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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유혹, 광기의 덫
로버트 멘셜 지음 / 강수정 옮김
에코리브르 / 2005년 7월 / 352쪽 / 15,000원
1장 경기과열, 거품 그리고 붕괴
주식시장은 탐욕과 두려움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서 번갈아 오르내리는 시소와 같다. 장세의 오르막 끝에 이르면 합류하지 않은 사람은 낙오자가 될 것 같은 불안감에 빠진다. 그래서 마지막 바보까지 모두 올라타면 거품은 터지고 심판의 날이 도래한다. 최근에 터져버린 인터넷 시장은 거품의 주요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예고하는 듯한 신기술이 바로 그것이었다. 굴뚝산업의 낡은 회사들은 모두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고, 모든 회사가 가상의 공간으로 자리를 옮겨 방향을 전환하고자 했다. 금융회사들마저도 하루에 열두 번씩 공모주를 발행해서 새로 등장한 회사에 자금을 모아주는 것처럼 보였다. 거품을 부풀리는 상황을 뒷받침해 주는 하부구조가 거의 전무했는데도 말이다.
거품시장은 아이들이 쌓는 벽돌 탑과 같다. 벽돌 하나 하나를 쌓아가면서 탑은 점점 흔들리게 되고 결국 어느 순간 무너져 내린다. 마지막 얹은 벽돌 때문에 탑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탑을 무너뜨린 건 한 층, 한 층마다 더해졌던 불안정성이 원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탑의 꼭대기가 아니라 탑을 지탱한, 아니 지탱하지 못한 하부구조인 것이다. 군중들은 석학이니 애널리스트니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며 떠들어 대지만 실패의 원인은 결국 나 자신에 귀착된다. 돌아가는 상황은 파악하되 자신의 직감을 현장에서 시험해봐야 한다.
튤립 열풍 : 네덜란드를 뒤흔든 황금의 구근
인간이 사고팔 의향이 있는 것이라면 뭐든 시장이 형성될 수 있다. 거품시장 역시 거래 종목에 관계없이 발생한다. 17세기 초, 네덜란드에서는 아름다운 자연의 선물이자 전혀 의외의 물건이 최초의 대규모 거품시장 한복판에 놓이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튤립이었다. 튤립은 1550년경에 터키를 거쳐 서구 유럽에 처음 소개되었다. 이후 집약적으로 재배하고 품종을 개량하면서 튤립은 더욱 아름다워졌다. 17세기가 되자 튤립은 부유층, 특히 독일과 네덜란드 부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구근을 선발하는 대회가 열리게 되고 많은 상금이 걸렸다. 우승을 차지한 구근은 이종교배를 위해 비싼 값에 팔려나갔다.
이처럼 튤립의 가치가 올라가게 되자 1630년경에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튤립 재배와 매매에 사로잡혔다. 튤립을 키우는 사람이 늘어나자 특별히 인기가 있거나 대회에서 우승할 만한 품종의 구근 값이 뛰기 시작했다. 뒷마당에 얼마 안 되는 땅이라도 있는 사람이면 너나 할 것 없이 구근을 재배하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다들 돈을 벌었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자 멀쩡히 직장을 잘 다니던 사람들이 사표를 내고 튤립을 재배하는 일에 전념했다. 튤립 열풍이 정점에 이른 1634년~1637년에는 튤립 상등품의 값이 지금 가치로 거의 11만 달러까지 치솟았다. 이는 웬만한 집 두 채를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새로운 부가 발생하면서 통화의 공급이 팽창했고, 모든 것들의 값이 덩달아 오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잉글랜드와 유럽 등지의 돈까지 몰려들었다. 열기가 고조되면서 사회의 조직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농부들은 튤립 투기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가축을 내다 팔고 집과 토지를 저당 잡혔다. 어떤 사람들은 밤에만 몰래 튤립을 가꾸기도 했다. 다들 누군가 튤립을 훔쳐 갈까봐 전전긍긍했다. 노테르담에 잠시 정박했던 한 영국인 선원은 양파인줄 알고 튤립 구근을 뽑아 먹었다가 감옥에서 10년을 보내야 했다. 레이덴 대학에서 식물학을 가르치던 에바드르 포르스티우스 교수는 재앙에 이른 이러한 현실에 심사가 뒤틀린 나머지 튤립만 보면 지팡이로 냅다 내리쳤다가 정신이상자로 취급되어 지하 감옥에 갇혔다.
거짓풍요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1637년 초, 가격의 붕괴는 느닷없이 시작되었다. 몇몇의 사람들이 다른 형태의 자산을 갖기 위해 튤립을 팔려고 했다. 그러나 사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거의 모두가 튤립을 재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를 느낀 사람들이 너나없이 튤립을 시장에 내놓았다. 팔려는 사람들이 공황 상태에 빠지자 가격은 갑자기 주저앉았다. 그제야 사람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게 진정한 자산이 아니라 구근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짧은 기간 생의 초라함을 벗고 화려함을 맛봤던 많은 사람들은 원래의 보잘것없는 삶 속으로 다시 내동댕이쳐졌다.
희대의 사기극
탐욕이 지닌 힘만으로도 주식 매수 열기를 일으키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지만, 능란한 사기꾼이 가세하고 정부의 공식 승인을 얻은 듯한 분위기까지 조성한다면 엄청난 거품시장을 만들 준비는 완벽하게 끝난 셈이다. 이 사건은 1700년대 초, 영국에서 일어났다.
1711년 옥스퍼드의 백작 로버트 할리는 사우스시 컴퍼니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9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영국 정부의 채권을 자사의 주식과 교환해 주겠다고 나섰다. 국채를 회수해 주려는 이런 애국적인 행위에 감동한 왕실에서는 그에게 사우스시 제도(필리핀, 보르네오, 팔라우 등 태평양의 적도를 경계로 남북에 걸쳐있는 섬들)와 남미의 무역독점권을 허가해 주었다. 하지만 당시 남미의 대부분을 식민지로 거느리고 있던 스페인이 영국과의 무역을 극도로 제한했기 때문에 그 독점권은 생각했던 가치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할리와 그의 일당들은 소문을 퍼뜨렸다. 잉글랜드와 스페인이 ‘남미에서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협상 중’이라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의회에는 ‘3,100만 파운드에 달하는 국채를 회수하기 위해 정부채권을 보유한 사람들에게 전환주식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제안을 했다. 그것은 의회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로버트 월풀(Robert Walpole, 나중에 영국 초대 수상이 됨)은 ‘주가를 인위적으로 올리려는 술책’이라며 하원에서 비난했지만 이미 퍼진 황금빛 소문 앞에 그의 반대는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결국 의안은 통과되었고, 투기가 시작되었다.
1720년 1월에 주당 128과 2분의 1파운드였던 사우스시의 주가는 8월에 1,000파운드까지 치솟았다. 지위고하를 막론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이 시장에 올라타려고 맹렬히 돌진했다.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던 로버트 월풀마저도 한 다발의 주식을 구입하고야 말았다. 사우스시의 주가가 폭등하는 것을 지켜본 다른 사기꾼들도 덩달아 수백 개의 거품 회사를 설립했다. 이들은 50배의 배당금을 주겠다는 장밋빛 약속을 내세웠고 이에 혹한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나라 전체가 주식 투기꾼으로 넘쳐나는 것처럼 보였다. 사우스시의 거품은 1720년 8월에 마침내 터지고 말았다. 회사 간부들이 보유 주식을 매각했다는 소문이 흘러나오면서 주식을 팔겠다는 주문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1,000파운드를 호가하던 사우스시의 주식은 315파운드까지 곤두박질쳤다. 수천 명의 살림살이가 바닥났으며, 의회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대공황, 검은 목요일
1927년 봄, 잉글랜드 은행에서는 침체된 산업을 부양하기 위해 금리를 인하했다. 그러자 투자가들은 더 나은 수익률을 찾아 미국으로 몰려갔다. 국부의 해외유출을 막기 위해 잉글랜드 은행은 미국 연방 준비제도이사회에 금리를 낮추도록 설득했고, 그렇게 시작된 인플레이션의 사이클은 사람들을 주식 투기장으로 향하도록 했다. 1927년~1929년까지 불과 2년 만에 다우존스산업지수가 무려 250퍼센트 가까이 상승했다.
주식시장에 급브레이크가 걸린 날은 1929년 10월 24일이었다. 그날은 지금도 검은 목요일로 기억되고 있다. 그날 아침 시장은 전날과 큰 변동 없이 안정세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초반에 2만 5,000주 정도의 매물이 나오면서 30분 만에 시세가 하락했다. 11시쯤, 전국에서 팔자 주문이 쇄도하기 시작하더니 대표적인 활동성 주식들의 시세가 한 번 거래될 때마다 2, 3, 5 심지어 10포인트씩 빠지기 시작했다. 시장이 붕괴되었다는 소문은 눈 깜짝할 사이에 도시 전체로 퍼져나갔다. 12시가 되자 증권거래소가 있는 교차로에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운집했다. 사진기자와 카메라맨들까지 금융가를 가득 메운 인파로 인해 주변 일대에 교통 대란이 일어났다.
이처럼 걷잡을 수 없는 소동이 일어나자, 은행장들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회의실에 모여들었다. 6개 은행의 수뇌들은 각각 4,000만 달러씩, 총 2억 4,000만 달러를 출연해서 주식시장에 투입했다. 하지만 확산되는 공황심리 앞에서는 안쓰러울 만큼 무기력했다. 밀려드는 숫자에 증권시황판 위에서도 심각한 체증이 벌어졌다. 오후 1시 30분이 되자 시황판의 표시는 2시간 가까이 뒤쳐졌고, 그날의 종료가는 장이 마감되고도 4시간 8분이 지난 저녁 7시 8분에야 찍혀 나왔다. 그날 하루에만 서류 상에서 40억 달러가 증발했고, 수많은 계좌와 투자자들이 사라졌다. 1929년 10월 24일은 월스트리트의 권위와 힘이 크게 실추되고 금융계에 중요한 이정표를 낳은 날이 되었다.
경제의 움직임은 본질적으로 군중심리에서 동인을 찾기 마련이다. 물론 그래프와 사업비율 등의 정보는 온갖 위험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우리의 암중모색에 없어서는 안 될 도구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개인으로 존재할 때에는 이성적이고 분별이 있지만, 군중의 일원이 되는 순간 바보가 되고 만다.
모든 사람이 정신을 잃을 때 제정신을 유지하는 법
주식시장의 오름세와 내림세를 황소와 곰에 비유하기도 한다. 뿔로 치받는 황소 장이든 내리치는 곰 같은 장이든 그 몰아치는 흐름에 휩쓸리지 않기는 쉽지 않다. 혼자 뒤처지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나 다른 투자자들의 의뢰를 받아서 40년 넘게 자산을 운용해오는 동안,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 몇 가지 원칙을 갖게 되었다.
첫째 - 탐욕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는 큰 차액을 남길 기회가 사라지고, 두려움의 정점에서는 오히려 좋은 기회가 널려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건으로 인해 시장이 주저앉더라도 늘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둘째 - 투자 범위를 설정한다. 이를테면 ‘이 안에서만 놀겠다’는 터를 정해놓고 그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영업실적과 수익성, 경영진의 철학, 영업망의 집중력 등을 고려해서 20~25개 정도의 회사를 정한다. 그 회사들 중에서 주가 이익비율(수익 실적에 대비한 주가 적정도)이 합리적인 수준일 경우에만 구입을 결정하고, 새로운 회사를 추가할 경우에는 가장 취약한 회사의 주식을 매각한다.
셋째 - 구매전략을 정해서 고수한다. 나는 구매하고자 하는 회사의 가격이 일정 범위 안에 들어오면 조금씩 사들인다. 다시 말해서 사고자 하는 물량의 25퍼센트를 먼저 사고, 가격이 떨어졌을 때 또 25퍼센트를 사는 식이다.
넷째 - 아는 것에 집중한다. 할인유통업이나 가정용품, 기본식료품, 의약품, 화물운송, 청량음료, 주류 그리고 금융서비스 업계의 수위를 달리는 회사에 집중한다. 이유는 실생활에서 늘 확인해볼 수 있는 업종이기 때문이다. 내가 기술 분야를 기피하는 이유는 그러한 회사들은 너무 급박하게 변화하다가 결국에는 상품 판매로 돌아서는데, 막상 그렇게 하면 영업망이 오래 버텨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탄탄한 영업망을 갖춘 회사가 아니면 투자를 하지 않는다.
다섯째 - 거래소 시장이나 브로커의 사무실에서 투자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그런 곳에서는 군중의 소음에 휩쓸리기 때문이다. 언론이나 군중의 요란스런 호들갑으로부터 안전한, 완전히 혼자가 된 상황에서 투자 결정을 내린다.
여섯째 - 장기적인 안목을 갖는다. 경영철학과 기업 문화를 갖추고 좋은 제품을 만들어 적당한 가격에 판매하는 회사를 선택한다. 수익전망이 확실하되 수익 성장률이 50~60퍼센트 이상 상회하지 않는 회사를 주목하는 게 좋다. 연 15~20퍼센트가 넘게 주가가 오른 회사치고 안전하게 성장할 회사는 드물다.
일곱째 - 복리의 기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는 5년이라는 기간을 정해두고 복리로 계산해서 최소 연평균 15퍼센트의 수익률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렇게 30년만 하면 원금은 66배로 늘어난다. 그 정도면 충분히 빠른 게 아닐까?
2장 소문과 암시
집단 히스테리
아무리 뻔하고 엉성하더라도 대강의 줄거리는 갖추고 있는 ‘소문’과 달리 ‘암시’의 힘은 듣는 사람의 반응에 달려 있다. 우유를 나눠 마신 옆 사람이 ‘우유가 상한 것 같다’고 말하면 실제로 우유가 몽글 몽글 굳어지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암시다. 하품도 일종의 암시로서 전염력을 갖는다. 암시의 힘은 이런 식으로 발휘된다.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두 명에서 네 명으로 때로는 수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퍼지는 현상이다. 주가가 폭락하건, 하늘이 무너지건, 대중은 분위기에 쉽게 편승한다.
「1974년 5월, 마이애미비치에 있는 베이하버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날 아침 10시가 조금 지났을 때 플로리다 주 보건국 산하 소비자 보호원의 ‘조엘 니츠킨 박사’ 사무실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베이하버 초등학교에서 공중보건 간호사를 파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학교에 뭔가가 새고 있는데 독가스로 뒤덮인 것 같으며, 아이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몇 명은 소방서 구급대에 의해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니츠킨 박사는 직접 가서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사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 학교 주차장엔 구급차에 소방차와 경찰차까지 온갖 차들로 꽉 차 있었다. 박사는 출장 중인 교장 대신 그의 비서실장과 얘기를 나누었다. 비서실장은 “처음으로 쓰러진 아이는 5학년인 샌디라는 아이인데 그 아이는 175명으로 구성된 합창단의 일원이며, 합창단원들은 그날 아침 9시 행사 준비를 위해 휴게실과 강당 겸 식당으로 쓰이는 카페토리엄에 모였었다”고 말했다. 이어 “한 30분이 지났을 때 샌디는 속이 메스껍다며 밖으로 나가 양호실에 갔고, 그곳에서 자리를 비운 양호교사를 기다리다가 쓰러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합창단원 중 또 다른 아이가 탈이 났고, 이어 또 다른 아이에게로 이어지면서 증상이 심한 일곱 명이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그리고 “스물다섯명은 경미한 증세를 보여 귀가 조치되었고 마흔 명 쯤은 학교에 남아 치료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비서실장의 설명을 듣고 난 박사는 아이들과 직접 얘기를 나눴다. 그런데 증상이 좀 묘했다. 아주 다양한 증상들을 표현한 것이다. 두통에 현기증, 오한과 복통, 숨이 가쁘거나 기운이 없다는 아이도 있었다. 박사는 카페토리엄을 조사해 봤다. 카페토리엄에서는 무슨 냄새가 나긴 했는데 불쾌한 냄새는 아니었고 다만 강렬했다. 알아보니 그 냄새는 도서관에 카펫을 새로 깔면서 바른 접착제 냄새였다. 물론 접착제는 유독물질이 아니었고 게다가 카펫을 깐 건 벌써 2주전의 일이었다.
상황은 이랬다. 처음에 쓰러진 샌디는 그날 정말로 몸이 좋지 않았다. 일종의 바이러스 감염이었는데 계속 서서 노래를 부르다보니 몸에 무리가 와서 의식을 잃게 된 것이었다. 아이들이 보기에 이유 없이 샌디가 쓰러진 것은 카레토리엄에서 나는 냄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샌디는 학교에서 규범적인 성실한 아이었다. 샌디가 기절하자, 아픈 아이들이 갑자기 늘어났다. 합창 연습을 마친 학생들은 이어 소방훈련을 했는데 실제로 머리가 아프고 메스꺼움을 느꼈다. 분명 독가스는 없었지만 그것은 진짜 전염병이었다. 바로 ‘집단 히스테리’라는 전염병이었다.」
집단 히스테리는 많은 사람들의 대규모 질병을 유발할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의 대규모 욕구나 필요로 이어질 수도 있다. 앞에서 이끄는 소수의 뜻이 무리 전체의 뜻이 되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다. 집단행동은 과장을 더욱 과장시킨다. 소문은 그것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을 때 더욱 맹위를 떨친다. 예를 들어 소위 기적의 바이오기술은 바이오테크 산업에 대한 투자와 주식 구매 열기를 낳았는데 그 열기의 원인은 수천 년 동안 인류를 괴롭혀온 의학의 결함에 있다. 생물학과 기술의 결합으로 그 부족함을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열망이 아직 불똥조차 튀지 않는 먼 후의 불을 피우기 위해 막대한 돈을 부싯돌로 쓰이게 한 것이다.
“댐이 무너졌다” : 우스꽝스러운 대피소동
때로는 소문과 암시가 뒤엉켜 흐르면서 불이 붙기도 한다. 우연히 그렇게 될 때도 있지만 계획적으로 조작되는 경우도 많다. 정치가나 기업의 홍보담당과 컨설턴트들이 활용하는 정보조작이란 대체로 소문과 암시를 적당히 섞음으로써 한편으로는 이야기를 통제하고 또 한편으로는 대중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기술인데, 이때의 목적은 주장의 탁월함을 강조하거나 동의를 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정적이나 논객의 어리석음을 폭로하고 비방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문과 암시의 교차는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으로 그치기도 한다.
「우리가족과 내가 1913년에 겪은 소동이 그러했다. 그날, 댐이 무너졌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이 댐이 무너졌다고 믿었다. 소문이 시작된 건, 1913년 3월 12일 정오 무렵이었다. 그 무렵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상가가 밀집된 하이 스트리트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물건 값을 흥정하는 소리, 계산하고 에누리하는 소리들로 웅성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뛰어갔다. 이번에는 풍채 좋은 신사가 종종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10분이 채 지나기 전에 하이 스트리트의 모든 사람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차츰 ‘댐’으로 모아졌다. 홍수로 인해 댐이 무너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누군가 그 두려운 한마디 “댐이 무너졌다!”를 외쳤다. 곧이어 “강에서 멀리 떨어진 동쪽으로 피해라!”는 외침이 더해졌다. 웨스트사이드는 댐이 무너진다고 해도 그 물이 채 5센티미터도 차오르지 않을 곳이었다. 하지만 20년 전 오하이오 강변도시 대부분이 홍수피해를 입었었다. 사람들의 공포감은 웨스트사이드가 10미터까지 물에 잠길 것이라는 생각으로 번졌다. 들불처럼 번져가는 공포감은 현재의 안전한 상황을 조금도 인식하지 못하게 했다. 달리고 있는 200여 명의 군중 속에 부인네들과 아이들, 하인들과 개와 고양이들까지 합류했다.
우리가족도 다른 곳으로 피하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닥친 위협이 ‘물’이 아니라 ‘네이던 베드포드 포레스트 기병대’라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낡은 군도를 휘두르시면서 가족들이 집을 나서지 못하게 하셨다. “그놈의 자식들, 어디 한번 와보라고 해!”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우리는 할 수 없이 다리미판으로 할아버지를 때려 기절시켜야만 했다. 할아버지는 키 180센티미터에 몸무게가 77킬로그램이나 되는 거구셨다. 어머니는 집안의 모든 불을 끄고 계란 12개와 빵 두 덩이를 챙기셨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들것에 들고 동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파슨즈 애버뉴에서 정신을 차리신 할아버지는 “대오를 정렬해서 반역자들의 무리에 맞서라!”고 호통을 치셨다. 하지만 곧 댐이 무너졌다는 상황을 깨달은 후에는 그 힘찬 목소리로 “동쪽으로 피하라!”고 외치셨다. 결국 대 탈주는 그 시작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끝나버렸다. 민병대가 확성기를 통해 “댐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라고 거듭 외친 것이었다. 곧 질서가 회복되었지만 처음엔 이 말조차 “댐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로 들렸다. 이튿날, 날이 밝았을 때 도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적인 풍경으로 돌아갔지만, 농담이라도 전날의 소동을 거론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 사람이 정신을 잃을 때 제정신을 유지하는 법
군중에 합류할 것인지의 여부는 개인이 선택할 문제이다. 또한 무조건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은 사실을 놓칠 수 있다. 물론 군중이 향하는 곳을 무조건 좇아간다고 해서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리는 만무하다. 따라서 중간 어디쯤에 있는 정답을 찾기 위해서는 언제나 그랬듯이 스스로 확인하고 찾아보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소문이나 암시를 접했을 때에는 내용의 진위를 검토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새로운 기술을 더 많이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신기술로 생산된 상품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소문의 줄기가 너무 무성하거나, 지나치게 많은 우연이 개입되어 있거나, 여러 가지 모양으로 접었다 펼친 자국이 무수할 경우, 겉포장을 벗기고 나면 정작 알맹이가 하나도 없을 가능성이 높다.
3장 두려움과 공황
가끔은 두려움과 공포가 멀리서 임박해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중동의 정세가 불안해지면 석유 수급 불안정에 따른 여파가 송유관을 타고 전해지기 훨씬 전부터 미국 운전자들은 기름 값 인상에 전전긍긍한다. 금융권으로 시선을 옮겨 봐도, 투자자들의 마음속에 인위적인 숫자를 정해놓고 공황의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최근에 닷컴 시장이 무너진 것은 2000으로 정해놓은 나스닥지수 때문이었다. 두려움과 공황은 이 기준에 도달하기 전에는 대체로 잠재해 있다. 그러다 그 선에 이르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두려움은 우리의 면역체계를 약화시키는 바이러스와 같다. 선동을 일삼는 정치인들에게 두려움은 더 없이 좋은 자양분이 된다. 선동가들은 사람들의 불안을 사실화하고, 그 불안의 원인이나 장본인을 제시하여 그렇게 모인 감정을 악용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거짓이나 과장된 비난이 일시적인 군중의 흥분을 자극해서 무고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 적이 많다. 즉 집단 히스테리가 마녀사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대개는 전시상황, 심각한 경제난, 또는 이런 것들의 발생에 대한 위기감 속에 뿌리를 내린다. 불안은 이런 움직임이 열매를 맺게 하는 비옥한 토양이다.
붕괴의 역학
군중의 와해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할인점에의 ‘세일’ 안내방송은 조금 전까지 차분하던 무리를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는 쇼핑객으로 만들고, 출근 시간의 지하철 승강장은 먼저 올라타려는 사람들로 뒤범벅이 된다. 증권거래소 시장에 매수나 매도공황이 번지면 주문과정으로 북새통을 이룬다. 군중속의 개인은 평소에는 순서를 지키다가도 한 사람이 줄에서 빠져나와 독단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면 금세 따라하면서 혼란을 가중시킨다.
두려움과 공황에 사로잡혔을 때 일신을 보호할 것인가, 상황을 악화시킬 것인가는 철저히 개인적인 문제이다. 위기에 처했을 때 최선의 대응은 공공의 행복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다. 위기상황에서 ‘최대다수의 최대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초등학교 때 배운 대로 한 줄로 질서 있게 빠져나가야 한다. 그러나 극장 화재나 비행기 사고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다른 사람이 밟히건 말건 의자를 뛰어넘고, 질서를 무시한 채 문을 향해 돌진한 사람의 생존율이 가장 높았다.
모든 사람이 정신을 잃을 때 제정신을 유지하는 법
모든 변수를 감안한다면 천운도 도움이 되겠지만 아수라장 속에서 최대한 안전하게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즉흥적인 반응을 억누르고 침착함을 유지해야 한다. 이는 말이 쉽지 실제로는 어려운 일이다. 요가의 호흡법 같은 것은 혈압을 낮추고 신경안정 요소가 작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 다음 현재의 상황을 분석한다. 다른 출구는 없는지,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게 더 낫지 않은지를 생각한다.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무릎을 가슴에 붙이고 양팔로 싸안는 자세를 하면 하나의 작은 캡슐이 되어 사람들의 발에 밟힐 염려가 없다. 심리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군중에게서 분리시킬수록 자신의 판단을 견지할 수 있다. 두려움과 공황이 사방에서 엄습해올 때 우리 내부에는 방향타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방향감각을 빌려 남을 좇아가기 보다는 자신을 기준으로 사안의 경중을 판단하는 것이 생존의 충분조건이 되기도 한다.
4장 폭력과 자경단원
우리는 존경받는 위인을 닮으려 한다고 생각하길 좋아한다. 솔로몬의 지혜, 테레사 수녀의 자비, 간디의 인내. 그러나 개인적인 바람과 기준은 집단사고로 대체된다. 군중은 본질적으로 이런 숭고한 목적을 훼손하는 경향이 있다. 군중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자극/반응이다. 폭동이라는 뜻의 영어단어 riot는 고대 프랑스어 riote에서 유래되었는데, 그 말의 어원은 ‘고함치다, 소리지르다’라는 단어 ruire로 이어진다. 군중과 폭동은 그렇게 연결된다. 사람들이 모이면 말다툼을 벌이거나 시비에 연루되고, 말다툼은 고함이 섞인 언쟁으로, 그리고 그것은 다시 폭력으로 변해간다.
볼록렌즈를 통과하면서 한 점에 모이는 햇빛처럼 분노도 집중될수록 더 큰 파괴력을 갖는다. 구체적인 대상에 초점을 모을 경우 분노는 이글거리는 불길로 터져 나온다. 군중 속에서 개인은 정체성을 상실한다. 익명이라는 가면을 쓸 때 우리는 전혀 다른 누군가가 되기 쉽다. 자경단원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역사에 기록한 사람들은 미국 서부의 작은 국경 초소에서 치안을 보완하거나, 아예 대체할 목적으로 조직된 자율 방범단원들이었다. 종종 무법천지가 되곤 했던 서부에서는 시민방범대의 동원에 대해 그런대로 타당한 논리가 있었다. 하지만 법의 열쇠꾸러미를 군중에게 건네줄 때는 늘 이성의 자리에 감정을, 증거의 자리에 소문을, 그리고 정의의 자리에 복수를 앉히게 될 위험의 소지가 엄존한다. 이 사람에겐 자경단원이지만 저 사람에겐 KKK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방인 희생양
가끔은 다른 업계에서 저지른 잘못 때문에 애꿎은 기업이 판매나 주가에서 죄 값을 치를 때도 있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경제적,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고해성사를 강요당하는 정치인이나 CEO들이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소수민족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행위에 대해 군중은 개인보다 죄의식을 덜 느끼는 방법이 된다. 마크 트웨인은 “군중은 타고난 용기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다수라는 집단에서, 앞장선 자의 용기로 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출신의 유대인 레오 프랭크는 1913년 애틀랜타로 가서 연필공장을 운영했다. 그런데 그의 공장에서 일하던 매리 페이건이라는 14살짜리 소녀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프랭크는 법정에서 유죄를 인정받게 되고 교수형을 선고받았지만, 조지아 주지사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형량이 감해졌다. 이 사건은 범죄의 성격과 감형에 따른 논란으로 미국 전역에서 관심을 끌었다. 2년 후인 1915년 8월, 사망한 ‘메리 페이건의 기사’라고 밝힌 25명의 무장한 남자들이 조지아 주립교도소의 전화선을 끊고 안으로 난입하여 프랭크를 데려갔다. 다음날 아침, 메리 페이건의 고향집 근처에서 그들은 레오 프랭크의 목에 올가미를 씌웠다.
남부 백인들은 토박이와 무단침입자를 가르고 본능에 가까운 텃세를 했다. 이민자와 비신교도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꼈던 그들에게 유대인인 프랭크는 폭력의 표적이었다. 그들은 프랭크를 메리 페이건 같은 어린 여자 직공을 착취하는 자본가로 만들었다. 또한 프랭크가 어린 여자 아이를 강간하고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프랭크는 즉결재판을 받았고 살인혐의까지 뒤집어썼다. 프랭크의 죽음을 낳은 마지막 촉매제는 계급 갈등이었다.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프랭크 구명 운동이 조지아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주지사의 사면에는 뇌물이 오갔을 것이라는 반감을 사게 된 것이었다. 더구나 이를 보도한 언론의 태도 역시 사법부와 부패한 정치인들에 대한 우려를 심화시켰다. 다수의 남부 백인들은 프랭크를 처단한 것을 정의를 실현한 것으로 정당화했다.
모든 사람이 정신을 잃을 때 제정신을 유지하는 법
군중에 합류할 때의 고귀한 목적, 즉 환경을 보호하고, 시민과 인권을 지키고, 불의에 항거하고자 했던 목적들이 어느새 우리 이웃의 자녀일 수도 있는 경찰이나 방위대와 격렬한 대치 속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은 직면한 순간의 감정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적인 판단을 감정에 내주지 않기 위해서는 눈앞에 놓인 현실에 대해 자기의 생각을 주장만할 게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이려는 자신의 동기를 실사해야 한다. 지금 누군가에게 하고 있는 비난이 감정에 휩쓸린 비난이 아닌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폭도의 법칙이 확산되고 정상적인 시민정신이 도외시되면 군중은 그 어떤 방향으로도 선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치의 정예요원 8명이 미국 기간시설물을 파괴하기 위해 동부 해안에 잠입했다가 체포되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비공개 군사재판을 지시했고,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출신인 ‘케네스 로얄’이 독일 요원들의 변호를 맡게 되었다. 로얄은 그들이 아무리 적이라 해도 인권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 문제를 대법원까지 끌고 갔다. 그러나 로얄은 결국 재판에서 패하고 말았고 나치 요원들은 비밀리에 형을 선고받았다. 8명 중 6명은 로얄이 선고사실을 알기도 전에 처형되었다.
당시 신문은 시대의 감정적 조류를 무시하고 원칙만을 내세운다는 이유로 로얄을 ‘시끄럽게 떠드는 당나귀’에 비유하고 조롱했다. 방송에서도 가혹하고 모질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궁극적인 승리는 감정이 아니라 원칙에 돌아갔다. 로얄은 불명예의 수렁에 빠지기는커녕 얼마 후, 육군준장이 되었고 곧이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해리 트루먼에 의해 국방성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케네스 로얄은 시대의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의 감정이 앞장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비밀재판을 주도한 그 법정이 언젠가는 자신도 그렇게 불러 세울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5장 지도자와 추종자
랠프 월도 에머슨은 ‘자조의 정신 self-relience'이라는 글에서 “세상의 의견을 좇아서 사는 것은 쉽다. 자신만의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쉽다. 하지만 군중의 무리 속에서도 고독한 독립이 주는 완벽한 달콤함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위대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개인주의자들은 세대를 거듭해가며 이 말에서 용기를 얻었다. 평화주의자들은 전시에도 대중의 정서에 흔들리지 않고 전쟁에 반대하는 소명을 가졌고, 히피족들과 같은 반체제 문화주의자들은 관습을 무시할 자유를 누렸다. 하지만 인간은 어울려 가는 것을 좋아하고 우리를 이끌어줄 대장을 원한다.
마케팅 담당자들은 이 같은 추종 본능을 적극 활용한다. 그들이 어떤 시장을 목표로 삼았다면 시장 한복판이 아닌 소수의 대상을 출발점으로 신상품의 타깃을 맞춘다. 소위 얼리어답터라고 불리는 조기 수용자 집단이 새로운 유행을 정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그 경향을 추종하기 때문이다. 10대 의류제품의 경우에는 대도시 중심부의 저소득층을 우선 공략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판매량은 많지 않겠지만 누추한 뒷골목에서 입는 옷이 래퍼의 어깨에 걸쳐질 가능성이 있고, 래퍼들의 모습은 TV전파를 타게 된다. 대중매체의 힘은 실로 대단해서, 돈을 쥐어줘도 가지 않을 할렘의 취향이 중산층 아이들의 소비 욕구를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유명한 금융 재벌가인 나탄 로스차일드(Nathan Rothschild)는 1815년 워털루 전쟁의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영국과 프러시아 연합군을 물리친다면 영국의 채권은 폭락할 게 분명하고, 영국이 승리를 거둔다면 그 반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서구라는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런던의 모든 사람들보다 하루 먼저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영국이 패배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듯 채권을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투자계의 대장 늑대가 장을 빠져나가려 하자 다른 투자자들이 그 뒤를 따랐고, 공황은 확산되었다. 그렇게 가격이 바닥을 치자 로스차일드는 대리인을 통해 다시 채권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미식축구로 예를 들자면 반대로 뛰는 작전을 구사한 것이었다. 그가 이때 벌어들인 100만 파운드라는 엄청난 수익은 모두 지도자 - 추종자라는 관계의 역학에서 탄생했다.」
선동가와 지도자
킹 목사는 인간의 무리본능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문제는 극단주의자가 되느냐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극단주의자가 되느냐이다. 다시 말해서 ‘증오의 극단주의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사랑의 극단주의자가 될 것인가?’이다. 이는 지도자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서 어느 쪽을 고취시키려 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존 F. 케네디가 취임사에서 “조국이 그대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그대가 조국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생각하라”고 한 말 한마디로 인해 평화봉사단을 비롯한 많은 것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지도자에 반해 선동가들은 군중이 잠재된 능력보다 열악한 존재가 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군중이라는 익명성 속에 묻히면 도덕의 나침반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다수의 감정을 어떤 표적에 집중시켜서 감정적인 정의를 요구하는 함성이 들끓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누군가를 적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착취하는 자본가, 이웃 나라, 다른 인종이나 종교집단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선동가들을 번성할 수 있게 하는 토양은 잔뜩 끓고 있지만 지향점을 찾지 못한 군중인 것이다.
히틀러는 유대인에게 악마의 이미지를 덮어씌우고 국가 전체를 자신이 조종하는 폭도로 만들었다. 그가 이용한 발판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처했던 경제적 어려움이었다. 히틀러는 소문과 암시를 이용해서 두려움과 공황심리를 흔들어 깨웠다. 광란에 휩싸인 군중은 가축 떼처럼 언제 어느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할 지 알 수 없다. 이런 군중에게 적대 세력을 만들어 주면 두려움과 공황은 저절로 폭력과 자경주의로 표출된다.
군중의 일원으로 서 있을 때 앞서 이끄는 사람이 선동가인지, 아니면 진정한 지도자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내용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지금 저들은 도시를 세우고자 말하는가, 아니면 부수자고 말하는가? 광야를 개척하자고 말하는가, 아니면 광야로부터 누군가를 쫓아내자고 말하는가’를 생각해 보고, 군중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어머니, 또는 정말로 존경하는 어른이 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비폭력의 힘
지도자가 자신을 추종하는 군중에게 요구할 수 있는 희생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아마도 자기방어 본능의 포기일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의 식민통치자들을 상대로 비폭력 시민저항운동을 전개할 때 설파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1930년 5월 간디의 추종자 2,500여 명은 영국의 소금세 부과에 항의하기 위해 다르사나에 있는 소금 저장고로 행진했다. 당시 간디는 감옥에 투옥된 상태였다. 간디는 영국이 독점권을 갖고 있는 소금을 직접 만들었다는 죄로 체포되었다. 이날의 상황은 그날의 현장을 지켜보았던 웹 밀러(Webb Miller)에 의해 <뉴프리먼>에 실렸다.
「소금 저장고 주변에는 웅덩이를 파서 물을 채웠고, 수라트 현지 경찰 400명은 가장자리에 쇠를 댄 라티스라는 1.5미터짜리 곤봉을 들고 있었다. 간디의 추종자들은 방책 90미터 앞에서 행진을 멈췄다. 그리고 맨 앞줄이 앞으로 나가 웅덩이를 건너 가시철망이 둘러쳐진 방책을 향해 나아갔다. 방책 앞에 버티고 선 경찰들은 간디의 추종행렬에 대해 ‘5명 이상이 한 장소에 모이는 것을 금한다’는 최근에 급조된 법규를 근거로 해산을 명령했다.
그러나 첫 번째 줄의 행렬은 행진을 계속했다. 그러자 수십 명의 현지인 경찰들이 간디의 추종자 행렬에 덤벼들어 쇠심을 박은 몽둥이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들은 피하지도 않고 볼링 핀처럼 쓰러졌다. 불과 2~3분 만에 두개골 파열이나 뼈가 부러진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들로 주변은 어지러웠다. 그들의 흰옷 위엔 핏자국이 번졌다. 뒤에 있던 행렬은 마치 자신들이 당한 것처럼 고통에 신음하며 숨을 삼켰다. 그러나 그들은 매질에 쓰러질 때까지 조용히, 고집스레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다음 줄이 나서고 또 다음 줄이 나섰다. 그들에게선 항의도 없이 오로지 신음소리만 들렸다.」
간디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비폭력 저항으로 영국의 지배를 종식시키자고 당부했다. 간디의 추종자들은 간디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인도는 독립을 쟁취했다. 이는 긍정적인 목적을 추구한 군중 광기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다. 개인에게 전혀 이익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방향으로 군중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바로 감정이다. 간디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성적인 행동으로는 할 수없는 군중의 행동으로 독립을 쟁취한 것이다.
조금 아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 어느 똑똑한 파리 이야기
원하지 않는 곳으로 이끌려가기엔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군중이 솔깃해 하는 것이면 뭐든지 부하뇌동하는 헛똑똑이들도 있다. 문제가 주식이든, 정치이든, 아니면 특정계층에 대한 비난이든 언제나 신중하고 단오하게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내가 지금 어디로 끌려가고 있는 것인가? <우리시대의 우화 Fables for Our time>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느 낡은 집에 커다란 거미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이 거미는 아주 아름다운 거미집을 지어놓고 지나가는 파리들을 잡아먹었다. 거미는 파리가 걸려들면 재빨리 파리를 삼켰다. 그래야만 다른 파리가 ‘참 평화롭고 조용한 곳’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파리 한 마리가 거미집 주변에서 붕붕거리기만 하고 좀처럼 내려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거미가 나가서 말을 걸었다. “어서 내려와서 좀 쉬었다 가.” 그 파리는 제법 똑똑한 파리였다. “나는 다른 파리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는 절대로 앉지 않아. 너희 집엔 파리가 한 마리도 없잖아”라고 대답하고 붕 날아갔다. 똑똑한 파리는 다른 파리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발견했다. 파리들은 춤까지 추고 있었다. 파리는 그곳에 얼른 내려앉았다. 하지만 더 이상 날 수 없었다. 끈끈이에 달라붙은 것이었다.」
군중의 진실 : 어리석은 군중이 역사를 만든다
군중심리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는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였던 구스타브 르봉의 선구적인 저작 『군중심리학』에 근거하는 바가 크다. 지도자와 추종자의 관계에 대한 그의 고찰은 시대를 뛰어넘는 가치를 지닌다. 그는 군중심리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특정한 상황이 주어지면 생겨나는 군중은 이전의 각기 다른 개인적 성격과는 다른 매우 새로운 성격을 지니게 된다. 이들은 ‘정신적 일체화라는 군중의 법칙’을 따르게 되고 지적 성향과 개성이 약화된다. 이질성은 동질성에 묻히고, 지혜가 아닌 어리석음이 모여 쌓이게 된다. 조정자의 암시에 순종하고 최면에 걸린 사람들과 같이 행동한다. 즉흥성․폭력성 등 원시인의 열정과 의협심을 갖게 된다.”
“군중은 단절된 개인들에 비해 지적인 면에서는 열등하지만 감정의 강화로 인해 영웅적인 행동을 할 때도 있다.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신념과 이념의 승리를 위해 달려가기도 한다. 십자군 때 식량이나 무기도 없이 이단자의 수중에서 그리스도의 무덤을 옮겨오거나, 식민지 국민들이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총칼 앞에 나선 것은 단절된 개인이 아닌 군중의 힘이다. 이런 의협심은 다소 무의식적인 경향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역사를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군중의 의협심이다.”
모든 사람이 정신을 잃을 때 제정신을 유지하는 법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를테면 모든 사람이 왕이라고 하지만 모두 평등한 것은 아니다. 어떤 조직이든 지도자와 추종자가 있고 대개 피라미드 형태를 갖는다. 문제는 앞서나가야 하는 상황, 또는 뒤에서 좇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맡은 책임을 어떻게 잘 완수하느냐 이다. 각각의 역할에서 유념해야 할 몇 가지 규칙을 살펴보자.
뒤에서 좇아갈 때 : 권위에 의문을 제기한다.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정당하거나, 고귀한 동기를 지녔을 수는 없다. 만약 아니라면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경청할 수 있는 지도자라면 더 나은 조직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엉뚱한 행렬에 섞여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책임자의 입장이 되어본다. 책임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분석해보면 원근 감각이 향상된다.
타성을 경계하는 것도 중요하다. 주변인들이 앞으로 밀려나갈 때 뒤꿈치를 더욱 단단하게 땅에 박고 그 상황을 따져봐야 한다. 이 투자를 하는 것, 이 집회에 참석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내린 결정인가? 아니면 군중에게서 얻은 만용의 결과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군중 속에서 이성은 사라지는 경향이 있지만 직감은 우리를 떠나는 법이 없다. 어떤 행동이든 논리적으로 합당하고, 가슴 깊은 곳에서 옳다는 느낌이 들어야 한다.
앞에서 이끌 때 : 반발에 관대하라. 물론 전적으로 허용하라는 것은 아니다. 좋은 아이디어들이 올라올 수 있도록 언로를 터주라는 얘기다. 예스맨들로 둘러싸인 지도자는 한 가지 대답밖에 듣지 못한다. 또한 겸손해야 한다. 지도자는 아랫사람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는 만큼 군중이 부여한 책임을 받아들이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그것을 행사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아랫사람을 이끌기 위해서는 신뢰라는 토양을 다져놓았는지도 질문해봐야 한다. 신뢰는 수백 번의 작은 행동들이 모여 쌓여서 이뤄지는 것이다. 제일 큰 사무실을 차지한다고 지도자가 된 것은 아니다. 지도력은 비전을 필요로 한다. 비전을 창출하고 필요하다면 그 길을 혼자서라도 갈 수 있어야 한다.
앞서서 이끌거나 뒤에서 좇아가거나, 결국 군중의 광기는 개개인의 문제로 환원된다. 집단적인 충동을 얼마나 잘 따르고, 얼마만큼 스스로 판단하고, 다른 사람에게 선택을 맡기는 것은 어느 정도인가를 질문해봐야 한다. 휩쓸리지 않아서 기회를 놓치거나 휩쓸려서 낭패를 보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문하고, 판단력을 믿고, 결정은 차분한 속도로 내려야 한다. 이런 연습을 반복하다보면 투자시장의 돈이든, 선거에 행사하는 표이든, 크게 잘못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