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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옛날 디펜스코리아와 토탈워 카페에서 활동하신 왕마귀님이 올리신 원문을 인벤에서 찾아서 올리는 것입니다.
*** 가일스 밀턴이 저술한 '사무라이 윌리엄'중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
바다에서는 나가시키가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는 아찔하게 높은 산들로 둘러쌓여 있었고, 삼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래서 배가 아름다운 천연항으로 들어오기전에는 선상에서 나가사키의 미로같은 길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1580년 예수회 신부들이 이곳에서 자체적인 농장과 통나무집을 소유한 이래 그 지역은 번영을 누렸다. 나가사키는 중국과 비단을 교역하면서 많은 수익을 거두어 이제 부유한 항구가 되었고 거리에는 교회와 신학교, 기숙사가 형형색색 줄지어 들어섰다.
하지만 전형적인 포르투갈 식민지 마을을 기대한 사람들은 이 지역의 분위기가 오히려 규슈 해안 근처의 여러 마을과 유사하다는 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상인들의 저택은 일본식의 오목한 지붕으로 덮여있었고 변변찮은 주택에도 반투명 창호지를 바른 대나무 미닫이문이 있었다. 가장 이색적인 곳은 예수회 교회였다. 육각형의 건물에 지붕은 탑 모양으로 쌓아올려 기독교 성전이라기보다 절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마카오에서 출발한 배가 일년에 한번 입항할 때는 여기저기 그늘진 거리에 사람들이 떼지어 몰려들었다. 선원들은 사창가와 술집을 찾아들었고 구레나룻을 기른 포르투갈 귀족(이달고)들은 펑퍼짐한 판탈롱에 버클이 달린 구두, 펄럭거리는 모자로 치장하고 거들먹거리며 다녔다. 이들 중 다수는 고귀한 이상과 가톨릭 신앙을 공유하는 신부들과 평신도를 위한 친목회인 자비 신도회(Misericordia Fraternity) 소속이었다.
일년에 한번 마카오를 떠난 포르투갈 선박이 일본에 입항하는 날은 축제와 기념행사가 치루어졌다. 1609년은 축제의 명분이 어느 때보다 더욱 뚜렷한 해였다 .노사 센호라 데 그라사('은총의 성모'라는 뜻) 호가 지난 수년동안 나가사키에 입항한 배 가운데 가장 많은 보화를 싣고 들어온 것이다. 배에는 60만 크루자도에 달하는 200톤의 비단과 어마어마한 양의 은괴가 실려있었다. 중간상 노릇을 하는 예수회 신부들은 배가 들어오자 매우 기뻐했다. 뱃짐의 매매를 성사시켜주는 댓가로 짭잘한 이익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보화를 가득실은 배는 선망과 탐욕의 대상이 되는 법이었고, 곧이어 그런 일이 발생했다. 나가사키의 촌장이 자신의 권리대로 무장경비대를 보내 뱃짐을 검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선장은 경비대의 승선을 불손하게 거절했다. 촌장은 화가 나서 자신이 직접 배에 오르겠다고 알렸다. 그러나 그 역시 승선을 거부당했다.
촌장은 선장의 신원을 알게되자 분노가 끓어올랐다. 선장은 마카오의 안드레 페소아(Andre Pessoa)로 몇달전 마카오에서 보여준 행동으로 완전히 신임을 잃은 인물이었다. 당시 마카오에서 일본 선원들이 소동을 벌인적이 있었다. 그러자 페소아는 그들의 숙소까지 난입해 많은 이들을 살해했다. 포로가 된 일본 선원들은 유혈사태가 자신들의 책임이라는 내용의 진술서에 억지로 서명한 뒤 석방되었다. 그리고 갖은 고초를 겪은 후에 상처를 안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페소아가 마카오에서 저지른 행위에 대한 소식은 이에야스에게 금방 전해졌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이 포르투갈인들에게 벌금형을 내리는 것으로 사안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페소아기 나가사키의 촌장을 모욕했다는 전갈을 듣자 이번에는 아주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에야스는 '선장과 포르투갈인들을 처형하고 모든 화물은 선박과 함께 압류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페소아에게는 일본인들을 살해한 것에 대해 사면해줄테니 이에야스의 궁으로 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상륙을 거부한 채 안전한 중무장 선박내에 머물렀다. 이에야스는 페소아의 불복에 분노하여 현지 영주인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에게 선장을 체포하고 선박을 압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리마 영주는 신이나서 임무를 수행했다. 일부 부하들이 마카오 사건에 연루되어 복수를 벼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약 1200명의 사무라이들을 소집한 뒤 1610년 1월 첫째주에 야간습격을 감행할 준비를 했다. 무사들은 30척의 배에 나누어타고 나가사키만을 따라 정렬했다. 성공을 확신한 그들은 페소아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밤하늘에 머스킷총을 쏘아올렸다. 페소아 선장은 무사들이 선박바로 앞으로 접근해 올 때까지 기다린 뒤 두 차례 일제포격을 퍼부었다. 일본의 소함대는 완전히 박살났고 여기저기 시체들이 떠다녔다.
포르투갈 배에서는 다친 상처에 소금까지 뿌리려는 듯 '일제사격을 할 때마다 나팔을 불어댔다.'
아리마 영주의 부하들은 퇴각한 뒤 부대를 재편성해야만했다. 그리고나서 만을 향해 계속해서 공격을 시도했지만 노사 센호라 데 그라사호에 접근할 수는 없었다. 3일밤을 연달아 페소아의 함포에 무릎을 꿇었다. 1월 6일 포르투갈 선장은 자신의 무장상선을 항구 바깥으로 둘려 안전한 공해로 빠져나갔다. 아리마 영주는 더욱 필사적으로 마지막 공격을 준비했다. 부하들이 상선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목재탑을 만든다음 '큰 배 두척으로 그것을 운반했다.' 탑은 포르투갈 상선의 돛대만큼 높았고 화재에 대비해 젖은 짐승 가죽으로 덮었다. 게다가 영주는 반드시 승리하고자 1,800명의 용병무사까지 고용했다.
최후공격은 밤 9시쯤 시작되었고, 이전보다는 성공적이었다. 가장 용맹스러운 일본무사 몇명이 마침내 무장상선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커다란 일본도를 미처 휘둘러보기도 전에 수비수들의 칼에 토막나 죽었다. 페소아 선장의 손에도 두명의 무사가 죽임을 당했다.
상선의 선원들은 기쁨에 들떠 때이른 승리를 선언했다. 이 때 상상도 못할 일이 일어났다. 포르투갈군이 일본군에 수류탄을 던지려던 찰나 한 무사가 발사한 머스킷 총탄이 그 수류탄에 박혀버렸다. 수류탄에 붙은 불이 갑판위의 대포화약에 옮겨 붙었고 곧이어 뒷돛대의 세로돛까지 불타기 시작했다. 순간 페소아 선장은 모든 것이 끝장났고 이 거대한 배도 운이 다했음을 감지했다.
극도의 흥분과 광란상태에 빠진 페소아 선장은 극적인 최후를 선택했다. 기록은 이렇게 전하고있다. '용맹스러운 선장은 자신의 검을 내려놓고 아무 말 없이 선실로 내려갔다. 그는 한손에는 십자가를, 다른 한손에는 횃불을 들고 창고로 내려가 화약고에 불을 붙였다.'
곧바로 재앙과도 같은 어마어마한 폭발이 이어졌다. 노사 센호라 데 그라사호는 위로 약간 뜨는 듯 하더니 화염에 휩싸여 두동강으로 갈라져서 깊은 바다밑으로 침몰해 버렸다. 페소아 선장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야스는 자초지종을 듣고 격분했다. 나가사키의 포르투갈 상인을 모조리 처형하고 일본의 예수회 관련자를 모두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가신들 사이에 신중론이 우세하자 권고를 받아들여 그러한 위협은 거두어들였다.
노사 센호라 데 그라사호의 침몰은 예수회의 명성에 큰 타격을 가했다. 예수회가 입은 손해는 약 3만 크루자도에 달했고, 예수회는 '상상할 수 없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포르투갈 상인들도 좌절했다. 상선이 침몰하면서 한 해의 수입도 가라앉아버린 것이다.
가장 용맹스러운 일본무사 몇명이 마침내 무장상선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커다란 일본도를 미처 휘둘러보기도 전에 수비수들의 칼에 토막나 죽었다. 페소아 선장의 손에도 두명의 무사가 죽임을 당했다.
===>왜군은 백병전에 강하기로 유명해서 '왜병이 한명이라도 판옥선안으로 들어오면 갑사(甲士)10명이 당해내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고 실제로 정유재란 당시에도 거제도에 나무 베러왔던 왜병 20여명이 고성현령 조응도가 지휘하는 판옥선에 기어올라 사부와 격군을 포함한 140여명을 모두 몰살시킨 사건도 있었는데 만약 위의 기록대로라면 왜인들의 단병접전 능력은 남만인보다는 몇수 아래라는 추측이 가능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