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적)생각, 감정, 느낌 등을 대상으로 파악하는 힘이 조금이나마 계발되면,
'대상으로 파악(감지)함'의 일차적 과보로서,
소위 탈동일시가 일어납니다.
거칠게 묘사하자면, 그러한 대상의 일어남에 휘말려서
끄달리지 않고, 중립성?을 가지는 거죠.
상좌부(위빠사나), 인도성자들이
ㅡ생각,감정 등은 나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다
라는 얘기를 참 많이 합니다.
저도 뉴비시절에 엄밀한 관찰과 맥락 파악 없이,
무지성으로이 언명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였죠.
꽤 오랜시간 동안..
ㅡ상좌부는 사성제와 삼법인, 없음
ㅡ인도성자는 진아(브라흐만)
이라는 목표(지향)을 전제하고,
그 수단으로서 위와 같은 언명을 세운다는 것을
전혀 몰랐었슴미다.
저는 그러한 길 위에 있지 않는 보통사람이어서,
지금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ㅡ 생각, 감정 등을 자각하고 탈동일시 되더라도
ㅡ 생각, 감정 등은 소위 '나'로부터 촉발된
'내가 관리하고 책임질 대상' 이다.
(좀 오바하자면.. 그게 내 꼬라지다..)
탈동일시의 효용은,
머리끄뎅이 잡혀서 북치고 장구치는 쌩쇼? 혹은 괴로움을 스킵하게 해주는..
살림살이에 도움이 되는 좋은 툴 정도로 봅니다.
여담으로..
상좌부 등과 같은 분명한 목표가 없는
애매한 일반인이 위 언명을 문자적으로 고대로
내면화시키면,
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슴다(나만 그랬나?)
날도 슬슬 풀리는데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첫댓글 트렌드가 동일시를 부정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과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 거 같은데...
이것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내가 아니다... 그게 법 즉 현상에서 일종의 결론인데, 곧바로 결론으로 치달으니까... 현실을 외면하거나 만구 생각에 머물게 되거든요.
무슨 말이냐 하면요. 이것 즉 법 곧 현상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내가 아니다...는 것은 '이것'을 있는 그대로 살필 때 가능한 앎이거든요.
이것을 있는 그대로 살피는게 뭔가... 고통이 발생했을 때, 그 고통을 수용해야 즉 그 고통에 머물러야 됩니다. 그래야 살필 수 있잖아요? 그러한 머무름을 [정]이라고 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 과정을 빼버리면 아무래도 불교와 거리가 있게 될 수 밖에 없어요.
말을 잘 이해해야 하는데... 좀 그래요.
고통스러운 현상이 발생할 때, 그 고통스러운 현상이 내가 아니다... 그러니 고통이 발생하든 말든, 흥칫뽕.... 전도된 거죠. 거꾸로 하는 거예요.
물론 그러다보면 점차 그런 고통이 안생기는 경향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발생하는 경향은 그냥 단순하게 속박되는 겁니다.
우리가 벗어난다는 거는요. 예를 들어 봅시다.
밤에 종종 깨는 상황일 수 밖에 없는데, 잠을 자야된다... 그런 생각을 자꾸 하면요. 잠을 깰 때마다 미움과 분노가 치솟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일 수 밖에 없더라도, 주어진 여건에서 그냥 눈을 감고 쉰다고 생각하면요. 잠을 깨도 미움과 분노가 치솟는 것이 영 덜합니다.
신체적으로는 깰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서 깨는 것은 같은 현상인데,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달라지는 겁니다.
그처럼 인과를 살펴서 행복하도록 마음의 행위를 조정해야 벗어나는 겁니다.
안팍으로다가 당위 명제(~해야 된다. ~이 되어야 한다. ~이래야 한다. ~이 맞다. 등)를 품고 있는 것이
마음의 괴로움을 촉발하는 큰 조건 중 하나 같습니다.
주어진 환경(=첫번째 화살)을 기꺼이 맞이하는 태도가
역설적으로 괴로움을 덜어준다는... _()_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게 사띠인데, 그 사띠가 다시 '정'의 요소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군요.
늘 깨어있는 사람.
늘 알아차리고 있는 사람
늘 고요할 수밖에 없나봅니다.
늘 알아차리고 있는 불자는 그의 거동 하나하나가 빛나는건 당연한 이치가 되겠네요.
눈 감고 누워 있으면 휴식은 되거든요.
그런데 깼다고 분노하면 그 휴식조차 사라져버립니다.
누린 거를 누렸다고 알지 못하고, 행복을 행복이라고 알지 못하죠.
불행에 더 민감해지고, 불행에 민감해진만큼 더욱더 불행해집니다.
스스로의 행위가 스스로를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행복이라고 이름하는 조건지어짐에서는
행복을 깊이 느끼고, 감사와 함께 머물며
소위 불행이라고 이름하는 조건지어짐에서는
존버하며, 어떻게든 별 거 아닌것처럼 정신승리..
왜 일관성이 없냐고 묻는다면..
일관성이 밥먹여 주냐고 되묻겠슴다. ^^;
행복과 불행에 일관되게 초연한 모델은
간지가 넘치지만,
저같은 중생에겐.. 글쎄요...
먼저, 행복조차 괴로움입니다.
A라는 전기적 신호에 터잡아 발생시키는 B라는 전기적 신호, 즉 두번째 화살... 그 두번째 화살이 고통의 증장이거나, A라는 전기적 신호 즉 첫번째 화살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권장할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냥 불교에서는 그래요.
잠에서 깰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서 원하지 않게 자꾸 일어날 수 밖에 없을 때, 그것은 고통입니다. 첫번째 화살이죠. 고통이예요. 이것을 부정하면, 자기 기만입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불교는 그런 말을 안합니다.
물론 개인차는 있습니다. A라는 전기적 신호가 발생했을 때, 봉순이는 100의 고통(행복)을 느끼고 말순이는 1의 고통(행복)을 느낄 수 있어요.
뭐... 그렇다고... 봉순이가 우울하고 말순이가 우쭐하거나, 그 반대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거는 그냥 사람이 다른 겁니다.
행복도 괴로움이고 고통도 괴로움이고, 일체는 괴로움인데... 그래도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행복을 만드는 사람, 어두운 밤하늘을 순간적으로 밝히는 번갯불처럼요. 그런 사람이 어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