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병원 장례식장 뒤편 소각장 (외 1편)
함기석
불타고 있다
누군가 쓴 일기장
누군가 신던 기린 양말
누군가 선물 받은 아름다운 목도리
눈 속에서 불타고 있다
누군가 발이 되어준 지팡이
누군가 불면 속에서 쓰다듬던 장난감 펭귄
누군가 비운 빨간 약병
첫눈 속에서 모두 불타고 있다
누군가 잃어버린 벙어리장갑
누군가 아기를 안고 칸나처럼 웃던 창문
누군가 잃어버린 청춘
열쇠 없는 일요일 아침, 자물쇠 닮은 갑작스런 죽음
누군가 머물다 떠난 빈 벤치
누군가 죽은 숲
누군가 울면서 걸어간 눈길
모두 젖은 물고기처럼 불타고 있다
—《문학.선》2014년 가을호
오염된 땅
첫 낱말이 태어날 때
그것은 죽음과 탯줄로 이어져 있다
그것은 핏덩어리 육체에서
나는 늙고 아픈 산파처럼 떨리는 손으로
엉킨 피를 닦아
대지의 파헤쳐진 가슴에 안긴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낱말은 훼손되고
썩은 젖을 빨며
꽃과 나무 사이에서
죽음은 한 순간도 유혹을 멈추지 않는다
4월, 빛이 잠든 벚나무 꽃그늘 아래
검은 나비 날고
끝에 태어날 낱말은
우리 주검이 누울 차디찬 석관을 개봉한다
—《시사사》2014년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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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기석 / 1966년 충북 청주 출생.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오렌지 기하학』『뽈랑공원』『착란의 돌』『국어선생은 달팽이』. remm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