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때까지 가보자
동갑내기 이 친구를 만나긴 이십여 년 전이다. 난 밀양에서 창원으로 전입해 왔고 그는 시내로 먼저 와 근무하다 진해로 나갔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그와는 동향도 동문도 아닌 가르치는 교과가 같을 뿐이었다. 당시 마흔 고개를 앞둔 우리 또래 동료가 많았다. 다들 열정과 패기가 넘쳤다. 나는 초등에서 출발해 중등으로 전직했고 그들은 국립 사대를 졸업해 나와는 출발점이 달랐다.
우리가 만난 학교는 신설된 여고였다. 이후 서로는 연한이 되어 근무지가 바뀌었다. 그런 사이 내가 이사를 하고 보니 친구가 사는 아파트단지 같은 동 같은 엘리베이터를 썼다. 그는 8층이고 난 맨 꼭대기 15층이었다. 우리는 시내 만기가 되어 김해로 옮겨 근무했다. 운전을 하지 못하는 나는 옮겨간 학교 동료와 카풀로 출퇴근했다. 친구는 장유 신도시로 이사를 가 교류가 뜸했다.
같은 아파트단지에 살 때나 친구가 장유로 이사 간 이후도 우리는 가끔 안부를 나누고 술자리를 가졌다. 친구는 여행을 즐겨 다녔다. 국내는 물론 방학이면 나라 밖 여러 곳으로 자유여행을 다녀왔다. 한번은 친구가 장기 여행을 다녀왔다는 인도로 나가볼 것을 나에게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거기 다녀오면 중년 이후 인생관이 달라질 거라고 했다만 나는 친구의 청을 따라주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교단 종착점이 다가왔다. 나는 김해에서 창원으로 복귀해 지역 만기를 채웠고, 친구는 김해에서 연한이 다 되어 학교를 옮겨야 했다. 가장 이상적이기는 내가 김해로 가고 친구가 창원으로 오면 된다만 교원 전보인사가 그처럼 간단하지 않다. 이동을 원하는 교사는 몇 지 요소로 점수를 산정해 서열이 정해진다. 무엇보다 희망 근무 지역 같은 교과끼리 경합이 적어야 한다.
나는 그새 작년 봄 교단생활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지 고민을 좀 했더랬다. 창원에서 지역 만기로 근무지를 바깥으로 옮기면 출퇴근 가능한 학교가 예상되지 않아서다. 그래서 정년까지 가지 않고 자투리 잔여기간은 털고 명예퇴직을 생각하고 있었다. 작년 여름까지 그 생각에 변하지 않았는데 가을에 들면서 마음이 흔들렸다. 몇몇 친구나 주변 동료들이 정년까지 완주해주길 바랐다.
지난 봄 신학기가 시작되기 전 교원 인사이동 뚜껑이 열렸다. 난 옮겨갈 학교를 접하고 무척 난감했다. 아무런 연고가 없고 희망도 하지 않은 거제로 정해졌다. 창원에서 그곳으로 옮겨가는 국어과 교사가 내 말고 둘이 더 있었다. 김해외고에서 근무하던 친구도 이웃 학교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우리는 운명의 장난처럼 정년을 앞둔 즈음 낯설고 물 선 거제로 옮겨 근무하게 되었다.
난 주중 연사에 와실을 정하고 친구는 옥포에 머물렀다. 우린 지난 상반기 퇴근 후 몇 차례 만나 동병상련 처지를 헤아리며 맑은 잔을 채우고 비웠다. 다행이 난 담임을 맡지 않고 업무가 없었는데 친구는 담임을 맡기더란다. 그런 속에 서로는 독거 중년으로 거제에 적응해 그럭저럭 지냈다. 여름 방학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연초삼거리에서 마주 앉으니 친구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친구는 그새 고민하다 정년까지 가질 않고 이번 학년도를 마지막으로 명예퇴직을 할 거라고 했다. 개학 후 그 뜻을 관리자에게 전했더니 맡은 담임을 다른 동료로 교체해주더란다. 정년까지 가주면 좋을 텐데 친구는 결심이 분명했다. 이후 서너 달 지난 십일월 끝자락이다. 지난주 명예퇴직 접수가 마감된 시점이라 친구가 어떤 결정을 했는지 궁금했다. 수요일 퇴근 후 만나기로 했다.
친구와 몇 차례 만난 삼거리 돼지국밥집으로 나갔다. 전에도 그랬지만 손님이 없어 썰렁했다. 저녁 식당가 손님이 뜸함은 근래 거제 경기를 보여주는 지표였다. 먼저 자리를 차지해 안주를 시켜 놓으니 친구가 나타났다. 친구는 몇 달 새 얼굴이 해쓱해 보였다. 난 손을 덥석 맞잡고 갈등은 어떡했느냐 따지다시피 물었다. 마음을 거두고 갈 때까지 가 볼 거라고 했다. 어찌나 고맙든지. 19.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