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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神市) 시대, 동양문명의 초석을 놓다.(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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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부락에는 스스로 삼로(三老)를 모셨으니, 삼로는 삼사(三師)라고도 한다. 어진 덕을 갖춘 자가 있고, 재물을 베푸는 자, 지혜를 갖춘 자가 있었으니, 누구나 그들에게 가서 가르침을 받았다. 또 육정(六正)이 있는 바 곧 현좌(賢佐), 충신(忠臣), 양장(良將), 용졸(勇卒), 명사(名師), 덕우(德友)가 그들이다. 또 살생에도 법이 있었으니,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밑으론 서민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때와 도구를 가려서 살생했다. 첫째는 함부로 죽여서는 안되나니, 옛부터 부여에 말이 있어도 타지 않고 죽이는 것을 금하고 방생했다 함은 이러한 뜻이다. 깃든 짐승을 죽이지 않고, 알을 품은 짐승을 죽이지 않는다 함은 그 번식할 때를 가려서 죽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 것을 죽이지 않고, 이로운 짐승을 죽이지 않고 살림은 그 짐승의 종류를 가려서 살생함이라. 만물을 중하게 여김이 이처럼 지극했다.
살생을 함부로 하지 않고 깃든 짐승이나 알을 품은 짐승을 죽이지 않았다 하니, 그만큼 생명을 존중해야 함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선 현대보다 더 앞선 사회였던 것이다. 말이 있어도 그것을 타지 않고 방생했다면 전쟁 같은 것엔 뜻이 없었다는 말 아닌가? 그래서 거대한 전쟁터인 중국대륙을 떠나 멀리 북만주의 송화강 유역에서 나라를 세웠을 것이다.
그렇게 47대 2천여년 동안 지속되었던 단군조선은 그 중기에 이르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교체시킨 색블루라는 단군이 있었다. 그는 무력으로 정권을 잡았지만 이렇게 말한다.
"생각컨대 짐 한 사람을 공양키 위해 백성들을 들볶아 공물을 바치게 함은 곧 정치가 없다는 말이니, 정치 없고서야 왕이 무슨 필요가 있으리요...."
그 후로는 자공후렴(藉供厚斂=뇌물을 받거나 세금을 무겁게 하는 것)의 폐단이 없어졌다 한다.
문자 사용의 내력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소도경전본훈'을 쓴 조선조 학자 이맥이 고기들을 인용해 한 말이다.
신시(神市)엔 녹서(鹿書)가 있고 자부(신시 후반부의 학자)에겐 우서(雨書)가 있고 치우(14대 환웅)에겐 화서(花書)가 있었으니 투전문 등은 그 남은 흔적이다....
녹서는 신시 시대에 신지(神誌)라는 당시의 문교부 장관이 사슴의 발자국을 본떠서 만든 글자이고, 치우천왕이 고안한 화서(花書)가 투전문(鬪佃文)에 그 흔적이 남았다고 했다. 지금의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고스톱'이라는 화투놀이를 하지만 일제시대만 해도 투전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손가락 정도의 넓이와 손바닥 정도 길이의 두꺼운 종이에 그림이나 꼬불한 글자들이 새겨진 투전을 본인도 어렸을 때 본 적이 있다. 현재의 화투패가 일본의 문화라는 말을 들었는데 치우시대에 쓰였다는 花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인의 조상도 단군시대에 갈라져 나간 협야노라는 사람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신시엔 산목(算木)이 있었고 치우에겐 투전목이 있었으며 부여엔 서산(書算)이 있었다. 산목과 투전목은 각기 이러했다.(옆 그림) 단군 가륵 제2년에는 을보륵이 정음 38자를 찬하고 이를 가림다(加臨多)라 했다. 그 글은 아래와 같다.(옆의 문자들)
산목, 투전목, 서산은 각기 숫자를 나타내는 문자였고 가람다문이라는 것은 세종대왕 때 만들어진 훈민정음의 원형이었던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이태백전서(全書)'의 옥진총담(玉塵叢談)에는 '발해국에 글이 있는 바 당나라에서는 아무도 이를 해득하는 자가 없었다. 이태백은 능히 이를 풀어 이에 대답했다.'라고 한다.....
이태백이 어떻게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국의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을까? 그도 동이족의 후예였기에 고구려의 문물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헌강왕 12년 봄 북진(北鎭)으로부터 적국(狄國)인이 와 나무조각을 나무에 걸어놓고 갔는데, 그 나무에 씌여진 15자를 취하여 보니 '보로국, 흑수국 사람이 함께 신라국과 화통코자 왔노라.'고 씌여 있었다....
헌강왕은 신라 후기의 왕이었는데 그때 북쪽의 보로국 흑수국에서 온 사람들의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또 고려의 광종 때 장유(張儒)는 접반사(接伴使=통역관)로 유명한 사람이다. 처음 난을 피해 오월(吳越)에 이르렀다. 월씨(越氏)에 호사가가 있었으니 동국한송정(東國寒松停)의 곡을 거문고 바닥에 새기고 이를 바다에 띄워 보냈다. 월나라 사람들은 그 글을 풀지 못하더니 마침 장유를 만나 절하고 그 글의 뜻을 물으니, 장유는 즉석에서 한시로 풀었다.
달빛 소나무에 하얀 밤
파도까지 잠든 경포의 가을
애처로이 울며 오가는
한 마리 바다 갈매기여!!....
중국 양자강 남쪽에 있었던 월나라 사람이 동국(한반도)에 대한 시를 썼는데 정작 자기나라 사람들은 해독하지 못하고 고려의 통역사가 해독했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당나라의 이태백, 북쪽의 보로국과 흑수국, 월나라의 시인도 모두 단군조선의 후예라는 뜻일 것이다. 단군시대에도 한자를 진서(眞書)로 사용하고 있었으나 가림다 문자 같은 간단한 문자가 일반인들 사이에서 통용되었고 그 후손들도 얼마 동안 그것을 사용했을 것이다.
최근에 알라스카 북극지방에 사는 이누잇족에 관한 다큐멘타리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들이 문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문자의 생김새가 단군조선 시대의 가림다 문자와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본인의 사견에 의하면 단군조선 시대에 이웃 부족으로 살았다는 수밀이족이 일본으로 건너가 아이누족이 되고 더 동쪽으로 이주해서 이누잇족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아이누와 이누잇 족은 백인과 황인종의 혼혈종 처럼 보인다. 광개토왕의 기록에는 일본의 왜이(倭伊)가 복속해 왔다는 기록이 있다.
복희에게는 용서(龍書)가 있고 단군에게는 신전(神篆)이 있었으니 이들 글자들은 널리 백산, 흑수, 청구, 구려(九黎)에 쓰여졌다고 했다....
전(篆)이란 전서체라 하여 옛 한자의 형태를 뜻한다. 神篆이란 전서체보다 더 고대의 한자란 뜻이며 그것이 신시시대부터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옛날엔 계해(癸亥)를 썼나니 단군 구을이 처음으로 갑자를 써서 10월을 상달이라 하고 이를 한 해의 시작이라 했다. 6계(癸)는 신시씨에 의하여 신지(神誌)에게 명하여 제정한 것으로 계(癸)를 처음 시작으로 했다.....
癸와 亥는 각기 천간(天干)과 십이지(十二支)의 마지막 글자다. 천간십이지(甲,乙丙...子丑寅,卯)는 단순한 문자들이며 한자의 최초형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천간십이지가 신시 시대부터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시대에 녹도문을 사용했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녹도문은 일반인들이 사용한 문자이고 神篆이란 학문적인 문자였을 것이다. 천간십이지도 역학을 말하는 부호로써의 문자였던 것이다.
부여사람 왕문이 쓴 바 법류부의전(法類符擬篆)과 자부선생의 삼황내문과 태자 부루의 오행설은 모두 환단시대(신시시대)에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은학(殷學=갑골문자)과 한문은 아마도 왕문의 유범(遺範=법)일 것이다.
법류부(法類符)는 법칙들을 나타내는 부적(符籍)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의전(擬篆)이란 전서(篆書=한자)에 비길만 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부여 학자 왕문이 쓴 법류부의전이라는 책은 한자와 비슷한 부적들을 수록해 놓은 책이라는 뜻인 것이다.
태백일사의 저자 이맥은 천간십이지의 문자들이 한자의 최초형태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부여 학자 왕문이 쓴 법류부의전이 은학(갑골문)이나 한문의 모체였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한자의 창시자가 창힐이라고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창힐에 대해서 환단고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통지(通志)' 씨족략엔 '치씨는 모두 치우의 후예'라고 되어 있고 '창힐은 고신(요임금의 아버지)과 더불어 모두 치우씨의 후예이다. 대극성에서 태어나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산동의 회북으로 옮겨 살았다.'고 하였으니....
한자를 만들엇다는 창힐도 동이족이었다는 예기다. 또 이렇게 말한다.
자부선생(신시시대의 학자)께서 칠회력(曆)을 만드시고 삼황내문경(道家文)을 천폐(天陛)에 진상하니 천왕께서 이에 칭찬하셨다. 삼청궁을 세우사 거기에 거하시니 공공, 헌원(황제), 창힐, 대요(황제의 스승)의 무리가 모두 와 여기서 배웠다....
중국인들의 조상이라고 하는 삼황오제 중에서도 최고(古)의 인물인 복희, 염제(신농), 황제는 모두 신시 환웅들의 후손이다. 위에서 말하는 공공, 창힐, 황제, 대요 등은 모두 같은 시대의 걸출했던 인물들이며 그들이 신시의 자부선생에게 와서 배웠다는 것이다. 환웅계열 중에서 제도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행동을 했던 소전(小典)이란 인물이 있었는데 그 소전의 후예가 중국의 오제(五帝)인 것이다. 주류에서 벗어났던 후손들이 주류를 유지했던 신시에 와서 문물을 배워간 것은 자연스런 현상인 것이다.
부여 사람 왕문은 처음 전문(篆文)을 번거롭다 여기고 그 획을 없애고 새로 부예(符隸)를 만들어 사용했다. 진(秦)나라 때 정막(程邈)은 숙신(배달국→단군조선→부여)에 사신으로 왔다가 왕문의 예법(隸法)을 한수(漢水)에서 얻었고 또 그 획을 계승하여 조금 바꾼 형태로 고쳤다. 이것이 지금(조선조)의 팔분(팔분체)이다....지금 그 글자의 근원으로 삼는 것을 탐구해 보면 모두 신시에서 전해진 법이며 지금의 한자도 역시 그 지류를 계승한 것임이 명백하다.
전서체는 글자의 형태가 곡선인 것이 많아 쓰는 데 시간이 걸리는 불편함이 있어 그 다음 발명된 것이 예서(隸書)체인데, 그것도 진나라의 정막이라는 사람이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의 왕문에게서 배워간 것이라는 이야기다.
남해도의 낭하리 계곡 및 경박호(湖)의 선춘령과 오소리 사이 바깥쪽 암석 사이에 언젠가 암각문이 발견되었는데 범자(梵字=인도어)도 아니고 전자(옛한자)도 아니며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이라 했으니, 아마도 신지씨가 만들었다는 옛 신시의 문자가 아닌가 한다.
남해도 낭하리 계곡의 경박호가 어디쯤인지 고지도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정신세계사' 간 임승국 역해 '한단고기'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