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경찰의 반민특위 습격
1949년 4월 눈엣가시와 같았던 국회 소장파 의원들이 이른파 ‘프락치사건’으로 구속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남아 있는 소장파 의원들은 언제 저승사자의 손길이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불안에 떨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반민특위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부의 비협조와 “특위는 빨갱이가 움직인다”라는 따위의 각종 음해에 시달려온 특위요원들은 신변위협에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김상덕은 사면초가의 위기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국회의장 신익희 등과 대책을 숙의했지만, 이승만의 광기에 대처할 뾰족한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반민자 공판이 진행되고 있을 때 친일세력은 3.1운동의 성지 탑골공원과 반민특위 본부에까지 몰려와서 특위의 해체를 주장하고 반민특위를 빨갱이 집단이라고 고래고래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심지어 6월 2일에는 친일세력의 사주를 받은 유령단체들이 국회 앞에 몰려와 특위요원들을 온갖 욕설로 헐뜯고 체포된 반민자들의 석방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반민특위는 6월 3일 시위자들이 특위본부를 습격한다는 정보를 듣고 경찰에 경비를 의뢰했지만 경찰은 이를 외면하였다. 경찰의 방치 속에서 동원된 시위대는 특위본부를 포위하고 사무실까지 습격할 기세를 보였다.
특위 특경대들이 공포를 쏘면서 간신히 데모대를 해산시키려 하자 그제서야 경찰이 나타났다. 특위 특경대는 시경 사찰과장 최운하가 6·3반민특위활동 저지 데모의 주동자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그를 구속한 데 이어 선동자 20여 명을 연행하였다.
최운하가 구속되자 각 경찰서의 사찰경찰 150여 명이 집단 사표를 내는 소동을 벌였다.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반민특위가 크게 위축된 상태에서 사찰경찰의 집단사퇴가 이루어진 것이다. 특위활동을 제약시키고 이에 대항하려는 친일경찰의 조직적인 계략이었다.
서울시경 산하 전사법경찰이 반민특위 특경대해산 등을 요구하며 집단사직서를 내놓고 있을 때인 6월 5일, 중부서장 윤기병, 종로서장 윤명운, 치안국 보안과장 이계무 등은 “실력으로 반민특위 특경대를 해산하자”는 데 뜻을 같이하고 음모를 꾸몄다.
이들은 밤늦게 시경국장 김태선에게 자신들의 계획을 전하고 내무차관 장경근의 지지를 얻어냈다.
장경근은 “앞으로 발생할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질 터니 특경대를 무장해제시켜라, 웃어른께서도 말씀이 계셨다”라고 이승만의 사전양해가 있었음을 암시하였다.3)
6월 6일 심야에 내무차관 장경근의 지지와 ‘윗어른’의 양해를 받은 이들은 반민특위 습격의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짰다. 행동책임자는 반민특위의 관할서장인 중부서장 윤기병이 맡기로 하였다. 윤기병은 새벽 일찍 중부경찰서 뒷마당에 전서원을 비상소집하여 차출한 서원 40명을 2대의 드리쿼터에 태워 중구 남대문로의 특위본부로 출동시켰다.
윤기병이 직접 지휘한 습격대는 특위본부 뒷골목(현 한전빌딩)에 도착하여 20명은 주변경계에, 나머지 반은 정문과 비상구, 각층 사무실에 배치되었다. 윤기병은 장탄한 권총을 꺼내들고 오전 8시경에 출근하는 특위직원들을 모조리 붙잡아 드리쿼터에 싣도록 명령하였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검찰관 차장 노일환 의원과 검찰관 서용길 의원도 이들에 의해 무장해제 되었다. 뒤늦게 출근하다 사태를 목견한 김상덕 위원장과 김상돈 부위원장이 “국립경찰이 불법으로 헌법기관인 특위를 강점하고 직원을 불법체포하니 이게 무슨 행패냐”고 분노를 터뜨렸으나 경찰은 들은 체도 아니했다. 특위사무실의 점거사실을 전해들은 검찰총장 겸 특별검찰관인 권승렬이 현장에 달려왔지만 오히려 경찰에 의해 몸수색을 당하고 출입조차 저지되었다.
그것은 제대로의 정신을 가지고는 바라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피가 역류하고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자신을 의식했다.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임정 문화부장)은 넋빠진 사람처럼 초점없는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부위원장 김상돈(서울시 초대 민선시장, 60년대 미국이민, 반정부운동으로 일관하다 86년 작고) 씨는 책상을 치며 통곡을 하고 있었다.
기마경찰관들이 일정 때 제일은행이었던 반민특위 청사를 삼엄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청
사 안으로 들어간 정.사복 경관들은 자리에 앉아 있는 반민특위 조사관들을 때로는 밀쳐내고, 때로는 발길질을 하면서 서랍 속의 서류에서 책상 위의 서류까지를 찢어 버리거나 보자기에 싸는 등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1949년 6월 6일의 일이다. 경찰은 반민특위 직원의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법에 따라 휴대했던 호신용 권총 등 무기와 서류, 통신기, 기타의 장비를 압수하고 직원 35명을 강제로 연행, 수감(검거)했다. 이날 오전 9시쯤에 이르기까지 약 1시간 동안 백주에 벌어진 무법·불법의 난동이었고 만행이었다.4)
당일 국립경찰의 반민특위 습격 현장에서 직접 당하면서 사태를 지켜봤던 이원용의 생생한 증언이다. 친일파가 중심이 된 경찰은 백주에 헌법에 근거하여 특별법으로 구성된 국가기관인 반민특위를 폭력으로 짓밟고 직원들을 구타하면서 서류를 찢거나 탈취해갔다.
다음은 경찰이 반민특위를 짓밟은 현장을 지켜본 취재기자의 증언이다.
1949년 6월 6일 내가 목격한 반민특위에 대한 경찰의 행동은 바로 쿠데타 그것이었다.
이들은 반민특위 특별검찰과장을 겸하고 있던 검찰총장 권승렬 씨로부터도 권총을 압수했다.
“이놈들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예, 검찰총장이십니다.”
“그러한데 나에게 그런 불손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느냐?”
“상부의 지시라서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너희들의 최고 상부가 내가 아니냐? 내가 언제 하늘이 두려운 줄 모르는 이런 불법 행동을 하라고 지시했더냐?”
그래도 경찰들은 막무가내로 권 총장의 권총을 압수해 갔다.5)
현직 검찰총장의 휴대용 권총까지 빼앗는 경찰의 무지막지한 행동은 법질서나 위계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만행이었다. 그들은 ‘상부의 지시’를 불법의 이유로 댔다. 검찰총장의 상부는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의 배경은 이승만이 직접 김상덕이 거처하는 관사를 두 차례나 찾아와 회유를 하였지만 여의치 않자 물리력을 동원하기에 이르렀던 것 같다.
반민특위 습격은 이승만 지시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은 국회로 비화되어 이날 오후 열린 제13차 본회의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국회내무치안위원장 라용균 의원은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만난 사실을 보고하면서 “특경대 무장해제는 국무회의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이 친히 명령한 것”이라는 대통령의 전언을 공개하였다.
특위습격사건이 이승만의 직접 명령이라는 발표에 의원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여기에다 사건 경위보고에 나선 장경근이 “특경대는 내무부가 인정한 국가경찰관이 아닌데도 특위가 임의로 임명하여 경찰관 호칭을 사용, 신분증명서까지 소지하고 경찰관 임무를 불법적으로 행사했다”고 전제, “내무부가 누차 그 경찰관 임무를 불법적으로 행사했다.”고 말하고, “내무부가 누차 그 불법성을 지적, 해산을 종용했으나 특경대의 경찰권 행사가 더욱 늘어나 부득이 강제해산시켰다”고 변명하였다. 이 발언이 의원들의 격앙된 분위기에 불을 질렀다.
격앙된 김상덕은 “특경대는 작년 10월 윤치영 전내무장관과 협의하여 설립된 것인데 불법 운운하니 말도 안 된다. 권총은 없어도 법관은 법관이 아닌가. 반민자는 권총에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민족정기에 잡히는 것이다”라고 일갈하였다. 그러나 장경근은 소신을 조금도 굽힘없이 “경찰관은 협약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정식발령이 있어야 한다. 또 무기의 회수는 발사를 방지하기 위해 취해진 예방조치였다”고 맞섰다.6)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과 이에 대한 대통령 이승만의 태도 그리고 내무장관과 차관의 오만무례한 언동을 지켜보면서 김상덕은 이튿날인 6월 7일 특위 활동이 더 이상 어렵다고 판단하고, 국회의장에게 특위위원장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뒤이어 오기열·조규갑·김경배·이종순 등 특위위원들도 사퇴서를 제출하고 특별검찰관들도 사퇴하여, 반민특위의 활동이 사실상 마비되었다. 특경대의 활동도 마비되어 친일파의 체포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반민특위 간부들의 일괄사퇴서를 받은 국회는 새로운 후임 위원을 선출하여 김상덕은 조국남·조규갑 의원과 함께 특위위원으로 재선출 되었으나 재차 사임하였다.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에 놀란 국회는 다음날 내각총사퇴와 압수한 반민특위의 무기와 문서의 원상회복, 내무차관과 치안국장의 파면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상정, 찬성 89, 반대 59로 통과시켜서 분노의 일단을 표시하고, 정치적인 수습 방안을 모색하였다.
협상결과 특위가 구속한 최운하·조응선 등 친일경찰과 연행된 특경대원들을 교환 석방키로 하였다. 석방된 특경대원 중 부상자 22명은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였다. 참으로 어이없는 ‘협상’으로 상징적인 친일경찰이 석방되고 반민특위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제2차 국회프락치사건까지 발생하여 국회부의장 김약수와 반민법 제정에 앞장섰던 노일환 의원 등이 체포됨으로써 특위활동이 위축될 대로 위축되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곽상훈 의원에 의해 반민법 공소시효를 단축하자는 개정안이 국회에 제안되었다.
반민특위 검찰관인 곽상훈은 반민특위의 활동이 여러가지 요인으로 지지부진하니 반민법 제29조 중 공소시효를 1949년 8월 31일까지로 단축토록 하자는 개정안을 내놓았다. 곽상훈은 “반민특위의 모든 공소시효를 중단해도 좋을 만큼 업무수행을 거의 끝냈다”고 엉뚱한 이유를 댔다. 1950년 6월 20일로 규정된 시효기간을 크게 단축시킨 내용이었다. 이 개정안은 표결에 부쳐져 74대 9로 쉽게 가결되었다.
후임 반민특위 위원장에는 법무장관 시절부터 반민법의 모순을 지적하며 반민특위활동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겨온 이인이 맡게 되었다. 이인은 특위직원을 새로 임명하고 결원된 특별검찰관 및 재판관들을 보강하여 7월부터 잔무처리에 들어갔지만 특위는 이미 사양길에 들어섰다.
역대 육군참모총장의 일제시대 경력을 살펴보면
건국이래 21대까지 모두 일본군 장교출신이다
결국 해방 이 후 대부분의 부일 경력자들은
우리사회 지배층을 형성했다
이런 상황 아래서 친일파 청산이 이루어지기는
불가능했다
안철수가 이승만과 박정희에 참배했다!| ←더 자세한건 여기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