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루카 10, 21- 24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10,24)
오늘 복음말씀은 마태오복음에서 나오는 산상수훈 같은 또 다른 행복선언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그 많은 예언자들과 임금들도 예수님을 뵙지 못한, 그분 말씀을 듣지 못한 그분의 말씀을 제자들(우리들 또한)은
보고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육을 취하셔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느님의 뜻을 율법에 씌여진데로가 아니라 우리중에 하나로 오신(오시는 ) 예수님을 통해서 보고 듣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2,000년전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그 시대, 그 장소에서만 일어났던 사건 (?)이 아니라 2025년 오늘 우리안에서도 계속되어지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침묵안에서,
우리 마음의 방으로 들어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때 또한 우리도 하느님을 뵙고, 들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셨고(요한 1,14),
그분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 하셨기(마태 28,20) 때문이지요.
누군가가
나를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인정해준다면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까요?
그런분이
우리 가운데 한사람으로 오십니다.
머지않아..
그분을 잘 받아 모실수 있도록 마음의 구유를 잘 준비하는 나날이기를 기도합니다.
(작은 재매 관상 선교회 정 루치아나 수녀님)
12월2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루카 10,21-24
진리의 기쁨을 누리는 법: 네비게이션을 보지 말고 아버지 손을 잡아라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는 어린 시절, 세상과 단절된 채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그녀의 가정교사 앤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에게 언어를 가르치기 위해 끊임없이 손바닥에 글씨를
썼습니다.
인형을 주며 'D-O-L-L'이라고 썼지만, 헬렌에게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손가락장난일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답답함에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졌습니다.
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발버둥 쳤지만,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을 데리고 펌프가로 갔습니다.
선생님은 펌프질을 하여 시원한 물줄기가 헬렌의 한 손에 쏟아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차가운 물의 감촉이 느껴지는 순간, 다른 한 손바닥에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썼습니다.
'W-A-T-E-R' (물) 바로 그 순간, 헬렌의 영혼에 번개 같은 전율이 일었습니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생생한 단어가 내 영혼을 깨웠다. 그것은 빛과 희망과 기쁨을 주었고, 나를 자유롭게 했다."
헬렌이 언어를 깨우친 것은 머리로 고민하며 땅을 팔 때가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의 인도하심(손)과 위에서 쏟아지는 물(은총)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을 때, 지혜가 선물처럼 주어진 것입니다.
참된 앎은 내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빛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루카 10,21)라고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을 '공부'해서 얻는 지식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논리로 증명되는 분이 아니라, 사랑으로 체험되는 분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는 무신론적 지식인 형 이반과 신심 깊은 동생 알료샤가 등장합니다.
이반은 세상의 부조리와 고통을 논리정연하게 나열하며 하느님을 부정합니다.
그의 논리는 너무나 완벽해서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악마이거나
무능한 거야." 이 차가운 지성의 공격 앞에서 동생 알료샤는 말문이 막힙니다.
그는 논쟁으로 형을 이길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알료샤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형에게 다가가 입을 맞춥니다.
그 단순한 사랑의 행위, 논리가 아닌 온기(입맞춤)가 닿는 순간, 이반의 견고했던 무신론의 성벽은 무너져 내립니다.
하느님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논쟁이 아니라 입맞춤으로 만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내비게이션을 켜고 내가 운전대를 잡는 것이 아닙니다.
내비게이션을 끄고, 조수석에 앉아 아버지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광야 시절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하느님은 그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농사는 내 땀과 노력으로 땅을 파서 소출을 얻는 행위입니다.
대신 하느님은 '만나'를 주셨습니다.
만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지면에 하얗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허리를 굽혀 그것을 '줍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불안해서(내비게이션) 몰래 많이 거두어 저장하려 했지만, 그것은 다 썩어버렸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내 힘으로 인생을 개척하는 '농부'가 아니라, 매일매일 하느님의 은총을 줍는 '거룩한 거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파는 것을 멈출 때, 하늘의 양식이 보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참 지식의 기쁨은 겸손하게 부여받는 것이지, 굴을 파듯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 영적 진리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성가 헨리 나우웬은 『서커스 곡예사』 이야기에서 공중그네의 비밀을 말합니다.
공중그네에는 공중으로 몸을 날리는 '플라이어(Flyer)'와 그를 잡아주는 '캐처(Catcher)'가 있습니다.
곡예사는 말합니다. "플라이어의 비결은 딱 하나입니다.
공중에서 제가 맞은편 봉이나 캐처를 잡으려고
팔을 뻗어 발버둥 치면, 둘 다 손목이 부러져 떨어져 죽습니다.
제 할 일은 그저 팔을 뻗고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강력한 캐처가 내 손목을 정확히 낚아챕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공중그네에서 내가 행복을, 내가 구원을 잡으려고(Digging) 아등바등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공중에서 힘을 빼고, 위대하신 캐처(하느님)가 나를 잡아주실 때까지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잡으려 하면 추락하고, 잡히기를 원하면 비상합니다.
이 모습이 철부지 어린이처럼 되는 것이고 진리 안에서 자유와 기쁨을 누리기 위한 모습입니다.
작아집시다. 그러면 잡아주실 것입니다.
그 진리가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2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루카 10,21-24
천국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궁금해했던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는
예수님의 육화강생을 통해 온 천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습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는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을 통해 명확히 밝혀졌습니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는 그 누구도 천상잔치에 소외되거나 차별대우 받지 않는 공평한 곳입니다.
하느님의 풍요로운 자비와 축복이 폭포수처럼 흘러넘치는 곳입니다.
더 이상 고통도 슬픔도, 눈물도 울부짖음도 없는 기쁨의 장소입니다.
언젠가 한 수녀원 본원 부활 성야 미사에 참석했을 때였습니다.
참으로 잘 준비된 전례였습니다.
모든 성가는 장중한 그레고리안 성가였습니다.
빛의 예식에 이어, 말씀의 전례가 시작되었는데, 일곱 개 독서를 모두 봉독했고, 독서 끝에는
어김없이 아름다운 성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사제석에 앉아 있는데, 제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하느님 나라는 이런 곳이겠지.
성삼위께서 중심에 자리하시고, 성모님을 비롯한 천상의 성인성녀들과 천사들이 둘러 계시고,
거룩한 무리에 든 사람들과 함께 끝도 없이 말씀이 선포되고, 찬가가 울려 퍼지고..
그러니 지상에서 거룩한 전례에 익숙해지지 않은 사람들, 그저 세상 좋은 것들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사람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거룩한 천상잔치 그 자체가 별 의미가 없겠구나, 정말 지루하겠구나, 거기 있는 그 자체가 지옥이겠구나.
그러니 지상에 있을 때부터 거룩한 전례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해야겠구나...
오늘 이사야 예언자 역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살짝 설명해주십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이사야 예언서 11장 6~8절)
보십시오. 혼자만, 자기 가족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그 어떤 편법을 써서라도 목숨 걸고 돈을 모으는 사람들, 독식(獨食)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천국에 없을 것입니다.
틈만 나면 분노하고 무력을 일삼으며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그곳에 없을 것입니다.
천국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 침묵 속에 헌신하는 사랑의 봉사자들의 몫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대림 제1주간 화요일 강론>
(2025. 12. 2. 화)(루카 10,21-24)
<성탄절은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만 ‘기쁜 날’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1-24)”
1) ‘철부지들’은, 인간 세상에서는 ‘낮은’ 위치에 있지만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에서는 소외당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서는 소외되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는 것을 감사드린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탄생 때 하늘에 울려 퍼진
‘천사들의 찬미’가 연상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철부지들’과 천사들이 말한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사실상 ‘같은 사람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뜻을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다는 말씀은, ‘철부지들에게만’ 드러내 보이셨다는 뜻이 아니라, ‘철부지들만’ 아버지의 구원 계획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셨는데, ‘모든 사람’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고, 구원받기를 희망하는 사람들만 믿고 받아들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구원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자들,
현세의 삶에만 만족하는 자들은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2)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부와 권력을 자랑하면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기득권층 사람들과 영혼 구원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뜻을 그자들에게는 감추셨다는 말씀은, 그자들을 구원에서 배제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은 지혜롭다고 자처하면서 잘난 체 하는 자들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구원’이란 원래, 구원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원하지 않고, 또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못 받습니다.>
성탄절은 모든 사람을 위한 날이고,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날인데도, 예수님을 안 믿고,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관심이 없는 자들에게는 성탄절은 기쁜 날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그냥 ‘남의 잔치’일 뿐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라는 말씀에서 ‘마리아의 노래’가 연상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마리아의 노래’는 ‘비천한 이들, 굶주린 이들’이 구원받게 된 것을 찬양하는 찬미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만한 자들, 통치자들, 부유한 자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만한 자들도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지면 구원받을 수 있고, 통치자들도 불의한 권력을 내려놓고 올바르게 살면, 또 부유한 자들도 혼자만의 부유함을 버리고 진심으로 자선을 실행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3)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인간 구원’의
‘전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선언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 3,35).”
예수님께서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시니,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올바르게 믿고 섬기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아들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요한 8,42).”
<하느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안 믿은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제대로 믿고 섬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요즘에도 하느님을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예수님을 안 믿는 일부 이단이나 사이비 종파들이 있는데, 그들도 역시 하느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닌 자들입니다.>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길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유일한 ‘구원의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다른 길이나 다른 진리나 다른 생명은 없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