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항 소재 도시전략연구소에서 발간하는 문화담론지 계간 <U & I> 겨울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경북 동해안의 겨울포구들을 여러 작가들이 한 군데씩 맡아서 쓰는 특집인데, 저는 경주에 살기 때문에 감포에 대해서.... ^^
경주에도 바다가 있다―감포 / 김종년(월인재)
이상하지, 참으로 오랜만에 깊디깊은 단잠을 잤다고 생각하며 일어난 날 아침에는 거의 어김없이 밤새 비나 눈이 내렸거나 내리는 중이었다. 오래전부터 그랬다. 어린 시절 낙동강변의 어느 한적한 면소재지의 낡고 퇴락한 적산가옥에 살 때에도 그런 경험이 있다. 아마도 열 살 무렵이었을 게다. 그 나이의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 잦은 신열과 어지러운 꿈에 시달리던 어느 겨울날 오전, 그때도 참으로 오랜만에 꿈 없는 잠을 깊고 달게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 방문을 열었을 때 놀라워라! 집 앞 신작로는 물론이요 그 앞을 흐르던 강과, 강을 건너 길게 드러누워 있던 들판과, 그 들판이 끝나는 지점에 낮게 웅크리고 있던 산들이 모두 투명한 겨울햇살 아래 혼곤히 흰 눈을 뒤집어쓴 채 반짝이고 있었다. 그때 그 일망무제의 설원(雪原)을 길길이 날뛰며 닿는 곳마다 은빛의 눈보라를 일으키던 바람소리를 나는 잊지 못한다.
이후 4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자주 그런 경험을 한다. 어째서 그럴까? 어째서 비나 눈이 내리는 밤에는 편히 잠들 수 있는 걸까? 살아오면서 그 까닭을 드문드문 생각해보았지만 마땅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어렴풋이 생각하느니, 내 몸은 유년시절부터 몹시 물을 그리워해서 기압골이 나지막이 내려앉은 일기불순의 저기압에 최적화된 것은 아닐까, 그래서 평소에도 비나 눈이 내리는 날을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곤 하는 것이다.
감포항을 찾아가는 날에도 그랬다. 마치 화석처럼 땅속 깊이 가라앉아 깊이 잠들었다가 개운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겨울비가 마치 봄비처럼 조용히 마당을 적시고 있었다. 2017년도 시작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새해 벽두였다.
잔잔한 성하(聖河)의 흐름은
비나 눈 내리는 밤이면
더 환하다
―김종삼, 「성하(聖河)」 전문*
경주 시내에서 감포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보문호반을 끼고 추령터널을 지나 대종천(大鍾川)과 나란히 내달리는 길과 불국사를 지나 석굴암을 향해 오르다가 옆길로 빠져 장항리사지(獐項里寺址)를 지나서 내리막길로 굴러 내려가는 길이 그것이다. 두 가지 길 모두 사시사철 아름답다. 그 중에서도 특히 보문호반을 지나 추령터널을 거쳐서 가는 길, 이른바 ‘감포가도’는 호수와 산과 고갯마루와 들판과 강과 마침내 고등어빛 푸르른 동해바다까지를 일목요연하게, 그것도 계절마다 그 느낌을 달리하면서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다. 경주에도 바다가 있다. 서울에서 살 때는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할 때가 많았고, 경주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에도 종종 그 사실을 잊곤 하지만 분명 경주에도 바다가 있다. 감포(甘浦), 이 단아하고 호젓한 이름의 포구.
‘감포’라는 지명은 해안이 ‘달 감(甘)’ 자 모양으로 생긴 데다가 주변에 감은사(感恩寺)가 있는 포구라 하여 ‘감은포’라 부르다가 음이 축약되어 감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이 일대는 감은사지(感恩寺址)와 유홍준이 극찬하다 못해 자신의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표지로까지 가져다 쓴 감은사지삼층석탑, 신라가 동해로 빠져나가는 길목이었던 신라 동해구(新羅 東海口), 미술사학자 고유섭 선생이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글에서 예찬한 문무대왕의 호국정신이 깃든 이견대(利見臺)와 대왕암(大王岩), ‘온갖 시름을 잠재운다’라는 멋진 뜻을 가진 전설의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 설화, 고려시대 몽고군이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보다 4배나 컸다는 대종(大鍾)을 약탈해서 뗏목에 실어 동해바다를 통해 밀반출하려다가 그만 봉길리 바닷가에 이르러 물속에 빠뜨리고 말았다는 사연을 간직한 대종천 등 불과 직경 10리 정도 되는 거리 속에서 온갖 신화와 전설이 난무하는 공간이다.
천년 전 몽고군이 빠뜨린 대종은 거센 물살에 먼 바다로 휩쓸려가 지금도 파도가 거센 날이면 이곳 사람들은 바닷속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그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그 소리는 혹시 먼 바닷속 깊은 곳에서 구슬피 울어대는 고래 울음소리는 아니었을까. 아닌 게 아니라 감포 앞바다에는 고래가 산다. 감포를 중심으로 위로는 포항 구룡포, 아래로는 울산 장생포에 이르기까지 이 일대 동해바다는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고래가 살아 숨쉬는 신화의 바다였다.
겨울비 호젓히 내리는 1월의 감포항은 너무도 어둡고 쓸쓸하여 마치 생전처럼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그런 와중에도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정박해 있는 낡은 어선들은 이 포구가 규모에 비해 제법 활력이 있는 곳이라는 걸 은근히 말해주는 듯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현재 ‘감포’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수산물은 단연 ‘미주구리(물가자미)’이다. 어찌나 유명하고 많이 생산되는지 감포읍내는 물론이요, 멀리 경주시내의 다운타운에까지 가자미횟집이 즐비하고 식당에서도 밑반찬으로 가자미 요리가 빠지지 않는다. 불현듯 겨울 나그네를 자처하고 들어선 식당에서도 주인장이 추천하는 음식은 단연 가자미회다.
먼데 끝없던 것들
다가와 줄지어 서고
마음에 묵히어만 오던
바로 그것
비가 내린다
감포에서 태어나 감포에서 현대시를 쓰는 첫 번째 시인이 된 최부철(1935~1966) 시인의 시다. 지금도 감포초등학교 교문 앞에 그의 생가가 있다. 시인의 말처럼 빗소리는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한겨울 빈 속에 흘려넣는 차가운 소주는 기억을 데운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만 자란 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 나이 20대 초반, 갓 대학에 입학하고 생애 처음으로 단독 장거리 여행을 결심하고 버스를 갈아타기를 여러 번, 마침내 흘러흘러 내려와보았더니 문득 그곳이 감포였더라고 한다. 나중에 내 아내가 된 소녀가 경주에 내려와 살게 되면서 함께 감포에 들렀을 때 무슨 전생의 기억처럼 풀어낸 말이다. 또 한 여자 후배가 있었다. 역시 서울에서 산다. 내가 경주에 내려와 살게 되면서 이곳을 찾은 그 후배는 노을 지는 저문 빛의 먼 왕릉을 바라보며 “아, 이곳에서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라는 말을 푸념처럼 내뱉곤 했다. 그리고 내가 존경하는 또 어떤 분이 있다. 오랫동안 서울에서 출판사를 운영하다가 벌써 10여 년 전 사업을 정리하고 강화도 산골짜기에 처박혀 어설프게 농사를 짓는 한편으로 틈틈이 밤하늘의 별을 보며 천문학 관련 책을 쓰는 약간 괴짜(?)인 이분도 옛날 경주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이런 말씀을 남겼다. “확실히 이곳에서는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어. 돌아가는 지금 내 심정을 말한다면 이승에서의 하루가 또 이렇게 저무는구나다.”
경주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커다란 슬픔의 도시’다. 그 슬픔을 구성하는 핵심요소는 낡음과 오래됨이다. 그런데 이 낡음과 오래됨이 뜻밖에도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안식을 준다. 어째서일까? 말할 것도 없이 ‘속도’와 ‘경쟁’으로부터 무장해제됨에서 오는 위안이고 안식이다. 감미로운 슬픔, 충만한 폐허, 느림의 여유로움 속에서 이 도시를 먼지처럼 한껏 부유하다가 마침내 슬픔도 지나쳐 지겹고 식상할 무렵, 겨우 숨을 돌리고 발길을 바닷가 쪽으로 돌리면 그곳에 날것 그대로 살아서 펄떡거리는 동해바다 감포가 있다. 그 바다의 파도소리는 워낙 거칠고 강렬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고도(古都)의 정적 속에서 한껏 길들여진 나그네가 문득 이 바다를 마주하면 무슨 전생의 바다 같기도 하다.
차가운 소주로 내부의 그 구불구불한 골목의 불을 밝히고 식당문을 나선 나그네에게 이제부터 외부의 골목이 이어진다. 감포 해국길, 현실의 골목이다. 그러나 현실의 이 골목 또한 대단히 비현실적이다. 시간의 긴 기차여행에서 문득 과거의 어느 낯선 역에 내린 느낌이다. 겨울비 소리 없이 내리는 좁은 골목에서 중년의 탄력마저 오래전에 잃어버린 남녀가 리어카를 끌고 있다. 빗물에 젖어 번들거리며 운반되는 것은 아직도 차마 버리지 못한 채 끌고 가야 하는 그들의 생(生)이다. 그리고 그 생이 지향하는 골목 끄트머리쯤에 적산가옥(다물은집)이 도열해 있다. 이 포구가 은성했던 먼 과거의 어느 한때, 만선의 깃발을 펄럭이며 귀항한 뱃사람들이 연탄난로를 끼고 둘러앉아 돼지기름깨나 태웠을 법한 그 적산가옥 식당들은 그러나 하나같이 문을 닫은 지 오래다.
나그네는 시간의 배 밑창, 그 오래고 남루한 골목을 깊고 느리게 배회하다가 가까스로 원래의 포구로 되돌아온다. 거기서부터 다시 현실이 시작된다. 흐린 날 일찍 찾아온 어둠으로 서서히 불을 밝히기 시작하는 노래방과 약국과 다방과 식당의 거리, 그리고 그 반대편으로는 저마다 서로 어깨를 기댄 채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들썩거리는 어선과 자동차 소음과 이 바다에서는 그다지 거북하게 들리지 않는 목청 큰 사투리와 이따금 생똥을 찍찍 싸갈기며 끼룩거리는 갈매기들과 방파제 끝에서 하염없이 먼 바다를 바라보는 노인이 있다.
노인이 있는 곳 부근에 송대말등대가 있다. 반백년 넘게 동해 망망대해를 그야말로 눈에 불을 밝히고 지켜본 등대다. 이곳에서는 파도소리가 더욱 거칠고 바람의 기세도 더욱 맹렬하다. 주변에 수백 년 해풍을 견디며 이를 악물고 자라온 소나무숲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 송대말(松臺末)이란다. 감은사지삼층석탑을 본떠 만들었다는 등대 아래, 거칠고 날카로운 바위 무더기 위에 서서 먼 바다를 바라본다. 지금도 이따금 운 좋은 어부가 죽어서 바다에 떠다니는 고래를 건져온다는 그 바다다. 가는 비는 그쳤지만 일말의 장애도 없이 무방비로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는 위협적이다.
아주 오래전에 내가 아는 또 한 사람이 말했다. “왜 강물 앞에서는 생각이 많아지고 바다 앞에서는 생각이 없어지는가?” 어린 시절 낙동강변에서 싸릿대를 꺾어 무지갯빛 은어를 잡아가며 한 시절을 보냈던 경험이 있는 나는 그 말을 듣고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아침강이나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어룽거리는 잔물결을 보면 어린 마음에도 생각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맹렬한 기세로 끓고 넘치는 바다 앞에 서면 전연 달라진다. 아무 생각이 없어지는 것이다.
애당초 여행의 시작에서 들이부었던 술기운도 해풍의 도저한 위력 앞에서는 씻은 듯 사라졌다. 떠나올 때 경주 시내에서 오래 산 한 여인이 말했다. “감포엘 가면 다방엘 꼭 가보세요. 아마도 도라지위스키도 잘하면 얻어먹을 수 있을 걸요. 큭큭.” 그 말을 듣고 내 머릿속에는 즉시 다방 풍경이 그려졌다.
바닷가 소읍에는 놀랄 만큼 다방이 많다. 바닷가뿐만 아니라 어떤 농촌지역의 소읍에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방이 많은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오늘날 농어촌 지역의 다방은 단순히 차를 파는 본연의 기능만 하는 게 아니다. 원색의 ‘뽈뽈이’를 부르릉거리며 종횡으로 질주하는 이들 다방 아가씨들은 바쁜 고객들을 대신해서 더러 민원서류도 떼어다주고 약도 사다주곤 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일종의 종합 심부름 센터라고나 할까.
감포 바닷가에 즐비한 다방 풍경은 과연 예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물론 도라지위스키야 있을 턱이 없고, 대신 다시 술과 마른 안주를 시켰다. 해는 완전히 저물었다. 이제부터 이 해안과, 이 해안보다 더 깊숙이 들어앉은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과, 그 속에 또다시 간신히 불을 밝힌 채 웅크리고 있는 낮은 집들 속에는 또 다른 밤의 언어로 우리들 생이 얼마나 깊고 아득한 것인지를 말해줄 것이다. ‘아, 바다가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다.’** 내일 아침에는 일출에 눈을 씻고 돌아가는 길에 처연한 폐허의 상징, 장항리사지 온전한 오층탑과 무너진 오층탑 앞에 서볼 작정이다. 아마 눈이라도 내린다면 그 비장함은 정점을 찍을 것이다.
**김춘수의 시 「처용단장」의 일절.
|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바다 사진도 좋고 김종삼시도 좋아합니다.
-평화롭게, 뷱치는 소년 . 등 멋장이 시인이었지요
우와ㅡ
글을 읽고 나온 탄성입니다ㆍ
잘 쓰신 좋은글 참으로 잘 읽었습니다ㆍ
“왜 강물 앞에서는 생각이 많아지고 바다 앞에서는 생각이 없어지는가?”
월인재님이 쓰신 이 글을 다시 읽으며 가끔씩 다녀오곤 했던 감포 앞 바다를 다시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