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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6일 오늘의 역사
2023년 평양 출발 함경남도 검덕으로 향하던 여객열차가 전복 400며명 사망
이 열차는 함경남도 단천역을 지나 해발 700m에 이르는 높은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노후화된 철로와 전력난으로 고개를 넘지 못하고 뒤로 밀리면서 열차가 전복됐다
사고 구간(동암역-리파역)에는 당일 폭설이 내렸다고 한다. 당시 동암역을 지나 급경사가 시작되며 열차 속도가 느려지더니 기관차가 견인을 못하고 전체가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기관사가 제동을 걸어 수습하려 했지만 밀려내려가는 열차에 가속도가 붙어 커브에서 중간 열차가 탈선 하며 후미 객차들이 산골짜기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는 설명이다. “기관차와 바로 뒤에 연결됐던 두 개 칸은 탈선되지 않고 단천역까지 밀려 내려와 정차하면서 상급열차에 탔던 간부들은 살고 나머지 7개의 열차에 탔던 주민들은 대부분 사망했다”고 말했다.
2022년 북한 무인기 5대 군사분계선 넘어 7시간 동안 침범
북한 군용 무인기 5대가 26일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경기 일대 영공을 7시간 넘게 침범했고, 이 중 1대는 서울 상공까지 날아갔다. 무인기는 서울 북부와 경기도 김포·파주, 인천 강화도 일대 등을 비행했다 군은 전투기와 공격형 헬기를 출격시켜 경고 방송·사격에 이어 격추 작전을 하는 등 대응 조치에 나섰지만 북 무인기를 한 대도 격추하지 못했다. 북한 정찰 무인기의 침범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여러 대가 동시에 군사분계선(MDL)을 넘어와 우리 영공을 휘젓고 다닌 것은 처음이다. 이로 인해 인천·김포공항에서 1시간 가까이 항공기 이륙이 중단돼 항공기 총 30여 편이 지연 출발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군은 이날 북 무인기 격추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작전에 동원된 공군 KA-1 경공격기 1대가 이륙 중에 강원도 횡성 농경지에 추락하는 사고도 발생했다
2021년 탈북민 박지현씨, 영국 더타임스 '2021년 영웅들'에 선정
2018년 북한 개성 판문역에서 남북도로·철도연결 및 현대화 착공식
2018년 고문 악명 높은 옛 남영동 대공분실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바뀜
2018년 일본 국제포경조약 탈퇴하고 상업적 고래잡이 재개(2019.7월부터) 선언
2014년 울산 신고리원전 3호기 건설현장 가스 누출로 3명 목숨 잃음
2013년 아베 신조 일본총리 야스쿠니 신사 전격참배 국제사회의 규탄 봇물
2012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
2011년 이희호 여사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김정일 조문 위해 방북
2009년 서석재 의원 사망
상도동계 서석재(徐錫宰·74) 전 의원(5선·11~15대)이 2009년 12월 26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서 전 의원은 부산 동아고 교사로 재직하다 1968년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한 이래 대부분의 정치 인생을 YS와 함께 해왔다. 164㎝의 작은 키에도 YS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사활을 걸어 '작은 거인'으로도 불렸고 '조직의 귀재'라는 별명으로 불렸을 정도로 YS의 조직관련 핵심참모였다.
1992년 대선 당시 전국의 불교 조직과 사조직인 '나라사랑실천본부(나사본)'를 관리하는 등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으로 맹활약했던 그는 후보 매수사건으로 93년 의원직을 상실하고 장기 외유하는 등 시련도 겪었다. 94년 총무처 장관에 임명되면서 명실상부한 '여권 실세'로 자리 잡았지만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4000억원대 비자금 보유설을 최초 발설해 파문을 불러일으키며 8개월 만에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서 전 의원은 권력의 핵심에 서지는 못했지만 민주계 중진 모임인 '민주화세력모임' 등을 통해 YS를 외곽에서 도왔다. 97년 대선 때 이회창 총재와의 갈등으로 신한국당을 탈당, 국민신당에 입당한 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후엔 국민회의 부총재를 거쳐 국민통합 21 상임고문 등을 지냈다.
2008년 언론 노조 총파업
MBC와 SBS 노조가 주축인 전국언론노동조합이 한나라당의 ‘방송법 개정안’ 에 반대하며 2008년 12월 26일 파업에 들어갔다.
언론노조는 이날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조합원 3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출정식을 갖고 총파업을 선언했다.
언론노조는 일부 중앙 일간지와 지방지, MBC, SBS 노조 등으로 구성돼 있다. KBS 노조는 지난 8월 언론노조를 탈퇴했으며, 조선·동아·중앙일보 노조는 가입하지 않았다.
이번 파업에 MBC는 노조원 2000여명(지방 계열사 포함)이 참여했다. 그러나 대체 인력이 투입돼 방송 차질은 없었다. 오전 6시부터 방송된 ‘뉴스투데이’ 의 진행자가 비(非)노조원으로 교체됐고, 뉴스데스크도 신경민 앵커가 단독으로 진행했다.
EBS 노조, CBS 노조, 한겨레 및 경향신문 노조도 이날 파업 집회에 참여했다. SBS 노조는 일부 앵커들이 검은색 ‘상복(喪服)’ 차림으로 방송을 진행했다.
방송사들이 파업에 나서는 것은 1999년 7월 방송법 개정에 반대하며 전국방송노조연합이 총파업에 나선 이후 9년 만으로, 언론노조가 9년 만의 총파업 카드를 꺼내 든 것은 한나라당이 민주당 등 야당의 반대에도 국회에 상정하려는 7개 언론관계법 때문이다.
한편, 정부는 이번 파업을 ‘불법 파업’ 으로 규정했다.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은 “공영방송을 자처하는 방송사 노조가 국회의 입법활동에 대해 정치 투쟁을 벌이며 파업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며 “이는 국민의 재산인 전파를 방송사의 사적 이익을 위해 사유화하는 행위” 라고 말했다. 노동부는 “언론노조의 파업은 ‘근로조건의 결정’ 에 관한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불법 파업이며, 노동관계법상의 보호도 받을 수 없다” 고 밝혔다.
전국언론노조의 총파업은 13일간 계속됐으며 2009년 1월 8일 여야의 언론관련법 처리 유보 방침에 따라 당일 오전 0시를 기해 총파업 투쟁을 일시 중지했다.
이에 따라 MBC 지부를 포함해 파업에 동참해온 각 언론노조 지부는 이날부터 업무에 복귀했다.
언론노조는 전날 오후 여의도에서 민주노총 주최로 열린 ‘언론악법.구조조정 저지’ 결의대회에 참석한 것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파업 일정을 마무리했다.
2004년 인도양 지진 해일 사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근처 해저에서 생긴 지진에 의한 해일이 일어나 기록적인 인명 피해를 내다.
2004년 12월 26일 오전 7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서 발생한 리히터 규모 9.1의 강진과 60여 차례의 여진이 발생했다. 이번 지진은 수마트라섬 서쪽의 인도-호주지각판과 동쪽의 버마판(유라시아판에 속함)이 서로 충돌하여 발생한 것이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에 따르면 이 지진이 자카르타에서 북서쪽으로 1620km 떨어진 북(北)수마트라 섬 서쪽 해안의 해저 40km 지점에서 발생했다. 이번 지진은 1900년부터 2004년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서 발생한 지진 중 3번째 강력한 규모이며, 1964년 알래스카 지진(진도 9.2) 이래 40년 만의 최대 지진이었다.
이번 지진으로 발생한 쓰나미(tsunami 지진해일)은 지진발생 30분만에 6m 높이로 태국의 휴양도시 푸케트에 도달하여 해안지방을 초토화 시켰다. 이후 쓰나미는 3시간 뒤에 수마트라섬 서쪽 1600km 떨어진 스리랑카 동남해안에 도착했으며, 시속 약 400km로 지진 발생 14시간만인 27일 오전 0시에는 진앙에서 5700km 떨어진 아프리카 소말리아 해안에 상륙했다. 이로 인해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최북단인 아체주에서 400만 주민 중 14만명이 희생되는 등 인도네시아·스리랑카·인도·말레이시아·방글라데시·태국·소말리아에서 총 23만 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2003년 대한민국의 음악 그룹 동방신기가 데뷔했다.
1996년 김영삼 정권(신한국당), 노동관계법-안기부법 변칙 개정
신한국당이 1996년 12월 26일 새벽 6시 국회 본회의를 단독 소집, 여당의원 155명만으로 단 7분 만에 노동관계법과 안기부법 개정안 등 11개 법률안을 기습 날치기 통과시켰다.
개정안은 국가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변형근로시간제,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 등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위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지만 이후 노동자들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권영길 위원장을 중심으로 약 2개월에 걸쳐 대대적인 총파업을 전개했다.
노동법 파동이 마무리 되기도 전에 한보사태와 김현철파동이 연이어 터져 도덕적 신뢰를 상실한 김영삼 정권은 연이은 대기업의 부도에 흔들리다가 아시아를 강타한 금융위기가 한국에 상륙하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지원을 요청하면서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94년 가양대교 착공
1994년 옐친, 체첸 공격 중지 명령
1991년 소비에트 최고인민회의가 그 자신과 소비에트 연방을 해산시키다.
1990년 국군보안사령부를 1991.1.1일부터 국군기무사령부로 개칭키로 결정
1990년 대법원, 이름에 쓸 수 있는 한자를 2,731자로 제한.
대법원이 1990년 12월 26일 이름에 쓸 수 있는 한자를 2,731자로 제한하는 `개정호적법 시행규칙`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1990년 5월 법원행정처내에 `호적제도개선위원회`를 구성, 그동안 문교부 산하 국어연구소 등 관련기관과 족보제작업체 등에 인명용 한자추천을 의뢰, 선정작업을 벌여왔었다.
그 결과 1972년 문교부가 정한 `한문교육용 기초한자` 1천8백자, 정부표준연구소 컴퓨터 표준코드에 수록된 한자 4천8백88자중 이름에 널리 쓰이는2천7백31자를 선정했다. 대법원은 이같은 한자선정을 위해 1970년 서울시 전화번호부와 1981년 인명사전에 사용된 한자 등도 참고자료로 활용했다.
대법원이 이름에 사용할 수 있는 한자를 제한키로 한 것은 잘쓰이지 않거나 너무 어려운 한자를 이름에 사용할 경우 본인뿐만 아니라 사회 일반에게도 불편과 부담을 준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대법원은 이번 한자제한과 함께 앞으로 호적에는 한자이름 밑에 한글이름도 같이 적도록 했다.
1989년 루마니아 구국위원회, 일리에스쿠를 대통령에 선출
이온 일리에스쿠가 루마니아 임시정부에 의해 1989년 12월 26일 대통령에 지명됐다. 그는 반 차우셰스쿠 투쟁을 주도해 온 구국전선과 임시정부의 대변인으로 활약하면서 독재정권 타도투쟁을 실질적으로 이끌어온 인물이다.
1930년 노동자 가문에서 태어난 일리에스쿠는 14세에 공산당에 입당, 공산혁명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부쿠레슈티 공과대학에서 수학한 후 모스크바대학에 유학하던 중 당시 모스크바대학생이던 고르바초프와 친교를 맺었는데 이것이 차우셰스쿠가 권좌에서 축출된 후 임시정부의 지도자로 부상하는데 한 몫 한 것으로 분석된다.
일리에스쿠는 공산당 내에서 착실히 경력을 쌓아 1968년부터 1971년까지 공산주의자 학생연맹위원장을 지냈으며 중앙위원회 서기를 거쳐 정치국 후보위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후 차우셰스쿠 독재체제에 비판적인 자세를 보여 정치국에서 해임돼 지방으로 좌천됐다. 당직에서 축출된 이후 그는 루마니아의 개혁 필요성을 주장, 국민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83년 한일경협 2차년도 규모 495억엔으로 합의
1983년 일본 나카소네 2차내각 발족
1980년 입법회의, 언론기본법 대통령선거법 의결
1979년 북한 대한체육회에 모스크바올림픽 단일팀 구성 제의
1974년 동아일보 광고해약사태 시작
1972년 트루먼 전 미국대통령 사망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1972년 12월 26일 오랜 투병 끝에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1945년부터 1953년까지 8년동안 제33대 미국대통령을 지냈으며 한국전쟁에 미군참전을 결정했고 2차대전 말기에 원자탄을 투하하는 것을 승인하는 등 그 생애에 많은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대전 후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해 미국의 냉전정책에 기조를 마련했다.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 대통령의 급서로 부통령에서 전쟁중의 미국을 맡은 트루먼은 1948년 예상을 뒤엎고 공화당의 듀이 후보를 물리치고 재선됐다. 트루먼 대통령은 심장과 신장의 병발증으로 중상에 빠져 있었으며 이날 밤 캔사스시 메디컬센터에서 생을 마감했다
1969년 제3한강교 개통(한남대교)
제3한강교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과 강남구 신사동을 연결하는 다리로서 한강상에 설치된 네 번쩨의 교량이며 경부고속도로를 계획 함으로 함께 계획되어 설치된 교량으로서 1966년 1월 19일에 착공하여 4년만인 1969년 12월 26일에 완공하였다.
이 다리의 개통으로 서울의 도심부와 경부고속도로가 직결돼 제1한강교로 우회하던 길이 6km나 단축됐다. 현대건설에서 시공한 이 다리는 교폭이 27m(보도4m, 차도23m)로 가장 넓은 6차선이며 길이 9백15m 양쪽으론 4백W의 수은등 51개가 설치됐다. 투입된 총공사비는 11억3천만원에 달한다.
제3한강교는 경부고속도로에 접속되는 교량으로 부산에서 출발한 차량이 서울 도심까지 곧바로 진입할 수 있게 되어 우리 국토의 남, 북을 연결시키는 대동맥이 최종적으로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는 요충지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교통수단이 나룻배에서 육상교통 수단으로 바뀌고 영동지역에 처음으로 전기와 수도가 공급되는 등 영동지역이 급속하게 개발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최초에는 제3한강교라 불렸으나 1985년 한강종합개발사업으로 한강 위에 놓인 다리 이름을 정리하면서 한남대교로 바꾸었다.
1966년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명절인 크완자가 처음으로 지내지다.
1962년 제5차 개헌안(대통령중심제-단원제) 공포
1962년 워커힐 준공
서울 동쪽 한강변에 워커힐이 공사착공 11개월만인 1962년 12월 26일 준공됐다. 마땅한 휴양지가 없어 일본으로 떠나는 주한미군의 달러를 잡아두기 위해 지어졌지만, 언론은 연일 ‘동양제일의 관광시설`을 강조하며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워커힐은 한국전에 참전해 교통사고로 숨진 워커 전 미8군사령관을 기념해 지어진 이름이다. 건물 곳곳에서도 전쟁의 기억이 묻어나온다. 준공 당시의 ‘힐 토바’ 건물은 워커(Walker)의 이니셜인 ‘W’자 모양으로 지었고, 다섯 동의 호텔건물은 역대 유엔사령관의 이름을 빌렸다. 이듬해 4월 8일 열린 개관식에는 워커의 아들인 미8군 소속 워커 중령이 참석해 아버지를 기렸고 세계적인 재즈 연주자 루이 암스트롱도 초청돼 자리를 빛내주었다.
그러나 개관전에 불거져 나온 ‘워커힐 사건’으로 참석자의 표정이 즐겁지 만은 않았다. 중앙정보부가 공사자금 가운데 상당부분을 횡령해 공화당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는 의혹이었다. 영업성적도 시원치않아 개관 첫 해부터 적자에 시달렸지만, 1966년에 방한한 존슨 미대통령이 이곳에서 묵고, 가수 패티김과 작곡가 길옥윤씨가 이곳에서 결혼하는 등 눈길 끄는 이벤트가 많이 열리면서 점차 서울의 명소로 자리잡아나갔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때 이곳을 방문한 북한측 대표들이 워커힐의 화려한 시설을 보고 ‘퇴폐적인 자본주의 문화의 전형’이라고 비난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워커힐은 1972년 3월 선경그룹(SK그룹)에 불하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61년 아랍연맹, 예멘과의 연방 해체
1957년 뉴델리에서 제2회 아시아-아프리카(亞阿)회의 개최
1950년 맥아더 원수, 중공군의 한국전개입에 관한 성명 발표
1949년 아인슈타인 통일자장의 원리 발표
1948년 소련, 북한에서 철수 완료
1945년 국군준비대회 개최
1944년 미국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 초연
1941년 미국-영국-중국 군사동맹 체결
1941년 총독부 조선임시보안법 공포 시행
1939년 터키 에르징칸에 진도 7.9 지진 3만명 사망 10만명 부상
1934년 日 최초 직업야구단 ‘대일본동경야구구락부’(요미우리 자이언츠전신)탄생
1932년 중국 감숙성에 진도 7.6 강진 7만명 사망
1916년 인도 국민회의파와 인도 이슬람교도연맹 공동전선 결성
1900년 성악가 엔리코 카루소, 밀라노 스칼라좌에 대뷔
1898년 퀴리부부(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가 새로운 화학 원소인 라듐을 발견.
마리 퀴리와 남편 피에르 퀴리가 1898년 7월에 우라늄의 330배나 되는 방사능을 가진 새로운 물질 ‘폴로늄’을 발견한데 이어 12월 26일에도 새로운 방사성 원소 ‘라듐’을 발견함으로써 인류는 희망과 절망의 시대를 동시에 열었다.
라듐은 ‘광선(光線)’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폴로늄은 마리 퀴리의 조국인 폴란드에서 땄다. 두 사람은 이 업적으로 1903년에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프랑스 학술원이 노벨상 후보를 추천할 때 마리 퀴리는 제외하고 남편만 추천했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지면서 폴란드 여성이자 유태인이었던 그를 차별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다. 1911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데 이어 이들 부부의 딸도 1935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함으로써 퀴리 가(家)는 한 집안에서 노벨상을 3개나 수상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마리 퀴리는 강한 방사선을 내는 동위원소들에 오랫동안 노출되면서 얻은 백혈병으로 1934년 숨졌지만, 사후 그에겐 또 다른 영예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후 61년만인 1995년에 파리의 팡테옹 국립묘지에 묻힌 것이다. 장 자크 루소,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등 프랑스를 빛낸 60여명의 유해가 안치돼 있는 곳, 나폴레옹이나 드골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이곳에 마리 퀴리가 영면하게 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모든 저명인사 중에서 명성 때문에 부패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라며 퀴리를 추모했다.
1896년 필리핀 독립영웅 호세 리잘 마닐라에서 공개 처형됨
1893년 마오쩌둥 중국 초대 국가주석 태어남
1799년 나폴레옹, 쿠데타로 통령정부 수립
1716년 영국 시인 토마스 그레이 태어남
1670년 유형원, 반계수록 지음
1628(조선 인조 6) 실학자 이수광 세상 떠남 『지봉유설』
1504(조선 연산 10) 도성내 원각사 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