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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대원성
임제록 강좌.
무비스님 - 불교는 쉽다. 6강 - 2 (2009. 06. 17)
13-9 人生無常(인생무상)
道流(도류)야 儞莫認著箇夢幻伴子(이막인착개몽환반자)하라.
遲晩中間(지만중간)에 便歸無常(변귀무상)하나니
儞向此世界中(이향차세계중)하야
覓箇什麽物作解脫(멱개십마물작해탈)고?
覓取一口飯喫(멱취일구반긱)하고 補毳過時(보취과시)하야,
且要訪尋知識(차요방심지식)이요 莫因循逐樂(막인순축낙)하라.
光陰可惜(광음가석)이니 念念無常(염염무상)하야
麤則被地水火風(추즉피지수화풍)이요
細則被生住異滅四相所逼(세즉피생주이멸사상소핍)이니라.
道流(도류)야 今時(금시)에
且要識取四種無相境(차요식취사종무상경)하야
免被境擺撲(면피경파박)이어다.
道流야 그대들은 儞莫認著箇夢幻伴子(이막인착개몽환반자)하라.
오인 하지 말라. 認箇夢幻伴子를, 꿈과 같고 환영과 같은 이 몸뚱이를 오인 하지 말라. 遲晩中間(지만중간)에, 머뭇머뭇 거리는 사이에,
便歸無常(변귀무상)이여, 곧 바로 無常으로 돌아가, 곧 바로 죽고 만다 이겁니다. 儞向此世界中(이향차세계중)하야, 그대들이 이 世界中을 향해가지고
覓箇什麽物作解脫(멱개십마물작해탈)고? 무엇을 찾아서 그 무엇을 찾아가지고 해탈을 지을 것인가? 무슨 물건 찾아가지고 해탈을, 정말 자유자재한 해탈의 맛을 누릴 것인가?
공부한다고 모두들 모여가지고, 覓取一口飯喫(멱취일구반긱). 한 입에 밥이나 한 끼 어디서 찾아먹고, 또 補毳過時(보취과시). 누더기나 기우면서 세월을 보내는 도다. 총림에서 어름어름하게 세월만 보내는 그 수행자들을 보고 하는 소리입니다. 그저 한 끼 밥 얻어먹고 겨우 그저 허기 면하고 그리고 따뜻한 양지에 앉아서 누더기나 기우면서, 補毳라고 하는 것이 누더기 깁는다는 뜻입니다. 補毳過時. 누더기나 기우면서 세월을 보내는 도다.
且要(차요). 그 가운데 참으로 중요한 것은 訪尋知識(방심지식)이요, 선지식을 尋訪해요. 찾아가지고 莫因循逐樂(막인순축낙)하라. 함부로 그렁저렁,
因循은 이럭저럭 즐거움을 쫓지를 말라. 이럭저럭 그냥 세월아 가거라 하고 그렇게 세월 보낼 일이 아니다 이겁니다.
光陰可惜(광음가석)이다. 시간을 가히 아껴야한다.
念念無常(염염무상)하야, 순간순간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다가오고 있으니 그것을 크게 나눠서 이야기 하면, 麤則被地水火風(추즉피지수화풍)이요,
지ㆍ수ㆍ화ㆍ풍. 4대로 흩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당하게 되고,
細則(세즉). 세밀하게 말하자면 순간순간 어떻게요? 被生住異滅四相所逼(피생주이멸사상소핍)이니라. 생ㆍ주ㆍ이ㆍ멸ㆍ四相. 네 가지 모습으로서 핍박하는 바를 입게 된다. 끊임없이 우리 세포는 죽어가고 새로 생성하고 죽어가고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무슨 흐르는 물만이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물에 목욕하는 그 사람도 끊임없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몸이 변화하는 것은 몰랐지요? 물이 흘러가는 것만 생각하고, 이 강물에 두 번 다시 목욕을 못할 것이다. 이런 말을 했지만 사실은 목욕 안 하고 그 자리에 있어도 이 사람은 사실 알고 보면, 두 번 다시 이 사람이 아닙니다.
1분만 지나도 이미 이 사람이 아닌 사실을 현대인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생ㆍ주ㆍ이ㆍ멸이지요. 끊임없이 우리는 변해가고 있습니다.
우리 입고 있는 옷도 안 변하는 것 같지만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어요.
道流야 今時(금시)에 且要識取四種無相境(차요식취사종무상경)하야 중요한 것은 四種無相境계니 네 가지 형상 없는 경계를 識取해서 免被境擺撲(면피경파박)이어다. 저 경계의 擺撲함입음을 면할지어다. 이것은 擺撲이라는 말은 옛날 속어인데 惑亂(혹란). 말하자면 끌려다니고 팔려다니는 것을 擺撲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거기에 미혹해가지고 내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13-10 四種無相境(사종무상경)
問(문), 如何是四種無相境(여하시사종무상경)고?
師云(사운), 儞一念心疑(이일념심의)가
被地來礙(피지래애)하며 儞一念心愛(이일념심애)가
被水來溺(피수래익)하며 儞一念心瞋(이일념심진)이
被火來燒(피화내소)하며 儞一念心喜(이일념심희)가
被風來飄(피풍래표)하나니, 若能如是辨得(약능여시변득)하면
不被境轉(불피경전)하고 處處用境(처처용경)이라.
東涌西沒(동용서몰)하며 南涌北沒(남용북몰)하고
中涌邊沒(중용변몰)하며 邊涌中沒(변용중몰)하야
履水如地(이수여지)하며 履地如水(이지여수)하니라.
緣何如此(연하여차)오?
爲達四大如夢如幻故(위달사대여몽여환고)니라.
問, 如何是四種無相境(여하시사종무상경)고? 어떤 것이 四種無相境인가?
師云, 儞一念心疑(이일념심의)가, 그대들이 한 생각 마음에 의심하는 것은,
被地來礙(피지래애)며, 땅. 地ㆍ水ㆍ火ㆍ風할 때. 지수화풍을 이야기 하는데 땅의 요소에 장애함을 입는 것이고, 또 儞一念心愛(이일념심애)가 그대들이 한 생각 마음에 사랑하는 것. 애착하는 것. 저 앞에서는 의심하는 것이고, 여기는 사랑하는 마음. 被水來溺(피수래익)하며, 그것은 水來. 물의 빠뜨림을 입는 것이고, 儞一念心瞋(이일념심진)이, 그대들 한 생각 마음에 분노를 내는 것은,
被火來燒(피화내소)하며, 불의 태움을 입는 것이다. 또
儞一念心喜(이일념심희)가, 그대들이 한 생각 마음에 기뻐하는 것은,
被風來飄(피풍래표)하나니, 바람. 이것은 기쁘면 들뜨는 겁니다.
사람이 기쁘면 들뜨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람하고 연관을 시켰습니다.
바람의 나부낌을 입는 것이니, 그러니까 우리가 의심하고 사랑하고 분노하고 그 다음에, 기뻐하고 하는 이러한 평소의 4가지 어떤 마음 작용. 가장 흔히 있을 수 있는 그런 4가지 마음 작용에 그만 휘둘리고 만다 이겁니다.
若能如是辨得(약능여시변득)할 것 같으면, 만약 능히 이와 같이 가려낼 것 같으면, 不被境轉(불피경전)하고, 경계가 나를 굴려가는 것을, 나를 좌지우지하는 것에 입음을 입지 않고, 處處用境(처처용경), 곳곳에서 그 경계를 내가 능히 쓴다. 마치 조주 스님은 너희들은 하루 12시간의 굴림을 받지만, 나는 하루 12시간을 내가 능히 사용한다. 그랬어요. 그래서 120세를 사셨다 하는 그런 표현도 있지요. 使得十二時(사득십이시)라. 나는 12시간을 부린다.
우리는 하루 24시간의 부림을 당하지요. 그러나 도인은 그 24시간을 내가 부린다. 내가 쓴다. 내가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處處用境. 곳곳에서 경계를 내가 쓴다 말이야. 내가 능히 쓰는 것이지요. 그래서
東涌西沒(동용서몰)이라. 동쪽에서 솟아서 서쪽으로 빠지고,
南涌北沒(남용북몰)하고 남쪽에서 북쪽에서 빠지고,
中涌邊沒(중용변몰)하며 중간에서 솟아서 변두리에서 빠지고,
邊涌中沒(변용중몰)하야 변두리에서 솟아서 중간에서 빠져서
履水如地(이수여지)라. 물을 밟기를 땅을 밟듯이 하고,
履地如水(이지여수)하니라. 땅을 밟기를 물을 밟듯이 하느니라. 이것은 말하자면 우리가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경계에 걸리지 않는 것. 경계에 걸리지 않는 동문서답 식으로 인생을 살줄 아는 그런 능동적인 삶을 사는 그런 삶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緣何如此(연하여차)오? 무엇을 인연해서 이와 같이 되는고?
爲達四大如夢如幻故(위달사대여몽여환고)니라. 地ㆍ水ㆍ火ㆍ風 4대가, 다시 말해서 이, 우리 육신은 4대로 만들어졌고, 이 육신에 근거한 우리의 삶. 이것은 꿈과 같고, 환과 같은 줄을 통달해 알기 때문이다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까짓 것 이 몸, 따지고 보면 별 것도 아닌데 너무 몸 하나 어떻게 살려 보려고 그 체면 하나, 알량한 체면 하나 세우려고 그~ 이리 끄달리고 저리 끄달리고 그래서 우리 인생이 막 그냥 엉망진창이 되는 그런 어떤 삶을 우리가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 하나 집착 벗어나 버리면 그렇게 무슨 구차하게 5욕. 사실은 그런 온갖 곤욕을 치를 까닭도 없는 것이지요.
구차하게 살지를 않으니까, 첫째 구차하게 살지 않으니까 무슨 잘못 될 까닭이 없는 것이지요.
그 알량한 돈 몇 푼. 그것 때문에 그냥... 그래가지고 나중에 들통이 나가지고 이리 끌려다니고 세상에 체면 없고요. 그거 뭐 따지고 보면 이 몸 하나 살자고 하는 것 아닙니까? 자기가 세상에 무슨 선행하려고 봉사하고 희생하기 위해서 그런 일은 하지 않은 것 아닙니까? 요는 이 몸 하나 의식주, 먹고 입고 자고 하는 그거 하나 해결 잘 하자고 하는 겁니다. 그 일 하나 해결 하자고 하는 것이지 떤 것 아닙니다. 이미 잘 해결하고 있으면서도 그런다니까요.
이미 잘 해결하고 있으면서도... 그런데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참 그러고 보면... 한 번 그런 쪽으로 생각이 기울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거기에서 그 어떤 생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를 못해서 그래요.
그래서 자꾸 그런 방향으로만 생각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무리 있어도 부족하고, 아무리 있어도 부족하고요. 아무리 올라가도 더 높이 올라가야 되겠고, 또 올라가야 되겠고요.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13-11 그대가 살아있는 문수다.
이것이 거의 폭탄선언에 가까운 이야기인데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구절이고, 자주 인용을 합니다. 이 대목을 임제록의 절정이라고나 할까요?
道流(도류)야 儞祇今聽法者(이지금청법자)가
不是儞四大(불시이사대)로대 能用儞四大(능용이사대)하나니
若能如是見得(약능여시견득)하면
便乃去住自由(변내거주자유)니라.
約山僧見處(약산승견처)하면 勿嫌底法(물혐저법)이라.
儞若愛聖(이약애성)하면 聖者聖之名(성자성지명)이니라.
有一般學人(유일반학인)이
向五臺山裏求文殊(향오대산리구문수)하나니,
早錯了也(조착요야)라 五臺山無文殊(오대산무문수)니라.
儞欲識文殊麽(이욕식문수마)아? 祇儞目前用處(지이목전용처)가
始終不異(시종불이)하며 處處不疑(처처불의)가
此箇是活文殊(차개시활문수)니라.
儞一念心無差別光(이일염심무차별광)이
處處總是眞普賢(처처총시진보현)이요,
儞一念心自能解縛(이일념심자능해박)하야
隨處解脫(수처해탈)은 此是觀音三昩法(차시관음삼매법)이니라.
互爲主伴(호위주반)하야 出則一時出(출즉일시출)하나니
一卽三三卽一(일즉삼삼즉일))이라 如是解得(여시해득)하면
始好看敎(시호간교)니라
道流야 儞祇今聽法者(이지금청법자)가 그대들은 다만 지금에 聽法者.
법문 듣는 그 사람이, 不是儞四大(불시이사대)로대, 그대들의 사대육신이 아니야. 그런데도 능히 그대들의 사대육신을 활용을 한다. 그렇지요.
그것은 분명히 4대는 아닙니다. 4대는 아닌데 能用儞四大(능용이사대)하나니 그 사대육신을 활용을 하나니,
若能如是見得(약능여시견득)하면, 만약에 이와 같은 도리를 안다면,
便乃去住自由(변내거주자유)라. 곧 가고 옴에 있어서 자유롭다. 어디에도 걸리지 아니해. ‘아~ 진정한 나는 아 이거 사대육신이 아니구나.’ 하지만 이 사대육신을 떠나서도 물론 내가 있는 것은 아니야. 그렇다고 떠날 수 없는 것이라고 해서 이것이 전부, ‘사대육신이 전부 나다.’ 라고 이렇게 생각 하는 것도 정말 형이하학적 인간이고, 답답한 인간이고, 유물론적 인간이고, 그리되면 정말 참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사람이지요.
인간의 이 양면성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해야 됩니다.
육신만이 내가 아니고, 그렇다고 마음만도 또 내가 아니다. 그 모두를 우리가 조화롭게 잘 활용하고, 잘 이해해서 잘 활용할 때 우리가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대육신 그거. 의식주 문제 그거 하나 해결 하려고 온갖 부정부패 그 더러운 짓 다 해가면서, 마음에 그것이 찔려가면서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습관이 되면 또 태연하게도 하거든요.
요는 여기 있는 주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去住自由(거주자유)니라. 그런 것을 알면 去住自由다.
約山僧見處(약산승견처)하면 나의 견해에 의거 한다면 勿嫌底法(물혐저법)이라. 이 육신이라 하는 것도 결코 싫어할 것은 아닌 법이다.
결코 부정할 일은 아니다. 儞若愛聖(이약애성)하면, 그대들이 만약에 성인을 사랑한다면, 聖者聖之名(성자성지명)이니라. 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성인이라고 하는 이름일 뿐이다. 성인이란 성인이라는 이름일 뿐이다 이겁니다.
사람이 있을 뿐이지 무슨 성인이다 범부다 그런 차별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 그저 이름을 그렇게 지어 놨을 뿐이에요. 제가 늘 말하지요?
지금 우리가 이 말하는 그 당체라든지, 듣는 당체는 이것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그 무엇이라고 우리가 명명할 수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성인이다 범부다 그렇게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그 존재는 대단한 겁니다.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대단한 것입니다.
有一般學人(유일반학인)이 向五臺山裏求文殊(향오대산리구문수)하나니
일반학인이 오대산을 향해서 문수보살을 구한다. 오대산을 향해서 문수보살을 구해 간다 말입니다. 특히 無着文喜(무착문희)선사 같은 이들은 오대산을 향해서 저 장안에서부터 일보일배하면서 몇 년에 걸쳐서 오대산에 문수보살을 친견 하러가는 겁니다. 지금도 저기 청해성 같은데서, 사천성 같은데서 포탈라 궁전에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서 몇 년을 걸쳐서 일보일배하면서 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 순간에도 무수한 사람들이 그렇게 가고 있습니다.
早錯了也(조착요야)라. 벌써 틀린 짓이다. 五臺山無文殊(오대산무문수)니라. 오대산에는 문수보살 없다. 관음도량에는 관음보살 없다 말입니다.
법당에는 부처가 없다. 지장도량에는 지장보살이 없어. 보현도량에는 보현보살이 없다. 儞欲識文殊麽(이욕식문수마)아? 그대들은 문수보살을 알고 싶은가? 祇儞目前用處(지이목전용처). 바로 이 순간 이렇게 눈앞에서 작용하고 있는 그 당체, 그 당체. 말하면 말하는 소리 듣고 기분 나쁘면 속상하고, 우스운 이야기하면 하하하 하고 웃기도 하는 이것이야말로 시간적으로 始終不異(시종불이). 시종 다르지 아니해. 시종일관 되어있는 존재입니다.
시간적으로 始終不異입니다. 또 處處不疑(처처불의)야. 이것은 공간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어. 여기 오니까 여기 따라오고, 집에 가니 집에 따라오고, 차타니까 차타는데 따라오고, 이것이 어떻게 의심의 여지가 있습니까 이 존재에 대해서요. 處處不疑입니다. 始終不異고요. 어디 가서도 다른 물건이 아니라니까요.
어제도 그 물건이요, 오늘도 그 물건이요, 내일도 역시 그 물건입니다.
어디 가도 또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그 존재입니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바로 이 한 물건. 무위진인. 此箇是活文殊(차개시활문수)니라. 이것이야말로 진짜 살아 있는 문수보살이다. 오대산에 문수보살 없다 말입니다. 포탈라 궁전에 관세음보살 없어. 관음도량에 무슨 관음보살이 있어요? 관음도량에 무슨 삼국유사에 의상대사가 저~ 은???가서 관세음보살 친견 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종이에 기록 되어있는 문자일 뿐입니다.
설사 친견 했다한들 그것이 지금 우리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그런 역사 쪼가리에 현혹 되가지고 끔뻑 넘어가지고, 한국불교 수준이 그래가지고는 참~ 이게 암담하다니까요.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 조계종이 뭡니까? 이것이 임제 종풍을 이어 받은 종지 아닙니까?
이것이 조계종의 교정이 되어야 되는 거에요.
첫날 제가 유인물에 소개해 드렸지만, 온 사찰에 있는 큰스님들의 비석이란 비석은 모두가 ‘임제의 몇 대 손’ ‘임제의 몇 대 손’ 아 석가고 달마고 그것이 아니고, ‘임제의 몇 대 손’ 이라고 이렇게 임제 스님을 높이 숭상하고, 임제 스님의 ‘그 사상을 내가 전수 받았노라.’ 해가지고 오늘 날 이 땅에 한국불교가 존재 하는 겁니다. 바로 이 정신 때문에 임제 스님을 그렇게 높이 숭상 하는 것입니다. 야~ 참~~, 이런 말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역대 어느 조사도 이런 말 감히 못했어요. “오대산에는 문수보살 없다.” 하기야 이런 것만 자꾸 들추어내면 장사가 안 돼지요.
그런데 이것이 眞金鋪(진금포) 雜貨鋪(잡화포) 이런 말이 있어요.
진금포에는 진금만 팔아요. 잡화포에 가면 백화점처럼 온갖 것 다 팔아요. 일찍이 조사스님들도 사람들의 어떤 그 속성을 잘 샅샅이 이해를 하셔가지고, 그런 표현을 했어요. 眞金鋪ㆍ雜貨鋪. 이 조계종은 사실 진금포입니다. 순금만 파는데 입니다.
儞一念心無差別光(이일염심무차별광)이 그대들의 마음에 한 생각 차별 없는 그 마음의 빛이 處處總是眞普賢(처처총시진보현)이다. 곳곳에 있는, 어느 곳에 있든지 간에 그것은 모두가 진짜 보현보살이다.
儞一念心自能解縛(이일념심자능해박)하야. 그대들이 하는 一念心自能解縛. 스스로 능히 속박을 풀어 헤칠 줄 아는 그래서 隨處解脫(수처해탈)이다.
어느 곳에 있든지 간에 자유자재야.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지요.
여기서 속으로 앉아서 저를, 무슨 욕을 하든지 무슨 죽일 놈 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저~기 어디 미국 가 있는 친구 생각을 하든지 아무 관계없는 겁니다.
自能解縛ㆍ隨處解脫인겁니다. 그 도리는 정말 얼마나 시원스런 해탈입니까? 이 자리에서 욕을 해도 아무 상관없다니까요.
그것이야말로 此是觀音三昩法(차시관음삼매법)이다. 이것이 바로 관세음보살이야. 이것이 관음삼매법이지. 이것 말고, 이 순간 우리가 한 생각으로 이러고저러고 하는 이것 말고, 달리 무엇이 진짜성인이냐? 그것이 互爲主伴(호위주반)이야. 서로 주인도 되고 벗도 돼가면서 혼자서 그러는 겁니다. 그래가면서 出則一時出(출즉일시출)이요, ??? 일시에 그 세 성인이 다 나가, 문수ㆍ보현ㆍ관음이 한꺼번에 다 나가요. 一卽三이요 三卽一(일즉삼삼즉일))이라.
그 하나가 셋이 되기도 하고 셋이 하나가 되기도...
문수ㆍ보현ㆍ관음이 내가 되고, 내가 곧 문수ㆍ보현ㆍ관음이 되기도 하고요.
如是解得(여시해득)하면,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始好看敎(시호간교)니라.
그때야 비로소 경전을 잘 볼 수 있다. 경전을 잘 볼 수 있다.
이쯤 돼야, 안목이 이쯤 돼야 “경안이 열렸다.” 하는 겁니다.
“경안이 열렸다.” 看經者慧眼通透(간경자혜안통투). 축원할 때 이러거든요.
參禪者疑團獨露(참선자의단독로). 참선자는 의단이 독로하고, 간경자는 혜안이 통투. 이렇게 볼 줄 알아야, 지혜의 눈이거든요. 혜안이 이렇게 열려야 비로소 경전을 제대로 볼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다.
始好看敎니라. 교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다. 참 시원시원 하지요?
그런데 방편 불교를 조금은 이야기 해야지요. 관음도량에는 관세음보살이 없다. 지장도량에는 지장보살이 없다. 법당에는 부처님이 없다. ←이것은 임제 스님이야기지 제 얘기 아닙니다.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없다.”그런데 불교에는요. 일체유심조라고 해서 하늘 이야기 많이 합니다. 하늘 이야기...
저~ 33천이니 무슨 이야기 많이 하고, 있지도 아니한 뭐 성인 이름. 있지도 아니한 뭐 세계 이름 얼마나 많은지 말도 못합니다. 그것이 모두가 뭐냐? 전부 의성천이라고 그래요. 뜻 意자ㆍ이룰 成자ㆍ하늘 天자(의성천). 우리 의식이 만들어낸 하늘입니다. 의식이 만들어낸 하늘이라고요.
의식이 만들어낸 부처님입니다. 의식이 만들어낸 성인입니다.
의식이 만들어낸 보살님입니다. 의식이 만들어낸 하나님이고, 의식이 만들어낸 신입니다. 그것을 의성신ㆍ의성천ㆍ의성불ㆍ의성보살. 전부 뜻 意자ㆍ이룰 成자입니다. 그것을 붙입니다. 전부 우리 의식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환영처럼 그렇게 한 순간 존재하는 거예요. 우리 의식의 힘은 또 무섭거든요. 대단하거든요.
우리 한 생각 마음 한번 딱. 강하게 먹으면 그야말로 일체유심조라고 해서 부처도 만들어내고 보살도 만들어내고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도 자기가 만들어놓고 자기가 친견하고, 관음도량에 가서 저~기 포탈라카 산에 가서 관세음보살 자기가 만들어놓고 자기가 친견하고, 전부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의식이 그런 경지에까지 이르렀을 때는 그 사람에게는 분명히 있습니다. 분명히 있어요. 또 그 도량마다 없다고 했다가 뭐 이 이야기 듣고 쫓아오면 큰일 나니까 제가 또 이렇게 방편의 길을 열어가지고,
의성불ㆍ의성천ㆍ의성보살ㆍ의성관음ㆍ의성문수ㆍ의성보현. 다 살려놨습니다. 다 살려놨으니까 뭐 이제 허물이 없습니다. 그래 그 양면을 우리가 어디 치우치지 말고 같이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것 중요한 것이지요.
14-1 文字(문자)에 속지 말라.
師示衆云(사시중운), 如今學道人여금학도인)은
且要自信(차요자신)이요 莫向外覓(막향외멱)하라.
總上他閑塵境(총상타한진경)하야 都不辨邪正(도불변사정)하나니,
祇如有祖有佛(지여유조유불)은 皆是敎迹中事(개시교적중사)니라.
有人拈起一句子語(유인염기일구자어)하야
或隱顯中出(혹은현중출)이면 便卽疑生(변즉의생)하야
照天照地(조천조지)하야 傍家尋問(방가심문)하야
也太忙然(야태망연)이로다.
大丈夫兒(대장부아)여 莫祇麽論主論賊(막지마론주론적)하며
論是論非(논시논비)하며 論色論財(논색논재)하야,
論說閑話過日(논설한화과일)하라 山僧此間(산승차간)에는
不論僧俗(불론승속)이요.
但有來者(단유래자)하면 盡識得伊(진식득이)니
任伊向甚處出來(임이향삼처출래)나
但有聲名文句(단유성명문구)하야 皆是夢幻(개시봉환)이니라.
師示衆云(사시중운), 임제 스님께서 시중에게 이르대,
如今學道人여금학도인)은, 지금 도를 공부하는 사람은,
且要自信(차요자신)이요, 요컨대 스스로를 믿을 것이요,
莫向外覓(막향외멱)하라. 밖을 향해서 찾지 말아라. 정말 임제 스님의 이러한 정말 진실한 말씀. 방편을 전혀 가자하지 아니한 이러한 진실한 말씀이 정말 우리 마음에 뿌리 내리고, 나의 인격이 되고 나의 소신으로 확립이 되면, 정말 이 이상 더 좋을 수가 없고, 사실은 이보다 더 큰 재산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에 우리가 믿어오던, 그 동안에 막연하게 생각해오던 그런 어떤 성인과 그런 부처님과 그런 보살들에 대해서, 이것이 한쪽에서는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겁니다. 정말 버리지 못합니다.
‘아~, 내가 그렇게 생각해왔던 것인데...’정말 미련을 버리지 잘 못 버려요. 그 어려운데 이것이 자기 자신에 소신이 없어서 그래요.
여기 보세요. 참으로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믿는 것이요, 莫向外覓이다.
밖을 향해서 찾지 말라.
總上他閑塵境(총상타한진경)하야, 모두들 저 부질없는 경계를 숭상해서,
거기에 올라가가지고서 都不辨邪正(도불변사정)이라. 모두들 邪와 正을 가려내지 못한다. 祇如有祖有佛(지여유조유불)은 다만 저 조사가 있다. 부처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은 皆是敎迹中事(개시교적중사)여. 경전에 있는 말이고, 책장만 넘기면 그냥 부처가 아닙니다. 그냥 수없이 쏟아지는 것이고, 무수한 보살들이 그냥 수없이 쏟아지는 것이지요. 敎迹中事입니다. 교리 가운데 적혀있는 일일 뿐입니다. 有人拈起一句子語(유인염기일구자어)하야, 어떤 사람이 한 구절의 말을 딱 잡아매, 그래가지고 或隱顯中出(혹은현중출)이야, 야 이봐,
저~ 기 포탈라 궁전에 가면 관세음보살이 있어. 그 많은 사람들이 가서 막 그냥 절을 하고, 몇 년 몇 달이 걸려서 일보일배 하면서 찾아가고 하는데, 그것 참 알쏭달쏭 하거든요. 그럴듯하거든요. 알듯 말듯해요.
隱顯中出입니다.
隱顯中알듯 말듯하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便卽疑生(변즉의생)이라.
곧 저 스님 뭘 모르고, 임제록 잘못 인쇄된 것을 들고 와 가지고 지금 저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 便卽疑生이라. 곧 의심이 나가지고서 이런 궁리 저런 생각 다하는 겁니다. 그래 照天照地(조천조지)해.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하고,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하고 별별 궁리 다 하는 것을 照天照地라고 했습니다. 하늘을 비추고 땅을 비춘다. 온 사방으로 자기 살길 찾는 겁니다. 자기 그 동안 쌓아놓은 기존의 어떤 지식과 기존의 어떤 신앙을 어떻게 하든 살려보려고, 어떻게 하든지 살려보려고 그것을 잡고 아등바등 하는 것이지요.
照天照地(조천조지)해서 傍家尋問(방가심문). 옆집을 향해가지고서 자꾸 묻고 찾고, 묻고 찾고 하는 것. 그래서 也太忙然(야태망연)이로다. 너무 너무 바빠. 저것 잘못 됐는가 하고 이 책 찾아보고 저 책 찾아보고, 여기 가서 물어보고 저 스님한테 가서 물어보고, 이절에 가서 또 물어보고, 관음도량에 정말 관세음보살이 없습니까? 그것이 우리 의식이 만들어놓은 관세음보살입니까? 하고, 막 그냥 也太忙然입니다. 너무 너무 바삐 돌아다닙니다. 왜냐? 자기가 그 동안 구축해놓은 신앙세계가 무너지려고 하니까요. 그런데 우리 전통불교의 올곧은 정신은 바로 이 임제사상에 있다 라고 하는 것.
그전에 유인물 우리 한 번 다시 볼까요? 절마다 펼쳐져 있는 비석에 그런 임제 스님의 종풍을 숭상한다.(그렇다고 꼭 보자는 말은 아니고요. 허허허허허허) 비석마다 임제 스님의 사상을 숭상하고 임제 스님의 몇 대손이라고 하는 그런 기록들. 그것을 우리가 부정할 수가 없지 않느냐 이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하는 소리지, 저 혼자 무슨 배짱이 있다고 이런 큰 소리 하겠어요? 저는 솔직하게 이런 큰 소리 혼자는 못해요. 임제 스님 믿고 하는 소리지요.
大丈夫兒(대장부아)여대장부들이여, 莫祇麽論主論賊(막지마론주론적)하며, 祇麽 = 그렇게 주인을 논하고 적을 논하지 말며, 論是論非(논시논비).
옳고 그른 것도 논하지 말며, 論色論財(논색논재), 色과 財를 논하지도 말고,
論說閑話過日(논설한화과일)하라. 논설로서 한가하게 말하는 것으로서 세월을 보내지 말라. 山僧此間(산승차간)에는, 산승이 운영하고 있는 이 선방에는,
不論僧俗(불론승속)이고, 승속을 논하지도 아니하고,
但有來者(단유래자)하면, 만약에 누구든지 오는 사람이 있을것 같으면,
盡識得伊(진식득이)라. 그들을 알아보게 하고 그들을 알도록 해준다 말입니다.
任伊向甚處出來(임이향삼처출래)나, 그대에게 부처님과 조사들은 어떤 경에서 인용 했든지 간에 向甚處出來. 어느 곳을 향해서 이끌어 왔든지 간에 그것은 任 = 맡겨둔다 이겁니다. 임의대로 맡겨두지만, 그것은 뭡니까?
따지고 보면 어느 경전에서 인용 했든지 간에, 금으로 만들어 놓은 경에서 인용해 왔더라도 그것은 뭐라고요? 但有聲名文句(단유성명문구)야.
그것을 읽으면 그냥 소리가 나고, 그냥 그것은 이름이고 그냥 문구입니다.
문구를 읽으면 그냥 소리일 뿐입니다. 소리는 허공중에 흩어지고 마는 소리일 뿐입니다. 다만 성명 문구일 뿐이다. 皆是夢幻(개시봉환)이니라.
모두가 꿈이요, 환영이라. 이렇습니다.
우리가 너무 그런 부처님이나 보살들이나 조사라고 하는 그런 명칭에 그동안 아주 익숙하게 습득이 돼 있어 가지고는, 정말 나도 모르게 의식화 되어버렸어요. 정말 어느 종교에서 있지도 않은 하나님 믿듯이, 우리 불자들도 그동안 불교공부 많이 하면 할수록 그런 성명 문구에 의식화 되어가지고, 이것이 잘 지워지지가 않는다고요. 큰 변고가 일어나기 전에는 이것이 쉽게 지워지지가 않아요. 그래서 실컷 그냥 이뭣꼬 하고, 그냥 일구 수좌노릇을 하다가도 금방 또 정말 바쁘면 관세음보살 찾는 것이지요. 하하하 바쁘면 관세음보살...
정말 일구 수좌노릇을 당당하게 하다가도 바쁘면 관세음보살 찾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가랑비에 옷 젖듯이 하도 많이 보아왔고, 하도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러는 사이에 우리에게도 쉬이 의식화 되어서 있지도 않은 신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듯이 우리 불자들도 꼭 그와 같이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간혹 그러지요. 신을 믿듯이 불교와 부처님을 그렇게 믿지 말라 말입니다. 꼭 보면요. 이름만 달라서 그렇지, 신을 믿듯이 그렇게 믿습니다. 정말 그것은 다른 종교하고 하나도 다를 바 없어요.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말 다이아몬드를 갖다가, 다이아몬드를 갖다가 구리나 흙더미인양, 그냥 쇳덩이로 팔아먹는 그런 입장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14-2 사람에 따라 모습을 나타낸다.
却見乘境底人(각견승경저인)하니
是諸佛之玄旨(시제불지현지)라.
佛境不能自稱我是佛境(불경불능자칭아시불경)이요
還是這箇無依道人(환시자개무의도인)이
乘境出來(승경출래)니라. 若有人出來(약유인출래)하야
問我求佛(문아구불)하면 我卽應淸淨境出(아즉응청정경출)하고,
有人問我菩薩(유인문아보살)하면
我卽應慈悲境出(아즉응자비경출)하며,
有人問我菩提(유인문아보리)하면
我卽應淨妙境出(아즉응정묘경출)하고,
有人問我涅槃(유인문아열반))하면
我卽應寂靜境出(아즉응적정경출)하야
境卽萬般差別(경즉만반차별)이나 人卽不別(인즉불별)이라.
所以應物現形(소이응물현형)은 如水中月(여수중월)이니라.
却見乘境底人(각견승경저인)하니, 도리어 경계에 올라있는 사람. 경계를 타는 사람. 탈 乘자 지요? 경계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고, 경계에 올라서 마음대로 경계를 부리는 사람을 보니, 是諸佛之玄旨(시제불지현지)라.
그것이야말로 모든 부처님의 현묘한 뜻이다. 佛境(불경), 부처님의 경지는
不能自稱我是佛境(불능자칭아시불경)이요. “내가 부처의 경지.” 라고 스스로 자칭하지 아니한다. 還是這箇無依道人(환시자개무의도인). 오히려 도리어 지금 말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這箇ㆍ無依道人.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依道人이 乘境出來(승경출래)니라. 경계에 올라서 경계를 부리면서 이렇게 나타나 와 있다 말입니다.
若有人出來(약유인출래)하야, 만약 어떤 사람이 떡~ 나타나서
問我求佛(문아구불)하면, 나에게 부처 구하는 도리를 묻는다면, 그리되면 굳이 부처를 구하는 것을 나에게 요구한다면,
我卽應淸淨境出(아즉응청정경출)하고, 나는 청정한 경계에 맞추어가지고서 떡~ 나타내 보인다 이겁니다. 부처는 청정한 경지니까요.
有人問我菩薩(유인문아보살)하면, 어떤 사람이보살의 경지가 어떤 것이냐?
보살을 자꾸 궁금해 하면,
我卽應慈悲境出(아즉응자비경출)하며, 나는 곧 그 사람에 맞추어서, 자비의 경계에 맞추어서 떡~ 나타내 보인다 하는 것입니다.
아, 자비는 이런 것이고, 이런 것이 보살이다. 또
有人問我菩提(유인문아보리)하면, 나에게 보리를 묻는다면,
我卽應淨妙境出(아즉응정묘경출)하고, 淨妙境 = 보리. 도지요? 깨달음이지요? 淨妙한, 청정하고 미묘한 경계에 맞추어가지고서 떡~ 나타내 보인다.
有人問我涅槃(유인문아열반))하면, 나에게 열반이 뭡니까? 라고 물으면,
我卽應寂靜境出(아즉응적정경출)이라, 곧 寂靜境계에 응해서 나타내 보여서, 境卽은 萬般差別(경즉만반차별)이나, 경계인 즉은 만 가지로 차별하지만,
人卽不別(인즉불별)이라. 사람인 즉은 다르지 아니해. 늘 임제 그 사람이다 이겁니다. 임제 한 사람이지, 와서 묻는 사람이 무엇을 묻느냐에 따라서 내가 이렇게도 응해주고 저렇게도 응해줄 뿐이지,
所以로 應物現形(소이응물현형)은 如水中月(여수중월)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應物現形. 물건에 응해서, 사람에 맞추어서 형상을 나타내는 것은, 如水中月이니라. 잔에 물을 떠 놓으면 잔에 비치는 달이요, 저기 강릉 경포대 호수에 가보면 경포대 호수에 있는 달이고, 바다에 가보면 바다에 있는 달이듯이, 상황에 따라서 또, 상대에 따라서 이러쿵저러쿵 여러 가지로 나타내 보인다. 그런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