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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회 성소실 원문보기 글쓴이: jeje
백아흔 두 시간
지난 백아흔 두 시간이 제게 얼마나 대단한 시간이었는지 모릅니다. 제 인생 전체를 통해 하느님께서 어떻게 활동하셨는지를 당신께서 직접 제 손을 잡으시고 돌아다니며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얼마나 행복해했고, 갈등하고, 찾아 헤매고, 사랑 받았고, 사랑해왔는지를 하나 하나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저를 일으켜주셨습니다.
지난 한 달간 저는 아루페 먼쓰(Arrupe Month) 프로그램에 동료 수사 16명과 함께 했습니다. 전반부 - 2주 반은 사제직에 대한 세미나였고, 후반부는 8일 피정이었고, 전체 평가와 은총을 나누는 시간으로 한 달을 보냈습니다. 예수회 신학과정의 수사들이 부제품, 사제품을 앞두고 교회와 예수회 그리고 자신의 지금 상황에서 사제직에 대해 숙고해보는 시간이 아루페 먼쓰입니다.
전반부에 예수회원들, 예수회원과 함께 활동하고 계신 수녀님, 평신도들을 강사로 초대해서 그들이 경험한 예수회와 예수회원들, 그리고 예수회와 예수회원들에게 바라는 사제직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눠주었습니다. 성소의 동기, 각자의 성향, 성체성사, 화해성사, 사제의 권위와 파워, 사목을 주제로 강사의 체험들 그리고 우리들의 성찰을 함께 나눴습니다.
전반부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들 17명은 그간의 성찰을 나눴습니다. 전반부 세미나에서 사제직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나누면서 저는 예수회 사제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기쁨과 보람도 많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사제직 자체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이제 2년 후면 사제가 되어 제대에 서고, 신자들 앞에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서품 후에 본당에서 한 1년쯤 사목 실습을 하고, 2년 정도 공부를 더해서 STL을 마무리하고 성소실이나 양성 파트에서 일하면 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리고 양성이나 영성쪽에서 사도직을 하며 살게 되겠거니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제게 던진 단어는 “글쎄,…!!" 두렵고, 무섭고,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습니다. 환하던 미래가 뿌옇게 되더니 완전히 헝클어진 것 같았습니다. 잘 할 수 있을까 란 생각 때문인지, 뭔지 모를 두려움이 저를 엄습했습니다. 전체 나눔의 자리에서 무섭고, 두려워서 감정이 북받쳤습니다. 그렇게 두려움을 한아름 안고 8일 피정에 들어갔습니다.
5월 16일
1-0 개인면담
월요일 오후 5시 피정 지도자를 만났고, 지금의 기분, 바라는 은총에 대해 기도하고 내일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두렵고, 바라는 것은 이 상황이 나아지는 것뿐이었습니다.
5월 17일
2-0
저는 신부님께 저의 이런 상황을 말씀 드렸습니다. 신부님께서 시편 139과 영신수련 23번, 예레미야서 29:11-14을 기도 자료로 주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제 마음은 두려움으로 기도에 집중할 수도 없고, 무서운데, 그런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얼마나 가볍게 들리는지!
8일 피정 동안 매일 저녁 8시에 한 시간 동안 성체 현시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의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가지고 성체 앞에 앉았습니다. 이 두려움의 근원은 무엇일까?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생각하며 성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어디서 오는 두려움인지, 이름이 뭔지? 사제직의 무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막연함! 도대체 실체를 알 수 없는 이 녀석 때문에 왜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것이지!! 이 피정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2-1 시편 139 – 주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
성체 앞에서 주님의 현존을 느껴봅니다. 제가 잃어버린 것은 제가 가야 할 길이 아니라 주님 당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웠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그 두려움은 당신을 잃어버린 데서 왔습니다. 가난과 약함이 당신을 만나게 합니다. 저의 자신감(자만심)이 당신을 잊게 했습니다. 저의 부족함이 다시 당신을 찾게 합니다. 저의 허상 중 하나는 여유롭고, 적응 잘 하는 그런 사람이 바로 저 자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누구보다도 더 씨름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5월 18일
2-2 영신수련 23번 – 불편심, 자유
지난 1년의 외국 생활이 힘들었습니다. 아닌 척 해도 몸과 마음은 힘들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왜? 저는 쿨(cool)한 사람이니까요. 무엇 때문에 그래야 할까요? 강해지는 것이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일까요? 사실 그렇게 쿨할 필요는 없는데, 머리로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기도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어쩌면 아는 것(지식)이 지난 1년은 제게 필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하느님은 온데 간데 없고, 그냥 신학 지식만 부여잡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과 제가 온 몸과 마음으로 만나오지 못 했습니다. 그렇게 지난 1년을 살았습니다. 어쩌면 더 오랜 시간 그렇게 보내왔습니다.
2-3 예레미야 29:11-14 – If you seek me with all your heart, I will let you find me.
삶이 어렵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삶은 밝아야 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밝은 삶을 사는 척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귀하고 특별하게 창조하시고, 키워오셨는데, 저는 제 나름의 틀로 저를 가두며 오히려 평범해지려 했습니다. 세상의 틀과 기준에 저를 맞추려 애썼습니다. 그저 우아하고 쿨하게 보이려 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저를 양팔 벌리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전 작은아들처럼 제 자신만 믿어왔습니다(루카 15장). 인생은 계속해서 작은아들을 체험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사는 것은 그렇게 아버지 곁을 떠났다가 다시 그 품에 안기기를 반복하는 것인데, 큰아들처럼 속으로 참고, 겉으로 우아하게 사는 것은 진짜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2-4 반복 – 두려움, 자유, 불편심
“괜찮다. 두려워해도 된다. 단, 잊지 마라. 내 안에 있어라.”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삶의 중심엔 무엇이 있는가?
3-0 면담
놀라운 은총이 있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가 하느님의 현존을 성체 앞에서 느끼며, 그 두려움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고, 제가 무엇을 잊고, 잃고 살았는지, 제 삶의 중심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말로만 듣던, 사랑이, 빛이 두려움을 몰아낸다는 것을 제 기도 안에서 온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은 제가 만들어낸 허상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그 두려움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제가 하느님 현존 앞에서 평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3-1 호세아 11
하느님께서는 제가 괜찮거나 그렇지 않거나 아무 상관하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사랑할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가 당신께 돌아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그 자리에 계십니다. 제 앞에, 제 뒤에, 제 옆에. 그런데 저는 이런 저런 이유로 당신을 잊고 지내왔습니다. 당신을 제 삶에서 잃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또 어느 날 당신을 잃고 헤매고 있을 저를 압니다. 저는 제 힘으로 힘겹게 또 씨름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을 잊고서는. 하지만, 또 당신께로 돌아설 것입니다. 제가 하늘 나라에서 당신을 뵐 때까지 이런 상황들이 계속 될 것을 압니다. 제가 당신을 잃고 있는 시간이 줄어들기를, 깊고 넓은 당신 사랑을 알아듣기를 기도합니다.
3-2 Prodigal Son 루카 15:11-32 – I will get up and go to my father
작은아들과 아버지 모두 서로에 대한 신뢰가 두텁게 느껴집니다.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는 그 용기와 믿음은 아버지가 아들을 믿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난 왜 이쁘게 차려 입어야 주님께 갈 수 있는 것일까요?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것인가요? 자신감, 믿음의 결여? 무엇이 무서워 아버지께 가지 못하고 있을까요? 징벌의 하느님 이미지?
5월 19일
3-3 호세아 11
주님께서는 믿고, 사랑하는 것 밖에 하실 줄 모르십니다. 미련하리만치. 인생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쉬었다 가기도 해야 합니다. 줄창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 좋은 것인가요? 왜 그래야만 하는 것인가요? 하느님과 함께 천천히 걷는 것을 잊지 말자 다짐합니다.
3-4 루카 15
그 동안의 제 인생은 거짓인가요? 큰아들의 인생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닙니까? 작은아들의 체험이 진짜고, 사랑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럼, 전? 공평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당신에게 화가 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이렇게 화를 내면서도 마음은 마치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 하는 것처럼 차분하니 이것도 이상합니다.
기도가 뭔지 조금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도는 제 과거와 연결된 오늘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 동안 싸이월드, 페이스북에 제 기도, 성찰을 참 많이도 써왔습니다. 그것들은 다 무엇이었나 싶습니다. 쓸모 없고, 의미 없는 것들이었습니까? 제 서른여덟 해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들은 모두 가짜란 말씀입니까?
4-0 시편 13, 22, 69, 86
기도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기도 성찰을 한다고 해도 놓치거나 못 보는 무엇이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가 그런 것을 짚어가며 성령의 흐름을 따를 수 있게 도와줍니다. 새로운 관점, 목소리를 나눠줄 수도 있습니다.
제가 하느님께 화가 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에, 누구에 화가 나 있는 것인지? 그것이 화가 맞는지?
4-1 시편 13
- 주님, 언제까지 마냥 저를 잊고 계시렵니까?
- 언제까지 고통을 제 영혼에, 번민을 제 마음에 날마다 품어야 합니까?
ð 제게 은혜를 베푸셨기에 주님께 노래하오리다.
왜 화가 나는데 마음은 고요한 것일까요? 성격 탓인가요? 제가 진짜 화가 난 것입니까? 누구에게, 하느님, 제 자신? 한참을 아무런 일도, 느낌도 없이 기도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잊었던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저와 함께 해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분 때문에, 저는 괜찮은 놈, 운 좋은 놈이었습니다. 제가 잘 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제가 나름 열심히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저를 이끄셨고, 저를 보호해주셨고, 저와 함께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 당신을 기억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이제 당신께서 항상 제 곁에 계셨음을 알겠습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제가 잊고 있었을까요? 제 눈은 저의 자만으로 가리워졌습니다. 저는 부모님, 친구, 선생님들로부터 많은 선물, 사랑을 받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께 받은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가 잘 나서, 제가 잘 해서, 제가 열심히 해서, 그 결과를 그 선물을, 그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제가 이렇게 어리석습니까!
‘Son, you are always with me, and all that is mine is yours.’
4-3 반복, 저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당신께서 함께 하셨던 모습을 하나 하나 보여주십니다. 저만큼, 아니 저보다 더 아파하시고, 기뻐하시고, 슬퍼하시고, 힘들어하셨습니다. 당신을 알아보면서 – 예수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제 본 모습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알지도 못했던 저의 숨겨져 있던 모습을 끌어내주셨습니다. 예수회에서 살아가면서 저는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저는 당신 안에서 커나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5월 20일
4-3 하느님과 함께 했던 행복했던 순간들
하느님께서 행복했던 저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십니다. 물론 좋은 시간만 있지는 않았지만, 웃음이 있었던 시간, 따뜻함, 정,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순간들을 보여주십니다. 힘든 시간도 당신께서 곁에 계셨음을 언뜻 언뜻 보여주십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태권도 도장을 다녔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도장 옆 양재학원을 다니셨습니다. 같이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서 엄마와 저는 호떡을 사먹었습니다. 얼마나 맛있었는지요! 가족이 일찍 저녁을 먹고 강변에서 배드민턴을 치던 때, 제가 자두를 엄청 좋아하는데, 어머니께서 저를 가지셨을 때 자두를 자루로 사서 드셨다고 했습니다. 초등학교 운동회, 직접 교복을 만들어 주신 어머니, 함께 공놀이 해주신 아버지, 초등학교 때부터 저보다 키가 컸던 여동생, 가족 안에서 그리고 학교 친구들 안에서 제가 얼마나 사랑 받는 존재였던지! 작은아들을 품에 안은 아버지의 사랑을 저는 매 순간 받아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4-4 중학교
저는 좋은 선생님과 친구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제 지평이 가족에서 세상으로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중1때 처음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영어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어머니께서 고백하시길, 당신도 그러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확실한 핑계거리가 생겼습니다. 기도 중에 자꾸 서품 후에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면 좋겠다 라든지, 성소실에서 이런 일을 하면 좋겠다 싶은 생각들이 자꾸 일어납니다. 유혹, 분심일까요? 중학교 시절 친구들, 선생님들, 하느님과 즐거웠습니다. 피정 집 마당에 난 잡초를 뽑기 시작했습니다.
4-5 고등학교
부모님께서 저를 중학교 입학 이후 전적으로 믿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공부하는데 필요한 것을 아낌없이 도와주셨습니다. 공부에만 집중하던 그 시절에도 저는 아버지와 함께 주말에 농구를 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중,고등학교 시절 학교 농구 선수이셨습니다. 그래서 저보다 훨씬 실력이 좋았습니다.
이렇게 행복했던 시간들을 보여주시는 하느님을 만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게는 두 권의 일기장이 있습니다. 하나는 행복하고 밝은 제 인생을 하느님과 제가 기록해왔고, 다른 하나는 저의 약함, 어둠을 적어온 것입니다. 행복으로 가득한 일기장이 훨씬 두껍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약함으로 가득한 일기장을 열심히 읽으면서 제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것도 저입니다. 하지만 행복한 일이 제 인생에는 더 많았습니다. 그 행복한 사람도 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제 눈을 열어 얼마나 행복하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저는 정말 행복했습니다. 사실 그분 앞에서 제가 잘 나고, 못 나고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하느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왜 몰랐을까요? 이제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때가 되었나 봅니다. 하느님, 이 시간을 허락해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5-0 이사야 53, 루카 5
첫날: 길을 잃고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둘째 날: 하느님께서 제 삶의 중심에 들어와계셨습니다.
셋째 날: 하느님께 화가 났습니다. (기도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넷째 날: 아름다웠던 제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치듯 하나씩.
5-1 이사야 53 – 예수님을 알게 하소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의 장면들이 떠올랐습니다. 고통 받는 예수님. 그 모습을 그저 따라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며 사라집니다. 어두워졌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제 발에는 커다란 쇠뭉치가 묶여있습니다. 저의 죄들이라 생각 듭니다. (수련 1년차 30일 피정 때 저의 죄를 묵상할 때 이와 비슷한 기도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이 쇠사슬을 제 스스로 끊어내려고 무진장 노력을 했지만 발에 피만 날 뿐 끊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알아보려고 하다나 ‘하느님’을 조용히 부릅니다. 이 작은 목소리에 밝은 빛의 하느님께서 저를 안아주시고 그 쇠사슬을 녹여내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 안내해 주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시몬처럼 저도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갑니다. 골고타 언덕이 아니라, 빛이 비치는 환한 곳으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함께 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앞장 서시고 예수님과 저는 십자가를 지고 뒤따릅니다.
이미지는 사라지고 저는 가만히 ‘하느님’, ‘아버지’, ‘주님’, ‘친구’를 되뇝니다. 마지막 단어는 ‘사랑’입니다. 계속 반복합니다. 사랑, 아버지, 하느님을 빛 안에서 이것을 되뇝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에게 인도해주십니다. Jesus is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5-2 루카 5:1-11
베드로가 그물을 던져서 많은 물고기를 잡아야 하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물에 걸린 큰 물고기는 귀여운 돌고래였습니다. 이러면 스토리 전개가 안 되는데, 저는 당황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베드로는 서로 쳐다보면서 웃는 것입니다. 아주 신나게 웃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자, 가자. 나를 따라와라.” 베드로는 “예”라고 대답합니다.
밤새 그물을 던지고 지친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보십니다. 성소 이야기의 대부분은 지쳤을 때, 바닥을 체험하고 있을 때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꼈다고 합니다. 주님은 강한 사람이 아니라, 지칠 데로 지친, 약하고 힘 없는 이를 부르십니다. 저 역시도 세상에 지치고, 그저 세상에 파묻히려 할 때 당신께서 부르셨습니다. “가자, 따라와.”란 간단한 말씀으로. 제가 대학 3학년 때 성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1, 2학년 때 저를 돌아보면, 뭔가를 찾아 헤맸던 것 같습니다. 그 무엇이 여자 친구를 만드는 것, 공부, 운동 이었습니다. 그런데 2년 동안 그것들이 저의 허기를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저는 포기하려 했습니다. 그 때 하느님께서 저를 일으켜 세워 주셨습니다.
5월 21일
5-3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며 기도했습니다.
새벽 5시 반, 저 멀리 하늘은 아침 해를 보여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점점 붉게 물들어가면서 황금보다도 더 눈부신 아침 해가 떠오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란 말만 반복합니다. 아침 햇살이 이슬에 반사돼 다이아몬드보다 더 아름다운 빛을 발합니다. 이 아름다운 아침 풍경을 보면서 이 장면을 과학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싶습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은 하느님 당신께서 창조하셨습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저는 많은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저는 죄를 지으면서 이 아름다운 세상의 일부이기를 거부해왔습니다. 저는 하느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하지만 당신께서 저를 깨끗이 해주시고, 성화시켜주실 것을 믿습니다.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섭니다. 저는 또 예전처럼 죄를 지을 것입니다. 그 때 하느님께서 저를 보시고 저를 위해 기도해주실 것이고, 저를 보듬어주실 것입니다. 지금 저는 하느님의 사랑과 당신의 활동하심을 느낍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은 당신께서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 당신께서 제 삶의 중심에 계셔야 합니다. 저는 그것을 원합니다.
5-4 루카 5:1-11
저 역시도 베드로처럼 지쳤을 때 당신께서 부르셨습니다. 당신께서 어떻게 제게서 일하셨는지 보여주십니다.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던 저를 당신께서 지켜보십니다. 완전히 소진된 저를 당신께서 부르시고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15년 전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2011년 오늘, 이 아루페 먼쓰 기간에 당신께서는 제게 기회를 주십니다. 똑 같은 체험 그리고 새로운 차원의 이해와 선물, 사랑. 다시 당신께서 제자로, 사도로, 친구로 부르십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계속 사랑하겠습니다.
6-0 최후의 만찬, 사제직
지난 역사 안에 하느님과 저는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오랫동안 그것을 잊고 전 그저 제 식대로, 제 힘으로 제 삶을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필요했고, 오늘의 저에게로 수렴됩니다. 지금 제가 느끼고 알아듣는 모든 것이 지난 제 역사 안에 그대로 녹아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이제 하느님께서 이름 붙여서 제게 보여 주십니다.
6-1 요한 13:1-20 Washing feet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그러다가 제가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려 합니다. 그런데 제 손이 더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발을 씻어줄 수가 없습니다. 발이 오히려 제 손보다 더 깨끗합니다. 손을 씻어보지만, 더 더러워집니다. 깨끗하게 할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저를 깨끗하게 해주십시오,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느님! 제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하느님께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합니까? 도와주세요, 가르쳐주세요, 하느님!
6-2 반복
두려운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시커먼 두 손을 꼭 쥐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하느님만 부르고 있습니다. 당신이 씻어주셔야 제가 당신 사람들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게 더 나을 수도, 그저 가만히 그렇게 있으라고 하십니다. 제가 꼭 무엇을 준비하고, 사도직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냥 거기 그렇게 더러운 손으로 있으라고 하십니다. 그게 사도직이라고 하십니다. 전 제 더러움이 어디에 묻을까 두 손 꼭 쥐고 움직이지도 못 하는데, 주님께서 양팔 벌려 기다리십니다. 네게 와 안기라고 하십니다. “어떻게요? 저는 지금 이렇게 더러운데요, 옷에 묻습니다!” “다 안다, 괜찮다. 어서 와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저를 기다려주십니다. 제 삶의 모든 사건들, 생각들, 사람들이 모두 모여 하나의 그림, 하나의 글자를 만듭니다.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과 기다림” 하느님께서 저에게 하나 하나 가르쳐주십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이 시간을 잊지 않겠습니다. 저와 함께 해주십시오. 당신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6-3 반복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지 않으셨다면, 엄청나게 많은 기적을 이루셨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지독한 실패입니다. 그런데 그의 실패, 십자가가 기적들보다 성공들보다 더 저를 낫게 만드는 것이 또 다른 기적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허락하십니다. 모든 것을 제게 맡기십니다. 그리고 다시 제 삶을 새롭게 계획하십니다. 사제는 신자들에 의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당신은 사제가 되기에 충분히 약합니까?”란 질문의 의미를 조금 알아듣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약하고 지치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불러 당신의 구원 사업에 일꾼으로 쓰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자녀들을 위해 약해져야 합니다. 약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6-4 성찬례 제정
이 아름다운 세상이 바로 우리 성찬례가 이루어지는 제대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빵, 포도주, 당신의 자녀들, 아름다운 세상이란 제대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손을 빌어 축성하고 함께 성찬례를 할 뿐입니다.
두 가지 일이 기억납니다. 수련 1년 차 때 병원 실습을 갔습니다. 성탄 미사를 환자분들, 병원 직원들과 가족들과 함께 했습니다. 미사 중에 아기 우는 소리와 핸드폰 벨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수련 1년 동안 아침에 조용한 수련원에서 대침묵 속에서 미사를 드려왔습니다. 아주 조용했지요. 1년 만에 아기 울음 소리와 핸드폰 벨 소리가 있는 미사를 했습니다. 이것이 진짜 살아있는 미사구나 싶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나누는 성찬례! 다른 하나는 철학 2년 차 때 공동체가 석모도로 피크닉을 갔습니다. 석모도에 있는 산에 올라 미사를 했습니다. 정상부근 넓은 바위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미사를 했습니다. 원장신부님께서 아래 내려다보이는 세상이 우리의 제대라고 하시면서 당신을 보지 말고, 세상을 향해 돌려 앉아서 미사하자고 했습니다. 주례 사제와 우리 모두는 세상을 향해 미사를 드렸습니다. 예수회원들이라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예수회 사제로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6-5 감사
저는 이제 충분합니다. 마음이 충만함으로 가득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세포 하나 하나가 다 느낄 수 있는 것만 같습니다. 당신께서 제가 제 자신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시고, 힘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스스로를 다시 격려하고 힘을 북돋워줍니다. 당신과 함께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 아무것도 안 해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과 함께 있느냐이지 제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었습니다. 과거가 오늘의 저를 만든다는 것을 알아듣는 것이 부활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하느님의 손길, 사랑, 돌봄이 오늘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당신과 함께하기에 충분합니다. 저는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당신으로 충분합니다.
7-0
하느님께서는 저의 불완전함과 더러운 손에도 불구하고 제 모든 것을 받아들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처럼 불완전한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보여주십니다. 제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자녀 중 한 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면서 우리 각자를 또한 특별한 방식으로 사랑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과 함께 가족입니다.
7-1 겟세마니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 피정을 시작할 때 저처럼 두려워하십니다. 저는 가만히 예수님 곁에 가서 섭니다. 그리고 그분을 감싸 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감싸 안습니다. 두려움에 몸을 떨고 계신 예수님이 느껴집니다. 잠시 후 제 체온으로, 하느님께 받은 사랑으로 그분의 몸을 따뜻하게 덥히고,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장면이 바뀌면서 어린 아이 두 명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합니다. 그 두 소년은 예수님과 저입니다. 같이 기도를 하다가 3명의 제자들에게 가서 기도하자고 초대합니다. 우리 5명은 함께 기도를 합니다.
우리 5명 사이에는 웃음, 기쁨, 행복이 가득합니다. 사랑은 사람들에게, 세상으로 퍼져나갑니다. 두 명의 귀여운 꼬마와 하느님 사랑의 강력한 힘이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랑의 빛 안에 두려움이 있을 자리는 없습니다.
7-2 베드로의 사랑 (3번 부인한 베드로)
베드로는 여전히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왜 울고 있습니까?” 당신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우는 것입니다. 저는 베드로가 힘을 얻고, 사랑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기를 바랬습니다. 우리 모두는 항상 하느님과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왜곡된 욕망, 한계, 유혹, 상처, 약함, 죄들이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을 가립니다. 하느님께서 하나씩 제게서 이것들을 없애주십니다. 그리고 제가 간직해온 사랑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아름답고 열정적인 제 마음이 제 안에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웁니다.
7-3 빌라도
빌라도는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이른 아침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잠을 깨우고 웬 사람을 죽이라고 외칩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한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합니다. 결국 예수란 사람을 못 박으라고 내어줍니다. 도대체 빌라도에겐 그 날 아침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빌라도의 뒤를 따라가면 그의 마음을 헤아려보려 합니다. 그런데 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합니다. 그는 뭘 느꼈을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빌라도는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빌라도는 예수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권위와 힘이 있었습니다. 왜 빌라도는 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게 놔두었을까요? 빌라도도 아마 아내와 아이들에게 좋은 남편, 아빠이지 않았을까요! 친구들 사이에서는 친절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지 않았을까요! 그런 그가 2000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일요일마다 이름이 불려집니다. 참 불쌍한 일입니다.
5월 23일
7-4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돕고 싶었고, 그의 고통에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저 그의 뒤를 따르며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슬퍼하는 마리아와 여인들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그들 곁에, 십자가 아래에 서 있습니다. 이 기도 안에서 저의 마음이 어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피와 그의 수난과 고통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 곁에 있고 싶고, 돕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를 두리번거리기만 합니다.
이 기도는 무슨 뜻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저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계실까요? 기도가 다시 건조해지고 그 동안 풍성하던 열매와 은총이 다시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을 합니다. 걱정하면서, 하느님을 찾고, 도와달라고 청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에게 당신 아들의 고통에서 하느님과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7-5 여인들을 위로하는 예수님
피를 흘리고 고통 중에 있는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여인들을 위로하실 수 있으시지! 그게 가능한가? 아프고 힘들고 쓰러질 지경인데, 옆 사람의 슬픔이 눈에 들어오다니, 그리고 그들을 걱정하시고 어루만져주시다니!!
예수님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그의 얼굴과 온 몸에서 나오는 사랑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을 봅니다. 그분은 그렇게 하셨고,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럼, 저는? 제가 예수님처럼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저를 도와주실 것이 확실한데. “당신처럼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느님!” 이라고 하느님에게 청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겪었던 그런 어려움으로 초대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제가 당신께 철저히 의지하면 가능할까요? 아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성령과 함께 할 수 있기를 청하지 못하고 머뭇거립니다.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 저의 마음입니다. 성령과 함께 사는 것이 피곤한 삶이란 것을 알기에 두렵습니다. 2005년 말에 평택 미군 기지 이전이 이슈였을 때 제가 서울에서 평택까지 걸었습니다. 제가 사회적, 정치적 이슈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그런 성격은 아닙니다만, 그 당시에 성령이 임하셨는지(?), 수련 2년 차 말에 일주일간 무전 도보 성지순례를 하듯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이틀쯤 걸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평택역 집회에 참여하고 돌아왔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성령과 함께 한다는 것을 깊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저의 반응은, “No, thanks!” 어설프게 성령이 임하신 모양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두렵습니다. 마더 데레사처럼 살고 싶으면서도 두렵습니다.
제가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합니다. 제가 지금 준비가 안 되어있다면, 당신께서 준비시켜 주세요, 제가 당신 사랑의 전선에 투입될 수 있기를 청합니다.
8-0 루카 24:13-35, 요한 21:1-19
평화로운 가운데 약간의 두려움. 현실에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두려움인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 하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인가?!
8-1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두 제자는 지난 3년의 체험을 서로 나눕니다. 어떻게 처음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께서 제자로 부르셨는지, 지난 3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지를 서로 이야기 합니다. 얼마나 많은 병자들이 건강하게 되었고, 죽었던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악령 들린 사람들이 평화로워졌던가! 두 제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들도 치유 받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베짜타 못가의 병자에게 무엇을 원하냐고 물으시는 예수님을 통해 자신들도 진짜 원하는 것이 뭔지 스스로에게 물었고, 병이 나았을 때 그들도 함께 나았다고 합니다. 3년 예수님 공생활을 함께 하면서, 마음과 몸이 얼마나 치유되었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고 스스로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야기 하면서 마음이 슬퍼집니다. 그 때 누군가 그들에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입니다. 세 명이서 함께 얼싸안고 뛰고 춤추고 너무 기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다른 이들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눕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표정이 밝지 않습니다. “왜 그러셔요, 예수님?” “너희를 파견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구나!” “걱정 마세요, 예수님! 저희와 함께 해 주실 것이잖아요, 그렇죠?” 예수님 얼굴이 밝게 변합니다. 우리 모두는 기쁨 속에 충만합니다.
8-2 요한 21,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배로 갑니다. 배를 보면서 처음 제자로 불렸던 그 시절이 생각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셔서 사람들을 가르치던 3년 전 모습이 떠오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가장 가까이서 3년을 보냈습니다. 기적을 직접 보았고, 가르침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묻히셨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침울해집니다. 그때 누군가 다가옵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고기 잡으러 가자. 난 물고기를 한번도 잡아본 적이 없는데, 산골에서 목수로 살아왔잖아! 나 좀 가르쳐주라, 어떻게 그물을 던지는 거니, 베드로! 자, 가자!” 밤새 고기를 잡고 아침에 뭍으로 나옵니다. 물고기와 그물을 정리하는 동안 예수님께서 아침을 준비하십니다. 함께 아침을 먹습니다.
5월 24일
8-3 루카 24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약하고, 지치고, 침울하고, 슬퍼할 때를 기다리십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지난 3년 동안 일어난 치유의 체험을 이야기 하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침울해지자 나타나셔서 격려하시고 북돋아주십니다. 그들 마음이 다시 불타오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제게 딱 맞는 시간을 아십니다. 그 때까지 참으셨다가 정확한 시간에 제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제게도 당신 자녀들,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지치고 약한 이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예, 하느님, 저를 그들에게, 그곳으로 보내주소서. 당신이 저와 늘 함께 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제가 필요한 곳으로 저를 보내주소서.”
8-4 요한 21, 미안한 베드로
예수님 수난에 함께 하지 못한 베드로는 미안해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죄인이고, 약함, 어둠, 한계를 지닌 존재입니다.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그런 저희들 곁에 계십니다. 어둠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제 어둠에 같이 계신 예수님을 선택할 것인지? 그것은 전적으로 제게 맡겨져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일을 하기에 약합니다. 그러나 저의 약함 곁에 당신이 있습니다. 제가 약할 때, 당신께서 저와 함께 하시기에 저는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 제가 이런 것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느님 저를 이곳으로 초대해주시고, 저의 약함, 강함, 행복, 슬픔, 어둠, 빛, 모든 것을 하나 하나 보여주시고 그 곁에 항상 함께 하신 당신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저의 전 생애에 빠진 적이 없습니다.
5월 24일 4시에 서원 갱신 미사를 했습니다. 5시에 미사를 마치며 8일 피정이 끝났습니다. 저의 백아흔 두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첫댓글 지금 제가 느끼고 알아듣는 모든 것이 지난 제 역사 안에 그대로 녹아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이제 하느님께서 이름 붙여서 제게 보여 주십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 제가 이런 것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느님 저를 이곳으로 초대해주시고, 저의 약함, 강함, 행복, 슬픔, 어둠, 빛, 모든 것을 하나 하나 보여주시고 그 곁에 항상 함께 하신 당신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저의 전 생애에 빠진 적이 없습니다. 아멘.
수사님의 기쁨, 고통들이 그대로 전해져 왔습니다. 피정안에서 주님과 행복하셨던 시간들 부럽습니다.^^기도나눔 감사 드립니다.
아직 다 못 읽었구요,, 서품식 때 꼭 좀 초대해 주십시요. ^ ^
휘~~리릭 읽을 글이 아니지요. 함께 기도하는 맘으로 읽어야만.....여건상 중반까지 읽었지만....... 사랑합니다. 그리고 왕창 응원합니다. jeje수사님.
외국에서 열심히 공부하시는 수사님 ~~~~ 파이팅! 기도드립니다
괜찮다. 두려워해도 된다. 단, 잊지 마라, 내안에 있어라,... - 성서에 366번 '두려워 말라'라고 한다고 그렇게 두려워 하는 저의 나약함을 싫어했읍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마저도 저의 일면이고 '나라고 예외겠는다,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 라는 말을 곱씹으면서 이겨가고 있었읍니다. 그런데 위 글 "두려워해도 된다. 단 잊지 마라, 내안에 있어라. 라는 말씀은 저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니 심장이 뜁니다. 아,...하느님은 나의 두려움마저도 감싸 안아 주시는 구나, 그렇지만 철저하게 원하시고 계시는구나, 당신안에 머물러 있기를,... 아멘,...
깊고 깊은 곳에서 만나신 주님을 저희와 함께 나눠주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항상 저희와 함께 계신 주님, 언제나 저희들의 찬미와 영광을 받으옵소서..
jeje 수사님! 함께 읽을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함께 계신 분인데 자꾸 외면하고픈 분......다시 돌아섭니다.
성령강림대축일에 읽으면서 마음이 격해집니다. 늘 주님의 은총 속에서 지내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