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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지훈 문학동산 원문보기 글쓴이: 曉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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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권 일제의 친일파 육성과 반민족 세력 / 제6장 해방 이후 친일세력 처리와 반민특위 활동 / 4. 반민특위 활동과 방해 책동 |
4. 반민특위 활동과 방해 책동 1. 반민특위 활동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5일 중앙청의 사무실에서 반민특위 중앙사무국의 조사관과 서기의 취임식을 마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반민특위는 먼저 취급할 친일파를 선정하기 위한 예비 조사에 들어갔다. 예비 조사는 『조선총독부관보』와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각종 직원록, 그리고 신문·출판물 등 일제강점기의 자료와 반민특위의 활동을 앞두고 발간된 『친일파 군상』의 책과 일반인의 투서 등을 기초로 진행되었다. 반민특위는 7천여 명의 친일파의 일람표를 작성하는 한편 조사관을 직접 현지로 파견하여 실제 조사에 착수하는 등 약 1개월 동안의 예비 조사를 진행했다. 이러한 예비 조사를 기초로 반민특위 조사위원들은 취급할 친일파를 결정하고 이들의 체포 준비에 들어갔다. 註27)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은 친일파의 체포에 들어가기에 앞서 정치·사회·경제 분야의 거물들에게 처벌할 계획이라는 처벌 방침을 밝혔다. 반민특위는 먼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친일파의 거두 가운데 도피를 시도하는 자들의 체포에 주력했다. 반민법이 국회에서 통과된 시기를 전후하여 친일 행적이 있는 자들이 이미 해외로 도피했거나 도피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중추원 참의를 지낸 진학문秦學文은 정부 수립 직전에 일본으로 도피했으며, 중추원 참의와 경방단 단장을 지내는 등 대표적인 친일파로 지목받던 조병상曺秉相도 일본으로 도피하기 위해 일본여행권을 외무부에 신청한 상황이었다. 또한 교육계의 차사백車士伯·황신덕黃信德·배상명裵祥明·이숙종李淑鍾 등은 정부 수립 후 교육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미국으로 출국한 상황이었다. 김활란金活蘭도 1948년 9월에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출국했다. 이에 대해 소장파 의원 이문원李文源이 국회에서 친일파를 특사로 기용하고 출국한 사실을 비난하자, 의원들 사이에 격렬한 논란이 있었다. 이 무렵 반민특위에 체포될 것을 우려한 친일파들은 이미 행적을 감추거나 외국과의 무역을 구실로 외무부에 여행증을 청구하는 등 해외로 도피를 시도하고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반민특위는 외무부에 국외여행증 발행 중지를 요구하는 한편, 관계 당국에 이들의 밀항을 철저히 단속해줄 것을 요청했다. 註28)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8일에 미국으로 도피를 꾀하고 있던 박흥식朴興植을 가장 먼저 체포했다. 박흥식은 반민법이 공포된 후 사돈 관계에 있던 장직상張稷相과 함께 김연수金秊洙를 방문하여 처벌을 피하기 위한 방안을 협의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자, 외무부 장관 장택상의 도움으로 기한이 만료된 여행증을 갱신하여 미국으로 도피를 꾀했다. 반민특위는 이어 적극적으로 반민특위의 활동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 개하던 이종형李鍾滎을 체포했다. 이종형은 해방 직후부터 가장 적극적으로 친일파 처리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던 인물이었다. 반민법이 공포된 후에는 이른 바 ‘반공구국총궐기대회’를 열어 반민법을 제정한 국회의원을 ‘김일성의 주구’로 비난하고, 자신이 운영하던 신문에 반민특위를 비난하는 글을 게재하는 등 친일파 처리 반대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어 반민특위는 일본으로 도피를 꾀하고 있던 방의석方義錫·김태석金泰錫·조병상을 잇달아 체포하였다. 반민특위는 1월말부터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거물급 친일파의 체포에 나섰다. 먼저 대구에서 제국의회 의원을 지낸 박중양朴重陽을 체포했으며, 경북 문경에서 도지사와 중추원 참의를 지낸 고원훈高元勳은 도피하여 체포하지 못했다. 부산에서 중추원 참의를 지낸 김우영金雨英을 체포한데 이어 일제강점기에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던 고등계 형사 하판락河判洛·노기주璣柱를 체포했다. 註29) 공주와 대전에서는 이 지역 출신인 김명동 반민특위 조사위원의 지휘하에 김갑순金甲淳·임창수林昌洙를 체포하였다. 한편 도 책임자의 인선 문제로 구성이 늦어졌던 반민특위 각도 조사부는 2월 초부터 활동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조직의 구성을 마무리 지은 경남도 조사부가 활동을 시작했으며, 다른 도 조사부는 대부분 3월부터 친일파의 체포에 나섰다. 註30) 이로써 자수하는 친일파가 속출하는 등 반민특위의 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반민특위는 친일파의 체포와 함께 국회의원과 정부 관리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고등관 3등급 이상을 재직하고, 훈勳 5등 이상을 받은 친일파, 즉 반민법 제5조에 해당하는 자를 처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는 반민족행위처벌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 기사 무엇보다 정부가 수립된 후 일제 관리가 정리되기는커녕 오히려 친일파가 기용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반민법이 제정된 후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과 함께 친일파가 정부 관리로 있는 한 반민특위의 활동도 어려울 것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반민법을 제정할 당시부터 친일행위가 있는 국회의원도 처리하라는 여론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반민특위는 반민법 제5조에 해당되는 국회의원과 정부 관리들을 처리해줄 것을 요구하는 공문을 국회와 정부에 발송했다. 아울러 친일 혐의가 있는 국회의원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국회는 반민특위의 요청에 대해 반민법 5조에 해당하는 의원이 없다고 반민특위에 보고했다. 하지만 친일파 처리에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던 국회 부의장 김약수金若水는 국회 스스로의 숙청에 의존하지 말고 반민특위가 조사하여 신속히 처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정부도 반민특위의 요청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애초에 정부는 각 부처와 각도에 해당자의 조사를 지시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갑자기 이를 중지시켰다. 심지어 대표적인 친일경찰로 손꼽이고 있던 노덕술盧德述이 반민특위에 체포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경무대로 불러 노덕술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석방 이유에 대해 노덕술이 경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술자이 자 경험자이므로 그를 제거하고서는 국가의 치안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반민특위가 노덕술의 석방을 거부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특위 관계자를 의법 조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註31) 이승만 대통령은 나아가 반민특위의 활동을 비난하고,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 반민특위의 활동을 불법시하고 친일파를 적극 옹호했다. 아울러 반민특위의 활동이 치안에 방해된다면 결코 포용할 수 없다며 정부 관리의 처리하라는 반민특위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반민특위는 정부가 친일 관리 처리 요구를 거부하자, 정부 관리의 체포에 나섰다. 반민특위는 상공부 광무국장인 김용근金龍根을 체포한 데 이어, 김제경찰서장 이성엽李成燁과 전북경찰국 수사과장 호경원扈京源을 체포했으며, 경북경찰국 수사과장 이대우李大雨도 체포했다. 이후에도 현직 관리의 체포는 계속되었지만 행정 관리의 체포는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 경찰에 집중되었다. 반민특위는 군대 내부에 있던 친일파의 체포에 나섰다. 반민법의 공포를 전후한 시기에 일제강점기 군인과 경찰이었던 자들이 처벌을 피하기 위해 군으로 들어간 경우가 많았다. 일제강점기 경기도경찰부 보안과장을 지낸 전봉덕田鳳德은 반민법이 공포된 직후 군에 입대하여 헌병부사령관으로 있었다. 더욱이 반민특위가 친일파의 체포에 나서자 군에 입대하는 친일파가 속출했으며, 특히 현직 경찰이 입대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군에 입대한 일제강점기의 경찰이나 군인은 기술자이기 때문에 반민법 제5조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말이 떠돌았다. 반민특위는 일제강점기에 경찰이나 군인으로 동포를 탄압했던 자는 경찰이나 국군에 있다고 하더라도 반민법에 해당된다고 밝히고, 군 내부의 친일파 조사에 착수했다. 반민특위는 국방부에 친일 행적이 있는 이들의 소환을 요구하는 공문을 발송했다. 그러나 군은 이들의 친일행위를 증명할만한 증거가 불충분하고 군에 필요한 인재라는 이유로 소환을 거부했다. 반민특위 조사위원들은 채병덕蔡秉德 육군 총참모장을 방문하여 소환 거부를 항의하고, 재차 이들의 소환을 요구했으나 국방부는 끝내 거부했다. 註32) 심지어 반민특위는 국방부의 요청으로 체포했던 자들도 석방했다. 반민특위는 특경대까지 갖춘 조직이었지만, 정부의 협조 없이는 관리나 군인·경찰을 체포하는 데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군 내부의 친일파의 체포는 고사하고 조사조차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반민법 제5조는 정부의 비협조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정부의 요청으로 체포한 현직 관리, 군인·경찰 가운데 일부 하위직 관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석방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자 일반인들은 군인·경찰을 포함한 현직 관리는 체포하지 못하고 힘없는 사람만 체포한다는 활동의 형평성 문제를 제기했으며, 반민특위의 활동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註33) 반민특위 중앙사무국이 현직 군인이나 경찰의 체포뿐 아니라 일반인을 체포하는 숫자도 날이 갈수록 저조했다. 반민특위 중앙사무국이 친일파를 체포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만 4개월 동안 취급한 친일파는 80명에 불과했다. 심지어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던 친일파가 석방되어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고, 거물급 친일파들이 서울 시내를 활보하는 것에 일반인들이 의아스럽게 생각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반민특위를 비판하는 여론이 높았으며, ‘잠자는 반민특위’라고 혹평할 정도였다. 반민특위의 활동이 부진한 데는 정부의 비협조뿐만 아니라 반민특위 내부의 원인도 작용했다. 먼저 활동에 필요한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반민특위 중앙사무국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친일파를 체포하고 조사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각도 조사부가 중앙사무국으로 압송한 친일파는 바로 특별검찰부에 송치되지 않고, 다시 중앙사무국이 조사를 담당해야 했다. 즉 각도 조사부가 1차 조사를 마치고 서울로 압송한 자들을 다시 조사한 후 의견서를 첨부하여 특별검찰부로 송치해야 했다. 반민특위 조사위원 사이의 불협화음과 조사관의 문제도 반민특위 활동이 부진한 원인이 되었다. 김준연은 불협화음을 조장한 대표적인 조사위원이었다. 그는 해방 후부터 줄곧 친일파의 처벌에 반대했으며, 반민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도 법의 약화를 주장했었다. 반민특위 조사위원이 된 후에도 조사위원으로서의 활동보다는 반민특위의 내부 분열을 조장했다. 그는 반민특위가 활동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반민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주장을 신문에 게재하여 반민특위의 활동에 혼란을 초래했다. 그의 주장은 반민법의 개정이었지만 사실상 반민특위를 해산하고 친일파를 처벌하지 말자는 것과 다름없었다. 심지어 김준연은 반민특위가 중추원 참의를 지낸 현준호玄俊鎬의 체포를 결정하자 그에게 미리 알려주어 자수토록 했다. 또한 노덕술을 은닉한 자에게도 체포하기로 결정한 사실을 미리 알려주어 도피토록 하는 등 조사위원으로서가 아니라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는 일에 앞장섰다. 김준연은 이후에도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발표되기 전에 이 사건을 암시하는 내용과 이 사건으로 구속된 소장파 의원의 석방을 지지하는 국회의원을 정부를 부정하는 김일성의 추종자라는 내용의 글을 신문에 게재하여 의원들의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註34) 이외에도 그는 반민특위 활동이 위축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친일파의 반민특위 사무실 앞 시위사건, 김구의 암살 사건에도 깊숙이 개입하였다. 반민특위 조사위원들이 체포된 친일파를 독단적으로 석방하는 일도 일어났다. 김경배 조사위원은 체포된 상공부 광무국장 김용근을 다른 조사위원과 협의 없이 독단적으로 석방했다. 이종순 조사위원도 같은 강원도 출신으로 중추원 참의를 지낸 장준영張俊英을 강원도 조사부가 체포했지만, 직권으로 영장을 취소하고 석방하기도 했다. 이에 반발하여 강원도 조사부 조사관이 이종순을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한 혐의로 체포하려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註35) 또한 반민특위 중앙사무국 조사관 양회영梁會英은 특경대 대원과 공모하여 전라남도 조사부가 조사를 마치고 서울로 압송한 친일파 이문환李文煥의 조사 서류를 없애고 대신 자신이 허위로 작성한 조사 서류를 제출했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이 일로 일부 반민특위 조사관이 해임되고 새로운 조사관이 선임되기도 하여 반민특위의 활동에 많은 차질을 빚었다. 이처럼 일부 반민특위 조사위원과 조사관이 친일파와의 개인적인 친분 관계나 이들에게 매수되어 친일파를 자의적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있었다. 반민특위 내부의 문제는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에게도 영향을 미쳐 세 기관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註36)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회 프락치 사건과 경찰의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사건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좌절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49년 5월에 경찰은 소장파 의원의 활동을 주도하고 있던 이문원과 최태규崔泰奎, 그리고 이구수李龜洙를 남조선노동당 프락치로 활동했다는 혐의로 체포했다. 소장파 의원들은 현역 국회의원을 구속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했지만 부결되었다. 반민특위의 활동을 좌절시키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던 친일 세력은 석방요구 결의안 제출을 빌미삼아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친일파가 주도하고 있던 국민계몽회國民啓蒙會는 석방요구 결의안에 찬성한 국회의원을 빨갱이로 몰아 부치고 국회를 비난하는 시위를 연일 벌였다. 아울러 반민특위 사무실 앞에서는 반민특위 내부에 있는 공산분자의 숙청을 요구하며 사무실로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반민특위는 국민계몽회의 활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점을 이상히 여겨 조사한 결과 경찰이 개입한 증거를 입수했다. 반민특위는 군중 동원을 지원하고 시위를 배후 조종한 혐의로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장 최운하崔雲霞와 종로경찰서 사찰주임 조응선趙應善을 체포했다. 이들의 구속과 반민특위가 경찰을 가장 많이 체포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 소속의 경찰은 정부가 경찰의 신변보장을 해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총사직을 결의했다. 이들은 집단으로 사표를 제출하며 정부와 반민특위를 압박했다. 하지만 반민특위는 경찰의 거듭된 석방 요구를 거부했다. 註37) 결국 내무부 차관 장경근張璟根의 주도 하에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6월 6일 경찰은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여 반민특위 관계자를 체포하고 서류를 탈취했다. 같은날 강원도 조사부 사무실도 경찰이 습격하여 조사관의 무기를 압수하고 조사부 사무실 경비를 위해 배치되었던 경찰도 철수시켰다. 이후 충남과 충북도 경찰국을 비롯한 각도 경찰국도 특경대 대원과 경비를 위해 배치되었던 경찰을 철수시켰다. 친일경찰의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사건은 반민특위의 활동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사건 다음날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과 조사위원 오기열·조규갑·김경배·이종순 등이 경찰의 처사에 항의하며 잇따라 사표를 제출하여 반민특위의 활동은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졌다. 아울러 특경대 대원이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특경대의 기능도 마비되어 반민특위 중앙의 친일파 체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6월 하순에 특별검찰부 차장 노일환을 포함한 소장파 의원들이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체포되어 반민특위의 활동은 더욱 약화되었다.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반민특위는 친일파 거두를 제외한 당연범은 한꺼번에 처리하기 위해 각도 조사부의 구속영장 청구를 보류하면서까지 체포를 늦추고 있었다. 반민특위는 6월말에 당연범의 명부 작성을 마무리 짓고, 이들에게 소환장을 발부했다. 하지만 친일파의 처벌을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태도와 잇따른 친일파의 방해 책동, 그리고 반민특위 활동에 실망한 일반인의 관심이 멀어지는 등 친일파 처벌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급격히 약화되는 상황에서 소환에 응하는 친일파는 거의 없었다. 註38) 명맥만 유지하던 반민특위는 반민법이 개정되어 정리 국면으로 들어갔다. 7월 1일에 특별검찰관 곽상훈을 포함한 의원들은 반민특위의 활동이 사회를 혼란시키고, 국민들 사이에 불안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공소시효를 1949년 8월 말까지로 단축하는 내용의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당시 국회는 국회 프락치 사건의 영향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전횡을 견제하던 이전의 모습과는 달리 이승만 대통령의 측근이던 윤치영尹致暎이 국회 부의장으로 선출되는 등 급격하게 친정부 자세로 돌아선 상황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반민법 개정안은 의원들의 압도적 인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다음날 반민특위 조사위원은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날까지 50여 일밖에 없어 친일파를 처벌할 수 없다는 이유로 모두 사퇴했다. 반민특위 조사위원이 전원 사퇴함에 따라 국회는 반민특위 조사위원을 새로 선출했다. 이전의 조사위원 가운데 경남 조규갑, 경기 조중현, 강원 이종순, 황해·제주 김경배가 다시 선출되었으며, 서울 이인李仁, 충남 유진홍兪鎭洪, 충북 송필만宋必滿, 경북 조헌영趙憲泳, 전남 조국현曺國鉉, 전북 진직현晋直鉉이 조사위원으로 새로 선출되었다. 위원장에는 이인, 부위원장에는 송필만이 선출되었다. 註39) 반민특위 지도부인 위원장 이인과 부위원장 송필만은 그동안 친일파 처벌을 반대하거나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인은 법무부 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반민법 제정을 반대했으며, 이승만 대통령과 가까운 인물이었다. 송필만은 반민특위가 구성될 때 반민특위 조사위원으로 추천되었지만, 친일파의 범주와 처벌 수위를 관대히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유일하게 부결된 인물이었다. 반민특위 위원장 이인은 반민특위 활동에 대해 일반인의 인식과는 달리 그 동안 반민특위가 친일파를 거의 처단하는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공소시효가 단축되어 친일파를 철저히 조사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고, 국내외 정세가 긴박하여 남북한에 균형적 운영을 못하게 되어 유감이라는 입장을 밝혀 적극적인 반민특위 활동에는 뜻이 없음을 드러냈다. 이러한 입장은 위원장으로 취임한 후 특경대를 해산시키고 신변 보호를 담당하던 경찰마저도 모두 철수시키는 조치로 나타났다. 7월 하순 반민특위는 전체 회의를 열어 그동안 미루어졌던 반민법 제4조 1·2항에 해당하는 당연범을 취급하기로 결의했다. 만약 이들이 호출에 불응하거나 주소가 불명인 자들은 도피자로 규정하여 공소시효의 중단 여부에 관계없이 계속 영장을 발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정부 관리 가운데 반민법에 해당하는 자는 해당 부·처장에게 통고하여 조치를 취하도록 요청하는 결정을 내렸다. 반민특위의 방침은 지금까지 체포된 친일파의 조사와 친일파의 자수를 유도하는 방향에 중점을 둔 것으로, 실제 반민특위 중앙이 반민법이 개정된 후 체포한 친일파는 거의 없었다. 반민특위는 친일 혐의가 있는 국회의원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국회의원의 조사는 반민특위의 정통성과 도덕성을 높이고 친일파 처벌에서 국회의원도 조사 대상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국회의원의 조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조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 프락치 사건에서 보듯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그 동안 자신과 대립해온 국회를 압박하여 약화시키고자 했다. 국회의원에 대한 조사도 반민법을 이용하여 국회를 약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註40) 이는 조사 대상에서 친일 행적이 뚜렷하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가까웠던 의원이 제외된 데서 잘 알 수 있다. 반민특위는 국회의원의 일제강점기 경력에 대한 예비 조사를 마치고, 친일 혐의가 짙다고 판단한 이종린李鍾麟·이항발李恒發·한암회韓岩回 등의 행적을 조사하였다. 반민특위는 이들의 친일행위는 인정되지만, 악질적인 행위가 없고 죄상도 일반적 수준보다 훨씬 가벼울 뿐 아니라 해당 지역구민의 위신과 의사를 존중한다는 이유로 모두 무혐의 처리했다. 반민특위는 친일파의 소환 요구와 자수 권유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미흡하자 한 차례 시한을 연장했으며, 또 다시 기대에 못 미치자 대상자의 명단을 발표하고 자진 출두를 촉구했다. 이인은 이로써 반민특위 중앙사무국이 처리할 친일파의 정리는 사실상 완료되었다고 밝혔다. 공소시효 종료를 앞두고 이인은 남한에서 조사하지 못한 친일파는 300여 명에 이르며, 남은 기간 동안에 이들의 조사를 완료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또한 정부 관리 가운데 친일 혐의가 있는 자에 대해서는 그 동안 고발도 없었고 조사한 적도 없다고 밝혔으며, 군 내부의 친일파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했다. 반민특위는 공소시효가 종료된 9월 초에 조사위원, 조사관 간부, 도 조사부 책임자의 연석회의를 가졌다. 이날 회의에서 반민특위는 업무를 대폭 줄이지만, 시효중단자인 도피자와 조사 불능 지역에 거주하는 친일파의 조사는 계속 진행하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반민특위 위원장 이인은 9월 7일에 반민특위 활동이 종료되었다는 이유로 사표를 제출했다. 나아가 이인의 주도 아래 의원들은 반민특위 조직법 폐지안과 특별재판부 폐지안, 그리고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가 담당했던 업무를 대법원과 대검찰청에서 담당하도록 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반민법 개정안과 각 조직법 폐지안은 국회에서 가결되어 반민특위·특별검찰부·특별재판부는 해체되었다. 개정된 반민법에 따라 기소된 친일파에 대한 재판은 대법원으로 이양되었다. 대법원은 이들을 재판할 재판관이 부족하여 임시재판부를 설치했다. 임시재판부 재판관으로는 대법원장 김병로가 추천한 5명이 임명되었다. 이들 가운데 4명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판사를 지낸 인물이라 특별재판부와 마찬가지로 친일파를 재판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친일파의 재판은 1950년 4월 하순부터 재개되었으나, 곧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재판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반민법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에 폐지되었다. 반민법 폐지안 이 제출된 이유는 반민특위가 활동할 당시 거물급 친일파들의 재판은 일찍 끝나 자유로운 몸이 된 반면에 친일행위가 가벼운 자들은 비록 보석으로 모두 석방되었지만 재판이 종료되지 않아 형평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반민특위의 친일파 처벌은 대체로 완전했고, 전쟁 속에서 친일파들이 열심히 일하고 국가에 충성을 다하고 있으므로 이들을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법안은 1명의 의원도 반대하지 않은 채 가결되었다. 이로써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한 법적 근거는 완전히 사라졌다. 註41) 2. 이승만정권과 친일파의 방해 책동 1) 반민족행위처벌법 반대운동 제헌국회에서 의원들이 헌법에 친일파를 처벌할 수 있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조항을 두고 논란을 벌일 때만해도 이 문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정부가 수립되고 국회에서 반민법의 구체적인 내용이 거론되자, 정부와 정치세력의 반응이 나타났다. 1948년 8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 처리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아직은 시기가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민주당은 친일파 처벌을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친일파의 범위를 확대하고 과도한 처벌을 하게 되면 사회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혀 사실상 친일파 처벌을 반대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도 공산당이 정부 파괴 공작을 획책하고 있는 상황에서 반민법 제정은 민심을 동요시키는 이적 행위라고 비난하고, 친일파의 처벌은 주권을 공고히 세운 후에 해야 한 다고 주장했다. 친일파 처벌을 반대하는 조직적인 움직임은 경찰 쪽에서 시작되었다. 국회에서 반민법 제정이 확실시되자, 8월 24일 수도경찰청 부청장 김태일金泰日을 비롯한 경찰 간부들은 회의를 열고 민족정기를 앙양한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퇴진을 결의했다. 이들의 결의는 표면적으로는 용퇴였지만, 사실은 반민법 제정에 불만을 품고 이승만정권의 주요한 물리적 기반인 경찰을 동요시켜 반민법 제정을 무산시키려는 위협이었다. 검사들은 친일경찰보다 앞서 퇴진하겠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으며, 일부 판사들은 반민법이 공포된 후 아예 출근을 하지 않았다. 반민법 문제로 공무원들이 동요하자, 이범석李範奭 국무총리는 공무원들에게 행동의 자제를 촉구했다. 註42) 이런 움직임의 일부는 반민법 제정의 취지에 따르겠다는 양심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친일파의 범주에 자신들이 포함된 데에 대한 불만과 친일파 처벌 문제에 대한 정부의 소극적 태도에 압력을 가하는 일종의 시위에 지나지 않았다. 반민법 제정을 반대하는 책동은 국회의원을 위협하고 국회에서 난동을 부리는 양상으로 이어졌다. 국회의원들의 숙소와 서울시 내 각처에 ‘반민족행위자의 처단을 주장하는 사람은 공산당의 주구’이며, ‘민족을 분열시키는 반민법안의 철회를 요구’하는 전단이 뿌려졌다. 또한 반민법 제정에 적극적인 의원들에게는 협박장을 보내기도 했다. 우익 계열의 청년들은 의원들이 반민법을 심의하고 있는 회의장에 난입하여 반민법 철회를 외치며 난동을 부렸다.註43) 이처럼 친일파 처벌을 반대하는 친일파의 방해 책동은 서서히 달아올랐다. 친일파가 주요 당원이던 한국민주당은 국회의원들에게 반민법의 제정을 연기시키거나 완화시키려는 로비를 벌였다. 한국민주당에 매달 자금을 제공하던 친일 자본가는 반민법을 완화시키거나 무력화시키기 위해 거액의 자금을 제공하였다. 나아가 친일파들은 친일 자본가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아 조직을 결성하고, 반민법을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註44) 이승만 대통령도 반민법이 제정되는 과정부터 공포되고 난 후까지 반민법 제정과 친일파 처벌에 대한 입장을 여러 차례 발표했다. 먼저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법 제정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동되고 민심이 이반되는 등 여러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으며, 반민법이 제정되어도 시행은 어려울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행정권을 이양 받은 직후에는 정부 각 부처의 간부를 중앙청 광장에 집결시켜 이들을 격려하는 훈시를 하고, 친일파를 처벌할 시기가 아니라고 강조하며 친일파를 안심시켰다. 註45) 반민법이 공포된 후에는 친일파의 처벌은 정부가 완전히 수립된 후에 해야 한다는 담화를 발표하여 반민법 시행을 반대하는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 무렵 반민법을 반대하는 친일파의 책동은 반민법이 공포된 다음날인 9월 23일에 열린 ‘국민대회’였다. 이 대회의 정확한 명칭은 ‘반공구국총궐기 정권이양 대축하 국민대회’로 형식상 반공 궐기 대회였으나, 실제로는 반민법을 반대하고 국회를 규탄하는 집회였다. 친일파 이종형李鍾滎이 단장으로 있던 한국반공단韓國反共團이 주최했으며, 내무부 장관 윤치영의 지원 아래 언론 분야의 이종형, 경찰측의 이구범李九範과 노덕술, 재정분야의 백낙승白樂承 등이 주도하였다. 이날 대회에는 이승만 대통령도 참석하여 축사를 할 예정이었으나, 여의치 않아 대독했다. 국무총리 이범석은 직접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 이 대회는 열리기 수일 전부터 대대적으로 신문에 보도되고 대회를 알리는 광고가 실렸다. 대회 당일에는 경찰과 동 회장 등이 서울 시내 곳곳을 누비고 다니면서 대회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은 빨갱이·좌익·공산당이며, 배급통장을 뺏겠다고 위협하면서 대회 참가를 강요했다. 대회에 참가하는 시민을 위해 서울 시내 택시의 대부분이 동원되었다. 대회를 주도한 이종형은 반민법은 동장·반장까지 모두에게 적용되는 망민법網民法이라고 규탄했다. 반민법을 제정한 의원들에 대해서는 공산당의 프락치이자 ‘김일성의 주구’라고 강변했다. 이날 대회장인 서울운동장에는 ‘반민법을 철폐하고 국회를 쳐부수자’라는 전단이 뿌려졌으며, 반민법의 수정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대회를 마무리 지었다. 다음날 국회에서는 대회를 두고 격렬한 논란이 되는 동안 내무부 장관 윤치영은 해방 후 처음 보는 애국적 대회라고 극찬하는 방송을 했다. 註46) 한편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월부터 반민특위가 친일파를 체포하기 시작하자, 보다 적극적으로 친일파 처벌을 반대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가 친일파의 조사만 하고 검거와 재판은 행정부와 사법부로 넘겨 줄 것을 요구했다. 이는 반민특위의 무력화를 뛰어넘어 반민특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또한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체포된 후 열린 국무회의에서 반민특위의 활동을 ‘무분별한 난동’이라고 규정하고 단호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인 법무부 장관이 노덕술이 체포된 사실을 보고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특위 조사관과 그 지휘자를 체포, 의법 처리하며 계속 감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반대하는 반공국민대회 기사 할 것을 지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 내 친일파의 숙청을 요구한 반민특위의 건의를 거부하고, 반민법을 일시적으로 정지할 것을 주장하며 반민법의 개정을 촉구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49년 2월 정부는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반민법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반민특위와 특별재판부는 대검찰청 산하에 두고 반민특위 조사위원과 특별검찰관 그리고 특별재판관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었다. 이는 행정부와 사법부에서 독립된 반민특위가 아니라 대통령 산하의 반민특위로 만들어 대통령이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정부의 반민법 개정안은 국회의 강력한 거부로 각하되어 반민법 개정은 무산되었다.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려는 갖은 책동에도 불구하고 실현되지 못하자, 반민특위 관계자의 일제강점기의 경력과 개인 비리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이는 반민특위의 도덕성에 타격을 주어 무력화시키려는 의도였다. 조사는 친일경찰로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장이던 최운하가 주도했 다. 경찰 조사를 바탕으로 친 이승만 계열의 박준朴峻 의원은 반민특위 부위원장 김상돈이 일제강점기에 총대總代를 지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김상돈의 경력을 두고 국회의원들 사이에 논란이 있었으며, 김상돈이 이 문제로 물러나지는 않았으나 반민특위는 타격을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도 김상돈의 개인적인 과실 치사 사건을 직접 거론하는 등 반민특위 관계자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반민특위를 무력화 시키고자 했다. 註47) 2) 친일경찰의 반민특위 관계자 암살음모사건 친일경찰의 반민특위 관계자 암살음모사건은 친일경찰의 주도 하에 반민특위 관계자를 암살하여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고 궁극적으로 친일파 처벌을 무산시키고자 했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948년 10월경부터 계획되었으며, 친일경찰인 전 수도경찰청 사찰과장 노덕술, 수사지도과장 최난수, 사찰과 부과장 홍택희洪宅熙, 전 서울 중부경찰서장 박경림朴京林 등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9월에 열린 반공궐기대회에도 깊숙이 관여했으며, 대회가 끝난 후 반민법 제정과 친일파 처벌에 적극적이었던 국회의원과 청년단체의 간부를 암살하기로 계획했다. 친일경찰은 반민특위 관계자를 암살하기 위해 먼저 특별검찰관 차장 노일환과 특별재판관 김장렬, 그리고 반민법 제정을 주도했던 김웅진 등 국회의원을 납치하고자 계획하였다. 이들을 납치하여 북한에 가서 살기를 원한다는 내용이 담긴 성명서를 강제로 쓰게 한 후, 이 성명서를 대통령·국회와 각 신문사에 보내 발표하고자 했다. 그런 후 38선 부근에서 이들을 암살하여 이들이 월북하는 도중에 애국 청년들에게 발각되어 살해당했다고 위장하는 계획이었다. 친일경찰이 이들 외에 암살대상으로 지목한 인물은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부위원장 김상돈, 특별검찰관장 권승렬, 특별검찰관 곽상훈·서용길·서성달, 특별재판부장 김병로, 특별재판관 오택관·최국현·홍순옥 등 반민특위의 핵심적인 관계자였다. 또한 친일파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청년단체의 간부로 활동하고 있던 유진산柳珍山·이철승李哲承·김두한金斗漢도 암살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註48) 이 사건을 주도한 노덕술은 1948년 10월 중순경에 미군정기부터 자신과 접촉하고 있던 테러리스트 백민태白民泰를 이 사건에 적합한 인물로 보고 홍택희에게 추천했다. 홍택희는 다시 백민태를 최난수에게 추천했으며, 11월 중순경에 최난수는 백민태에게 암살 계획을 설명하고 거액의 활동 자금을 제공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후 최난수는 홍택희·백민태와 함께 모인 자리에서 백민태에게 국회의원 노일환·김웅진·김장렬 3명을 납치하라고 지시했다. 이를 위해 최난수는 친일 자본가 박흥식에게 받은 수표와 수류탄·권총·탄환 등을 건네주었다. 백민태는 최난수의 지시에 따라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노덕술에게 전달했다. 반민특위 관계자를 암살하려는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계획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백민태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백민태는 대법원장과 검찰총장을 비롯한 암살 대상이 충격적이라 두려움을 느꼈고, 무엇보다 자신이 평소에 존경하던 인물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획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백민태는 조헌영·김준연 등에게 이 사실을 고백했다. 1948년 12월 중순에 김준연은 국회 본회의에서 이 사실을 폭로했다. 註49) 김준연의 폭로는 의원들 사이에 사실 여부를 두고 논란이 벌어 졌으나, 폭로한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가 없어 더 이상 논의되지 못했다. 이 사건의 전모는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체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반민특위가 노덕술을 체포하자, 백민태는 검찰에 자수하여 계획의 전모를 털어 놓았다. 검찰은 수사 끝에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고, 노덕술·최난수·홍택희·박경림 4명을 기소했다. 이들은 재판 과정에서 혐의 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결국 1·2심에서 노덕술과 박경림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선고를 받고 석방되었다. 최난수와 홍택희는 1심에서 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는 벌금형을 선고받는데 그쳤다. 이 사건에 관련된 친일경찰이 무죄 선고를 받거나 가벼운 처벌을 받은 이유는 재판부가 사실에 입각하기보다는 정치적인 판단에 따라 재판했기 때문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재판부는 친일경찰에게 유리한 증언과 증거만을 받아들이고 불리한 내용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건의 핵심 인물이던 노덕술은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었다. 또한 최난수와 홍택희가 징역형에서 벌금형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은 것은 1심 공판은 반민특위가 활동하는 시기에 있었지만, 2심 공판은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친일파 처벌문제가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진 시기에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재판부의 재판 결과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은 재판 과정에서 줄곧 혐의 사실을 부인했던 홍택희가 훗날 검찰의 기소 내용이 대부분 사실이라고 시인한 데서 알 수 있다. 註50) 재판이 끝난 후 석방된 노덕술은 군에 입대하여 제1사단 헌병대장을 역임하는 등 경찰에서 활동할 때와 마찬가지로 군에서도 정보와 대공對共을 다루는 분야에서 활동했다. 최난수 와 홍택희는 경찰 총경으로 승진하고, 치안국의 정보와 수사 분야에서 활동했다. 친일파와 친일경찰의 사주 하에 반민특위 관계자를 암살하려는 시도는 또 한 차례 있었다. 1949년 3월에 반민특위 강원도 조사부 사무실에서 조사부 책임자 김우종의 호위를 맡고 있던 김영택金榮澤이 김우종의 암살을 시도했다. 이 사건은 처음에 김영택이 김우종에게 권총 사용법을 가르쳐주는 과정에서 김영택의 실수로 발포되어 김우종이 부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조사관이 총알의 진행 방향과 김영택이 호위를 자청한 사실 등 몇 가지 미심쩍은 점을 발견하고, 조사한 끝에 강원도의 거물급 친일파가 경찰과 공모하여 김우종과 특경대 대장 지상호池相豪를 제거하려던 사건임을 밝혀냈다. 註51) 김우종 암살기도사건의 실체가 드러나자, 경찰은 김영택이 북조선노동당 당원이었다며 북한의 공작설을 제기했다. 하지만 김영택이 거물급 친일파와 경찰이 김우종을 제거하면 거액의 돈을 받기로 했다는 자백을 하면서 사건의 실체가 드러났다. 김우종 암살기도사건은 경찰이 김우종의 호위 담당으로 내정되어 있던 인물을 대신하여 현직 경찰인 김영택을 강력히 추천한 점을 고려할 때, 친일파와 경찰이 두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강원도 조사부를 조직할 무렵부터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김영택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한 혐의로 특별검찰부로 송치되었지만, 배후 인물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은 채 일단락되었다. 오히려 김영택이 특별검참부에 송치되어 조사받을 동안 친일파와 경찰의 방해공작으로 특별검찰관이 조사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음을 토로할 정도로 친일파와 경찰의 책동은 노골적이었다. 김영택은 재판 과정에서 기소 내용을 전면 부인했으며, 결국 특별재판부의 공소기각으로 석방되었다. 반면에 이 사건을 담당했던 조사관은 이후 김영택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는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특경대 대장 지상호는 이 사건과 관련된 증인을 고문했다는 혐의로 구속된 뒤 석방되었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註52) 반민특위 관계자 암살음모사건은 ‘반공궐기대회’나 ‘국회 프락치 사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건이었다. 친일파가 반민특위를 와해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친일파 처벌 자체를 무산시키기 위해 반민특위 요인은 물론 대법원장과 검찰총장까지도 암살을 시도했던 사건은 친일파가 처벌 문제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하고자 했든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이 사건은 공공의 이익 대신 사익을 채우려 했던 친일파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냈으며, 친일파 처벌의 당위성을 명확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3) 국회 프락치 사건과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사건 친일파의 방해 책동과 이승만정권의 비협조 속에서 어렵게 활동하고 있던 반민특위는 국회 프락치 사건과 경찰의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사건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두 사건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이 빌미가 되어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사건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두 사건의 중심에는 소장파 의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소장파 의원들은 국회 개원 직후부터 국회 프락치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전횡을 견제하는 사실상 유일한 세력이라 할 수 있었다. 먼저 소장파 의원들은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이승만과 충돌했다. 소장파 의원들은 헌법안의 심의가 이승만 대통령의 야심에 따라 졸속으로 진행되자, 국가의 장래를 좌우할 헌법이 민의에 따라 제정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일방적인 주장에 너무 끌려 다닌다고 비판했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총리로 지명한 이윤영李允榮의 인준을 거부했으며, 반민법 제정과 정부 내 친일파 숙청을 주장하여 이를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충돌했다. 친일파 처벌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반민특위 조사위원, 특별검찰관, 특별재판관으로 선출되어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소장파 의원들은 여러 가지 개혁법의 제정에도 앞장서고, 정권의 안정을 위해 인권을 침해하는 법과 제도를 비판했다. 1948년 12월에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자, 이 법을 일제강점기에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마련된 치안유지법이나 독일의 히틀러Adolf Hitler가 유태인을 탄압하기 위해 제정한 법과 같다고 비판하고 폐기를 주장했다. 소장파 의원들은 두 차례나 걸쳐 평화통일을 위해 외국군의 즉시 철퇴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제출하기도 했으며, 지역민이 자치단체장을 직접 선출하는 지방자치법의 제정을 촉구했다. 또한 농민의 권익을 담고 있는 농지개혁법이 제정되는 데도 앞장섰다. 註53) 이처럼 소장파 의원들은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소장파의 전성시대’라고 불릴 만큼 독재 체제를 강화하려는 이승만 대통령의 전횡에 맞서 활동했다. 註54)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사건의 발단은 국회 프락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5월 18일 최운하가 지휘하는 경찰이 이문원과 최태규를 체포한데 이어 이구수를 체포하면서 시작되었다. 권승렬 검찰 총장은 국회 보고에서 검찰과 경찰이 3월 중순부터 세 의원의 활동을 이상히 여겨 수사를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국회의원이 좌익계열의 인물과 접촉하는 사실을 탐지했다고 밝혔다. 4월 초순부터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여 세 의원을 체포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검찰총장은 세 의원의 혐의를 입증할 물적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다만 외국군의 완전 철수, 정치범 석방, 친일파 처벌, 남북정치회의 구성 등 남조선노동당의 남북평화통일의 7원칙에 따라 활동했기 때문에 구속했다고 밝혔다. 이때까지만 해도 국회 프락치 사건은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국회폐회 기간 중에 3명의 의원이 구속되자, 의원들은 국회의원의 면책 특권과 구속 사유가 분명치 않다는 이유를 들어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석방요구 결의안은 재석 의원 184명 가운데 찬성 88명, 반대 94명, 기권 1명으로 부결되었다. 註55)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친일파들은 석방요구 결의안의 제출을 빌미삼아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친일파들은 국민계몽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국민계몽회의 간부들은 5월 하순에 모임을 가지고 석방요구 결의안에 찬성한 의원을 공산분자라고 규정짓고 이들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국민계몽회의 주요 간부는 친일파인 손홍원孫弘遠과 김정한金正翰이었다. 손홍원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과 국민훈련후원회 회장을 지낸 인물로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는 이유로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부터 포상까지 받은 인물이었다. 김정한은 녹기연맹綠旗聯盟의 간부와 일제 문부성文部省 촉탁으로 활동한 친일파로 반민특위의 수배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이 단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실은 친일파 처리를 반대했던 국회의원 김준연과 이강우李康雨가 지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註56) 5월 31일 열린 집회에서 참석자들은 석방요구 결의안에 찬성한 의원을 ‘빨갱이’로 규정하고 국회를 성토하는 시위를 벌였다. 6월 2일에는 500여 명의 군중이 ‘국회 내 적색분자를 숙청하자’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국회와 반민특위를 규탄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다음날에는 손홍원과 김정한의 주도 하에 반민특위 사무실을 에워싸고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반민특위 내의 공산분자를 숙청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민특위를 성토했으며, 반민특위 사무실 진입을 시도했다. 6월 4일 반민특위는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장 최운하와 종로경찰서 사찰주임 조응선, 국민계몽회 회장 김정한 등을 국민계몽회가 주도하는 시위에 군중을 동원하고 배후 조종한 혐의로 체포했다. 반민특위는 사무실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을 때 경찰이 소극적으로 대처한 점과 시위 현장에서 국회의원을 폭행하고 시위를 주동한 자를 체포했으나 바로 석방한 점 등을 이상히 여기고 조사에 착수했다. 註57) 반민특위는 시위에 참여했던 자를 체포하여 조사한 결과 연이은 시위에 경찰이 깊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즉 최운하와 조응선은 김정한을 숨겨주고 이들과 활동 계획을 협의했다는 점을 밝혀냈다. 또한 반민특위의 수배를 받고 있던 김정한이 모 장관을 찾아가 신변 보호를 요청하자, 장관은 서울시경 국장 김태선金泰善에게, 김태선은 다시 최운하에게 이임하여 그를 숨겨 주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친일경찰의 구심점이던 최운하가 반민특위에 체포되자, 그를 석방시키기 위해 경찰과 검찰의 간부진이 총동원되었다. 친일경찰 출신이던 마포경찰서장은 반민특위 부위원장 김상돈을 만나 석방을 요청했으며, 권승렬 검찰총장은 반민특위 조사위원을 일일이 방문하여 최운하의 석 반민특위 특경대원을 구인하여 활동을 방해하는 기사 방을 요청했다.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가 최운하를 석방하지 않자 정부 고위 관리들이 나서 반민특위 지도부를 위협했다. 장경근張璟根 내무부 차관과 이호李澔 치안국장은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을 방문하여 최운하를 석방하지 않을 경우 실력 행사를 하겠다고 위협했다. 치안국 고위 간부도 김상덕·김상돈·서성달의 집을 차례로 방문하여 실력 행사를 하겠다고 위협했다. 한편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 소속 경찰 400여 명은 정부가 경찰의 신변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며 총사직을 결의하고 집단으로 사표를 제출하며 정부를 압박했다. 반민특위가 최운하와 조응선의 석방을 거부하자, 장경근 내무부 차관과 이호·김태선 등 경찰 수뇌부는 회의를 가지고 검찰·경찰·헌병 세 기관이 함께 최운하가 수감되어 있는 마포형무소를 습격하여 최운하를 빼내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검찰과 헌병 측에서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자,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기로 계획이 변경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6일 아침 중부경찰서 서장 윤기병尹箕炳이 지휘하는 50여 명의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사무실을 봉쇄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특경대 대원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한 후 체포했으며, 반민특위의 활 동과 관련된 서류와 집기도 탈취했다. 경찰은 반민특위 중앙뿐만 아니라 각도 조사부에게도 타격을 가했다. 반민특위 사무실이 습격당하는 날 반민특위 강원도 조사부 사무실에도 경찰이 난입하여 반민특위 조사관의 무기를 압수하고 사무실의 경비를 위해 배치되었던 경찰을 모두 철수시켰다. 이후 충남과 충북도 조사부의 특경대 대원과 경비를 위해 배치되었던 경찰을 철수시켰으며, 경기도 조사부의 사무실을 봉쇄했다. 사건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 보고와 외신 기자와 가진 회견에서 자신의 명령으로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했다고 밝혔다. 註58) 습격사건 다음날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을 비롯한 조사위원들은 정부와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사표를 제출했다. 국회도 사건을 보고받고 국회 차원의 대책을 논의했다. 국회는 내각 총사퇴 건의의 조속한 실행, 반민특위의 원상회복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했다. 만약 정부가 국회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부가 제출한 각종 법안과 예산안의 심의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국회는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휴회에 들어갔다. 국회 의장단은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여 국회의 결의를 전달했으며, 국회의원 각 계파의 대표들은 내각의 일부 퇴진, 반민특위 간부의 일부 변동 등을 타협책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특경대 해체는 불가피한 조치였고, 내각 사퇴의 주장도 위헌이라며 타협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회와 정부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자, 의원들은 이러한 사태는 대통령중심제에서 비롯되었다고 인식하고 내각책임제로의 개헌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6월 하순부터 노일환·박윤원朴允源·강욱중姜旭中·황윤호黃潤鎬 등 소장파 의원들의 핵심들이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됨으로써 반민 특위 사무실 습격사건과 개헌문제는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의원들이 체포될 때부터 사실 여부에 대한 많은 의혹이 있었다. 수사 당국이 의원들의 혐의를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라고 제출한 문서의 신빙성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발생하는 등 많은 점에서 의혹이 있었다. 註59) 특히 이러한 논란은 이 사건을 담당한 특별수사본부의 주요 인물들이 친일경찰 출신이라는 점에서 더욱 증폭되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의 수사는 군·경찰·검찰의 합동으로 설치된 특별수사본부가 담당했다. 특별수사본부는 반민특위의 체포를 피하기 위해 군에 입대한 친일경찰 출신으로 당시 헌병부사령관이던 전봉덕이 주도했다. 또한 헌병대에서는 전봉덕과 마찬가지로 반민특위의 체포를 피해 입대한 친일경찰 출신 김정채金貞彩·윤우경尹宇景등이 참여했으며, 경찰에서도 친일경찰 출신 최운하·김호익金昊翊 등이 참여하여 수사를 담당했다. 국회 프락치 사건에 대한 재판은 검찰과 재판부의 일방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노일환은 남로당의 가입 사실과 남로당의 지시에 따라 활동했다는 자신의 자백이 헌병대의 고문에 못이긴 허위 자백이었다고 주장하는 등 의원들은 자신들의 혐의 내용을 전면적으로 부인하였다. 변호인은 의원들의 혐의를 입증할 결정적 증거로 제시한 암호 문서를 소지했던 정재한과 소장파 의원들을 조종했다는 남로당원을 재판정에 출정시킬 것을 요청했지만, 검찰은 이를 무시했다. 재판부는 변호인이 신청한 증인과 기타 여러 요청을 기각한 반면에 검찰 측 증인 신청은 모두 인정하고 직권으로 검찰에 유리한 자를 증인으로 채택했다. 이러한 일방적인 재판 속에 의원들은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註60) 국회 프락치 사건과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사건은 반민특위의 활동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는데 그친 것은 아니었다. 두 사건은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정권이 강력한 독재체제를 구축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1949년 5월부터 남한에서는 반공체제를 강화하는 움직임이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간헐적으로 거론되던 미군 철수 문제가 1949년 5월에 본격적으로 논의가 시작되어, 6월에 미군을 완전 철수하기로 합의가 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그동안 불안하던 이승만정권의 기반은 더욱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의 승리는 이승만정권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결국 두 사건은 이승만정권이 기반을 공고히 다지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를 장악했으며,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사건으로 친일파 처벌을 무산시켰다. 이로써 이승만정권은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독재체제를 공고히 해 나갈 수 있었다. [註 29] 허종, 「반민특위 경상북도 조사부의 조직과 활동」, 『대구사학』 69, 2002, 10쪽 ; 허종, 「반민특위 경상남도 조사부의 조직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25, 2003, 573쪽.☞ [註 43] 길진현, 『역사에 다시 묻는다』, 44쪽. 전단의 내용은 ‘행동위원 일동’의 명의로 -. 대통령은 민족의 신성이다. 절대 순응하라, -. 민족을 분열하는 반족안을 철회하라, -. 반족 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이다, -. 인민은 여기에 속지 말고 가면의원을 타도하라, -. 민의를 이반하는 의원은 자멸이다. 한인은 뭉쳐야한다는 것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