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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사회 면역』은 전세계가 주목하는 정치철학자이자 이탈리아 최고의 석학으로 추앙받는 로베르토 에스포지토가 일찍이 『임무니타스』에서 이론화한 면역의 패러다임을 토대로, 최근 3년간 인류가 경험한 팬데믹의 위기를 다각도에서 조명하고 분석하는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의 조건들을 제시하는 책이다. 저자는 생물학적 전염이 발생하는 경로와 결과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비롯해 면역화가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상황에 대처해야 할 민주주의 체제 자체의 자가면역적인 성향, 푸코와 생명정치의 비판자들이 범하는 초보적인 오류와 지독한 오해를 비롯해 푸코가 어떤 식으로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근거들, 철학의 대가들이 면역의 철학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을 뿐 그 개념을 기본적으로 수용하고 활용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정황들, 최근 3년간 지속된 팬데믹 시대의 정치가 취한 방향과 초래한 문제점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현대사회가 팬데믹 사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거벗은 생명의 보호와 고귀한 삶의 영위 사이에서 갈등하며 겪은 이른바 면역 신드롬의 정체는 제재와 자유, 규칙과 예외, 정책과 실존의 대립 관계가 공통성과 면역성, 코무니타스와 임무니타스의 복합적인 변증관계로 환원되는 곳에서 발견된다. 현대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명-정치적 문제의 해결책은 지구촌의 사회적, 정치적, 인류학적 역동성을 지배하는 면역화 패러다임의 기능에 주목할 때 발견된다.
🏫 저자 소개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로베르토 에스포지토는 삼부작 『코무니타스』, 『임무니타스』, 『비오스』의 출판 이후 일련의 혁신적인 정치철학 저서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하며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다. 1950년 나폴리에서 태어나 나폴리 대학에서 수학하고 교수를 역임한 뒤 피사 고등사범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코무니타스』가 기존의 공동체 개념을 완전히 전복시키고 근원적 의미를 복원함으로써 공동체와 관련된 정치철학의 세계적인 판도를 뒤바꾸어 놓은 책이라면 『임무니타스』는 저자가 근현대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제시하는 면역화의 움직임을 다각도에서 조명한 책이다. 에스포지토의 면역화 패러다임은 푸코가 고안했던 생명정치의 구도를 재해석하고 재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근현대의 해석에 사용되던 기존의 세속화, 정당화, 이성화 패러다임을 대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부작 발표 이후 출간한 주요 저서에 『삼인칭』, 『둘』, 『사람과 사물』, 『정치와 부정』 등이 있고 2022년에는 팬데믹을 주제로 『사회 면역』을 발표했다.
📜 목차
서문 7
I. 전염 27
II. 자가면역적 민주주의 79
III. 생명정치의 시대 131
IV. 면역의 철학 187
V. 팬데믹 시대의 정치 245
에스포지토의 책 296
역자 해제 | 코무니타스와 임무니타스 298
역자 후기 | 번역 노트에서 313
📖 책 속으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코무니타스와 임무니타스, 즉 공동체와 면역성 사이의 패러다임적인 관계다. 원래부터 분리가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나는 공동체와 면역성은,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부각되는 만큼 논리적으로 분리되지 않을 뿐 아니라, 면역 장치를 갖추지 않은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 만큼 역사적인 차원에서도 분리되지 않는다. 인간의 몸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몸 역시 존속을 지속적으로 보장하는 보호 체계 없이는 신체 내부의 분쟁을 극복하지 못한다. 모든 것은, 보호해야 할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사회의 몸을 보존하는 균형의 유지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어떤 한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자가면역질환과 유사한 방식으로 붕괴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면역 장치를 갖추지 않은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의 몸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몸 역시 존속을 지속적으로 보장하는 보호 체계 없이는 신체 내부의 분쟁을 극복하지 못한다. 모든 것은, 보호해야 할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사회의 몸을 보존하는 균형의 유지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어떤 한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자가면역질환과 유사한 방식으로 붕괴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 p.12
팬데믹에 대한 환원주의적이거나 음모론적인 해석은 수백만이 넘는 전 세계의 사망자들 앞에서 여지없이 신빙성을 잃어버렸다. 이러한 유형의 해석이 누가 보기에도 틀렸다는 점은 2021년 초에 이미 드러나 있었다. 이러한 견해들이 틀린 이유는,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어버린 면역의 패러다임에서 억지로 이탈하려는 성격을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면역의 패러다임이 지닌 내부적인 복합성, 즉 면역이 상당히 ‘위험’한 동시에 ‘필요’하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면역이 ‘위험한’ 이유는 면역의 강화가 장기화될 경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치명적인 역효과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지만, ‘필요한’ 이유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성 질병의 전염이 확산될 경우 유일하게 가능한 방어 전략이 바로 면역이기 때문이다. 각국 정부의 팬데믹 대응 전략이 실행되는 과정에서─특히 평가와 적용의 오류, 지연, 모순, 누락의 손실을 평가하는 과정에서─빈번히 부족했던 것도 사실은 팬데믹 상황에서 개인과 집단의 생명/삶을 ‘보호하는’ 방식과 ‘제한하는’ 방식을 식별하고 구분하는 능력이었다.
--- p.22
인체의 ‘면역체계’만큼 인간이 외부를 자신의 내부에 수용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할 뿐 아니라, 왜 스스로의 유기체를 안과 바깥의 지속적인 교환 장소로 간주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 p.24
경쟁이 단순히 백신의 효과만을 두고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백신의 개발과 배포의 공간과 시간을 두고서도 벌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생명정치는 이제 현대사회의 경험 전체가 끊임없이 변모하며 회전하는 새로운 초월적 지평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134
역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역사에 역사적으로 헌정되어 있다.” 푸코가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했던 이 말은 그저 모든 이론이 모든 실천과 마찬가지로 역사 내부에 각인된다는 것만 의미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모든 것이 역사 자체에 의해 생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푸코가 분석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나 개념 자체가 아니라 이들의 역사적인 형성 조건, 즉 어떤 사실이나 개념이 고유하고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는 데 기반이 되는 시공간적 맥락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역사’와 ‘철학’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것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 p. 140
모든 것은 면역체계의 제어에 달렸다. 면역 과정은 주어진 선을 넘지 않는 이상 세포 조직을 복원하고 재생하면서 고유의 보호 기능을 발휘한다. 하지만 동일한 기능을 발휘하는 가운데 조절 능력을 상실하면 막으려고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피해를 일으킨다. 발열의 경우도 초기에는 신체를 위한 일종의 경보 시스템으로 기능한다는 차원에서 유용하지만 한계점을 넘어서면, 몸을 폭발의 위험에 노출시킨다.
--- p.274
오늘날 우리는─ 대략 몇십 년 전부터 심화되는 양상을 보인─생물학적 면역 패러다임의 뿌리 깊은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 면역체계는 더 이상 외부 환경과의 차별화를 가져오는 울타리가 아니라, 특정 상황에서 외부와의 관계를 오히려 용이하게 만드는 요소로 간주된다. 안정적이고 배타적인 유형의 면역체계 대신 부각되는 것은 역동적이고 수용적인─어떻게 보면, 임무니타스라기 보다는 오히려 코무니타스에 가까운─면역체계다. ‘
--- p.283
주목해야 할 것은 백신이라는 면역im-mune의 가장 전형적 도구가 우리에게 가장 필수적인 공통co-mune의 자산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면역의 필요성이 일부가 아닌 전체에, 그러니까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세계 전체의 면역화는 이제껏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 의미를 완전히는 파악하기 힘든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우리는─반복되는 이야기이지만 역사상 처음으로─코무니타스와 임무니타스를 일치시키려는 성향의 경로 선상에, 달리 말하자면 임무니타스가 더 이상 코무니타스를 절개하는 칼이 아니라 코무니타스 자체의 형식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던 이러한 변화가 오늘날 가능해진 것은 어떤 윤리적인 선택이─실제로 곳곳에서 표명되었던 것처럼─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모두의 관심이 한 곳으로 수렴되면서─역사상 처음으로─온 세상을 구하지 않고서는 세상의 어느 한 부분을 구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 p.287
생명정치 체제가 절정에 달한 오늘날만큼 정치가 생명/삶의 보호와 발전에 직접적으로 관여해야 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정치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개별적인 종족의 생명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류 전체의 생명이다. 코무니타스와 임무니타스가 극단적인 형태로 중첩되는 지점에서, 각자의 생명은 오로지 모두의 생명에 의해서만 보호될 수 있다.
--- p.291
🖋 출판사 서평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우려해야 했던 것은 전체주의의 회귀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것은 비상사태이지 예외상태가 아니니까요. 예외상태는 특정 영역을 지배하려는 주권적 의지에서 비롯되지만 비상사태는 자연적인 필요에서 비롯됩니다. 면역은 생물학적일 뿐 아니라 법률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면역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와도 직결되는 일종의 보호 체계입니다. 사회가 스스로를 보호하려면 외부의 침입에만 대비할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고유의 면역 체계가 기능하는 방식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면역 체계는 외부의 침략을 막는 장벽이라기보다는 우리 몸의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필터에 가깝습니다. 면역관용에 의해 유지되는 수많은 현상은 바로 면역 체계의 이러한 변증적인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와 사회는 생물학적 체계에서 오히려 배워야 할 점이 많습니다. [...] 개인의 몸은 물론 사회공동체의 몸도 면역 체계 없이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면역 체계를 지니지 않았던 사회는 없습니다. 법이야말로 인류 최초의 면역화 시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법이 없었다면 분쟁은 전염병처럼 창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동체와 면역화 사이에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은 굉장히 민감한 문제입니다. 과도하게 적용될 경우 원래 보호하려고 했던 집단의 생명을 파괴할 수도 있는 것이 면역화이니까요. 이른바 자가면역질환이라는 질병이 이와 흡사한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철학자들은 팬데믹에 대한 적절한 답변을 찾지 못한 채 두 종류의 극단적인 해석으로 치닫는 듯이 보입니다. 둘 다 정도에서 벗어난 해석이죠. 첫 번째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음모론적인 해석입니다. 팬데믹을 권력층에서 의도적으로 조장했다고 보는 거죠. 팬데믹이 시민들의 복종을 보다 효과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었다고 보는 겁니다. 물론 시민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에 대해 염려를 표명하는 것은 당연하고 지극히 정당한 처사입니다.
아울러 권력의 무게가 입법부에서 행정부로 기울어질 수 있다는 것도 지극히 타당한 우려고요. 이는 비상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이 어떤 수위를 넘어서는 순간 민주주의 체제의 붕괴를 조장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경험한 비상사태 혹은 예외상태의 활성화는 정부의 의도적인 선택에서만 기인하지 않고 그 누구도 예기치 못한 팬데믹의 폭발이 갑작스레 가져온 필요성에서도 기인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 비상상태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본질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지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코무니타스’와 ‘임무니타스’, 그러니까 공통성과 면역성의 관계는 언제나 균형과 한계의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극단적으로 긍정적인 해석입니다.
이는 팬데믹이 사회에 새로운 균형을 가져올 뿐 아니라 평등성의 구도를 재정립하게 되리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 역시 뚜렷하게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 누군가의 주장대로 - 팬데믹이 자유주의와 글로벌화의 종말은 물론 새로운 전체주의의 등장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견해와 직결되기 때문이죠. 최근 몇 년 사이에 평등성의 구도가 변화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이러스의 접촉으로 인해 누구든 죽을 수 있다는 비극적인 차원의 평등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리바이어던 국가를 정당화하기 위한 홉스의 원리, 즉 모두는 평등하지만 그건 모두가 죽음의 위협을 받기 때문이라는 원리는 사실 긍정적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생명의 이름으로 전개되는 생명정치와 죽음을 특정인들의 생존 조건으로 간주하는 생명정치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 로베르토 에스포지토(팬데믹 관련 인터뷰에서)
에스포지토의 생명정치 삼부작을 구성하는 『코무니타스』, 『임무니타스』, 『비오스』에서 면역의 패러다임은 사회공동체적 몸을 내부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외부세력에 대한 위험의 경계를 설정하는 근대법의 내재적이고 부정적인 기능과 성향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이었다. 반면에 에스포지토는 『사회 면역』에서 면역의 패러다임이 팬데믹 같은 극단적인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긍정적인 기능을 회복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여기서 두 용어로 조합되는 ‘사회 면역’이라는 표현은 ‘임무니타스’와 ‘코무니타스’처럼, 혹은 생명정치의 ‘생명’과 ‘정치’처럼 상호배타적인 형태로 공존하는 두 차원의 극적인 조합을 의미한다.
‘사회’를 공통성의 차원으로, ‘면역’을 개별성과 고유화의 차원으로 이해하면 ‘사회’는 ‘면역’과 이율배반적이고 불가피한 형태로만 공존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데믹의 위기가 다름 아닌 면역의 공통적인 실천이 필연적인 과제로 부각되는 상황을 초래했다는 점에 주목하면, 우리가 팬데믹과 유사한 위기 상황에서 추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사회 면역’, 즉 임무니타스와 코무니타스의 조합이라는 것 역시 분명해진다. 에스포지토가 생명정치의 긍정적인 전환으로도 이해하는 이 ‘사회 면역’은 인류를 연대의식과 상호보호가 요구되는 글로벌 정치공동체로 사유하기 위한일종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가깝다. 『사회 면역』은 팬데믹 상황을 두고 벌어진 철학적 논쟁의 이슈들, 예를 들어 생존할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과 자유로울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의 대립 관계나 팬데믹의 위기는 비상상태인가 예외상태인가라는 문제 등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으로도 읽을 수 있다. 글로벌 면역화의 평등성을 중시하는 ‘사회 면역’ 개념을 토대로, 에스포지토는 상호 생존을 보장하는 ‘생명정치적인’ 권리가 인류 공동체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이 보인다.
첫 번째 장에서 저자는 면역의 패러다임이 법적 영역에서 생물학적 영역으로 전이되는 과정 보다 구체적으로 - 특히 파스퇴르와 코흐의 경쟁 구도를 통해 - 분석하면서 이 과정이 결국 의학과 정치의 중첩을 통해 생명정치와 현대의학에 접목되는 경로를 계보학적인 차원에서 추적한다. 두 번째 장에서 저자가 다루는 것은 면역화의 절대적인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그 자체로 자가면역적인 특징이다.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대리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 대립에서 드러나는 모순과 문제점들은 본질적으로 자가면역적이며, 이러한 특성은 - 팬데믹 기간에 일어난 것처럼 - 사회를 ‘치료해야 할’ 단일한 정치적 몸으로 간주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세 번째 장에서는 푸코와 생명정치에 대한 현대 철학자들의 극심한 오해와 평가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이들의 비판적 관점이 지닌 문제점들을 파헤친다.
저자는 푸코에 대한 오해가 전적으로 그의 강의록을 해석하는 학자들의 선입견과 편협한 사고방식에서 비롯되었고, 푸코의 기획은 완성단계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점을 일목요연하게 증명해 보인다. 네 번째 장에서는 저자가 면역의 철학자로 간주하는 하이데거, 니체, 루만, 지라르, 프로이트, 데리다, 슬로터다이크의 면역학적 관점을 소개하며 면역학 고유의 의미론이 생철학을 비롯해 존재론, 인류학, 종교, 사회학, 심리학의 영역에서도 핵심 요소로 기능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다양한 관점들로 구축되는 철학의 여정은 데리다가 제시하는 공동-면역의 개념을 통해 절정에 달한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우리 모두가 3년간 경험한 팬데믹 상황을 돌아보며 이 시기에 부각된 다양한 입장과 정책 간의 연관성과 대립 구도 및 세계정세의 변화를 분석하며, ‘사회 면역’이라는 역설적인 패러다임을 극단적인 위기상황의 분석 도구이자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에스포지토는 비상상태와 예외상태의 차이를 무시하거나 팬데믹의 위기를 상대주의적인 관점에서만 평가하는 입장이 틀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그는 개개인의 생명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협하는 바이러스의 위협만큼은 객관적으로 관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반면, 의학의 정치화는 의학의 독재로 이어질 수 있고 정치의 의료화 또는 기술화도 정작 중재와 대화가 필요한 곳에서 정치의 본질적인 힘을 무력화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오늘날처럼 면역과 권리, 생물학과 법적관행이 강렬하게 조합된 적은 없었다. 에스포지토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 세계적인 차원의 공동체 정신에 호소하며 - 어떤 긍정적인 생명정치 개념을 도출해낸다. 현대 생물학이 어떤 폐쇄된 신체 개념, 즉 외부 환경과의 모든 교류를 배제하며 정체성을 유지하는 신체 개념을 이미 오래전에 포기하고 환경과의 조화로운 교류를 추구하는 신체의 변증적 이미지를 수용한 것처럼, 사회와 정치도 이와 유사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에스포지토의 생각이다. “인체의 ‘면역체계’만큼 인간이 외부를 자신의 내부에 수용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할 뿐 아니라, 왜 스스로의 유기체를 안과 바깥의 지속적인 교환 장소로 간주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 좋든 싫든 하나가 되어버린 지구촌의 모든 사회가 국수주의나 고유의 지정학적 한계를 극복해야만 언젠 다가올지 모를 또 다른 팬데믹의 위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오늘날의 팬데믹은 사실 건강하지 못한 글로벌화의 결과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공동체를 더 이상 어떤 닫힌 세계 또는 보호받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구분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배타적인 관계성을 허물고 ‘타자의 위험’을 수용함으로써 상호 면역화를 추진할 수 있는 세계로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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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화를 추구하는 성향이야말로 오늘날의 현대사회를 좌우하는 가장 지배적인 사회현상 이다. 로베르토 에스포지토의 『사회면역』은 팬데믹의 시대를 맞아 정치권이 보여준 우유부단함에 대해 조금은 덜 묵시록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면역의 사회정치적 과정을 해독하는 데 필수적인 개념적 도구들을 제공한다.
- [허프포스트]
거의 예언에 가까웠던 것으로 드러난 『임무니타스』에서 이미 이론화했던 코무니타스와 임무니타스의 모순적인 공생 관계를 토대로 에스포지토는 『사회 면역』에서 정치와 생명, 사회와 면역의 복잡한 관계를 하나의 결정적인 매듭으로 재구성하기에 이른다. 그의 목표들 가운데 하나는 무엇보다도 팬데믹이 일어난 뒤 제기된 주요 질문들, 예를 들어 생존할 권리와 자유로울 권리 사이에 분쟁 관계가 실재한다는 것은 사실인가? 비상상태와 예외상태의 차이는 무엇인가? 과학기술과 정치의 관계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등의 질문들을 면역의 패러다임이라는 동일한 의미 지평 내부에서 고찰하는 것이다.
- [라 레푸블리카]
“근본적인 전환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현대 문명은 언젠가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이는 역사와 자연, 인간과 환경, 과학과 기술의 점점 더 밀접해지는 관계뿐만 아니라 경제와 정치의 관계와도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오래 전부터 목격해왔고, 팬데믹을 계기로 더욱 더 확연하게 드러난 불평등의 증가 현상을 세상이 견딜 수 있으리라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에 와서야 분명해진 것은 인류의 어느 일부가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일부가 희생된다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오늘날만큼 분명했던 적은 없습니다. 세상은 모두 함께 살아남거나 아니면, 모두가 함께 무너질 위험이 있습니다.”
- [허프포스트, 에스포지토와의 인터뷰에서.]
에스포지토가 주목하듯이,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 전체에게 백신을 접종하겠다는 아이디어는 - 여전히 백신을 생산하거나 구입할 수 없는 나라들이 많이 있는 만큼 이론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 이율배반적인 방식으로 서로를 배척할 뿐 필연적으로 공존할 수밖에 없는 임무니타스와 코무니타스의 관계 자체를 긍정적으로 변형시킨다.
- [레스프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