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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그리스도(3)
갈 2:11-21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 설 교 >
죽음없이 부활없다
갈 2:20, 고후 4:10-12 / 김홍도 목사
어떤 사람이 깊은 산 속에 들어갔다가 산불을 만났습니다. 산불이 멀리서부터 포위해 타들어 오고 있습니다. 꼼짝없이 타죽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살아날 길을 궁리하다가 주머니에 성냥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기가 있는 자리에 불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불탄 그 자리에 들어섰습니다. 그 불이 점점 퍼져 나가다가 포위해 들어오던 산불을 만나니까 더 이상 산불이 타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탈것이 타버렸기 때문입니다.
1. 죽음을 정복하는 길은 죽음입니다.
이와 같이 죽음을 정복하는 길은 죽음인 것입니다. 죄의 결과로 들어온 죽음은 인생의 제일 큰 원수요 마지막 원수인데 이 죽음을 정복하고 생명과 부활을 주시기 위해서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죽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하셨습니다. 마치 산불이 포위해 들어올 때 불을 먼저 놓아서 그 안에 들어가서 안전하게 살게 된 것 같이 예수님이 우리대신 죽어 주시고 우리대신 심판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셨고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예수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어 주시고 우리 죄를 위하여 피를 흘려주시고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영생을 얻고 생명의 부활을 얻게 되고 죽음이 없는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12장2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사망의 종이 되었던 우리가 마지막 아담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영생을 얻게 되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죽음을 정복하려면 죽음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태복음10장3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2. 죽음을 거쳐야 부활이 옵니다.
반드시 죽음을 거쳐야 영광의 부활을 얻게 됩니다. 죽지 않고 죽음을 거치지 않고는 우리도 부활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①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음을 알아야 하고
② 우리도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죽을 몸도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3절 이하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③ 과거에 죽은 자 같이 살아야 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같이 현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 속에서 마치 과거에 죽어서 천국에 갔다가 지금 부활해서 돌아 온 것같이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천국에 갔다온 한 사람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 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고린도후서12장2절)고 했는데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후부터 바울은 죽었다가 산 것처럼 모든 세상 사물이 이전과는 달리 보였습니다. 전에 소중히 보이던 것이 분토와 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쉴 틈 없이 복음만 전하다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전에 설 때 세상 것은 도무지 찬양 할 수가 없고, 세상에 대해 집착하지 않을 수가 있었고, 세상의 압력도 두려움 없이 분쇄할 수가 있었고, 세상의 부귀와 권세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것과 족히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 자와 같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11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즉 이 성경책 안에 들어 있는 주보 순서지는 이 성경이 부산에 가면 이 주보도 부산에 가고, 이 성경이 미국에 가면 이 종이도 함께 미국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로 여기며 순간 순간 살아야 합니다. 죽지 않고는 부활의 새 생명으로 살수가 없습니다. 죽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아무 소용도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죽지 않은 옛사람은 아무리 잘 나고 착하고 재주 많고 지식이 많아도 하나님께는 무가치 한 것입니다. 아담 안에 있던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조지 밀러(George Miller)씨는 큰 진리를 깨닫고 말하기를 "나는 어떤 날 죽었습니다. 조지 밀러에 대해서도 죽고, 세상이나 친구들의 칭찬이나 책망에 대해서도 죽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욕을 해도, 꼬집어도, 송곳으로 찔러도 모르는 것처럼 우리 옛 사람은 죽었다는 믿음으로 살 때 불쾌할 것도 없고 실망할 것도 없고 억울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또 칭찬 듣는다고 우쭐하거나 교만 할 것도 없고, 책망이나 비방을 듣는다고 실망하거나 불쾌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다같이 한번 입으로 시인합시다. "나는 죽었다." 자기 이름을 넣어서 "0 0 0는 죽었다." 이제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몸인데 칭찬 들으면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면 되고, 불쾌한 일이나 근심거리가 있으면 그것도 주님께 맡기면 되는 것입니다. 불안해 할 것도 없고 실망할 것도 없고 안타까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장20절)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옛사람이 자꾸 사느냐 하면 TV의 전기 코드가 늘 꼽혀 있지 않고 뽑히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긴장에서 풀리면 옛사람의 성질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하시면서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지 않으면 금방 시들고 마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칭의와 구원은 단번에 순간적으로 이루어져 변함이 없지만, 이 새사람의 생활 즉 성화(聖化)된 생활은 순간 순간 믿음의 긴장 속에서 이루어져 나가야 합니다. 아무리 성화된 성도라도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자라는 믿음의 긴장 속에서 풀어지면 죄악의 옛 성품이 다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13절에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는데 "드리라"는 말은 영어로 "yield"로서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3. 내가 많이 죽으면 남을 많이 살립니다.
"죽으면 한번 죽는 것이지 많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즉 내가 희생하고 죽어지는 범위가 넓고 시간이 길면 그만큼 나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고 살아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10-12절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에 넘기움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고,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 하느니라 한 것은 우리가 많이 죽을수록 다른 사람이 많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 갈 때에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물이 갈라졌고 그들이 요단강 한복판에 굳게 버티고 서 있을 때에 많은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건너갔습니다. 제사장들이 강에서 올라오자 요단강이 합해져서 아무도 건너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요단강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제사장들 즉 교회의 지도자들이 죽음 한 가운데 굳게 버티고 서 있을 때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어 가나안 땅 천국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내가 많이 죽을수록 남을 많이 살릴 수가 있습니다. 영혼구원 사업은 누구의 말대로 생명놓고 생명을 따먹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되고 많은 사람을 구원하려면 우선 주의 종들이 희생하고 죽어지는 생활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죽는 일이 없이 사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부흥은 멋진 설교를 흉내내서 그대로 한다고 해도, 큰 꿈을 가진다고 해도, 진실한 희생과 죽어지는 생활 즉 자기부인(Self Denial)이 없으면 생명을 살리는 역사, 부흥의 역사는 안 일어납니다.
죽음을 거쳐야 나도 살고 남도 살리게 됩니다. 죽음을 거치지 않고 생명을 살리는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2장24절 말씀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한 말씀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 많은 죄인들이 살아나게 될 것을 의미 하지만 이 말씀은 또한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한 알의 밀 알갱이가 낮은 땅속으로 떨어지기 싫고 습기차고 냄새나는 땅속에 썩어져 죽기 싫어해서 가만히 있으면 사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죽는 것이요 많은 생명의 열매를 거둘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이 없이 생명이 살아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십자가의 사람입니다
갈 2:20 / 양성태 목사
십자가 사람은 하나님의 힘이 생깁니다과거 못 박고 현재 살아내며 미래 전망하는 십자가의 자리 지켜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신학자 A.W. 토저는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을 세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한 방향만 보는 것’, 두 번째는 ‘뒤로 후퇴할 수 없는 것’, 세 번째는 ‘오직 십자가만으로 충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십자가만 봅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보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과거가 없습니다. 과거를 다 십자가에 묻어버렸습니다. 부끄러워 할 것도 없고, 괴로워할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도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이제는 오직 십자가만을 생각합니다. 십자가 이상 앞으로 나가지를 않습니다. 십자가 이외에 더 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하나로 충분하다고 고백할 줄 아는 것입니다.십자가의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아래서 사는 것이라”를 고백하고 경험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사람이 되려면 십자가에 담긴 비밀들을 깨달아야합니다.
첫째, ‘십자가는 나의 과거를 장사지낸 자리’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 말씀은 내가 지금은 2015년을 살고 있지만, 2000년 전 예수님과 함께 그 십자가에서 함께 못 박혀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강도처럼 달렸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그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달려서 죽었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죄를 가진 나’가 죽은 것입니다.죄는 신학적인 문제입니다. 모든 죄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신학적 의미의 죄는 언제나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라도 정직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적인 것이 바로 우리의 죄입니다. 죄의 결과는 곧 사망입니다.죄는 열매의 문제가 아니라 나무의 문제, 즉 생명의 문제입니다. 열매를 다 따내어도 그 나무를 죽이지 않으면 계속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을 때 손과 발을 씻으려 합니다. 행동을 회개하고 상황을 정리하려 합니다. 그러나 죄는 손과 발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건과 상황의 문제가 아닙니다. 따라서 죄는 열매의 문제가 아니라 나무의 문제입니다.그렇다면 어떻게 죄를 해결할 것입니까? 우리 힘으로는 해결 불가능입니다. 죄를 없애기 위해 힘쓴다고, 나를 다듬고 수양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죄를 해결하려면 사탄을 대적해야 합니다. 사탄을 멸하는 곳은 한 곳 뿐이요, 한 분 뿐입니다. 그 곳이 십자가요, 그 분이 바로 십자가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바로 2000년 전 예수님의 그 십자가에 나의 죄가 죽고 죄인인 내가 죽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십자가에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위대한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둘째, ‘십자가는 나의 현재를 보여주는 자리’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본문에 내가 주 안에 주님이 내 안에 라는 말씀은 ‘이제 나는 내 인생에 새 주인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전에는 죄의 종이었는데 이제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주님이 내 삶에 새 주인이 되시는 영광을 얻었다는 것입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나오라 내 배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의 강을 마셔라”,
“여호와는 내게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내 영혼을 소생케 하는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주님께서 여러분 안에 들어가셔서 마음과 생각과 계획을 다스리시는 주인 되어주시는 것입니다.우리의 새 주인이 되신 주님은 여러분 안에 거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을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으로 삼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너는 내 것이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선포하시며 소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걸작으로 빚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십자가는 나의 미래를 결정짓는 자리’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는 여전히 육체가운데 삽니다. 세상 가운데 삽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사람들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삶으로 펼쳐지는 것입니다.십자가의 사람들의 삶은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하루를 살아도 목적이 분명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목적에는 찰나적인 것과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찰나적인 목적은 당장 목전에 있거나 삶의 방편이라면, 영원한 목적은 영원을 살게 하는 것이요 뿌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찰나적인 목적을 붙들고 죽을 듯이 살아갑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허공을 친 자기 인생을 발견하고는 통탄합니다. 그 말로가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찰나적인 목적과 영원한 목적 둘 다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간순간 목적을 알려 주시고, 결국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향으로 절묘하고도 은혜롭게 십자가의 사람들을 인도해 나가시는 것입니다.십자가의 사람들의 삶에는 하나님의 평안이 임합니다. 저는 성도들을 방문해서 기도할 때마다 놓치지 않는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어도 영혼에 기쁨과 평강을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가정의 모든 식구들 가운데 영혼의 기쁨을 주시고 영혼의 평강을 주옵소서.”십자가의 사람들에게는 이런저런 기쁜 일이 생겼기 때문에 평강이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일을 초월하여 좋은 일에도, 궂은일에도, 밤에도, 낮에도 항상 내 마음을 지배하고 사로잡는 평강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힘이 생깁니다. 십자가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는 인생이 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힘은 불가능이 없습니다.십자가의 사람들은 죄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가장 크게 실감하는 것은 죄에서 자유하게 된 심령과 삶입니다. 죄는 인생을 파괴하는 가장 근원적인 곳에 있고, 가장 강력하고, 가장 교묘한 존재로서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게 되는 순간부터 죄가 나에게서 손을 놓게 된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 내 손을 붙들고 나의 영혼을 자유케 하는 것을 순간순간 경험하게 됩니다.결론입니다.십자가가 무엇입니까? ‘한 방향만 보는 것’입니다. ‘뒤로 후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만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자리는 무엇입니까? 과거를 못 박고, 현재를 살아내고, 미래를 전망하는 자리입니다.우리 모두들은 십자가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진정한 목적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영원토록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의 평안을 얻을 것입니다. 가공할만한 하나님의 능력이 항상 우리의 삶에 임하시는 것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죄의 권세와 결과와 영향력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성령의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순교신앙의 회복
갈라디아서 2:20 / 이상호 목사
오늘은 순교자기념주일이자 마리아여신도회 헌신예배입니다. 현실에서 ‘바르게’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그냥 ‘교회 생활’을 ‘신앙생활’이라고 여기어도 쉽지 않은데, ‘바른’이라는 제한적인 단어가 붙으면, ‘바르다’는 것이 주는 물음 때문에, 동시에 ‘그르다’는 잣대 위에 서야 하기 때문에 신앙의 길이 여간 어려운 걸음이 아니게 됩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믿겠다고 고백했고, 하나님께 순종하겠다고 나선 걸음이니, 이왕이면 ‘바른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걸으면 좋겠습니다. 복음은 “회개하라”가 첫소리입니다(막 1:15).
빈들의 소리도 주님의 길을 예비하면서 “회개하라”(마 3:2) 소리쳤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복음의 첫소리를 듣고 어떤 반응을 했던가요?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회개하라” 소리치는 입을 틀어막았죠. 만약 2,000년 전의 복음 시작 사건을, 오늘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사건으로 받아들인다면, 사실 이렇게 받아야 올바른 성경 읽기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회개하라”는 외침에 어떤 반응을 하게 될까요?
“무슨 소리야? 내가 얼마나 예수를 잘 믿는데, 회개하라고? 웃기네!” 하지 않을까요? 또는 자신을 빼고, 자신의 발등에 떨어진 불덩이로 듣지를 않고 누군가가 회개해야 할 텐데 하면서 강 건너 불구경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닐까요? 혹시 “죄인이니, 회개해야지”하지만, 무엇을 회개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뼈를 깎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뼈아픈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까? 소망이 우리에게 있다고 자신 있게 큰소리칠 수 있을까요? 한때 ‘기장 교인’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고개를 들 수가 없어졌습니다.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타 교단들의 비윤리적이고, 비복음적인 사건들이 우리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총회, 한신대학교, 교단 소속기관들, 노회, 교회들에서 터지는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뉴스가 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부끄러웠습니다. 결코, 어느 개인 한 사람만의 일탈로 치부하고 팔짱을 끼고 모르쇠로 고개를 돌려 피할 사건들이 아닙니다. 한 신앙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일은 우리가 모두 함께 짊어지고 풀어야 할 신앙적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무엇이 잘못되고, 무엇이 부족하기에 이런 창피한 일들이 거룩한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일까요?
어떤 하나님을 만났나요?
신앙은 자신이 만난 하나님 이해에 따라 그 행태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질투하시는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 축복하시는 하나님, 해방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 창조질서를 보전하시는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 세상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지키시는 하나님, 도우시는 하나님, 평화의 하나님, 평등의 하나님 등등, 정말 다양하고 여러 모양으로 활동하시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으로 만난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 따라, 우리의 믿음의 형태도 다양하게 달라졌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온전한데, 고백 후에 나타나는 신앙생활이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기복신앙을 부추기는데 하나님이 동원되고, 교회 생활 잘해야 심판받아 지옥 불에 떨어지지 않고 축복받아 영생한다는 데에도 하나님께서 등장합니다. 해방과 자유, 인권을 주장하며 불의한 정권과 격렬하게 대결하여 사회정의를 세우는 데에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며, 소위 세상에서 성공하여 권력을 쥐거나, 사회적 지위를 높이거나, 경제적 부요를 누리는 데에도 하나님의 축복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믿습니다. 주실 줄 믿습니다. 주여! 주시옵소서.” 탄원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는 도구로 이용하는 일까지 생깁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하시기도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런 행태가 ‘바른 것이냐?’ 하는 물음 앞에 설 때입니다. 과연 성경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기만 하는 하나님으로 믿으라고 한 것일까요? 하나님의 정의를 위한다고 외치며 투쟁만 하면, 뒷자리 어두컴컴한 곳에서 자신의 양심을 속이며 불의한 짓을 해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실까요? 평등을 소리 높이며 가난한 자를 위하기만 하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탐욕으로 뱃속이 더러워져도 괜찮다고 용납하시며 눈감아주는 너그러우신 하나님이실까요? 고백하는 것과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다른 이중적인 신앙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신앙은 어떤 것일까요?
1. 피의 제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놀랍게도! 성경에서 일관되게 증언하는 하나님은 피의 제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삭 헌제 사건을 보시죠(창 2:1-18).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창 2:1)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창 2:2)을 번제물로 바치라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정말로 이삭의 목에 칼을 들이댔습니다. 황급히 천사가 동원되고, 이삭을 대신해서 숫양이 피를 흘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속이 새까맣게 타버렸는지 어떤지는 무심하시면서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아노라.”(창 2:12) 하고,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한다.”(창 2:16)하며 아브라함을 축복했습니다. 아브라함을 흡족히 여긴 것이죠. 피의 제사 후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만약’ 숫양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가정법으로 사건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삭의 피는 대지를 적셨을 겁니다. 모리아 산에서는 숫양이 이삭을 대신하긴 했지만, 피의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이 피의 제사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유월절 절기는 어린양의 희생으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 믿음의 근간(根幹)입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 표적이 된 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너희는 이날을 기념하여, 대대로 지킬지니라.”(출 12:13-14) 어린 양의 희생은 모든 것의 맏이를 대신 한 것이죠. 하나님은 사람의 맏아들만이 아니라, 가축들의 초태생, 처음 익은 열매, 첫 추수를 바치라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처음 것을 ‘내 것’이라 하실까요? 왜 처음 것 받으시길 기뻐하실까요? 첫 태생의 의미는 생명을 잇는 처음 것입니다. 곧 모든 존재의 전부를 ‘내 것’이라 하시는 것이죠. 존재의 전부를 바치는 상징이 피 속에 담겨있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중요한 제사가 있습니다. 속죄제입니다. 레위기에 자세하게 방법이 기록되었는데, 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뿌리고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레 4:35) 했습니다. 이 역시 피의 제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임을 증언합니다.
2. 피의 제물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세례를 받고 뭍에 올랐을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들 예수님을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한 것은, 유월절 희생양을 의미하기도 하고, 이사야의 예언인 ‘고난받는 종’으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사 53:47)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왜 십자가의 길을 향하셨습니까?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요 17:4)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기뻐한다’라고 한 이유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에서 피의 제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피의 제물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기 때문에 기뻐하신 것이죠. 이 일을 히브리서는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려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라고 했습니다. 피의 제물이 된 예수님은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으로 아사셀 염소가 되어 고난을 받았습니다(히 13:12).
3. 순교의 피로 세워지고 자라는 교회
그리스도교는 기억의 종교입니다. 무엇을 기억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고린도전서 1:23-25에서 정말 중요한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떼어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는 성만찬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피의 제물이 되신 십자가의 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라는 것이죠. 교회는 이 피의 제물이 되어 몸과 피를 나누어주어 죄인들의 생명이 되어 주신 십자가를 기억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나도 그처럼 사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주님의 몸이 될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후, 성만찬 공동체가 세상 가운데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핍박의 파도는 새싹이 큰 나무로 자라는 것을 시기하였습니다. 스데반이 사울 앞에서 순교하고, 예루살렘 교회는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순교의 피를 헛되게 하지 않았죠. 흩어진 성도들이 들불처럼 복음을 전하고, 세상 구석구석에 주님의 몸이 섰습니다. 다시 시련의 폭풍우가 불어치고, 순교의 피가 땅 위에 뿌려졌습니다. 폭풍우를 피해 흩어진 성도들은 흩어진 그곳에 십자가의 복음을 마른 땅에 빠지지 않도록 박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피의 제사가 반복하여 드려지는 동안, 땅끝까지 복음은 전파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하면 안 될 일이 있습니다. 순교의 피가 “교회를 부흥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에 따라 사는 사람”이 많아졌을 뿐입니다. 이 중요한 사실이 구별되지 않으면, 거룩한 희생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더럽히는 것이 됩니다. 오늘의 교회들이 행한 일들이 무엇입니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부흥, 교회 성장,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매진해 왔습니다. 그 열매가 무엇이던가요? 알곡이었나요? 쭉정이였나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이끌지 못하고, “교회 다니면 복 받는다”고 ‘복’에 매달려 살도록 기만했던 일은 얼마나 많습니까? 일일이 나열하려면 엄청 많을 것입니다. 왜 이런 꼴이 되었습니까?
순교신앙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회개하라”는 복음의 첫 외침 앞에 서야 할 때입니다. 순교신앙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4. 순교의 신앙이 회복되어야 할 교회
그러면 순교신앙이란 어떤 것을 말할까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계 2:10) 하셨으니, 목숨을 끊어 “죽으면” 될까요?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에 성도는 한 사람도 없게 되겠지요.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 속에서 순교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a).
이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하는 것, 이것이 순교신앙이요,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피의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겠다고 나선 성도들, 성직자라면, 이제부터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도록” 해야 합니다.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는 방법대로 사는 신앙, 이것이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세상 속에서 살되, 세상과 같지 아니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교인이 되기 전에, 먼저 바른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흠 없는 존재가 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악의 유혹이요 어둠의 속삭임인 거짓과 기만과 속임과 탐욕 등 어둠에 속한 것들과 손잡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속사람이 지르는 양심의 소리에 용기를 가지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솔직히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면서 불평을 많이 합니다. 우리 교단을 볼 때도 걱정입니다. 분노도 생깁니다. 그런데 불평하고, 걱정만 하고, 화만 낸다고 잘못된 교회가 바뀌나요?
1960년대에 한국을 방문한 펄 벅 여사가 명동에 있는 청동다방에 들렸습니다. 이 다방에는 공초(空超) 오상순 시인이 마련해 둔 사인북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펄 벅이 남긴 글입니다.
“어둠을 불평하기보다는
단 한 자루의 촛불이라도
밝히는 것이 났다.”
어둠을 보고 나의 촛불 하나를 켜는 것,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만사는 희생 없이 되는 일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성장하는데 부모의 희생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학자가 배출되는데 스승의 헌신적인 가르침이 따릅니다. 나라를 국난에서 지키는데 순국의 희생이 있었으며, 민주주의를 이 땅에 정착하는 데에도 수많은 희생의 붉은 피 흘림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자그마한 가게를 지켜 가족의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일용할 양식을 얻는 데에도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의 가장의 발품, 노력이라는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몸으로 체득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는 길에 순교신앙이 꼭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순교신앙이 주님의 몸인 교회를 자라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피의 제사’를 원할까요? “그렇습니다.” 놀랍게도 성도들이 피의 제사를 지냈던 때는, 오히려 교회는 평화롭고 평안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존경도 받았습니다. 성도들은 비록 고난의 태풍 속에 있었지만, 확고부동한 소망과 믿음으로 신앙은 더욱 단단했고, 성결(聖潔)했으며 경건했고 맑았습니다. 분명하게 어두운 세상의 빛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련도 없고, 탄압도 없는 오늘에는 타락한 교회, 교인들, 직분자들, 성직자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게 된 것이죠. 순교신앙이 상실된 신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보다, 자기를 만족하게 하는 것으로 멈추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 가짜 믿음일 뿐입니다. 그래서 죽어가는 한국교회의 회생은 피의 제사 회복에 달려있습니다. 순교신앙이 살아나야 합니다. 오늘 누가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내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닮아가면서,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단 한 자루의 촛불’이면 됩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겸하는데 우리 모든 성도들이 이제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로, 십자가에 달려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며, 순교신앙으로 헌신하는 삶으로 하나님께는 영광, 우리에게는 참된 심령의 부흥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죽었다고 생각합시다
갈 2:20 / 김경진 목사
“죽었다고 생각해”, 선친께서 주신 주옥같은 조언입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면서 잠시 목회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논문을 쓰기 위해 교회를 사임하기는 했지만 큰 교회도 아니었고, 동네에 계시는 분들이다 보니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임이 있을 때면 가야할지, 때로는 이 사람 저 사람들을 만나야 할지 고민이 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떠나온 교회와 지혜롭게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고민하던 찰나에 아버지께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아버님이 “죽었다고 생각해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적용하다 보니 고민이 해결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이라면 가야지’ 혹은 ‘이 사람은 만나야 하지 않을까?’, ‘이때는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들 때마다 ‘너 죽었잖아. 죽었다고 생각해’라고 말하니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좋은 관계를 이어오고 있지만 당시에는 섭섭하셨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혹 오해를 하신 분이 있으시다면 설교를 통해 그 마음을 푸시면 좋겠습니다.
어떤 분과 상담을 나눈 내용이 기억납니다.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다 보니 싸움이 끊이질 않던 부부였습니다. 어떤 순간에는 상대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와 분노가 올라왔답니다. 그래도 아내를 죽일 수는 없고, 살맛은 나지 않으니 자신이 죽어야겠다며 산으로 올라갔답니다. 산 위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정리하며 죽을 준비를 하던 중에 자신이 죽게 되면 더 이상 용서할 일도, 사과를 받을 일도, 싸움을 일으킬 일도 없겠구나 싶었답니다. ‘이 이야기는 꼭 듣고 싶었고 아내에게 이 부분은 사과를 받고 싶었는데 죽으면 다 끝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죽었다고 생각하기로 결심하고 산에서 내려왔답니다. 이후에 아내가 이런 저런 말을 할 때마다 ‘내가 죽었지’ 생각하니 싸움을 일으킬 일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행복한 가정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한 글입니다. 며느리를 못마땅해 하는 시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며느리의 이런 점, 저런 점이 시어머니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안부를 묻는 전화도 뜸한데, 한 번 찾아와서는 금방 떠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시어머니가 지인에게 불평을 늘어놓자 그분이 이렇게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며느리,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마음이 좀 편해지실 겁니다.” 설 명절이 다가오는데 며느리 죽었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마음이 많이 편해지실 겁니다. 그렇다고 며느님들은 시어머니 돌아가셨다고 생각하고 찾아뵙지 않으면 안 되겠죠. 이처럼 ‘죽었다’ 생각하면 문제가 한결 가벼워지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됩니다.
< ‘작은 죽음’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은 넉넉한 마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
그렇다면 ‘죽었다’고 생각할 때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먼저는 밖에서부터 오는 문제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피해 의식을 갖지 않고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우리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든지 혹은 악하거나 무례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해 볼까요? 그때마다 ‘죽었다’고 생각하면 대응할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정확하게는 죽었으니 자연히 지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그 일을 경험할 뿐이죠.
‘죽음’은 생물학적 용어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의미는 매우 포괄적입니다. 생명, 호흡, 심장이 멈추는 자체를 본질적인 죽음으로 이해하기는 하지만 사회적으로 겪는 죽음의 의미도 상당합니다. 누군가가 나의 존재를 잊는 것, 또 다른 죽음의 그림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영향을 미치지 못하거나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는 상태 역시 죽음의 모습입니다. 더 이상 이전처럼 살지 못하는 단계로 들어서는 순간을 죽음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잊혀지고, 빼앗기고, 사라지고, 잃게 되는 경험이 너무도 무섭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죽음을 늘 생각하고 산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죽음이 주는 그림자들을 발견하며 살아갈 수 있을 듯합니다. ‘죽음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말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삶이 복된 삶입니다. 죽은 자신이 내일을 맞이했다고 한 번 상상해 보십시다. 그리고는 매일 지나가던 버스를 본다면 감회가 새롭지 않겠습니까? ‘내가 죽은 이후에도 버스는 매일 움직이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 교회와 직장이 나아가는 모습을 보며 세밀한 부분까지 느끼고 실감하게 됩니다. 작은 죽음을 경험하며 살 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다 보면 죽음이 실제 찾아온 순간에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견딜 만한 힘을 배양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줍니다.
< ‘작은 죽음’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은 악한 마음에서 스스로를 지킵니다. >
‘죽었다’고 생각하며 살면 내면에서 올라오는 악한 생각이나 죄악 된 마음도 제어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실까요? 한 이성을 보더니 정욕적인 마음이 올라온다거나, 탐나는 물건을 보아서 훔치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합시다. 올라오는 마음을 막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죽었다’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욕심을 내는 일이 불가능해집니다. 분노나 폭력적인 생각이 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죽었다’고 생각할 때 우리 안에 올라오는 악한 충동이나 사악한 생각을 지나가게 할 수 있습니다. 악한 정욕이나 감정이 나의 삶에 파고들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말씀입니다.
< ‘작은 죽음’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만을 신뢰합니다. >
세 번째로 ‘죽었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의지하게 됩니다. ‘죽었다’고 생각하는 일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돕고 싶거나, 어떤 일을 해내고 싶을 때에 ‘너는 죽었잖아’라고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 기도하는 방법 말고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끝났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기도하는 삶, 이것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얻는 또 다른 유익입니다.
< ‘작은 죽음’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은 감사가 넘치는 삶을 이뤄 갑니다. >
마지막으로 작은 죽음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은 하루를 ‘큰 선물’로 받게 됩니다. 죽은 자신에게 없어야 될 하루가 주어졌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감격이 되겠습니까? 어제 죽었으니 오늘 먹는 한 끼 식사는 덤이 됩니다. 신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내가 어제 죽었는데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을 하루 더 본다는 일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니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시간이 흐르는 대로 감사하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값진 유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며느리와 사위가 죽었다고 생각해 보실까요?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들에게서 오랜만에 안부 전화가 왔다면 기분이 어떠실까요? 여러분에게 그날은 어떤 날이 되겠습니까?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 기적의 날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왜 지금까지 전화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아니라 ‘아, 살아 돌아왔구나! 살아 있었어!’ 하는 감격이 솟구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놀라운 반전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 바울은 자신과 타인에게 ‘작은 죽음’을 선포하며 살았던 사도였습니다. >
여러분, 바울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날마다 죽는다고, 매일같이 죽음을 경험한다고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본문인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이 말씀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갈라디아서 2:20 중)
자신이 죽었다는 의식을 가진 바울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씀은 갈라디아서 전체의 흐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자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전하신 권면의 말씀이 갈라디아서입니다. 바울은 전반부에 서신을 쓴 이유를 설명해 두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1:6~7)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고 있다며 이야기합니다. 헐었던 것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이 헐리고, 그분의 보혈로 죄인 된 인간은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을 다시 세우려고 하자 바울이 안타깝게 여기며, 권면하기에 이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라디아서 2:21)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시기 위해 죽으셨는데 이것을 다시 살린다면,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이 여긴 셈이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본문 말씀이 등장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막혔다’는 표현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엇이겠습니까? 사형수의 형벌의 장을 뜻하는 표현이지요. 한마디로 죽음의 장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형을 판결합니까? 유대인들이 가지던 율법이었습니다. 이 율법은 인간이 지켜야 할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법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고소하며 고발합니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는데 너는 그것을 지키지 않고 있다. 너는 죄인이다.” 인간을 정죄하고 고소하고 고발하는 게 율법의 기능입니다. “적어도 이렇게는 살아야지”, “이렇게 살아야만 했어”라는 말로 율법을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의 문제에 적용한다면 ‘너는 이것을 해야지만 구원을 받을 수 있어’라고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선이고, 저것은 악이야. 그러니 저렇게 살면 죄를 짓는 거야. 그 결과는 죽음이야.”와 같은 형식이 율법이 가진 틀입니다. 결국 율법 앞에서는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 이르지 못합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입니다. 이어서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3:24)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인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모두가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십자가에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연결합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자신도 죽었다고 표현한 것인데, 이 말은 “구원을 얻으려면 적어도 이렇게는 살아야지”라는 율법의 틀에서 해방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니 더 이상 율법이 인간을 괴롭히지 못한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율법의 틀이 폐기되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율법은 타인을 향한 요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잣대로 “적어도 너는 이렇게 살아야지”라고 이야기하며 정죄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에 대해서도 죽음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 ‘작은 죽음’은 참된 삶, 참된 부활로의 출구입니다. >
바울의 고백을 오늘의 상황에 적용해 본다면 ‘며느리는 이렇게 살아야지’, ‘목사는 당연히 이래야지’, ‘누구는 저렇게 살면 안 되지’라는 기준으로부터의 ‘해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판단하고 사형장으로 끌고 가는 삶의 태도에서 탈출하는 것입니다. ‘나는 왜 이것밖에 되지 못할까?’라는 자신 안의 자괴감이나 고통에서의 해방을 뜻하기도 합니다. 율법의 잣대로 자신을 돌아보며 슬픔에 잠기거나, 후회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충분히 우리를 덮고 있고 그분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해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며, 용기를 얻고 일어서면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고백입니다.
죽음은 결국 새로운 삶으로 이어집니다. 바울이 말한 죽음은 자포자기적인 결말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죽었다’고 생각하며 말한 게 아닙니다. 그저 포기한다는 식으로 행동하지도 않았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고린도전서 15:31~32)
바울은 살기 위해 죽는다고 말합니다. 부활하기 때문에 죽는다고 말합니다.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기 위해 죽음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었다고 생각하십시다. 올 한 해 우리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할 때에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어떤 것도 용서할 힘이 생깁니다. 나에게 올라오는 욕망과 죄악들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삶도 가능합니다. 하루하루가 감사로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행복으로 가득 찰 수 있습니다. 나를 죽일 때에 이 일은 가능하며, 진정 모두가 살 길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죽었다고 생각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삽시다
갈 2:20 / 최응희 목사
우리 교회의 표어가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인들은 어디에 내놔도 참 그리스도인의 향기와 모습을 지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어떤 모습이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일까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다른 가치관, 다른 생활관, 다른 물질관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셔서 역사하심을 믿는다면, 그 삶이 이전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먹는 음식이 다르지는 않습니다. 입는 옷이 달라질 필요도 없습니다. 사는 집이 달라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달라집니다. 좋아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돈을 쓰는 방향이 달라집니다. 관심이 달라집니다.
취미삼아 예수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편안함을 얻으려고 예수를 믿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올 수도 있습니다. 혹시나 지옥이 있을까 두려워서 믿을 수도 있습니다. 가정이 평화를 위해서 교회에 나가 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전혀 믿음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나름대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주님은 그런 믿음도 아껴주시고 살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능력있는 믿음은 아직 아닙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믿음은 아직 아닙니다. 내 생활의 여러 개 중의 하나로서 신앙생활도 해 보는 것입니다. 병풍신앙이지요.
그러나 정말 이제는 내가 참 그리스도인이 되겠노라 그렇게 결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마음을 좀 바꾸어야 합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신앙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도(正道) 그 바른 길로 가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으로 살줄 알아야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고, 자기 자신 앞에서 부끄럽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밝은 모습으로 살 줄 알아야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참 놀라운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거듭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대부분 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그냥 이제부터 교인이 된다는 표시가 아닙니다. 세례는 옛 사람을 장사지내는 의식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바울사도가 세례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로마서6:3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로마서 6:8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로마서 6:10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로마서6:13
가끔 옛 선비들을 생각합니다. 놀라운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인간됨의 도리로서 옛 성현들의 글을 읽으면서 그 글을 따라 꼿꼿하게 살고자 했던 사람들이 선비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하늘에 부끄럽지 않기를 소원하고, 사람들 앞에 맑고 깨끗하기를 소원하며 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적어도 그 정도는 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맑고 깨끗하며, 자손들 앞에서 본이 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 다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다움이 어떤 것일까요?
첫째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주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예배를 드리는 사람, 그 고집스러운 모습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시간 나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내어 반드시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다움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무릎꿇어 경배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습니다. 찬양을 할 때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로 드립니다. 말씀을 들을 때, 딴 생각속에 보내거나, 찬양을 무슨 박자나 리듬으로 생각하며 부르거나, 기도시간을 명상이나 조는 시간정도로 생각한다면 그것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예배이겠습니까. 예배, 하나님 앞에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며 예배를 잘 드려야 참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입니다.
둘째는 말씀을 읽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하면 성경을 읽는 이미지가 떠올라야 합니다.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말씀을 읽어야 그 말씀에 따른 행동이 나올 것입니다.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 기뻐하시는 행동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읽지도 않으면서 어찌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메시지, 그 사랑의 편지를 읽지도 않으면서 어찌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뜻을 온전히 행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인’ 말씀을 읽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다움은 말씀을 읽는 모습에서 나옵니다.
셋째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무엇입니까? 사람에게 영혼이 있음을 알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으로 내가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내 이름이 올라간 것을 믿는 것이 구원의 확신입니다. 그냥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것을 믿고 묵묵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줄 아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람들의 찬사나, 사람들의 인정에 감정이나 마음이 이리 흔들, 저리 흔들 하는 것은 참 그리스도인다움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 눈앞에 보이는 열매만 얻고자 하는 조급한 세속적인 마음일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믿고,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을 믿고, 그것으로 영혼의 기쁨을 삼는 사람, 그 사람이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럴 때에 진정한 헌신도 나오고, 그럴 때에 진정한 드림도 나옵니다.
넷째는 감사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는 항상 감사의 향기가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주신 삶을 감사하고, 받은 축복을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믿음은 감사만큼이 그 분량입니다. 감사 속에서 기쁨도 나오고, 능력도 나오고, 헌신도 나옵니다. 감사가 그리스도인다움의 모습입니다.
우리 믿음의 첫 번째 고백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복의 근원임을 믿기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육신적이며 물질적인 삶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을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세상의 주이심을 고백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용하는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살고 있음을 감사하는 가장 기본적인 믿음의 고백이 십일조입니다. 십일조 사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행동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다움은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살고 있음을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육신도, 물질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려 사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고, 내 영혼도 부족하고 허물 많으나 예수님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모습입니다. 감사의 노래와 감사의 기도가 그 삶의 바탕을 이룬 사람,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요, 참 그리스도인다운 사람입니다.
다섯째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다른 어떤 종교에도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가 없는 종교는 없습니다. 손을 모으거나 허리를 굽히거나 절을 하거나, 모든 기도의 모습은 다 경건합니다. 제 눈에는 다 아름다워 보입니다. 다만 제대로 된 대상을 향하고 있지 않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마땅히 해야 할 행동입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믿음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다움은 기도에 있습니다. 소원을 구하든지, 육신적인 것을 구하든지, 물질적인 것을 구하든지, 우선은 기도가 있어야 믿음이 믿음입니다.
기도는 두 종류의 기도가 있습니다. ‘간구의 기도’와 ‘성화의 기도’입니다. 문제해결을 바라며 드리는 기도가 ‘간구의 기도’입니다. 직장을 주세요, 돈을 잘 벌게 해주세요. 우리 자녀들이 잘 되게 해 주세요. 건강하게 해 주세요. 어려움이 해결되게 해 주세요. 간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그렇게 간구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기도도 들으시며 응답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평생을 살면서 예수님 닮기를 바라고, 믿음이 아름답기를 바란다면 ‘성화의 기도’를 많이 드려야 합니다. 더 많이 감사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기 원합니다.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이기심을 깨뜨리고 더 사랑하게 하옵소서. 제게 주신 은사들을 주님 기뻐하시는 곳에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 말씀 따라 살도록 성령으로 도와주옵소서. 이런 기도가 성화의 기도입니다. ‘간구의 기도’는 육신의 삶 속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다만 우리 인격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품 속에 쌓이지 않습니다. 평생을 해도 항상 같은 모습에 머뭅니다. 그러나 ‘성화의 기도’는 우리 인격을 변화시킵니다. 우리 인품 속에 깊이 쌓이게 됩니다. 그래서 믿는 연륜이 오랠수록 그 믿음이 아름다워집니다. 그리스도인다워집니다. 그 인품과 믿음에서 향기가 나게 됩니다. 간구의 기도로 날마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고, 성화의 기도로서 점점 향기롭고 아름다워지는 여러분의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라디아2:20
이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답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연륜이 쌓여가면서 스스로 믿음의 성장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다운 모습 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바른 길을 꼿꼿하게 가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 말씀을 읽는 사람, 하나님 나라를 믿는 사람, 감사로 사는 사람, 무릎꿇어 기도하는 사람,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다운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사람이요,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한신교회의 비전
갈 2:20 / 이중표 목사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의 터전으로 가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위해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정을 만들어주신 일입니다.
가정은 삶의 터전이고 안식처이며, 삶의 소망을 얻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창조하실 때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할 때는 하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창조했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고 “궁창이 있으라” 하매 궁창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정을 창조할 때는 하나님께서 직접 간여를 하셨습니다.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이끌어 가셔서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정은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사이며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에 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 가정이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었습니다. 가정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머무실 가정이 파괴되었다는 것이요, 하나님이 가정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비극은 가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정을 회복시키는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는 일이었고, 다른 말로 말하면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한 몸 이루어 가정을 이루듯이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루어 살도록 만든 사람들, 또 이 사람들의 삶의 현장이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려 친히 교회를 세웠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예수님의 모형을 표상학적으로 유비합니다. 첫째 아담이 깊이 잠들어 하와를 만들 듯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교회라는 신부를 만듭니다. 첫째 아담이 옆구리의 갈비뼈를 취하여 신부를 만들 듯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 찔려 물과 피를 쏟아서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첫째 아담이 자기 신부된 여자를 보면서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말한 것처럼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서 “이는 내 몸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째 아담이 자기 갈비뼈를 취하여 만든 여자와 한 몸을 이루어 가정을 이루듯 예수님께서 당신의 옆구리에서 피흘려 만든 성도들과 한 몸 이루어 세운 곳이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가정이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었기에 이 가정을 회복하기 위하여 교회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며, 최고의 보화며, 최고의 축복이요, 여기에 최고의 영광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26년전에 한신교회를 창립하셨습니다. 물론 한신교회가 26년전에 창립되어서 오늘에 이르렀지만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는 창세 전에 창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다 창세전에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구원받은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자입니다. 우리의 만남은 26년 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소중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의 가정을 창조하여 거기 머물기를 원하셨던 것처럼 오늘 한신교회를 세우셔서 우리가 함께 가족을 이루므로 하나님이 친히 거하실 처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교회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이며,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한 신앙적 원리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됩니다. 아담은 하와와 가정을 이루기 위해 먼저 같이 죽는 일을 했습니다. 아담이 깊이 잠들 때 하와는 옆구리 갈비뼈로 있으면서 같이 잠들었습니다. 이것은 함께 죽는 것을 모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담을 살릴 때 갈비뼈가 빠져나오면서 둘이 되었습니다. 같이 죽고 같이 산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같이 죽은 것입니다. 첫째 아담이 죽을 때 그 갈비뼈 속에 하와가 있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릴 때 우리는 그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될 때 우리도 부활 생명으로 산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별세의 믿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므로 이제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게 되었습니다. 한 몸 되어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가 되고 우리는 몸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정의할 때 세 가지로 정의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들, 둘째 그리스도의 몸, 셋째, 성령의 전입니다. 한 하나님이지만 삼위의 관계를 말할 때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는 그의 몸입니다. 성령과의 관계에서는 성령이 거하는 집입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말씀하시고 그들을 불러내어 아브라함의 씨로 이스라엘 총회를 이루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430년 동안 애굽에 있을 때 장정만 60만, 전체는 2백만이 되었습니다. 저들은 애굽을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모형입니다.
교회는 히브리어로 ‘카알’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입니다. 불러낸 사람들, 아브라함을 이방 땅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사 수많은 후손들의 세계를 이루어 놓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 공동체의 시작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씨로부터 예수가 이 세상에 나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8-29)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 공동체에 대한 인격적 표현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가 몸을 이루기 위해서 친히 제자들을 부르셔서 훈련을 시켰던 것입니다.
한 몸이 되기 위해서는 인격적으로 마음이 같아야 되고, 뜻이 같아야 되고, 생각이 같아야 되고, 삶의 방향이 같아야 됩니다. 이 함께 사는 원리를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역사 속에서 함께 살아갑니다.
“한신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은 “반포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틀린 대답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로 한신교회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영광스런 비전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영광스러운 성도가 된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영광스러운 성도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제사드리는 것이 예배의 모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 생애의 목적이 하나님 앞에 제사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이나, 맥추절이나,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데 짐승을 잡아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제사장은 짐승을 잡아서 제사드리는 것이 일생의 사역이었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죄로 말미암아 마땅히 죽을 자들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리므로 죄사함을 받는 의식이 바로 예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소, 비둘기를 잡아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어떤 짐승을 잡아서 제물을 드려도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짐승일 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제물로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려 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나를 죽여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를 죽여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수 있습니까?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날 교회에 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은 십자가에 내 정과 욕심을 못박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제사장들이 칼로 짐승을 잡아 각을 뜨고 죽이듯이 말씀의 칼이 내 안에 들어와서 혼과, 영과, 골수를 쪼개고 나누어 나를 죽이고 새로운 존재로 살려놓는 것입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죽고, 말씀을 들으면서 죽고, 기도하면서 죽고 새로운 존재로 살아 돌아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우리는 영광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살아서 모든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제물로 드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으니까 이제 사는 삶 전체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는 주일예배요, 나가 사는 것은 주간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날 교회에 와서는 예배를 경건하게 드립니다. 그런데 교회 밖에 나가서는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삽니다. 이것은 일부만 예배요, 전 삶이 예배가 안된 것입니다. 전 삶이 예배가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영광스러운 성도가 된다.” 직장에서도 예배하는 성도요, 가정에서도 예배하는 성도요, 교회에서도 예배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전 삶이 영광스러운 성도가 되는 것이 바로 교회의 비전이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행복한 비전
“나는 에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배우고 교제하는 행복한 제자가 된다.”
예배하는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만 나 자신이 예수의 인격을 닮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서 교제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훌륭한 신랑과 신부가 만나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정을 이루지 않고 둘이 직장에서 퇴근하고 만나서 오늘은 신라 호텔에 가서 갈비 먹고, 내일은 강남 음식점에 가서 샤브샤브 먹고, 모레는 한정식 먹고 이런 식으로 산다면 행복하겠습니까 둘이 가정을 이루어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교제하며 살 때 거기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 편하게 믿게 놓아 두시죠.” 하면서 예배만 드리고 왔다 갔다 합니다. 그래서 한 교회에서 20년동안 믿음생활 했어도 이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믿으면 편하긴 합니다. 그러나 행복한 신앙은 못이룹니다. 왜? 교회가 하숙집 같으니까요.
예수님과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함께 살아야 됩니다. 교제해야 됩니다. 예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셨다면 내가 신부가 되어서 예수님과 가정을 이룰 때 여기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비밀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눈물을 먹은 마음」책을 읽고 독서감상문을 썼는데 감동이 되었습니다. 책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 나는 이 책을 읽고 하나님의 효자가 되는 것을 알았다. 둘째, 나는 이 책을 읽고 성공적인 삶이 무엇인가를 알았다. 셋째, 나는 이 책을 읽고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았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부모님을 잘 만난다는 것은 효자가 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부모가 잘 돌봐주고 사랑해주기 때문에 부모를 잘 만난 것이 아니라 효자가 되면 부모를 잘 만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가장 복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가정을 세우는 목적이 뭡니까? 행복하라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라고 가정을 주셨습니다. 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예수님과 교제하고, 예수님의 인격을 배우고, 예수님을 머리로 삼고 교제하면서 행복하라고 보내셨습니다.
별세의 비전
“나는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며 세상을 살리는 별세의 사도가 된다”
내가 성령의 전이 되었다면 세상에 나아가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이기 때문에 우리가 들어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서는 것입니다. 내가 미국에 가면 미국에 한신교회가 있는 것이요, 일본에 가면 일본에 한신교회가 있는 것이요, 캐나다에 가면 캐나다에 한신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들어가는 곳마다 세상을 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가정을 살려놓으십시오. 직장을 살려놓으십시오. 만나는 사람을 살려놓으십시오.
제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어느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왔더니 한 자매가 저를 찾아왔어요. “목사님,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건너 마을에 사는 아무개 집 며느리입니다. 제가 여학생 때 통학하면서 만났던 한 청년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예수를 안믿는 사람이라 저랑 예수 믿기로 약속하고 결혼했는데 교회에 안나갑니다. 그뿐만 아니라 시댁이 불신 가정이기 때문에 제가 교회에 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교회에 나가려고 하면 시어머니와 시아버지가 구박합니다. 그래서 시부모 모르게 새벽기도만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서울로 떠나려고 합니다. 서울 올라가서 야간 신학해서 여전도사라도 해야겠습니다.” “가정은 어떻게 하고 떠난단 말입니까” “목사님, 저는 이 집에서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 딸을 셋 낳았더니 시어머니가 딸만 낳았다고 구박하고 남편은 날마다 술 먹고 와서 저를 구타해서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 집을 떠나서 공부해가지고 여전도사 할 겁니다.” “가정 버리고 신학해서 여전도사 하라고 무슨 계시가 왔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자매님은 지금 생각을 잘못하고 있습니다. 자매님은 그 가정을 살려야 됩니다. 가정을 살린 후에 전도사를 해야 간증거리도 있지 자기 가정을 버리고 간 사람을 누가 전도사로 쓰겠습니까? 또 그런 사람을 예수님이 좋아하겠습니까? 자매님이 그 가정에 들어가 순교자의 정신으로 사십시오.” 그러면서 제가 물었습니다. “남편이 때리면 어떻게 했습니까?” “죽이라고 하면서 달려들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달려들지 않아 가만히 있지 오늘부터 남편이 구박하고, 시어머니가 뭐라고 구박하면 ‘우리 남편이, 시어머니가 아지 못해서 저러신다.’ 하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더 사랑하시오. 그리고 1년동안 순교자의 정신으로 이 가정에서 살아보고 그 후에 나한테 오시오.”
같이 기도하면서 1년을 지냈습니다. 순교자 정신으로 가족들을 돌봤습니다. 남편과 시어머니가 구박해도 “주여, 저들이 아지 못해서 그러하옵니다.”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렇게 1년을 지내니까 남편과 시어머니가 변화되고 남편도 교회에 나오고 시어머니도 교회에 나왔습니다. 1년 후에 저를 찾아왔기에 제가 물었습니다. “신학공부 해서 전도사 하시렵니까?” “이제 안해도 되겠습니다.” 가정에서 전도사가 되어서 가정을 살려놓았습니다.
혹시 불신 가정에 결혼해서 들어갑니까? 교회가 되어 그 집에 들어가십시오. 그 집을 살려놓는 교회로 들어가십시오. ‘이 가정이 나 때문에 예수 믿게 될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들어가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영광스러운 성도가 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배우고 교제하는 행복한 성도가 된다. 나는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며 세상을 살려놓는 별세의 성도가 된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비전이며 여러분의 비전입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와 하나님의 사람들
갈 2:20 / 하용조 목사
믿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갈등은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해결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맡겨 드리면 될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맡겼다가도 다시 그 일을 가져와서 자신이 해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 갈등의 가장 큰원인은 불신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지 않는데도 잘 살아 가는 세상 사람들을 보면서 갈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어떤 기도제목이나 사건을 맡기기 보다는 내가 그 일의 어느 부분을 차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고 안심할 수 있을 만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물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다스리고 정복하고 번성할 능력과 창조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다른 동물과 달리 자기의 환경을 지배하고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이 함께 한다면 훨씬 위대한 작품이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깨닫고 나의 삶을 투자했을 때 사람이 이룰 수 없는 작품을 창출해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가능성입니다.
성경에 있는 인물들은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들의 능력과 열심에 하나님의 방법과 섭리와 인도하심을 그들에게 허락함으로 인간이 이룰 수 없는 수준의 작품을 창출하여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능력있다는 것을 온 세상에 전파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의 원어를 보면 집을 짓는다 또는 경영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오늘날의 경제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과 방법과 뜻으로 어떤 일을 경영하는 것을 섭리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과 저에게 준 삶을 나의 지식과 능력으로 운영하기보다 하나님께 맡기면 더욱 초월적이고 놀라운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나님께서 거듭 호소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인간의 노력으로 사래의 권고를 듣고 하갈을 아내로 취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아들은 약속의 자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은혜의 자손을 이땅에 뿌려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인간의 뜻과 욕심으로 말미암아 갈등이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우리도 내 뜻대로 내 욕심대로 내 인생을 요리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운영하실 수 있는 경영에 맡기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이 거룩한 삶이요하나님이 원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아브라함의 일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나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나의 생각과 계획을 십자가에 죽여버리고 하나님의 경영하에 나의 삶의 전체를 맡길 수 있겠는가?, 내 자신의 삶을 내가 운전하지 않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 가운데 우리의 삶을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서 죽는다는 말은 부정적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성도들이 얼굴을 찡그리고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고 억제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경영하시기 위해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부활을 위한 죽음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고 한 것처럼 죽어야 합니다. 나라는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말은 나의 생각과 주장과 내가 원하는 것들의 활동을 잠시 멈추라는 뜻입니다. 내 생각과 욕망의 흐름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 생각과 내가 원하는 것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내가 죽었다는 것은 자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삶을 내 마음대로 주장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내 삶을 경영하셔서 깨어진 인생이 다시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내 스스로 계산하고 계획하는 일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만 죽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다른 말로 메시야입니다. 나를 구원하실 그분과 함께 내가 가지고 있는 계획을 죽음에다 넘겨 주라는 것입니다. 죽음 뒤에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이 옵니다. 따라서 나에게 가지고 있는 계획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 넘겨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함께 가시고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분이 내가 가지고 있는 계획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는 나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내 계획을 그분에게 넘겨주고 나의 소유권을 이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은 그 분이 나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계획을 책임지겠다는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살아주시겠다는 보증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계획을 넘겨 받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죽음은 부활을 위한 죽음입니다. 위대한 결과를 위해 나의 가진 적은 것을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 비밀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것이 이런 놀라운 능력이구나 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새 주인으로
세번째,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는 것처럼 새 주인을 맞이 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내가 주인이더니 이제는 내가 주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새 주인으로 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들어가셔서 여러분 마음과 생각과 계획을 다스리시고 나의 주인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포기하게 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내가 나의 실패와 잘못과 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나의 적은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면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받으셔서 죽은자를 살리시고 그분은 새 주인이 되셔서 새롭게 여러분의 인생을 운영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안의 죄를 말갛게 씻고 구속하신 그리스도께서 이시간 여러분과 나의 마음속에 오셔서 우리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오셔서 우리안에 주거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성전으로 삼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값으로 사신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과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렇게 그분이 이미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지 못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타협함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을 불법 점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파산합니다. 실패합니다. 짖궂은 모습, 험악한 모습들이 인생의 잡품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게는 이러한 모습들이 많습니다.
예수믿고 20년 동안 내 뜻대로 일을 결정하고 저질러버렸기 때문에 부끄러운 잡품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내가 주인 노릇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도 예수님은 여러분과 제게 찾아오시기를 원합니다.
가장 큰짐은 나라는 짐입니다. 이 나라는 짐은 얼마나 포기하기 어려운지 아십니까?
필리핀에서는 원숭이를 재미있는 방법으로 잡는다고 합니다. 원숭이를 잡기 위해서 먼저코코낫을 원숭이 손에 들어갈 만큼만 구멍을 뚫어 놓고 그 안에다 쌀을 넣어서 원숭이가 있는 높은 나무 밑에 코코낫을 갖다 놓습니다. 그러면 원숭이가 내려와서 그 안에다 손을 집어넣고 쌀을 움켜쥘 수 있는 만큼 움켜쥐고는 손을 빼려고 한답니다.
하지만 원숭이를 잡기위해 뚫었던 구멍이 움켜쥔 쌀 때문에 손이 나오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코코낫을 쥐고 나무에 깨지라고 땅땅 소리가 나게 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천천히 걸어오면 원숭이가 급해 더 빨리 칩니다. 하지만 여전히 원숭이는 나무를 치고 있다가 결국에는 잡히고 맙니다.
저는 이 원숭이 예화를 보면서 제 모습을 발견합니다.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내 기도제목, 열망, 소원을 꼭 쥐고 포기하지 못하여 그것으로 말미암아 흰머리가 나고 주름살이 잡히신 적은 없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입니다. 주님께 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내 안에 하나님의 내주하시는 기적이 나타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좥내가 너를 경영하마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면 쥐었던 손을 놓고 포기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다음 말씀을 읽어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지 않습니까? 내 머리와 온 몸이 움직이고 걷고 달릴 수 있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내몸은 일도 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고 병들지 않은, 하나님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나를 건강하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내 육신을 드려서 거룩한 도구로 쓰임받도록 축복하시고 내가 오늘 내 발로 교회를 찾아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지식과 건강과 여러분의 삶의 모든 경험을 하나님의 거룩한 사업에 재료가 되게 하십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서 나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주장하게 온전히 나를 맡길 수 있으려면 다음의 세 가지가 이루어 져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다가와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줍니다. 사랑하면 나를 다 바칠수 있습니다.
아들 희생한 그 사랑에 나를 맡겨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가를 깨닫는 것만큼 나의 사랑을, 내 삶을 그분에게 맡길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적게 느끼면 적게 맡길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예수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7장에 예수께서 돌아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절규합니다.
저는 이때야 말로 하나님이 나타나실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를 한번도 지은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뺨을 때려도 가만히 계셨고 침을 뱉어도 가만히 계셨습니다. 제가 얼마나 울분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절규하시는데 그때 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이니까 반드시 나타나서 그 흉악한 로마병정과 그 간악한 바리새인들을 한 칼에 다 죽여버리고 예수께서 승리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장을 읽어보면 주님이 돌아가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성경을 읽다가 놓았습니다. 놓고 나서 하나님은 믿을 것이 못되는구나. 이런 의인을 돌아보시지 않는 하나님을 내가 어떻게 믿을까? 하나님은 없고 성경은 그냥 종교적인 서적인가 보다라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에 내가 영적으로 무지하니까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한 손가락을 봅니다. 그 손가락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 광경이 재현되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부르짖는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손가락을 가리키면서 이는 내가 저를 사랑함이니라하고 말씀하시는데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의 교실구석이었는데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걸레였습니다. 그것은 35년동안 세상의 온갖 죄악과 세상의 타협과 세상 속에 살던 나라는 인생이 걸레조가리로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순간에 성령께서 나에게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죄없이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가 부르짖는 외침도 외면하셨습니다. 나의 죄를 예수께서 대신 지시고 누명을 쓰시고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내가 지은 죄를 대신 해서 누군가 죽어야 했습니다. 내가 죄의 길에서 해방하고 값을 치루어야 했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부르짖음도 외면하시고 죽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리고 이는 내가 너를 사랑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처럼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작은 일에도 누구에게 누명을 쓰면 화를 내고 멱살잡고 싸움합니다. 그런데 나의 죽을 죄를 그분이 대신해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게 하시는 대속의 은총을 맛보고 저는 완전히 깨졌습니다.
그 사랑입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그분이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기의 아들을 희생하신 그 사랑에 우리가 깨어있을 때는 내 뜻을 주장하지 않고 날 사랑하시는 그분에게 나를 맡길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이것은 희생입니다. 사랑에는 희생이 따르는 것입니다. 만일 사랑한다고 하면서 희생하지 않으면 가짜 사랑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희생이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를 알 수 있는 체험이 있으십니까?
사랑때문에 치룬 하나님의 희생
제가 전도사였을때 일입니다. 어느날 심방요청이 왔습니다. 아들이 하나있는 집사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심방을 갔더니 집사님이 우수와 걱정에 쌓인 얼굴로 저를 봅니다. 전도사님 큰일 났습니다. 제가 더 이상 애를 가질 수 없답니다. 여러해 동안 애를 가지려고 노력했는데 의사의 검진에 의해 불임이라는 판명이 났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집 어린애가 혼자 클 것을 생각하니까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는 전도사로서 어떻게 위로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전도사님 아들이 셋이죠. 예, 셋입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하는 얘기가 전도사 박봉에 아들 셋 키우시기 힘드시지 않으세요. 그래서 아닙니다. 하나님 은혜로 세 아들이 잘 큽니다고 했더니 큰아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 아이를 우리집에 양자로 주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내가 그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서 미국에서 일류가는 대학에서 공부를 시키겠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듣는 순간에 만화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귀와 코에서 김이 무럭무럭나는 것 같았습니다. 애비로서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릅니다. 당신은 애 셋 키울 자격이 없으니 고생시키지말고 애를 우리집에 보내주면 잘 키우겠다는 얘기입니다.
전도사 체면에 화는 못내고 어떻게 피할까 생각하다가 묘안이 떠올랐는데 미안하지만 그애를 제가 혼자 낳은 것이 아니라 집사람과 함께 낳았는데 제가 집에 가서 물어보고 해답을 드리겠습니다.라고는 집에 왔습니다.
집에 와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니까 그렇게 처량하고 불쌍할 수가 없더군요. 그날 저녁에 집사람이 집에 온 걸 보고 여보, 이런 이야기가 있는데 큰아이를 양자로 줄까?라고 했더니 집사람이 화가 나서 문을 쾅 닫고 들어가더니 그날 저녁은 밥도 주지 않더군요.
그 다음날 새벽기도회에 가서 강단에 무릎꿇고 앉았는데 억울해서 기도가 나오질 않았습니다. 하나님 이런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너는 아들이 셋 있지 않느냐 나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데 나는 그 아들을 죽는 자리에 내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나는 셋 중에 하나를 출세시킬테니 양자로 달라고 하는데도 이렇게 억울하고 마음이 아픈데 그분께서는 내 죄를 위하여 죽는 자리까지 내어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완전히 저를 붙잡아 버렸습니다.
이런 크신 희생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을 찬양합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아버지의 희생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내 뜻을, 내 삶을, 내 인생을 내가 경영할 자격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저는 그분의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신 그 하나님의 사랑과 줄줄이 흐르는 보혈의 공로로, 그분의 지극하신 사랑과 역사하심이 여러분과 나의 죄를 덮어버렸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그가운데 살아있는 한 내 것은 없습니다. 마지막 남은 구절을 함께 읽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와 생기를 소유한 분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오신 분이라면 하나님의 아들은 부활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는 분입니다.
내 신뢰의 대상이 이 땅에 사람의 모습을 쓰고 오신 하나님입니다. 그분에게 불가능이 있습니까? 그분에게 신실하지 못한 것이나 불리한 것이 있을까요? 그분에게 지혜가 부족할까요? 그분이 여러분에게 사기를 치겠습니까? 여러분이 그분을 의지하는데 그분이 몸을 피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재산을, 인생을, 문제를 그분께 맡길 수 있게 될 줄 믿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것을 찬양하며 감사드립니다. 그분이 나의 의지가 되시고 반석이 되시며 우리안에 오셔서 우리 삶의 경영자가 되시고 우리 삶의 인도자가 되시길 원합니다.
이제 여러분의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주님께 맡기고 내가 나를 주장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께 여러분의 인생의 소원을 맡기고 내가 주인이 아니고 그분이 주인인 것을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재능과 경험과 인생의 삶은 그분이 나를 들어 쓰셔서 하나님의 나라로 하나님의 기적과 이적의 현장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에 여러분의 삶을 맡기시기를 축원합니다.
죽음으로 사는 길
갈 2:20 / 이삼규 목사
성경에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역설적인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특히 성경의 기자들 중 외견상의 모순을 가장 많이 범한다는 비판을 받은 사람은 아마도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역설(逆說)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영어에서는 ‘Paradox’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진실 되거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도 이것들의 모순되는 특질 때문에 그와는 반대로 보이는 진술이나 주장’을 의미합니다.
성경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이 얼마나 모순되게 들립니까? 바울은 자기가 약할 때 강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정말 큰 모순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 강할 수 있을까요?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곤고와 박해” 이런 것들을 바울은 약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런 것들을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기뻐하노니”라고 말했습니다. 모순 중에 모순이지요. 제정신이라면 그렇게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안 믿는 사람들은 미쳤다고 말할 것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점이 드러납니다. 바울은 ‘그의 마음’으로 일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일하고 섬긴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볼 때 말이 되는 것이 영적인 마음으로 볼 때는 말이 안 됩니다. 영적인 마음으로 볼 때 말이 되는 것이 자연인이나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는 말이 안 됩니다.
서로 모순(矛盾)되는 두 가지 사상
모순적 요소들은 심지어 오늘날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발견됩니다. 전 세계 기독교 안에는 모순되는 두 가지 사상이 존재합니다. 제가 말하려는 두 가지는 ‘칼빈주의냐 알미니안주의냐? 또는 자유주의냐 근본주의냐?’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을 펴는 두 가지 사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오셨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돕는다.’라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겪게 되는 이런저런 갈등과 곤경에서 우리를 건져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인간은 어쩌다 생기는 이런저런 어려움의 문제들 외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은 틀림없이 주님이 해결해 주신다.”라고 말합니다. 이 사상에 따르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좋지만 이따금 몇 가지 작은 실수를 범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상은 기독교의 목적이 우리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의 직업이 무엇이든 예수님의 교훈과 기독교가 성공으로 이끌어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세속의 냄새가 진동하는 나이트클럽에서 노래하는 가수라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나이트클럽의 가수로 대성할 수 있고, 정직하지 못한 사업을 한다 해도 주님의 도움으로 성공하여 유명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성경의 좋다는 구절들을 모조리 긁어모아 자신에게 유리하게 써먹습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기 원하실 뿐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조엘 오스틴이라는 목사가 있습니다. ‘긍정의 힘’이라는 책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번영신학자요, 종교 다원주의자입니다. 세상에서 번영을 누리는 것이 곧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주장합니다. 긍정의 힘으로 더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사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은 자신들을 돕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믿습니다. 그들의 논리대로 한다면 예수님은 그들의 자존감을 높여주겠다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십자가에서 그토록 무서운 고통을 당하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꿩 잡는 것이 매다.”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을 많이 모이게 할 수만 있다면 어떤 육신적인 일들도 용납합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은 이런 논리를 세웁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사람을 모아놓고 예수님만 전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일부 목회자들이 매우 강한 유혹에 넘어가 육신의 욕구에 굴복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육신의 만족을 추구하는 대중이 좋아하는 예수는 어떤 예수일까요?
여기에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자아(自我)라는 것이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 선한 일을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병원과 고아원을 세웠고, 양로원을 운영하며 굶주린 자들을 먹였으며, 헐벗은 자들에게 옷을 입혔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자아는 여러 가지 선한 일을 하느라 바쁩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모든 선한 일로 인한 영광을 자아가 받으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만일 그 자아가 매우 종교적이라면 영광의 99%는 하나님께 드리더라도 1% 정도는 자기가 챙기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자기가 매우 충성스런 주님의 종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신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그분은 그분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인간과 공유하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아프리카의 성자로 알려진 슈바이처 같은 사람이 바로 이런 사상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가 우리를 더 좋은 사람으로 개선하기 위해서 오신 것일까요?
2) 예수님은 자아(自我)를 끝내기 위해 오셨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퍼져 있는 또 다른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아를 교육하거나 세련되게 만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아를 끝장내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자아(自我), 즉 우리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사형선고를 내립니다.
이에 대해 좋은 모범을 보여준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분께 합당한 자리를 우리의 삶에서 차지하시려면 ‘나(I)’라는 존재는 완전히 제거되어야 합니다.
이런 자아소멸의 메시지에 초점을 맞춰 사역하는 교회들이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중들은 이런 메시지를 좇아 모여 들지 않습니다. 육신을 만족시켜주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즐거움을 주고, 허탄한 바람을 불어 넣어주며, 그들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경박한 것을 원합니다.
■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한 교회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려서 100% 그분을 높이려고 애쓰는 25명이 모인 교회가 있습니다. 다른 한 교회는 ‘기독교 연예오락주의’라는 저주스런 멍에를 걸머지고 있고 2,500명이 모이는 대형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에서는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 두 개의 교회 중에 어떤 교회와 하나님이 함께 하실까요? 신약의 핵심 사상에 의하면, 옛 자아의 가치들은 거짓된 것이고, 자아의 지혜는 못 믿을 것이며, 자아의 선(善)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옛 자아를 사라지게 해야 합니다. 옛 자아의 삶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썩어버렸습니다. 옛 자아를 아무리 깨끗이 청소한다고 할지라도 그 자아는 돌이킬 수 없는 부패의 핵(核)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못 박히는 삶
새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라고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옛 자아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자아가 성경이 말하는 바로 그런 것이라면 이 옛 자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이 문제에서 우리는 모순으로 보이는 말씀에 직면하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삶에 대해서 언급한 주요 구절인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바울의 개인적인 증언입니다. 바울의 체험적 신학의 아름다운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증언은 별로 아름답지 못한 편지에 담겨 있습니다. 왜 갈라디아서를 아름답지 못한 편지라고 말합니까? 그것은 갈라디아 신자들의 신앙적 퇴보 때문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에 박아놓은 이 작은 다이아몬드는 갈라디아서 전체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작은 다이아몬드에 몇 가지 모순이(paradox)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뭐라고 말했는지 살펴봅시다.
1>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 말은 모순처럼 들립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돌아가신 분을 수없이 보았지만 그들은 절대로 말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염을 할 때 별짓을 다해도 아무 말도 못합니다.
“의사 선생님, 내가 죽었으니 장의사 좀 불러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일 그가 정말 죽었다면 그는 의사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2>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 있다.
이런 말이 가능할까요? 이런 가장은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죽어서 저 세상으로 간 사람이 어떤 기적에 의해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말하는 경우 말입니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 있다.”라는 바울의 말은 모순입니다. 만일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면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습니까?
3>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이것도 모순적인 말입니다. 더 나아가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이라는 말에서 ‘나’라는 존재는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살아 있고, 또 그러면서 살아 있지 않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은 모순의 연속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에 들어 있는 모순들을 일부러 강조하는 이유는 이것들이 본질적으로 모순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이 구절을 건성으로 읽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에는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을까요? 이 구절에는 반드시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각 사람이 이 구절의 교훈을 실천하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옛 자아는 절대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이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권리도 포기 되는 것입니다. 김형준 목사님은 이것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①자아관의 변화
자아관이란 내가 나에 대해서 갖고 있는 마음의 상, 이미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권리포기란 내가 나의 주인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②세계관의 변화
세계관이란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말합니다. 즉 사물을 인지하는 방식이며 삶에 대한 시각을 말합니다.
③가치관의 변화
가치관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무엇이 나에게 더 소중하고 중요한가를 판단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은 절대 죽음을 의미합니다. 부분적으로만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자아관과 가치관과 세계관이 180도 달라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독일 신학-14세기 익명의 저자에 의해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신비적 색채의 글]의 저자는 ‘지옥에서 불타는 것은 오직 우리의 고집뿐이다.’라고 썼습니다. 지옥불이 계속 타도록 만드는 연료는 ‘내가’, ‘나의’, ‘나를’, ‘나의 것’이라는 외침일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가 강조한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내 곳간, 내 영혼” 무려 이런 표현이 여섯 번이나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옛 자아가 살아 있는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물 잔에 독이 들어 있어서 그 물을 마시면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잔 안에 든 액체 중 단 1%만 독이라 할지라도 그를 죽일 수 있습니다. 내가 볼 때 1퍼센트의 독이 들어있는 잔이 더욱 위험합니다. 독이 조금 들어 있으면 사람들이 눈치 채는 것이 더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100%의 독이 든 잔은 사람을 즉시 죽입니다. 그러나 1%가 들어가 있는 잔도 사람을 확실히 죽이지만, 더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입니다. 여러분 요즘 가습기 살균제 사건 기억하시죠? 유해성분이 포함된 증기를 들여 마시면 서서히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만 위험합니까? 그것과 똑 같은 성분을 치약을 만드는데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증기만 마셔도 죽는데 입안에 넣고 매일 양치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당장은 잘 모르겠지만 서서히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몇 년 전부터 치약을 끊고 소금으로 양치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옛 자아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위험은 큽니다. 조금 남은 그것은 마치 자아 전체가 독인 것만큼이나 확실히, 그러나 더 고통스럽게 우리를 죽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자아라는 독을 확실히 제거해야 합니다.
새로 살아있음을 경험하라!
사도 바울은 옛 자아가 완전히 사라지고 새 자아가 완전히 들어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옛 자아의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우리는 죽었지만 살아 있는데, 이 ‘살아 있음’은 과거의 ‘살아 있음’과는 다릅니다. 우리 존재의 모든 본질에 가득 차 있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아니라 거룩하신 구속자의 생명입니다. 우리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면,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실제로 나타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옛 자아가 사라지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이 옛 자아에 필사적으로 매달립니다. 자기의 것을 잃어버릴까봐 큰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들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라는 예수님의 교훈을 잊은 채 살아갑니다. 우리의 것을 잃어버릴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것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자아관, 세계관, 가치관이 달라진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진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거래를 제안하십니다. 그 거래는 새 자아를 줄 테니 옛 자아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옛 자아는 아주 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새 자아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은 어떤 대가를 치러도 아깝지 않은 귀중한 것입니다. 옛 자아를 희생하는 데 따르는 고통은 하늘로부터 내려와 삶의 모든 부분에 파고드는 거룩한 감동의 기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육신적 눈으로 볼 때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이 모순으로 가득 차 보이는 이유는 우리의 옛 본성, 즉 우리의 자아 중심적 삶이 하나님의 뜻과 본질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름다움과 기쁨과 아들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죽으면 사는 삶입니다. 여기에 역설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십시오. 그러면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
갈 2:20 / 김삼환 목사
설을 두 번 쇠는 나라가 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만 신정도 있고, 구정도 있는 것 같습니
다. 20여 년 동안 정부에서는 신정만 지키도록 정부가 최선을 다했었습니다. 언론을 다 동원하고,
행정부도 동원 다 했지만 국민들 마음에는 구정 명절을 져버릴 수가 없습니다. 신정과 구정을 두 번
쇠면 국가적, 경제적 손해가 너무 많고, 똑같은 설을, 명절을 두 번 지킴으로 국가적 에너지 낭비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번으로 몰아야겠는데 국민이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만
구정을 쇠자고 하니 전 세계적으로 또 구정을 안 쇠는데 신정을 버리고 구정에만 맞추기도 참 어렵
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정도 쇠고 구정도 쇠고 하다 보니 1월 한 달 내내 인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열 번도 더 인사합니다. 오늘 1월 마지막 주일에 가장 마지막
으로 한 번 더 인사하겠습니다.
“새해 모두 축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세배를 하면 어른들도 복을 빌어 줍니다.
“올해 참 큰 축복 받아라.”
세배를 드리는 본인도 금년에 여러분 모두 건강하시고 잘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정말 축복을 빌
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축복을 어떻게 빌어야 합니까? 도대체 복은 무엇입니까? 누가 복 받은 자
이며, 어디 가야 복이 있습니까? 인간의 축복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우리가 상식으로 복
의 의미를 잘 알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성경의 복은 상식적인 복처럼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
에서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하나님을 잘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인간이 복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
다. 이 땅 어디를 가도 복은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곳에 축복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 사람,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복은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복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
다. 본인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 손이 복이고 그 발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 주변이 다 복이 있
습니다. 왜일까요? 그 사람이 복이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물이 있는 곳의 땅이 비옥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과실이 자라나고, 잎이 무성하듯이 하나님 경외하는 주변은 시냇가의 심은 나무와 같습니
다. 그 사람이 잘 믿음으로 그 처가도 복이 있고, 그 친척도 복이 있고, 고향도 복이 있고, 친구도
복이 있습니다. 그의 자녀도 복이 있고, 부모도 복이 있습니다. 복은 사람 본인인 것입니다. 사람 자
신이 복이 없으면서 제아무리 복을 받으려고 해도 안 되고, 복을 찾아도 안 됩니다.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세상의 어떤 좋은 것을 가져도 본인이 복이 아니면 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곧 영적인
복,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복입니다. 그 사람은 복을 좇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모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물질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본인이 복이 되어 온갖
보화를 가득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축복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
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좋고,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왜일까요? 그분이 나를 복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육신에 속하여 육의 사람이 되고, 육신의 길을 걸어가면서 죄의 종노릇하였습니다. 그렇
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서 육에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로 인해 육신에 있는 저주는 다 떠나가고, 육신 안에 있는 모든 불행과 고통은 다 사라졌습니다. 내
영혼이 구원 받는 것과 함께 내 육체도 함께 구원을 얻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체질이 변한
것입니다. 유전자가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언어가 변하고, 삶이 변하고, 목적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한 분, 예수 그리스도 한분으로 말미암아 내 육체 안에는 모든 저주, 어두움, 마귀의 세력
이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십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주
님과 함께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삽니다. 우리 집은 영원한 집이 되었습니다.
저희들 어렸을 때는 부모님들, 어른들이 묻습니다. “너는 누구 집 아이냐? 누구 집 아들이냐?” 물으
면 우리는 우리 아버지 이름을 대지 않습니다. 누구 댁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동네 사람들이 아는
것입니다. 모두가 알 수 있는 우리 집 택호를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안동에서 온 사람은 동네에서
그 집은 ‘안동 댁’, 서울에서 온 분은 ‘서울 댁’, 수원에서 온 분은 ‘수원 댁’, 평양에서 온 분은 ‘평
양 댁’이라고 합니다. 마을이 뭐 그렇게 크지 않으니까 그렇게 택호를 정하면 거의 다 1:1로 맞아들
어 가는 것입니다. 청송에서 오는 분 ‘청송 댁’이고, 영양에서 온 분은 ‘영양 댁’입니다. 우리 집은
어떤 이름을 붙였냐 하면 우리 어머니가 한 마을 그 아래 집에서 저희 집으로 결혼해 오셨기 때문
에 ‘이동 댁’이라고 했습니다. 한마을에 이동했다고 해서 ‘이동 댁’으로 우리 집이 다 알려져 있었습
니다.
“저는 이동 댁입니다.”
“이동 댁 아들입니다.” 하면 “아, 그 집이구나.” 하고 다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으
면 우리들 집은 택호가 변합니다. 예수 안에서 누구나 똑같은 칭호가 주어지는데 이 이름이 ‘영원
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영원하신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영원한 기쁨이요, 우리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의 길은 영원히 시들지 아니하는
축복의 길, 생명의 길,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열매 맺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영원한 것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세상은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1
장24절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모든 인간은 풀 아니면 꽃입니다. 모든 영광, 모든 인기, 모든 생명, 모든 부유함, 인간이 가지고 있
는 모든 것은 풀 아니면 꽃입니다. 시들든지, 마르든지, 떨어지든지, 잠깐인 것입니다.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름다움도 잠깐, 건강도 잠깐, 권력도 잠깐입니다.
금년에는 나라의 지도자들이 많이 교체 됩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미국, 세계의 지
도자들이 다 바뀌는 해입니다. 다 바뀝니다. 그 모든 영광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이 우리에게 주신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떠나가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영원합니
다. 우리의 기업은 영원합니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영원하신 그리스도와 만남으로, 영원하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오심으로 내 집은 영원한 집이 되고,
내생명은 영원한 생명이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원하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은혜로 인해 그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시적인 세상의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가봐야 잠
깐이니까요. 우리는 사람을 사귀어도, 길을 가도, 결혼을 해도 영원과 연관된 ‘영원 댁’으로 사는 것
입니다. 영원한 것에 취미를 삼는 것입니다. 영원한 길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기 때
문에 영원한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연속극이 인기 있다 해도 우리는 별로 관심
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건 그때뿐이니까요. 우리는 영원한 길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대서양을 건너는 어떤 할머니가 큰 풍랑 중에 그렇게 기뻐하고, 찬송을 합니다. 평안을 갖는 것을
보고 모두 놀랐습니다.
“할머니, 할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기쁘십니까? 풍랑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나는 무섭지 않아. 이 땅을 떠나면 천국 가서 먼저 간 딸을 만나고, 미국에 도착하면 미국 간 딸을
만나고, 나는 어디 가도 좋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까 나는 괜찮아. 두려움이 없어.”
우리는 영원한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이리 가도 좋고 저리 가도 좋습니다. 땅에는 특별히 좋은 것이
없습니다. 특별한 음식, 좋아하는 음식이 없습니다. 제게 늘 많은 분들이 묻습니다.
“무슨 음식을 좋아합니까?”
저는 뱀 외에는 다 먹습니다.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없습니다. 다 맛있습니다. 특별히 좋은 사람 없
습니다. 예수 믿으면 다 좋은 것입니다. 이래서 나쁘고 저래서 나쁘고, 이 사람은 이래서 못 쓰고
저 사람은 저래서 싫고, 그렇지 않습니다. 특별히 좋은 땅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 가서 살아도 거
기가 별장이고, 어디 가서도 천국이고, 어디 가서도 궁궐입니다. 내 주 예수 모신 곳 그 어디나 천
국입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변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우리는 이 옷도 좋고 저 옷도 좋습니다. 무슨 옷이나 다 괜찮습니다. 불편하지 않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제가 요전에 있던 교회, 해양교회 있을 때 우리 옆 강일동에 구두 깁는 집이 있
었습니다. 그분은 한쪽 다리가 여기까지 없는 장애인입니다. 이쪽 다리에다가 구두를 올려놓고 깁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늘 그 곳에 가서 구두를 맞춰 신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구두가 제대로 발에
맞지 않는 겁니다. 이쪽저쪽이 다른 겁니다. 그 집을 갈 때마다 싸우는 사람을 늘 만납니다. 막 어
떤 분은 치면서 ‘이게 구두냐?’ 하며 치고 박고 그렇게 싸웁니다. 저는 한 번도 안 싸웠습니다. 그분
은 늘 다시 맞춰준다고 합니다. 그분도 구두가 안 맞는 거를 알고 미안해합니다.
“다시 맞춰드릴게요. 다시 해 드릴게요.”
“괜찮습니다. 신으면 다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으면 다 됩니다. 조금 불편합니다. 조금 아픕니다. 조금 아프면 괜찮죠. 여러분, 구두
신으면서 아픈 것 안 참으면 어떻게 구두 신을 자격이 없지 않습니까? 10년 동안 열 번도 더 구두
를 맞췄는데 그분과 단 한 번도 안 싸웠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그 구두공도 다 잊었을 때 제가 명
성교회 목회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서울시립병원에서 누군가 저에게 연락을 했다고 합니다. 몸이
아픈 분이 저를 심히 찾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인지 물으니 그분이 말했습니다.
“제가 구두를 깁을 때 우리 집에 손님 가운데 김삼환 목사님이 있었어요. 제가 그 구두 깁는 장애인
이라고 말씀드리면 아실 거예요.”
알아보니까 그분, 그 구두공이 저를 찾은 겁니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누워 지내다 보니 10년 동안
한 번도 불평하지 않고 늘 웃으면서 구두를 기워 가던 제가 그렇게 보고 싶었다는 겁니다. 몸이 아
파 누워서 문뜩 저를 찾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구두가 불편해서 못 신는 것 아닙니다.
내 마음이 불편하면, 사람이 아무리 좋은 구두 신고, 좋은 음식을 먹는다한들 마음이 행복하고 평안
이 있습니까? 마음의 평안이 신발에 달렸습니까? 옷에 달렸습니까? 음식에 달렸습니까? 왜 현대인
들은 모든 것을 이런 것에 올인(전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결코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기쁨은 어디가도 기쁩니다. 이 평안은 어디 가도 평안합니다. 풍랑이
일든지 안 일든지, 어느 누구를 만나도 행복합니다. 마틴 루터는 결혼할 때 누구하고 결혼했다고 합
니까? 끝끝내 아무도 안 데려가는 그 처녀하고 결혼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행복은 미인인 것과 관
계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누구나 행복할 수 있습
니다. 오늘날 미인 지상주의라면이 세상에 미인만 행복하게요? 이런 저런 소식을 듣고 보니까 미인
이 제일 불행합니다. 미스유니버스, 미스코리아가 제일 불행합니다. 모든 것은 예수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래도 기쁘고 저래도 기쁘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이 사람도 좋고 저 사람도 좋습니다. 이 음식도 좋고 저 음식도 좋고, 우리는 여기 살
아도 좋고 저기 가서 살아도 좋고, 누구하고 살아도 좋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
다. 우리는 참 보화를 가졌습니다. 예수님이 참 보화입니다. 참 기쁨입니다. 참 평안이 주님에게 있
고, 참 자유가 주님에게 있습니다. 참 자유를 떼어놓고 지내면 어떻겠습니까? 참 자유가 없는데 천
가지 자유가 모인들 참 자유를 대신할 수 있습니까? 참 기쁨이 없는데 만 가지 기쁨을 모은들 내
마음이 기쁨으로 움직여집니까? 그래서 현대인들은 코미디를 볼 그 때만 기쁘고, 눈으로 잠깐 볼
때만 기쁩니다. 그 안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디 가서 무엇 보고 기쁨을 얻어 보려고 해도
참 자유 없습니다. 대한민국 같은 자유의 나라에 건너온다고 해도 참 자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유의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무한대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은 자유가 없
습니다. 왜일까요? 참 자유 되시는 예수님을 제하여 놓고 무슨 자유가 있겠습니까? 참 행복 없습니
다. 모든 것을 다 가져도 참 행복이 없다면, 작은 행복을 천개를 모아도 참 행복이 될 수는 없는 것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기쁨이요, 행복, 축복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원하신 주님, 주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제가 도서 의료 선교를 15년 동안 하면서 신안도초 그쪽에 배를 하나 만들어 두고 섬 선교를 15년
동안 진행했습니다. 우리 총회 역사상 처음으로 배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14톤짜리 배를 만들었
다가 나중에는 25톤 정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도 느리게 가서 20노트로 또 늘렸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로 만든 배를 제가 한 15년 간 섬겼습니다. 주 목사님도 잘 아시죠? 그 때 섬 선교를 진행
하려고 많이 다녔습니다. 가끔 목포에서 배를 타고 가다 보면, 그때 부부가 노를 젓고 가는데, 물고
기를 잡아서 돌아가는 분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러면 우리 배가 그 옆을 지나가다가 이렇게 저희 배
뒤에 그 조각배를 연결하도록 끈을 20미터 늘어뜨려 달아줍니다. 이렇게 걸어놓으면 그분의 노 젓
는 수고는 끝이 납니다. 그분이 가야 할 곳으로 우리배가 같이 가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 험한 세
상, 피곤한 세상에 누가 같이 가주실까요? 주님께서 풍랑 이는 이 땅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주
님이 나를 가야할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건강하고 힘 있는 자라도 제 힘으로 노를 저
으려면 피곤합니다. 신혼 가정도 피곤하고 자기 사업도 피곤합니다. 젊은이도 피곤합니다. 오늘 현
대인들은 다 피곤합니다. 그렇게 직장 가기 원했는데 막상 가면 직장이 피곤하고, 그렇게 원해서 결
혼을 했는데 피곤합니다. 제 힘으로 노를 저으니까요. 그래서 이사야 40장에서 우리 인간은 피곤하
다고 말합니다. 장정이라도 넘어지고, 노인이라도 넘어지고, 젊은이도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다 피곤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앙모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걸어가도 곤비치 않고 달려가도 피곤치
않다고 말합니다.독수리 같은 새 힘을 주십니다. 주님과 함께 가면 피곤함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평생 믿어도 하루 같고, 평생 살아도 하루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이틀 산 것 마냥 지루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부부 간에도 하루 산 것 같
이 기쁘게 살아갑니다. 주님 주시는 새 힘으로 살기에, 주님과 손잡고 가기에, 주의 도우심을 따라
가기에 우리는 곤비치 않습니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는 곤비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주님
이 함께 하여 영원한 축복을 받는 성도되기를 바랍니다.
다 일어나십시오. 성가대가 불렀던 찬송 70장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앞을 보고 부르시면 됩니다.
1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 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2 이방이 떠들고 나라들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번 발하시면 천하에 모든 것 망하겠네.
3 만유 주 여호와 우리를 도우니 피난처요 세상에
난리를 그치게 하시니 세상의 창검이 쓸데없네.
4 높으신 여호와 우리를 구하니 할렐루야 괴롬이
심하고 환난이 극하나 피난처 있으니 여호와요.
그렇습니다. 주님이 피난처가 되십니다. 우리에게 환난이 많고, 두려움, 어려움이 많지만 주님이 우
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우리 주 목소리 한번만 발하시면 천하의 모든 것이 다 정리된다는 것입니
다. 할렐루야!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지켜주시고 함께 하시니 우리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일어나신 김에 찬송 또 하나 부릅니다. 210장 3,4절입니다. 주의 자녀 받을 복은 영원한 축복인 것
입니다. 앞만 보시면 됩니다. 찬송가 찾기에 게으른 분을 위해서 다 준비한 겁니다. 같이 부르겠습
니다.
주의 은혜 내가 받아 시온 백성 되는 때
세상사람 비방해도 주를 찬송하리라
세상 헛된 모든 영광 아침 안개 같으나
주의 자녀 받을 복은 영원 무궁하도다
앉으시기 바랍니다.
‘세상 모든 영광이 아침안개 같으나’
세상 영광은 허무하다고 합니다. 왜 허무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는 우리는 어찌 허무하고 헛
될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영원한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6절에도 하나님은 천대까
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했습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박상진 교수님은 얼마 전 책을 내셨는데 ‘천대
의 복을 누리는 은혜의 가문’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여러분도 이 책을 한 번 다 보시기 바랍니다.
박상진 교수님의 아버님이 박용묵 목사님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목사님 집회에 참석했던 유명한 목
사님입니다. 신현균 목사님처럼 이전에 한국교회를 아주 부흥시켰던 훌륭한 목사님입니다. 이 목사
님은 자녀가 7남매인데, 자녀에게 아무 것도 유산으로 물려준 것 없지만 영적으로 믿음만 물려줬습
니다. 하나님 잘 경외하는 것만 물려줬습니다. 왜일까요? 그것만이 귀하니까요, 그것만 영원하니까
요. 그 영원한 축복과 기업을 자녀들에게 물려줬습니다. 그렇게 하니 제일 큰 아들은 지금 명지대학
교 교목으로 계십니다. 둘째 아들은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하버드 의대 교환교수로 갔다 서울의대 교
수로 계십니다. 그다음 따님도 연대 피아노과를 졸업하고 평생 교회 봉사합니다. 박상진 교수님은
쌍둥이인데 바로 쌍둥이 형은 안양 샘 병원 원장으로 있습니다. 박상진 교수님은 미국에서 박사학위
받고,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로 계십니다. 온 가정이 얼마나 축복을 받았는지요. 그런데 부모가 물
질적으로 물려준 것은 하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동물이 아닙니다. 소는 송아지에게 땅을 물려줘야 되고, 풀밭을 물려줘야
그가 살아가겠지만, 우리는 말씀을 물려주고, 교회를 물려주고, 믿음을 물려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물려주면 자자손손이 수천대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물려줄 유산이 잘못 인식하면서
기독교 가정에도, 교인가정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물려주면 안 될 것을 물러주고, 의지하면 안 될
것을 물려줍니다. 육에 속한 사람처럼 풀과 같고, 꽃과 같은 것만 물려주니 자녀에게 슬픔에 오고,
고통이 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시편 107:10-12)’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과 밖에 있는 것이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변하였습니
다. 육체의 저주는 그리스도께서 가져가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귀하고 거룩하고 영원한 기업만
주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와 함께 나누면서 나와 같이 살게 되고 동행하게 되는 것이다’
하십니다. 내 육체가 지금 살아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내 육체가 지금 이 세
상에 행복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살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음을 떠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시편144편의 기자는 외칩니다.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
니 내가 그에게 피하겠고 그가 내 백성을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시 144:2)
주님이 나의 방패가 되시고, 피난처 산성이 되시니 누가 우리를 공격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넘어
뜨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들과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양식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잇돌들과 같으며
우리의 곳간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
우리 수소는 무겁게 실었으며 또 우리를 침노하는 일이나 우리가 나아가 막는 일이 없으며 우리 거
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진대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 144:12-15)
누가 우리를 침략하고 넘어뜨리려 할지라도 주님이 먼저 알고 미리 가셔서 막아주십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지켜주시는 주님을 찬양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답은 하나입
니다. 원인은 하나입니다. 잘못된 것은 하나입니다. 주님을 떠나고, 멀리함으로 해일처럼 강한, 바다
의 해일의 고통이 우리에게 몰려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막을 수도 없고, 수습할 수 없습니다. 주님
이 우리를 막아주심으로 우리는 평안히 거하고, 안전히 거하고, 머리털 하나 상함이 없이 보호를 받
는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서 온 문제는 수습할 수 없습니다.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제가 황낙주 국회의원이 국회의장으로 있을 때 개원국회에서 제가 설교를 했습니다. 당시 4년마다
한번 오는 개원국회니 거기서 설교할 기회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 번 제가 설교를 한 바가
있습니다. 그때는 당 의장, 국회의장, 양당 대표, 당의 요직들, 기라성 같은 정치인들이 모두 다 참
석했습니다. 저를 귀빈식당에서 식사를 대접하고, 모두가 참석한 자리에서 인사말도 하고 그렇게 했
습니다. 그때 황낙주 의장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교회는 안 나가지만 하나님이 계신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웃기는 분입니다. 교회는 안 나오면서도 하나님은 확실히 계시다네요.
그러면서 설교에 은혜를 받으셨는지 말씀하는 겁니다. 본인이 3일 전에 러시아로부터 특별히 입수
한 정보가 있다고 합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이렇습니다. 러시아가 왜 망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나라가 망하려면 천재지변이든지 하다못해 쿠데타가 일어나든지, 전쟁이 일어나든지, 내란
이 일어나든지, 누가 반대하는 세력이 일어나서 무너져야 되는데 아무도 그런 일을 일으킨 사람이
없는데 나라가 무너진 것입니다. 여러분, 문제가 일어나지 않으면 잘 될 것 같죠? 하나님을 떠나면
문제가 안 일어나도 이유 없이 안 됩니다. 이유 있어 안 되나 이유 없어 안 되나, 잘 먹어 아프나
못 먹어 아프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됩니다. 이유 없이 망하는 겁니다.
10개 넘는 연합국 나라가 산산조각이 나고 하루아침에 나라가 거지처럼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됐
는지 모두 연구했습니다. 러시아의 정보학자, 과학자, 정치인, 기업인, 교육인, 러시아에 대한 연구
로 가장 존경받는 최고 학자들 100명이 모여서 3년을 연구했습니다. 왜 망했을까? 왜 망했을까요?
3년을 연구한 발표를 황난주 의장 본인이 입수했다는 겁니다. 그게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을 떠나
서 망했다는 겁니다. 3년 동안 찾은 결론입니다. 이 진리를 몇 년 만에 발견했습니까? 70년이 되어
야 발견한 겁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 핵심이 바로 이겁니다. 주님을 떠나면 망하는지를
70년이 되기 전에는 모릅니다. 왜 일까? 끝끝내 모르는 겁니다. 인간으로 할 짓은 다 해 보는 겁니
다. 그래서 사기도 쳐보고, 도박도 해 보고, 로또도 사보고, 처가 가서 처가 돈도 빼앗아보고, 처삼
촌에게도 공갈쳐 빼앗아보고, 다 해 봐도 안 됩니다. 다 해도 안 됩니다. 동창들 다 찾아다니며 잘
살아보려고 할 짓 다 해도 다 안 됩니다. 제비족도 해 보고, 다 해 보는 겁니다. 그러나 70년 걸립
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망하는데 그것을 빨리 알지 못하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빨리 돌이켜
올 수 없습니다. 이게 불행입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는 아버지를 떠난 후, 빨리 돌아오지를 못합
니다. 금방 돌아오면 되는데, 예수 믿고 교회 나오면 금방 살아나는데, 돌아오는 그 기간이, 그 한
텀(term)이 그렇게 오래 걸립니다.
북한에는 1948년에 공산주의가 들어왔는데 제가 영적으로 보면 2018년이 돼야 돌이킬 것 같습니
다. 70년입니다. 성경에 이스라엘도 70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참 1년이 안타깝고 아쉽지만 돌아오
지를 못합니다. 아쉬운 겁니다. 안타까운 겁니다. 한 가정도 젊은 20살이 집안도 못 이끄는데 지금
그렇게 젊은 분이 나라를 이끌어 간다는 게……. 참 나라 앞날이 걱정입니다. 빨리 주님께로 북한이
돌아와야 되는데 모르는 겁니다.
지난해 세계 5명의 독재자들이 죽었습니다. 하수구에서 숨어 있다가 비참하게 총살당해 죽든지, 끌
려나와 죽든지, 모두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이니까 저렇게 무식하겠지? 여러분, 아프
리카를 이렇게 보지 마십시오. 우리정부의 각료들 가운데 하버드, 프린스턴, 옥스퍼드에 Ph. D 한
분이 몇 분이 있습니까? 아프리카의 각료들 보면 옥스퍼드 출신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사
람들이 무식한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얼마나 많이 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몰라
서 그런 겁니다. 그 독재가, 170조억 원를 가지면 영원히 살줄 아는 겁니다. 돈만 있으면 영원히 살
줄 압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이 버리면 아무 것도 아닌 거를 모르는 겁니
다. 세상 것은 풀 아니면 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의 생명만 영원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스
도와 함께 주님을 모시고 십자가 그늘 아래 보호받고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성도되기 바랍니다.
주님에게로 돌아가야 됩니다. 열 두 해 혈루증을 앓던 분이 주께로 돌아와서 은혜를 받는 것처럼 모
든 문제를 주님에게 가지고 나옵시다. 우리 주님 앞에 모두 가지고 나와 예수 앞에 히스기야 왕 같
이 엎드립시다. 그는 위기를 당했을 때 하나님 앞에 문제의 편지를 가져다 놓고 “주여, 보시옵소서.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도움 받는 성도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도와주십니다. 영원하신 주
님이 우리의 피난처이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교육이 또 그리스도를 떠나서 얼마나 방황하게 될까 염려됩니다. 오늘날 하나님 앞에
서 우리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기도 많이 하
고, 눈물로 부르짖으며 하나님 앞에 은혜 달라고 얼마나 간구했습니까? 순교자들이 피 흘려 하나님
앞에 기도한 은혜로 하나님께서 대한민국 땅을 백년 만에 세계적인 나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
데 오늘날 대한민국이 전반적인 모든 분야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저버리는데, 그렇다면 이
민족이 70년 동안 얼마나 방황하겠느냐 말입니까? 오늘의 대한민국 교육이 왜 이리 위기를 맞이했
습니까? 선생님이 없습니까? 돈이 없습니까? 최고의 시설을 만들어 놓았는데, 교육이 왜 위기입니
까? 왜 망쳐놓았습니까? 그리스도가 없는 교육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가정이 왜 이렇게 되었
습니까? 무엇이 없어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리스도 없는 가정입니다. 민주주의이기만 하면 되나
요? 하나님 없는 민주주의는 다 망하는 겁니다. 민주주의든, 무엇이든지 그렇습니다. 이번에 다보스
에서 발표한 자료 못 보셨습니까? 경제도 하나님 떠난 경제이면, 이기적인 욕망과 욕심을 갖고 나
가는 경제이면 그 돈이 불처럼 활활 타올라서 가진 사람이나 안 가진 사람이나 다 안 되게 합니다.
사람의 가치는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소유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는데 쓰여야 합니다. 아멘. 하나
님께로 가야 됩니다.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요사이 또 그런 말 많이 하지 않습니까? 대기업이 빵, 베이커리 장사까
지 다 합니다. 또, 그 돼지 창자 가지고 만드는 분식 음식이 뭐죠? 순대까지 다 손을 댑니다. 또, 대
기업이 커피점까지 다 합니다. 대기업이 왜 그렇게 영세사업까지 손대서 돈을 법니까? 물로 개인이
든 기업이든 학자든 누구든지 성공은 해야 됩니다. 복은 받아야 됩니다. 그러나 복 받은 다음에는
이웃에게 복을 돌려줘야 됩니다. 봉사해야 됩니다. 인생도 60까지 살면 그 다음부터는 벌려고 애쓰
지 말고 봉사해야 됩니다. 좋은 일 하고 이웃과 사회를 섬기다가 영원한 나라에 가야 됩니다. 아멘.
교회도 부흥해야 합니다만, 자기만을 위해서 부흥하면 안 됩니다. 복을 다 나눠야 됩니다. 모두 같
이 함께 나눠야 됩니다. 조금씩 조금씩 구제하듯이 하면 안 됩니다. 다 같이 나누는 겁니다. 동업입
니다. 내 복이고,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람이 한 끼에 두 그릇을 먹고 삽니까? 한 번
에 두 잠을 자는 겁니까? 욕심낸다고 됩니까? 먹고 살면 되는 겁니다. 같이 사는 겁니다. 우리나라
기업도 기독교적인 이념을 갖고 기업을 해야 기업가도 복 받고, 나라도 복 받습니다. 혼자 다 쓸어
가지고 나 혼자 잘살겠다고 하는 기업정신은 그리스도 밖의 기업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모든 철
학도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 말해야 합니다. 잘 났든지 못 났든지 예수 안에서 예수와 함께
살면 그 삶은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 삶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유럽의 나라 가운데 알바니아가 있습니다. 알바니아라는 나라에 어떤 예쁘지 못한 아가씨가 있었습
니다. 너무너무 볼품이 없습니다. 많이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가진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영원한 축복을 가진 자에게는 뜨거운 열정이 생겨납니다.
교회 나오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인도에 자기보다 더 그렇게 어려운 분들이 있
다는 뉴스를 보고 그는 기도 했습니다.
“주여, 저 인도 가서 섬기게 해 주세요.”
그러나 길이 없었습니다. 도무지 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찾아보니까 그가 인도에 갈 수 있는
길이 딱 하나 있는데 수녀가 되어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녀가 됐습니다. 인물이 못
났지만 주님의 은혜를 감사했습니다. 그곳에 가니 수많은 인도의 빈민들이 그를 사랑하며 가까이 했
습니다. 모두 그와 함께 섬기면서 지내는데 이 소문이 온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그가 온 세계를
위한 천사가 되었습니다. 전 세계의 미인들이 다 그를 찾아오고, 세계의 대통령이 다 이분을 만나려
고 합니다. 이분은 나중에 노벨상도 받게 되었습니다. 아주 유명한 분이 되었습니다. 이분의 이름이
누구냐고 아직도 모르고 물으신다면 곤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주님와 함께 살아가면 인생의 후반부가 이렇게 아름답습
니다. 섬기고, 봉사하고, 나누어 주고, 사랑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곳에 가니까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60세 넘으면 너무 쇼핑도 하지 마세요. 그 대신 가진 것, 있는 것 많이
나눠 주세요. 많이 주세요. 나중에 불태우지 말고 지금 많이 주세요. 많이 주라고요. 영원한 주님의
세마포옷 입고 살 생각하고, 지금은 사랑하고, 축복하고, 좋은 일 많이 하기 바랍니다. 영원한 나라
백성으로 이 땅에서도 멋있게 살기 바랍니다. 이후 천국 가서 영원히 사는 하나님의 자녀되기 바랍
니다.
나는 없고 그리스도만 있습니다
갈 2:20 / 이종철 목사
예수를 믿는 신앙인의 모습이 어떠한지는 오늘 읽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이 잘 보여줍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다, 곧 나는 죽었다고 말씀합니다. 내 안에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말씀합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합니다. 골고다 십자가에서 달려 죽은 것은 예수님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 또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는 그것을 세례와 연관 지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세례는 단순히 기독교에 가입하는 의식만이 아닙니다.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세례, 정확히는 침례가 맞은데 세례 받을 때 우리는 완전히 우리 몸을 물속에 잠기게 했다가 다시 일으킴을 받습니다. 물에 잠기는 순간은 마치 우리가 죽는 것과 같습니다. 물속에서 나오는 순간 우리는 다시 삽니다.
이것을 잘 보여준 분이 있었는데 바로 김익두 목사님입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일제시대 대표적인 부흥사로 초창기 한국교회를 이끌었던 분입니다. 이분을 통해 주기철 목사, 김재준 목사, 이성봉 목사가 회심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예수를 믿기 전에는 깡패였습니다. 안악골 호랑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사람들이 김익두만 보면 슬슬 피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예수를 믿고 회개를 했습니다. 회개를 한 후 지난날의 삶이 부끄러워 자기 옛사람이 완전히 죽었음을 공적으로 알리기 위해 부고장을 돌렸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김익두는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익두가 죽었다는 말에 사람들은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죽었다는 김익두가 까만 성경책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어느 날 정말 김익두가 죽었는지 시험하기 위해 사람들이 실수한 척하며 구정물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구정물 세례를 받았지만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툴툴 털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옛날의 김익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뻐하시오. 만일 그가 살았다면 당신은 성하지 못했을 것이요. 하지만 지금의 김익두는 옛날과는 다른 새로 태어난 사람이라오.”
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죽었습니까? 사도 바울이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우리는 죽었다고 하는 말씀할 때 그 의미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율법에 대해서 우리가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2장 19절입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율법은 우리를 죄인으로 정죄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노예가 되어 살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는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구원 문제에서 항상 이것이 문제가 되었고 율법을 어디까지 지켜야 하는지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율법 중 정결례법 때문에 유대인들은 부정한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합니다. 바로 앞에는 안디옥 사건이라는 유명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와 바나바가 이방 크리스천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아마 성만찬 식사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보더니 그들의 눈을 피해서 그 자리를 빠져나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니 이방 크리스천들은 부끄러워졌고, 복음으로는 부족하고 율법도 지켜야 되는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사도 바울은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였던 것이 안디옥 사건의 전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예 율법에 매여 살던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사망을 선고합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더라도 그 사람이 죽으면 기소중지가 됩니다. 그것처럼 죽은 사람은 율법의 유무죄를 다툴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처럼 더 이상 율법에 매이지 않고 율법의 저주를 받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율법의 저주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를 얽매던 모든 저주에서 풀려났습니다. 죄나 사망이나 양심이나 운명에 매여 살던 내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오늘 말씀에서 다루고 싶은 것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 정과 욕심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 감정과 세상에 속한 모든 욕심도 십자가에 목 박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정과 욕심에 대해서 죽었습니까? 예수 믿고 우리는 얼마나 변했습니까? 가끔 드는 회의인데 우리는 수많은 설교를 듣고, 또 하나님 말씀을 읽는데 과연 나는 얼마나 변화되었나 하는 생각입니다. 신앙생활은 오래하고 나이는 먹었는데 나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누가 조금만 내 감정을 건드려도 우리는 참지 못하고 분노합니다. 누가 나를 알아주거나 대접해주지 않아도 곧 섭섭해 합니다 여전히 인색하고 자기 이기적으로 행동합니다.
어떤 사람이 수술을 하러 들어갔습니다. 마취제를 놓고는 좀 있다가 무언가로 꾹 찌르더랍니다. 마취가 완전히 되지 않았던지 ‘아야!’ 하고 소리를 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의사가 하는 말이 ‘아직 안 죽었네’ 하더랍니다. 죽은 사람은 감각이 없습니다. 내 감정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내 욕심이 살아 있는 것을 보니 우리는 여전히 죽지 않은 사람들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수양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고 그의 감정에 대해서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전에는 사람을 죽이던 증오와 폭력의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서고,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며 멀리는 다메섹까지 가서 사람들을 잡아들이던 폭력적이고 매우 교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믿자 증오는 이제 사랑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손해를 보고 해함을 당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로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3장은 과거의 옛사람은 죽고 새로 거듭난 사람임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욕심에 대해서도 여전히 죽지 못합니다. 여전히 세상의 권력과 물질과 쾌락과 명예를 좇아 사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성도들보다 목회자들의 욕심이 더한 것 같습니다. 큰 교회를 이루어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심이 강합니다. 교회가 어찌되건, 교회가 분열이 되어 망신창이가 되어도 상관없이 자기 권력을 놓지 않고 자기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죽이고 자기는 살겠다는 태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긴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빌3:7-9)고 하였는데 우리는 사도 바울이 배설물, 곧 똥처럼 여기던 것들을 마치 신주단지 끌어안듯이 안고 있습니다.
터넷 상에 떠도는 우루과이 한 성당 벽에 적혀 있다는 ‘반성하는 주기도문’은 우리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이라 하지 마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 너 혼자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아들과 딸로 살지도 않으면서.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 하지 마라. 너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하지 마라. 물질만능의 나라가 오기를 학수고대하면서.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지 마라. 온 천지가 네 뜻대로 되기를 갈망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을 양식을 잔뜩 쌓아두려 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하지 마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원한과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하지 마라. 호시탐탐(虎視眈眈)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하지 마라. 그 모든 것들이 온통 네 것이 되기를 염원하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너의 기도로 드리지 않으면서.
맨발의 성자 이현필
이번에 저는 남원에 있는 동광원 수련회에 참석하여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프로그램들 중에 십자가의 길 묵상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따라 산을 올라가며 팔복과 십자가의 말씀들을 묵상하는 것이었습니다. 골고다 십자가에 해당하는 정상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만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압축한 말씀이요, 신앙인의 삶을 요약하는 문장이었습니다.
이 동광원을 창시한 분이 있습니다. 바로 이현필 선생입니다. 맨발의 성자라 불렸던 이현필 선생은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만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이현필 선생의 일대기는 엄두섭 목사님이 쓴 『맨발의 성자 이현필』이라는 책에 잘 기록되어 있는데 그분의 생애를 간단히 언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현필 선생은 1940,50년대에 주로 활동을 하셨는데 이분은 자기를 죽이는 금욕적인 생활로 유명합니다. 결혼을 하였지만 예수님을 믿고 깨달음을 얻은 후 평생을 육체적으로 금욕하는 순결의 삶을 살았습니다. 도시의 쾌락이나 문명을 벗어나 주로 산속에서 기도하며 수도하였습니다. 맨발의 성자라 불리듯이 추운 겨울에도 산속을 맨발로 다니며 고행을 하였습니다. 수사복 없이 단 벌의 무명옷과 겨울에도 불을 떼지 않고 거적데기 같은 이불만 덮고 잤습니다.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생식하며 살았으며 죄인이라 하여 밥도 상 위에서 먹지 않고 땅바닥 에서 먹었습니다. 이현필 선생을 흠모하여 많은 사람들이 따랐는데 여자들은 평생을 처녀로 지내며 순결을 지켰습니다. 그들 중 일부가 오늘날 동광원이라는 곳에서 호호백발 할머니가 되어서도 여전히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결혼했던 사람들은 가정을 포기하고 순결의 삶을 살았기에 한 때 그들은 가정을 파괴하는 세력으로 몰리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중세의 성 프란체스코와 그 수도회를 보는 듯 했습니다. 엄두섭 선생의 책에서는 이현필 선생을 한국의 성 프란체스코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탁발하며 정말 거지 같이 살았는데 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래 이 선생의 정신은 ‘예수 잘 믿으려면 거지의 오장치를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던 만큼 이들을 훈련시킬 때도 고운 옷을 못 입게 하고 굵은 무명에 검은색 물을 들여 치마저고리를 해서 입게 하고 맨발 벗고 다니게 하고 쓰레기통을 줍게 했다. 거지 훈련을 시킨 셈이다. ... 동광원 수녀들을 연상할 때 담으로 둘린 수녀원 안에 고요한 수실에서 깨끗한 너울을 쓰고 제대 앞에 촛불을 켜놓고 꿇어 앉아 로자리오를 굴리며 경을 읽는 맑은 얼굴을 한 그런 수녀를 연상해서는 안 된다. 동광원의 수녀들은 쓰레기 뒤지는 거지훈련을 해야 했다. 오물 리어카를 밀고 다니는 똥통 인부다. 하루 종일 밭에 나가 남자들보다 더 중노동을 하는 농부들이다. 그 수녀들은 방구석에 앉아 똥오줌을 싸며 헛소리치는 백 명 가까운 정신병 환자를 종일 시중하기에 지친 보모들이다.” 지금도 동광원에는 이렇게 오랜 세월 주님의 길을 따르다 8,90세에 이른 할머니 수녀님들이 30여 명 살고 있습니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기에 이분들의 표정 하나하나에서 깨끗함을 느낄 수 있고, “밥 먹었어요” 하는 말 한마디에서도 사랑이 묻어나옵니다.
사실 이들은 자기 고행과 수양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는 야보고서 1장 27절의 말씀을 붙들고, 전쟁과 기근으로 발생한 고아들 6백여 명을 돌보았습니다. 무전 걸식하는 사람들을 데려다 하룻밤 제우고 따뜻한 밥을 지어주는 운동도 벌였습니다. 이들 수녀들은 당시 위험하고 전염성이 있었던 폐병 환자들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아주기도 하였습니다. 생명에 대한 사랑도 지극해서 길을 걸을 때도 지렁이를 밟을까 생명을 해할까 조심조심했으며 이현필 선생은 몸에 붙은 이도 죽이지 않고 다만 쫓아내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누가 낚시를 하여 고기를 잡은 것을 보면 자기 돈을 주어 그 고기를 사서는 다시 놓아주기도 하였습니다. 이현필 선생은 “만물은 내 지체요 인류와 이웃은 내 몸이다”라고 하며 생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들이 금욕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던 이유는 단지 육체적 수련을 위한 이유에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부인하여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의 길을 좇고자 하는 열망에서였습니다. 이현필 선생의 다음과 같은 기도문들은 그 의도를 잘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항상 죄인 됨을 기억케 하옵소서. 죄인된 것을 깨닫는 시간만이 제게 가장 행복된 것은 구주가 가까워지는 까닭이로소이다. 주님 저로 하여금 항상 저의 약함을 기억케 하옵소서. 저의 약함을 깨닫는 시간만이 제게 가장 복된 것은 크신 권능 물밀 듯이 찾아주신 까닭이로소이다.” “언제나 언짢은 일을 좋아하게 하소서. 궂은 것을 즐겨하게 하소서. 쓴 것을 달게 여기게 하소서. 대접받는 일을 중심으로 싫어하고 핍박과 수치와 천대를 꿀처럼 달게 여기고 악평과 훼방을 금싸라기같이 여기는 맘을 주시옵소서.” “주님! 주님만을 사랑케 하소서. 제 마음을 빼앗아 가소서. 온전히 빼앗으사 주님 수중에 두소서.”
이현필 선생은 그렇다고 하여 성 프란체스코처럼 많은 기적들을 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기적적이고 신비적인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몸에 병이 있어 기도를 받으려고 오면 “나는 하나님이 아니오.” 하며 거절했습니다. 오히려 어디가 아프다는 이에게 “아프게, 더 아프게 해주십시오.”라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호리라도 남김없이 갚으라. 내가 이승에서 겪어야 할 병이거나 고통, 불구라도 될 수 있으면 다 당하고 가는 것이 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 프란체스코와 그의 제자가 함께 추운 겨울 탁발 걸식하다가 어떤 야박한 집의 하인으로부터 맞고 모욕을 당해 쫓겨나면서 “이것이 완전한 기쁨”이라고 했던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자기의 무능력과 약함이 드러나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당하는 그 순간을 그들은 가장 큰 기쁨의 순간이라 고백했습니다. 이현필 선생은 평생 동안 폐결핵으로 고생을 하였는데 병을 보내주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며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오 축복하신 이 결핵병이여. 내게서 영원히 떠나지 마옵소서.”
이분의 자기 부정의 모습은 자신이 세웠던 원칙을 스스로 파기하는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현필 선생이 평생 힘썼던 것 중에는 살생을 금하여 육식을 먹지 않으며 아파도 약을 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현필 선생은 자기 죽음이 가까워오자 이것을 스스로 파기합니다. 이현필을 우상화하거나 그 제자들이 어떤 교조적인 율법주의자가 될까 두려워서였습니다. 제자들 앞에서 그는 신촌의 한 거지굴에서 굴비로 국을 끓여 그 국물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을 찾아가 약 처방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때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나는 위선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을 얻을 사람이지 선행이나 금욕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오늘 이대로 죽으면 저는 천국에서 예수님께는 역적 같은 놈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제가 절대선행을 강조해왔던 고로 저를 따르는 이들을 온통 철저한 율법주의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는 53세의 나이로 오랜 영양실조와 고행과 병으로 인해서 죽음을 맞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자기 의복을 헐벗은 사람에게 주고, 관을 쓰지 말며 거적 대기에 싸서 평토장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리고는 “오 기쁘다, 오 기뻐”하며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리스도만 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이런 이현필 선생의 삶을 본받으라고 하면 무리일 것입니다. 당시 시대적 삶이 못 먹고 못 살던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행동과 순종이 없이는 자기가 죽었다는 것도, 예수를 따른다는 것도 헛것이요 실제적인 자기 변화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청빈, 고행, 순결, 순명을 통하여 자기 부정의 길을 갔습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는 자기 것 중 스스로 부정하거나 포기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이나 생각이 아니라 행동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기를 부정하거나 모든 것을 버리는 이유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를 사랑하신 분,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목숨을 버리신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 속한 헛된 욕심들을 버립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고백합니다. 농부가 모든 소유를 팔아 밭을 산 이유는 그 안에 보화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인이 자기 소유를 다 팔아 진주를 산 이유는 그것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극히 값진 진주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죽이지 못하는 이유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예수가 그만큼 소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분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는 이유는 그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시험은 세상이 너무 좋아 보이고 하나님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갈수록 믿음을 갖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 꽃이 더 피고 신앙의 위대한 인물도 고난과 역경 가운데 탄생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6;20)라는 말씀이 맞습니다. 가난하고, 애통하고, 의에 주리고, 핍박받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의 편안함이 우리를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만 물질과 그 편안함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의 풍요를 누리면서도 여전히 허무와 소외,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정의나 사랑이나 어떤 보람된 가치를 추구하려 합니다. 명상이나 전원생활을 통하여 평화를 맛보려 합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의 힘과 그리스도의 가치는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내가 죽는 자기부정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신앙을 어떻게 이룰 수 있겠습니까? 다시 우리 사회를 가난하게 만들어달라고 기도할까요? 저는 그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내 자신에게서 우리들이 추구하고 있는 안전과 번영이 헛된 것임을 깨닫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어려움이나 몸의 약함이나 사회적 어려움으로 오지 않고 우리 스스로 그렇게 필요를 느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편으로는 육체의 필요를 줄여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육체를 좀 불편하게 하는 작은 금욕이 필요합니다. 좀 더 검소하고 좀 불편하게 사십시오. 좀 덜 먹고 가려 먹는 것이 필요합니다. 남들 하는 대로 다 좇아가지 말고 한 템포 늦추거나 돌아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육체의 느낌대로 분노하지 말고 한 번 더 참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질에 대해서는 좀 더 버리고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힘을 가진 대로 사용하지 말고 섬기며 겸손하게 사용하십시오. 작지만 의식적인 행동들이 우리의 육체의 소욕을 죽이는데 유익하며, 내가 죽은 만큼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아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살아나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지배하는 만큼 우리는 행복하며, 우리의 복이 될 것입니다.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갈 2:20 / 김남준 목사
Ⅰ. 본문해설
갈라디아서는 율법주의자들을 반박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교리를 강조하고 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가 우리를 율법과 모든 죄에서 건져내시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혔고 이어 이 사실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간증하듯이 남기고 있다.
Ⅱ.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힘
A. 핍박자 사울의 회심 : 대속의 교리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것, 이 대속의 교리가 핍박자 사울을 회심하게 하였다. 사울은 나사렛에서 나온 예수가 결코 그리스도일 수 없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생각에 예수는 다만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나무에 달려 죽은 사람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예수를 다메섹에서 직접 만나게 된다. 그는 큰 고민에 빠진다.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죽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이유가 없고, 하나님이 살리실 정도로 인정한 분이라면 형벌로 죽으셨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두 명제의 모순에서 사도 바울은 대속의 교리를 발견하게 된다.
B. 대속 교리의 핵심 : 못 박힘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를 위한 죽으심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의 죄를 끌어안고 그들을 대신하여 형벌적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내포적 대신의 죽음). 이 의미를 깨달은 후 사도 바울은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였던 자신이 그와 함께 영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께 불순종하던 자신은 죽은 자로 여기고, 새 사람으로 살아야 함을 알게 된다.
Ⅲ. 우리 안에 함께 사시려 함
A. 본문의 주해
우리말 성경에서 20절은 ‘내가 그리스도와~ 못 박혔나니’라고 시작한다. 이 부분은 희랍어 성경에 19절로 되어 있다. 즉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이다. ‘함께 못 박혔나니’는 희랍어 성경에 현재완료형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있어 왔노라’(I has been co-crucified)라고 번역해야 한다. 십자가 경험 사건은 과거에 있었지만 그 결과가 현재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음을 말한다. 즉 우리가 구원받음과 함께 죄와 율법에 대하여 죽어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세상의 중심을 자신으로 알고 나를 주인 삼으며 살려 했던 ‘내’가 죽어 있는 것이다.
B. 그리스도가 사시는 방식
사도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살아있다’는 것은 생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목적이 있는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져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부어주신 생명과 사랑을 분여받게 된다. 이것이 교회와 신자와의 영적 관계이며 이로 인해 신자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그 본질은 성령의 교통이다. 결국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은 내 안에 성령의 교통을 충만히 누리며 사는 것이다. 성령은 신자 안에 오셔서 그리스도의 생각과 뜻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전달해주신다. 또한 사랑으로 감동시켜 예수님께 순종하며 살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셨더라면 사셨을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시는 방식이다.
C.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함께 죽으시고 살리신 것은 ‘육체로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 대속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 실제적인 삶 속에서 열매 맺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셨더라면 하시고 싶으신 일들을 실제적인 생활 속에서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진리의 빛을 머금고 윤리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고 그 아름다운 지식과 윤리의 열매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도인 각자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옛 성품을 죽이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피조물로 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Ⅳ. 적용과 결론
신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아야 한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며 더 이상 죽은 자처럼 살지 않고 산 자처럼 하나님을 향해 살도록 부름 받은 자이다. 따라서 옛 자아에 대하여 죽고 예수님을 향해 살면서 구체적인 삶 속에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충만한 은혜를 주실 것이다.
무엇이 참된 신앙인가?
<서론>
“무엇이 참된 신앙인가?” 이것을 제목으로해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무엇이 거짓이 없는 참된 신앙일까요? 오래 예수를 믿는 사람도 내가 예수 잘 믿느냐 못 믿느냐 생각해볼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내 자신만 내가 신앙인인 것을 인정할 뿐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타인, 나와 함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신앙인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율법과 의식을 가졌어도 훌륭한 신앙인이 아닌 사람 참 많습니다. 열심히 계명과 율법을 지키고 교회 출석하고, 십일조도 내고 하면서도 실상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신앙인이 아닌 낙제생으로 볼 때가 많습니다.
<본론>
1. 거짓된 신앙
무엇이 거짓된 신앙일까요? 사랑이 없는 신앙은 외형적으로 아무리 훌륭하게 믿어도 거짓되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로 3절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보면 탁월하게 말을 잘하고 외국어를 여러나라 말을 유창히 해도 천사처럼 설득력이 있어 그 사람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다 수긍하는 것이 될지라도 그 생활 속에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시끄러운 소리와 꽹과리 소리에 불과하다. 인정 안한다는 것입니다. 각 나라말을 유창하게 구사하고 천사처럼 설득력 있게 말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시끄러운 소리와 꽹과리 소리밖에 안된다니까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포스트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해박한 지식과 놀라운 신념의 소유자라도 사랑이 없으면 무가치하다. 공부를 많이 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에서 박사, 석사 학위를 받고 실제로 지식이 탁월한 사람도 그 생활 속에 사랑이 없으면 그 지식이 아무 가치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구제와 헌신이 눈부셔도 사랑이 아닌 다른 동기로 하면 유익이 없다. 진짜 사랑의 동기로 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얻기 위해서 인기를 얻기 위해서 지지를 받기 위해서 구제를 하고 헌신이 눈부시도록 나타내도 하나님은 그것은 소용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에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을 하지 않고 무엇을 해도 실제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고 또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가 절대로 좋은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종교는 무용지물입니다. 쓸데없습니다. 우리 한국에 5만교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 소용없는 모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2. 십자가와 사랑
기독교 신앙은 그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근거가 십자가와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복음은 언제나 십자가에서 출발한 이유는 의식과 제도와 종교가 아닌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예수님의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첫째로 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어디에서 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당신의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 바로 외아들을 주신 사랑 그것 아닙니까? 다른 무슨 사랑보다도 자기의 금지옥엽으로 데리고 있는 외아들을 준다니 그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 사랑인 것입니까?
요한일서 4장 9절로 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를 살리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그 사랑이 어떠한 사랑이냐. 독생자를 우리에게 제물로 내놓기까지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는 우리를 심판하거나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너무나 더러워서 하나님 앞에 나설 수가 없으니까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33년 거하시면서 십자가를 걸머지시고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청산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알지 못하고는 기독교를 알았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는 살펴보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우리 인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절대 믿음과 순종입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이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예수님의 기도를 받은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대신 죽는 것이라는 것을 밝히 보여 주시고 예수님은 그 뜻을 받들어서 수치와 곤욕을 다 참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절대 믿음과 순종입니다.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 결코 부인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에 대한 사랑을 확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의 증거가 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한다는 보증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랑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신앙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은 옛사람을 벗어버리는데 있습니다. 옛사람 속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반역하고 저주로운 생활을 한 것인데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 했으므로 옛사람을 버리는데 있습니다. 죄와 허물과 마귀의 종 된 옛사람, 불순종, 불신앙, 탐욕과 세상의 종이 된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믿음과 순종, 온유와 겸손과 의와 거룩한 옷을 입고 새사람이 되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랑에 대한 보답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로 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셨고 예수님은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었다고 하시는데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지내고 함께 부활하사 새사람이 되었다는 체험을 해야 되겠는데 이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성경에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겠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나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받아 들여야 되겠는데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천국 내 천국이 되어야 되겠는데요. 이것은 우리가 주의 말씀을 들어서 예수님이 날 대신 제물이 되어서 십자가에서 죄와 불의, 추악, 저주, 절망과 죽음을 청산했다는 것을 알고 우리 상상 속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것을 꿈꿔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매일 예수님과 나는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이 되었다. 그것을 상상해 보고 꿈꾸어보고 그렇게 된 사실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와 나와의 관계는 그리스도가 날 위하여 죽었다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그것을 입술로 시인할 때 강력한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가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내 죄와 불의, 추악, 저주, 절망과 죽음을 끌어안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과 한가지이다. 그 사실을 상상해보고 꿈꿔보고 그 사실을 마음속에 믿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옛사람이 아니다. 새사람이다. 예수 죽음 내 죽음이다. 예수님과 더불어 죄와 허물을 다 청산하고 병과 저주를 청산하고 죽음과 멸망을 청산해버리고 말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다. 그런 생각과 꿈과 믿음의 말을 고백하면 그것이 우리 생활 속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삶의 구주로 모시고 우리는 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옛사람이 청산된 것을 상상하고 꿈꿔보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산 사람이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천국 내 천국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여러분과 예수님이 일치가 되는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예수 죽음 내 죽음 아닙니까?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주님은 행동으로 이것을 이루어 놓았는데 우리는 이제는 생각과 꿈과 믿음과 입술의 고백으로 받아들여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고난이 내 것이요, 부활의 영광도 내 것이요, 이것이 연결이 안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고난을 여러분과 나 때문에 당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나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신 것이요 자기가 지은 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알아야 되고 나를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리신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고 여러분의 상상 속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나를 생각하고 꿈꾸고 믿어야 되고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내게 효과를 발생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우리도 사랑으로 살기로 작정하고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주시는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은바 되고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은바 되고 성령님의 그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 신앙은 사랑이 없이는 하나님도 없고 예수님도 없고 신앙도 없습니다. 사랑이 신앙 속에 제일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로 18절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여기에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모든 종교적인 신앙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십자가가 없는 신앙
마귀는 우리에게 와서 십자가가 없는 사랑으로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어라. 열심히 교회 나가라. 십일조 드려라. 헌신하라. 그러나 십자가는 질 필요 없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짊어졌지 네가 질 것이 아니다. 이같이 십자가 없는 신앙을 가지도록 마귀가 우리에게 자꾸 종용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은 오만하고 자기중심에 서고, 탐욕에 서서 사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로 16절에 있는 말씀대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세상이 꽉 들어와서 세상에서 나는 너보다 낫다는 오만하고 무엇이든지 자기 뜻대로 행하려고 하고 욕심에 서서 인생을 살면 십자가 없는 신앙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나를 죽이고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제켜 놓고 자기중심으로 신앙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삶의 주인이 자기가 되고 하나님을 이용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 산다. 하나님은 하나님 뜻대로 하실 것이다. 내가 뭘 하나님께 내 인생을 맡길 것이 있느냐. 그래서 인본주의적인 신앙으로 자기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자를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돼지소굴에서 나온 넉마 같은 인생일지라도 모든 사람이 이마를 찌푸릴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오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용납해서 씻겨주시고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2장 13절에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사람들은 모든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힘으로 생수의 우물을 판다고 하는데 아무리 파봤자 그곳에서는 물이 머물지 않습니다. 터져서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수고는 결과에는 다 무너집니다. 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꾼의 경성함이 허사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늦게 누우며 고생의 떡을 먹음이 허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믿고 그냥 잠자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안 되기 때문에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 맡겨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를 내 힘으로 어떻게 갚을 수가 있습니까? 허물을 어떻게 내 힘으로 벗을 수가 있습니까? 무서운 병에 걸렸는데 내 힘으로 못 낫잖아요. 저주에 빠져서 못살아 이마에 땀을 흘리는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까? 더구나 죽음을 내 힘으로 감당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대신 짊어지고 탕감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허물의 종이 되는 것 원치 않고 병들어 앓는 것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 저주를 받아 세상에서 이마에 땀을 흘리고 가시넝쿨에 뒹구는 것 원치 않습니다. 죽어서 지옥 불에 타는 것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셔서 이를 대신 청산하게 하셨는데 예수님은 죽음으로 이것을 청산하셨습니다. 이제는 오직 하나님과 아들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겠다.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셔드리면 하나님이 너를 책임져 주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께 내어 맡기면 주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므로 믿고 평안을 가지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붙들어 주시므로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은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고 나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 정상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자기를 성찰하지 아니하고 회개가 없고 이웃에 대한 비평과 판단만 있는 것이 십자가 없는 신앙인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다고 하면서도 모든 일에 내 탓은 없고 전부 네 탓이다. 이것은 남편 탓이다. 이것은 자식 탓이다. 이것은 이웃 탓이다. 이것은 우리 교회 목사님 탓이다. 우리 장로님 탓이다. 전부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고 내 탓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제일 먼저 자기 성찰부터 보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잘못했지 않느냐. 내 탓이 아니냐. 내 탓이면 솔직히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좋은 신앙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7절에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제가 50년의 목회를 하면서 수많은 사람과 신앙상담을 했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와서 신앙상담을 할 때 자기 탓으로 된 것이 아니고 남편 탓으로 아내 탓으로 자식 탓으로 이웃 탓으로 이렇게 되었다고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회개가 없고 이웃에 대한 비평과 판단만 있으니 참 기가 막힌 것입니다. 내 탓을 해야 회개를 하거든. 무슨 일에 내 잘못이 있어야 회개하지 나는 잘못이 없다고 말하니까 비평과 평론밖에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31절로 32절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하나님은 예수님 때문에 우리에게 용서를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수 이름으로 간구하면 예수님 때문에 그 분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용서하시고 이웃도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완악하게 된 사람은, 깨어지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감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걸머지고 내가 깨어진 사람은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좋은 일은 좋아서 좋고 나쁜 일은 좋게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일에 감사하고 깨어진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부드럽고 겸손하고 깨어진 사람은 믿고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십자가에서 깨어지신 예수님을 따라서 깨어져서 나가야 참된 신앙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같이 교회 왔다갔다 해도 율법적인 신앙과 참된 신앙이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적인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율법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사람 생명보다 귀중하게 여기고 율법을 우상화하는 것이 율법적인 신앙인데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나 지도자들이 너무나 율법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보다도 율법이 귀중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잘못 알아서 그런 것입니다.
4. 율법이냐 사랑의 실천이냐?
우리 성경에 보면 한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가지고서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 마귀에게 맞아서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지나가버렸습니다. 제사장은 율법을 보존하고 율법을 가르치고 율법을 시행하는 사람이 제사장인 것입니다. 그 제사장에게는 율법만 지키면 되었지 사람이야 죽든 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 레위인 한 사람이 총총 걸음으로 지나가다가 피투성이 되어 죽어가는 사람보고 설레설레 흔들고 지나갔습니다. 종교의식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을 도와서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물두멍에 물을 채우고 성전을 소재하고 하는 의식을 집행하는 이 레위사람 고개를 흔들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과 의식이 중요하지 하나님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모든 율법은 하나님이 계셔야 율법이 되지요. 의식도 그렇습니다. 율법을 하나님 없이 손에 들면 전쟁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살상의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 한 사람은 율법도 가지지 않고 종교의식도 가지지 않지만 그 말을 타고 오다가 보니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지라 말에서 내려서 그를 끌어안고 자기 옷을 찢어서 붕대를 삼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름을 붓고 포도주를 먹이고 그를 말에 싣고 주막에 가서 주막집 주인에게 은전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내가 올 때까지 잘 봐주세요. 더 비용이 들면 내가 갚아 주겠다고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종교를 가지고 사랑을 버린 제사장과 레위인과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사랑을 베푼 이 사마리아인과 누가 더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이고 누가 더 하나님께 칭찬 듣는 사람입니까?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사랑을 베푼 사마리아인이 하나님에게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종교는 있고 하나님은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많이 볼 때 탄식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성전 뜰에서 말씀을 가르치는데 바리새교인, 사두개교인, 교법사 율법주의자들인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율법에 대단히 열중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율법의 일점일획도 차별이 없이 지키고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인데 이런 사람이 한 여인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왔습니다. 와서 예수님 발 앞에 던지고 발로 차고 모두 다 침을 퉤퉤 뱉고 있는데 보니까 손에 손에 돌멩이를 들고 있습니다. 성경 모세 율법에는 간음하다가 잡힌 사람은 돌로써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은 불공평합니다. 왜냐하면 간음을 하다가 잡혔다고 했는데 왜 남자는 안 데려오고 여자만 데려옵니까? 잡혔으면 둘이 다 데리고 와야지 혼자서 어떻게 간음합니까? 그런 벌써 편견된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보내고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가져왔으니 예수님이 별 볼일 없이 이제는 코너에 몰렸습니다. 성경에 율법을 무시고 선생으로써 가르치는 것은 선생이 아니라고 치부하려고 왔습니다. 그때 이 바리새교인, 사두개교인, 교법사들이 주여, 이 사람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는데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율법으로 말하면 반드시 죽어야지요. 죽이지 말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는 당신이 무슨 하나님의 종이냐고 달라 들 것이고 또 돌을 쳐서 죽이라고 하면 사랑이라 하는 당신이 사랑을 반역했으니 어떻게 구주가 될 수 있느냐고 할 것이고 이래도 저래도 꼼짝 못하게 예수님이 올무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한 사람 두 사람 얼굴을 쳐다보시고 난 다음에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그리고 엎드려서 손가락으로 글을 씁니다. 무슨 글을 썼다는 것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나온 사람들의 윗사람부터 적은 사람까지 인생에 지은 가장 험난한 죄악을 적어 나갑니다. 예수님 어깨너머로 보니까 자기들이 지은 죄를 하나 둘 다 적어 나가거든요. 가만히 보니까 이 여자에게 돌로써 쳤다가는 그 다음 예수님 돌에 맞아 죽겠다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꾸 글을 써내려가니까 아이구 나는 지금 소에게 물을 줘야 되겠는데 바빠서 가야 되겠다. 나는 아침에 조찬 기도회가 있는데 빨리 가야 되겠다. 나는 사람 만날 일이 있으니 빨리 가야 되겠다. 다 돌멩이를 놓고서 달아나버렸습니다. 한참 만에 예수님이 허리를 들어보니 아무도 없어요. 돌만 천지에 널부러져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여자에게 고개를 들라. 널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살펴보고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리니 집에 가서 다시 죄짓지 말아라. 여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율법은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했으나 예수님은 살리는 일에 치중을 했습니다. 사람이 율법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 사람 밑에 율법이 있고 사람 위에 율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계명을 지켜야지요. 그러나 계명을 하나님보다 사람보다 높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도구가 율법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칼이라면 군인들은 율법을 사용해서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의사는 칼을 가지고 수술해서 사람을 살립니다. 하나님에게 물어보시면 하나님이 인생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살리기 위해서 주신 것이지 사람 죽이는 칼로써 주신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번은 제자들을 데리고 밀밭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그날이 안식일입니다. 성경말씀에 안식일에 타작하지 말라고 했는데 안식일 밀밭 사이로 오는데 배가 고프니까 밀 머리를 꺾어서 비벼서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교인이 보고 선생님이여 어떻게 안식일에 타작을 합니까? 밀을 먹은 것도 타작입니다. 당신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합니까? 계명에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했는데 어떻게 타작을 합니까?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정말로 깜짝 놀랄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것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있지 사람을 평판하고 죽이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단호하게 사람을 귀히 여기고 사람을 중심으로 삼아 모든 것을 해석해야지 사람을 종으로 삼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안식일 날 성전에 보니 병든 자가 있는지라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쳤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쳤으니 원수들이 말하기를 어떻게 안식일이 거룩한데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안식일 날 병 고치느냐. 그러니 예수님이 이 답답한 사람아, 안식일 날 저 고통당하는 사람을 고쳐준 것이 무엇이 잘못 되었느냐?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사람을 너무 사랑하셨습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을 주님은 너무나 사랑해서 모든 우주 만물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있지 사람이 우주 만물을 받들기 위해서 있다고 말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사람을 죽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사랑으로써 해석해야 율법이 되지 율법을 사랑 아니고 율법 그 자체로 해석하면 무서운 살인검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그러므로 제사장, 레위인, 바리새인, 사두개인, 교법사 등은 예수님 시대 다 열심 있는 율법적인 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의 내용인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버리고 율법을 우상으로 만든 사람인 것입니다. 율법은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제켜 놓고 율법을 우상으로 삼아서 율법으로써 사람을 판단하고 평론하면 안됩니다. 사람을 살리는데 있지 죽이는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시키기 위해서 준 하나님의 등불인 것입니다. 율법을 보고서 비로소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안하므로 말미암아 파멸을 당하지 회개하면 그 율법은 살리는 검이 되며 그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 아들 예수께 나와서 죄사함을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 성경에 보면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 아버지가 두 아들을 키웠는데 둘째가 내 인생 내가 살겠다고 상속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상속을 아버지께로부터 탈취하여 저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다가 완전히 거지가 되었습니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생각하기를 우리 아버지 집에는 먹을 양식이 풍족한 종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렇게 하자. 아버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다시는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겠습니다. 품꾼의 하나로 보아주소서 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누더기를 입고 전신이 병든 상태로써 아버지께로 돌아옵니다. 아버지가 소문을 들으니 둘째 아들이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빨리 뛰어나가서 아버지가 뛰어 나가서 그 목을 얼싸 안았습니다. 왜 아버지가 뛰어나갔냐면은 옛날에 유대인들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부모를 비난하는 자를 돌려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 동리로 돌아오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배반하고 나간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빨리 가서 그를 끌어있지 아니하면 동네사람들이 돌로써 쳐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리 사람들이 보기 전에 미리가서 아들을 끌어안으려고 가서 목을 끌어안고 울고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혀라. 그리고 가락지를 끼워라. 아들 된 증거로... 그 다음 신발을 신겨라. 그리고 잔치를 베푸는데 살찐 송아지를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내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얻었다. 거기까지는 참 좋은데 형이 들에서 일을 하다가 집에 돌아오는데아버지가 저를 환영했으니 나는 이런 집에 안 들어가겠다. 아버지는 이 아들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율법을 통해서 회개하고 돌아오므로 끌어안았는데 형은 율법으로써 동생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동생보다 높습니다. 아버지를 만나서 아버지, 나는 이 집안에 들어오지 않겠습니다. 아버지가 창기와 더불어 아버지 가산을 다 탕진한 이 녀석을 왜 받아들입니까? 나는 이 아들이 죄짓고 추악한 놈이요 율법대로 심판을 받기를 원하지 나는 집에 들어오기를 원치 않습니다. 아버지가 큰 아들 보고 얘, 얘는 잃었다가 얻었으며 죽었다가 살아났지 않느냐. 내가 환영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너는 늘 나와 같이 있었으므로 이 집안 재산이 다 네 것 아니냐. 그로써 만족하고 들어오너라. 들어와서 동생하고 같이 화목하자. 안 들어갑니다. 나는 이런 놈의 집안에 안 들어갑니다. 끝까지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고 안 들어갔습니다. 잔치에도 참여 안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 사는 우리들도 이 교회에 나오는 율법주의자들이 술 먹고 도박하고 방탕하던 놈이 다 교회 나와 있으니 이런 교회에 나는 안 온다. 나는 의롭고 거룩하게 살았으니 나 같은 사람 있는데만 가겠다. 그러면 그 사람 어디 갑니까? 지옥밖에 갈 데가 없습니다. 천당에는 죄인들이 올라가는 곳이지 의인이 올라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 천당에 의인이 올라가는 줄 압니까? 천당에 가면 의인 없어요. 모두 죄인이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아 씻음 받은 사람들이 올라가는 곳입니다. 긍휼과 자비를 받은 사람이 올라가지 하나님 없이 의롭게 되어서 당당한 사람 천당에 못 올라갑니다. 한 사람 하나님 성전에 바리새교인과 세리가 왔는데 바리새교인은 하나님, 나는 저 뒤에 있는 세리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같이 죄를 안 짓고 깨끗한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훌륭하지요? 그런데 세리는 뒤에서 나는 세금쟁이로 다른 사람의 세금을 늑탈하고 죄도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죽일 놈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둘이가 그렇게 기도하고 나갔는데 하나님께서 물으시기를 누가 더 용서받고 의롭다함을 입고 나갔느냐? 보통 사람들은 다 앞에 바리새교인이 더 의롭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십일조 드리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금식하고 착한 삶을 살았으니 훌륭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아니야. 자기가 죄인 아니라는 사람은 내게 상관이 없고 저 회개하고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이옵니다.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하는 죄덩어리인 세리가 용서를 받고 의롭다함을 받고 나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깨어진 사람을 원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한 대로 사마리아인이 율법도 없고 의식도 없어도 강도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도와준 그 사랑이 있으니 그 사랑 속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내동댕이 치고 간 그 사람은 하나님이 없고 예수님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되 항상 예수님의 사랑을 그 가운데 모시고 지켜야 올바른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율법은 소용이 없습니다.
1963년 인종차별 철폐 시위 행진이 경찰견과 소화 호스에 맞닥뜨렸을 때,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 집안에 폭탄을 던지시오. 그래도 우리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이오.” 흑인 인권운동자로서 워싱턴 네거리를 대모하는데 경찰관들이 와서 호스에 물을 뿌리고 몽둥이로 때리고 하니까 “우리 집안에 폭탄을 던지시오. 그래도 나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이오.” 특히 그가 노벨평화상을 받고 나오면서 남긴 말은 유명합니다. “그래도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참된 신앙인의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당부가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요한복음 15장 12절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계명이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하면 그 속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사랑하면 그 곳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으로써 이웃을 판단하지 말고 이웃의 잘못을 사랑으로 도와줘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데 힘을 다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우리 기도드리겠습니다.
내 안에 사신 그리스도
갈 2:20 / 김광선 목사
금주는 부활절이면서 델리 임마누엘교회 창립 14주년 감사예배입니다.
1995년도 4월 15일 부활주일에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지난 14년 동안 하나님께서 저를 늘 용서하시고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 임마누엘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많은 일들을 하셨습니다.
그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베푸신 은혜와 큰 일들을 약 5 분 정도 준비한 영상을 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14년간 우리 교회를 통해 많은 일들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가장 큰 일은 ‘영혼 구원’입니다.
이번 한국에 나가 느낀 점은 한국은 전도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한 영혼 전도하여 구원하기가 거의 ‘하늘에 별따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이번 방문하여 자매결연을 맺은 대영교회 최복규 목사님은 총신대 전도학 교수입니다.
30년간 전도만을 연구하여 교회에서 임상실험을 하고 있는데 요즘 전도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합니다.
지난 14년간 우리 델리 임마누엘교회와 지교회들을 통해 인도에서 예수 믿고 구원얻은 우리 동족의 숫자가 수백명에 달합니다.
또한 지금 인도에 살면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신 분들, 그리고 앞으로 구원 받게 될 영혼들을 생각하면 정신이 바싹 날 정도로 전율을 느낍니다.
한국에서 도무지 예수 믿지 못할 택한 사람들을 인도로 보내 주셔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구원사역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지혜와 섭리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은 일년에 3,000개 교회 정도가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교회 개척이 힘들다고 합니다.
해외는 국내 보다 더 교회 개척이 힘이 듭니다.
국내건 해외건 하나님의 교회가 개척이 되어 성장을 한다는 것은 불같은 사단의 시험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개척할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 2:3)고 했습니다.
바울같은 능력의 종도 교회를 개척할 때 이런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저처럼 부족한 종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디모데’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 같은 신실한 동역자들을 붙여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번에 한국에 나갔을 때 황종연 장로님,오성주 집사님 내외를 모시고 제가 저녁을 좋은 곳에서 대접을 했습니다.
그분들은 14년 전에 델리 임마누엘교회가 개척이 될 수 있도록 온 몸을 던져 헌신해주신 고마운 분들입니다.
황종연 장로님은 수출입은행 델리 소장이셨고, 오성주 집사님은 한국통신 델리 지사장이셨습니다.
온갖 방해와 시련 중에도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분들이 사랑과 수고의 결과였습니다.
평생에 그 분들의 사랑과 헌신을 잊을 수 없습니다.
가능하면 한국에 갈 때마다 먼저 찾아 뵙고 문안을 드리고 있습니다.
오성주 집사님은 지금도 80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매일 하루에 한 두 통의 메일을 보내 주십니다.
어제는 다섯 통을 보내 주셨습니다.
각종 시사정보, 건강정보, 심지어 흘러간 가요, 추억의 팝송도 보내 주시고, 아름다운 경치 사진도 보내 주십니다.
창립 14주년을 맞으면서 잊을 수 없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좋은 분들을 만나게 하셔서 교회가 부흥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남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들로부터 제가 종종 이런 말을 듣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같이 착하고 좋은 성도들은 만난 목사님은 참 복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습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이런 좋은 성도들을 만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하루라도 회개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용서하시고, 날마다 은총을 베풀어주세요,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단 하루라도 살 수 없습니다”
그게 중심입니다.
이번에 한국에 갔을 때 종합검진을 받았습니다.
위와 장 내시경까지 받았습니다.
수면 내시경을 받는데 문제는 깨어날 때 헛 소리를 종종하는 것입니다.
이 헛소리가 중요한 소리입니다.
평상시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내면의 소리가 나오는 것이거든요.
이번에 깨어날 때 제 옆에 있던 사모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고 합니다.
장 내시경은 장에 거품과 공기를 집어 넣기 때문에 방구가 많이 나옵니다.
방구를 벙벙 뀌어대면서 “오 주여, 감사합니다!” 중얼거리면서 복음성가도 한곡 하면서 깨어나더래요.
그 이야기기 듣고 감사했습니다.
만일 깨어나면서 영자씨 순자씨 찾으면 무슨 망신입니까?
주님 이름 부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하나님께 자신의 부족과 무능에 대해 깊이 회개를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좀 더 성실하고 열심히 했다면 하나님께서 더 큰 일을 이루실 수 있었을텐데 나의 부족과 무능이 하나님의 일들을 막지 않았는지 ....”
가장 후회하고 있는 것이 건물 문제로 설교 아카데미가 중단이 된 것에 대해 전적으로 저의 불충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꼭 해야 될 일인데 건물 핑계를 대고, 과다한 선교비 지출을 이유를 들어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 한 것에 대해 깊은 후회와 회개를 했습니다.
인도 북쪽 데라둔에는 인도의 유수한 신학교들과 선교센타들이 밀집해 있습니다.
델리에서 기차로 5시간 30분 가까운 거리이고, 데라둔에서 1시간 만 차 타고 올라가면 해발 2,000미터 휴양도시 무수리가 나옵니다.
날씨가 맑으면 히말라야 눈 산이 병풍처럼 보입니다.
히말라야 줄기이기 때문에 사시사철 기후가 좋습니다.
여름에도 시원하고 겨울에도 그다지 춥지가 않습니다.
이런 기후와 교통 조건 때문에 인도의 좋은 신학교들과 선교단체 그리고 수양관들이 많습니다.
5년 전 그곳 땅 값이 1평에 5,000원 정도 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1평에 3만 5천원-4만원까지 올랐습니다.
시내와 좀 떨어진 산 밑 계곡물이 흐르는 곳입니다.
그때 그곳에 있는 한국 선교사들이 1,000평을 사 놓고 여유가 생기면 설교 아카데미 건물을 한 동 한 동씩 천천히 지으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그때 1,000평이면 500만원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 큰 맘 먹고 1,000평 사 놓았다면 지금쯤 설교 아카데미 몇 동 정도 지어 놓았을텐데 그 시기를 놓쳤습니다.
지금은 그 땅 살려면 3,500만원 듭니다.
많이 올랐지만 지금 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땅을 사 놓으면 언젠가 우리 교회가 부흥이 되어 한 동 한 동 지을 수 있습니다.
개인 이름으로 한 동을 지을 수 있고, 한국 자매교회에 부탁해서 한 동을 지을 수 있고.....
시작하면 되는데 그것을 하지 못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자체 수양관을 갖기 전까지는 그곳에 수양관들이 많이 있으니까 설교 아카데미를 올 여름부터 데라둔에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델리 임마누엘교회와 모든 지교회들이 힘을 합쳐서 해야 할 일은 인도에 리더들을 기르는 사회복지센타과 현지교회 개척입니다.
이달에 인도 하원의원 선거가 있습니다.
벵갈로에 상리아나의원이 Congress 당으로 출마합니다.
작년에 오리싸와 벵갈로 지역에 기독교 핍박이 한창일 때 상리아나는 힌두정당인 BJP 소속 국회의원이었습니다.
기독교 핍박은 BJP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BJP 소속이면서 자기 정당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TV 방송국에 출연하고 신문에 기고를 하면서 BJP 정당의 기독교 핍박을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중앙정부에 서한을 보내 군대를 파병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상리아니 사무실은 힌두과격분자들에 의해 공격을 당해 박살이 났고, 테러 위협으로 인해 죽음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는 BJP로부터 국회의원 제명 처분까지 받았습니다.
Congress 의 소니아 간디가 call 을 했고, 특수부대요원 18명을 보내 주어 거의 일년간 그림자 경호를 해 주고 있습니다.
이 달에 Congress 소속으로 벵갈로에서 출마합니다.
그 분은 벵갈로 뿐 아니라 한국 선교사님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현지인들로부터 사기나 위협을 당할 때 보호를 해 주었고, 적극적으로 인도 선교를 도왔습니다.
이런 기독교 리더가 앞으로 정말 필요합니다.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 만큼 정확하고 큰 투자는 없습니다.
사회복지센타를 위해 회원이 되어 후원을 해 주시는 여러분들게 감사를 드립니다.
좋은 사역자들을 공급 받아서 인도 현지교회를 개척하여 복음의 지경을 넓히는 것이 앞으로 우리의 과제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실 줄을 믿습니다.
모든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갈라디아서 강해 본문의 순서를 한 단계 먼저 나온 것은 오늘이 부활주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동시에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 속에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주께서 이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유는 그의 택한 백성들을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그리고 함께 부활하기 위해서임을 말씀해 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천 년 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 가실 때 나도 그 때 같이 못 박혔다고 본문은 영적 비밀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천 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고 나는 지금 2009년도를 살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그때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왜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어야 했습니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시간 속에 사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을 통해 모든 것을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 개념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계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신 분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항상 현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누구를 구원할 것인지 마음에 작정을 하셨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9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했습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작정의 결과이지 우리의 어떤 조건이나 행함과 전혀 상관이 없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이미 우리를 구원하기로 예정한 결과입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영원에 대한 개념을 먼저 이해해야 십자가 사건이 이해가 됩니다.
예수께서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 전에 있었던 택하신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 후에 생길 택하신 사람들 전체를 다 안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 12절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단 한 번의 영원한 속죄로 전 인류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살아 있을 모든 사람들 가운데 택한 자들의 죄를 완전히 구속하셨습니다.
그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심은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신 것입니다.
여러분, 왜 인생이 고달픕니까?
왜 사는 것이 고달프고, 왜 과거의 죄 문제로 후회하고 앞 길에 장애를 받고 있고,
왜 지난 허물과 죄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고 구원의 확신을 잃고 두려움에 사로 잡히게 됩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류가 율법 아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롬3:20)고 했습니다.
죄는 두려움을 가지고 옵니다.
죄는 하나님을 떠나게 만듭니다.
죄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어보려고 애를 쓰면 애를 쓸수록 율법에 덫에 걸려 오히려 더 괴로움을 당합니다.
갈라디아 2장 17절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이런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8장 4절에,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연약해서 율법의 요구를 결코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성자라 할지라도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 요구를 예수께서 다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이 율법을 범한 모든 죄를 대신 다 갚아 주시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든 율법을 다 지킨 것으로 간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믿는 자들은 율법에서 해방이 되어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11장 33절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이제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게 됩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나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삼일 만에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습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이 이제 믿는 자들 속에 사신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새 생명, 새 삶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로마서 6장 4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새 생명 때문에 살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본문에는 이 새 생명이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I. '나' 대신에 '그리스도‘로 살게 하십니다.
내 안에 부활하신 주님이 사십니다! 할렐루야!
내 안에 사신 주님은 내가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이 되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감동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한국에 가면 정말 좋은 친구 하나가 있습니다.
참빛교회 강종안 목사입니다.
갈 때마다 숙소를 제공해 주고, 끼니 때 마다 맛 있는 것을 사주고, 자기 차를 내 줍니다.
옷도 사주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싸우나를 데리고 가 주고...
귀국 할 때는 김치와 먹을 것을 특별히 오다해서 챙겨 주고....
감동을 줍니다.
그 친구 생각하면 얼마나 감동이 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주위에 나를 눈물나게 감동시키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생일하나만 제대로 챙겨 주어도 감동을 받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은 나를 위해 대신 죽어 주셨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영원한 천국을 주셨습니다.
내 안에 사신 부활하신 주님이 이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이 은혜 속에 살게 하시니 사는 것이 감동입니다.
먹는 것이 감동이고, 입는 것이 감동이고, 일하는 것이 감동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깨닫고 나서 다음과 같이 감동을 외쳤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 8:35-39)고 했습니다.
성도들 속에 사셔서 감동을 주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II. '율법' 대신에 '믿음'으로 살게 합니다
우리는 비록 그리스도와 이천 년전에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이 ‘육체’ 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지 않고 나의 행위에 의지해서 살도록 나를 율법으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내가 뭔가 해야 구원을 얻을 것 같습니다.
내가 뭔가 큰 봉사를 해야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고, 내가 헌금을 많이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고, 내가 뭔가 금욕하고 절제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고.....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우리를 율법으로 몰아 가고 율법의 덫에 걸려 또 절망하고 넘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함으로써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은 내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 보여 주고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감동’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감동 때문에 기도하고, 감동 때문에 봉사하고, 감동 때문에 헌신하고, 감동 때문에 헌금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동의 결과로 무엇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감동이 나로 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일이 열매를 맺습니다.
내 열심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나면 허전해지고, 나를 나타내기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왜냐면 나를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동으로 하게 되면 누가 알아 주나 알아 주지 않으나 내가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좋아서 하기 때문에 다툼이 없고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감동을 통해 일하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사랑하는 임마누엘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미 예수님과 함께 이천 년 전에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가 다 해결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주셨기 때문에 율법은 더 이상 우리에게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킨 것으로 간주해 주십니다.
의인으로 여겨 주십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예수님과 함께 부활했습니다.
(1) 여러분들 속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십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용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원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자마다 감동인생을 살게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이 감동입니다.
사는 것이 감동입니다.
일하는 것이 감동입니다.
죽는 것이 감동입니다.
오직 감동으로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사심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바라 보고 사느냐가 그 인생을 결정합니다.
바라봄의 법칙에 의해서 바라보는 대상의 종이 되게 됩니다.
돈을 바라보고 살면 돈의 노예가 됩니다.
권력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권력의 노예가 됩니다.
권력에 맛을 들인 사람들은 앞에 있는 권력가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계속 권력에 올인 합니다.
바라보는 것에 종이 되어 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를 바라보고 삽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을 바라 보고 살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동이 되어 내 옛 사람을 이기게 됩니다.
그 감동으로 기도하고, 그 감동으로 봉사하고, 그 감동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비로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 열매가 나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신앙으로 감동의 인생, 믿음의 인생으로 날마다 승리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
슥 14:4-5, 갈 2:20 / 이성희 목사
서론
미국 워싱턴의 놀런 클리크에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키가 큰 측백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30년 전 정부의 허가로 벌목꾼들이 숲의 나무를 베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측백나무도 베어낼 대상이었지만 베기에는 너무 아까워 차마 베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변 나무들을 다 베어내고 나니 이 나무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나무를 다시 살리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지만 앙상한 가지만을 남긴 채 나무는 죽었습니다. 아무리 큰 나무라고 하더라도 혼자 허허벌판의 거센 바람을 맞으며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나무들이 잘려나가면서 이끼와 다른 나뭇가지들이 죽어버리자 충분한 수분을 얻지 못한 큰 측백나무도 함께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하고, 죽을 수 있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주님이 죽으셨으니까 우리도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고, 살 수 있는 이유도 분명히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혼자 죽고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많은 축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양편의 십자가에 박힌 자들은 주님과 함께 못 박힌 자들이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의 십자가 옆의 십자가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하나의 십자가에 예수님과 내가 함께 못 박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내가 함께 못 박히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1:16에는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유대로 다시 가려고 할 때에 도마가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도마는 절망 가운데 “모르겠다, 우리도 죽어버리자”라는 포기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도마는 우울증세를 가지고 있었고 이 증세 때문에 한 말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절망이나 우울증 때문이 아니라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대담하게 함께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이 말을 잘 묵상해보면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며 영광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못 오를 산이 없고, 주님과 함께라면 못 건널 강이 없네. 주님과 함께라면 날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네. 십자가 지고 가는 길 험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가면 행복하겠네. 폭풍이 몰아치는 거친 광야도 주님과 함께 가면 못 갈 것이 없네”.
주님과 함께 라면 무엇이든지 기쁨이며, 영광이며, 영예입니다. 루터는 “주님과 함께라면 지옥에라도 가겠다”고 했습니다. 지옥에 가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라면 지옥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기록한 역사서입니다. 사도행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저희’라는 부분(they-section)과 ‘우리’ 부분(we-section)입니다. 사도행전의 앞부분은 ‘저희’라고 하다가 16장에 바울이 빌립보에 왔을 때 ‘우리’라는 말이 처음 등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빌립보에 왔을 때에 누가가 바울의 전도팀에 합류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빌립보를 떠날 때에 “저희가 떠났다”고 합니다. 누가는 빌립보에 남아 교회를 돌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20:6에 바울이 다시 빌립보에 왔을 때 ‘우리’라는 말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빌립보를 떠나”라고 합니다. 그 후 28장 끝까지 ‘우리’라는 말이 계속됩니다. 누가는 의사요, 역사가요, 문장가였습니다. 이런 누가는 바울이 전도하고, 후에 고소를 당하여 왕과 총독 앞에 서고, 유대인들에게 죽을 뻔 하고, 로마로 가다가 파선을 당하고, 로마에 가서 마지막 순교할 때까지 바울과 함께 하였습니다. 병도 많고 몸이 약했던 바울 곁에 의사인 누가가 함께 있었다는 것은 바울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가장 어려울 때 함께 하는 사람이 가장 좋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가장 친밀한 사람입니다. 가장 고마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가장 큰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바울은 가장 고통스런 그 순간을 예수님과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히겠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히는 것을 예수님은 가장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므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상반절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초대교회의 가르침의 초점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사실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초대교회는 두 가지 큰 이단이 있었습니다. ‘가현설’과 ‘양자설’ 이단입니다. 이 두 이단은 예수님의 본성을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본성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만을 인정하던 이단입니다. ‘가현설’이란 예수님은 신성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고,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던 구레네 시몬이었는데 사람들은 환각 가운데 예수님이 죽은 것으로 착각하였다는 이론을 말한 이단입니다. ‘양자설’이란 예수님은 인성만 가지고 있었는데 어릴 때 삶을 보니 너무 착해서 하나님이 세례를 받을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양자로 삼아주셨다는 이론을 말한 이단입니다. 이런 초대 이단은 그리스도의 본성에서 시작된 극단적 이론을 말하므로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은 신성만 가지고 계시다고 하는 단성론을 주장하는 교부들과 교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이 왜 문제가 됩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신으로만 보기도 하였고, 인간으로만 보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기 때문에 ‘단성론’이 생겨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예수님이 사람이며 동시에 하나님이시라는 양성론을 믿을 때에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는 말은 예수님을 핍박하던 바울의 삶의 변화를 표현한 말입니다. 그가 율법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사도행전 8:1에는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고 합니다. 스데반이 죽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은 스데반이 돌에 맞을 때에 스데반의 옷을 지키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 이 말은 바울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박해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 가두고, 십자가를 박해하던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완전히 돌아섰음을 말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유화는 ‘십자가에 못 박히심’(The Crucifixion)이란 그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가로 길이가 60m이고 세로 길이가 14m인 작품입니다. 오래전 러시아의 화가 얀 스티카가 그린 그림인데 너무 커서 둘 곳이 없었습니다. 미국의 휴버트 이튼이란 분이 포레스트 론이라는 묘지를 설립하면서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의 포레스트 론에 이 그림이 들어갈 수 있도록 큰 집을 지어 이 그림을 전시하였습니다. 얀 스티카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그리는데 어떤 장면을 그릴까 구상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큰 그림의 왼쪽 구석에 사울(바울)을 그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상상이지만 얼마든지 가능한 장면이었다고 봅니다.
이전에 사울은 십자가를 조롱하였습니다. 십자가를 부끄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후에 바울은 십자가를 사랑하고 자랑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힌다고 말할 만큼 십자가는 그에게 위대한 믿음의 증거였습니다. 바울이 이제까지 메고 있던 것은 율법입니다. 율법은 그에게 짐이었고, 어리석음이었고, 십자가보다 더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율법의 짐을 내려놓고, 어리석음을 멀리하고, 무거움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구속이나 고통이 아닌 자유와 해방입니다.
‘동정’(compassion)이란 단어는 ‘함께 고난을 받는다’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동정심의 극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와 함께 고난 받으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께 똑같은 동정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동정심의 극치였던 그 십자가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힌다는 것은 참 평안이며, 기쁨이며, 안전한 것입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 감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는 것은 무한한 영광입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은 이기적이지만 그 사람의 멍에를 지기를 원하는 것은 이타적입니다. 그냥 함께 있는 것만을 원하는 것은 이기적이지만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히고 죽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일입니다.
‘임마누엘’로 오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임마누엘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는 십자가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가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바울의 말대로 이제 내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임마누엘을 이루는 것입니다.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나는 평화롭다. 나의 갈등은 인간과 함께 있을 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누구나 평화롭습니다. 함께 있는 그 자리가 십자가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평화로운 법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어느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은 그를 공동묘지에 보내 죽은 자들에게 10분간 욕설을 퍼붓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제자가 돌아오자 스승은 물었습니다. “죽은 자들이 화를 내더냐?” “아닙니다.” 이번에는 다시 묘지에 가서 10분간 그들을 칭찬하며 박수를 치고 오게 하였습니다. “죽은 자들이 좋아하더냐?” “아닙니다.” “사람들의 갈채에 우쭐대지 않고 세상의 비난에 주눅 들지 않게 되면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아는 셈이다”라고 스승은 말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이제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란 말은 세상에 대하여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세상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사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하반절에는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은 믿음 안에 사는 삶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입니다. 믿음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바울은 세 가지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나 대신 그리스도가 존귀하고 그리스도가 내 삶의 중심입니다. 둘째는 율법 대신 믿음으로 삽니다. 셋째는 옛 사람 대신 새 사람으로 삽니다. 누구에게나 십자가는 변화의 경험을 하게 합니다. 십자가가 변화시키지 못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바울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육체 가운데 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바울이 육체 밖에서 산 적이 없습니다. 이전이나 이후나 바울은 육체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육체 가운데 살지만 육체로 살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육체 가운데서 육체로 사는 사람이 있고, 육체 가운데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더 이상 육체로 살지 않습니다. 왜 육체로 살지 않습니까? 육체를 죽였으니 육체로 살지 못하고 믿음으로 삽니다.
‘육체’라고 하는 말은 육체를 하나님을 거스르는데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체를 쾌락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육체를 자기 정욕대로 버려둡니다. 자기 육체를 죄의 움막으로 사용합니다.
창세기 6:3에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그들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사람을 멸망시키기로 하신 것은 사람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면 육신으로 변질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영의 일입니다. 육신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몸은 죄인의 관습으로 꽉 차 있습니다. 육체를 육체로 버려두면 멸망합니다.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죄 속에 삽니다. 육체를 십자가에 묶어 두지 않으면 악에게 묶여 삽니다. 로마서 1:24에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라고 합니다.
죄를 지어 죽을 몸은 육의 몸입니다. 십자가는 죄의 몸을 신령한 몸으로 만듭니다. 부활은 영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44에는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육의 몸과 영의 몸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면 영의 몸이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면 영으로,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친환경’이란 말을 자주 합니다. 환경 친화적 삶을 의미합니다. 현대인은 육체를 건강하게 하려고 친환경 유기농 식품을 찾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친영혼’입니다. 영혼 친화적 삶입니다. 영혼을 건강하게 하려는 노력이 가장 필요합니다. 십자가는 영혼을 강건하게 합니다. 영혼의 힘이 십자가에서 나옵니다.
영성가 윌리엄 로우는 “당신의 몸은 병약하고 썩어가며 곧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영혼을 온전케 하는 것보다 몸을 꾸미는데 더 집착하는 사람은 아주 어리석은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몸을 꾸밀 것이 아니라 영혼을 잘 꾸며야 영원히 삽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0에는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락방강화에서 유독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라는 말을 많이 하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신비를 제자들을 두고 떠나기 전에 가르치고 다짐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함께 못 박히신 예수님, 부활하셔서 우리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는 우리의 주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조엘 오스틴이 들려준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유수한 대학의 총장은 예의 바른 신사였고, 존경받는 리더였습니다. 그의 아내가 말년에 알츠하이머라는 치매를 앓게 되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아내의 병이 깊어져갔고 몇 년 후에는 남편을 못 알아볼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는 간병인을 두고 정성을 다해 병든 아내를 보살폈습니다. 총장은 어느 날 재단 이사들에게 총장직 사임을 통보하였습니다. 그가 사임을 자청한 이유는 아내를 돌보는 데 전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사회는 어떻게든 총장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습니다. 그 때 한 이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리 애쓴 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모님이 총장님을 알아보지도 못하시는데요.” 총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50년 동안 이 여인과 평생을 함께 하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아내는 저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저는 아내를 똑똑히 알아봅니다.” 진정한 사랑은 어떤 환경에서든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함께 사는 것은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함께 사는 것은 함께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섹스피어의 ‘헨리 5세’에는 “우리는 우리와 함께 죽기를 두려워하는 자들과 같이 죽고 싶지 않노라”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각오가 되어 있는 자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을 사랑합니까?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세요. 주님을 구주로 믿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세요.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세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주님과 하나가 된 삶을 살고 아직 육체 가운데 살지만 육체로 살지 않고 믿음 안에서 사는 귀한 주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
갈 2:20-21 / 김광선 목사
지지난 주간에 미국 워싱턴 프레스센타에서 열린 ‘북한자유주간’ 행사의 하나로 탈북자 방미선씨의 북한실태증언이 사진과 함께 인터넷 신문에 실렸습니다.
무산광산 선전대 여배우 출신인 방씨는 남편이 2002년 굶어 죽은 후 자녀들과 함께 탈북했다가 중국 공안에 잡혀 여러 차례 인신매매를 당했다고 합니다.
북한에 송환된 후엔 수용소에서 갖은 고문을 당했고 결국 2004년 다시 탈북에 성공했습니다.
수용소에서 당한 고문의 흔적인 허벅지를 내 보였는데 여러 군데가 마치 칼로 베어낸 듯이 움푹 움푹 파여 있었습니다.
그 고문으로 인해 현재는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운 상태입니다.
얼마나 먹고 살기가 힘든지 소똥에 묻어 나온 옥수수를 줍는 날이면 행운이라고 생각할 정도라고 합니다.
오래 전 월간조선에서 본 기사가 생각이 납니다.
심각한 식량난으로 인해 시장에 ‘사람고기’를 내다 팔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심각한 식량란으로 백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는데도 외화 벌이의 주요 원천인 개성공단을 폐쇄하겠다는 위협을 하고 있는 김정일은 실로 ‘악의 축’입니다.
북한 주민들을 위해 많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남북이 통일 되어 함께 잘 사는 민족이 되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탈북자들이 기자 회견을 할 때 마다 끝 부분에 공통적으로 당부하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일로 생각하지 말아 달라. 탈북자가 바로 당신일 수도 있었다”
여러분,
우리는 같은 민족이고, 같은 문화를 가지고 있고, 같은 언어를 쓰는 한 민족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북한에 살면서 굶어 죽어가고 있고, 독재 치하에서 억압과 공포에 떨면서 죽지 못해 살고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남한에 살면서 사치와 방탕이 극에 달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자유가 너무 넘쳐서 국가 공권력도 우습게 여기고 덤비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MBC PD 수첩 제작진을 검찰에서 조사하기 위해 체포하러 갔더니 못 가겠다고 검찰을 돌려 보냈습니다.
어제 대전에서 화물연대총파업 데모가 있었는데 죽창으로 무장하고 경찰을 위협하고 경찰과 경찰차에 돌을 집어 던졌습니다.
용산철거민 현장에는 화염병이 등장을 하고 작년 촛불집회 때에는 쇠파이프로 경찰과 맞서고 경찰차에 불을 질렀습니다.
자유가 넘쳐나 이제 주체를 못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제 친구 아들이 미국 LA 경찰입니다.
만약 LA에서 시민이 경찰이나 경찰차에 돌을 던질 경우에 어떻게 하느냐 물어 보았더니 현장 사살이라고 합니다.
미국 같은 다민족 사회에서 공권력을 유지하고 민주사회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 조치는 필수적이라고 합니다.
검찰을 우습게 여기고, 경찰에게 돌을 던지고, 죽창과 쇠 파이프를 휘두를 수 있는 남한에 살고 있는 것이 참으로 복입니다.
누구는 북한에 살면서 굶어 죽어가고 있고,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북하는데 누구는 자유를 주체할 수 없는 남한에 살면서 열량 과다 섭취로 비만을 걱정해야 합니다.
며칠 전 인터넷 신문에 나왔습니다.
남한 백성들이 너무 많이 먹는데요.
어떻게 해서 누구는 북한에 살고 있고, 우리는 남한에 살고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들은 자유가 있고, 살기 좋은 남한 땅에 태어나려고 해서 태어났습니까?
태어나고 보니 남한 땅이었습니다.
북한에 태어나고 싶은 사람들은 북한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겠습니까?
태어나고 보니 북한 땅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났습니까?
“저 집안을 보니 아빠 엄마가 잘 생겼고, 능력도 있고, 집안도 잘 살고 있으니 저 집에 태어나야겠다” 여러분 집안 골라서 태어났습니까?
태어나고 보니 바로 그 집안입니다.
태어나 보니 집이 아니라 ‘집구석’에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태어나고 보니 아버지가 술주정뱅이에다 실업자입니다.
집구석에 태어난 것입니다.
김정일이 어쩌다 ‘악의 축’이 되었습니까?
태어나고 보니 애비가 김일성이었습니다.
출생이라는 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나고 보니 그렇게 된 것 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되기 싫다고 해서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창세 전에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때가 되면 믿게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4-5절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르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들은 때가 되면 교회에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과 오고 또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요즘 송별회가 자주 있어 곤욕스럽습니다.
하지만 송별회 때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가시는 분들의 송별사를 들을 때입니다.
여기 와서 교회에 다니고 세례를 받으신 분들이 많습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마음이 열리고 깨달아지고 그래서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택한 자녀들은 때가 되면 주님을 영접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 보게 되고, 하나님께서 내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푸시고 계시는가를 깨닫고 감사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노이다 사회복지센타 아파트에 다섯 명의 인도 아이들을 차세대 리더로 지금 키우고 있습니다.
가난한 목회자의 자녀들입니다.
이번에 벵갈로에서 올라 온 네 아이들은 난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 보았습니다.
굉장한 경험이었습니다.
인도 중산층도 살기 힘든 고급 아파트에 지금 살고 있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라 평균 보다 더 작고 말라 있는 그들이 쿡이 해 주는 풍성한 식사 제공을 받고 있습니다.
노이다에 좋은 학교를 입학시키고 지금 모라자는 실력을 보충하기 위해 과외 선생을 들여 공부시키고 있습니다.
일반대학을 졸업하고 인도에서 알아 주는 좋은 신학교인 데라둔 장로교 신학교를 나온 젊은 목사님이 사감으로 아이들을 돌 보고 있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공부하는 것 다 우리 교회에서 대 줍니다.
인도 땅에 수천, 수만의 목회자 자녀들이 있습니다만 이들은 그들 중에 특별하게 선택이 되어 그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실제 하나님을 믿고 보니 그 안에 얼마나 풍성한 삶이 있는가를 믿으면서 깨닫고, 누리면서 감사와 감격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 죄 용서함의 비밀이 있고, 영생의 비밀이 있고, 자유와 평강의 비밀이 있고, 축복의 통로로 살아 가는 풍성한 삶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풍성한 삶의 비결은 바로 ‘우리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믿는 자들 속에 사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근세 한국교회가 세계에 내 놓고 자랑할 만한 두 분을 뽑는다면 목회자로서 한경직 목사님과 학자로서 박윤선 목사님을 꼽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세계적인 성경 주석학자이신데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시기 되었습니다.
의식불명의 상태로 오래 계시다가 결국 돌아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이 돌아 가면서 병상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돌아 가시기 직전 박 목사님께서 무의식 상태에서 뭔가 중얼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방언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실제 박윤선 목사님은 생전에 방언을 한 일이 없습니다.
제자가 귀를 대고 자세히 들어 보니 놀랍게도 박 목사님은 무의식 상태에서 시편 23편을 히브리 원어로 암송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돌아 가셨습니다.
그 분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습니다.
무의식의 깊은 심연 속에 주님이 사셨기 때문에 시편 23편을 그의 신앙고백으로 평생 간직하고 사셨습니다. - 함께 찾아서 봉독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리로다“
여러분의 무의식에 심연 속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죽음과 같은 절대 절명의 무의식 상태 속에서 여러분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 것 같습니다.
바로 그 소리가 여러분들을 실제로 지배하고 있는 존재의 소리입니다.
예수님은 돌아 가시기 직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
스데반도 순교하면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
이 부르짖음은 어느 날 갑자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주님을 사모하는 삶이 습관화 되어 있을 때 나오게 됩니다.
살인마 강호순의 마음 속에는 여자에 대한 반감과 살인 충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충동을 이기지 못해 그렇게 여러 사람을 죽였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무의식의 심연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사채업자들을 보십시오.
사채업자 때문에 과도한 이자를 감당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돈 벌려고 자살하려는 사람들에게 청산가루를 파는 사악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무의식에 심연 속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그것에 의해 우리의 일생은 움직여갑니다.
여러분의 무의식의 심연 속에 오직 예수께서 사시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의 은혜를 받고 살 때 우리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누가복음 17장 21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도를 닦고, 선행을 하고, 공적을 쌓고, 고행을 하고, 인간적 조건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 별 노력을 다 한다해도 그것들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라 내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출생이 내 의지가 아니듯이 구원의 은총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밖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내 안에 사실 때 내 마음은 두 세계의 전쟁터로 변하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이라고 했습니다.
거듭난 영혼을 가진 사람 속에 두 세계가 함께 존재합니다.
옛 사람은 육의 소욕을 따라 살려고 하고 새 사람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려고 합니다.
그러니 중생한 사람의 속은 늘 전쟁터입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입니다.
옛 사람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행하려고 합니다.
‘죄’라는 것은 ‘내 생각대로, 내가 좋은대로 사는 것’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좋아 하시는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지낼 때 아벨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렸는데 가인은 자기 뜻데로 땅의 소산으로 드렸습니다.
노아시대 사람들은 6장 2절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기 ‘자기들의 좋아하는...’
사사시대 사람들의 특징은 사사기 21장 2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옛 사람은 자기들의 생각대로, 자기들이 좋아 하는대로 살려고 합니다.
새 사람은 하나님께서 좋아 하시는 것을 하려고 합니다.
로마서 8장 5절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신다면 당연히 나는 주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하게 됩니다.
주님이 주일날 예배하고 안식하는 것을 좋아 하시니까 나도 좋아서 주일성수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선교하시는 것 좋아 하시니까 나도 선교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천개 인도 교회에 설교를 보내는 일에 나도 열부, 스무부, 몇 십부씩 같이 보내고 사회복지센타를 통해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전도하시는 것을 좋아 하시니까 나도 좋아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봉사하시는 것 좋아 하시니까 나도 봉사하면서 좋은 것입니다.
주님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좋아 하시니까 나도 좋아서 이웃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육체는 죄의 성향을 따라 살려고 하고 내 안에 사시는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합니다.
그러니 전쟁터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 )고 탄식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낮에는 이웃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지킬 박사로 살고 밤에는 살인마 하이드가 됩니다.
내 속에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같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터가 되고 맙니다.
이 전쟁을 어떻게 끝낼 수 있겠습니까?
그 비결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I.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에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라고 했습니다.
C.S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약해지는 것이다. 무엇이든 사랑해 보라, 그러면 당신의 마음은 괴로워질 것이고, 아마 깨어지고 말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라면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지 않게 됩니다.
1978년, “신앙과 생활”이라는 기독 잡지에 실린 실화입니다.
한국동란이 한참이던 1951년 12월 24일 새벽, 강원도 원주 근처에 작은 마을을 짚차를 타고 지나가던 미국 감리교 선교사 부부가 다리 밑에서 들려 오는 아기 울음 소리에 차를 멈추고 렌턴을 비추면서 다리 밑으로 내려가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여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맴 몸으로 죽어 있었고 그 품 속에는 그 여인이 입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되는 속옷과 겉옷으로 갓 태어난 아이가 겹겹이 싸 있었습니다.
아마 만삭이 된 한 여인이 다리 위를 걸어가다 산통이 심하여 다리 밑으로 급히 내려가 출산을 했는데 추위 때문에 아기가 죽을 것 같아 급히 자기가 입고 있었던 옷을 다 벗어 아이를 싸고 자신을 얼어 죽은 것입니다.
이 미국 선교사 부부는 그 아이를 데려다가 13년 동안 키웠고, 본국으로 귀환하면서 그 소년의 출생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C.S 루이스의 말대로 사랑에 빠지면 약하게 되고,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고,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자신을 깨뜨리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고 했습니다.
사랑에 빠진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우리 없이 살기 보다 죽기를 택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5절에,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전 성경의 고백입니다.
‘아가’서 같은 경우를 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의 사랑을 애타게 기다리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때 내면의 전쟁은 휴전에 들어 가게 됩니다.
그 사랑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동안에 전쟁은 휴전에 접어 듭니다.
II.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몸을 버리사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는,
1.우리를 죽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23)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죽으셔야만 그를 믿는 택한 자녀들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지시고 해결하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 가운데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함께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의 모든 죄와 허물은 십자가에 예수께 옮겨지고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내게로 옮겨진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의인됨의 자존감으로 살게 됩니다.
2. 우리 속에 사시기 위함입니다.
본문에, “이제는 내가 산 것은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은 죄보다, 질병보다, 실패보다, 죽음보다 크신 분입니다.
그 분이 우리 안에 살 때 하나님의 말씀들이 우리 속에서 실제화되어 집니다.
믿음 따로, 행동 따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서 실제화됩니다.
“예수 믿으면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비아냥 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밥이 나오고 돈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실제화될 때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서 ‘새로운 일’들을 창조합니다(렘33:2-3)
그 말씀이 우리에게 밥을 만들어 주고 돈을 만들어 줍니다.
비전을 줍니다.
그 비전을 이룰 능력과 환경을 줍니다.
그래서 아담에게 최초로 약속하신 축복의 언약이 이루어집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라, 만물을 다스리라”
축복의 통로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 속에 실제화되어 질 때 남편이 잘 되고, 부인이 잘 되고, 자녀가 잘 되고, 직장이 잘 되고, 사업이 잘 됩니다.
말씀이 현실 속에서 실제화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임마누엘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을 보시고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날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시게 하심으로 나를 율법의 모든 요구에서 해방시키시고 내 안에 사심으로 말씀을 실제화시켜 승리하게 하십니다.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시도록 모든 것을 내려 놓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음
갈 2:20-21 / 김광선 목사
가정의 달을 맞았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가정의 가치관도 날로 변하고 있습니다.
좋은 쪽으로 변하기 보다 안 좋은 쪽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 같아 심히 우려가 됩니다.
최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전국 성인남녀 1천15명을 대상으로 한 `부양의식 및 부양실태 분석' 자료를 언론에 보도했습니다.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10명 중 9명이 노인이 되었을 때 자녀들이 자신들을 부양해 줄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서는 월급의 상단 부분을, 그리고 집을 팔아서라도 올인하고 있는 것에 비해 자녀들로부터 후에 뭔가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치는 거의 10% 밖에 안 된다는 씁쓸한 현실입니다.
거의 밑지는 장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자신의 노후 대책’에 대한 질문에 응답자의 77.2%가 '스스로 부양하겠다"고 답을 했습니다.
자식들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현제 10명중 3명은 부모에 용돈 안 주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비교적 적은 금액인 20만원 이하의 용돈을 주거나 용돈을 전혀 주지 않는 사람을 모두 합하면 71.2%나 됐다.
이 같은 결과는 자녀가 부모를 부양하는 것을 당연시해온 전통이 머지않아 붕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부모님들은 살 길을 찾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살 길이 다른 길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올인하면서 투자하고 있는 자식들로부터 늙은 다음에 부양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지금부터 마련하자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부터 가정 주일을 맞을 때마다 자녀 교육에 대해 말씀 드렸는데 아이들이 자란 다음에 직장생활하면서부터 월급의 십분의 일을 반드시 부모님에게 드리는 훈련을 시키라고 했습니다.
소득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께, 십분의 일은 부모님께, 그리고 십분의 일은 이웃을 위해 쓰는 것이 가장 성경적인 경제생활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씀에 은혜를 받고 그대로 실천한 분 가운데 최근에 재미를 보고 계신 분이 얼마전 한국으로 귀국하신 현대자동차 민왕식 집사님 가정입니다.
큰 딸 소영이가 월급의 십분의 일을 매달 통장으로 입금을 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그 재미가 쏠쏠하다고 합니다.
누나가 그렇게 하는데 동생 성욱이가 가만 구경만 하고 있겠습니까?
저도 우리아이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쇠뇌를 시키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실천할 뿐 아니라 동생 학비까지 대 줍니다.
민 집사님처럼 큰 아이만 잡으면 동생들은 저절로 잡힐 줄 믿습니다.
우리 큰 아이에게 “너 만일 결혼할 남자 생기면 우리 집안 풍속을 이야기해 주고 월급의 십분의 일을 내 놓겠다고 하면 ‘OK' 하고 그렇게 못하겠다고 하면 'NO' 하라”고 시켰습니다.
우리 부모님들 살 길을 찾아야겠습니다.
우리 학생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사회에 나가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 월급의 십분의 일을 꼭 부모님께 드리기를 이 자리에서 맹세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할 친구들은 손 한번 들어 보세요.
그렇다고 하나님께 드릴 십일조 떼 먹고 그 돈으로 부모님께 드리면 안됩니다.
하나님께 십일조, 부모님께 십일조, 이웃을 위해 십일조를 쓰고 나머지 십분의 칠로 살기 바랍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성도의 경제생활 방식입니다.
“목사님, 그럼 십분의 칠로 어떻게 살아요”
성공해서 많이 벌면 되잖아.
한 달에 일억씩 벌면 칠천만원 가지고 왜 못 살아.
한 달에 일, 이백만원 벌 생각하지 말고 학생 때부터 큰 비전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살기 바랍니다.
‘가정의 달’의 달을 맞이했습니다.
가정 주간을 맞을 때마다 거의 비슷한 내용의 설교를 하게 됩니다.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그리고 부부와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구약의 십계명을 비롯해서 신약에도 ‘부모 공경’ ‘부부간의 사랑과 존경’ ‘자녀교육’에 대해 강조를 합니다.
비단 기독교 뿐만 아니라 이런 인륜에 대한 교훈은 유교에서 더 강조합니다.
어떤 면에서 유교가 기독교보다 더 도덕과 윤리를 강도 있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유교에서는 부모를 살아 생전에 공경하는 정도가 아니라 부모가 돌아 가신 다음에도 공경의 표시로 제사를 드리고, 부모 뿐 아니라 할아버지와 증조 할아버지까지 공경하여 제사를 드리도록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유교의 경전이 성경보다 더 고상한 것인가?
목사님들이 교회에서 부모 공경이나 자녀 교육에 대해 설교를 할 때 종종 공자나 맹자가 하는 말들을 인용하고 마치 기독교를 유교와 같은 도덕이나 윤리를 가르치는 세상의 종교로 폄하시키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모 공경이나 인륜에 대한 이야기나 유교가 가르치고 있는 부모 공경이나 인륜 도덕은 전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런 차이를 모르고 기독교나 유교의 인륜이나 사회생활에 대한 도덕, 윤리가 같다고 여기는 무지한 분들에 의해 ‘다른 복음’이 전해 지고 있습니다.
이 차이를 모르는 분들이 교회에서 마치 사당에서 공자나 맹자를 가르치듯이 ‘부모 공경’ ‘효’에 대해서 가르치면서 성경과 논어, 맹자를 오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많은 교회에서 ‘효도 대학원’을 열어 자녀들에게 ‘효’를 가르칩니다.
노인 분들은 특히 좋아합니다.
자녀들에게 효를 가르쳐 주니까 대접 받을 수 있어 얼마나 좋습니까?
그게 교회 부흥의 한 방편으로 이용이 됩니다.
노인 분들은 그런 교회를 가르칠 것을 가르치는 제대로 된 교회라고 여기고 자녀들에게 그교회를 다니라고 종용합니다.
그런 프로그램을 도입해 재미 보는 교회들도 많습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도덕법이나 유교에서 말하는 도덕법이 같다는 막연한 생각 때문에 은연 중에 성경의 율법들을 그리스찬들의 ‘생활 규법’으로 받아 들이고 율법의 계명들을 지키려고 합니다.
또 그렇게 가르칩니다.
이것이 얼마나 신앙에서 멀어 지고, 복음과 정 반대인가를 알기 때문에 어린 바울이 이런 길로 가려는 원로 베드로를 크게 책망한 사건이 지난 주 본문의 배경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목적은 사람이 윤리나 도덕적으로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을 비롯한 모든 율법을 주신 근본 정신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십니다.
십계명을 주시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0장 2절에,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십계명을 주십니다.
애굽의 노예 생활 속에서 그들을 해방시켜 주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살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인간을 창조하시자마자 인간에게 하신 첫 마디가 ‘축복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축복의 언약입니다.
세 가지 언약입니다.
첫째가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둘째가 만물을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셋째가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이 언약이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향한 실체적 언약입니다.
실체적 언약이라는 것은 첫 아담과 맺으시고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될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렇게 사는 것이 정상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 만물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애굽에 종살이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내어 그곳에서 번성케 하고, 열방을 다스리는 나라로 세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 이 축복의 언약을 이루십니다.
그의 자손을 번성케 하시고, 세상을 정복하게 하시고, 그의 자손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죄의 노예로 사는 멸망의 사람들을 생명으로 이끄시고 계십니다.
우리를 택한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번성케 하고, 만물을 정복하고, 만물을 다스리도록 축복을 주십니다.
축복의 언약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이를 이루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어 다른 사람이 잘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되고, 우리를 통하여 복음을 받아 죄에서 벗어나 새 생명으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축복의 통로’로 살 때 나는 더 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윤리나 도덕적으로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축복의 통로’로 만들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1-4계명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우상을 만들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여기지 말라는 것은 애굽의 종살이에게 너를 구원해 주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 바로 그 분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그 분을 잘 섬기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도 애굽의 노예살이 할 때는 휴일도 없이 죽자 사자 일했는데 안식일을 지키면서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쉴 수 있도록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 이시다라는 것을 알고 그 분을 고마워하고 경외하케 하기 위함입니다.
5-10계명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관한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축복의 통로가 막히지 않기 위해 이 계명들을 주신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그 부모로부터 출애굽시켜 주신 하나님에 대해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을 때 부모의 이야기를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만일 살인하게 되면 축복을 받아야 할 그 사람이 죽어 그 축복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것 역시 가정이 망가지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통로가 망가지기 때문에 그리고 시기 질투로 말미암아 칼을 휘두를 경우 자칫 목숨을 잃어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갈 수 없기 때문에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은 이미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 사람들에게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끔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그들이 나올 때 금은 보화 모든 애굽의 모든 좋은 것을 싹 쓸어 가지고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너는 굳이 남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것도 만일 거짓 증거하면 사실이 은폐됩니다.
그렇게 되면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하나님의 역사가 이야기될 때 거짓 증거자들에 의해 사실이 은폐되고 와전될 수 있기 때문에 거짓 증거를 경계하신 것입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이유 역시 남의 것을 탐내면 도적질할 수 있기 때문에 원천봉쇄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계명들이 백성들에게 윤리나 도덕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악에서 가난에서, 결핍에서 구원해 내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육하고 번성하고’ ‘만물을 정복하고’ ‘만물을 다스리라’는 축복의 통로가 막히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유교에서 하는 윤리나 도덕 계명과 근본이 다른 것입니다.
십계명의 목적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면 인류의 도덕은 저절로 따라 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유럽의 발전된 나라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한 때 거의 가 다 문화라고는 없는 산적과 해적들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산적과 해적들이 일등 국민들이 되었고, 오늘의 유럽을 이룰 수 있었습니까?
공자나 맹자의 도덕과 윤리적인 교훈에 감화를 받고 새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복음을 받아 들였기 때문입니다.
복음대로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계명이 근본 정신대로 사니까 저절로 일등 국민, 일등 국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근본적으로 이런 축복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지난 주일에 율법의 두 가지 기능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첫째가 율법은 ‘죄로 심히 죄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5장 20절에,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했습니다.
율법의 거울 앞에 철저하게 타락한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나의 공로나 의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 분만을 경외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범죄를 허용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자기의 충신 우리야를 죽이고 그 부인을 빼앗는 살인죄와 간음죄를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다윗은 범죄한 자신을 크게 회개하고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하나님의 칭찬을 듣게 됩니다.
열왕기상 1장 1절에, “다윗왕이 나이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중신들이 의논하여 전국의 아리따운 여인들 중 최고의 미인인 아비삭을 다윗의 침실로 넣어줍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미 성군이 되어 있었습니다.
밧세바의 일로 깊은 회개와 교훈을 받은 다윗은 아비삭과 동침하지 않습니다.
때로 죄가 이처럼 사람을 성군으로 만들고, 더욱 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공경하게 만드는 신앙의 성숙을 가져 옵니다.
그렇다고해서 나도 성자가 되기 위해 일부러 죄를 짓으면 안되겠지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다윗처럼 대하지 않습니다.
삼손은 들릴라와 범죄했을 때 두 눈알이 뽑히고, 감옥에서 일생을 보내게 됩니다.
인생에 가장 아름다워야 할 청춘시절에 두 눈 알이 뽑히고 감옥에 갇혀 하염없이 멧돌이나 가는 중노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단 한번의 실수로 일생이 망가지기도 하고 자신 뿐 아니라 자녀들에게까지 심각한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축복의 통로로 살아야 할 사람이 더 이상 하나님의 쓰임을 받지 못하고 인생이 끝나고 마는 사람들을 저는 교회에서 허다하게 보았습니다.
우리는 죄를 범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율법의 두 번째 기능은 우리를 죽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7장 9절-10절에,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 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심히 죄 되게 하고, 우리를 죄로 인해 죽게 하는 이유는 결국 하나님께서 최초에 하신 축복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율법의 죽임을 통해 이 언약을 어떻게 이루십니까?
본문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했습니다.
십계명을 비롯한 모든 율법은 우리를 고발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6:23)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멸망에 처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율법의 문제를 해결하고 죽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지혜가 그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이 나에게 요구한 그 모든 율법을 요구를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대신 다 이루어주셨습니다.
로마서 8장 4절에,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그래서 복음 전체입니다.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 주심으로 율법을 완성시키시고, 십자가에서 주님이 나와 함께 죽어 주심으로 율법이 더 이상 내게 아무 것도 요구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이미 주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율법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은 내게 아무 것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효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마틴 루터가 이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복음을 깨닫기 전에는 율법에 얶메여 단 순간도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고 죄의식과 죄책감과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으로 떨고 지냈는데 이 복음을 깨닫는 순간에 마치 번개불이 자기를 통과하듯이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그런 의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죄인은 나를 예수님과 함께 죽게 하셔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 죄인을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 이 깨달은 복음으로 중세 시대 율법에 메여 종노릇하고 있었던 유럽을 건진 것입니다.
‘의’라는 것은 내가 선행을 하고 어떤 피나는 노력을 해서 내 스스로를 거룩하게 만드는 행위를 통해 만들어지는 의가 아니라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의를 내 것으로 그냥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의’고 이것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이 하나님의 공의를 힘입어 내 모든 죄는 다 십자가 예수님에게 옮겨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들어 진 하나님의 의가 내게로 옮겨졌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나를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고 참된 자유와 평안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 오해합니다.
이제 우리는 율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네
그런 사람들은 도무지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해방되어 이제 새로운 법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 법은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부호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빌 게이츠는 그의 여비서와 결혼을 했습니다.
처음 빌 게이츠와 그 부인의 관계를 회장과 비서의 관계였습니다.
그 관계는 오직 월급 받고 시키는 일을 하는 의무만 있었습니다.
일하기 싫어도 월급을 받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일을 그르치거나 실수를 할 경우 거기 상응된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 관계입니다.
그들은 결혼을 했습니다.
이제 부부 관계가 되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 더 이상 비서가 아니기 때문에 하고 싶은데로 마음대로 삽니까?
회사에 나가지 않아도 되니까 아침에 일어나지 않고 실컷 잡니까?
비서 시절에나 회장에게 커피를 타다 바쳤지 이제 비서가 아니니까 커피를 만들어 줄 의무가 없습니까?
비서 시절에 아침에 커피를 타 주던 대로 타 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비서로서 의무감으로 커피를 타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남편에게 타 주는 것입니다.
아침에 출근을 하지는 않지만 남편을 위해 커피 보다 더 많은 노동이 들어가는 아침 식탁을 준비할 것입니다.
회사에 나가 일하지 않지만 기쁨으로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월급을 받지는 않지만 전혀 불평하지 않습니다.
빌 게이츠이 것이 다 자기 것입니다.
달라진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필요도 없고 마음대로 살 수 있다’가 아니라 율법보다 더 차원이 높은 새로운 법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억지로 하는 의무가 아니라 사랑의 법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때문입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죄입니다.
‘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선’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율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면 나도 좋아서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면 나는 안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입니다.
요한복음 6장 38-39절에,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좋아 하시는 것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비록 내키지 않아도 아버지의 뜻이라면 순종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으로 인류를 구속하시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기도할 때 “만일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옵소서 하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데로 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가 법과 의무의 관계가 아니라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하나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더 이상 율법에 메여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새로운 관계, 새로운 법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 법은 율법 이상의 삶을 살게 합니다.
‘사랑’으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우상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살인하거나 간음하거나 도적질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생육하고 번성하게 만듭니다.
만물을 정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만물을 다스리게 만들어 줍니다.
이 축복의 언약이 우리 삶에 이루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분의 하시는 말씀이 진실임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살게 되고, 그 믿음이 우리를 위해 영원한 처소가 하늘에 있다는 것과 이런 영원하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친히 뵙고, 그 분의 통치를 받으며 영원히 산다는 구원의 소망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과 기쁨이 우리에게 에너지가 되어 이 땅을 살면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며 그 분이 좋아하시는 선한 일을 전도와 선교의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율법에서 해방이 되고 성령의 새로운 법으로 살아 만인에게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을 나누어 주는 축복의 통로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