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전쟁이다! (6.25전쟁 사진집) 11
Ⅵ. 장진호 전투: "후퇴라니, 말도 안 돼!"
한국에서 전투를 한지도 거의 6개월이 지났다. 처음 한국에 와서 부상 없이 아직 살아서 전투에 임하고 있는 해병대원들에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부산을 둘러싼 낙동강 방어선은 단지 악몽 같았던 기억에 불과했다. 인천 상륙은 모든 북한군 전선을 우회하여 시행되었기 때문에 공산군들은 곧 패주하여 북쪽으로 달아났거나 -혹은 항복했거나- 혹은 농부의 옷을 입고 산속 고지로 사라졌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9월 27일- 서울 국회의 연설에서 맥아더 장군의 공표에 따라 서울시는 공산군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이것은 서울을 빼앗긴 지 정확히 3개월이 된 때였다.
그러나 어떠한 공식적인 발표도 아직 시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적군에 의해 이승만 대통령이나 맥아더 장군이 저격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 중인 군인들이 국회의사당을 둘러싸고 있다는 정보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았다.
"해방" 발표가 있었던 직후의 며칠 동안에 서울에서는 많은 미군 병사들이 부상을 당했고, 또 전사 했다. 공산군들은 전투가 끝났음을 알리는 라디오방송을 듣기보다는 죽어가면서도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는데 더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투가 끝났다. 전투에서 죽지 않은 적군은 항복하거나 숨어버렸고, 나머지 적군은 방향을 돌려 그들이 왔던 북쪽으로 후퇴해갔다.
미 8군의 병사들이 즉각 그들을 추격했고, 그동안 남·북한 간의 경계였던 38선에 도달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 선을 돌파해 나아갔다. 공산군들은 저항다운 저항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들의 수도였던 평양에서조차도.
그리고, 8군의 장병들이 북진하고 있는 동안에,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창설되었던 새로운 부대인 제10군단이 배를 타고 한반도를 돌아 북동쪽 해안에 있는 원산과 홍남에 상륙했다.
이 제10군단은 7사단과 해병 제1사단, 그리고 3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 부대는 8군 사령관인 워커 장군이 아니라 맥아더 장군의 직접 지시를 받는 부대였다. 그래서 전장에는 이때 서로 분리된 두개의 이원화된 지휘체계가 존재하게 되었다.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심지어 좁은 허리 부분에서조차도- 예기치 않은 문제가 있어 그들이 철수할 때 필요한 어떤 강력한 선을 구축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없이. 그리고 임시 유엔본부가 있는 레이크 석세스(Lake Stuccess)나 뉴델리, 그리고 북경으로부터의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만주를 넘어 중국, 러시아를 포함한 전체 공산 제국으로 뻗치 나갈 수 있는 북한의 북쪽 국경인 압록강 변을 먼저 차지하려고 애쓰는 두개 사령부 사이에 전력 질주 경쟁이 시작되었다.
그 북진 경쟁 동안 -10월 하순에 최초로 그리고 11월 초에 다시- 새로운 적과의 접촉이 발생하였다. 누빈 군복을 입은 중공군 제4 야전군 병사 몇 명이 포로로 잡혀왔다. 그러나 도쿄의 유엔군사령부에서는 이들을 중국이 사기가 떨어져 분산된 북한군을 돕기 위해 파견된 부대로 간주하고 잊어버렸다.
아무도, 아마 백아더 장군까지도 분명히, 그들을 성가신 방해물 이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확실히 맥아더 장군은 정보보고나 야전 지휘관들의 보고를 통해서 압록강을 따라 만주에 배치된 많은 중공군의 위협을 알았고 또 평가했다.
그러나 인천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도박을 했다. 확실히 그는 아시아의 전쟁 역사에서 어느 장군도 전에 도전한 적 없고 이겨본 적 없는 겨울이 곧 북한을 폭풍과 함께 강타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도박을 했다. 북쪽으로 향하는 다양한 소부대 사이에 적절한 통신을 유지하거나 그들의 측방을 연결하는 고려조차도 없이 최종적으로 그는 두 개 부대를 앞으로 돌진하도록 명령했다. 맥아더 장군은 적의 저항 없이 전진하는 부대들이 압록강에 도달한 후에 그들의 위치와 진지를 공고화하면 되리라 도박을 감행한 것이었다.
그의 도박은 대참사를 빚으며 실패했다. 겨울이 북한의 산들 위에 털씩 내던져졌고, 다음엔 끊임없는 나팔 소리와 징 소리와 함께 무시무시한 새로운 적이 전진한 각 부대를 박살내기 위하여 밤에 나타났다.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한 것이었다.
이번 장(章) "Retreat, Hell !(장진호 전투: 후퇴라니. 말도 안 돼!)"의 사진들은 해병 제1사단이 그들이 재편성하고 있었던, 그리고 방향을 돌려 동해와 홍남 방향으로 후퇴하며 싸웠던 장진호 근처에서 중공군에게 공격을 받은 후에 찍은 것들이었다.
만주벌판과 멀리 시베리아 대초원으로부터 오는 북풍이 압록강과 주변의 산 도처에 얼어붙은 개울과 벌거벗은 바위들이 있는 산골짜기들에, 반짝이며 텅 빈 고원에 지금 거친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얼음으로 덮인 길을 따라 불어 내려왔다.
그 바람은 포위된 해병대원들이 알고 있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바람이었으나 그들은 그 바람을 뚫고 행군해야만 했다. 그들 해병대원의 일부가 측후방을 엄호하고, 전방에 척후를 보내 작은 접전을 벌이는 동안, 사단의 대부분 병력은 종대를 이루어 동해로 가는 길을 따라 이동했다.
10만여 명에 이르는 잘 무장되고 공격적이며 철저하게 교화된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 해병사단의 장병들은 연대들이 북쪽으로 밀리면서 얼음같이 고인 물로 가득한 호수를 사이에 두고 분산되었다.
그들을 제10군단의 나머지 부대들이 뒤따랐다. 믿을 수 없는 나흘 밤낮 동안 그들은 싸웠고, 공산군을 죽였고, 그리고 지키고, 또 싸우고, 중공군을 사살하고 또 방어했다. 이런 싸움이 덧없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은 '하가루' 라고 이름 붙여진 삭막하고 작은 마을에서 다시 합류했다.
지금은 단지 그 이유만으로 알려진 '하가루', 그리고 사실 그 장소는 해병대원들이 불도저와 탱크와 동력삽과 맨손으로 눈과 얼어붙은 땅을 사흘 만에 활주로로 만든 곳이었다.
동상에 걸리고 부상을 당하고 전사한 2,000명 이상의 동료들을 후송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동안 해병대원들은 압도적인 수적 우세를 점한 중공군에 의해 포위된 상태에서 계속 싸웠다.
그리고 항공기들이 피해자들을 수송하기 위해 왔을 때, 그리고 조종사들이 지상에 있는 해병대원들에게 전 세계가 그들의 후퇴를 지켜보고 있다고 얘기했을 때, 그들은 분개하여 욕을 했다.
해병대원들에게 후퇴란 절대 없다! 그들의 지휘관인 올리버 프린스 스미스 소장은 그것을 보다 분명하고 정확하게 표현했다. 몹시 추운 대피소에서 격식을 차리지 않고 앉아서, 가끔 그의 숟가락으로 그것들이 녹았는지 찔러 보았던 햄버거 통조림을 데우면서 중공군의 전술은 제10군단의 전방에서 약점을 드러낸 쇼인 것처럼 말했고, 압록강 쪽으로 그들을 밀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같은 시간에 엄청난 병력의 다른 중공군 부대가 밤을 틈타 측방으로 멀리 우회하여 전진하고 있는 해병대를 뒤로 에워쌌다. 한번 포위하자마자 노상 장애물을 설치하면서 중공군들은 해병부대들을 다른 모든 지원과 물자공급으로부터 완전히 차단하려고 했고, 그런 다음 그들 모두를 전멸시키려 했다.
그것은 거의 모든 해병연대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싸웠고, 방어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들이 가진 화기와 병력을 재편성하는 데 성공했고, 침착한 지휘 아래
아직 그들이 동해와 그들 사이에 세워진 인의 장벽을 뚫고 그들의 길을 갈 수 있다고 확신할 만한 사나운 해병대 사단으로 거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