이 빠진 그래서 체화되지 못한 머릿속만으로의 이해는 내 삶에 큰 힘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나름 한동안 방문객님이 지도해주신 기법으로 열심히 '일어나는 사실들'을 보려 꽤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던 적도 있었는데요....
물론 그러한 호흡법들만으로도, 글로 읽어서만은 알아차릴 수 없는 붓다의 가르침의 깊은 내용들이 조금은 환해지기도 했지만..
나를 완전히 바꿔놓기에는 나의 끈기가 부족했던게 분명합니다.
이런저런 핑계 이유 등으로 호흡법을 놓아버린지 꽤 되었으니 말입니다.
지금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욕망을 놓을 수 있는 방법으로는
무상 고 무아의 체화일텐데요.
고통을 명확히 보고, 그 고통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는 점은 이미 들어 알고 있지만..
그 수행이 제겐 또 커다란 산입니다.
그 산을 어떻게 정복해야 할까요
그 산을 어떻게 내 삶의 정원으로 가꾸어야 할까요.
그 산을 어떻게 나 자체로 체화시킬 수 있을까요.
고견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고견을 내려주세요.
장로경 2게집을 읽으며
화엄 가족이 된 그 오랜 시간이 내게 아름다운 지혜의 가치로 꽃피워지길 간절히 바라며
부디 이 고뇌와 갈등 속에서도 붓다의 가르침이 빛이 되어 나의 삶을 이끌어주길 기원해봤습니다.
첫댓글 올리는 글은 잘 읽고 있습니다.
수행요. 그거 억지로 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수행은 재밌어야 하는 거구요, 재밌으면 하지 말라고 해도 합니다.
눈꽃님은 지적인 거를 좋아하던가요? 어쨌든 좋아하는 거를 하고, 거기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홀로 있어도 가능한 행복이 더 좋기는 하지만요. 대상이 필요한 경우가 더 많죠. 책이든 뭐든 자기 마음과 몸뚱이 말고 뭐가 있어야 되는 경우죠.
뭐가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면, 그 무언가가 언제든 구할 수 있는 것. 최소한 접근가능성이 높을수록 좋습니다.
물론 불자는 신심이 토대인 경우가 더 좋겠지만요, 불교와 관련 없는 활동이라도 상관은 없습니다. 어쨌든 생활 전반에서 신심을 기억하는 정도면 뭐...
행복해지는 습관, 행복한 습관...그런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제가 강조하는 슬픔두요, 그거 행복의 하나라고 했지 않습니까?
행복은 행복이니까요, 그것이 아무리 시시해 보이더라도, 더 휘황찬란한 행복을 구하려고 하지는 마세요.
세상은, 뭐랄까...인간은 어차피 죽구요, 세상에서 별 용빼는 거는 없습니다.
행복한 습관, 그 행복에 머물며 잔잔한 슬픔을 띈 엷은 미소? 그 정도면 나름 잘 살았죠.
네. 무엇을 접하든 신심의 토대위에서 보고 생각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일반 상식 수준의 과학공부를 하면서도 붓다를 떠나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 행복에 머물며 잔잔한 슬픔을 띈 엷은 미소]
아~참으로 고요 하고도 깊은 내면의 평화를 담은 고차적 심적 상태를 의미하고 계신거죠?
이렇게 도움을 주시니 평화로움으로 가는 걸음에 힘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불자에게 신심은 기본인데, 그것이 24시간 끊이지 않는 그런 거는 그냥 말일 뿐이구요.
그냥 전반적으로 생활에서 부처님을 기억하는 편이라면 신심이 투철한 게 아닌가 합니다.
고집멸도의 사성제를 고성제로 일원화시키고, 바로 그 고성제가 연기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아주 특별한 필요가 없다면, 고차적 심적 상태 등을 따로이 구별하여 말하지 않는 편입니다.
육체적 즐거움과 정신적 즐거움을 분별하지만, 그거...육체와 정신은 상대적입니다.
육체와 정신 모두 함께 드러나 있을 때에는, 그 두가지가 분별되지만요. 정신 즉 마음만 기반할 때를 살펴보면, 사실 질적 차이를 긍정하기 어렵습니다.
육체적 즐거움인가, 정신적 즐거움인가...그런 걸로 우열이나 수준을 가릴 필요는 없구요.
정신적 즐거움만 생각하더라도, 그 우열이나 수준을 가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고매하든 고매하지 않든, 즐거움은 즐거움이고...즐거움으로 향하는 것은 즐거움으로 향하는 것이고...
그러니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고매하든 고매하지않든, 즐거움으로 향하는 의도와 즐거움이라는 느낌이 함께 하는 습관이면 부족하지만은 않습니다. 나름 잘 산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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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발전된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 같은 자신이기를 원한다면요.
처음 꼬리말에 적었듯, 홀로 있어도 가능한 행복을 지향점으로 하구요.
자신의 몸과 마음 이외의 요소가 필요하더라도, 자신이 마음 대로 할 수 있는 것 즉 접근가능성이 높은 쪽으로 지향하구요.
자신이 마음 대로 할 수 없는 것, 뜻대로 안되는 것, 타인에 의존하는 요소는 지양하는게 좋습니다.
지속적 행복을 위해서는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아요?
사소한 것, 이미 주어진 것에서 행복을 찾고 찾을 수 있어야 지속적일 수 있습니다.
소소한 즐거움이 다양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자기 기만을 하라는 거는 아닙니다. 이거는 조심해야 되요. 그게 나쁘지만은 않지만, 좀 망칠 위험도 있어서 그래요.
곁에 저를 이끌어주시는 분이 계시니 그 아름다운 가르침에 감동됩니다.
굳이 선정 등의 지고한 세계에 있지 않아도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가꾸어 가는 것도 고요함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적어주신 댓글들이
여러번 곱씹어 읽어볼 말씀들이네요.
감사합니다.
명절 즐거이 보내시구요. 🌸
제 마음은 내 몸과 가족까지에만 닿는 것 같습니다.
타인의 괴로움에 까지 가 닿는 마음을 헤아릴 수준이 되지 않아서,
눈꽃님의 마음에 공감은 못하지만...
저도 언젠가 마음이 이웃에게까지 가닿으면 그 때는 알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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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객님 말씀을 보니 떠오르는데,
행복심리학이란 분야의 전문가분께서 말씀하시길
행복은 그냥 드러나는 게 아니라,
(소소하고, 자주 재현가능한)[행복한 일]을 능동적으로 만들어서, 누리는 거라고 하더군요.
작고 소소한 행복의 순간들과 더 많이 함께하시길 기원하며..
명절 잘 보내세요~ _()_
황벽님도 명절 잘 보내시구요.
잠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주 나이 137억년의 장구한 세월속에, 지금 동시대의 시간을, 동일한 법의 가르침을 여기 화엄이라는 공간에서 우연히도 공유하고 있는 우리들..
그 우연은 그냥 우연이기만 할까?
필연적 우연일까?
그냥..
이 인연이 너무 소중하고 특별하여 가슴 촉촉하게 바라보았습니다.
방문객님 황벽님 그리고 모든 우리 화엄가족 여러분
소중한 인연에 감사드리며 명절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일체는 형성된 것이고, 일체는 괴로움이다.
행복도 고통도 형성된 것이고, 행복도 고통도 괴로움이다.
여기에서 무엇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가?
행복해지려고 하지 말고, 행복하려고 해야 한다.
메저키스트가 아니라면.
그렇지 않은가?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서원이다.
일체 중생이여 행복하고 평안하라.
방법을 찾아 행복을 실현하라.
어떻게든.
아... 명절 잘 보내세요.
친인척이 이웃이고 게다가 서로 사이도 좋아서 동고동락할 수 있다면 독고독락하는 것보다야 훨씬 복된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당연한 얘기 같은데요. 눈꽃님이 부럽다는..ㅎㅎ
행복해지려고 하지 말고 행복하려고 해야된다..
예전에 방문객님이 비슷한 취지의 말씀을 했었던게 기억나네요. 수온이 아니라 행온이라고...
아~~
[행복해지려고 하지 말고, 행복하려고 해야된다.]
법계유심님 설명 들으니 조금 이해가 되네요.
"수온이 아니라 행온"이라고..
그말이 그말 같아서 한참 동안 그 문장을 노려봤었는데 이제사 그 미묘한 차이가 보입니다.
법계유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