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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북한 해군,
서해안에서 무력도발 (제2연평해전)
2002년 6월 29일 서해교전 당시 북한
경비정 PCF684호(215t)가 우리 해군의
공격으로 화염에 휩싸인 채 또다른 북한
경비정에 의해 황해도 등산곶 쪽으로
예인되고 있다.
한국은 물론 전세계가 월드컵 축제로 들
떠있던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25
분쯤 서해 연평도 서쪽 14마일 해상에서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측 경비정
의 기습 포격으로 남북 해군간에 교전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27명이 탑승했던 우리 해군
고속정 1척이 침몰했으며, 이 고속정을
지휘하던 윤영하(28) 대위 등 우리 해군
5명이 전사했고, 19명이 부상당했다.
해군 고속정으로부터 집중 대응사격을
받은 북한측의 발포 경비정에서도 화염
이 발생, 또 다른 경비정에 의해 예인됐
다. 군 당국은 50명승선 규모인 이 경비
정에 탔던 북한 병사들 가운데 적어도
10명 이상 사망하고 상당수가 부상을
입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이날 교전으로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
후 화해·협력 분위기를 보였던 남북관계
가 급속히 냉각냈다. 남북 해군의 교전은
1999년 6월의 ‘연평해전’ 이후 3년 만의
일이었다.
국방부 합동참모본부는 이날 오전 11시,
전 군에 경계강화 지시를 내렸다. 유엔사
령부는 북한측에 경위 설명을 요구하기
위한 장성급 회담을 이날 오후 6시에 갖
자고 제의했으나 북측의 불응으로 이뤄
지지 않았다. 북한은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모두 11차례에 걸쳐 군사적 도발을
했으며, NLL 침범은 2002년 들어 14
차례, 6월달 만 6번째에 해당하는 것이
었다.
▶2009년 중국 열차
정면 충돌사고…63명 사상
중국 중남부 후난(湖南)성에서 2009년 6월 29일 오전 열차 충돌사고가 발생, 최소 3명이 숨지고 60여명이 부상했다. 이날 오전 2시34분께 후난성 천저우(침 林+언덕부방 州)역 선로에서 창사(長沙)에서 출발해 선전(深천 土+川 )으로 가는 열차(K9017)와 퉁런(銅仁)에서 선전 서역으로 가던 열차(K9063)가 부딪쳐 객차 4량이 탈선했다.
이 사고로 열차에 타고 있던 승객 2명이 숨지고 주택가에 살고 있던 주민 1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승객과 주민을 합쳐 60여명이 다쳤다.
CCTV는 이날 현장을 연결해 구조작업 상황을 중계했으며 일부 객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된 상태였다.
류즈쥔(劉志軍) 철도부장과 천저우 당서기, 시장 등 중앙과 지방당국의 책임자들은 보고를 받고 즉시 현장으로 달려와 구조와 복구 작업을 지휘하고 있다.
앞서 후난성에서는 지난 1997년에도 열차 충돌사고가 발생해 126명이 사망하고 200여명이 다쳤으며 지난해 4월 산둥(山東)성 쯔보(淄博)시에서도 열차 충돌사고로 66명이 숨지고 247명이 부상하는 등 그동안 중국에서 열차 사고가 잇따라 발생했다.
▶ 2007년 오늘,
애플 #아이폰 최초 판매개시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3380856&cid=42171&categoryId=58265
▶2004년 우초 방일영 선생
송덕비 제막
▶2004년 황온순 원불교 종사 열반
▶2003년 영화배우 캐서린 헵번 사망
2003년 6월 29일, ‘할리우드의 전설’이 숨을 거뒀다. 60년 영화 이력 동안 네 번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캐서린 헵번이 파킨슨병을 포함한 여러 합병증에 시달리다 이날 편안히 눈을 감은 것이다.
헵번은 1930~50년대 할리우드 황금기를 대표하는 ‘연기파 여배우’의 대명사였다. 또렷한 광대뼈, 적갈색 머리, 상류층 억양 등이 특징인 그녀는 강한 여성 캐릭터를 주로 맡았다. 헵번은 ‘모닝 글로리’(1933) ‘초대받지 않은 손님’(1967) ‘겨울의 사자’(1968) ‘황금연못’(1981) 등으로 네 차례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고 모두 12차례 후보로 지명되는 진기록도 남겼다. 이 때문에 ‘할리우드의 전설’이라는 별명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동시대 여성들은 그녀를 역할 모델로 삼을 정도였고, 1985년 한 여성잡지는 헵번을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여성으로 뽑기도 했다.
1907년 5월 코네티컷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여성운동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볼티모어의 증권사에서 일하다 1928년 뉴욕에서 ‘요즘 나날’이라는 연극으로 데뷔했다. 그해 사교계 인사 러들로 오그덴과 결혼한 헵번은 6년 만에 이혼한 후 “결혼은 사랑과 명예를 갉아먹는 끔찍한 일”이라며 “결혼을 믿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 믿음대로 그녀는 이후 다시 결혼하지 않았다. 다만 배우 스펜서 트레이시와 함께 9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26년간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헵번은 ‘미국 여성들에게 처음으로 바지를 입힌 여배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배우’(1999년 미국영화연구소(AFI))등에 선정되기도 했다.
▶2002년 서해 연평도 부근에서 제2차
서해교전이 발생, 해군 6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하다
▶2002년 한국 월드컵 3-4위전서
터키에 2대3 패배. 4위 달성
아시아 첫 4강신화를 달성한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이 월드컵 대장정을 아쉽게 마감했다. 29일 대구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3·4위전에서 한국은 터키에 2대3으로 패해, 4위에 머물렀다. 한국과 터키의 3·4위전은 다소 맥이 빠질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시종 한 치 양보 없는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됐다. 하지만 승리는 골 결정력과 수비력에서 앞선 터키의 몫이었다.
한국은 경기 개시 11초 만에 수비수들이 볼을 돌리다 가로채기를 당하면서 하칸 쉬퀴르에게 선제골을 내줬다. 역대 월드컵 최단시간 골기록.
허를 찔린 한국은 전반 9분 터키 오른쪽 골포스트를 맞고 네트에 빨려들어가는 이을용의 그림 같은 직접프리킥으로 동점을 만들었다. 하지만 김태영과 최진철이 빠진 수비 공백이 너무 컸다. 터키의 투톱으로 나선 하칸 쉬퀴르와 일한 만시즈는 다소 느슨한 한국수비라인을 2대1패스로 단숨에 뚫으면서 전반 13분과 32분 추가골을 터뜨렸다.
두 골 모두 하칸 쉬퀴르의 패스에 의한 일한 만시즈의 득점이었다. 한국은 후반 맹반격에도 불구, 터키 골키퍼 뤼슈튀 레치베르의 선방에 번번이 막히다 후반 48분에야 송종국의 중거리슛으로 한 골을 만회했다.
경기장 관중과 함께 전국 총 311곳 250만여명이 단체응원을 펼친 ‘붉은 악마’들은 패배에 아쉬워하면서도 불같은 투혼을 보였던 한국선수들에게 따뜻한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또 승리한 터키에게도 축하의 박수를 보내 ‘형제애’를 과시했다.
▶2001년 국세청 언론사 세무조사 발표
2001년 6월 29일, 손영래 서울지방국세청장이 국세청 12층 회의실에서 `조선일보 등 6개 신문사를 검찰에 고발한다`는 내용의 발표를 하고 있다.
장장 142일 간에 걸쳐 23개 중앙 언론사들을 대상으로 한 국세청의 세무조사로 2001년 한 해 내내 여야간의 정쟁 심화와 국론 분열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국민들도 `내편 네편`으로 갈라졌고, 언론과 지식인들도 이분법 잣대로 서로를 부정했다.
`엄정한 징세권 사용`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정부의 주장에 일부 마이너 신문과 정부소유의 방송, 시민단체들이 가세해 해방직후 이 사회를 지배했던 좌우갈등과 흑백논리가 재연됐다. 2001년 6월 29일 국세청이 TV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언론사 세무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매출액이 중소기업 수준에 불과한 언론사에 총 1,000명이 넘는 인력을 집중적으로 투입, 조사한 결과가 철저하게 비판언론사를 표적으로 삼았음이 확인되자, 야당과 조선-동아일보 등 정부에 비판적인 신문사들은 `비판언론 길들이기`라며 강력 반발했다.
비판적인 신문사에는 최고 864억원이라는 추징세액을 집중 부과하고, 조선-동아-국민일보 대주주(사주)는 검찰에 고발, 구속시킨 데 반해, 매출액이 신문사에 비해 3∼4배나 많은 KBS MBC 등 방송사에 대해서는 "조세범칙 혐의가 없다"며 검찰에 고발하지 않은 것이 형평성을 잃은 단적인 예로 지적됐다. 특히 국내 신문사들이 지난 10년간 낸 세금의 총액보다 많은 2936억원의 법인세 등을 납부한 조선일보가 추징세액이 가장 많고, 1988년 창간 이후 12년 동안 법인세를 단 한 번도 낸 일이 없는 한겨레신문에는 11억원 만을 부과해 두고두고 논란이 됐다.
언론사 전체에 5056억원의 세금을 추징하고, 사주를 고발, 구속케 한 국세청 발표에 한나라당은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에 재갈을 물려 차기 대선에서 유리한 언론 상황을 조성하며, 김정일의 서울 답방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세무조사를 실시했다"고 평가했다.
▶2001년 해군-해병대 여성 장교 국내 첫 탄생
해군 및 해병대에 창설 이래 처음으로 여군 장교들이 생겼다. 2001년 6월 29일 거행된 제96기 해군사관후보생과 제87기 해병간부후보생 수료 및 임관식에서 해군 13명, 해병대 7명 등 모두 20명의 여군장교(소위)가 처음 배출됐다.
2001년 3월 해군 32대1, 해병 17대1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된 이들은 이후 14주간의 혹독한 군사훈련을 단 한 명의 탈락자도 없이 끝마쳤다. 4시간 동안 연병장 50바퀴를 도는 명예구보도 해냈다.
이중에는 해군의 경우 함정을 타는 항해병과가 7명이며, 해병대의 경우 병사들과 함께 발로 뛰어 남성들도 힘들어하는 보병병과가 4명이다.
▶2000년 이한동
제33대 국무총리 취임
▶1998년 금융감독위원회, 대동은행-
동남은행-동화은행-경기은행-충청은행
등 5개 퇴출은행을 확정
▶1997년 마이크 타이슨, 경기 도중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어 실격패
세기의 대결’로 관심을 모은 1997년 6월 29일(한국시각) 에반더 홀리필드(챔피언)와 마이크 타이슨(도전자)의 WBA 헤비급 타이틀전에서 타이슨은 3회 홀리필드의 귀를 두차례나 물어뜯는 복싱사상 초유의 반칙 끝에 실격패했다. 타이슨은 경기가 풀리지 않자 핵주먹 대신 강력한 이빨을 사용했다.
1997년 6월 29일 WBA 헤비급 타이틀
전에서 챔피언 에반더 홀리필드(오른쪽)
의 귀를 물어뜯고 있는 마이크 타이슨.
1997년 6월 29일 WBA 헤비급 타이틀전에서 챔피언 에반더 홀리필드(오른쪽)의 귀를 물어뜯고 있는 마이크 타이슨
3라운드 40여 초를 남긴 시점. 초반 클린치 작전으로 애를 먹던 타이슨은 홀리필드가 팔을 붙들고 늘어지자 이빨로 오른쪽 귀 윗부분을 덥석 물어뜯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의 중상이었다. 타이슨은 3회전 때 마우스 피스를 물고 있었지만 뱉어버린 뒤 일을 저질렀다. 그리곤 타이슨은 입을 우물거리다 귓조각을 뱉어 내 버렸다. 타이슨은 고통 때문에 펄쩍펄쩍 뛰는 홀리필드를 쫓아와 한방 먹이려는 태세였지만 경기는 4분 동안 중단됐다.
주심 밀스 레인은 실격패를 선언하려 했다. 그러나 링 닥터의 판단은 경기에 지장이 없다는 것. 주심은 타이슨에게 경고한 뒤 게임을 속행했지만 이성을 잃은 타이슨은 3라운드 종료 직전 다시 상대의 왼쪽 귀를 물었다. 먼저번처럼 살점을 떼어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실격패 당하기엔 충분한 행동이었다.
▶1995년 미국 우주왕복선 아틀란티스
호 러시아우주정거장 미르에 도킹 성공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풍백화점 5층 건물 2개동 북쪽(정문에서 왼쪽)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 501명이 사망하고 939명이 부상했다.
1995년 6월 29일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사망 5백1명, 부상자 9백30
명을 기록하는 등 해방 이후 단일사고로
는 최대규모였다.
1995년 6월 29일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사망 5백1명, 부상자 9백30명을 기록하는 등 해방 이후 단일사고로는 최대규모였다
단일사고로는 건국이래 최대의 사망자를 낸 사고로 기록됐다. 사고당시 백화점안에는 고객 1천여명과 직원 5백~6백명이 있었다. 백화점 건물은 폭격을 맞은 듯 폭삭 가라앉아 삽시간에 폐허로 변했으며 수십명이 피투성이가 돼 밖으로 튀어 나오는 등 현장주변은 아비규환을 이뤘다. 사고현장은 콘크리트 잔해와 철근 구조물이 수북이 쌓였고 파편이 인근 법원건물에까지 튀었다. 삼풍백화점 건물은 며칠전부터 벽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으며 이날 오전 일찍부터 4층 천장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삼풍백화점 사고는 부실설계, 부실시공에 의한 품질사고로서 사고원인이 매우 복합적이었다. 설계와 시공만 부실한 것이 아니라 유지관리의 부실, 기술을 무시한 건축주의 독선, 부정부패와 뇌물관행을 기본으로 한 건설업계의 비리 등 총체적인 부실의 결과였다.
▶1994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총리로 선출
▶1994년 황낙주 국회의장 피선
▶1993년 육군 상록수부대, 유엔평화
유지군(PKO)으로 소말리아 파병
▶1992년 박준규 국회의장 피선
▶1987년 노태우 민정당 대표,
6.29선언 발표
개헌논의 금지 및 제5공화국 헌법하에서 차기 대통령을 뽑도록 한다는 4.13호헌조치 이후 이에 대한 철폐를 요구하는 성명, 집회 및 시위가 전국민적 차원으로 확산되면서, 당시 민정당 대표위원으로 대통령후보로 지명됐던 노태우 의원이 1987년 6월 29일 전격적으로 8개항의 시국수습대책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1.여야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선거를 통해 1988년 2월 평화적 정부이양을 실현 2.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도록 대통령선거법 개정 3.김대중씨를 포함한 시국사범에 대해 광범한 사면,복권 실시 4.구속적부심 등 인권보장 조항의 강화 및 기본권 신장 명시 5.언론자유 창달을 위한 언론관계법 개정 및 언론의 자율성 보장 6.균형있는 사회발전을 위한 지방 교육자치제의 실시 7.정당활동의 자유보장 및 육성 8.맑고 밝은 사회건설을 위한 과감한 사회정화조치 및 사회비리척결 등이었다.
6.29선언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 개인의 견해로 전격발표되었으나 7월1일 전두환 대통령의 `시국수습에 관한 대통령 특별담화`로 정부와 민정당의 공식입장으로 확정됐다.
▶1986년 86년 멕시코 월드컵서
`축구의 신` 마라도나 등장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펠레에 이어 또 한 명 `축구의 신`이 등장했다. 6월 22일 잉글랜드와의 준결승에서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는 `신`으로 거듭났다.
공중으로 뛰어올라 슛을 쏘고 있는
아르헨티나 출신 마라도나(오른쪽).
그는 잉글랜드 골키퍼와 1대1 상황에서 공중에 뜬 공을 손으로 건드려 넣었다. 주심은 보지 못했고, 경기 후 마라도나는 `그것은 신의 손이 한 일`이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그가 두 번째로 뽑아낸 골은 완벽한 개인기로 빚은 신기(神技)였다. 마라도나는 센터라인에서부터 잉글랜드 수비 5명을 제치며 드리블한 뒤 득점하고 포효했다. 마라도나는 당시 서독과의 결승전 결승골을 어시스트해 아르헨티나에 월드컵을 안겼다. 숱한 화제 속에 끝난 멕시코 월드컵은 지금도 전세계 축구팬에게 `마라도나의 월드컵`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경기장에서는 신이란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천재였지만, 사생활에선 끊임없이 광기를 뿜어낸 `문제인간`이었다. 아르헨티나 역대 최연소인 16세에 국가대표로 뽑혔고, 1982년부터 1994년까지 네 차례 월드컵에 출전해, 1986년 우승, 1990년 준우승했다. 마라도나는 국가대표 외에도 그가 소속했던 아르헨티나의 보카 주니어스와 이탈리아의 나폴리팀에 무수한 우승트로피를 헌납했다. 하지만 그는 이탈리아 진출 후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기자들에게 공기총을 쏘아대고, 툭하면 여자문제가 불거졌다.
결국 마라도나는 1994년 미국월드컵 조별 리그 도중 도핑 테스트에서 흥분제를 복용한 사실이 드러나 쫓겨났다. 마라도나에게는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고, 악동과 축구의 신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던 마라도나의 선수생활도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대회에서
아르헨티나가 서독을 3대2로 이겨
우승(MVP는 마라도나)
▶1984년 정래혁씨 의원직 사퇴
▶1981년 전인대 제11기 6중 총회,
등소평이 당군사위원회 주석으로
1976년 4월 7일 4인방에 의해 세번째로 실각했다 4인방 제거후 1977년 7월 19일 다시 국방상 섭검영의 도움으로 세번째 부활에 성공한 등소평이 1981년 6월 29일 전인대 제11기 6중 총회에서 아직 파워게임에 미숙한 모택동 후계자 화국봉을 실각시키고, 당군사위원회 주석에 취임함으로써 1997년 사망할 때까지 최고지도자로 군림했다. 이날 총회에서호요방 총서기는 주석으로, 화국봉 주성은 부주석으로 임명됐다.
등소평은 `포스트 毛의 최고지도자`로서 중국의 개방-실용노선을 주도함으로써 `모택동 시대`와 결별하는 길을 걸었다. 6중 총회에서는 문화대혁명을 전면 부정하는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가 채택되기도 했다. 이 역사결의 7항에서는 모택동의 무오류성도 부정되었다.
▶1981년 전두환 대통령,
말레이시아 도착
▶1980년 북한주민 1명
이영우 월남 귀순
▶1979년 카터 미국 대통령 방한
▶1977년 밴스 미국 국무장관, 남북한
미국 중국 등 당사국회담 개최 촉구
▶1971년 소련의 우주비행사 도브로볼스키 사망
1971년 6월 6일 발사되어 24시간의 우주비행과 궤도 스테이션 `살류트`와의 도킹을 성공시킨 소련 유인우주선 소유즈 11호가 지구귀환을 위해 대기권에 돌입, 낙하산으로 예정지점에 연착륙을 시도했지만 3명의 비행사는 좌석에 앉은 채로 사망했다.
세 비행사의 사망원인은 명확치 않지만 계기류가 정상적으로 작동했고 우주선내에 화재 흔적도 없었기 때문에 우주선내의 기압이 어떤 이유로 해서 갑자기 저하되어 세 비행사의 혈액이 비등해 절명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이 사고는 최초로 과학적인 용도의 획기적인 유인우주 정거장의 실험을 성공시켰고 게다가 24일에 가까운 장시간기록도 수립했지만 후의 비극적인 사고로 막을 내렸다.
▶1970년 서울서
제37회 세계 작가대회 개최
▶1962년 최고회의
5개항 언론정책을 발표
▶1959년 미국,
폴라리스 유도탄 발사 성공
▶1958년 주한 유엔군경제조정관실
(oec), 미국 원조단(usom)으로 개편
▶1956년 마릴린 먼로,
극작가 아더 밀러와 결혼
두 번의 결혼에 실패한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가 `세일즈맨의 죽음` 극작가로 알려진 아더 밀러와 뉴욕에서 1956년 6월 29일 세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미국 신문은 이 둘의 결혼을 `미국의
위대한 두뇌와 미국의 위대한 육체의
결혼`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미국 신문은 이 결혼을 `미국의 위대한 두뇌와 미국의 위대한 육체의 결혼`이라고 표현했다. 신혼여행을 위해 여권을 신청했으나 공산주의운동을 이유로 신청이 기각된 밀러가 국무성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중이어서 이 결혼은 더욱 화제가 되었다.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못하는 먼로는 밀러에게서 지성의 경외로움과 아버지의 정을 느끼며 유태교의 밀러를 위해 유태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그러나 심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성격이었던 그녀는 매스컴의 집요한 추적, 결혼한 아서 밀러에 대한 열등감, 우수한 연기자가 되려는 강박 관념 등으로 인해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를 유지하다 1962년 8월5일 자살해 또 한번 전 미국을 놀라게 했다.
▶1951년 트루먼,
리자웨이에게 한국휴전교섭 지령
▶1950년 극작가 함세덕 사망
▶1950년 맥아더원수 한국전선 시찰
맥아더와 6.25
6·25전쟁이 일어난 후 조선인민군은 남진을 계속하다 국제연합군의 참전으로 낙동강에서 교착상태를 맞게 되었다. 이에 국제연합군은 조선인민군의 허리를 절단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워 첫 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되었다.
제1단계로 9월 15일 오전 6시 한·미 해병대는 월미도에 상륙하기 시작하여 작전개시 2시간 만에 점령을 끝냈다.
2단계로 한국 해병 4개 대대, 미국 제7보병사단, 제1해병사단은 전격공격을 감행하여 인천을 점령하고 김포비행장과 수원을 확보함으로써 인천반도를 완전히 수중에 넣었다.
마지막 제3단계로 한국 해병 2개 대대, 미국 제1해병사단은 19일 한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하고 20일 주력부대가 한강을 건너 26일 정오에는 중앙청에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작전을 끝냈다.
▶1949년 주한미군 철수완료
▶1946년 민족통일총본부 구성
(총재 이승만)
▶1944년 만해 한용운 서거
승려이자 시인이었고 무엇보다 독립운동에 힘썼던 만해 한용운 선생이 1944년 6월 29일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중풍으로 눈을 감았다.
만해 한용운의 초상화.
본명이 정옥(貞玉)인 그는 오늘날 우리에게 법호인 만해(萬海)와 법명인 용운(龍雲)으로 더 친숙하다. 충청남도 홍성 출생인 그는 6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배우고, 18세 때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는 등 일찍이 글과 독립운동에 눈을 뜬 시대의 지성인이었다.
그러나 1896년 동학농민운동의 실패로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온 그는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05년 강원도 인제의 백담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그러던 1910년 한ㆍ일합병의 국치(國恥)를 참지 못하고 중국으로 망명, 독립군군관학교를 방문한 뒤 만주ㆍ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하여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과 불교정신을 널리 펴는 데 힘썼다. 1919년 3ㆍ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명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가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6년 희대의 시집 ‘님의 침묵’을 내놓으며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조선일보가 중심이 된 일제하 최대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 발기에 참여,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으로 활동했다.
한편, 지난해 8월 만해가 ‘님의 침묵’을 탈고하는 등 심신이 지칠 때 마다 찾았던 백담사 소재 강원도 인제에 ‘백담사 만해마을’이 준공돼 운영되고 있다. 조선일보사는 지난해 12월 18일 이곳에 ‘조선불교유신론’ 1913년 초판본, ‘불교대전’ 1914년 초판본 등 만해의 저서 원본들과 관련된 희귀자료 115점을 전달한 바 있다.
▶1938년 전국에 방공훈련 실시
▶1913년 제2차 발칸전쟁 발발
▶1912년 제5회 스톡홀름올림픽 개막
▶1911년 국유미간지이용법 공포
▶1906년 이민보호법 반포
▶1906년 광업령 공포
▶1903년 카프(KAPF)의 실질적
지도자인 팔봉 김기진 출생
▶1900년 `어린왕자`생텍쥐페리 출생
▶ 1895년 영국 생물학자 T.H.헉슬리 사망
▶ 1890년 오늘,
#플라스틱 발명한 영국 야금학자
#알렉산더파크스(1813년~ )가 사망했다.
인류의'애물단지' 플라스틱.
▶ 1888년 오늘,
최초의 (클래식) #클래식음악녹음 으로 기록되는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이 작곡한 곡으로 2분짜리 음악 '#이집트의이스라엘인'이 파라핀 실린더에 기록 되었다.
https://m.blog.naver.com/citizen77_/221330769664
▶ 1883년 독립운동가 안무 장군 출생
▶ 1882년 임오군란으로 청원받은 청군(淸軍), 인천 상륙
▶ 1873년 청나라 동치제(同治帝), 처음으로 외국 사신 인견(引見)
▶ 1868년 헤일 망원경(1948)을 개발한 미국의 천문학자 헤일 출생
▶ 1861년 영국의 여류 시인 엘리자베스 브라우닝 사망
▶ 1849년 러시아 제국 헌법에따라 임명된 초대 총리 비테 출생
▶ 1762년 에카테리나 2세 러시아 황제 즉위
▶ 1593년 임진왜란에 진주성 함낙
https://youtu.be/0isZ6dVsUS4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 솦트리종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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