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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1년 11월 20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오 25,31-46)
'Amen, I say to you,
whatever you did
for one of the least brothers of mine,
you did for me.’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직접 찾아내시고 상처 난 양을 낫게 하시고 일으켜 세우시겠다고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그 말씀은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히 실현된다(제1독서). 첫 인간 아담의 범죄로 죽음이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과 부활로 생명이 왔다. 죽음의 모든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발아래 굴복시키신 것이다(제2독서). 주님께서는 양과 염소를 가르시듯, 당신을 따르는 양들을 돌보시고 구원하신다. 주님의 목소리는 굶주린 이, 소외된 이들 안에서 들을 수 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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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전례력이 끝나는 마지막 날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지내며 예수님께서 우리의 왕이심을 선언합니다. 그분 스스로 한 번도 자신을 왕이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 날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 우리 ‘인생의 왕’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왕은 예로부터 백성 앞에서 무소불위의 힘과 권력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역사 이래 대부분의 왕은 백성을 지배하고 찬란한 궁궐을 짓고 그 안에서 화려한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의 왕이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힘과 세력을 가진 화려하고 위엄 있는 왕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복음은 우리의 왕이 어떤 분이신지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세상에서 굶주리고 헐벗은 이, 병들고 감옥에 갇힌 이가 바로 주님 당신이시라는 것입니다. 곧 그런 사람들이 우리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겠다면, 배부른 이가 아니라 굶주리는 이를, 건강한 이가 아니라 병들고 약한 이를, 힘 있고 능력 있는 이가 아니라 헐벗고 목마른 이를 찾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자신보다 더 잘난 사람만을 찾는 한, 더 능력 있고 더 가진 사람들만을 만나고 사귀려고 하는 한, 권력이 있고 힘 있는 이들에게 줄을 대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는 한, 우리 인생의 왕은 그 자리에 없습니다. 세속의 왕은 부와 권력을 가지고 저 위에 있지만, 우리 인생의 왕이신 주님께서는 저 아래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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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십니다. 미래를 주관하시는 분으로 고백합니다. 진정으로 그렇게 고백하면 그분은 내 운명의 주인이 되어 주십니다. 평범한 이 진리를 다시 기억하며 실천하라는 것이 ‘그리스도 왕 대축일’의 교훈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죄와 연관된 것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에 구원이 달린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얼마나 사랑하며 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도 이웃에게 행한 것이 ‘예수님 당신에게 행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해야 할 ‘작은 이웃’은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제쳐 놓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상처 주면서 ‘사랑의 길’을 간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어렵고 힘들지만 그만큼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왕이란 딱딱한 표현입니다. 누구나 그 앞에선 벌벌 떨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왕이 아니심은 분명합니다. 오히려 그분은 사랑의 왕이십니다. 오늘만큼은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며 주위의 ‘작은 이웃’들에게 따뜻함을 전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면 그리스도 왕국 백성이 됩니다
-박용식 신부-
아가타는 혼인을 하자마자 남편을 왕처럼 대했습니다. 사람들은 남편을 너무 깍듯하게 대하는 아가타에게 여러가지 조언(?)을 했습니다. 신혼 초에는 아내가 주도권을 잡아야 하고, 기싸움에서 밀려서는 안 되며, 시작부터 너무 잘하면 나중에 감당하기가 힘들다고 충고를 해줬습니다.
그러나 아가타는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여전히 남편을 왕처럼 모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를 묻자 아가타는 "제 남편이 왕이면 저는 왕비이니까요!"하고 대답했습니다.
남편을 왕으로 대하는 아내는 왕비가 되듯이, 남편을 노예로 대하는 아내는 노예의 아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여기고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위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는 자녀와 부모, 사제, 친구 등 모든 인간관계에 해당될 것입니다.
마태오복음 16장 13-20절에 이러한 내용이 잘 나와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 중 한 사람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고백합니다. 누구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베드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알아 본 베드로에게 "시몬아,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아들을 알아본 베드로 역시 하느님 아들로 여기며 하늘나라 열쇠를 주신 것 입니다.
우리도 이처럼 예수님을 어떻게 모시느냐에 따라 예수님한테 어떤 대접을 받을 지가 결정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자신도 예수님한테 소중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것이고, 예수님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예수님한테 우스운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프랑스 출신 줄타기 곡예사 불롱뎅은 수면에서 48m 높이에 설치된 335m 길이 줄을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는데 성공해 부와 명성을 얻은 사람입니다. 그가 눈을 가리거나 외바퀴 수레를 타고 줄을 건너며 묘기를 부릴 때마다 관중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습니다.
한 번은 그 곡예사가 "내가 한 사람을 등에 업고도 외줄타기 곡예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하고 묻자 관중 한 사람이 "당신이라면 문제없이 할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곡예사는 그 사람에게 "그렇게 믿고 확신한다면 당신이 내 등에 업히시오" 하고 말하자 그는 "나는 아닙니다"하고 꽁무니를 뺐다고 합니다. 곡예사는 결국 자신의 곡예에 열렬한 박수를 보내는 사람 대신 다른 이를 등에 업고 줄타기에 성공했습니다.
신자들도 주님께 비슷한 말을 합니다. "주님이라면 나를 업고 가실 수 있으니 나의 모든 것을 맡기겠습니다"하고 고백하지만 막상 주님께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 할 때는 꽁무니를 뺍니다. 인생 전체는커녕 돈 몇 푼, 잠깐의 시간, 하찮은 재주나 능력조차 주님께 맡기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에게 봉사해야 합니다"하고 말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봉사좀 해주시오"하고 부탁하면 "나는 못합니다"하고 거절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머리로만 믿는 것도,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도 아니라 몸으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고백하고 베드로처럼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삶의 맨 첫 자리에, 왕의 자리에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왕으로 모시면 그 아내는 왕비가 되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우리도 왕이신 예수님 신하가 돼 하늘나라 시민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아 우리 삶에서 그리스도를 최고의 왕으로 모심으로써 그리스도 왕국 백성이 되는 영광에 참여합시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 만세
-최인각신부-
당신은 저에 임금이십니다.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으면서, 임금이신 예수님을 생각하니 행복의 노래가 저절로 나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저의 술잔도 가득합니다. 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 오늘 화답송인 시편 23장의 내용을 곱씹고 곱씹을수록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의 맛을 더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 이처럼 고맙고 감사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처지를 정말 잘 알고 계시고, 나와 항상 함께하시며 내 편이 되어 주시고, 내 숨은 사정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셨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분은 나를 위해 철저히 봉사하신 분이시기에, 내 고마움의 마음이 그분을 유일한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예수님은 임금님이시고 주님이시며 목자이면서도 그러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나를 위해 철저히 낮아지시며, 심지어는 나를 당신의 임금으로 모시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까지 합니다. 내가 굶주려 배고프다고 칭얼거릴 때 먹을 것을 마련해 주셨고, 내가 목마르다고 외칠 때 마실 것을 주셨으며, 내가 세상의 나그네였을 때 따뜻하게 맞이해주셨으며,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셨으며, 내가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셨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 찾아 주셨던 분이 바로 그분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나를 위한 철저한 봉사자셨으며, 내가 청할 때 한 번도 거절하지 못하는 종이셨으며, 내 뒤에서 지켜봐주시고 떠받쳐주는 든든한 후원자셨고, 내가 넘어질 때 일으켜주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셨으며, 말로 다 못할 내 기도를 대신해준 기도의 대가(大家)셨으며, 내가 우울할 때 대신 울어주며 나를 기쁘게 해준 광대셨으며, 내가 먼 길을 갈 때 먼저 준비하시며 앞길을 비추는 등불이셨습니다. 나의 당신이 되어 주신 당신은 나로 말미암아 울고 웃으시며, 나의 행복을 위해 나의 전부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제 당신이 누구신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당신은 가끔, 아니 매번 나를 위한 바보이셨습니다. 당신의 모든 일을 다 내려놓고, 마치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나에게 빠져 버린 것 같은 당신! 다 무너져가는 당신의 몸, 당신의 체면, 당신 영광의 자리마저 다 내동댕이치고 나만을 최고로 여긴 당신! 나만을 섬기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시는 당신! 나를 살리기 위해 그 어떤 희생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으며, 실제로 모든 것을 팔아 나를 구해주시는 당신! 나를 영광스럽게 하려고 당신의 봉사와 사랑과 희생을 감추고 조용히 침묵하시는 당신! 꿈에라도 나타나기를 바라며 조금이라도 좀 더 함께하고자 하는 당신! 나의 말 한마디를 곱게 간직하며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온몸을 바치는 당신! 나의 전부가 되어 주신 당신! 당신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시지만, 당신은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하시지만, 당신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주셨습니다.
저 자신을 되돌아보니, 저는 당신 때문에 다시금 살아난 사람이며, 당신 때문에 살아갈 힘을 얻는 사람이고, 당신 때문에 세상 살맛을 느낀 사람입니다. 당신 때문에 저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옮기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당신은 꽃길을 마련해주셨으며, 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당신 마음에 곱디곱게 기록해 두셨으며, 나의 거동 하나하나에 당신은 감동하며 살며시 웃으셨습니다. 당신은 나의 존재 자체로 행복해하셨습니다. 당신은 내가 당신 아닌 다른 곳에 마음을 두어도 내색하지 않으셨으며, 내가 두 마음을 품어도 당신은 화내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부정을 다 아심에도 당신은 아무런 표현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친히 나를 씻어주는 정화수가 되어 주셨습니다.
당신은 제 삶의 목자라는 권위도, 주님이라는 전지전능도, 임금님이라는 영광도 전혀 드러내지 않으시지만, 당신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모든 것에 있어 저의 목자이며 주님이시며 임금이심을 고백합니다. 한편으로 죄송스럽지만,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어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저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양과 염소
-고찬근신부-
우리는 양입니까? 염소입니까? 양의 무리 속에 염소가 끼어 있으면 얼핏 보기에 비슷해 보이지만 양과 염소는 분명히 다릅니다. 양도 염소도 각기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양이라면 털이 곱슬곱슬하고 통통한 게 순하다는 인상이 떠오르고, 염소라면 뿔과 수염이 나 있으며 고집이 센 놈들로 기억됩니다. 양은 순해서 타인에게 쉽게 다가가지만, 염소는 고집이 세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습니다. 양이 타인 지향적이라면 염소는 자기 중심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양입니까? 염소입니까?
가끔 텔레비전 뉴스에 청와대에 경제인들이나 사회 각계 유력한 지도자들이 초청되어 식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세히 보면 대통령 옆에 앉거나 같은 식탁에 앉은 사람들은 초청된 사람 중에서도 더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거나 재력이 큰 재벌들 순서입니다. 여러 개의 식탁이 있고 저 구석에 앉은 사람들은 대통령 얼굴도 잘 안 보이고 말 한번 붙여볼 수도 없습니다. 거기에도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정말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청와대에 가보기도 힘듭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대통령보다도, 역사상 어떤 왕보다도 위대한 분이시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훗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왕좌에 앉아 모든 민족 앞에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보잘것없는 사람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을 챙겼는지 챙기지 않았는지를 따지신다고 했습니다. 그 큰 영광에 싸인 그리스도 왕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기준은 커다란 업적이 아니라, 바로
보잘것없는 한 사람에게 건네준 빵 한 조각, 물 한 모금, 옷 한 벌이며, 병자와 옥에 갇힌 사람을 찾아갔던 그 발걸음이라고 했습니다. 작지만 따뜻한 그 선행이 바로 위대한 그리스도 왕께서 가장 반기시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보잘것없는 사람을 챙겼으면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는 양이 되는 것이고, 챙기지 않았으면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쫓겨나는 염소 신세가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스스로 양인지 염소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도 양이겠지 하고 있지만,우리가 자기 안에 갇혀 이웃에게 다가가지 않고, 할 수있는 작은 선행들을 하지 않고 있을 때, 우리 턱에는 수염이 자라고, 우리 머리 위에는 뿔이 자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말구유에 태어나셨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군마(軍馬)가 아닌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으며, 최후의 만찬 때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극히 겸손한 그분이 바로 왕 중의 왕이시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깊고 솔직한 기도와 통회로써 자신을 돌아보며 우리의 염소 됨을 없애야 합니다. 즉 자기를 자랑하는 수염과 타인을 밀쳐내는 뿔을 뽑아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열쇠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주위에 그런 사람을 챙기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먹기가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아직 염소인가 봅니다. 염소는 작은 일에도 고집을 부립니다.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작은 이들 안에서 주님을 만나뵐 수 있도록 제 마음의 눈을 열어 주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오늘은 교회의 전례력이 끝나는 마지막 주일입니다. 생명을 지닌 모든 피조물의 ‘마지막 날’은 창조주를 만나 뵙는 날일 것입니다.
왕으로 오시는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으시는 그날은 “모든 민족들” 곧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란 어떤 구분도 없이 온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를 종말 심판관으로 만나는 날입니다.(마태 25,3132; 다니 7,1314 참조) 이날에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인류는 그분 앞에서 ‘복을 받은 이들과 저주받은 자’가 되어 오른쪽과 왼쪽으로 분리될 것입니다.(마태 25,33) 그래서 교회는 우리가 예수님을 종말 심판자로 만나기 이전에 그분 앞에 한번 서보는 날로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기념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말씀인 ‘최후의 심판’은 종말설교(2425장)의 결론인 동시에 예수님 가르침의 총결산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이들” 곧 “의인들”은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34ㄴ. 46절) 그리스어 본문에서 ‘의인’은 ‘의로운’이라는 형용사가 명사로 쓰인 것입니다. ‘의로움’ 또는 ‘정의’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과 소외된 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의인은 천심으로 불쌍한 이웃을 바라보며 자비와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입니다.(9,13; 12,7 참조) 그들을 위한 복락은 종말론적인 축복으로 원초적인 계획 안에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된 나라”이며 “와서, …차지하여라.”는 것은 이미 그들에게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완성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34. 46ㄴ절)
한편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라는 명령은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7,23)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구원과 사랑의 절대적 가치를 지닌 분으로부터의 분리는 어떤 상급이나 징벌을 얻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저주이며 “악마와 그 부하들”에게나 있을 법한 “불 속”과 같은 극치의 고통을 뜻합니다.(41ㄴ. 46ㄱ절) 그러나 이런 징벌이 의인의 상급과는 달리 ‘천지창조 때부터’라는 원초적 계획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은 하느님의 구원이 징벌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축복과 영원한 저주’를 불러오는 심판은 ‘악행’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가장 궁핍한 상황에 그 필요를 충족시켜 ‘…주었는가?’(3536절) 또는 생존의 필요조건을 도외시하며 ‘…주지 않았는가?’(4243절) 하는 행위의 소산입니다. 이때 의인이나 악인들은 “저희가 언제 주님께…”(37. 44절)라며 자신들이 행한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루카 17,10 참조)이라 생각하거나 ‘나와는 상관이 없다.’(창세 4,9ㄴ 참조)고 도외시했던 그들의 마음이 행위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가장 작은 자와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마태 25,40.45)
그러면 가장 작은 이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불쌍한 그리스도인들이나 선교사들로서 예수님의 제자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를 막론하고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주변 인물들로 물질적·신체적 어려움과 고통에 싸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불편한 진실로 우리를 당혹하게 했거나 비천하다고 터부시했던 사람들 그래서 피하고 싶었던 이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미움을 통해 예수님 자신을 직접 만났다는 것입니다. 동료에게 베푸는 자비와 사랑 그리고 무관심이나 미움은 그 행위가 어떤 형태와 이름으로 이루어졌든지 하느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습니다.(마태 10,42; 18,6.10.14; 1요한 4,8.20 참조) 제1독서가 보여주듯이 하느님께서는 고통 받는 인간 편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에제 34,1116) 이처럼 영원한 상벌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사랑을 통해 선택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오늘 우리 삶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묵상하게 됩니다.
묵상(Meditatio)
주님 앞에 서 봅니다. 주님 앞에서 저를 대변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이 중요하다고 말했던 학력·재력·권력·명예·지연일까요? 그러나 그분 앞에 서는 순간 저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허식은 사라진 채 ‘무영의 저’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제가 걸어온 그 길은 어디로 난 길이었는지 가만히 되돌아봅니다. 그러자 주님의 웃음이 말없이 서 있는 제게 물으십니다. “너의 가장 작은 이들은 어디에 있느냐?”(마태 25,40.45 참조)
기도(Oratio)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시편 24,34)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양승국신부-
<하느님 오른 편에 당당히 서기 위해>
교회력으로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반복되는 복음 말씀은 최후 심판 때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복음사가들이 묘사되는 세상 마지막 날의 때로 참혹하고, 때로 끔찍한 모습에 살짝 걱정도 되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경우만 해도, 그날이 오면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갈라 세우겠다고 말씀하시니 제 개인적으로 걱정이 태산입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계신 예수님
-안승태신부-
하느님의 하느님다우심은 어떤 것일까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자연이적을 일으키시는 모습 안에서 그분의 신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온 우주 그리고 인간 세상의 질서를 세우시고
지탱해 나가시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그분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요? 분명
하느님은 그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분으로서 “있는 자” 존재 자체이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격적으로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 안에서 당신이 누구신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최후의
심판 때에 지상에서의 우리 삶의 평가 기준이 ‘작은 이들에게 베푼 사랑’이라면
그분의 관심사는 당연히 우리 사회의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느님의 관심은 예수님의 공생활 3년 안에서 뚜렷이
표현되었습니다. 왕으로서 하느님의 지배는 모든 사람들이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의 구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병자들과 죄인들과 소외받는 이들을 찾아가시는 모습 안에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작음’과 ‘소외됨’
‘병듦’을 통해서도 우리를 찾아 주시는 하느님, 예수님을 체험하게 해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나 아닌 다른 형제들의 소외와 고통의 삶의 자리로 오시는
하느님을 만나러 나서야 합니다. 그리스도 왕국은 그러한 ‘작음’ 안에서
크게 자라나는 겨자씨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우리도 왕이다
-김찬선신부-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며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는데
우리가 오늘 이 축일을 지내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라는 것은 당신의 나라가 있고,
당신의 백성이 있다는 뜻인데
이 나라는 이 세상 임금들이 통치하는 나라와 같은 나라일까요?
만약 이 세상 나라와 똑 같은 나라이고
이 세상 통치자와 똑 같은 임금이라면
굳이 이런 축일을 지낼 필요도 없을 것이고,
우리도 그런 분을 임금으로 모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선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 통치자와 다르게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유다 백성이 왕으로 모시고자 하였습니다.
또 스스로 왕이라고 하신 적도 없습니다.
헤로데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을 때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는 식으로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이 왕이 되시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왕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나라는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백성,
그중에서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당신과 동일시하는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이들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동일시하시고
특히 사회적 약자들을 당신과 동일시하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도무지 남으로 생각지 않으십니다.
이는 어머니가 자식을 남으로 생각지 않으시는 것 그 이상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나라에서는 임금이 백성을 당신과 동일시하시니
그리스도 왕국은 그 백성인 우리도 왕이 되는 나라입니다.
세 번째로 왕이신 그분이 이러하시기에
그분의 통치도 당연히 이 세상 통치와 다릅니다.
이 세상 통치자는 자기 백성을 종처럼 부리고 억누르지만
그리스도 왕께서는 목자가 자기 양떼를 보살피듯 다스리십니다.
오늘의 독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나라에서는 그 백성도 다릅니다.
임금이신 그리스도께서 백성을 당신과 동일시하시니
백성인 우리도 서로를 그리스도 대하듯이 대해야 하고
특히 사회적 약자들을 그리스도와 똑 같이 대해야 합니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지내는 이 축일의 의미는
한 해가 끝나는 날, 이 세상이 끝나면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그 나라가 세워지길 염원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것이며,
그분의 사랑의 통치가 잘 이루어지도록
우리는 그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에 충성하겠다고
충성서약을 하는 날일 것입니다.
정의의 임금, 영원한 생명의 왕
-이승준 신부-
그리스도 왕이신 예수님께서 지닌 왕권을 인간적인 눈으로 본다면
그분을 진정 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사야 예언자의 말처럼 그분은
고통과 멸시를 받은 사람, 천대 받고 하느님께 벌 받은 자(이사 53, 3-4참조)와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한 채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분이시기에
왕의 호칭과는 더욱 어울리지 않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왕으로 믿습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세상의 불의에 맞서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분은
모든 이들이 두려워하는 죽음까지도 자신의 십자가상 희생을 통해
무찌르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분을 ‘정의의 임금’이요
‘영원한 생명의 왕’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왕권은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분께서
왕으로 우리 앞에 오실 때 우리를 판단하는 기준은 ‘세상의 가장 작은 일에서부터 얼마나
충실하게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그분과 함께
머무르는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가장 낮은 자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분을 알아보며 얼마만큼 나눔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그 이름
- 배광하 신부-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된 나라
영생의 욕망
세상에서 인간이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모든 욕망도 결국은 생명의 연장에 있습니다. 식욕, 성욕, 탐욕 등도 자신의 생명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되는 것을 막아보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죽음을 피하고 싶은 갈망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고대 이집트 ‘미라’ 역시 죽음을 피하고 영생을 얻으려는 욕망의 산물입니다. 영생의 욕망이 강한만큼 미라 제조 방법 또한 끔찍할 만큼 집요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우선 천연 소금인 나트륨으로 시체를 건조시켜 수분을 흡수하고 지방을 녹인다고 합니다.
피부의 탄력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 작업이 약 70일 걸리고 또다시 40일을 건조 시킨 뒤 끝이 구부러진 갈고리를 시체의 코로 넣어 사람 머리의 뇌부터 제거 시킨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무진의 액체를 뇌에 집어넣고 이어 내장을 제거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심장은 생명을 상징하기에 그대로 두었다고 합니다.
내장을 꺼낸 자리는 밀기름, 밀랍, 나트론, 껌으로 혼합된 모래와 톱밥 등을 채워 넣고 모양을 다듬는다고 합니다. 그런 다음 나무진이 스며든 아마포 붕대로 시체를 감는데 영생을 바라는 부적을 끼워 넣어 길이만 수 백 미터 되는 붕대를 약 2주일 동안 감는다고 합니다.
이집트의 투탕카멘 파라오의 미라에서는 143장의 부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같은 허황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간은 죽음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그토록 꿈꾸었던 영생의 모든 인간적 노력은 수포로 끝난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성 바오로는 인간이 도무지 풀 수 없고, 이길 수 없었던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확신에 차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1코린 15, 20)
나아가 베드로 사도는 영원한 생명인 구원은 예수님에게서만, 그분 이름 밖에 없다며 최고 의회에서 증언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 우리가 구원 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 밖에 없습니다.”(사도 4, 12)
복을 받은 이들
유한의 인간이며, 모든 것이 불완전한 우리에게 가장 완전하시며 무한하고 절대 전능인 주님께서, 호령하시는 임금이 아닌 사랑과 용서와 가장 겸손하신 인자의 아버지로 옥좌에 앉아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교회는 오늘을 그처럼 감격과 고마움이신 주님을 온 우주의 왕으로 모시는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는 권력을 휘두르는 세속의 막강한 임금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주님을 멀리하고 세상 것들에게 더 많은 정신과 마음을 빼앗겼다면, 그 모든 세상 것들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줄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을 내 삶의 중심으로 모셔야 한다는 뜻이 더 큽니다.
더구나 교회의 전례력으로 이 해를 마지막으로 보내고 있는 때에 세상 종말과 내 삶의 끝을 생각하여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원의 것이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네 삶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선택하게 만듭니다. 주님께서도 오늘 그 마지막 때에 우리들 가운데 양과 염소를 갈라 선택하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축복과 저주의 선택 조건은 아주 간단합니다. 참된 왕이신 주님께서는 결코 옥좌에 앉아 계시지 않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도처에 계십니다. 그 주님께서는 굶주린 자의 모습으로, 목마른 자의 모습으로, 나그네와 헐벗은 자, 병든 자와 감옥에 갇혀있는 자의 모습으로 우리들 곁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에서 가장 비천하고 불쌍한 사람, 소외되고 억눌린 자의 모습으로 늘 우리 곁에 있는 그들이 당신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 같은 모습의 주님을 우리가 세상에 살 때 얼마나 많이 만나 뵈었는가가 축복과 저주의 선택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위한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영생을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왕이신 주님을 만나게 되면 영생을 향한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을 고대하며 준비하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지금 여기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축복과 저주, 생명과 멸망의 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자유이지만, 선택에 따른 상벌은 각오해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 마지막 날 주님께 축복의 말씀을 듣도록 살아야 합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25, 34)
가난한 이들의 왕이신 예수님 "
- 이기양 신부-
구둣방을 하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노인은 자기는 살만큼 살았고 이제는 하느님 나라에 잘 가는 것만이 유일한 소망이라고 늘 생각했습니다. 노인은 죽기 전에 예수님을 꼭 한 번만 뵙게 해달라고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한 덕분인지 노인이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예수님이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내일 내가 찾아가겠노라."
꿈을 깬 노인은 어찌나 기쁘고 신바람이 나는지 새벽부터 온 집을 쓸고 닦으며 부산하게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침부터 눈이 빠지게 예수님을 기다렸지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서 저녁이 다 됐는데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 날도 찾아온 사람은 어김없이 헐벗은 거지, 동냥 나온 굶주린 모자, 앞 못 보는 소경, 그리고 몇몇 손님이 전부였습니다. 기다리다 지친 노인은 "아유, 그럼 그렇지. 아무리 꿈속이라지만 예수님이 내게 오실 리가 있겠나. 개꿈이었나 보네"하며 무척 실망스러워했습니다. 그날 밤 하루 종일 긴장 속에 지낸 노인이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는데 또 꿈속에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을 보자 노인이 대뜸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니, 예수님, 오늘 저에게 오신다고 약속하시고선 왜 오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지요.
"무슨 소리냐? 내가 오늘 세 번이나 너를 방문했는데… 한 번은 거지의 모습으로, 또 한 번은 굶주린 모자의 모습으로,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은 소경의 모습으로 말이다."
오늘 복음 말씀 그대로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며 만나고 싶어하고 예수님 말씀을 한 마디라도 더 듣고 싶어 하며, 천국에 가고 싶은 열망으로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루에도 수없이 마주치는 거지들, 인간다운 삶을 외치다가 감옥에 갇힌 사람들, 치료비가 없어서 병원에서 쫓겨난 사람들, 학교에 가서도 한 끼 먹을 것이 없어서 물로 배를 채우는 결식아동들, 그들이 바로 당신이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들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왔었노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해 주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너무나도 나 중심적이고 이웃에게 배타적이며 물질주의에 젖어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참으로 편치 않은 말씀입니다. 우리시대 성향과는 전혀 다른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웃을 위한 선행만이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분께서 만드신 심판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사실입니다. 죽은 후에 우리가 심판을 받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기준은 소외받고 힘든 이에게 얼마나 위로를 주고 나눠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불편해도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모습은 이런 나눔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세상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그에 걸 맞은 준비를 하면서 살아가십시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 사람들이 바른 준비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노후대책에 관심이 많지요. 노후를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고 건강해야 한다면서 열심히 준비합니다. 물론 노후를 위한 준비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한 준비가 그것입니다. 노후를 위해서는 몇 억을 준비했지만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가난한 이웃을 위한 나눔의 통장이 비어 있다면 그 사람은 미신자들과 다름없는 삶을 산 사람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경고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그리스도는 우리 왕이십니다. 그분의 왕국은 오늘 복음 말씀을 실천하는 자에게만 열려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특히 어려운 이웃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나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홍금표 신부-
제목이 생각나지 않지만 톨스토이의 단편집에 보면 이러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열심한 구두방 노인이 매일 한가지 소원을 가지고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의 내용은 죽기 전에 단 한번만이라도 예수님을 뵙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간절한 기도 때문인지 어느 날 할아버지는 놀라운 꿈을 꾸게 됩니다.
예수님이 내일 할아버지를 찾아 갈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다음날 할아버지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서두릅니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 저녁이 지났는데도 예수님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찾아온 사람은 불쌍한 거지 청년과, 과일을 쏟아 당황하는 상인, 그리고 굶주린 모자가 그 구두방을 방문하였을 뿐입니다. 할아버지는 매우 실망한 채 잠자리에 들고, 다시 꿈을 꾸게 됩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이 다시 꿈에 나타났습니다. 할아버지는 화가 나서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느냐고 따집니다. 예수님은 웃으면서 당신이 오늘 세 번이나 할아버지를 찾아갔노라고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의 모습이 구두방을 방문했던 불쌍한 거지로 과일 장수로 그리고 불쌍한 모자의 모습으로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권자임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내면서 복음으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특별히 와 닿는 부분은 축복 받은 사람들에게 하시는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라는 말씀과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최후 심판의 결정적 기준입니다. 그것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자비, 마치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웃사랑의 정신이 바로 최후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여기 있는 형제들 중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와 동일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인간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불가분의 관계가 드러납니다.
어떻든 이 두번째 사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가난한 구체적인 한 개인과 동일시하신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하면 뭔가는 모르지만 우리와는 확연히 다른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이 누릴 수 없는 영광과 엄위, 찬란함과 화려함을 가지신 초월적인 분, 우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세계에 사시는 분으로 여깁니다.
물론 이 사실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초월적인 분으로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삶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잃어버릴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초월적인 분이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단지 그분은 초월적인 분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분은 우리의 찬양과 공경의 대상으로만 머무르게 되고, 이제 우리에게는 그분과의 사랑을 주고받는 일보다는 그분을 섬기고 숭배하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복음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특별히 가난한 이들과 동일시하심으로 초월자이면서 동시에 우리 인간세계에 내재하시고 우리 인간과 깊은 연대를 가지고 계신 분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것은 신앙의 핵심인 인간에 대한 살아 있는 사랑의 실천의 중요성을 보여줌으로써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균형 잡힌 삶을 우리에게 요구하고자 함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숭배와 흠숭, 찬양 속에서 만날 수 있는 분이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똑같이 만날 수 있는 분이요, 영광의 세계에서만 거처하시는 분이 아니라 목마르고 헐벗고 외로움을 느끼는 구체적인 한 개인과 깊은 사랑의 유대를 맺고 있는 분이요, 전례적 공경만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구체적인 한 인간에 대한 사랑도 요구하시는 분, 이 바로 우리가 신앙하고 주권자로 고백하는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목마르고 배고파하고 외로워하는 예수님을 우리 삶의 자리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족들의 얼굴에서, 그리고 우리 형제 자매들과 특별히 고통받는 이들의 모습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물론 사랑의 실천이 계산적이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분을 의식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삶은 분명 한 단계 성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예수님의 담화는 참행복 선언(5,3-12)으로 시작하여 최후의 심판을 내다보며 끝납니다. 마지막까지 이웃 사랑에 초점을 맞추면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맡겨진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십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이 드러났습니다.(7,28 이하; 8,8 이하; 9,6; 21,23 이하) 25장의 이 심판 대목에 이르러 예수님의 전권은 정점에 이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31절) ‘영광·천사·옥좌’는 하느님의 현현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배와 왕권과 존엄을 위임받은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최후의 심판을 얘기하지만 그다지 호기심을 끌지도 공포를 불러일으키지도 않습니다. 미래에 대해 꾸밈없이 전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완성에 이를 수 있고, 또한 어떠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리석고 미련하게 우리의 능력과 힘을 낭비할 것인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를 당장 찾아 나설 것인지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32절) 팔레스타인에서는 양과 염소를 함께 기르다가 밤이 되면 목자가, 따뜻한 곳을 필요로 하는 염소를 양과 갈라놓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런 구분이 제물로 바칠 새끼 염소를 다른 가축들에서 골라내는 작업이라고 해석합니다. 어떻든 심판은 이렇듯 하나의 구분 작업입니다. 선한 자와 약한 자들로 이루어진 교회 역시 이런 구분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갈라놓기 시작하십니다. 당신이 정하신 기준에 따라 판결을 내리십니다.
그 기준이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자신과 동일시하십니다. 정작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도 원하지도 않으십니다. 병들었을 때 병을 고쳐주거나 감옥에 갇혔을 때 풀어주라는, 어렵고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마음만 있으면, 조금만 애쓰면 도울 수 있습니다.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운명에 동참해 주길 바라십니다. 재물이나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열려 있고 공감하는 자애로운 마음을 원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40절) 예수님은 가까운 사람들을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순명하는 이들을 형제라고 부르셨습니다.(12,48-50) 이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부활하신 뒤에는 제자들을 형제라 부르십니다.(28,10) 예수님은 보잘것없고 나약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 뒤에 서 계십니다. 그들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도움을 청하십니다. 우리는 단지 한 사람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예수님과 관계하는 것입니다. 각자 안에 계시는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영원한 품위를 지녔고 무엇으로도 평가할 수 없는 가치를 지녔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일(육화)의 절정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34절) 예수님이 오른편에 세운 이들은 열린 눈과 연민의 정으로 세상을 산 사람들입니다. 단지 곤경에 처했기 때문에 그를 도왔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도움의 대가가 무엇인지, 돌아올 이익이 어느 정도인지에 몰두하지 않았습니다. 이웃의 필요를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다른 이의 삶을 북돋아 준 그들의 노력은, 삶의 가치와 무가치를 결정하시는 예수님께 완전히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왼편에 세워진 이들은 하느님 면전에서 추방됩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41절) ‘영원한 불’이란 하느님의 축복과 생명에서 제외되어 겪는 고통입니다. 그들은 인자하신 아버지의 공동체에서 살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기주의자들과 좌절과 증오에 가득 찬 이들로 이루어진 무리에 떨어집니다. 이러한 결정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것이 됩니다.
본문 전체에서 후렴처럼 반복되는 자선 행위는 결코 영웅주의에서 비롯하지 않습니다. 남을 도울 때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마음, 자신을 훌륭한 사람으로 내세우고 싶은 마음, 자신의 결점을 봉사를 통해 메우려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선행을 베풀더라도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나 봅니다. 도움이란 다른 사람을 도움 받을 이로 낮추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품위를 발견하도록 일으켜 세우는 일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웃에 계속 관심을 가지라는 가르침이자 도전입니다. 물론 모두를 돕는 것은 무리입니다. 자아도취적 기만을 멀리하고 이웃을 형제와 자매로 존중하는 것이 이웃 사랑의 첫걸음입니다.
우리가 언제 하느님을 몰라뵈었고 언제 지나쳤는지 하느님 앞에 가면 알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앞에 전전긍긍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심판은 모든 것의 정체를 벗기고 본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이 될 것입니다. 심판은 진실만을 보여 줄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손에 넘겨져 인간의 심판을 통과하셨습니다.
새벽을 열며
제가 중학생 때, 저희들 사이에 인기 있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라디오 만들기였습니다. 전파사 같은 곳에서 ‘라디오’ 키트라는 것을 팔았는데요, 그것을 구입해서 직접 납땜도 하면서 만드는 것이지요. 그래서 정말로 소리가 나면 얼마나 신기하고 신이 났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번은 친구로부터 라디오 회로도를 하나 얻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전파사에 가서 그 회로도에 맞는 부품들을 모두 구입하여 집으로 달려갔지요.
조립 도구들을 꺼내들고서 정말로 정성껏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조립을 마친 뒤에 테스트를 겸해서 전원을 넣었는데, 소리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소리가 나지 않는 이유를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고장을 많이 일으키는 부품부터 고장을 잘 일으키지 않는 부분까지 꼼꼼히 보았습니다. 하지만 전혀 문제가 없었어요. 마지막으로 가장 값이 싼, 당시에 하나에 10원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다이오드를 검사하다가 그 중 한 개가 거꾸로 붙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교체하자 정상적으로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10원 밖에 안 되는 이 싸구려 다이오드가 소리를 내지 못하게 했던 주인공이었던 것입니다. 싸고 비싸고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싸구려라고 할지라도 제대로 끼워지지 않는다면 전체적으로 작동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지요.
사실 우리들은 작고 힘없는 것들은 하찮게 여기는 못된 습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위의 작고 초라해 보이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그들도 이 사회를 정상적으로 굴러가게 하는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즉, 앞선 다이오드처럼 그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또 자기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 전체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나의 이웃 하나도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최후의 심판 모습을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행동한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들 역시 주님의 자녀이며 주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기에, 그들에게 하는 것이 바로 주님께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은 과연 어떤가요? 앞서도 말했듯이, 이 세상의 관점으로는 보잘 것 없다고 판단하면 무시하고 하찮게 여길 때가 얼마나 많았던지요?
최후의 심판의 자리에 선 내 자신을 떠올려 봅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주님으로부터 어떤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요? 혹시 이 세상의 가치로 비싸다는 것만을 소중하게 여겨서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교회력으로 오늘은 일 년을 다하는 마지막 주일이며, 다음 주일에는 새로운 해인 '나'해가 시작하는 대림 제1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렇게 올 한 해를 마감하는 오늘, 우리는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있는 우리 자신을 떠올리면서 지금까지 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올 한 해 어떻게 살아왔는지 되돌아 봅시다.
빠다킹 신부
그리스도 왕 예수
-강영구 신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대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왕)입니다.
높은 곳 하늘에서 낮은 곳 땅으로 내려오셨기에 왕입니다.
예수님은 섬김 받기 위해서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되신 분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임마누엘이 되셨습니다.(마태1,23)
그분이 차지하는 낮은 자리는 섬김 받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섬기는 하느님이지 섬김 받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임마누엘이 섬기는 작고 보잘것없는 생명도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노자(老子)는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 故能爲百谷王.
“강과 바다가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 낮추기를 잘하기 때문에,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됩니다.”
골짜기 물들이 큰 바다로 흘러들 수 있는 까닭은
낮은 곳에서 모든 골짜기를 섬기는 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높은 곳에 머물면 작고 보잘것없는 형제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낮은 곳에 머물면 작고 보잘것없는 형제도 크고 높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 왕 예수님의 왕도(王道)는 섬김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基督人-크리스챤)은 그리스도 왕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섬김 받는 사람입니다.
그분으로부터 섬김 받기 때문에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된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왕다운 사람(그리스도인)입니다.(一明)
부르심
-백광현 신부 -
저는 군에서 제대한 후에 세례를 받은 늦깎이 신자입니다. 군에서 개신교회에
몇 번 나간 적이 있었는데 목사님이 세례를 권유했지만 받지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믿는 자는 천국이요 믿지 않는 자는 지옥행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착하게 산 사람이 하느님을 모르는
환경에서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지옥에 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 발로 걸어 간 성당에 들어설 때
본당 신부님이 강론 중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때 ‘비록 신자가 아니지만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구원에 가까이
있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미사가 끝난 후 예비자 교리를 받고 싶다고 했을 때 교리가 이미 한 달 전에
시작되었으니 다음 교리에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난 성당과 인연이 없다며
뒤돌아오는데, 한 자매가 뛰어 나와 신부님을 만나고 가라고 했습니다. 신부님은
허락해 주셨고 그 후에 세례를 받은 후, 성소를 받아 수도회에 입회해 이렇게
사제가 되어 떨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자매님의 작은 배려가
아니었다면, 다시 하느님을 찾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의 세심한 배려가 한 인간을 구원한 것입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최금자(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
◆로마역 가까이에 있는 성모 대성당 맞은편 길가에는 안토니오라는 나폴리 출신의 노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돈이 생기면 음식보다 술을 사 마시고 술에 취해 길거리에 쓰러져 자곤 했습니다. 나는 기숙사가 그 근처에 있어 그가 누워 있는 길을 수시로 지나가곤 했습니다. 오랫동안 몸을 씻지 않아서 그에게는 역겨운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행인들은 그가 풍기는 냄새와 모습에 놀라 황급히 그 자리를 피해 지나갔습니다. 나는 왠지 모르게 그에게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안토니오를 도와주는 것을 기숙사 친구들이 알고부터 위험하니 가까이 하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외면할 수가 없었고 학교에서 간식으로 먹으려고 싸온 빵을 그에게 주곤 했습니다. 종종 그를 데리고 근처 바에 가서 커피와 빵을 사주곤 했는데, 하루는 바 주인이 영업에 방해가 되니 다시는 오지 말라며 면박을 주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몹시 민망했지만 상처받을 안토니오를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습니다. 나는 주인에게 “공짜로 달라는 것도 아니고 돈을 내고 사먹는데 왜 그러느냐?”고 따졌습니다.
그해 가을, 다른 지방에서 여름방학을 보내고 9월에 기숙사에 돌아오니 친구 페네시아가 안토니오가 뉴스에 나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뉴스에 따르면 로마역 근처에서 노숙하던 한 남자가 더위에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안토니오가 노숙하던 곳을 지날 때마다 슬픈 눈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던 그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받는 작은 불편 때문에 고통받는 이웃에 대해 무관심과 무례함을 일삼을 때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 자신의 불행한 처지 때문에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왜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했을까요? 사회의 약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로는 삶을 변화시킬 수 없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있음을, 그들에게도 인간의 존엄성이 있음을 상기시키시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우리 사회가 강자에게는 너그럽지만 약자에게는 무자비함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어야 함을 알려주십니다.
온 우주의 왕이신 그리스도
-경규봉신부-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우주의 왕이심을 경축하고,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기뻐하며, 세상이 왕이신 그리스도의 통치로 인하여 새롭게 되도록 기원하는 축일이다. 교황 비오 11세는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좀먹는 무신론과 세속주의를 경계하고 왕이신 그리스도의 통치권이 개인과 가정과 사회 및 전 우주에 두루 미치고 있음을 강조하는 뜻에서 이 축일을 제정하였다(1925년).
교회는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내는데, 이는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향해 수렴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뜻대로 이루어짐을 뜻한다. 사람은 누구나 왕이 되고 싶어 하지만 왕이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이시며, 자신이 심판관이 되고 싶어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심판하시는 심판관이 되신다. 그래서 교회는 최후 심판에 관한 복음을 읽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왕이시며 심판관이심을 드러낸다. 왕이며 심판관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종말의 때에 영광을 떨치시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시고 오실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실 것인데,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그렇게 갈라놓으실 것이다. 그리하여 양은 오른편에 서도록 하여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이미 하늘나라를 준비하셨다. 그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 전부터 당신 나라에 들어오기를 준비하시며 기다리셨다. 그런데 그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다름이 아니라 임금을 섬겼기 때문이다. 임금을 섬길 줄 모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섬긴 사람들이 임금인줄 전혀 몰랐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의 믿음에 따라 행했다(야고 2,20-26).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따뜻하게 맞이했다(창세 19,1-2; 출애 23,9; 신명 10,18).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고 돌보아주며 찾아감으로써 자신들의 믿음을 실천했다. 그런데 그처럼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 왕이신 그리스도를 돕는 것이었으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곧 의인이다. 진정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은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을 돌보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은밀하게 하는 것이다(마태 6,1-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지만 사람이 되셨다(필립 2,6-8). 하느님이 인간이 되실 정도로 인간을 소중히 여기셨다. 인간을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은 인간이 당하는 여러 가지 고통과 아픔까지도 소중히 여기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 본질적으로 인간의 연약한 한계 아래 머무시면서 그 속에서 아픔과 고뇌를 맛보시었다(마태 8,17; 히브 4,15).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소외당한 사람, 헐벗고 굶주린 사람, 고통 중에 신음하는 사람들과 당신 자신을 일치시키시어 그들과 하나가 되시고, 그들의 위로자요 보호자가 되어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과 하나가 되고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도 고난당하는 사람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마태 22,34-40; 히브 13,2).
반대로 저주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 것이며, 그분과의 관계가 영원히 단절될 것이다. 의인들을 위하여 하늘나라가 창조 이전부터 준비되었듯이 악마와 그 졸도들을 가두기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이 있으며, 저주받은 자들은 그 불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하고 교만하여 타락한 삶을 사는 사람은 영원히 꺼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고통을 주는 심판의 불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저주받은 사람들은 악한 일을 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선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다. 남에게 비록 악행을 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저주의 대상이 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태만과 무관심은 크나큰 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적극적으로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자세가 요구된다. 이것이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마태 19,19)는 주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삶이다.
저주받은 자들은 자신들이 왜 저주를 받았는지 몰랐다. 그들은 이웃에 대하여 무정하고 무관심했던 자신들의 악행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들은 주님을 만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주님을 돌보아 드릴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리고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헐벗고 굶주리며 나그네가 되어 목말라하며 감옥에 갇힌 자와 동일시하셨기 때문에 놀랐다. 만약 그들이 보잘것없는 형제들을 대하는 태도 여하에 따라 영원한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보잘것없는 형제들을 온정과 사랑으로 대했을 것이다. 실로 하찮게 보이는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무신경한 자들은 그들의 형제이며 친구이신 예수님을 무시하고 그분의 뜻을 철저히 짓밟는 자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들은 영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영벌은 영원한 징벌을 뜻하며, 이 벌은 지독한 고통이며, 최후 심판으로서의 형벌이다(마태 18,8; 2테살 1,9; 유다 1,13). 의인들이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지속되는 지복의 생명, 부활의 생명(1테살 4,14-17)을 누리는데 반해 악인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가 영생을 누리는가 아니면 영벌을 누리는가 하는 것이 이 지상에서의 짧은 생애를 통해 결정된다. 이 지상에서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이들 안에서 주님을 보고,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에 따라서 영생인가 영벌인가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짧은 인생을 통해서 영생이 결정됨을 생각하고 이 세상의 삶을 소중히 여기자. 우리 모두 사랑을 가득 담고 살아감으로써 하느님의 영원한 행복과 생명을 누리는 신앙인이 되자.
- 서 공석 신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왕이라 일컬었던 것은 그분이 과거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 구원자였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은 그분이 열어놓은 구원의 새로운 삶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우리가 세례 받는 것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로마 6,4)라고 가르치십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잘 지키고 성전에 잘 바쳐서 하느님으로부터 축복받는 것이 구원이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은 세례로써 과거의 삶에 죽고 예수님이 보여 주신 구원의 새로운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옛날에는 나라에 왕이 있었습니다. 백성은 왕의 나라에서 왕이 공포한 법을 지키며 왕이 제시하는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제시한 삶을 삽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는 예수님을 왕이라 일컬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미사에서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몸이다,.. 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라는 말씀을 상기하면서 성찬에 참여합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예수님을 기억하고 배워서 그분의 삶을 우리의 것으로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신 그 대인관계와 그 생명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오늘의 세상에는 왕이 없습니다. 나라는 이제 왕의 것이 아니고 백성의 것입니다. 백성이 나라를 위해 일꾼들을 선택합니다. 백성은 임금님의 나라에서 황공하게 살지 않고, 자기 나라에서 당당하게 삽니다. 아직도 왕이 있는 나라들이 있지만, 이제 왕은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 의전을 위한 상징적 인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옛날 왕이 당연히 있던 시절에 ‘그리스도 왕’이라는 칭호가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칭호를 축일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린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최후심판 이야기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발생한 구원의 삶이 지녀야 하는 가치관을 설명하는 비유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이야기에 열거된 사람들은 굶주린 이, 목마른 이, 나그네, 헐벗은 이, 병든 이, 감옥에 갇힌 이들입니다. 한 마디로 어려움에 처한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쉽게 외면당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은 그런 사람들을 영접하고 그들에게 도움이 되게 살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그런 사람들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하는 새로운 삶은 외면당한 이웃들 안에 하느님을 보고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사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별의 벽을 만드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십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말하면서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유대교는 굶주리는 이, 헐벗은 이, 병든 이, 감옥에 갇힌 이는 모두 하느님이 버렸다고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이 그런 이들과 함께 계신다고 믿으셨습니다. 인간은 항상 자신의 우월함을 찾습니다. 인간은 모든 구실을 동원하여 자기의 우월함을 추구하고 그것을 과시하면서, 자기 삶의 보람을 느끼려 합니다. 먹을 것을 풍요롭게 가진 사람이 굶주리는 사람 앞에, 옷을 잘 입은 사람이 헐벗은 사람 앞에,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 앞에 우월감을 느낍니다. 바리사이, 율사, 제관들은 율법과 제사의례를 구실로 많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면서, 자기들 스스로는 의인이라고 우월감을 가졌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월감에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가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스스로 우월감을 가질 수 없는, ‘이 보잘것없는 형제 중에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당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우월감을 가질 수도 없고, 다른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지도 못합니다. 오로지 다른 사람들의 연민과 봉사가 그들을 인정합니다. 그들은 연민과 봉사의 은혜로움을 알고 있습니다. 연민과 봉사는 예수님이 실천해 보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계명과 성사에 충실하면, 하느님이 축복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재물도 주고 권력도 주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축복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나 한 사람을 축복하시지 않고 모든 이를 축복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극소수의 사람을 축복하여 많은 사람이 박탈감을 느끼게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최후만찬에서 당신의 죽음이 “많은 사람을 위한”(마르 14,24)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받은 축복이 온 세상을 위한 축복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은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 우리의 우월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우리가 연민과 봉사를 실천하는 계기가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십니다. 부모는 자녀 모두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실천하신 것은 많은 사람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만 혜택을 받아 그것으로 그들이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실천하신 병 고침과 용서는 유대교가 만들어 놓은 사람 차별을 없애는 연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위한 연민이고 봉사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우리도 인간 차별을 없애는 연민과 봉사의 구체적 몸짓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이를 돌보아 주고, 감옥에 갇힌 이를 찾아주는 일은 우리 인간이 만들어 놓은 차별을 없애는 축복의 몸짓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린 새로운 삶은 이런 몸짓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연민과 봉사를 자기도 실천합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그 몸짓들을 구체적으로 그려 보인 것입니다. 복음은 법이 아니고 강요도 아닙니다. 법과 강요는 우리 삶의 향기로움을 빼앗아갑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구원의 새로운 삶, 향기로운 삶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인간이 만든 차별을 하느님까지 동원하여 당연시하지 않고, 연민과 봉사의 실천이 살아서 움직이는 하느님의 향기가 있는 삶으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
마지막을 준비하는 마음
-서경윤 신부-
「그래서 이 자들은 영원한 벌을 (받으러) 갈 것이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러) 갈 것입니다」(마태 25,46).
겨울을 재촉하는 늦 가을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가운데, 이미 깊어버린 가을의 황량한 들판과 떨어져 비에 젖어 흐트러진 낙엽이 뭔가 사람의 마음을 허전하고 쓸쓸하게 합니다. 답답한 마음에 훌쩍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우연히 틀어 놓은「섹스폰」곡 모음의 애절한 가락들이 분위기를 한껏 돋구어 주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교회의 전례주년도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마지막이란 단어는 그 자체로도 사람의 마음을 심란하고 불안하게 합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마지막 주일이지만 그 때마다 또한 반복해서 지난 1년을 후회하고 똑같은 결심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지금이 불경기라고들 합니다. 하기는 불경기란 어떤 분이든 언제든지 있어 왔고, 또 그렇게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다른 모양입니다. 회사마다 무슨 기구 축소니, 명예퇴직이니 하는 말들이 쉽게 나오고, TV는 30․40대 퇴직자들의 처절한 구직 현장을 방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TV드라마도「가을 소나타」나「아내가 있는 풍경」등 40․50대의 명예 퇴직자들을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봉급 생활자들은 이런 것을 보고들을 때마다 남의 일 같지 않아 가슴이 두근거리고, 자기도 언제 회사를 그만 두게 될 지 불안하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명예퇴직이 꼭 불운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군인들이 계급 정년이나 연령 정년에 걸려서, 30대나 40대에 제대한 사람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군인들은 40․50대에 모두 예편을 합니다. 불안했던 마음이야 그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래도 대부분 성공적으로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번에 수능시험을 치른 학생들은 그 결과를 기다리며 약간은 느긋해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첫 지원에서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수험생들이 아직도 해방감에 젖어 들기는 이릅니다. 여전히 많은 학생들은 밤잠을 줄이고 독서실을 찾아야 합니다. 입학시험에 합격 불합격 판정을 불안해하며 기다리는 심정은 누구나 경험해 봐서 다 잘 압니다. 그래서 합격자 발표 현장은 환호와 좌절이 극명한 장소가 됩니다. 그러나 대학 입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닐 뿐 아니라, 학창생활의 전부도 아님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대학에 떨어졌기 때문에 전화위복이 된 경우도 흔히 있습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여러 가지 마지막을 겪게 됩니다. 무엇이나 시작한 것은 마감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항상 새로운 시작이기도 합니다. 역시 연중 마지막 주일도 지나고 나면 새로운 전례주년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중에
도 이 생에서는 최후의 마지막이 있습니다. 다른 마지막은 재도전의 기회가 있지만 이것만은 재도전의 기회가 없습니다. 생을 마감하는 죽음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새로운 생의 시작을 믿습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분명히 내게도 닥칠 마지막이건만 마치 나는 그것과 상관이 없는 양 살아갑니다. 직장을 떠나게 될까봐 불안해하는 회사원 같지도 않고, 대학에 지원해 놓은 학생들만큼 조마조마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분위기에 따라 죽음을 생각하면 약간 심란할 정도입니다.
창밖에는 계속 가을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습니다. 감나무의 잎새는 모두 떨어지고 빠알간 감알만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비를 맞은 감은 더 진한 색깔을 드러내는 듯하고 땅에 떨어진 잎사귀는 우중충한 색깔이 되어 젖은 쓰레기처럼 되였습니다. 내일이라도 비가 그치고 햇살이 나면, 주인은 어지럽게 뒹구는 낙엽을 비로 쓸어 불태워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감알은 조심스레 따서 바구니에 담아 집안으로 들여갈 것입니다. 그 감은 먹은 사람의 살과 피가 되어 같은 생명을 누리며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세상을 함께 살고서도 악인과 의인이 갈라지듯이, 한 나무에 달렸던 감과 잎이 갈라지는 순간에 나는 감의 신분이 될지, 아니면 낙엽의 신세가 될지,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에는 침이 바짝 말라 버렸습니다.
지키고 사는 명령
-김현준 신부-
교회 전례력으로도 일년의 마지막 주일인, 마지막 때의 심판이야기를 복음으로 듣는 주일이며, 내게도 '생활 속의 복음'을 쓰는 마지막 주일이기도한 오늘, 좋아하는 '옛날 먼 옛날에'라는 동화를 함께 듣고 싶다.
어느 날, 한 고관 나리가 어떤 곳을 지나다 발길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장한 병졸이 엄숙한 얼굴로 파수를 보고 있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근처는 허허벌판일 뿐 중요하다고 생각될 만한 건물은커녕, 물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리는 파수병한테 물었다. “자네, 무엇을 지키고 있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파수병은 부동자세로 대답했다. “예, 저는 오로지 상관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고관나리는 상관을 찾아가 물었다. 그러나 그 상관 역시 더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명령에 따를 뿐이라고 했다. 나리는 계속해서 명령을 내렸다는 높은 곳을 찾아가 보았으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오로지 빈 명령만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는 바뀌어 옛날 먼 옛날에 큰 성이 있었고, 그 성안에는 아름다운 꽃밭이 있어 여러가지 화려한 꽃이 만발하였다. 어느 날 아침 꽃을 좋아하는 왕이 꽃밭 사이를 산책하다가 후미진 곳에 핀 아주 작은 낮선 꽃을 발견하였다. 왕은 이 가련한 꽃이 마음에 들어 혹시나 짓밟힐까 염려하여 파수병을 세워 이 꽃을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세월이 흘러 세상은 변했다. 옛 성은 무너지고 아름다운 꽃밭은 허허벌판이 되었다. 그런데 빈 명령만이 되풀이되고 있었던 것이다. 연중 마지막 주일이며 그리스도왕 대축일인 오늘의 복음말씀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내용으로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이자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공적 가르침의 총 결산인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는 말씀이, 오늘 우리 시대의 ‘나'에게 지켜지는 가르침인가?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는 ’빈 명령'인가?
우리는 혹시 이 가르침을, 무엇을 지키는지 그 목적도 모르고 그냥 엄숙한 얼굴로서 있기만 하는 파수병처럼 그저 지켜보고만 있지 않는가?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의 실천적 행동을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신 “나에게서 떠나라, 그리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는 그리스도왕의 명령도 빈 명령일 수 없다,
그렇다. ‘사람의 아들'을 알아 뵙는 일과 '여기 있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알아보는 일 사이에는 특별한 연관이 있다. 즉 대신관계(對神關係)와 대인관계(對人關係) 사이에는 특별한 연관과 상호작용이 있다. 인간의 근본은 하느님이며, 그 분과의 관계가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인간은 하느님을 인간들 사이에서 만나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최후의 심판 비유의 핵심은 바로 이 두 관계에서의 실천적인 행동이다. 세상 종말에 오실 그리스도왕이 어떻게 사람들을 심판하실지, 그 심판의 척도는 실천적인 행동, 즉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자비와 사랑의 행동이다. 우리 구원의 결정적 가치 기준이 어떻게 말했느냐, 어떻게 생각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행동했느냐라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 역사를 들추어보면 수많은 왕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였고, 지금도 대통령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이야기에서처럼 자신이 벌거벗은 줄도 모르고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값진 옷을 입은 양 착각하고, 보란듯이 거드름을 피우며 거리를 행차하면서 ’자기를 섬기라'는 크고 작은 임금님들이 많다. 순진한 어린이의 눈, 진실의 눈으로 불 때는 “야! 벌거벗은 임금님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왕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말․생각이 아닌 행동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그리스도왕은 사람을 좋아해서,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유다인의 왕(INRI)'이라는 억지 죄목의 명패를 달고,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자기를 섬기라'가 아닌 ‘여기 있는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잘하라’는, 다른 왕들은 흉내도 낼 수 없는 명령을 주셨다.
이 명령을 뒤집어 보면, 그리스도왕은 우리의 이웃 안에서, 가장 상처받기 쉬운 모습으로 현존하신다는 사실이다. 이 명령이 ‘옛날 먼 옛날에' 이야기에서처럼 빈 명령으로 되풀이되는 오늘의 현실이지만, 세월이 흘러 장면이 바뀌면, 바로 나의 마지막 이야기라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 살아오면서 내가 상처 주고 소외시킨 사람들을 한사람씩 떠올리며, 또 나를 상처 준 사람들을 떠올리며 용서하고, 용서받는 마음으로 주의기도 한번씩 바치면 어떨까, 그럴 때 빈 명령이 아닌, 지키고 사는 명령이 되지 않을까. 나에게 상처받은 사람이 바로 나의 그리스도왕이다.
누가 우리의 왕인가
-강길웅 신부-
교회는 연중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정하여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왕이시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실로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세속적인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으며 오히려 봉사하는 왕, 아픔을 나누고 사랑을 베푸는 왕으로서 가난하고도 비천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왕이야말로 왕 중의 왕이요 세상 모두를 다스릴 왕이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에 왕이 등장하게 된 것은 기원 전 11세기경의 일입니다. 그때까지 그들에겐 하느님만이 유일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위대한 모습을 보고는 하느님께서 왕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그 후에 등장되는 왕들은 모두가 백성을 실망시키는 왕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다윗'을 기대합니다.
‘새로운 다윗'을 소망하는 백성들의 기대는 메시아 신앙으로 발전되며 언젠가는 다윗처럼 자신들의 불쌍한 처지에서 해방시켜 복된 나라로 이끌어 줄 날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그런 왕은 등장되지 않았습니다. 모진 박해 생활과 식민지 생활에서도 하느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어 등장된 분이 예수님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믿었습니다. 다윗에 버금가는 훌륭한 왕으로서 새 이스라엘을 건설할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은 사람들이 원하는 그런 왕이 되는 것은 원치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해 조국을 식민지에서 건지고 굶주림에서 해방시키며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는 그런 현실적인 문제에서는 그분은 어쩌면 외면 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백성들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면 분명히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왠지 속 시원히 세속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병자들 치유요 그리고 설교로써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뭐 그런 소극적인 일뿐이었습니다.
유다는 그래서 예수님을 팔았으며 군중들은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분은 메시아가 아니요 메시아는 아직도 안 왔다고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 3차 중동 전쟁에서 다얀 국방상이 이스라엘을 6일 만에 승리로 이끌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얀을 일시 메시아로 보았다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속의 왕은 다 지나가는 것이며 왕권은 언제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아무도 반석 위에 자기 왕권을 영원히 간직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진정한 왕이십니다. 십자가 옆의 강도가 주님보고 왕이 되어 오실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천국 낙원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보통의 왕과는 다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우리의 왕이 계신 모습을 보게 됩니다. 굶주리고 헐벗으며 감옥에도 갇힌 병들고 비천한 인생들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 주시는 왕이며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만이 주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방향과 그 본질을 분명하게 바라보고 올바르게 걸어가야 합니다. 만일에 ‘왕'이라는 개념을 착각한다거나 어긋난 왕을 찾고 있다면 그는 벌받는 곳으로 쫓겨날 것입니다.
언젠가 ‘꽃동네'에서 자신도 불구자이면서 다른 불구자를 도와 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성한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와서 도움을 베풀면서 오히려 더 많은 도움을 받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기적이었고 천국이었으며 그리고 그것은 주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걷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는 그들 가운데 주님은 분명히 계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기 위해 ‘왕궁'을 찾는 모습을 봅니다. 교회 자체도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 ‘궁전'을 짓는 모습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가난한 자를 바라보고 병든 자를 바라보십시오. 슬퍼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고 죄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십시오. 바로 그들 안에서 주님이 여러분을 환영하여 당신 시민으로 받아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왕
-최기산 주교-
가치혼돈의 시대
요즘은 참 가치가 거짓 가치에 의해서 밀려나고 있다. 물질이라는 가치는 어느새 인간의 우상이 되어버렸다. 하느님도 신앙인의 마음 속에서 제2의 가치로 밀려나고 있다. 이제는 사랑과 진실, 자비의 고귀함도 제2의 가치로 여겨지는 암울한 시대가 되였다.
약 200여년전 조선의 유교 학자들이 불교의 절과 암자에 모여 천주교의 진리를 연구하고, 그 진리대로 살 것을 결의하였다. 그들은 예사 사람들이 아니었다. 당대의 내로라 하는 명망가요, 학자들이었다. 그들 중에 왕자를 가르치는 선생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 당시의 그들은 오늘날 우리네 식자들이 그리도 귀하게 여기며 탐구의 열을 높이고, 목청을 높이며 배워야 한다는 불교와 유교의 교리와 사상을, 참 진리인 하느님의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보다 못하다고 생각했기에 제2의 가치로 여겼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천주교 교리에 매료되었었다. 그래서 교리를 배우는 동안 교리대로 살았다. 그들은 새벽에 일어나 찬물에 세수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흠숭하는 예를 드렸다. 그들은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믿음의 확신이 있었으며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인류에게 오직 왕은 하나,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오로 사도처럼 “그리스도는 나의 생의 전부입니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선조들의 신앙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한편으론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일부 성직자, 수도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이 승방을 찾아가서 진리를 탐구하겠다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선을 하기도 하고, 하안거, 동안거를 하고 돌아왔음을 자랑하기도 한다. 거기 가서 피정을 한다는 사람도 있으니 참으로 세월이 많이 변했다.
또 그곳에 가면 마음이 안정된다느니, 피정다운 피정을 한다는 말을 하고 있으니 저승에 계신 우리 조상님들이 보시면 웃으실 일이다. 과거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우리보다 식견이 모자라서 천주교의 진리를 공부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고․감사하며,․타인들에게 전했을까? 우리의 선조들은 예수 그리스도 외엔 구세주가 없음을 분명히 알았고 그것을 믿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였기에 목숨도 기꺼이 바칠 수 있었다.
우리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우리의 주님, 나의 주님, 우리의 왕으로 모시는 일이다. 어떤 이들은 세계화, 토착화시대에 그게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진리는 하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참 신앙인인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 우리의 왕
왕은 누구인가? 전권을 가진 사람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전권을 가지신 분이고 나에게 전권을 가지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고 말하신 분이시고 “장차 쇠지팡이로 만국을 다스리실 분"(묵시 12, 5)이시다. 교회의달력으로 한해를 마감하는 오늘은 그리스도 오직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함으로써 흐트러진 우리의 마음을 다시 추슬러, 그리스도 좌에 무릎을 꿇는 날이다.
아시아 주교회의는 우리에게 있어서 메시아, 즉 구세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다시 강조 발표하였다. 지난 10월22일에는 유럽주교회의에 참석한 시노드 교부들이 최종 메시지를 발표하였다. ‘우리는 유럽의 희망의 복음을 기쁜 마음으로 선포한다'라는 제목의 메시지에서 “오늘날 온갖 형태의 고통과 불안, 죽음으로 우리들의 희망이 약해지고 있다. 우리는 인류와 역사의 유일하고 참된 희망인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선언했다.
복음의 메시지
그리스도,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시며 우리의 왕이시다. 우리의 왕을 제쳐두고 다른 왕을 찾아 헤매는 것은 모반이다. 그분은 사랑의 왕이시다. 이 세상의 왕들은 지배하고 권력을 휘두르지만, 그분은 사랑에 관한 심판만 하실 것이다. 종말의 날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랑을
실천한 대로 심판 받을 것이다. 그분은 사랑의 자(尺)로 재실 터인데, 길이가 짧은 사람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한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하는 말씀이다.
인간은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눈길을 돌리기보다. 잘난 사람에게 눈길을 한번 더 주고 잘해 주게 마련이다. 의인들은 연민의 눈으로 부족한 사람들을 늘 생각하고 그들에게 잘해 주었다. 그들은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잘해 준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연스럽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혹은 어떤 꿍꿍이속이 있었다면 모두 적어 놨을 것이다.
사랑이란 자신의 이익이나 어떤 목적을 위해서 남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인간이기에, 하느님의 모상이기에, 예수님께서 그들 안에 계시기에 무조건 베푸는 것이다.
가깝고도 먼 길
-정인준 신부-
기원 전 931년 이후 하나의 이스라엘은 두 왕국으로 갈라지는 불운의 역사를 맞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서로 갈라진 유다와 이스라엘 왕국은 각자 정통성을 주장하면서도 하느님 신앙에서 멀어지며 예루살렘 외에 지방산당들을 짓고 우상숭배에 빠지기까지 한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런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것은 백성을 잘못 이끈 왕들과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한탄한다. 그래서 예언자의 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된 목자를 잃고 헤매는 양들의 모습으로 비치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어 줄 참된 지도자인 목자를 목말라 하며 그 희망을 예언자는 전하고 있다. 그 목자는 양들이 입은 상처를 싸매주는 인자한 모습이면서도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려 줄 공정한 심판자의 모습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구약배경에서 예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세상 종말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신다. 그 때 주님께서는 양과 염소를 구분하시는 목자이시면서도 임금의 모습으로 오신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의인인 양과 악인인 염소를 가르는 기준조건은 심판관이 정해주는 것이 아닌 심판을 받는 각자가 직접 "사랑실천"을 통해서 마련한다는 점이다.
그 조건은 까다롭거나 차별된 것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있는 공평한 것이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할 수 있는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는 것,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는 것, 나그네 되었을 때에 맞아 주는 것,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는 것,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는 것, 그리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는 것'이라는 구체적인 점들을 들어 주님께서 설명해 주신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거리는 머리에서 가슴"이라는 말이 있다. 머리로는 주님의 말씀을 "타당하고도 지당하옵니다"라고 떠들면서도 막상 그 말씀을 실천하기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활에서 체험한다. 야고보 사도는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 입니다"(야고 2,26)라고 신앙인의 핵심을 찔러준다.
이제 우리는 연중시기를 마감하며 대림시기로 바뀌는 소중한 때를 맞고 있다. 성서주간이기도 한 이 의미 있는 한 해의 마감 길목에서 주님의 말씀에 더욱 맛들이며 그 믿음으로 소외된 내 이웃에게 한걸음 더 다가서며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을 새길 때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봉사와 사랑을 하시며 세상을 다스리시는 진정한 왕 이심을 고백하며 대림시기를 준비해야 하겠다.
그리스도께 합당한 신뢰와 사랑을
-조욱현 신부-
오늘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왕 대축일’로써 전례력을 마치는 날이다. 교회가 전례주년 마지막에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왕권이 전례적으로 영성적으로 전례주년 전체를 종합하면서 총체적인 묵상자료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오늘 전례의 의미는 진정으로 우리가 모두 우리의 ‘전부’이신 그리스도께 합당한 신뢰와 사랑을 드리며, 우리의 생활이 종합되어 그리스도의 신비에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제1독서: 에제 34,11-12.15-17: 너희는 나의 양떼이다
그리스도의 왕권이란 통치권과 지배권만의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긍정이며, 그분의 영광에 ‘우리를 결합시키는’ 그분의 의지이다. 즉 우리 모두를 초대하시는 ‘참여적’ 왕권이시다.
제1독서에서 ‘목자’라는 개념은 ‘왕의’ 품위로 나타난다.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목자이신 왕으로 드러내신다. 그러나 다른 왕들과는 다른 왕이시다. 즉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왕’이시다. 사랑의 왕권이지 지배의 의미나 착취의 의미가 아니다. 그분은 길 잃은 양떼를 찾으러 가시고 다친 양들을 돌보시고 보호해 주신다.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암시이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길 잃은 양을 찾으러 가는 “착한 목자”(요한 19,11-18)로 제시하셨다. 그러면서 당신의 양떼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과 헌신을 통하여 ‘왕권’을 행사하신 그분의 모습을 내다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랑의 왕권이라 하여 ‘심판’의 왕권마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말씀이 마지막 구절에 나타나고 있다(17절). 왕권에의 참여라는 구원을 위한 왕권이지만, 단죄할 수도 있는 왕권이다.
제2독서: 1고린 15,20-26.28: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는 하느님
바오로 사도께서는 그리스도의 왕권이 긴장과 싸움을 통하여 확보된다고 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보장된다고 한다. 그분은 ‘죽음’을 쳐 이기셨기 때문에 ‘왕’이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이 승리에 참여케 하시며 ‘새 아담’ 즉 새 인류의 영적인 머리이시다(21-22절). 맨 처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당신의 왕권의 승리에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부활한 첫 사람”(20절)이라는 상징적 표현은 지상의 첫 결실들이 나중에 얻게 될 수확의 ‘보증’이듯이 우리 부활의 보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왕권은 완성되지 않았다. 죽음이 아직 극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은 종말론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죽음을 이기신 후 모든 만물은 하느님의 직접적 절대 통치권 하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이 마지막 결정적 통치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사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 자신과 더불어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이다. 우리가 없다면 그분은 하느님께 바칠 ‘왕국’을 갖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께 속해있는 것 뿐 아니라, 그분과 함께 다스리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복음: 마태 25,31-46: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의 행위-최후의 심판의 기준
오늘 복음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왕’으로서 동시에 ‘심판관’으로서 드러내신다. 여기서 심판관이 주시는 ‘나라’는 당신을 충실히 섬긴 보상이며, 당신이 다스리시는 ‘왕권’이 있음을 의미한다(34절). “나라를 차지하여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다스리실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다스리시기를’ 원하신다. 함께 다스린다는 것은 역사 내에서 그렇게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분의 왕권은 갑자기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매일의 행위를 통해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분의 왕권이 드러나고 또 인간이 그 왕권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분의 최후의 ‘심판’의 기준에서 나타나듯이, 형제들의 괴로운 몸과 마음 안에 계신 그분의 ‘위격’에 행하는 사랑의 크기에 좌우될 것이다(35-36.40절).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들”이란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있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하는 문제와는 상관없다. 그들은 그저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 버림받거나 소외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바로 그들의 불행한 처지와 다름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구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목록들이다(이사 58,7; 토비 4,16 참조). 이제 예수께서는 여기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시고, 그것을 거절하는 행위를 준엄하게 다루신다고 하신다. 바로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지상생활에서 예수께서도 가난하셨고 당시 사회로부터 압박과 핍박을 당하셨으며 거부와 배척을 당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러”(요한 1,29) 오신 분으로 어디서든지 악을 고발하고 단죄하셨다. 그래서 불의를 당하는 사람들 편에 항상 가까이 계셨던 분이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재평가이며 모든 인간의 손상된 몸과 마음속에 원래 새겨져 있는 품위에 대한 재인식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 항상 그리스도를 위한 자리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분을 받아들일 때만이 인간의 품위를 진정으로 증진시킬 수 있고 인간의 모든 어려움과 원의를 해결해갈 수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현존하실 수 있도록 그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이웃을 통해서이다. 특히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이다. 바로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사랑을 거절하는 것은 바로 그분을 거절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당신의 삶을 통하여 ‘섬김’과 ‘십자가에 내어주심’에서 얻으신 것이다. 이 삶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그 ‘왕권’을 인간들에게도 참여하게끔 해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삶을 우리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영광의 나라에서 그분의 왕권에 참여하고 생명을 차지할 것이다. 이웃 안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 도우심을 청하자.
예수님을 따르는 길
-양승국 신부-
위기에 처한 여자 청소년들을 위해 불철주야로 뛰시는 존경하는 수녀님께서 체험하신 일입니다. 부모에게 외면당한 아이였을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도 셀 수도 없이 많은 상처를 받은 아이였겠지요. 아무리 기를 써도 그 상처가, 그 아픔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필요했던가 봅니다. 아이는 시설에 적응하지 못하고 가출을 거듭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한 울타리에서 생활하는 다른 아이들에게 미칠 악영향, 가출할 때마다 파생되는 심각한 문제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로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을텐데, 수녀님께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밤 열두시가 넘은 시각이었습니다. 가출한 아이에게서 수녀님을 찾는 전화가 걸려옵니다.
"수녀님, 저예요."
"응, 그래. 너구나. 지금 어디니?"
"좀 먼데요. 여기 ○○동이에요."
"괜찮아. 꼼짝 말고 거기 가만 있어라. 내가 지금 바로 갈게."
수녀님께서는 아이에게 왜 또 가출했는지 묻지 않으십니다. 왜 그 늦은 시각에 거기 있었는지도 묻지 않으십니다. 오직 기쁜 마음으로 데려오십니다. 그저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주십니다. 다시 한 번 새롭게 시작해보자는 말씀만 하십니다. 수녀님은 어쩌면 또 다른 돈보스코이십니다. 수녀님은 참된 사목자가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하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보여주셨습니다.
사목이란 세상 사람들이 사목자를 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향해 사목자가 다가서는 것입니다. 사목자가 세상을 향해 자신을 활짝 여는 것이 사목입니다. 참 사목자는 언제나 준비되고 열린 마음으로 기쁘게 잃어버린 양떼를 찾아나서는 사람입니다.
당장 사정이 딱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혹은 당장 거처가 필요한 사람들을 시설로 입소시키기 위해 이곳 저곳 문의를 하다 보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물론 대상자에 대한 정확한 신상파악도 중요합니다. 시설이 이미 적정 수용인원을 넘어서 어쩔 수 없는 경우도 많지요. 그러나 당장 너무나 다급한데도, 시일이 오래 걸립니다. 준비해야 할 서류도 너무 많습니다. 한마디로 너무 문턱이 높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곳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요. 말 떨어지기기 무섭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빨리 데려오십시오." "무척 상황이 딱하신 것 같은데, 사람이 우선 살고 봐야지요. 서류야 나중에 천천히 해도 되니, 우선 모시고 오십시오."
이런 대답을 들었을 때 정말 기분이 좋고 살 맛이 납니다.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아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하신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 번 한 가지 진리를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보잘 것 없는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휘청휘청 걸어가는 사람들, 그 사이에 현존하시며 절대로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복음서 전체를 한번 훑어보면 이 사실은 명백하게 입증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아주 드물게 고관대작 집에 초대도 받으셨지만, 거의 대부분 시간을 가난하고 소외받은 민중들 사이에서 지내셨습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주도권이나 기득권을 쥔 사람들 편이 아니라 고통 받는 백성들 편에 서셨습니다.
결국 현실적 눈으로만 바라본다면 '예수님=가난한 사람, 불행한 사람'이셨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사람'로 지칭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있다면 우리는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간 것입니다.
요한 23세 교황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린 교회가 돼야 합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문을 활짝 여는 교회가 돼야 합니다."
레르카로 추기경님께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영혼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조직, 정체성 그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소중한 보물입니다."
우리가 철저히 예수님을 추종한다면 결국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들 곁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
-김영수 신부 -
교회력을 따라 한 해를 살아가면 자연의 섭리를 따라 질서 있게 나의 삶을 준비하고 살아가는 여유와 세상의 소음 속에 살면서도 우리 삶 속에 함께 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깊이 느끼며 살 수 있는 은총을 누립니다. 위령성월과 더불어 맞이하는 연중 마지막 주일은 한 해 동안의 삶을 신앙 안에서 돌아보고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다가오는 새해를 차분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연중 마지막 주일에 우리가 묵상하는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은 복음 전체의 가르침의 요약이며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주님의 뜻을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최후의 심판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며칠 전에 수능 시험을 치렀던 수험생과 같은 마음으로 제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혹시 지나쳐 버린 주님의 모습은 없나 하는 조바심 때문에 제 고개는 연신 저의 삶의 모퉁이를 기웃거리게 됩니다. 시험의 답은 교과서에 있고 인생의 답은 삶속에 있듯이 신앙의 답은 주님께 있습니다. 신앙의 여정에서 주님을 만나지 않으면 신앙의 답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찾는 주님은 너무나 가까이 계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지나쳐 버리기도 합니다. 그분은 상본에 나오는 고정된 이미지로 오시는 분도 아니고, 당신의 이름을 밝히고 도움을 청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오히려 내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곳에서 누군가의 모습으로 나와의 만남을 계획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내 삶 안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얼굴로 때로는 가까이에서 때로는 멀찍이에서, 친근하게 혹은 냉담하게 내가 대한 사람들 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작품에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왔던 천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떨어져 사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각자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우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 함께 살아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걱정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랑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이며, 하느님은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은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이 세상에서의 삶을 결산해야 할 때를 맞이합니다. 심판은 개인적인 결산의 때이며 또한 온 인류가 함께 겪어야할 결산의 시간입니다. 그 결산의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느냐를 따지지 않으시고 얼마나 사랑했느냐를 보시고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사는 일이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축복입니다.
신앙생활은 끊임없는 선택과 결단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 것인가, 나의 욕망과 만족을 쫓을 것인가의 선택이며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우리가 져야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가 참된 삶을 살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기 위하여 선택하고 살아가야할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 길이 너무나 단순하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지나쳐 버릴 수 있는 것들이어서 놀랍기만 합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사랑은 복잡한 기교나 현란한 이론이 아니라 단순하고 소박한 진실입니다. 여기 내 삶 속에 주어진 현실이 사랑의 터전이며,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질문 - ‘가장 중요한 때는? 가장 중요한 사람은?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사랑만이 사랑을 낳듯이 우리가 사랑하기로 마음먹을 때마다 사랑해야할 일을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위해 세상에 오신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이며,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위해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입니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계절에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 할 줄 알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감사할 줄 아는 아름다운 삶에 대한 열정으로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하시길 기원합니다.
하늘나라 백성이 지녀야 할 모습
-최승정 신부-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며, 전례력으로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주일입니다. 즉 우리는 세상의 왕국이 아니라 그리스도 왕국에 속한 백성이며, 그리스도가 우리를 다스리는 진정한 왕임을 고백하고 전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장엄하게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 ‘크리스토스’의 우리말 표기이며, 헬라어 ‘크리스토스’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번역입니다. ‘메시아’는 ‘기름부음 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왕과 예언자들이 기름부음 받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시대에 ‘메시아’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보내 주실 정치적·종교적 지도자, 즉 다시금 강력한 유다왕국을 건설할 왕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초대공동체는 예수 부활을 체험하고 나서 ‘그리스도’가 정치적·종교적 권력을 누리는 왕의 의미를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사업도 유다인을 넘어서 인류 해방이라는 종말론적 무게를 포함한다고 알아듣습니다. 따라서 이미 초대공동체에서부터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예수님께 붙여진 고유한 호칭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반면에 오늘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왕좌에 앉는 장면으로 출발합니다. 연중 31주일의 ‘달란트의 비유’와 연중 32주일의 ‘열 처녀의 비유’는 하늘나라, 즉 그리스도 왕국에 들어갈 사람들과 그렇지 않을 사람들에 대한 비유였습니다. 반면에 오늘 복음은 매우 직설적으로 그리스도 왕국에 들어갈 사람이 지녀야 할 삶의 태도를 제시합니다. 종교 규정의 형식적인 면이 아니라 일상의 구체적 행위로 그리스도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랍게도 당시 유다의 종교 계명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차원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삶의 구체적 선행이 종교적 계명보다 더 결정적인 조건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말씀은 계명과 율법만을 강조하던 당시의 유다 종교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랑은 역동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데 우리는 어느덧 또다른 율법을 만들어 그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을 흘려버린 안타까움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실로 그리스도 왕으로 섬긴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함께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나라 백성이 지녀야 할 모습입니다. 그 출발은 오늘 복음이 전하듯이 우리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 대한 형제적 관심이며, 이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왕이신 그리스도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일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 기준
-김근배 신부 -
전례주년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 교회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낸다. 특별히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지내는 의미는, 이 세상의 종말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함이며, 나아가 세상의 종말에는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셔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러 오실 것임을 알려줌으로써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다시 한번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말씀도 최후의 심판 장면을 상세하게 보여주면서 심판의 기준은 무엇보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마태오 25. 40)임을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최후 심판의 기준은 바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이웃 사랑의 정신이며, 이 이웃 사랑의 정신은 당신 자신을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와 동일시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으로서 인간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불가분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 하면 우리와는 확연하게 다른 특별한 존재로만 생각한다. 즉 인간이 누릴 수 없는 영광과 권위, 찬란함과 웅장함을 가지신 초월적인 분, 그래서 우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세계에 계시는 분으로만 생각한다. 물론 이 사실은 분명한 진리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초월적인 분으로만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속에서 중요한 부분을 잃어버릴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초월적인 분이지만 동시에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단지 그분을 초월적인 분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분은 우리의 찬양과 공경의 대상으로만 머무르게 되고 이제 우리에게는 그분과의 사랑을 주고받는 일 보다는 섬기고 숭배하는 일에만 전념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 그분은 숭배와 흠숭, 찬양 속에서 만날 수 있는 분이지만 또한 우리 삶의 현장 속에서 똑같이 만날 수 있는 분이다. 영광의 세계에서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굶주리고 목마르고 외로움을 느끼는 구체적인 한 개인과도 깊은 유대를 맺고 계신 분이다. 바로 이 분이 우리가 믿고 왕으로 고백하는 주님이시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굶주리고 목말라하고 병들어 괴로워하는 예수님을 우리 삶의 자리에서 찾아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분을 발견하고 의식할 때, 우리의 삶은 한층 성숙한 모습이 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마태오 25. 46)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의 왕인가?
-유영봉 신부-
묵상길잡이 : '왕'이라는 말은 민주화를 갈망하는 요즘 귀에 거슬리는 단어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왕'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분은 참으로 당신을 우리 죄인들을 위한 제물로 바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죄와 죽음을 이기신 왕이 시기 때문이다.
1. 왜 하필 왕인가?
오늘은 전례적으로 한해를 마무리하는 연중 마지막 주일이며, 그리스도 왕 주일이다. '왕'이란 단어는 민주화를 부르짖는 요즘 전제군주적인 냄새가 많이 나기에 거부감을 갖게 하는 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왕'이란 요즘의 '대통령'처럼 우리가 뽑아서 일꾼으로 삼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갈아치울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왕'은 나라의 주인이요, 백성도, 땅도, 산천(山川)도, 심지어 들짐승과 산짐승까지도 나라님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왕'이란 바로 '주님'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 왕',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당신의 왕권을 확립하셨는가?
2.예수님은 악(惡)과 죽음을 이긴 왕이시다.
예수의 십자가 위에 써 붙인 죄명(罪名)은 '유대인의 왕 나자렛 사람 예수'였다. 예수님은 이 세상 권력에 뜻을 둔 적이 결코 없었지만, 본의 아니게 정치범으로 몰려 죽으셨다. 당신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을 가장 비인간화시키는 죄(罪)와, 인간을 짓누르는 제일 두려운 공포의 대상인 죽음을 극복하셨다. 그리하여 죄와 죽음에서 인간을 해방시킨 진정한 왕이 되셨던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죽음을 뛰어넘는 결정적 승리에 도달할 수 있었는가?
그분의 생애를 보자.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루가2,48-49) 아들은 모친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였다. 예수님은 12세 때부터 자신의 특별한 소명을 느끼셨고, 세례 때부터 세상 사람들을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는 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당신의 사명임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 많은 인간적인 갈등을 겪으셔야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면서 "내가 이렇게 마음을 겉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 주소서'하고 기도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요한12,27)하셨다. 수난을 목전에 둔 겟세마니 동산에서도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제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가22,42)하며 기도하셨다. 예수님이 가셔야 할 그 소명의 길은 '자신을 바쳐 많은 이들을 살리는 고통받는 야훼 종의 길'이었다. 그 길은 인간적으로 멀리 도망치고 싶은 고통과 수난의 길이었지만, 예수님은 항상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며 그 길을 묵묵히 가셨다.
끝내 예수님은 큰 쇠못이 당신의 손발을 뚫어 십자가에 못 박히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예수를 보고 "네가 유다인의 왕이라면 자신이나 살려 보아라."(루가22,37)하며 야유를 퍼붓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꼼짝도 못하고 죽음만 기다려야 하는 이 순간은, 완전한 패배의 순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순간은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일생동안 따라다니던 끈질긴 유혹을 끝내 물리치고 당신을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복종시킨 진정한 승리의 순간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도망갈 수 없게 됨으로써, 자신을 이기고 죄인들을 위한 숭고한 제물로 자신을 바쳐 죽음을 넘어서는 결정적인 승리를 얻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 '이제 다 이루었다'하시며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19,30)
이렇게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제물이 되어 죽으심으로 인간의 이기심과 아담의 불순종이 엮어 낸 모든 죄업(罪業)을 말끔히 씻으셨다. 이로써 인간성과 인류는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던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제2독서)하고 고백한다. 드디어 예수님은 '만물의 으뜸이 되시고' 죽음까지도 뛰어넘는 '우주의 왕'이 되셨던 것이다.
3. 예수는 내 안에서 '왕 노릇'하시는가?
나는 나에게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나를 얼마나 이겼는가?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해방과 자유는 자신을 얼마나 이겼는가에 달려있다. 예수님이 죽음을 넘어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된 것은 자신을 온전히 내 놓는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순명으로 된 것이었다. 나에게 있어 예수는 누구인가? 참된 해방, 구원에 이르는 길은 바로 예수님이 가신 그 길에 있음을 깨닫자. 이 깨달음이 없이는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나의 모든 삶이 예수 중심의 삶이 되어 예수님이 나에게 왕 노릇 할 때, 그 때 나에게 주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
심판의 기준
- 함영진 신부 -
“신부님 저는 장애인 협회 누구누구입니다. 어려운 저희들 도와주시는 뜻에서 화장지나 녹차 중 한 구좌 8만원만 구입해주십시오”
낮은 톤의 애처로운 여자목소리, 여름부터 지금까지 보름 간격으로 걸려오는 전화입니다.
“이미 구입해서 쓰던 것도 있고……. 연말쯤 가서 한번 볼까요?”
처음에는 점잖게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아침저녁 할 것 없이 전화해서 조르는데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은 몸이 아파서 잠시 쉬고 있는데 또 전화가 왔습니다.
“나중에 보자고 했잖아요!” 신경질을 내고 끊어버렸습니다.
한 시간쯤 뒤에 이번에는 다른 낯 익은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시시...신부님, 저저...전 장애인 협회 누누...누굽니다”
말을 더듬는 남자 목소리, 해마다 빠지지 않고 걸려오는 전화의 주인공입니다.
‘오라! 너 딱 걸렸다’ 대뜸 화를 내면서 반격했습니다.
“됐거든요, 저번에도 전화하셨지요? 누구신지도 알겠고 저는 그 물건 다 있다니까요! 너무 하는 거 아닙니까?”
거칠게 쏘아 붙이고 나니 왠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장애인 협회다. 복지시설이다. 형편이 어려워서 그런데… 차비가 없어서 그런데...”
우리 동네 사시는 어려운 분들도 신경 쓰기 힘든데 연간 수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들 매번 점잖게 거절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는 날 ‘심판 채점 기준표’를 보여주십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느냐?”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느냐?”
“나그네 되었을 때 따뜻하게 맞아주었느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느냐?”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느냐?”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 주었느냐?”
그러고 보니 예수님 곁에는 항상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고, 죄인 취급받는 오갈 데 없는 나그네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늘 그런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지내셨고 그들과 당신은 하나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초라한 마구간 말 구유가 하늘나라 임금님의 궁전이고 침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무시하고 만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제일 친한 친구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냅니다.
세상에 왕 중 왕으로 오셨던 그분의 삶이 철저하게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이었기에,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삶이었기에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고자하는 사람은 모두 그 삶의 방식을 따라가야 됩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내가 양이 될지 염소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최종 판결을 내릴 권한을 가진 분이 이미 우리에게 그 기준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모른 체 외면하고 넘어간다면 예수님께서도 나에게 등을 돌리실 겁니다. 심판 날에 나의 채점표는 과연 몇 점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