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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노위 문 닫았다고 사회적대화 그만둬서야
야당 또는 국회 상임위에서 주선할 수 있고
지자체장협, 산업별 사업자단체도 대화상대
경사노위·탄소중립위 바꾸려는 노력도 해야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우리나라에서 교육·노동·연금 등 구조개혁이 안 되는 것은 이해당사자 사이에 사회적 타협에서 진척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5월, 한국은행 총재가 한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은 이미 장기 저성장에 진입해 있다”며 구조개혁 없이 재정·통화 등 단기정책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나라가 망하는 지름길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은행 총재가 재정통화정책이 아닌 사회정책을 언급한 것도 뜻밖이지만 사회적 타협의 부재를 구조개혁의 걸림돌로 지적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반면에 다른 한켠에서는 정부가 사회적 대화를 허물지 못해 안달이다. 정부가 노조 혐오자를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위원장으로 임명했을 때 정부의 메시지는 오해의 소지 없이 분명했다. 정부는 더 이상 사회적 대화를 추진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정부 들어서 경사노위가 개점휴업에 들어간 것은 물론 공무직위원회가 일몰로 중단되었으며 산자부가 주관하던 자동차포럼이나 금융위원회가 참가하던 금융협의회와 같은 비제도적 사회적 대화도 마감됐다.
이제 정부의 언명은 정부위원회로 번져가고 있다. 기재부, 복지부, 교육부 가릴 것 없이 산하 정부위원회에서 양대 노총(한국노총, 민주노총)을 밀어내기에 바쁘다. 고용노동부만 하더라도 최근 산재예방심의위원회의 근로자위원 추천권자를 양대 노총에서 ‘노동단체’로 바꾼 데 이어 최저임금위원회에서조차 양대 노총 대표를 빼겠다는 방침을 전하고 있다. 양대 노총은 대체될 수 있는 존재로 전락했다.
사회적 대화를 둘러싼 양대 노총의 엇갈린 행보
정부가 노조와 말을 섞지 않겠다는 상황에서 노동조합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정부가 사회적 대화에 등을 돌렸으니 노동조합도 사회적 대화에 미련을 버리면 될까? 그러기엔 사회적 대화가 갖는 의미가 적지 않다는 게 딜레마다.
사회적 대화는 기업별 노조체제에서 노조가 정부의 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제도적 통로다. 노동자가 이해당사자로서 정책의 결정과정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법 개정이나 정책의 결정과 같은 정치적인 공간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노동정치의 한 축을 이룬다. 노동조합이라는 사회권력을 바탕으로 국가권력과 경제권력을 제어하는 것이야말로 노동조합이 추구하는 사회‘개혁’의 노른자위다.
그렇다고 노동계가 한 목소리로 대응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사회적 대화를 바라보는 양대 노총의 행보가 어긋나는 탓이다. 사회적 대화를 경사노위나 탄소중립위원회와 같은 전국 규모의 제도적인 차원으로 좁혀보면 노동조합의 참가는 반쪽에 그친다. 윤석열 정부가 등장하기 한참 전에 민주노총은 이미 사회적 대화를 그만뒀다. 민주노총이 경사노위(노사정위원회)를 탈퇴한 건 1999년이다. 2021년에 만들어진 탄소중립위원회에도 초청을 거부했다.
제도적 차원의 사회적 대화에 관한 한 민주노총의 불참 기조는 바뀔 것 같지 않다. 정파적 시각을 뛰어넘어 참여를 결정할 수 있는 리더십이 보이지 않는 탓이다. “무엇을 갖고 대화할 것인가”가 아니라 “대화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20년 이상을 논쟁 중인 동네가 민주노총이다. 대안으로 노정교섭을 주장하나 그것은 “‘대화’를 요구했다는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민주노총 위원장을 지낸 분의 글에서 인용했다) 성사될 리도 없다. 민주노총더러 노조에게는 주어진 무기를 내칠 일이 아니라 전술적으로 활용하라는 말도 부질없어 보일 지경이다.
한국노총은 사회적 대화에 참가와 불참을 거듭했지만 참가에 방점을 찍어왔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경사노위 불참을 선언했지만 사실은 정부가 사회적 대화의 문을 닫고선 한국노총을 초대한 꼴이었다. 한국노총은 거부했다. 탄소중립위원회에서는 아예 배제됐다. 노동조합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상대방과 파트너십을 갖고 대화를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페르노리카코리아 프란츠 호튼 대표가 17일 국회에서 열린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 시작 전 김문수 경사노위 위원장과 대화하고 있다. 왼쪽 아래는 페르노리카코리아 이강호 노조위원장. 2023.10.17. 연합뉴스
전환의 시기일수록 다양한 대화 가능성 모색해야
윤석열 정부가 노조를 배제하고 사회적 대화를 폐기했다고 한국노총까지 고개를 주억거릴 일은 아니다. 노동조합이 법의 정신에 따라 단체교섭을 넘어 정책 협의의 장으로 ‘제대로 된’ 사회적 대화를 하자고 정부에 요구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앞서 말한 정부위원회도 사회적 대화의 일종이다.
사회적 대화를 경사노위라는 좁은 우물 안에 가둘 필요는 없다. 사회적 대화가 노동정책에 국한된 것도, 정부가 반드시 참가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적지 않은 사회적 대화가 노사 사이에서 이뤄진다. 사회적 대화라는 간판을 내걸지 않아도, 제도적 공간이 없어도 무방하다. 정부의 정책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이해당사자가 참가하여 정보의 교환, 협의, 교섭을 수행하는 일련의 활동이 사회적 대화다. 사회적 대화의 형태는 다양하고 운영은 유연하다.
지역 차원의 사회적 대화도 그 가운데 하나다. 야당이 집권한 지역에서 지역 현안이나 일자리 창출을 두고 머리를 맞댈 수 있다. 광역 차원에서는 서울시구청장협의회를 비롯한 전국시장·구청장·군수협의회가 있으며 전국 차원에서는 전국시도지사협의회가 있다. 전국교육감협의회는 교육공무직 노조와 단체교섭을 하는 당사자이기도 하다. 산업·업종 차원에서 사업자단체와 대화를 추진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다. 사업자단체가 노동조합과 단체교섭 의무를 갖는 사용자단체는 아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정부위원회에 참가하고 노동 현안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가 하면 대정부 건의를 하는 등 노동관계 역할을 수행한다. 정부가 뒤로 빠지면 야당이 앞으로 나와 사회적 대화를 주도하는 방법도 있다.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또는 숙의적 간담회를 통해 정부 부처를 포함한 다양한 이해당사자를 불러 모을 수 있다.
투쟁하려면 대화하라
당장 사회적 대화가 이뤄지지 않더라도 노동조합이 나 몰라라 할 일은 아니다. 다음 정권에서 사회적 대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라도 지난 시절의 사회적 대화를 성찰하고 방향을 모색하는 것은 남아있는 과제다. 경사노위나 탄소중립위원회와 같은 제도적 기구의 구성과 운영을 바꾸려는 노력도 중요하다.(둘 다 법 개정이 필요하다) 내부적으로 정책역량을 강화하고 노조 민주주의를 통해 중앙의 지도력을 확립하는 일이나 정당 및 시민사회단체와 연대의 기반을 구축하는 일도 간과하긴 어렵다.
사회적 대화는 갈등의 해결 과정이지만 동시에 갈등의 증폭 과정이기도 하다. 특정 의제에 초점을 맞춰 일선 조합원과 광범위한 대중을 끌어들임으로써 갈등을 사회적인 의제로 만든다. 사회적 대화가 역설적이게도 사회적 투쟁을 촉발하는 불쏘시개가 되는 셈이다. 대화는 투쟁과 별개가 아니라 투쟁과 순환한다.
전환의 시기다. 불평등과 기후위기, 저출산·고령화, 장기침체, 기술혁신과 같은 거대 위협들(mega threats)이 공존하고 있다. 이런 위협들은 혼자 오지 않을 뿐더러 사회적 갈등까지 몰고 온다. 복합재난, 다중위기가 그것이다. 전환에 따른 갈등을 대화 없이 풀기도 어렵지만 대화만으로 풀기도 어렵다. 노동조합으로서는 갈등을 사회화하면서 투쟁을 동원해야 할 수도 있다. 이 대목에서 확인할 것은 ‘투쟁은 다른 형태의 대화’라는 사실이다. 투쟁하려면 대화하라.
출처 : 윤 정부가 폐기한 사회적 대화, 노조는 무엇을 하나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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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