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니파 맹주 사우디, 시아파 종주국 이란 남자 가라테 겨루기 결승서 맞붙어
경기 압도하던 사우디 선수 충격의 실격패..올림픽 사상 첫 金 날아가
매트 뻗고도 우승한 이란 선수 "이렇게 이기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슬람 수니파의 종주국을 자부하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시아파의 맏형을 자처하는 이란. 이슬람세계 종파분쟁의 선봉에 있는 두 거대 이슬람국가를 대표하는 가라테 선수들이 올림픽 결승전에서 만났다. 우여곡절 끝에 열린 도쿄올림픽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숨막히는 라이벌전이 깜짝 성사된 것이다. 경기는 대진표만큼이나 극적으로 마무리됐다. 손에 거의 들어온 듯 했던 사우디의 역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이 반칙패 선언으로 눈앞에서 날아간 것이다.
7일 도툐 부토칸에서 열린 가라테 쿠미테 남자 75kg이상급 결승전에서 이란의 사자드 간자데가 상대인 사우디의 타레그 하메디로부터 발차기로 얼굴을 가격당한 뒤 쓰러져있다. /신화 연합뉴스
7일 도쿄 부도칸에서 열린 남자 75㎏ 이상 급 쿠마테(겨루기) 결승전에서 이란의 사자드 간자데(29)가 사우디아라비아의 타레그 하메디(23)에게 일격을 맞고 매트위에 쓰러졌지만, 심판 판정에 따라 반칙승을 거두고 금메달을 땄다. 경기는 갑작스럽게 끝났다. 경기를 지배했던 것은 원래 사우디의 하메디였다. 경기 시작 9초만에 3점 짜리 공격을 성공시키며 4대 1로 앞서가고 있었다. 거침없이 몰아붙이던 하메디는 간자데의 목을 향해 하이킥을 날렸고, 간자데는 곧바로 매트에 뻗어버렸다. 눈은 뜨고 숨은 쉬고 있었지만, 몸을 가누지 못했다. 의료진이 달려와서 산소마스크를 씌우며 긴급 조치를 하고 간자데는 들것에 실려나갔다.
7일 도쿄 부도칸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가라테 남자 75kg 이상급 결승전에서 이란의 사자드 간자데가 사우디의 타레그 하메디로부터 얼굴을 가격당한뒤 쓰러져있다. /신화 연합뉴스
승리를 확신한 하메디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매트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어 심판진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눴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반전이 일어났다. 간자데를 매트위로 뻗게한 고공킥은 규정을 위반한 반칙 행위로 결론짓고 반칙패를 선언한 것이다. 사우디가 염원하던 첫 올림픽 금메달이 눈앞에서 날아가버리는 순간이었다. 들것에 실려갔던 간자데는 치료중에 자신이 승리했다는 통보를 받았고, 시상식장에 걸어나왔다. 하메디도 항의하지 않고 경기 결과를 받아들였다. 로이터통신은 둘 다 무표정한 표정이었다고 전했다. 그래도 두 선수는 시상식에서 서로를 끌어안으며 격려했다.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간자데는 “금메달을 따서 좋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기게 돼 슬프다”고 말했다. 하메디는 “물론 내가 원한 것은 금메달이었기 때문에 심판 판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한 경기에 만족하고 판정 결과를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결승전 상대 이란의 사자드 간자데가 쓰러져 긴급 의료조치를 받는 동안 사우디의 타레그 하메디가 기다리고 있다. /Du Yu
금메달이 싫은 나라가 어디 있겠느냐만 좀 더 절실한 쪽은 사우디였다고 할 수 있다. 이란은 이번 대회에서 딴 3개를 비롯해서 역대 여름올림픽에서만 금메달 24개를 획득한 이슬람권의 스포츠 강국이다. 반면 사우디는 도쿄 대회 전까지 올림픽 메달이 은1·동2였다. 사우디는 전세계 무슬림의 85%를 차지하는 수니파의 맹주이고 중동 축구의 최강자로 군림했지만, 전세계국가들이 자존심을 걸고 경쟁하는 올림픽 대회에서는 유독 힘을 쓰지 못했다.
도쿄올림픽 남자 가라테 75kg 이상급 시상식이 끝난 뒤 메달리스트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결승전에서 사우디의 타레그 하메디(맨 오른쪽)에게 얼굴을 얻어맞았지만 실격승을 거둔 이란의 사자드 간자데(오른쪽에서 둘째)의 표정이 우승자답지 않게 밝지 않다. /사우디 올림픽위원회 트위터
사우디와 이란은 현재 아라비아 반도 남부 예멘 내전에서 각각 정부군과 후티 반군을 지원하며 사실상 대리전을 벌이고 있다. 하메디는 이번 올림픽에서 ‘언더독’으로 분류됐으나 강자들을 잇따라 제압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그가 이란의 간자데를 이겼더라면, 이슬람 종파 라이벌 구도와 맞물려 극적인 효과를 자아낼 수도 있었다. 사우디 언론들과 외신들은 차분하고 성숙한 태도를 보인 하메디에 대해 스포츠맨십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사우디 영문 일간 아랍뉴스는 “은메달도 놀라운 결과지만, 하메디는 손안에 들어온듯했던 금메달을 놓쳐 몹시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하메디는 4년 뒤 설욕할 기회가 현재로선 없다.
사우디 올림픽위원회가 타레그 하메디의 은메달 획득을 축하하면서 공식 트위터에 올린 게시물. /사우디 올림픽위원회 트위터
가라테는 이번 도쿄대회에 한해 일시적으로 정식종목으로 열렸기 때문이다. 일본은 올림픽 영구종목에 포함되기 위해 치열한 로비전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라테가 향후에도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편입될 경우 태권도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사흘간 열린 가라테 경기는 역동적이고 참신한 모습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논란과 분노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75㎏급 심판 판정은 더 많은 관객과 만나려는 가라테에게 좋은 조짐은 아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