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전쟁이다! (6.25전쟁 사진집) 09
V. 서울 탈환: 시가전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많은 사람이 뉴스를 듣고 어깨를 으쓱했을 뿐, 곧 다시 본인들의 업무로 돌아갔다. 그들에게 있어서 한국에서 오는 보도기사는 떠들썩한 소문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속보들은 정확했다.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낙동강 방어선의 서쪽 최전선으로부터 조용히 철수한 해병대원들은 부산으로 복귀하였고, 거기에서 미국으로부터 막 도착한 다른 해병대원들과 합류했다. 해병대는 전투병을 보충하여 제1해병사단으로 새로이 재편성되었다. 부산에서 하루 떨어진 위치에서 해병대 소속 함선들은 병력을 싣고 있는 수많은 함선들을 만났다. 해안에 상륙 시 해병대를 후속하게 될 육군 7사단의 장병들을 실은 배들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을 벗어난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진, 그리고 싫어하는 수송수단인 배를 탄다는 것조차도 기뻐하며 해병대원들은 잠자리, 식사, 짠물 샤워 등에 대해 불평하면서 즐거워했고, 그들이 공격하러 갈 곳이 어디인지 그 장소에 대해 잡담을 하면서도 즐거워했다. 배의 대형 확성기를 통해 나오는 부대장의 음성이 그들의 질문에 답을 주었다. "인천!"이라고
많은 눈이 상륙작전에 적합한 해변과 깊은 수심, 그리고 좋은 시설을 갖춘 항구들이 있는 한반도 동북쪽을 연해 있는 원산, 흥남 그리고 다른 항구들을 갑판 위의 지도에 그리며 아는 체를 하는 베테랑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인천! 갑판 위에는 인천에 관해 세밀히 그려진 지도가 없었다. 인천은 그들이 상륙할 수 없는 확실한 장소 중의 하나라고 퇴짜를 놓았던 항구였다.
맥아더 장군은 해병대가 인천을 상륙장소로써 제외시킬 수밖에 없다고 하는 바로 그 이론에 주목했다. 그는 만약 도쿄나 워싱턴, 그리고 유엔안보리가 위치한 레이크 석세스(Lake Success)에 있는 모두가 인천을 상륙할 수 없는 곳으로 믿는다면 북한공산군이나 모스크바의 소련 고문관들도 아마 똑같이 생각할 것이라고 분명히 확신했다.
아주 공을 들여 항구에 관한 모든 책과 도표, 기록... 접근로, 각 수로와 측면의 사주들, 그리고 특히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변화무쌍한 간만의 차가 있는 항구가 주는 조류의 특징들... 이런 모든 것을 검토한 후에 상륙전의 분야별 전문가들의 의견과는 반대로 맥아더는 결정을 내렸다.... 인천!
상륙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항구를 보호하고 있는 섬을 공격한 해병대는 다음으로 정박지를 둘러싼 방파제를 기어올라 상대적으로 가볍게 저항하다 곧 제거된 적군을 무찌르며 상륙했다. 항구를 확보함으로써 후속 중원부대가 쏟아져 들어오고, 비행장은 탈취한 해병대 앞에 놓인 다음 목표는 서울이었다.
이 장의 사진들 "The City(시가전)"는 공산군들에게 점령되었던 서울탈환 전투 중에 찍은 것들이다. 물론 북한 공산군이 서울방어를 위해 어디를 확보하기로 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비행장을 탈취한 후 곧 한강에 도달했을 때 해병대는 잠깐 멈추었다. 그때 다른 해병
대원들이 수륙양용 트랙터를 타고 굉음을 내고 있다가 떼를 지어 이동했다.
아마 공산군들은 그 트랙터들을 빛바랜 녹색 모자를 쓰고 무섭게 소리치며 사격을 해대는 병사들을 태우고 그들을 맹렬히 공격하며 강과 들을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전차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처음에 공산군들은 혼란에 빠져 달아났다.
공산군들이 트랙터가 무엇인지를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먼지투성이가 된 녹색 사나이들인 해병대원들은 한강을 건너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철도 양옆의 고지를 점령했고, 서울의 서쪽 변두리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주 최근에 적이 포기한 깊고 세심하게 구축된 지휘소가 있는 고지 정상에서 선두 공격중대의 중대장은 고지 가장자리를 따라 배치된 관측병들과 기슭 하단부 밭들이
있는 소총병들과 계속 무선통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공산군들은 방향을 바꾸어, 교외에 이르는 결정적인 접근로를 통제할 수 있는 그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필사적인 시도를 꾀하고 있었다.
사흘 밤낮 동안 많은 적군이 고지 주위로 급히 되돌아와서 오직 전령과 긴급 탄약 팀만이 낮 동안 후방으로부터 기어들어 올 수 있었고 밤에는 아무도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대는 홀로 저항을 했다. 밤은 더욱 최악이었다. 소총 사격과 폭발로 가득 찼고, 돌격을 시도하는 적군들이 해병대원들의 진지로 뚫고 들어왔다.
3일째 되는 밤의 황혼 무렵에 기관총 사수인 레오날드 헤이워스 상병은 이달 초순에 낙동강을 따라 이동하는 그의 사진들을 보여주었을 때 처음엔 당황해하더니 곧 아주 온화하게 수줍어했다. 날이 거의 어두워질 무렵 동료들에 둘러싸인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훨씬 고참인 한 해병대원이 헤이워스의 큰 키로 인해 상병의 어깨 너머로 살펴보기 위해 발끝을 딛고서 있었다.
헤이워스가 떠나간 뒤에 그 고참 해병대원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제기랄! 형편없고 저주받을 사진, 누구나 때때로 우는 법이라고." 다음 날 아침 동틀 녘에 기관총을 쏘던 레오날드 헤이워스 상병이 총에 맞아 곧바로 전사했고, 고지 정상부를 탈환하기 위해 마지막 공격을 시도했던 공산군들도 멈추었다.
한낮의 몇 시간 동안도 밤이 길고 추웠던 것처럼 길고 더웠다. 고지 정상부 주변의 사선에 배치된 해병대원들은 아래쪽의 제방을 따라 밭을 가로질러 그들을 향해 빠르게
공격해오는 공산군들의 지속적인 위협을 받았고, 그들은 알게 되었다. 미끄러져 들어오는 적들 하나하나가 다음날의 야간전투 중 아군에게 사격을 가하고 아군의 사격에 사살당해 죽을 운명일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밭을 조준하여 사격하는 바로 그 순간에 제방을 따라 재빨리 피하는 어슴푸레한 모습들 가운데 어린이들이 나타났다. 착하고 작고 커다란 눈을 가진
어린이들이... 그 어린이들은 처음에 자신들을 무시했던 이들을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따르며 그들 자신만의 참호를 파고, 그들의 작은 머리에 맞게 헬멧을 능숙하게 조정했다.
아무도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한참 뒤에 중대가 서울 시가지를 공격하기 위해 고지로부터 내려온 후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들이 고지 꼭대기 부근에 있었던 동안 그들은 포화 소리에 귀를 막으며 견딘 중대원들이었고, 환영을 받았다.
적어도 한 명의 적군 병사가 해병대의 탄막을 뚫고 들어왔는데 인내심이 강한 저격병이었다. 그가 출현했다는 첫 번째 증거는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하고 신중하게 선택한 장소에서 점심 전투식량을 앉아서 먹고 있던 해병대원의 가슴으로 저격병의 총탄이 박혀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의무병들과 동료전우들은 그 해병대원의 상태가 급속히 악화되었기 때문에 즉각 필사적으로 그를 보살폈다. 그러나 그가 고지 가장사리를 지나서 보다 안전한 아래쪽 기슭으로 옮겨졌을 때 얼마나 오랫동안 더 살아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부상자들을 후방으로 수송하고 있는 구급 지프 한 대가 교묘하게 매설된 지뢰를 밟아서 폭발과 함께 사람과 기계 조각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부상자들 가운데 3명이 또다시 부상을 입었다. 운전병을 돕기 위해 함께 갔던 그의 동료도 전사했다. 폭발로 인해 상처를 입고 또 친구를 잃고 영원히 마음에 상처를 입은 운전병은 그가 폭발로부터 내팽겨쳐진 도로가에 앉아 울고 있었다.
그 운전병은 자기 친구가 그를 도와주기 위한 임무를 받고 동행했기 때문에 죽은 것뿐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동료를 죽게 만든 매설된 지뢰 위를 온전한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아마 이 포인트가 해병대가 강한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부상에는 무관심하지만, 수년간 고난을 함께 나누고 적의 공격이 지나가길 바라며 며칠 밤을 개인 참호에서 함께 지냈던 전우의 죽음을 비탄에 잠겨 통곡하며 진심으로 슬퍼하는 해병대원...
그리고 전우를 살리기 위해서 주저 없이 자신의 생명을 내줄 수도 있는 사람...또 다른 구급 지프 한 대가 길로 내려와 부상자들을 싣고 후방에 있는 구호소를 향해 다시 천천히 출발했다. 다치고 부러지고, 각자가 생각에 잠겨있고 여전히 살아서 초라한 누더기를 걸치고 있는 사람들의 고립된 집단이 다른 모든 사람, 아마 문명 그 자체를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그들의 모습이 마치 인간의 초기 문명에서 아침 일찍 굶주린 짐승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사람들이 그들의 토굴 입구에 함께 모여 있을 때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일부는 죽었으나 그들은 살았고.. 그 토굴과 그들의 비밀과 모든 가족과 꿈들은 안전하게 되었다. 그 집단은 살아남았다. 해병대가 서울 남서쪽 측면으로 들어섰을 때 천천히 피어오르는 연기와 아침 안개가 아직 서울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밤새 공산군의 반격을 물리친 후, 해병대원들은 고지로부터 내려와 서울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경의선 철도를 횡단하면서 적이 장악하고 있던 서울의 한복판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길임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황폐해진 거리만이 그들을 맞아 주었다. 그런데 마법과도 같이 전진하는 해병대원들에게 양손을 흔들며 박수갈채를 보내고 환영의 "만세!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로 거리가 열을 이루었다.
그들이 옳다고 외치는 환영의 소리를... 해병대원들 역시 알았다. 그들이 경험을 통해 남쪽에서 배웠듯이 민간인들로 가득한 거리는 좋은 징조라는 것을 알았다. 반대로 거리가 비어있으면 문제가 있고 기다리고 있는 적이 있음을 뜻한다는 것을...
그들 본부와의 무선접촉은 해병대원들에게 대대의 다른 중대 대원들이 그들의 측면에서 전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왜냐하면 지형이 후방 쪽으로 사다리꼴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무선교신은 해병 1사단의 나머지 부대는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기에 앞서서 그들 뒤에서 이동 중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나머지 부대의 공격은 상업지구와 정부 건물들을 넘어서 가로질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군 7사단의 전방부대들이 지금은 파괴된 교량 가까이에서 남으로부터 한강을 도하하려고 준비 중이라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그러나 무전교신으로 약속한 병력지원의 소식은 아직이었고, 해병대원들은 외로이 살상의 세계인 전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오전 중반쯤에 정찰대와 해병 제1연대 1대대의 에이블(ABLE)중대가 그들 책임 지역의 주민 주거구역을 통해 침투하였다. 아군 피해는 가벼웠으나 증대되는 대담함과 부주의함 대신에 중대장인 밥 배로우 대위는 더욱 경계를 강화했다. 그의 정찰대는 잘 닦여진 길을 완전히 회피하여 뒤뜰을 가로지르고 정원의 담을 넘었다.
전차 지원을 요구하는 반복된 요청은 무거운 퍼싱 전차의 한강 도하가 지연되고 있다는 불안한 답변을 가져왔다.
정오 직전에 배로우 대위의 해병중대원들은 그들이 서울 서쪽 끝의 가장자리를 이루는 말안장 형태의 산줄기 정상 부분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와와 흙벽으로 잘 지어진 집들이 그 지역을 덮고 있었다.
전방의 지면은 서울의 주요한 기차 종착역의 화차 주차장으로 급히 사라졌다. 상업지구와 정부청사 지역들이 왼쪽 산의 기슭 주위까지 뻗어 있었다. 멀리 오른쪽으로 파괴된 한강 다리가 뻗어 있었다. 바로 앞에는 전방 정찰대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과 매우 흡사한 다소 무해하게 보이는 주거지역이 펼쳐져 있었다.
밥 배로우 대위는 도시 전체에서 가장 관측이 용이한 장소 중의 하나에 무혈입성했다. 그런데 배로우 대위는 앞에 보이는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그의 중대원들을 철로를 가로질러 곧바로 달려 내려가도록 하는 대신에, 서울을 탈취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결정 중의 하나를 내렸다.
그는 기관총들을 능선의 가장자리를 따라 전개하도록 명령했고, 그동안 그는 관측병들, 통신병들과 함께 지도를 가지고 대대의 다른 중대의 정확한 배치와 그의 측후방에 전개되어 있는 육군 및 해병대의 전진속도, 그리고 새로운 지역을 공격하기 전에 전차들이 합류할 가능성이 있는지 등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는 일반적으로 소부대 지휘관에게 기대되고 요구되는 것보다 훨씬 더 세밀하게 공격을 위한 모든 요소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그것을 알지 못했지만 많은 미국인의 생명이 서울을 통한 대공세에 헌신했고 서울발환을 위한 전투의 운명이 그날 오후 약 한 시간 동안 배로우 대위의 손에 놓여 있었다.
지도를 보고 무선교신을 하면서 배로우 대위가 저격수들을 전방 보안관측수와 항공지원 연락관이 그의 중대에 배속되었다. 들은 다음 각자가 면밀히 살펴야 할 전방지역의 할당된 위치에 배치되었다. 관측되는 전체 전장은 정면으로는 주거지역이었고, 왼쪽은 서울의 주요한 오른쪽 멀리로는 한강다리가 보였다. 쌍안경을 들고 관측하는 10명의 병력들 외에는 아무것도 능선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중대가 다른 공격부대들보다 너무 앞으로 진출해 있다는 것을 알고, 배로우 대위는 다른 부대들이 중대 측방에 도달할 때까지 전진속도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배로우대를 향한 압력의 정도로 판단해볼 때 고급간부들이 도쿄에 있는 총사령부로부터 적에게 점령당한 지 3개월이 되는 서울을 늦어도 9월 27일까지는 공산군으로부터 탈취하라는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