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커피 문화 100년
외제 상표만 붙으면 ‘오케이’
1960년대 말, 마침내 정부는 커피의 암거래에 따른 세수稅收 결함과 연간 780만 달러의 외화 소모를 막는 한편, 커피의 유통 질서를 양성화시킬 목적으로 국내 커피 메이커의 설립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1970년 9월 10일부터 시판한 동서식품의 ‘레귤러커피’는 1파운드에 680원으로, 하루 평균 4000통씩 주로 다방에 판매되기 시작하였다. 1971년도의 1년간 커피 소비량은 300만에서 350만 파운드로 추정되는데, 이것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14억 원이 넘는다. 국산과 외제의 사용 비율은 3 대 7로서, 전체 소비량의 10분의 7은 여전히 미군 피엑스와 커미서리에서 흘러나온 불법 외제품이었다. 동서식품도 시판 뒤 10개월 동안 미군 피엑스에 40만 달러어치, 커미서리에 12만 달러어치를 납품했다. 명목으로는 50만 달러 이상의 외화를 번 것으로 되지만, 실제로는 이들 가운데 많은 양이 다시 국내 암시장으로 역류되는 기현상을 빚었다. ‘커피는 미제가 좋다’는 고정된 소비 풍조와, 국산 커피가 미군 피엑스에서 나오는 것보다 비싸다는 두 가지 취약점 때문에 국산 커피는 여전히 소비자의 관심과 입맛에서 제외되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웃지 못할 현상은, 미군 피엑스에 납품된 동서식품의 국산 커피가 시중으로 흘러나와 우회 소비되던 이 당시에, 피엑스에 납품한 커피의 상표는 전과 다름없이 ‘맥스웰하우스’로 붙여졌다. 그러니까 소비자들은 국산 커피를 외제 커피로 알고 즐겼다. 이것은 국산 동서식품의 커피가 맛에서는 외제 커피와 전혀 차이가 없음을 소비자 스스로 증명한 셈이었다. 참고로 말하면, 이때 국산 ‘레귤러커피’ 1파운드에 680원인데 비해 피엑스에서 나온 커피는 1파운드에 410원쯤이었다. 이처럼 가격 차이가 나는 요인은 국내 시판 커피는 원두를 수입할 때 20퍼센트의 관세가 붙으며 공장에서 출하될 때 50퍼센트의 물품세가 또 붙기 때문이었다.
‘꽁피’를 팔아도 다방은 성업하고
일찍이 서양에서 커피가 품귀 현상을 빚거나 공급이 달릴 때 대용 커피가 등장하였듯이, 우리나라에서 사이비 커피가 등장한 까닭도 커피를 구하기가 쉽지 않고, 또 고가高價 상품이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가 다방마다 독특한 맛을 내어 손님을 끌던 것이 유행처럼 번져서 저마다 ‘개성 있는’ 커피 개발에 다방의 운명을 걸던 풍조도 사이비 커피가 등장한 배경이 되었다. 특히 저마다 독특한 커피 맛 경쟁이 과열됨으로써 다방 주방장들의 주가가 뛰어올라 한때 주방장 스카우트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면, 주방장 가운데 극히 일부의 주방장은 그릇된 수법으로 커피 조리를 하는 일도 있었다.
숙지황 같은 한약재를 섞어 끓이거나 담뱃가루, 톱밥 따위를 넣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재탕하더라도 맛이 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계란껍질까지도 사용하는 등 변칙 조리가 난무했다. 이른바 ‘꽁초 커피’, ‘꽁피’, ‘톱밥 커피’를 비롯하며 미제 인스턴트 커피 소량에다 볶은 설탕 파우더를 섞어서 순수 외제 커피의 대용으로 팔았던 ‘고바우 커피’에 이르기까지, 한때 커피의 변칙 조리가 성행했던 원인은 한마디로 늘어나는 커피 애호가들을 겨냥한, 정도를 벗어난 상업주의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우리나라 커피 문화는 제품의 유통에서 조리에 이르기까지 변칙과 불법이 난무하는 가운데 파행적으로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국의 다방 업소가 6700여 개(이 가운데 서울만 3000여 개)나 되었던 1971년도의 커피 소비량은 ‘레귤러커피’가 3000톤, 인스턴트 커피가 350톤으로 모두 3350톤이었다. 연간 국민 일인당 ‘레귤러커피’는 21잔, 인스턴트 커피는 7잔씩을 마셨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레귤러커피’의 경우 1파운드당 80잔에서 100잔을 뽑아야 제 맛이 나게 되어 있으나, 시중 다방에선 배가 넘는 200잔에서 250잔까지 뽑아내는 실정이었다. 그러므로 실제로 마신 잔 수는 앞서 밝힌 수보다 훨씬 많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커피 수요가 늘고 이에 따라 커피콩 수요량도 늘게 되자 외화 절약을 외치던 정부는 커피콩 수입량에 제동을 걸기 시작하였다. 물론 커피콩 수입은 정부의 허가 사항이었으므로 줄곧 통제를 받아왔으나, 석유 파동과 같이 수입 원자재 값이 폭등해 외화 소모량이 커질 때마다 커피콩 수입은 가장 먼저 찬바람을 맞아야 했다. 경제 개발에 아무런 보탬도 못 주는 커피에 아까운 외화를 날릴 수 있느냐는 것이 관리들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76년의 경우처럼 커피콩 수입량을 10퍼센트나 줄인 정부는 고심 끝에 국산차 마시기 운동을 장려하기 시작하였다. 달러를 마시는 커피 대신에 국산 홍차, 쌍화차, 인삼차, 컴프리차, 과향차 따위의 국산차를 마시도록 권장하였다. 그러나 이미 커피가 일반에 깊숙이 자리잡은 뒤여서 국산차 장려책은 그다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커피 가격 자유화와 커피 인구의 급격한 증가
1974년 12월에 커피 가격이 자유화되면서 다방 커피는 한 잔당 80원으로 인상되었고, 1975년 11월에 다시 100원으로 올랐다. 서울 명동 일대와 중심가 일부에서는 커피 전문점이 등장하여, ‘산토스커피’, ‘모카커피’, ‘콩고커피’ 등 외제 커피 이름을 붙여 보통 커피 값의 두세 배인 250원에서 350원까지 받음으로써 정부의 통제 정책은 대세를 막지 못했다. 이처럼 커피 인구가 얼마나 급격하게 증가했는지는 커피콩 수입량에서도 잘 나타난다. 1964년에 94톤을 수입했던 커피콩이 1977년에는 2325톤으로 늘어났으며, 1978년의 경우에는 피엑스를 통해 유입된 것까지 합해서 3500톤쯤으로 추산된다. 이 양은 10그램을 한 잔으로 계산할 경우 모두 3억 5000만 잔으로, 국민 한 사람이 1년에 열 잔 정도를 마신 결과인데, 그 당시 일본이 72잔, 미국이 703잔, 노르웨이 894잔, 덴마크가 1044잔이었던 것에 비하면 여전히 커피 후진국쯤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의 커피 인구가 전체의 10퍼센트쯤 되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실제로 마신 사람의 평균 잔 수는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커피 소비량이 늘면서 국내 커피 메이커들의 시장 경쟁도 간단치 않았다. 1970년대에는 동서식품과 미주산업이 주도해나갔으나, 1980년에 가서는 원두커피 시장의 75퍼센트를 장악하기에 이른 동서식품의 ‘맥스웰’과 20퍼센트 점유의 미주 ‘MJC’ 외에도, 씨스코의 ‘렉스’와 태양산업의 ‘자이언트’가 경쟁의 틈바구니에 끼어들었다. 이 당시의 ‘레귤러커피’는 국내 전체 커피 수요의 약 60퍼센트를 점하고 있었으며 대부분 호텔이나 다방에서 소비되고 있었다.(계속)
출처 : 한겨레 블로그 http://blog.hani.co.kr/limbo/23313
첫댓글 빗새님이 석동님의 숙제를 풀어주셨군요...
빗새님 고맙습니다.
이 수고를 글로서 답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일기장을 뒤져보았더니 79년부터의 자료는 있는데 75년엔 다방 출입을 못할 나이여서 그랬는지 자료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위의 기사와 동아일보 자료를 확인했는데 75년에 80원이었다가 100원으로 인상된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에 보탬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빗새님 애쓰셨습니다.
이런 연유로 75년에 커피 한 잔 값이 80원이었음을 알게 됐지요.... 큰 수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