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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 교인과 아브라함의 믿음
갈 3:1-9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갈 3:1-10 / [율법이냐, 믿음이냐] 아,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그 누가 여러분을 속였기에 여러분이 그처럼 미혹되어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림을 그리듯 내가 그분이 왜 죽임당하셨는지 분명히 알리지 않았습니까? 2) 한 가지만 여러분에게 물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분이 여러분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오신 게 아닙니까? 3) 여러분은 아마 머리가 어떻게 돌아 버린 모양입니다.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영적인 생활로 이끌어 갈 수 없다는 것은 여러분이 처음부터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지금에 와서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려고 하니 말입니다. 4) 여러분은 복음을 지켜 나가려고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복음을 그렇게도 쉽게 내던지려고 하다니 나로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5) 다시 한 번 물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기적을 베푸신 것은 여러분이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온 마음으로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6) 아브라함도 같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ㄱ)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그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올바른 사람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ㄱ. 70인역 창15:6) 7) 여러분은 이 일만 봐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8-9) 성경은 이방인일지라도 그들이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을 미리 내다보고 기록해 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오래 전에 아브라함에게 ㄴ)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너처럼 나를 의지하는 사람에게 복을 내릴 것이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사람은 모두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ㄴ. 창12:3(참조,18:18))
사도 바울은 2장 후반부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라는 복음의 핵심을 설명했습니다(2:16). 바울은 유대인이 존중하는 인물인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계속 복음을 설명해 나갑니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1-5) 바울은 지금 몹시 격앙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교회에 들어온 율법주의자들의 논리에 속아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십자가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고 담대하게 선포된 ‘이신칭의(이신득의)’의 원리, 곧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바울은 ‘듣고 믿음으로’와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를 대조합니다. 그러면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자신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합니다. 바울의 준엄한 책망 안에는 속히 온전한 복음으로 돌아오라는 사랑의 촉구가 들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6-9)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원리는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의 시대인 아브라함 때부터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창 15:6; 롬 4:3, 22) 이 복음의 원리를 강조합니다(6).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겨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로움은 구원받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조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심으로써 받아 누리는 상태입니다. 인간은 오직 그렇다고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됩니다. 이 진리는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적용된 다는 것이 이미 계시 되었는데, 그 계시의 당사자가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율법의 행위를 따르는 할례받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이신칭의’로 함축되는 복음의 원리를 믿는 사람들이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삶을 통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역사 안에 계시하셨습니다. 역사 속에 존재할 모든 인류에게 적용될 이 복음의 원리를 듣고 믿는 사람은 아브라함과 같이 복을 받습니다.
적용: 성도의 정체성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당신은 지금 ‘이신칭의’로 함축되는 복음의 원리를 따르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살고 있습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합 3:17-18)을 열망하는 것이 곧 나의 진정한 부흥입니다.
< 설 교 >
복 있는 믿음
갈 3:9 / 강성찬 목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이를 의로 여기시고 또한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 중에도 가장 큰 복은 그를 믿음의 선조로 삼으신 것이며, 또한 그의 자손을 사막의 모래처럼 하늘의 뭇 별처럼 많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들이 하나님께 받아야 할 복 중에서도 가장 큰 복은 믿음에 믿음을 더하는 복입니다. 또한 영적인 분복, 즉 믿음으로 전도하고 낳은 자식들이 포도 열매처럼 주렁주렁 결실 맺는 복이 복 중의 복입니다.
(요삼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것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복 받는 믿음은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믿음입니다.
(출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출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달력의 주일 표시는 모두 빨강색으로 되어 있는데, 빨강색은 모든 사람이 가던 길도, 하던 일도 모두 멈추라는 정지 표시입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이므로 주님을 경외하는 일과 주님을 위한 일 외에는 하지 말라는 적신호임을 알게하는 의미로 받기도 합니다. 주님의 일 외에 하던 세상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면 위험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달력에 빨간 글씨로 되어 있는 주일은 세상 일을 멈추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던 신자들이 하와이에 가서 노동을 하는데 주일을 잘 지키므로 농장 주인은 그것이 못마땅하여 심하게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외국에 와서 노예가 되었으니 예수나 잘 믿어야 한다고 동맹하여 주일을 지켰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말하기를 “주일에 일을 하지 않으려면 대신 매를 맞아라.”라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 신자들은 일찍 주인을 찾아가서 “어서 때려 주시오. 주일예배에 가야겠소.”하였습니다. 주인은 그들이 이같이 열성으로 예배당에 가자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감동을 받아 주일을 잘 지키게 하고 자기도 예수를 믿고 교회까지 세웠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장로교회를 국교로 한 종교적인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서는 일요일 곧 주일에는 상점 문은 물론이요 영화관, 미술관, 박물관까지도 다 폐문한다고 합니다. 한번은 세계 관광협회에서 스코틀랜드의 관광협회에 관광단을 위하여 오락장소와 명문지의 문을 좀 열어달라고 요지의 발송된 서신이 전해온 것입니다. 그 때에 스코틀랜드의 일반 시민의 여론은 이를 거부할 뿐더러 반대 성명서를 발부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은 의미의 회답이 왔다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일요일이면 영화관, 미술관, 운동장의 문을 닫으나 교회의 문은 열립니다. 만일 스코틀랜드를 정말 보고 싶은 사람과 참으로 스코틀랜드를 알고 싶은 사람은 영화관이나 미술관 또는 운동장이 아니라 교회에 와 주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스코틀랜드의 생활도 보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상해 선시 공사는 각종 공장과 각 판매부가 있어 5천명을 거느리고 일하는 세계적 대 회사였다합니다. 이 공사에서 총지배인으로 장정광씨를 초청할 때에 기독 신자인 장씨는 주일 휴업의 조건부로 승낙했다합니다. 공사로서는 하루 수만 원의 이해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바로 맞은 편에 영안 공사란 경쟁자가 있어서 심히 난처하였으나 장씨를 맞아들이기 위해서 주일 휴업을 하니 영안 공사는 기뻐했다합니다. 그러나 장씨가 입사하고 주일 휴업 후 8천명의 종업원들은 기뻐하며 6일간 성실히 일하므로 선시 공사의 성적이 영안 공사보다 훨씬 나았다고 합니다
복 받는 믿음은 말씀대로 행하는 믿음입니다
(신 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경을 오해 하는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옛날 평안도에서 있었던, 일이라 합니다. 교회 나온지는 꽤 오래됐는데 성경을 읽지 않고 설교도 듣는 둥 마는 둥 항상 졸기만 해서 마태복음을 찾으라면 구약에서 뒤적거리고 창세기를 찾으라면 신약에서 뒤적거리는 한 성도가 하루는 목사님이 말씀을 읽어야 된다고 강조를 하자 큰 맘을 먹고 읽기를 시작했는데 한번은 이 사람이 목사님에게 성경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묻기를 [목사님, 예수님께서 개고기를 참 좋아하셨나 봅니다] 깜짝 놀란 목사님은 답변을 해 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개를 기르긴 했지만 개고기는 먹지않았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성도들이 킥킥거리면서 그 사람을 흉을 보는데 그런데 그는 성난 표정으로 성경을 뒤적거리더니 마태복음 16장 13절을 펼쳐 보이는 것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보세요 성경에 분명히 이렇게 나와 있는데요” 하면서 구절을 읽었습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밑줄을 그어 지명표시임을 나타내고 있는데도 이 사람은 평안도 사투리로 해석을 했던 것입니다. 평안도 사투리로 [가이]는 개를 얘기하고 [사랴]는 사려고'의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예수님이 개고기를 얼마나 좋아하셨으면 온 유태나라의 개를 다 잡수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바다를 건너서 [가이 사랴]즉, 개를 사려고 빌립보 지방에까지 가셨을까하는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한참동안은 그 구절을 읽을 때는 꼭 이렇게 읽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개를 사러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그렇게 읽었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일들도 그러 합니다.
한 할머니가 속이 아파 병원에 가셨습니다. 병명은 위(胃)가 안 좋은 것으로 나왔고 그래서 의사는 잔탁을 드시라는 처방을 내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 속만 안 좋으신 게 아니라 귀까지 안 좋아 잔탁을 장닭으로 잘못 알아들었고 할머니는 착실하게 의사선생님이 내려준 처방을 지키기 위해 시장에 가서 장닭을 큼지막한 것으로 사와서 이왕 먹을 것 인삼까지 넣어 푹 고아 먹었습니다. 안 그래도 속이 안 좋은데 기름진 닭에 인삼까지 넣었으니 탈이 날 수 밖에 없었고 병이 오히려 더 악화되자 이 할머니 화가 나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니 선상님이 하란 대로 했는데 속이 더 아프니 어찌된 일이요?” 그러자 의사선생님, “ 드시란 약은 드셨습니까?” “하모!” “어떻게 드셨는데요?” “인삼을 넣어 푹 고아 먹었지!” 잔탁에 인삼을 넣어 고아먹었다니 기절할 일 아닌가요?
이 이야기를 인용한 목사님은 “나이 들어서 말씀보고 싶을 때 눈 어두워 못 보고, 귀 어두워 말씀 못 들고 한탄하지 말고 젊었을 때 성경 많이 일고 주님 일 부지런히 하십시오.” 하셨답니다.
말씀이 대단한 위력을 발휘 하기도 합니다.
기가 막히도록 좋은 칼을 만드는 유명한 대장장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칼로 갑옷을 한칼에 두 조각낼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그 대장장이를 불러 자신의 갑옷을 두 조각 내보라고 명령했습니다. 만약 하지 못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 대장장이는 칼을 단 한번 휘두르고는 칼집에 꽂았습니다. 왕이 다시 호통을 치려 하자 대장장이는 '왕이여 몸을 한번 흔들어 보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몸을 흔들자 두 조각이 나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왕은 놀라운 칼잡이의 실력 때문에 자신의 몸이 두 동강난 줄도 몰랐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검의 위력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속에 있는 죄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위기를 만드시면 우리가 순간적으로 무언가 심오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윌리암 뮐러는 손이 하나뿐이었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의 공장에서 일하다가 기계에 잘린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병신이라고 멀리하고 흉을 보았지만 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뮐러 옆에는 항상 성경책이 있어서 희망과 용기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라서 튼튼한 두 다리를 가진 것을 항상 감사하며 우편배달부를 했습니다. 불편한 몸이지만 그의 배달은 빠르고 정확했습니다. 고된 배달이 끝나면 그는 주머니에서 성경을 꺼내 읽었습니다. 그는 이 좋은 책이 모두에게 읽힐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자신을 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영국 성서공회를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는 불구자에게 힘든 일이라고 거절했지만 성서를 보급시키고 싶은 그의 꿈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성서공회의 허락을 받고 부두노동자를 대상으로 성경 파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곳은 험악한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 처음에는 놀림을 받고 매를 맞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믿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의 정성이 노동자들에게도 전달되어 성경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렸습니다. 노동자에게 성경을 보급하는 일에 성공을 거두자 영국 성서공회는 그를 중국 선교사로 파송키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뮐러는 성경을 들고 낯선 중국 땅으로 떠났습니다. 힘겨운 중국어를 배우고 나서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팔았습니다. 중국에서도 그의 정성과 믿음은 받아들여져 성경책은 잘 팔렸습니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뮐러는 장님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몸소 한문으로 된 점자를 만들었습니다. 북경에서 그는 장님에게 점자를 가르쳐 성경을 읽게 하였고, 마침내 장님학교까지 만들었습니다. 한쪽 팔만 가진 그가 주님의 은혜로 양팔을 가진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말씀 중심할 때 위대한 역사를 이루게 합니다
1809년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 둘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주위에서는 이 아이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이의 미래를 내다 보고저녁 식사를 마친 후면 꼭 아이를 무릎에 앉혀 놓고 성경을 읽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아이가 아홉살 되던 해 어머니는 풍토병에 걸려 숨지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숨지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부자나 위인이 되기보다는 성경을 힘써 읽는 사람이 되라」 후에 이 아이는 미국에서 가장 존경과 관심을 받는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다. 링컨 이야기입니다.
복 받는 믿음은 시험을 참는 믿음입니다.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서양의 어머니들이 시집가는 딸에게 진주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이 진주를 흔히 '얼어붙은 눈물'이라고 부릅니다. 이 진주는 시집가서 흘려야 할 눈물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진주를 택했을까요? 그것은 진주의 생성과정을 알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주는 '아비큘리데'라는 특수한 조개에서 만들어집니다. 이 굴속에 모래가 들어오면 굴은 '나카'라는 물질을 생성하여 모래알을 감싸기 시작합니다. 나카가 많이 덮이면 진주가 큰 것이 되고 값이 비싸집니다. 이 나카는 아주 조금씩, 천천히 생성되기 때문에 진주가 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굴속에 모래가 들어오면 모든 모래가 진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래알이 들어오면 굴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카를 생성하여 모래를 코팅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모래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래알을 무시하면 나카를 만드는 고생은 하지 않지만 결국은 모래 때문에 상처를 입고 병들어 죽어버립니다. 재미있지요? 굴이 모래를 맞이하여 나카를 생성하여 힘들더라도 진주를 만들든지, 아니면 모래알을 무시하다가 병들어 죽던가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시련을 맞이하여 힘들더라도 건설적으로 극복하여 새로운 삶을 창조할 것인지, 아니면 자포자기하여 실패한 삶을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시련 뒤에 복된 역사가 임합니다.
독일의 얼라피 박사는 우리가 매우 자주 이용하고 있는 약품을 발견하고는 606호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왜 606호라고 했습니까? 606번째 실험에서 성공했기 때문에 약 이름을 606호라고 붙였습니다. 600번 실험해도 안되었습니다. 605번 실험해도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아니하고 흔들리지 아니했습니다. 에디슨은 어느 때는 한 가지 발명을 위해 일만 번이나 실험을 했다는데 그래도 흔들리거나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발명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많은 시험과 환난이 있었지만 자기 자리를 지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손이 언제나 그와 같이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에 중심의 심지를 보십니다. 마음을 보십니다. 일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시험이 오거나 어떠한 고난이 있을 지라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승리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젊은 재상이 왕에게 와서 어떻게 하면 시험에 들지 않고 맡은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왕은 기름이 가득한 잔을 주면서 한 시간 안에 지시하는 거리를 돌아오라고 했다. 기름을 쏟거나 시간이 늦으면 엄벌에 처한다고 하며 칼을 든 군인이 뒤따르게 했습니다. 젊은 재상은 땀방울을 흘리며 기름을 쏟지 않고 제 시간 안에 도착했다. 왕은 만족한 듯 웃으며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모퉁이 구두 가게를 보았는가?' '못 보았습니다' '그럼 쌀가게는?' '못 보았습니다' '그럼 가구점은?' '죄송합니다. 기름을 쏟지 않으려고 정신을 집중하느라 아무것도 못 보았습니다' 그렇다. 맡은 일에 충성하다보면 시험에 들 겨를이 없습니다.
토마스 에디슨이 나이가 많았을 때 한 젊은이가 '선생님, 살아 오시는 동안 시험에 든 적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시험? 나는 평생 너무 바쁘게 살다보니 시험에 들 여가가 없었다네' 라고 했다고 합니다.
복된 믿음은 십일조를 드리는 믿음입니다.
(말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챨리 페이지는 직장도 없는 무일푼의 청년이었습니다. 하루는 거리를 지나다가 구세군의 가두전도를 보게 되었습니다. 찬송과 전도설교가 끝난후에 한 젊은 여성이 탬버린을 바구니 삼아 들고는 헌금을 걷으면서 한 바퀴를 도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성이 페이지 앞에 왔을 때 페이지는 그녀에게, 자기는 헌금을 하고 싶으나 돈이 하나도 없고 실은 음식 사먹을 돈조차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성은 자기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더니 페이지에게 넘겨주는데 그것은 자기 돈 1불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여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돈을 받으세요, 그 중 10센트를 여기에 헌금하세요 그리고 앞으로도 수입이 있을 때마다 10분의 1을 하나님께 바치세요. 이렇게 평생동안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세요. 그러면 돈이 떨어져서 고생하는 일이 없을 겁니다.' 페이지는 감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 돈을 받았고 그 중에서 10센트를 헌금했습니다. 얼마후에 그는 곧 직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여성의 말을 믿고 계속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생활을 했습니다. 세월이 흘렀을 때 챨스 페이지의 이름은 백만장자의 명단에 올랐다. 그는 하나님께 십일조뿐만이 아니라 여러 개의 병원을 지어서 바쳤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많은 자선 사업도 하였다. 멋있는 출발이었습니다.
몽골에서 사역을 하시는 선교사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몽골교회에서 주일예배 때였습니다. 선교사님께서 말씀을 마치고 헌금을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때 한 성도님이 손을 높이 들더니 질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목사님, 아무거나 십일조해도 되는 겁니까?” “그럼요,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리면 되는 겁니다.”성도님은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헌금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도님이 큰 자루 하나를 들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작은 헌금 바구니에 도저히 넣을 수 없었기 때문에 헌금바구니 옆에 두었는데 목사님은 그것이 무엇인가해서 자루를 풀어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내용물은 다름 아닌 소똥이었습니다. 몽골에서 소똥은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겨울이 되어 벽에 소똥을 바르면 아주 난방효과가 탁월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소똥은 8월 중순부터 6월초까지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나라인 몽골에서는 땔감으로도 아주 유용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겨울을 나려면 적어도 26만 원 가량의 난방비가 필요한데 몽골에서 신입선생님의 월급이 4만 5천 원이니 땔감 비는 보통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정말 그 나라에서 소똥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소똥냄새가 교회를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목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 함께 기도합시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 이 성도님의 가정에 만 배의 축복을 허락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그런데 놀라운 일은 다음날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마을의 있는 모든 소들이 그 성도님 집 앞에 몰려와 볼일을 보더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소똥이 쌓여갔습니다. 그해 그 성도님은 엄청난 소똥덕분에 땔감비가 전혀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은 소똥은 이웃에 팔아 생활비를 벌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성도의 순수한 십일조 헌신을 기쁘게 받으신 것입니다.
복된 믿음은 주를 앙모하는 믿음입니다.
(시 33:12)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 63:1)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토마스 카알라일은 인간을 희망에 기초를 둔 존재로 정의하면서 “내 소유를 다 빼앗긴다 해도 나는 오직 한 가지, ‘희망’만은 가지기를 원한다”고 말했다합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영국군과 미군 포로 2만 명이 수용되어 있던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8,000명의 포로가 사망했는데, 대부분은 영양실조도, 질병도, 과로도 아닌 절망으로 죽었다는 사실이 전후 조사단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수백만 명의 유태인이 학살되었던 2차대전 당시 유태인들을 수감했던 한 지하 감옥의 벽에서 손톱으로 그린 다윗의 별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비록 태양 빛이 우리에게 비춰오지 않지만 저기 태양이 있는 것을 믿노라. 비록 사랑이 지금 내게 느껴지지 않지만 저기 진실 된 사랑이 있는 것을 나는 믿노라. 비록 하나님께서 침묵 가운데 계시지만 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노라.”
우리는 이 글에서 극한 죽음의 공포와 뒤엉킨 어두움의 절망 속에서도 낙심치 않으며, 그 건너편에 존재하는 하나님과 승리를 바라보고 확신했던 한 신앙을 발견하게 됩니다.
1850년 1월 6일, 영국의 콜체스터시는 심한 눈보라로 도시 전체가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한 십대 소년은 그가 늘 다니던 교회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까이에 있는 교회에 들어가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출타한 목사님을 대신하여 한 평신도가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가 설교한 본문은 이사야 45장 22절의 말씀이었습니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여러 달 동안 이 소년은 마음의 곤고함과 죄에 대한 괴로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목사여서 비록 교회에서 자랐다 할지라도, 그는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지 못했었습니다. 그 설교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다만 본문을 반복해 외칠 뿐이었습니다. '사람은 바라보는 것을 배우고자 대학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라도 볼 수 있습니다.' 그 설교자는 이렇게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이 설교자는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새 방문자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그 방문자를 쳐다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젊은이, 자네는 아주 피곤해 뵈는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그때 그 소년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는데, 이것이 바로 위대한 설교가 스펄젼의 회심의 경험이었습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교회가 복 받는 믿음으로 나아가되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믿음 말씀대로 행하는 믿음 시험을 참는 믿음 십일조를 드리는 믿음 주를 앙모하는 믿음으로 복 받는 모두가 되고 영광 돌리며 사명 감당합시다.
이신득영
갈라디아서 3:1-5 / 김형익 목사
말씀내용
오늘 본문은 갈라디아서의 두번째 부분이 시작하는 부분입니다. 첫번째 부분(1~2장)이 바울 자신의 자서전적 이야기를 통하여 사도직을 변호하는 것이었다면, 이제 두번째 부분(3~4장)에서 바울 사도는 칭의의 교리를 매우 상세하게 논증하는 교리적 부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6장은 교리의 적용 즉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교훈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매우 신랄하고 강한 표현으로 이 본문을 시작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의 다른 서신서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강한 표현입니다. 필립스는 ‘갈라디아의 친애하는 바보들이여’(O you dear idiots of Galatia) 라고 번역했고 유진 피터슨은 ‘여러분, 미친 갈라디아 사람들이여’(You crazy Galatians) 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표현을 통해서 바울 자신이 얼마나 감정적으로도 상하였는가 하는 것을 읽을 수 있는데 이것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란 점에서 하나님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어떤 감정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드러내신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명제: 신자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이루어진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바울 사도가 처음으로 꺼내는 논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by grace through faith) 이루어진다’는 명제입니다. 이것은 대명제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논지를 가지고 어리석게도 거짓 가르침에 현혹되어버린 갈라디아 교인들을 다시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대명제 아래서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은 ‘이신득영(以信得靈)’ 즉,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좀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대명제입니다. 신자의 삶은 믿음의 시작부터 완성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처음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 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시작하였으나 믿음을 중간에 포기한다면 여러분은 처음부터 가졌던 믿음이 참 믿음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의 믿음은 하나님 편에서의 은혜라는 단어를 만납니다. 믿음이 아니라 일을 하는 자에게는 은혜란 단어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마는(롬 4:4), 오직 믿음으로 서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일 뿐입니다. 이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요, 이 복음을 믿는 것이 구원하는 믿음이며, 이 복음을 믿을 때에 우리는 성령을 받게 되는것입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절에서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듣고 믿음으로냐’는 말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원어로 이것은 ‘믿음의 들음으로써’(by hearing of faith)라고 되어있습니다. 의미는 같습니다마는, 그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믿음으로 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고 그 들음은 믿음을 가져왔습니다.
우리의 평생에 잊지 말아야 할 명제입니다. 신자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by grace through faith) 이루어집니다.
2.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영적 분별력을 동반한다(1).
1절에서 바울 사도는 ‘누가 너희를 꾀었느냐’고 묻습니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꾀더냐’가 아니라 단수인 ‘누가’를 쓴 것으로 보아 바울 사도는 결정적으로 그들을 꾀고 유혹한 존재인 거짓의 아비, 사단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단은 진리를 매우 묘하게 왜곡하여 거짓 진리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하와에게 그렇게 접근했었고 역사적으로도 쉬임 없이 사단은 교회와 성도들을 그렇게 꾀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단이 그 일을 동일하게 하고 있다고 할 때, 교회와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영적 분별력입니다. 진리의 말씀에 대한 분별력입니다. 참된 신앙에 대한 분별력입니다. 참된 성도와 참된 지도자에 대한 분별력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분별력을 동반합니다. 분별력없는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한다’(요 10:4~5)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영적 분별력입니다.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요일 2:20). 역시 모든 성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본능적으로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갈라디아 사람들처럼 잠시 현혹될 수는 있습니다마는 참 성도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과 책망을 듣고 돌이킨다는 것입니다.
이 분별력은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거짓된 복음이나 교훈을 많이 들어보십시오. 절대로 여러분에게 참된 믿음은 커녕, 분별력이 생길리 만무입니다. 특별히 이 부분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처음에 갈라디아 교회에 전했던 복음, 그들이 믿었던 복음의 내용을 다시 언급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갈라디아 사람들의 선행이 하나님께 인정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눈을 떠서 그들 눈 앞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똑똑히 본 것입니다.
그 누구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믿음의 유일한 대상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보았기에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이 살아온 삶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바로보지 못하고서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것이 바로 나의 죄를 위한 사건이었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향해서 가지고 계시는 붙타는 진노가 다 해소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설교는 우리가 이렇게 하면 가정생활, 부부생활, 자녀교육, 사업성공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가 없이는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이를 수 없음을 언제나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설교했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을 보았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눈 앞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보고서도 이렇게 그리스도를 떠나 구원의 근거를 자신들에게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3.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는다(2,5)
바울 사도는 본격적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이 질문이 함축하고 있는 사실 하나는 바울 자신이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할 때 그들이 이미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비록 지금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믿고 거듭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짚고 넘어갈 점은 여기서 바울 사도가 성령을 받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들이 거듭난 사람들이라는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신칭의, 그들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다 라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받은 자들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를 믿은 후에, 그 다음의 특별한 체험으로 오게 되는 것이 성령받는 것이라고 가르치지만 매우 성경에서 벗어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제시하는 질문을 보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두 가지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오답이고 하나는 정답입니다.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인가, 듣고 믿음으로 인가를 묻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매우 중요한 사항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알게 하고자 했던 것들입니다.
A. 성령받음은 나의 영적 성취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취를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성령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영적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보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행위’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행함으로써 그 보상으로 성령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인을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으로 나누는 셈입니다.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과 성령을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우리는 성령을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안에는 성령님이 내주하십니다. 이 사실을 성경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모를 수는 있겠지만,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성령을 주신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고서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고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롬 8:15,16).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성령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하고자 하시는 일이십니다. 5절은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라고 했는데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역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 성령을 받게 되는가 하면 믿을 때입니다.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으로써 우리는 성령을 받습니다. 받는다는 표현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표현입니다. 우리가 일을 해서, 율법을 준수해서, 할례를 받아서 그것을 내 당연한 몫으로 얻게 된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나의 성취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취하심에 근거를 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써 나의 구원을 위해서 완전하게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이루신 일을 믿는 사람이 성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라면 성령을 받는 것도 동일합니다.
B. 하나님을 알고 성령을 체험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성령체험하고 싶은데 방법이 무엇입니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받는 비결’이라고 해서 이런 저런 책들도 가르침들도 나옵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이렇게 하면 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방법 속에 하나님을 묶을 수 있다면 하나님을 하나의 메커니즘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인격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만나고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오직 한 가지의 길만을 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을 체험한다고 하는 말도 다른 의미가 아니라 같은 것입니다. 오직 한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성령을 체험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 밖에 없습니다. 어떤 신학자(Donald McCullough)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연구방식은 연구대상과 맞아야 한다. 천문학자는 망원경으로 천체를, 생물학자는 현미경으로 세포를, 사회학자는 조사와 면담을 통해 인간의 행동방식을, 정신병리학자는 깊은 대화를 통해 잠재의식을 연구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신뢰와 전적의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연구하고 알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먼저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이후에야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하셨다.”
하나님을 아는 길은 오직 믿고 따르기로 결정하고 따라갈 때 그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뢰하는 관계! 이 말처럼 신앙을 잘 정리해 주는 말도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신앙, 믿음이란 본질적으로 관계로만 정의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을 왼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동의한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본질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신뢰한다, 믿는다는 것은 반드시 삶의 태도에서 드러나고 보이게 마련입니다. 여러분이 의사를 신뢰한다면, 의사의 처방을 따라 약을 사서 복용하실 것입니다. 신뢰하기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뢰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약을 사서 복용하지 않겠지요. 그리고 그 신뢰가 순종을 통해서 드러날 때 우리는 보다 깊은 신뢰의 관계로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을 알고 성령을 체험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C. 믿음이 성령받음에 선행하는가, 반대의 순서인가?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에 이르게 됩니다. 믿음이 먼저인가, 성령을 받는 것이 먼저인가 하는것입니다. 2절 말씀을 잘 읽어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믿음으로 반응함으로써 성령을 받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선행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때 빌립보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게 된 사람 루디아의 기사를 보면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 16:14)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죄인의 마음을 열어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믿게 하실 때 성령님은 분명히 믿음에 선행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사역은 죄인이 실제로 믿을 때까지는 온전하고 확실하게 그 사람의 내면에서 의식할 수 있도록 나타나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라야, 신자는 자기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고, 그 속에서 거룩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성령님의 역사를 인식하게 되며, 성령님의 열매가 자기 성품 속에 맺혀져 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반적으로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다고 말하고 믿음이 성령받음에 선행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4. 그리스도의 삶은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끝난다(3).
바울 사도는 여기서 더 나아가 어떻게 성령을 받았느냐 하는 출발점의 문제만이 아니라 어떻게 마치는가에 대한 문제도 말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믿었을 때 성령을 받음으로써 제대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라 율법을 행하고 할례를 받고자 함으로써 성령이 아닌 육체로 마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이루시는 분, 완성하시는 분은 처음에 그 일(구원)을 시작하신 하나님이십니다.
A. 육체는 성령과 구별된는 개념으로 약함과 죄악 가운데 있는 인간의 본성을 가리킨다.
여기 육체라는 표현은 사실 할례의 개념과 관계가 있습니다. 할례를 육체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체가 의미하는 것은 성령과는 구별되는 개념으로 온갖 약함과 죄악 가운데 있는 인간의 본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것은 자기의를 추구하는 죄성입니다. 구원의 근거를 자기 안에서 찾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잘 시작했다가 이제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은 철저하게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끝나는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B. 성화에 대한 오해: 성화는 칭의에 따라오지만, 칭의가 과거의 사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성화에 대한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분명하게 할 부분은 성화와 칭의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이 3절 말씀을 언뜻 보면 성화에 대한 말씀을 하는 것 같습니다. 분명히 성화는 칭의를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화가 칭의에 따라온다고 해서 칭의는 과거의 사건으로 남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칭의를 마치 기독교에 입문할 때 통과하는 수준의 복음(entry-level gospel) 즉 일종의 통과의례(rite of passage)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칭의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의 신자로서의 삶을 지배하는 구원입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가지고 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구원받은 후에도 우리는 오직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관계로 설 수 있을 뿐 입니다. 한 번이자 영원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의 의를 전가받음으로써만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인정받고 그 분 앞에 서기 위해서 우리의 순종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게 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이요, 믿음으로써 값없이 주어지는 그리스도 예수의 의로우심인 것입니다.
5. 교훈과 적용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생각하고 적용해야겠습니다.
A. 이신칭의의 복음은 고난을 가져오며 가져올 수 있다(4).
이신칭의의 복음을 오늘 바울 사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는다는 이신득영으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이 복음의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고난을 예고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복음을 전하면서 수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만일 그가 복음의 진리를 조금이라도 타협할 수 있었다면 그는 고난을 당해야 할 이유가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는 갈라디아 지방 즉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 그리고 루스드라와 더베에서 복음을 전할 때(행 13~14),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서 죽게 되었던 경험도 하였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 사도가 당한 고난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고난이 바로 이신칭의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 고난은 비단 바울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처음에 갈라디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은 이들 가운데에는 바울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했던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4절에서 바울 사도가 하고 있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가 그 복음을 인하여 고난을 받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속히 떠나서 거짓된 교훈에 휘말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고난을 헛되이 받았구나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본성으로 듣기 좋아하는 이야기, 들어서 세상 사는데 유익한 교양에 관한 이야기, 세상에서 눌리고 상한 자존심을 교회에 와서라도 회복할 수 있도록 자존심 회복의 메시지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거짓 복음이라고 규정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은 오직 바울 사도 자신이 받았고 전했던 그 복음의 진리 밖에 없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자존심이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성령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기도하며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지옥이 아니라 천국을 보장받게 된다면 이 보다 더 복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죠이선교교회인 우리는 이를 위해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비록 이것이 고난을 가져온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마 5:10~12).
마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B. 교리 없는 체험은 왜곡된 영성으로, 체험 없는 교리는 죽은 정통으로 인도한다.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다루고자 하면서 놀랍게도 성령을 받은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밝힌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풍성하고 실제적으로 가르쳐주는 서신입니다. 우리는 보통 교리와 체험을, 신학과 삶을 나누려고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신앙에 매우 해악을 미치는 결과를 가져오는 잘못된 전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리와 체험은 함께 가며 신학과 삶도 함께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교리없는 체험은 왜곡된 영성으로 인도하고, 체험없는 교리는 죽은 정통으로 인도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과 기도는 항상 함께 가야 하는 우리의 경건의 가장 기본적인 틀인 것입니다. 한 가지에 치우치지 않게 하십시오.
C.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마지막으로 여러분,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처음에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눈 앞에 십자가에 달려죽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보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잊혀져가고 은혜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구원을 얻고 감격하고 죄인에게 찾아오신 은혜를 찬양했으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고, 교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고, 그러기 위해서 무엇인가 자기의 공적을 쌓아가는 것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는 일을 우리는 많이 보게 됩니다. 그것은 남에게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서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 참선을 하고 덕을 수행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눈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밝히 보이지 않는 순간 우리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본성대로 행하도록 우리를 허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눈을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예수께 주목하고 살아간다면,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예수를 밝히 보고 산다면 결코 여러분은 육체로 돌아가는 일, 육체로 마치고자 하는 데로 가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설 곳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자리 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도 그렇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인 죽음을 맞이할 때에도 그럴 것입니다. 만세반석 열린 곳에 내가 들어갑니다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만세반석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그 몸을 깨뜨리신 곳 십자가를 붙들고 우리는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담대하게 서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함정
갈 3:1-9 / 배영진 목사
오늘은 신앙의 함정에 대하여 설교하겠습니다. 오늘 갈라디아 성도들은 신앙의 함정에 빠졌습니다. 사도바울이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 안타까워 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여정을 출발하면 그 중간에 함정이 많습니다. 예수믿는다는 것은 내가 오늘 예수 영접했어! 이게 추석귀성 열차 티켓을 한장 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총체적 여정입니다. 신앙의 여정을 출발하는 것이 예수영접이맞는데, 그 신앙여정 중간중간 함정에 빠져버리지 않아야 종착지에 도착합니다. 오늘 갈라디아 성도들이 이 함정에 빠졌습니다. 이게 사도바울의 첫 사역지이고 1차 전도여행입니다. 요즘 터어키 지방, 이곳이 갈라디아인데 거의 이방인들이 많은 이 지역에 복음을 전했고, 완전 초신자들로 구성된 네 교회를 개척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입니다. 사도행전 13장 14장입니다. 이방인들이 사도바울의 복음을 듣고 정말 기쁘게 받아들여 예수님을 영접했고, 이들이 사도바울을 정말 귀히 여겼습니다. 그렇게 신앙의 여정을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네 교회를 개척해놓고, 선교센터 안디옥교회로 돌아간 사이에, 예루살렘교회에서 온 이들이, 다른 복음으로 이 초신자들을 흔들고 부추기니까, 네 교회 성도들 모두가 다같이 혼란에 빠져버립니다.
1장에 보면 누군가 다른 복음으로 너희를 교란시켰다 그래요. 신앙의 함정에 빠진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 소식을 듣고 너무 괴롭고 힘들어해요. 공든 탑이 무너진 겁니다. 저는 2천년의 교회역사, 그리고 한국교회 역사에서 이 신앙의 함정에 빠져버린 케이스를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신앙의 함정에 얼마든지 빠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함정이 뭔가? 십자가 은혜를 잊어버리는 겁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이 오늘 뭐라고 했는가? 3절에 어리석은 사람들아,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려고 하느냐? 이것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는 말은 뭐죠?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예수를 구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듣고, 나는 죄인이구나, 내가 내 죄값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구나. 이걸 받아들여요. 믿음이라 합니다. 예수님이 죄값을 치르시고 나는 거저 구원받아요. 이것을 값없이 거저 받았다, 이걸 은혜라 합니다. 은혜는 뭐냐? 내 공로가 없다, 이것이 성령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 뭐냐? 은혜가 내 속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은혜가 사라지면 내 속에 내 공로가 생깁니다. 그래서 신앙의 함정은 은혜가 사라지고 내 공로가 생기는 것입니다.
첫째, 신앙의 함정은 은혜가 사라지는 것이다.
다같이 1절을 봅니다. 사도바울이 뭐라고 해요?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1절에 한번 3절에 한번,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바울이 안타까워합니다. 뭐가 어리석은가요? 그들이 신앙이 누군가에 의해 홀려요. 은혜가 사라집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여러분 눈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개역성경은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래요. 꾀다, 홀리다 이것은 누가 와서 나를 속일 때, 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요. 사기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정신을 못차리고, 넘어지는 겁니다. 지금 갈라디아 초신자 성도들을 혼미하게 함정에 빠뜨린 사람들이 누구냐? 그 당시 유대인 거짓교사들입니다. 2장에 이 사람들을 사도바울이 다 알아요 누군지. 이들이 너희에게 몰래 들어온 거짓신도들이다 그래요. 이들이 바울이 떠난 틈을 타서 찾아와 덫을 놓습니다. 거짓 가르침이 뭐냐? 너희가 예수믿어도 십자가 보혈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 너희가 구원받으려면, 너희도 뭔가를 해야하는 것이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혼란에 빠집니다. 와 이분들이 거짓말 할 사람들처럼 안보이는데, 그러면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뭐지? 그러니까 그들이 말해요. 사도바울은 실제로는 열두사도 출신도 아니고, 그가 혼자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 사도가 됐다 주장하는데 그건 가짜야! 자 여기서 성도들이 멘붕이 옵니다. 두가지 가르침이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믿으면 완전히 우리 죄 문제는 해결된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다. 이것은 거저 받는 것이다. 이게 사도바울의 복음입니다. 율법주의 선생들은, 아니다. 어떻게 구원을 거저 받냐? 예수믿고 우리 유대인처럼 할례도 받아야 한다!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교회에서 왔고 열두사도들이 보냈다고 말하니까, 갈라디아 성도들이 완전 교란됩니다.
그런데 이들이 갈라디아에 오기 전에 이미 안디옥교회에도 와서 똑같이 함정을 팠습니다. 사도행전 15장 1절에 보면 예루살렘교회 공의회 기록이 나옵니다. 최초의 교리회의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와서 안디옥교회에 와서 안디옥 성도들을 가르칩니다. 너희 이방인들아 너희가 모세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십자가 은혜만으로는 너희의 구원이 충분하지 않아! 우리처럼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러니까 값없이, 거저, 은혜로 구원받지 않는다! 십자가 보혈에, 뭔가를 더해야 돼! 자 그렇다면 이게 뭐가 됩니까? 은혜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거저 받는 것이 아니다. 은혜가 은혜가 안되는 것입니다.
둘째, 신앙의 함정은 내 공로가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 성도들이 혼란스러워한 것이 뭐냐? 성령으로 시작했는데 이제 육체로 마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오직 은혜구나, 이 믿음인데, 육체로 마친다 이것은 내 신앙생활에 내 공로가 개입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 십자가은혜 플러스 내 공을 거기 덧붙이는 것입니다. 내 공로가 들어갑니다. 이것이 오직 믿음이라는 신앙여정에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공로가 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은혜가 떨어지면 그 결과로 자동적으로 내 공로, 내 자랑, 내 수고, 내것이 들어가는 신앙이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함정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주의 선생들이 이렇게 가르치니까, 갈라디아 성도들이 반박을 못하고 혼란에 빠집니다.
자 이러면 교회안에 무슨 문제가 발생하는지 아세요? 할례를 받은 사람과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교회 안에서 차등이 발생하게 됩니다. 내가 할례를 받았고 너는 할례를 안받았어. 그러니 넌 내 상에서 먹을 수 없어. 할례도 못받은 주제에 무슨 구원을 받아? 차별이 생겨요. 그래서 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 신자들과 같은 상에서 밥을 먹지 않았어요. 일등 신자와 이등 신자, 교회안에 우열반이 생깁니다. 우열반의 가치관은 뭡니까? 나는 이만큼 했어. 너는 안했잖아. 나는 헌신했어. 넌 안했잖아. 난 기도많이 했어. 넌 안했잖아! 이렇게 신앙생활에 내가 수고한 것, 내가 전도한 것, 내가 헌신한 것, 내가 헌금한 것, 내 공로를 세기 시작하고 자랑이 됩니다. 내가 교회에서 한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교회앞에 공표해주기를 바라고, 그는 이미 신앙의 함정에 이미 빠졌다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여정에서 이 함정에 한번도 안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항상,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라고 말합니까? 매일 하나님의 은혜속에 우리가 적셔져 있습니까? 저는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중에 이 신앙의 함정이 너무 많다고 봅니다. 나는 몇 사람 영혼구원했어! 이겁니다. 내가 우리 교회 전도왕이야! 그러면 그것이 계급장이 되고 훈장이 됩니다. 내가 1등신자가 됩니다. 내가 이 교회를 세우는데 얼마나 공이 많은 줄 알아? 뻐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금 갈라디아에 들어온 유대인 교사들에게 자기들 공로는 뭘까요? 할례입니다. 나는 할례받았다. 이것이 자기들 자랑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할례자들, 할례의 공로를 주장하는 이들이, 고린도교회도 들어와서 함정에 빠뜨렸습니다. 빌립보교회도 들어와 함정에 빠트렸습니다.
사도바울이 가는 곳마다 새로 교회를 개척하고 십자가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면, 이 할례자들이 어김없이 그 신생교회에 와서 믿음과 하례 두가지를 해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쳤어요. 사도바울과 이들은 평생 원수처럼 되어버렸어요. 그런데 누가 다수였어요? 할례파들이 다수였어요. 그들이 얼마나 왕성하게 활동했는지 심지어 2장에 보면 베드로사도도 이 할례파들의 눈치를 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할례파들이 들어오니까 외식을 합니다.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식사하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믿고 할례받으면 1등 신자, 예수믿고 할례안받으면 2등신자, 우열반이 생겨요. 그래서 그렇게 눈치보고 있는 베드로사도에게 바울이 공개적으로 책망을 합니다. 베드로사도여, 복음에 따라 똑바로 행동해주셔야, 모두가 신앙의 함정에 빠지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딱 보니까,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미 신앙의 함정에 빠졌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할례를 받았다고 1등신자 함정에 빠지고, 갈라디아 신자들은 자기들이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므로, 유대인보다 열등한 2등 신자라고 여겨요. 여러분 교회 안에, 공을 쌓으면, 1등 신자, 공을 안쌓으면 2등 신자!가 되나요? 은혜가 없이 나의 공로를 계산하면 반드시 함정에 빠집니다. 뭘 열심히 한 사람은 1등신자 우월감의 함정에 빠집니다. 열심히 안한 사람은 2등신자 열등감의 함정에 빠집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손길인데 이 십자가 은혜! 이게 사라진 성도는 공이 있다 공이 없다, 이 이분법, 우열반 함정에 빠집니다. 은혜가 사라지면 자기 공로가 나오고 자기 자랑이 나옵니다. 기득권을 주장해요. 은혜가 사라지고 공이 없는 신자는 눈치를 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이걸 가리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친다고 한 것입니다. 육체라는 것은 내가 한 일, 내가 쌓은 공로, 내 자랑, 나 아니면 이렇게 되었겠어? 이런 생각입니다.
4절 그래서 사도바울이 진심으로 말합니다. 이러면 여러분의 신앙은 허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진정 헛되이 끝나버린 거다, 거의 사도바울이 울먹이는 상황입니다. 그때 성도들이 할례를 받거나, 지금 우리가 교회에서 헌신을 하거나, 그것은 그렇게 할 모든 힘을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다 주님이 주셨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신앙은 헛것이 됩니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는가? 은혜를 깨닫고 하는 일이 곧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것을 했어요 라고 할 때 그 뜻이 뭐냐면, 이건 내 공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하게 하신 분이 오직 우리 주님이셔요. 이 신앙은 헛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주님이 기억해주십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잊어버리면 뭐가 됩니까? 내가 헌신한 것, 내가 기도한 것, 내가 헌금한 것, 그거 다 믿음으로 한 것이 아니고, 내 공로로 한 것이 됩니다. 이건 내가 한 거 맞아. 그럼 내 공로 아닌가? 우리가 이 신앙의 함정에 빠집니다. 제가 볼 때,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이 함정에 한 두번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목양을 열심히 해서, 한 사람이 변화되면, 나도 모르게 내 공로의 함정에 빠져요.
내가 다 한 거 아니야? 내가 아니면 더 사람이 저렇게 성장했겠어? 이것입니다. 내 공로, 이러면 이미 십자가 은혜가 사라진 상태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함정입니다. 여기 푹 빠져버립니다. 저도 늘 함정에 빠지고 웅덩이에 푹 들어갑니다. 인간은 자기 공로, 자기 의에 안빠지고 사는 사람이 없어요.
자 문제는 뭡니까? 우리중 누구도 이 신앙의 함정에 안빠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은혜가 사라지고 함정에 빠졌을 때, 내가 거기 빠졌다는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깨달으면 고백하는 것입니다. 앗 내 안에 주님의 은혜가 사라졌구나. 그래서 내 공로가 얼마인가 세기 시작했구나. 어느덧 나만큼 열심히 한 사람이 있나? 내가 이러고 있었구나! 이걸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함정에 빠지면 그 사람이 영 멋이 없어져요. 눈이나 어깨나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갖고 말합니다. 6절을 다같이 읽어볼까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이 그것을,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이신칭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여기서 믿음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믿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15장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뭘 약속하셨는가? 밥하늘에 별을 세보라고 하십니다. 셀수 있느냐? 셀 수 없습니다. 주님! 하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아 네 자손이 이 별들만큼이나 많아질 것이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6절 말씀이 창세기15장 6절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그리고 창세기 17장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하셔서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습니다.
사도바울이 이 15장 17장의 순서를 가지고 논증합니다. 15장에 아브라함 75세때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이 믿을 때,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을 믿은 것이다. 그때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셨는데, 아브라함에게 아무 공로가 없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나님이 선포하실 때, 아브라함이 할례고 뭐고 하나님앞에 아무 것도 한게 없다. 내가 아무 것도 한게 없고, 공로도, 자격도 없는데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것만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셨어요.
사도바울이 이 신앙의 함정에 빠져버린 갈라디아 초신자 성도들에게 이 돌직구 편지를 써서 보내고나서, 엄청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과연 이 성도들이 이렇게 단호하고 강력한 내용을 받을 수가 있을까 정말 노심초사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네 교회를 정말 사랑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처음 맞아줬을 때, 마치 하나님의 천사 대하듯이, 우리 주님을 대하듯이 나를 환영하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너무나 복음을 잘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이 이렇게 내가 전해준 복음을 이렇게도 속히 떠나버렸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신앙의 함정에 빠져버리다니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하고나서, 한동안 기다리다가, 바울이 2차 전도여행에 나섭니다. 갈라디아 지방을 꼭 한번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가 갑니다. 이 내용이 사도행전 16장에 나옵니다.
제가 진 에드워드 목사가 쓴 실라의 일기를 여러분에게 추천하는 배경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사도행전 16장 1-5절까지읽어봅니다. 바울과 실라가 루스드라와 더베에 도착했을 때 디모데를 만납니다. 어머니 유니게와 할머니 로이스, 이 가정을 중심으로 루스드라 성도를 만났는데 놀랍게도 루스드라 교회가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우둑 일어선 것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청년 디모데를 봅니다. 루스드라에는 청년 디모데, 더베의 청년 가이오, 이들이 바울사도가 전해준 복음,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 이 신앙을 지켜야 한다고, 갈라디아 네 교회 성도들을 격려하고 응원하고 일으킨 것입니다. 16장 2절을 보세요.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두 교회에서 호평을 받았다. 5절 보세요. 교회들은 그 믿음이 점점 더 튼튼해지고, 그 수가 나날이 늘어갔다.
여러분, 저는 신앙의 함정을 설교했습니다. 내 안에서 혹 은혜가 사라졌는가 오늘 생각해보세요. 은혜가 사라지면 내 공로가 생깁니다. 그러면 함정에 빠집니다. 다시 하나님 은혜, 십자가의 은혜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래 주님의 은혜구나 은혜로 오늘 내가 있구나, 이렇게 믿으면 그 함정에서 다시 나올 수 있습니다. 아이 키우는 일, 그거 오늘까지 주님이 은혜주셔서 한 거야. 이게 사라지면 자식키울 때 함정에 빠집니다. 내 자식이니 내가 키울거야. 이러면 함정에 빠집니다. 사업을 할 때, 오늘까지 된 것도 은혜야. 주님이 내게 주신 직원들, 내게 투자한 투자자들, 내 건강, 내 여건 모두 주님 은혜야. 이 고백이 사라지면 그 사람이 함정에 빠집니다. 우리가 신앙의 여정을 갑니다. 끝까지 은혜로 가야 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는데, 육체로 마치면 안됩니다. 십자가를 붙들고, 은혜속으로 다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위력 / 저주에서 축복으로
갈 3:1-14 / 오정호 목사
우리가 엘리베이터를 탔더라도 원하는 층수를 누르지 않으면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영적 수준과 목적을 정하고 우리의 의지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은혜의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고 그 상태에서 안주하려고 합니다. 그 구원의 능력을 온전하게 누리며 영의 자유함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어리석도다”라는 바울의 책망이 나옵니다(1절). ‘어리석다’는 말은 ‘사려깊지 못하다’, ‘영적으로 둔감하다’는 뜻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런 책망을 듣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복음의 약속과 은혜가 분명한데도 잘못된 율법주의의 유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순종치 못하도록 유혹하는 거짓교사들의 권면이 마치 누룩이 반죽그릇에 퍼지듯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영혼에 악영향을 미쳤습니다(갈5:8-9). 바울은 주의 은총속에 주신 자유를 굳게 지키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명령합니다(갈5:1). 성도가 복음의 자유를 잃어버리면 율법의 억압속에서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변질은 믿음의 위기를 반드시 가져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오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복음의 위력을 세가지 관점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복음은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완전히 단절시킵니다.
초대교회시대나 지금의 우리나 여전히 잘못된 사상의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얼마전 한국교회의 일각에서 ‘가계의 저주’ 신드롬이 일어났습니다. 조상의 죄가 후손들에게 내려와 우환이 된다는 내용의 책들이 여러 종류가 출판되었습니다. 이 ‘가계의 저주’는 그 뿌리를 샤머니즘에 두고 있습니다. 이런 무속적인 신앙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어두운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금만 어려움이 생기거나 자녀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조상의 죄를 탓하거나, 환경을 탓합니다. 또한 과거의 잘못이나 사건, 상처에 얽매여 마음에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기도 합니다. 신학적인 기초가 부족하여 구약의 일들을 신약의 일로 대치하는 사람들은 목회자에 대해 불순종하거나 교회를 옮기면 저주를 받는다는 암시를 주는 일이 있습니다. 심지어 저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특별기도 또는 신령한 사람에게 안수를 받아야 한다는 교묘한 처방을 내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잘못이 조상들로부터 대물림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되었습니다(고후5:17). 이제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갈2:20).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약속합니다. 이제 우리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2. 복음은 우리를 참된 자유인으로 해방시킵니다.
그리스도와 저주가 공존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다는 사실에 주목하시오(13절). 여기에서 ‘저주’는 율법을 준수하지 못했을 때 받는 저주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저주를 다 받으셨기에 우리가 받을 저주는 없습니다. 당시 갈라디아 교인들은 십자가의 복음과 율법을 겸하여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훼방하는 것이요, 주님의 구원사역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화에 우리가 부족한 부분을 더하겠다고 붓을 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저주는 100% 해결되었습니다. 조상들로부터 대물림할 저주는 더 이상 없습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완전합니다. 주님의 사역은 완전하고 충만한 사역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율법의 정죄와 저주에서 해방시킨 자유인입니다(롬8:1-2). 이미 이 모든 일이 과거에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분별력을 가지고 복음의 은혜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고 그 자유를 전파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 압박감과 저주에 대한 공포심에서 해방되십시오. 영적인 자유인이 되십시오.
3.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재해석합니다.
혹자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우환을 겪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천국이 아닙니다. 단지 천국을 준비하는 광야생활일 뿐입니다. 그곳에는 만나와 메추라기와 반석의 생수를 체험하기도 하지만 타는 갈증도 겪는 곳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순례의 길을 가면서 겪는 눈물과 아픔과 고난은 저주가 아닙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법 안에 있지만 또한 자연법칙의 다스림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도 자연재해를 겪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재해나 자기의 잘못이나 인격의 부족함, 개인적인 유혹과 시험으로 겪게 되는 어려움은 저주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겪는 고난중에는 사단의 공격도 있습니다. 예수믿기 때문에 핍박받는 것은 상이 있습니다. 핍박은 저주가 아닙니다. 어떤이는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저주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식을 향한 회복과 회개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에게 해석되지 않는 어려움이 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높은 섭리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을 때에는 억지로 해석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수준이 달라지면서 깨닫게 될 수도 있고 이 땅에서 그 답이 주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서는 그때에는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고전13:12).
우리는 저주에서 축복으로 바꾸시는 복음의 위력을 경험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온 과거를 청산하십시오. 이번 사순절을 보내면서 주님과의 관계에서 막혀있는 문제가 없도록 회개하십시오.
둘째,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가까이 하십니다. 이를 위해 깨어 기도하십시오. 기도를 회복하십시오. 우리의 삶이 메마르지 않도록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많은 핍박과 도전과 환난을 이기는 힘입니다.
셋째, 저주의식이 아니라 은혜와 축복의식 속에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당대에 예수 믿는 사람의 경우에 샤머니즘적인 생각이 나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안에 축복을 약속하신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넷째, 다른 사람들의 고난을 쉽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예기치 않은 육체적, 가정적 어려움이 있을 때 함께 울어주십시오. 심판대의 자리에 서지 말고 위로하고 도와주며 동병상련의 아픔을 함께 나누십시오. 설령 징계를 받는다 할지라도 그의 손을 잡아주고 기도해주는 사랑의 짐을 함께 나누어 지십시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복음의 위력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를 이끌어 주실 줄 믿습니다. 조상탓 하지말고 마음껏 주님을 찬송하는 자로 살아갈 줄 믿습니다. 사단도 율법도 우리를 저주하거나 정죄하지 못합니다. 복음의 영광이 나를 이끌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갑시다. 복음의 자유와 은총을 향유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고난 속에서 피어나는 꿈같은 은혜와 축복
갈라디아서 3:1-7 / 고일성 목사
인생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60-70-세까지 산다고 하면 파란도 많고 곡절도 많을 것입니다. 웃을 때도 있고 울 때도 있고, 근심과 걱정으로 인하여 오히려 이 세상에 나지 않았으면 하는 때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고해와 같다고 하는 사람도 있어서 인생이 얼마나 고달프고 괴로움이 많은 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빛나는 자 혹은 높이울 자' 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쿠라라"는 성 프란시스가 태어난 아시시 지방에서 귀족의 딸로 태어나 프란시스의 설교를 듣고 18세에 수도원에 들어가 성 대미안 성당에서 41년간 살고 60세까지 살았던 성녀였습니다.
그녀는 성 프란시스가 죽은 후에 프란시스의 참다운 정신을 지켜나갔다고 합니다. 그녀는 포도넝쿨로 만든 침대에서 목침을 베고 잤으며, 옷 안에다가는 콕콕 찌르는 돼지 털가죽을 대어 입기도 하였습니다. 밤을 기도로 밝히는 때도 있었지만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불을 켜고 예배종을 울렸습니다. 법왕은 성 대미안 성당에 재산을 주어 다른 수도원과 같이 먹기에 곤란받지 않고 평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하려고 애썼으나'쿠리라'는 이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한 그녀가 251년 가을 임종의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천사와 같이 거룩하게 빛났으며, 위로하려고 모여든 사람들에게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하나님의 종 프란시스에게 배운 후로는 어떠한 아픔도 괴로움도 병도 견디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성 프란시스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의 고난에 같이 참예 했었고 그 모든 것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이겨냈던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은혜와 축복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4절에"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얻는다는 진리를 분명히 가르치신 바울 사도의 서신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한 유대인 일파가 들어와서 선전하기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없고 할례와 모세의 모든 율법과 제도까지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믿는 그들은 그 선전대로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바울 사도가 올바른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하여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은 믿음으로 시작하였다가 잘못된 교리 때문에 할레와 율법으로 돌아가면 과거에 받은 많은 괴로움이 결국 헛된 데로 돌아간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저는 고난 속에 담겨진 깊은 뜻을 소개합니다.
1. 인생고란 말이 있습니다
태어난 것이 괴로우며, 늙는 것이 괴로우며, 병드는 것이 괴로우며, 죽는 것 또한 괴로움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은 나그네와 객과 같아서 험한 산과 높은 고개와 넓은 강과 같이 위험하고 험한 길이 많고 평탄하지 않으니 어찌 불평이 없으며 번민과 고통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빈부귀천과 유, 무식은 물론하고 전부가 슬픔의 들과 고뇌의 바다에 던져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자는 의지할 곳이 없고,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으니 추위와 바람과 비를 피할 수 없으니 가난이 고통이요, 부자는 사람을 사용하되 신용할만한 사람이 없으며, 또 재산 보호에 따르는 고난 때문에 부자 또한 고통이요, 무식한 자는 모르는 것 때문에 괄시를 받으니 고통이요. 유식한 자는 아는 것 때문에 병이 생겨 고통입니다.
일본의 한 청년 찰학자는 인간문제를 연구하다가 살맛이 없다고 하여 자살하였습니다. 무식한 자는 유식한 자의 비아냥과 천대로 고통이 많습니다. 자식이 없는 자는 없어서 고통이요, 있는 사람은 있어서 고통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하여 자식 있는 자의 고통을이야기 하였습니다.
같이 살고 같이 죽을 것 같이 인정도 많은 것 같은 친척과 죽마고우도 내가 어려움에 빠지면 돌아보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생명과도 같이 사랑하던 애인도 홀연히 변하여 버리는 세상입니다. 힘쎈 항우를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건강한 사람이라도 병마에 시달려 고생하다가 죽기도 합니다. 부자라도 하루 아침에 망하여 가난하게 되고, 만인에게 높임을 받던 자도 하루 아침에 감옥에 가는 일도 있습니다. 이것이 다 인간생활의 고통인 것입니다.
미국의 연극 배우로 세계적으로 유명하여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았으며, 수 많은 재산을 소유하였고, 미인인 연극배우를 아내로 삼았고 자녀도 있고 모든 것이 풍성했던'채플린'은 말하기를"나는 세상에서 제일 많은 근심을 가지고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고난을 당합니다. 예수를 믿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론 우리는 그 이유를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고난에도 목적이 있고 그 가운데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쇠덩어리는 풀무불 속에 들어가서 녹아져야 강철이 됩니다. 금덩어리도 불에 들어가지 않고는 정금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큰 조개라도 그 속에 깔깔한 모래가 들어가지 않으면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지 못합니다.
거센 파도를 경험 한 사람이 진정한 마도로스가 되는 것입니다. 곡식이 잘 익어 곡간에 들어가려면 햇빛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비,바람과 찬서리도 있어야 합니다.
그와 같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인격과 성품, 그리고 능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성도로 성장하려면 때로는 고난도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시편119편71절에"고난당하는 것에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욥의 고난이 없이 인내의 욥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삼손이 불레셋에 내려가다가 사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 사자와 싸워서 죽이고 지나갔는데 돌아오다가 보니 사자의 시체 속에 벌들이 꿀을 만들어 놓았기에 마침 시장했던 삼손이 그 꿀을 먹었던 일이 있습니다.
인생행로에 있어서 이처럼 사자와 같은 위기를 만나고 고난을 만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니라 괴롭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잘 견디기만 하면 그 속에 단꿀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난 속에서도 꿈 같은 은혜와 축복이 있습니다.
오히려 고난 속에서 인간의 인내를 배우게 됩니다.
고난 속에서 겸손과 사랑, 동정심과 지혜와 용기를 얻게 됩니다. 이런 고난을 통하여 자신이 성장하게 됩니다.
신앙의 위대한 인물들의 인격은 고난 속에서 더욱 성숙해 졌으며 성장하였음을 압니다. 고난의 밤이 필요합니다. 시련의 골짜기도 때로는 필요합니다.
2. 우리가 겪게되는 고난은 과연 무엇입니까?
① 질병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를 사랑하시고 그 사람도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쇠약하여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천적으로나 후천적으로 몸의 일부가 불구가 되어 늘 그것 때문에 고통을 가슴에 안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때로는 병상에 눕게 됩니다
"병은 눈썹에서 떨어진다"는 속담과 같이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언제 어느 때 병에 걸릴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더욱더 하나님께 가까이 하게 하고 더 큰 은혜를 받게 하는 은혜의 가시가 될 수 있다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처럼 때로는 병이 하나님의 은혜의 가시가 있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 프랜시스'는 본래 부자집 아들로 태어나 세상의 향락을 좋아했으나 그가 큰 병에 걸려 누워 있을 때 그는 마음의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부자란 무엇인가? 삶이 무엇이냐? 왜 살아야 하는가?
이처럼 병 중에서 그는 비로서 인생무상을 깨닫고 새 사람이 되어 평생을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게 됩니다.
'죤 밀턴'은 소경이 되어 이 세상을 보지 못하게 된 후에 오히려 그의 신령한 영의 눈이 밝아져 그가 하늘의 낙원을 보게 되었고 그 결과 그토록 유명한"실락원"이라는 작품을 썼으며. "베토벤"은 귀머거리가 된 후에 영원한 하늘의 음악을 듣고 더욱 유명한 명곡을 남겼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사도 바울도 그 육신을 괴롭히던 가시 때문에 고통했지만 후에는 가시로 인한 고통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후에는 육신을 괴롭히던 가시로 인하여 더 은혜받고"나는 약할 때에 강하니라"고 외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계십니까?
질병과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과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질병이 헛되고 무가치한 것만은 아닙니다.
히스가야도 질병 중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기도하여 은혜를 받았습니다.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도 폐병으로 사선을 넘는 고통 가운데서 은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학교에서 질병으로 고통의 과정을 학습하게 된 것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② 실패의 고난이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여 하루 아침에 망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사업의 실패는 자신 뿐만 아니라 가정과 다른 사람에게까지 큰 고통과 충격을 안겨 주게 됩니다.
사업 실패뿐만 아니라. 예비고사. 입학시험, 취직시험, 여러 가지 시험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혼에도 실패하여 후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실패가 많은 세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실패의 고난도 헛되이 받아서는 안됩니다.
참으로 성공한 사람은 실패를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에디슨'은 수없이 실패한 사람인데 실패한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옛 말에"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실패 가운데 성공의 요소도 있으니 그것을 찾아내라는 말입니다. 실패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고칠 것은 고쳐야 합니다.
실패의 쓰라린 경험을 통하여 새로운 지혜를 찾아내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정직하게 실패를 시인해야 합니다. 남의 탓으로 돌린다든지 운명이니 하면서 구질구질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실패를 통하여 재기의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젊어서의 고생은 돈 주고도 못산다"고 했으며"한번 실수는 병가의 상사"라는 말도 있습니다. 실패의 죽은 사자 속에서 꿀을 찾아 내듯이 고난의 학교에서 실패의 학습과정을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한번의 실패는 인생의 좋은 경험이 됩니다.
이런 실패를 통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형성되고 더욱더 보람되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잠언24장16절에"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려지느니라"고 했습니다. 실패했다고 해서 비굴하게 고개 숙이고 마음마저 여리면 안됩니다.
그럴수록 더욱 진실되게 의롭게 살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넘어지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납니다. 실패의 고난 속에서 오히려 올바른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실패의 쓴잔을 통하여 고난 속에 담겨진 은혜와 축복을 찾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③ 슬픔의 고난이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 눈물을 흘려보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닙니다. 왜 이 세상은 눈물의 세상입니까?.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울면서 왔고 세상을 떠날 때도 눈물 가운데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한번 왔다가 한번 가는 세상입니다. 노인도 가고 청년도 가고 때로는 어린이도 갑니다. 의술이 아무리 발전하고 이제는 인간 베아로 복제 인간을 만들어 낸다고 할지라도 역시 인간은 한번은 가는 것입니다. 가는 것은 인간의 기술로는 막을 길이 없습니다.
히브리서9:27절에는"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는 말씀 그대로 가야 합니다. 때로는 갑자기 가기고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언제 눈물의 시간이 찾아올런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슬픔은 우리 모두의 공통된 경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눈물의 사자도 축복의 선물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캄캄한 밤에만 멀리 하늘의 별들을 볼 수 있습니다. 눈물의 랜즈를 통하여 영원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절망에서 영원한 소망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요한복음11:25절에"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눈물의 사다리를 통하여 우리는 영원한 세계로 들어갑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눈물을 통하여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사랑과 동정심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가장 고귀한 심령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눈물은 정성의 상징이요, 양심의 심볼입니다.
눈물 한 방울의 값을 친다면 진실로 한량이 없습니다.
눈물은 인생에서 가장 순수한 것입니다.
가장 맑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에 눈물은 우리에게 감명을 주고 감격을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울어야 할 때에 울지 않는 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울 때에는 울어야 합니다.
눈물이 매말라 간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인정의 눈물, 사랑의 눈물, 감사의 눈물, 감격의 눈물, 참회하는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자가 정말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우리의 가슴속에는 항상 많은 눈물의 샘이 흐르고 있어야 합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은 벌써 인간이 아닙니다.
눈물은 인간을 심화시키고 향상시키는 정신의 깊은 원천입니다. 우리는 이 원천을 메마르지 않게 해야 합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이란 책을 쓴 '스토우' 부인은 귀한 아들을 잃고 그 큰 슬픔 가운데서 당시 흑인 노예매매제도에 의하여 아들과 생이별하는 흑인 어머니를 동정하며 그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위대한 작품의 배후에는 큰 슬픔이 있었습니다. 슬픔은 때때로 이렇게 위대한 창조적 활동으로 승화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슬픔의 고난도 헛되이 받지 아니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을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학교에서 슬픔의 눈물을 잘 배워서 슬픔 속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음을 믿고 그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④ 비난과 속임수의 고난이 있습니다.
전적으로 믿었던 사람을 통하여 속임을 당하는 고난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스가랴13:6절에"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로는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이 배반하고 돌아서서는 온갖 거짓말로 비방하고 훼방하는 고통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시편31편13-14절에서 다윗은"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치려 의논 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여호와여 그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라 하였나이다"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니라"(마5:1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고생되는 일이라도 고생으로 생각하는 마음을 버리면 고생도 낙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여름은 의례 더운 것입니다. 이때 덥다 덥다 하며 떠들어 보아도 더위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보다도 도리어 덥다는 번뇌의 마음을 버리면 몸은 시원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에게는 형편이 좋은 성공의 때도 있지만, 형편이 좋지 못한, 가난하여 지고 병들고 비난과 핍박을 당하는 때도 있습니다. 이런 때에 싫다고 떼어 버리려고 떠들어 보아도 잘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마음대로 가난이나, 질병이나 실패나 곤고함이나. 슬픔을 내쫓으려고 애쓰기 전에, 가난이나 근심이나 슬퍼하는 마음을 내어쫓으면 마음은 항상 평안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마음 먹기에 따라서 더위도 피할 수 있고, 가난과 슬픔에서 벗어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고통을 피할 본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고통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고 있는 것이니 고난 중에도 참는 것이 고통을 피하는 길이요 방법입니다. 사자같이 무서운 고통이라도 참는 자에게는 복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잠시 지나갑니다.
영국출신의 작가이며 변호사였던'스티븐슨'은 결핵을 치료하기 위하여 요양차 몰로카이 섬에 갔다가 그곳 나병환자들의 건강상태를 보고는 거의 신앙을 버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간호사들의 뜨거운 사랑으로 그들을 돌보는 것을 보고는 믿음을 다시 되찾게 됩니다.
이 시간 소개하는 글은 그가 나병환자 촌에 있는 방명록에 쓴 것입니다. 그 글을 소개하고 마치려 합니다.
- 고통 속의 아름다움 -
이 곳에서.
그들의 뒤틀린 팔다리와
뭉개진 얼굴 모습을 본다면
그리고
매 앞에서도 미소를 짓는
순진한 병자들에게
한없는 연민을 느끼게 된다면
아마
어리석은 사람은
곧 그의 하나님을 부정하고픈
시험에 빠질 것이다
그들을 보면
움츠러 든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천천히 들여다 보면
고통스런 가슴속에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 슬픈 해안가를 거니는
그들을 ** 보면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도
침묵하고
찬양하게 될 것이다
(R. L. Stevenson)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 3:1-9 / 박조준 목사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2장을 통해서 그의 사도적 사명과 메시지의 신적인 기원에 대해서 강력히 변호한 바 있습니다. 그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고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화제를 갈라디아 사람들에게로 돌립니다. 갈라디아서의 내용을 구분하자면 1∼2장은 변명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복음과 사도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이제부터 생각하게 되는 3장과 4장은 말하자면 교리편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복음과 율법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불순한 영향의 결과로 인한 갈라디아 교인들 의 복음에 대한 불신앙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매우 질책하는 어조로 시작합니다. 1절에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3절에 는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고 했습니다. 필립스는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오, 그대, 불쌍한 갈라디아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바보스러울 수가 있소? 너무 너무 기가 막혀서 하는 말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복음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일종의 영적인 반역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너무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어떤 술법사가 그들을 홀리었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에게 마술을 걸었는가? 라고 의심할 정도로 그것은 너무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한 것 은 그가 거짓 교사들의 활동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에 누가 라는 문법적으로 단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필경 바울이 거짓 교사들의 배후에 있는 마귀의 정체, 다시 말하면 속이는 영의 활동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8장 44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 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부여잡고 그것을 활용해야 하는데, 마귀 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일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보세요. 사기꾼은 진실한 사람보다 말은 더 잘합 니다. 감동될 정도로 잘합니다. 문제는 그 생활의 열매가 얼마나 진실하냐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갈라디아 사람들이 어떤 일을 저질렀기에 사도 바울이 이처럼 그들의 지각없는 일에 대하여 한탄하고, 그들이 홀린 것이 아니냐고 묻게 되었습니까? 갈라디아 사람들은 유대주 의자들의 교훈에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진리를 잘 받아들였습니다. 죄인들이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는 진리를 잘 받았습니 다. 처음에는 사도 바울이 가르친 진리를 잘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인 지금은 사람 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하며 율법의 행위 역시 필요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무 놀랐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의 새로운 입장이 복음과는 너무 거리가 먼 것 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어리석음에 깜짝 놀란 것은 바로 그들의 눈앞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박히신 것이 밝히 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그들 눈앞에 재 현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볼 때 분명히 갈라디아 사람들이 꼬임을 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들의 눈앞에 그리스도께서 못박히신 것 이 밝히 보이는데 도대체 어떤 술법사가 어떤 방법을 써서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과 눈이 변하게 할 수 있었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역사 속의 그리스도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이 아니라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특별 선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2절 이하에 이렇게 선언했 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 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린도전서 2장 2 절에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 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하였습니다. 여기 본문에 못박히신 이란 분사의 완전시상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으 며, 또 그의 십자가의 은택은 언제까지나 생생하고 정당하며 유용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서 그 앞에 선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것은 전혀 그들 자신의 행위 때문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의 속죄의 사역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이루어 놓았거나 또는 이룰 수 있는 어떤 것 때 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단 한 번에 이루신 것 때문입니다. 복음은 인간에 대 한 좋은 충고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입니다. 더구나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라는 청 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사역의 선포입니다.어떤 요구가 아니라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못박히셨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이루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 진리를 굳게 붙잡고 있었다 면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들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일은 오직 믿음으로 이 좋은 소식을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유월절 어린양입니다. 여러분은 이 역사적인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저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출하시기로 하셨 습니다. 모세를 통해 애굽 왕 바로에게 아무리 말을 해도, 듣는 것 같다가 안 듣고, 약속을 했다 가는 어기고 그래서 재앙을 새롭게 내리게 되었습니다. 열 가지 재앙이 임하는데 마지막 재앙으 로 애굽 온 땅에 사람이든 짐승이든 처음 난 것은 다 죽이는 무서운 재앙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어린양을 잡아 고기는 먹고 피는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 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 리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말씀대로 하였습니다. 양을 잡아 그 피를 문 좌우 설주 와 인방에 발랐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셨습니다. 그러나 피가 없는 집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 생축의 처음 난 것은 다 쳐서 죽였습니다.
그렇지만 문설주와 안방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사람의 가정에는 아무런 일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 사람보다 선해 서,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이 무서운 죽음을 면했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어린양의 피 때문이었습 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이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고상한 생활을 하고 사람됨이 훌륭해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를 지셨기 때문에, 거기에서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에 그 피를 바른 사람은 죽음을 면하고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된 것 아닙니까? 사도 베드로도 같은 진리를 베드로전서 1장 18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 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금이나 은 같이 없어질 보배로속죄함을 받은 것 아니요거룩한 하나님 어린양 예수의그 피로 속 죄함 얻었네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찬송을 부르세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그 피로 속죄 함 얻었네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속함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피 공로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선한 행위, 무슨 공적을 첨가한다는 것 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대한 모독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 2:21).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의 지각없는 행위를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갈라디아 사람 들은 누가 어떻게 술수를 쓴다고 해도 대항했어야 마땅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이란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 선생의 꾀임에 넘어 가고 말았으니 바울 사도의 입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하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은 당 연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본문 2∼5절까지는 그들 자신의 경험으로부터의 논증입니다. 2절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고 했고, 4절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갈라디 아 사람들이 모두 성령을 받았다고 단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도 바울이 묻는 것은 그들이 주님을 영접했느냐, 아직 영접하지 않았느냐 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을 영접한 것이 행위 로냐 그렇지 않으면 믿음으로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되는 방식 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3절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바울이 묻는 것은 그들이 어떻게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하였 는가 하는 데 관한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의 행위로, 다시 말하면 율법의 요구에 따름으로써 이 루어진 것입니까? 혹은 듣고 믿음으로, 그러니까 복음의 메시지를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입니까?
이 두 가지 태도 중에 하나를 택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율법과 복음 사이의 상반을 그는 이미 2장 16절에서 넌지시 비친 바가 있습니다. 사 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 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 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하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율법과 복음 사이를 옳게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 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자신이 성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과 복음 사이의 차이입니다. 율법은 이것을 하라 고 하는데 복음은 그리스도 께서 그것을 다 해 놓으셨다 고 말합니다. 율법은 인간이 성취한 행위를 요구하지만 복음은 그리 스도가 성취하신 일을 믿으라고 요구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향해 무엇을 하고 싶어하게 만들고 복종을 강요하는 데 반해, 복음은 우리에게 약속을 주면서 이것을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복 음과 율법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릅니다. 그것은 한 사실의 양면이나 한 진리에 대한 해석상의 문 제가 아닙니다. 의롭게 되는 문제에 있어서는 루터의 말처럼 율법을 세우는 것은 복음을 무너뜨 리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서 사도 바울은 또 다른 방향에서 똑같은 논의를 제기합니다. 이번에는 그들이 성령 을 받았다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셨다는 관점에서 출발합니다. 5절에서 너희 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일이 율법의 행위 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했습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동사인 주시고, 행하시는 이 두 가지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속적인 활동에 대 해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두 동사는 부정시제로서 그들이 성령을 받은 때를 바울의 방문과 결부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들의 경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듯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를 방문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고 그를 통해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일들을 그들 가운데서 이루실 수 있었 습니까? 그 대답 역시 하나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고 그들은 성령을 받았는데, 이것은 그들이 율법을 복종했기 때 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복음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경험상의 사실이었습니다.바울은 갈라디아에 가서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눈앞에 밝히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들었고 또 믿음의 눈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복음 안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할례에 복종하지도 않았고 율법을 좇지도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은 것이 그들이 한 일의 전부였는데 그렇게 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셨습니 다. 이렇게 그들이 사실상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려 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라고 바울은 개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복음으 로 시작하였다가 복음에 율법이 보충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서는 안된 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향상이 아니라 변질입니다. 그러면서 6∼9절에서는 구약 성경으로부터 논증합니다. 6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 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고 했습니다. 바울이 아브라함을 인용한 것은 놀라운 지혜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언제나 모세를 그들의 선생으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 울은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 아브라함을 예로 듭니다. 그는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했습니다. 그 당시 아브라함은 나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100살에 가까운 아브라함과 90살이 된 그의 아내 사 이에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엄청난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 로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은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 믿음은 증명을 요구하지 않으며 찾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믿음은 단순히 하나 님의 말씀으로 족합니다. 더구나 아브라함의 믿음은 구체화된 것입니다.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믿음에는 확신의 요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니 이것 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다 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후사의 약속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그것 때문에 아브라 함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자신이 믿음으로써 의로운 존재로 받아들여졌습 니다.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그가 그것을 받을 만한 어떤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의로워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지 켰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 때는 아직 할례나 율법의 제도가 있지도 않은 때였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이 약속을 다른 주어진 약속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본문 7∼9절까지를 읽 어보십시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 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 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창세기 12장 3절을 인용했습니다. 우리는 이 축복의 본질이 무엇이며, 또 어떻게 해서 모든 이방이 그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가를 알아 야 합니다. 축복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축복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서 의로 정하다 와 축복하다 라는 두 동사가 동등하게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축복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 은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유대 민족의 조상이었지만 오직 한 길, 이 믿음 안에서 이방 사람들 이 아브라함의 축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마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할례 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에 맞서 할 례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벌써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 다. 본문 7∼9절까지에서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녀들은 그의 육체의 계통을 좇아 난 후손, 다시 말해서 유대인이 아니라 그의 영적인 후사, 그와 같이 신앙을 소유한 사람, 그리스도를 믿는 사 람임을 가리킨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이 모든 일을 알고 있어야 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갈라 디아 사람들은 그런 거짓 교사들의 꼬임에 넘어가서는 안될 사람들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눈 앞에 밝히 보이는,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었던들 그들은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 았을 것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로 말하면 그렇게 사도 바울에게 복음의 원리를 잘 배웠는데 거 짓 교사들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복음을 변질시키고 있다는 것을 당장에 알아챘어야만 했습니다. 우리도 인간의 모든 이론이나 가르침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특별히 성경과 우리 신앙의 경험을 좇아 알고 있는 대로 판단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복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한마디로 못박히신 그리스도이며 동시 에 그가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신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 리스도를 밝히 나타내 보이는 일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삼고 그의 완성된 사 역 안에서 안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 것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본문 1∼9절에 믿음 이란 명사와 믿는다 는 동사가 일곱 번이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음의 단 하나의 요구는 믿음 입니다.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게 은혜를 베푸셔서 이 복음을 믿어 의롭다 하심을 받을 뿐더러 성령의 충만한 은사,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살라
갈 3:4-5 / 이한규 목사
가끔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했다가 자기 공로를 내세운 율법주의로 변질되는 사람이 많다. 처음 예수 믿을 때는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지만 점차 주일성수, 새벽기도, 성경 읽기, 십일조 생활 등의 경건 생활에 익숙해진다. 그래도 그런 경건 생활로 구원과 축복을 받는다고 착각하지 말라. 경건한 삶을 사는 이유는 성도의 당연한 모습이고 당연한 책무이기 때문이다. 자기 소원이 이뤄지는 축복을 핵심 목표로 경건 생활을 하는 것은 진짜 경건 생활이 아니다. 모든 축복의 기본 원천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는 믿음이다.
남보다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고 헌금 많이 해도 자랑하지 말라. 더 나아가 남의 신앙을 깔보지 말라. 그러면 나도 ‘다른 복음’의 함정에 빠진다. 복음으로 시작했으면 끝까지 복음으로 살라. 처음 믿을 때는 믿음으로 복을 받다가 점점 행함으로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말라. 구원과 축복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주어진다. 그러므로 행위보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에 우선적인 관심을 가지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얻는 유익은 무엇인가? 첫째,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면 마음이 평안해진다. 둘째, 영혼이 깨끗해진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면 영혼은 막 내린 눈처럼 맑아진다. 셋째, 거룩한 에너지가 생긴다. 무엇인가 새로운 영적인 힘이 생기는 것을 느낀다. 넷째, 절대 승리를 얻는다. 하나님을 잃지 않는 한 패배는 없다. 하나님이 없으면 절망스럽지만 하나님과 교제하면 소망이 생긴다. 다섯째, 가장 복된 삶이 펼쳐진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만큼 복된 것은 없다.
< 하나님과 교제하는 길 >
어떻게 하나님과 깊이 교제할 수 있는가?
첫째,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라. 하나님은 인간의 어떤 행위보다도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 자체에 가장 큰 점수를 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려는 노력을 결코 포기하지 말라.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으면 사람이 추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나의 삶이 우울한 것에 대해 남 탓이나 환경 탓을 하지 말라. 내가 하나님을 힘써 추구할 때 나의 삶에 생명의 빛이 나타나면서 나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말씀이 참된 사실임이 증명될 것이다.
둘째, 하나님 안에서 나를 포기하라. 하나님의 임재는 노력해서 얻어지기보다 내가 무엇인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할 때 얻어진다. 이제까지 하나님의 임재 체험이 없었다면 그것은 대개 포기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자아에 도취되면 나르시스의 운명의 펼쳐지지만 자아를 포기하면 날아오르는 운명이 펼쳐진다. 나의 감정에만 반응하지 말고 남의 눈물에도 반응할 줄 알라. 내가 남을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려고 할 때 기분이 좋은 것 이상으로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
셋째,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라. 가짜 사랑은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선물에 관심이 많지만 진짜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하나님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이 하나님과 깊은 교제로 들어간다. 또한 참된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낳는다.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이뤄진다. 성도가 능력과 권세가 넘치는 삶을 살고 하나님의 임재의 축복 가운데 행복을 노래하며 사는 간단하고도 심오한 비결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넷째, 하나님께 더 많은 시간을 드리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과 상당히 비례한다. 다른 어떤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날 때 하나님을 생각하며 일어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 하나님을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라. 그처럼 실제 삶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려는 의식적인 훈련을 통해 생활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게 하라.
인생에서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되 한 가지 두려움만은 가지라.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기는 것이다. 그 교제가 끊어지면 축복의 샘이 끊어지고 그 교제가 깊어지면 축복의 샘도 깊어진다. 스스로의 공로의식을 버리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며 내일의 축복과 평안을 예비하라. 내가 하나님과 깊이 만나는 것은 내게 큰 기쁨을 주지만 하나님이 나와 깊이 만나시는 것은 하나님께도 큰 기쁨이 된다. 하나님이 내게 기쁨을 주시지만 나도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다.
교회, 아브라함의 자손
갈 3:5-14 / 이수영 목사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의 시조입니다. 단지 혈육상으로만 보면 아브라함의 선조들이 또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겠지만 하나님께서 노아 때 대홍수로 노아의 가족만 남기고 온 인류를 지면에서 한 번 멸하셨고(창세기 7-9장), 그 후 바벨 탑 사건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사람들을 온 지면에 흩어버리신(창11:8-9) 뒤에 언약의 백성으로 처음 택하신 이가 아브라함이었고 하나님께서 언약의 표징으로서 명하신 할례를 처음 받은 이도 그였기에(창17:10-14, 23-24)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백성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창12:1-3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창12:1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 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만큼 칭찬들을 만한 그의 성품이나 행적에 관한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리고 왜 하필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는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인 주권적 은혜로 아무 자격조건 없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자기가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 택하심을 받았음을 아는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고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그에 의해 번영하는 백성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실 때는 아무런 자격조건 없이 택하셨지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을 아브라함이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먼저 명령하시기를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신 후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고 번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그동안 잘 살고 있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결단과 순종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는 백성을 말합니다.
넷째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하시면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단지 복을 받을 뿐 아니라 “복이 될지라.” 하신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복을 얻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만 복을 누리지 않고 다른 이들을 복되게 하는 백성인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베푸시는 복을 함께 누릴 백성을 땅의 모든 족속에게로 확대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나라, 민족, 언어 구별 없이 모든 시대, 모든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불러 모으시는 백성입니다.
그런데 “누가 아브라함이 받은 복의 진정한 상속자인가?” 하는 질문이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 가운데서 제기되었습니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주장하기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창15:6의 말씀을 따라 그들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본문 5-6절입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따라서 아브라함이 받은 복의 진정한 상속자는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이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 7-9절입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롭다 여기심을 얻을 것이며,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복을 받아 누리게 되리라는 것이 사도 바울이 내린 결론인 것입니다. 이런 결론은 그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에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즉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롬4:11-12)
율법을 준행하며 할례를 받는 것으로 유대인들이 결코 아브라함이 받은 복의 독점적 상속자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율법을 준행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의롭게 만들기보다 오히려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하는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본문 10-13절을 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신27:26)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2:4)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레18:5)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신21:23) 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은 여기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는 자들이 오히려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이유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면 모든 율법을 하나도 빠짐없이 철저하고 완벽하게 지켜 행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한 율법의 말씀을(신27:26) 상기시킵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는 자들이 오히려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둘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셔서 율법을 다 지켜 행하지 못한 죄와 그로 말미암는 저주에서 우리를 살려내시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인데 그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결론적으로 유대인들뿐 아니라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받아 누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이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모든 복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영광이며 복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할 때 우리에게는 그의 복만 물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보여준 믿음의 유산이 또한 우리에게 물려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줄 알고 떠날 줄 아는 믿음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쓰기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히11:8)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갈 땅이 어떻게 된 땅인지를 알지도 못한 채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났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신뢰와 절대순종의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그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그의 복 주심의 약속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히는 것이 아브라함이 나이 백 세 때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신(창22:2)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일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하나님의 명령에 반발하거나 철회를 간청하거나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 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에 대한 철저한 믿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즉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 하신 말씀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하신 말씀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속으로 “이삭에게서 태어나는 자식이 있고 그를 통해 큰 민족이 이루어지려면 내가 이 아이를 죽여 제물로 바치더라도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다시 살려내실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히11:17-19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창21:12)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고 가슴에 품으며 그대로 믿는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순종은 그런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또한 다른 이들과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해주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들이 되게 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을 우리도 받아 누리게 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복 받게 하고 세상 모든 민족으로 하여금 복 받게 하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전도하는 것입니다. 선교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래야 복 받는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에 온 세상으로부터 구원에로 택하셔서 불러내신 하나님의 백성을 일컬어서 교회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유일하신 주로 믿고 따르는 무리를 통 털어서 교회라고 부릅니다. 교회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사명공동체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구원의 복음을 전하며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참되고 복된 삶을 증언해야 할 거울이 되는 것이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그 사명을 잘 감당하는 우리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사람
갈 3:5-15 / 정영도 목사
한국의 추석의 유래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 한민족이 한 해의 농사를 감사함으로 하늘의 하나님께 제천행사(祭天行事)를 하고, 씨족들과 동네 사람들이 함께 즐거워하며 잔치한 것이 유래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태조 이성계가 유교를 국교로 삼고, 정책으로 모든 백성들에게 조상숭배를 조장하게 됨으로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은 조상숭배의 문화가 전래되어 오고 있어서 구조적으로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있다. 조상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뿌리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민족의 뿌리는 과연 단군인가? 단군은 실재인물인가? 고려의 불교승려였던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보면, 일연은 우리 민족의 시조를 단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웅녀<곰>와 환웅<환인의 아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단군이다. 이 단군이 자라서 한민족의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단군을 국조로 믿는 대종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오늘날 이것을 역사적인 사실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1. 나의 뿌리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역사를 더듬어 보아야 한다. 역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금방 알 수 있다. 성경은 족보를 중시한다.
1) 육신의 조상 - 육신의 혈통,
한국의 각 성씨 시조 - 한반도 이주한 조상들 - 셈 - 노아 - 아담
2) <영혼> 믿음의 조상을 찾아보자/신앙의 뿌리
① 하향식 - <누가 누구를 낳고>
상향식 - <그 이상은>- 그 아버지의 아버지> 자기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이다.(눅 3:23)
② 신앙의 아버지
각 지 교회의 목사는 영적인 아비이다. 바울은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딤전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고전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③ 정목사에게 신앙과 신학을 가르쳐 준 신앙의 선배들은 누구인가?
개혁교회-장로교, 한국 장로교회를 낳은 가장 대표적인 인물-장로교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 미국 북장로교회-장로파 청교도들/ 영국의 존낙스-종교개혁자 칼빈/주님의 사도의 신앙(성경)-예수 그리스도/낳은 구약교회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다.
3)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후손 된 성도
① 열국의 아비-아브라함-주의 약속, 예언
(창 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창 17:6)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창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②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자가 누구인가? (6절)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들이다.
(갈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롬 4: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 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롬 4: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법이다. 세상 법은 개정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법은 영원하다.
2. 아브라함의 복을 동일하게 받는 사람
1)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무엇인가? (창 12:1-2)
①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케 하시는 복을 받는다.
② 복의 근원이 된다 (2-3절)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저주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저주를 내리신다.
2) 어떻게 아브라함은 이 복을 받았는가? 믿음으로 (6절)
(갈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① 율법의 행위로는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없다 (10절).
율법을 지킴으로, 사람이 선행으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 이유?
율법 전체를 다 지키지 않으면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불신자의 구원?> 예화 - 국법을 모르고 어긴 사람?
@교통법규 위반-모르는 것이 통하는가?
②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불신앙으로 깨어진 관계과, 신앙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외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리고,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신 예수님의 그 은혜를 자신을 향한 것임을 믿을 때에
(갈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3) 믿음으로 복을 받는 사람은 아브라함이 받은 것 그 이상이다.
① 창대 케 되는 복, 복의 근원이 된다.
② 더 큰것- 성령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2절).
(갈 3: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③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서 아들의 권세를 가진다. -천국열쇠이다.
마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④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그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3. 결 론
1) 육신의 조상은 썩을 육신을 물려주었으나, 영의 조상은 우리에게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되는 믿음을 물려주었다.
우리도 우리의 후손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하겠다.
2) 아브라함이 믿었던 그 하나님을 믿는 자는 아브라함과 동일한 복을 받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믿음으로 그 복을 받기를 바란다.
(갈 3: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십자가에서 해결된 복과 저준
갈라디아서 3:6-14 / 김형익 목사
1. 회색지대는 없다: 율법이 선포하는 두 가지, 복과 저주(신 27,28; 수 8:30~35)
율법을 피할 길이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인간의 상황을 가장 잘 묘사해주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법을 만드셨고, 인간을 그 아래 두셨습니다. 이 법을 떠나서 살 수 있는 길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복과 저주를 선언합니다. 정확하게는 복이냐, 저주냐입니다. 둘 중 하나 밖에는 없습니다.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율법에 의해서 의인과 죄인으로 나뉘어지고 영복과 영벌에 처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딜레마는 율법을 다 완전하게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저 행위만을 구속하는 것이라면 모르지만, 율법은 마음의 문제 즉 탐욕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과 행위, 생각과 태도에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인간이 다 율법을 범한 자라는 것이 딜레마입니다. 즉, 인간은 다 율법 앞에서 그리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범한 자라는 사실입니다. 율법의 기준으로 복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본래적 상황은 율법 앞에서 받을 복은 없으며, 저주만을 받게 되어 있는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피할 수 없는 율법의 요구인 복과 저주 앞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선결되어야 하는 조건은 율법의 순종을 통해서 주어지는 복을 받는 것과 율법을 불순종함으로써 얻게 되는 율법의 저주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이 두 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구원은 하나님의 복을 받고 하나님의 저주를 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주제입니다. 먼저 율법이 선포한 복이 어떻게 죄인에게 주어지는가를 보겠습니다.
2. 율법이 선포한 복은 믿음으로 주어진다(6~9)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율법이 선포한 복은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주어집니다.
A. 누가 아브라함의 참 자손인가?
율법은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법은 본성상 강제력과 구속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키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준 모세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구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의미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표시인 할례를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에 와서 거짓 복음을 가르쳤던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의 요지는 설령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하여도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데, 유대인이 되는 조건인 할례를 요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논리에 이어서 바울 사도는 여기서 과연 누가 참 아브라함의 자손인가 하는 문제를 던지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 사도는 창 15:6을 인용합니다. 6절 말씀입니다.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것은 바울 사도가 이신칭의의 교리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제시하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바울사도가 강조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과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해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하시는 것은 아브라함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우문이 될 수 있습니다. 명백하게 그 자손은 유대인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의도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는가를 생각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듯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시고 복을 주시고 유대인 외의 이방인들에게는 저주를 내리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7절에서 바울 사도는 창 15:6을 근거로 자신의 대답을 줍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가 혈통적으로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구분없이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가졌던 것과 동일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타락 이후 아담 이래로 모든 죄인을 위한 계획이었음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하나님의 의도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울 사도의 관심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행위로 구원을 얻고 신약 시대에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성경에서 벗어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8절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바울 사도는 구약을 인용합니다. 8절은 창 12:3 또는 창 18:18이나 창 22:18의 인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썼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셨는데, 그 내용은 ‘모든 이방(인)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은 단순히 그 혈통적 후손인 유대인만을 구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 즉 구원을 얻게 하시려는 의도였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논리대로라면, 바울 사도의 구약 성경에 대한 해석이 옳다면, 유대인들은 그들 자신의 존재와 사명 그리고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율법을 순종한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면 그 후손, 아브라함의 자녀도 마땅히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첫번째 문제?아브라함의 참 자손이 누구인가?에 대한 결론을 9절에서 보여줍니다.
갈 3: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복 즉 구원을 받는 것은 빤듯하게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B. 아브라함의 믿음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복음을 듣던 때부터 시작해서 그의 생애 전체에 걸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 즉 그의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특별히 그의 생애의 절정으로 기록되는 창세기 22장의 기사에서 아브라함은 자기의 믿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즉, 그의 믿음은 우리가 믿는 믿음과 본질상 동일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합니다. 이삭이 산으로 올라가면서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한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묻자(창 22:7) 아브라함은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시리라”라고 대답함으로써 자신이 자기의 아들을 대속하실 구주를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그를 죽이실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대속을 믿었습니다.
또 아브라함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사환들을 산어귀에 두고 올라갈 때 아브라함은 말했습니다.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 22:5). ‘돌아온다’는 동사는 복수입니다. 이삭과 함께 돌아오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나 아브라함의 믿음이나 본질상 같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사는 것이고 아브라함은 그 전에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내용은 같습니다.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이후에 살고 있기에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화될 수 있는 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역시 아브라함과 동일하게 하나님을 믿고 의롭다함 곧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9). 율법이 선포하는 복을 얻는 것은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3. 율법이 선포한 저주는 십자가에서 해결된다(10~13)
이제 또 한 가지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저주야말로 율법이 불가불 가져오는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 회당에서는 율법을 범한 자에게 주는 형벌로 40에 하나 감한 매를 때릴 때 그 형벌을 받는 자는 맞을 때마다 신 27장에 있는 율법의 저주에 대한 말씀을 소리내어 읽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매를 5번이나 맞았다고 했으니(고후 11:24)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경험했을 터입니다.
A. 우리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 이유
10절 말씀이 바로 그 본문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신명기 27:26의 인용입니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는 의롭게 되기 위하여 율법의 행위에 의존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구절을 통해서 바울 사도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의존하는 자들이 왜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가 하는 이유에 관한 것입니다. 율법은 그 모든 율법의 조항들을 다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작은 조항 하나라도 범한다면 그는 설령 다른 조항들을 다 잘 지켰다고 하더라도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을 지키는데 실패한 것에 대한 벌은 하나님의 의로운 저주일 수 밖에 없습니다. 10절에는 숨겨져 있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다 율법을 범한 자다 하는 전제입니다. 이런 점에서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의롭고 합당한 저주를 받아야 하는 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유대인이나 유대인이 아닌 자나 모든 인간은 다 마찬가지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면 그는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인간의 전적 부패’라고 말합니다. 이 가르침에 의하면, 타락 이후에 하나님의 명령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인간은 없으며 오히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매일 율법을 범하고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율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된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기에 율법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전부는 오직 저주 밖에 없으며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 아래 데려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율법의 행위를 강조했을 때 사실 그들은 스스로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의로움에 이르기는 커녕, 도리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자신들을 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의 기준을 따라서 살고자 한다면 그는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될 것이고 결코 거기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이 우리를 축복할 수 없고 저주 아래 놓이게 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 사도가 씨름했던 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이것이 11절 말씀입니다.
갈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바울 사도 자신은 율법을 지키는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한 노력을 철저하게 해 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는 만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율법 행위에 기초한 만족을 얻기 위해서 그는 심지어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는 일까지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행위에 의존하는 것은 결코 그를 영적 만족?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확신?에 이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진리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11절에서 하박국 2:4 말씀을 인용하여 주장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위는 서로 다른 원리에 따라서 작용을 합니다. 서로 배타적입니다. 섞을 수가 없습니다. 12절의 설명입니다.
갈 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바울 사도는 구약의 레위기 18:5을 다시 인용합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면 그는 의로운 자가 되겠지만 그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음을 다시 한 번 보여줍니다. 율법 행위에 의존하는 것은 저주를 가져올 뿐이고,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만 말미암는 것입니다.
B.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죄인의 구주가 되시는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했던 유대인들에게는 물론이요, 이후의 인류 역사 속에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는데 가장 어려운 장애는 바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13절 하반절에서 바울 사도는 또 다시 구약 신명기 21:23을 인용합니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구약 시대에 저주를 받은 자는 그 시체를 해지기 전까지 나무에 달아놓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무에 달렸다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의 표시였습니다. 이 말씀과 전통은 후일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었음을 바울 사도와 베드로 사도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행 5: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베드로 사도가 공회 앞에서 유대인의 지도자들에게 했던 말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달아 죽였다고 하지 않고 ‘나무에 달아 죽인’이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가 되었다는 신 21:23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24도 같은 의도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바울 사도는 처음 갈라디아 지방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회당에 들어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 설교에서 이렇게 이 사실을 암시합니다.
행 13:29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바울 사도나 베드로 사도가 이로써 의미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라는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너무나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우리 죄인의 구주로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결되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앞에서 바울 사도가 말한대로 우리가 다 율법을 범한 자라면, 우리는 다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율법의 저주를 받아 우리가 다 나무에 달린 자가 되어야 했으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바울 사도는 선언합니다. 나무에 달려 죽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죄인의 구주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나무에 달려 죽으사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에 죄인의 구주가 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받을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써 우리에게 임할 저주를 제거해주셨습니다.
이제 바울 사도는 오늘의 본문의 결론을 말합니다. 14절입니다.
갈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하려 함이니라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는?이 우리 모든 이방인들에게 미치게 되고, 반면에 우리가 받아야 했던 율법의 저주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에게 남김없이 부어짐으로써 우리에게서는 완전하게 제거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써 성령의 약속 곧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주가 제거되고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에게 아브라함의 복이 임하였으며 저주가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모든 자에게 말입니다.
4. 교훈과 적용
A. ‘죄송합니다만 당신은 저주를 받을 사람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모든 인류가 피할 수 없이 받는 하나님의 저주 선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을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저와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사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길 뿐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우리가 그 저주를 피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B. ‘옳아서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너무 옳아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아무리 옳아도 그가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을 만족시켜 드릴 수 없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 기준을 채우려는 종교생활은 언제나 불만족에 이를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이 불만족은 온갖 형태의 위선으로 나타나기가 쉬운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다녀도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모습을 반영해줍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아무리 종교적 열심을 더하고 더해도 채울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영적인 만족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의로움 안에서만 우리는 완전한 만족을 얻게 될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C. ‘교회를 다닌다고 세례를 받았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또는 교회에서 얻은 직분이 그들 중 아무 것도 우리를 아브라함의 자녀로 만들어주고 구원받은 성도로 보장해주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그 보장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여러분의 구원을 보증해주지 못합니다. 믿음 뿐입니다.
D. 오직 믿음!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의 평생의 모토였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으로 믿는 자를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감격하여 살았습니다.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이, 경건하지 않은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분이신 하나님을 인하여 그들은 기뻐하였습니다.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원리를 잊지 마십시오.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다 빚이요, 불평이고 불만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사십시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복
갈 3:6-14 / 박기완 목사
김익두 목사님에 대한 일화가 많습니다. 그분은 유명한 깡패였지만 예수를 믿고 변화받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신촌 서북교회에서 목회할 때.... 어느 여름날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교통수단이 좋지 않을 때에 보따리를 메고 산을 넘어가는데, 너무 덥고 힘들지만 빨리 올라가서 산 위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좀 쏘이면서 쉬고 가리라 생각하고, 부지런히 올라가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때라 웃통을 다 벗어 젖히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있었습니다.
그런데 맞은 편에서 술에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올라오더니 김익두 목사님을 쳐다봅니다.
그러면서 다짜고짜 "야! 너 왜... 나보다 먼저 올라왔냐?" 그러더니 막 때리는 겁니다.
이 김익두 목사님이 그냥 맞습니다. 옛날 같으면 당장 요절을 낼 테지만 꾹 참고 때리는 대로 다 맞습니다.
마치 '이사 나간 집 굴뚝 부수듯이' 그냥 때려부수더랍니다. 한참을 때리더니.. 전혀 대항을 하지 않으니까 숨을 몰아쉬면서 씩씩거리고 있더랍니다.
그때 목사님 말씀이 "형님 다 때렸소?" 그러면서 악수를 했는데, 그 손이 아주 대단하거든요...
딱 붙들고 악수를 하면서 한 말이 유명한 일화가 되었죠....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그러더랍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이 친구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으니까 "나 김익두야!" 하고 말하니까 이 사람이 깜짝 놀라면서 "아이쿠, 죽었구나!" 그러면서 벌벌 떨더랍니다.
"내가 예수 믿기 전이라면 자네는 오늘 여기서 장례식까지 끝나는 건데.... 내가 예수 믿은 덕에 복은 자네가 받았네" 하고 말합니다.
"아이구, 그러면 나는 어떡하면 좋을까요?"
"뭘 어떡해? 따라와..." 그리고는 그 사람을 데리고 가서 부흥회에 참석하게 하고 예수를 믿게 해서.... 그가 나중에 장로가 되었다고 하는 그런 일화입니다.
이 사람, 술 먹고 행패를 부렸지만..... 김익두 목사님을 만나는 바람에 오히려 예수 믿고 구원을 받으며.... 장로가 되어 교회에 충성하니... 훗날 천국에서 큰 상급을 받는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이와같은 일보다도 더 복된 일이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그랬고,
9절에서도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그랬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고,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다 받는다고 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은혜요 복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복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복을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창세기 12:2-3절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그랬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그의 이름이 창대하게 되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그랬습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복을 몰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야곱이나 요셉과 같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복이 임합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 갔는데 그때부터 요셉으로 인하여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억울하게 누명을 써서 감옥을 갔는데 전옥이 복을 받았습니다(창39:21).
야곱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을 갔을 때 야곱으로 인하여 라반의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창30:27, 30).
이렇게 복을 몰고 다니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 주변의 사람도 덩달아 복을 받습니다. 그냥 옆에 있기만 해도 복을 받아요.... 그런 사람과 손을 잡고 동업을 하면 그의 사업이 불같이 일어납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복의 근원입니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바로 그런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녀들은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고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주시겠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배와 같다' '정금과 같다' '많은 보화보다 낫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은 성령을 선물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간혹... 하나님을 무서운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으로 인식합니다.
이것은 죄를 지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때 아담이 말하기를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그랬습니다(창3:10). 왜 아담이 하나님을 두려워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범죄한 사람은 하나님이 진노의 하나님.. 무서운 하나님으로 인식이 되죠....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신명기 5:6절 이하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마라....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4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그러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3-4대까지라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할아버지 죄 값을 내가 지고, 아버지의 죄 값을 내가 지며, 그 저주를 물려받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결코 자손들이 죄 값을 물려받는다거나 저주를 물려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는 부모의 영향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그 부모의 행위가 3-4대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대개 오래 살면 증손자까지 보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못 살면 나 자신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식, 내 손자, 증손자까지도 나의 영향을 그대로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부모님 때문에 고생하고 산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부모가 정신을 차리고 바르게 살았더라면 내가 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부모님이 하나님을 모르고 죄 가운데 살다보니 덩달아 우상숭배를 하게 되고 자손에게까지 그 죄를 답습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부모의 영향은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습관이 이미 어려서부터 형성되기 때문에 무심코 던지는 부모의 말 한마디나 행동 하나까지도 자녀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모릅니다.
이처럼 부모 때문에 자손들이 영향을 받고 고생을 하는 것이므로 아비의 죄가 3-4대에 이른다는 말씀의 뜻은 죄 값이나 저주를 물려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에스겔 18장을 보면, 범죄한 그 영혼은 반드시 죽을 것인데 아들이 아비의 죄악을 담당하지 않을 것이며,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각자가 자신이 범한 죄의 값을 지불하는 것이지 결코 아들이 아버지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아버지가 아들의 죄를 대신하는 그런 일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죄를 자식이 다 뒤집어쓰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범한 죄가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그 죄로부터 돌이켜 바르게 살면 그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운명적으로 타고나면서부터 저주를 받았다거나, 안 믿는 사람처럼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또는 조상의 죄를 물려받아서 그렇다는 등...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모두 다... 자기 하기 나름입니다.
신명기 38:15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모든 저주가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음으로 해서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인간이 죽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그 영혼은 지옥으로 가게 된 것이 저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들이 받는 저주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가 불순종함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저주를 속량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지옥의 멸망에서 우리를 건져주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함으로 받게 되는 모든 저주를 속량 받았습니다. 지옥의 멸망을 받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마귀의 자녀이었으나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지옥 백성이 천국 백성으로 바뀌었습니다. 과거에는 저주아래 있었던 불행한 인간이었지만 이제는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을 보면,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입니다. 이 세상 풍속을 좇았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마귀를 따랐으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본질상 진노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아니함으로 구원을 얻지 못하고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은 저주 중에 가장 큰 저주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잘살고 출세하면 무엇합니까? 이 세상을 떠나면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한 저주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신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저주와 상관없는 축복의 사람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우리에게는 아직도 타락의 근성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축복받은 성도로써... 빛의 아들이 되고 거룩한 행실로 옷을 입어야 될텐데... 자꾸만 죄를 짓거든요... 사도 바울도 이런 고통에 시달리며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할 것인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고 탄색했습니다(롬7:24).
그런데 놀라운 소식이 오늘 본문 14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아시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4-5절에서 예수님은 "사도들과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제자들이 오순절에 이르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14: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을 가리켜 보혜사(保惠師)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는 돕는 자, 헬퍼(Helper)를 말합니다.
헬퍼는 돕는 사람, 거드는 사람이란 뜻인데.... 협력자, 조력자, 후원자, 원조자, 지지자, 구조자, 위안자.. 그런 뜻입니다.
높은 산을 정복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이끌어 주는 사람도 헬퍼라고 하죠... 산악인들에게 있어서 헬퍼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헬퍼가 없으면 그 험악한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할 수 없어요...
헬퍼는 그 지역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입니다.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지리를 훤히 알고 그 지역의 기후를 알고 어디에 뭐가 있다는 것을 다 압니다.
그래서 헬퍼를 잘 선정해서 그의 안내를 받아야만 죽지 않고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령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보다 더 유능한 헬퍼가 어디있습니까?....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시고... 나의 앞길을 아십니다. 나의 필요가 무엇인지... 무엇을 도와 줘야 할지를 잘 아십니다.
그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라가면... 은혜의 길로, 복된 길로, 마침내 승리의 길로 가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혼자... 나 스스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나 혼자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고, 나 혼자서는 말씀대로 살 수 없으며, 신앙의 지조를 지킬 수 없습니다.
더구나 나 혼자서는 환난과 시험을 이기고 끝까지 승리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에 들어가는 그 날까지 우리를 책임지고 인도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를 도와주는 유능한 헬퍼...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성령께서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며, 절대로 우리를 고아와 같이 홀로 두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요14:18).
성령께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며, 때로는 책망도 하시고, 우리를 진리의 말씀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장래 일을 알려주신다고 했습니다(요16:8-13).
뿐만아니라,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해 주시되,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십니다(8:5-27).
이처럼 성령이 우리 개개인을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주장하시는데 실패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고 했습니다(롬 8:28).
고린도전서 12:3절을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시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진실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성령을 받으신 분들입니다.
성령이 그 안에 계십니다.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 회개하게 되는 것, 믿음으로 거룩하게 살다가 천국에 가는 것 이 모두가 성령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절에 보면,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죽었습니다.
죽은 자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죽은 자에게서는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바르게 살 수 있으며, 죽은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또 죽은 자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100%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자꾸만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은 아직도 영의 사람이 되지 못하고 육신에 속한 사람으로, 믿음이 어린 젖먹이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시기하고 분쟁합니다(고전 3:1-3).
그러나 성령의 은혜가 임하게 되면 죄와 싸워 이기게 됩니다. 장성한 신자가 되고, 신령한 신자가 됩니다.
죄짓기를 잘하던 사람이 죄를 멀리하게 되고, 술을 좋아하던 사람이 술이 싫어지게 되며, 거짓말을 잘하던 사람이 정직하게 되고, 도적질을 하던 사람이 도적질을 그치고 선한 일에 힘쓰게 됩니다. 옛사람이 변하여 새사람으로 바뀌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임하면 모든 죄를 회개하고 거룩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믿음으로 살게 되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따라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36:26절을 보면,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새 영은 보혜사 성령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우리 속에 주심으로... 돌덩이와 같이 단단한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뀌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성령을 우리 속에 두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코 내 힘으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지만 성령이 함께 하시면 말씀대로 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전에는 더러운 죄 가운데 살았으나 이제는 더러운 죄 가운데서 구원함을 받아 거룩하게 살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을 받으면... 사람이 변화되고, 말씀대로 살게 되며,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물질의 복도 주셔서 다시는 기근의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주받은 황무지와 같은 땅이 에덴동산으로 변하는 것처럼 축복의 사람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신32:10, 사62:4).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분부하신 말씀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라" 그랬습니다. 전도하는 것도 먼저 성령을 받은 후에 전도하라고 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가장 큰 축복은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믿음으로 성령을 약속으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누구십니까?.. 성령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입니다. 예수님의 또다른 보혜사로서..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라면, 성령님은 영으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셨기에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았지만... 성령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말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모든게 다 해결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더 이상의 문제도 어려움도 없습니다.
한번은 모세가 양을 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떨기나무에 불로 임하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애굽 땅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 내라!" 그때 모세는“하나님 저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혀가 둔하고 말주변도 없는데 어떻게 그런 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누구관대 바로에게로 가며 이스라엘에게로 가오리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그러셨습니다(출3:12).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모세가 모세...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드온이란 사람이 어느날 추수해서 타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때는 전쟁을 하고 있었던 시기인데 미디안 군대가 무서워서 포도주 틀 속에 깊은 곳에 들어가서.... 숨어서 몰래 타작을 하던 겁쟁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드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기드온에게“큰 용사여!”하고 부릅니다.
기드온은“제가 무슨 큰 용사입니까? 저는 겁쟁이입니다. 저희 집안에서도 제일 작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그러셨습니다(삿6:16).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겁쟁이도 큰 용사가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책임이 막중하고 부담이 되고 떨리는지... 걱정과 근심이 많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하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신명기 31:8절에서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겁쟁이 기드온도 큰 용사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두려움에 떨었던 여호수아도 담대하게 가나안을 정복하고.. 여호와 닛시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오늘 우리도 이 세상 속에서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면서 살게 되는 은혜입니다.
본문 9절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그랬습니다. 복을 받을 것이다가 아니고, 복을 받느니라... 당연히 받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믿음의 권속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받으며... 믿음으로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갈 3:6-14 / 성흥모 목사
오늘은 개신교회가 지키는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종교개혁 제493주년이 되고 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마르틴 루터 교수가 가르치고 있는 대학의 성당 정문에 로마교회가 판매하고 있는 속죄권 즉 면죄부의 부당성에 대하여 95개 조문의 반박문을 내어 붙였습니다. 이것은 대학에서 학문의 방법으로 주로 하는 토론의제였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내어 붙인 10월31일 마지막 주일인데 이 주일을 종교개혁기념주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14-15세기 당시 유럽은 십자군전쟁을 끝내면서 동서의 교류가 활발하게 되었고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문예부흥, 르네상스가 일어났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탈리아는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문화적인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때마침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로 인하여 지식은 폭발적인 발전을 가져왔으며, 학문의 발전은 속도를 더하였습니다. 그 중 예술분야의 발전은 눈부실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운둔의 잠에서 깨어나 자신을 찾게 되었습니다. 문예부흥, 이 르네상스는 종교개혁을 부채질 하였습니다.
로마에서 르네상스의 예술을 숭상하며 이끌어가는 교황은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 베드로 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성당은 그 하나로서 위대한 작품이요, 온갖 예술품으로 가득 채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세계적인 건물을 지으려면 돈이 있어야 했습니다.
교황의 눈에는 교인들이 돈으로 보였습니다. 수많은 돈을 거두려고 면죄부를 팔아야 했습니다. 교황 레오 10세는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으로 학문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바티칸으로 끌어들인 사람입니다. 교황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의 재임 중에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교황청으로 불러들여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궁으로 만들기 위해 돈을 주었습니다. 교황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돈을 끌어 모았습니다. 그는 그동안 온 교회가 헌금해놓은 것을 탕진하고 있었습니다. 전임 교황 율리우스2세가 모아둔 저금과 레오 자신이 재임하면서 모은 수입과 헌금을 다 탕진하였습니다.
돈을 모으다 모자라니 면죄부를 발행했습니다. 면죄부를 판매해야 하는데 가장 만만한 나라가 독일이었습니다. 교황은 독일의 알브레히트라는 사람을 마인쯔의 교구의 대감독과 동시에 막데부르크의 대주교, 할베르쉬타트의 행정권도 주는 조건으로 많은 헌금을 선불로 받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을 위한 속죄권, 즉 면죄부를 판매하는데, 절반의 헌금을 알브레히트로 가지게 하면서 독일에서의 판매권을 주었습니다. 알브레히트 감독은 독일에서 속죄권을 팔 수 있도록 책임자를 선정하는데, 능변가인 도미니카의 수도사인 테젤이라는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이 사람 테젤이라는 사람은 말을 청산유수와 같이 잘 했습니다. 지금 팔고 있는 속죄권은 지옥에 간 사람이라도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 속죄권이며, 거룩한 대베드로 성당을 건축하는 헌금으로 어떠한 죄를 지었어도 다 용서받을 수 있는 면죄부라고 외쳤습니다. 지금 헌금통에 돈이 떨어지는 쩔그렁하는 소리와 함께 죽은 영혼이 하늘나라로 올라간다고 외쳤습니다. 가슴이 설레게 하는 속죄권이었습니다.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그 속죄권을 사놓아야 했습니다.
여기에 반박문을 내어걸고 면죄부의 부당성을 경고하고 나선 사람이 비텐베르크 대학의 이름 없는 한 교수, 마르틴 루터였습니다. 당시 독일 신성로마제국은 황제 아래에 황제 선출권을 가지고 있는 7명의 선제후와 수많은 제후들이 있었습니다.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은 작센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작센의 선제후의 보호 아래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95개 조문의 토론의제를 내걸 때는 종교개혁을 하리라는 생각으로 붙인 것도 아니요, 어떤 확정된 프로그램으로 진행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만스펠트의 공작령인 아이슬레벤에서 한수 루터와 마가레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루터는 에어푸르트 대학을 나와 아버지의 소원대로 법학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법학도 시절에 루터는 인생의 전환을 가져올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1506년 6월 2일 그는 만스펠트에 있는 부모님을 방문하고 학교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스토테른하임에서 큰 폭우를 만났습니다. 천둥번개가 치면서 그의 옆에 있는 숲을 때렸습니다. 그 벼락으로 함께 가던 친한 친구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면서 “성안나여 살려주소서! 살려만 주시면 수도승이 되겠습니다.”라고 서원하였습니다. 안나는 천주교회에서 마리아의 어머니라고 하여, 광산업을 하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이었기에 안나를 부른 것이었습니다. 루터의 아버지는 광산업자였습니다.
루터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해 7월 17일 에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은둔 수도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번개가 치듯이 갑자기 닥칠 죽음과 그 이후의 하나님의 심판을 온전히 준비하는 수도사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항상 죽음을 앞에 두고 살았습니다. 지금 죽어도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아야 하고, 반드시 구원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수도사 루터는 엄격한 금욕적인 수행을 감내하면서 그는 자기의 속사람, 내면적인 자아성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도사의 길을 걸으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련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수도사가 되기 이전보다도 더욱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이 수도원의 원장도 알아주는 신앙인이었고, 특별히 부원장 슈타우피츠 박사는 명설교가였고, 성경연구에 탁월한 사람이었고, 고행으로 알아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루터는 사제로 서품을 받았고, 에어푸르트대학에서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루터는 그의 고백신부이며 수도원 부원장인 스타우피츠박사의 권면을 받아 비텐베르크로 가서 성서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스승을 대신하여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서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먼저 시편을 강의하였습니다. 그는 시편을 연구하면서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본문들이 있었습니다.
시편 22편을 연구하면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는 말씀을 강해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루터는 복음교리의 핵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편22편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여주는 다윗의 예언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을 당하여야만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깊은 사색과 연구 끝에, 이 시편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끊어져야 하는 인간을 대신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을 것을 예언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을 받으시고, 버림을 받으시고, 죄의 대가를 치르고 형벌을 받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시31:1의 말씀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그를 구원하며 자유하게 하는 지 의문을 품었습니다. 그는 후에 깨달았습니다. 사람을 죄악에서 건지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라는 시실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대속하신 구속의 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공의만이 죄악에서 건지실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사람, 살려달라고 부르짖으며, 회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로 그를 구원해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1516년 9월까지 로마서를 강의하였는데, 로마서를 통하여 그의 실존적인 고민과 시련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탁상담화에서 이런 말로 회고하였습니다. “의로운” 그리고 “하나님의 의”라는 말들이 번개처럼 그의 양심을 찔렀습니다. 그런 말들을 들을 때 루터는 무기력하기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의롭다면, 그 분은 인간에게 벌을 내리실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과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면서 많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만일 우리가 의로운 자로서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의가 믿는 사람을 구원으로 이끈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곧 자비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그의 영혼은 새로운 기운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에 그 본질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리하여 말씀드리면 루터는 하나님의 의가 심판하시고 벌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였으나, 이제는 그 의를 믿는 자를 의롭다고 여기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곧 하나님의 사랑이요, 자비였습니다.
루터는 수도사로서 흠 없는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여전히 죄인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의 양심을 불안하였고, 그의 선한 행위를 가지고는 하나님과 화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고행에 고행을 거듭하면서도 죄인을 벌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원죄로 인하여 저주받은 죄인들에게 다시 십계명이라는 율법을 주시고 계속하여 억압하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죄인으로,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죄와 죄의 형벌과 심판을 가지고 고민하였습니다.
바울이 말한 바 롬1:17의 말씀“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기 위하여 낮이나 밤이나 몸부림을 쳤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으로 가능하며,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사람의 선한 행위나 노력에 의한 만들어지는 나의 의, 능동적인 의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의, 수동적으로 받은 의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보내어주신 아들을 믿는 그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는 것이 바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내신 의,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면서 이루신 그 의, 그 아들의 공로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어린 양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우리가 그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믿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고, 그 의로우심으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수도원에서 철저하게 금식하며 고행하고, 자기를 연단하면서 수련하여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루터는 로마를 방문하면서 수없이 고행하였어도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루터는 생각하였습니다. 수많은 금식과 수련과 고행이나 순례나 성자숭배가 은혜의 수단이 될 수 없고, 구원의 확신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루터는 고행을 밥 먹듯이 하였습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회개하였습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회개하고 또 회개하여도 여전히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금식도 잘 했습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금식이라고 해야 얼굴이 설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시시하게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하는 개혁운동의 핵심적인 주장은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였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은 ‘오직 예수’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종교개혁은 우리들로 하여금 다시 신앙, 믿음으로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었고,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 아들을 통하여 대속하시는 은총을 받아들이는 손과 같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 믿음 외에는 그 어떤 공로나 선행이나 율법이나 지식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믿음만 가지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을 외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다 이루시고 우리 주님이 대속하신 공로를 힘입어야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공의로우시기에 우리를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범죄한 영혼은 죽으리라”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 벌하고 심판하시고 저주하시고 지옥에 던져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모든 진노와 심판을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에게 다 쏟으시고. 다 짊어지게 하시고, 죄 없으신 주님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아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며, 하나님은 나를 대신하여 아들을 보내어주셨으며, 아들이 나의 죄를 대속하셨다고, 예수님은 나의 죄를 속량하셨다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의롭다, 하나님이 내어주신 선물을 받아들였다,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아들이라는 선물을 받아 아들을 구원의 주님으로 받아들인 사람을 의롭다, 의인이라고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만 보십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여, 믿게 하시고 있습니다. 옛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는데,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이제 믿음으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 예수님이 다 해결해주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다 아브라함과에 속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율법과의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는 과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 속하는 사람이요,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이제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9절 말씀에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하나 있고, 율법을 다 준행하므로 구원받는 것이 있는데,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고 물어보십니다. 그러면서 예를 들어주기를 옛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는데, 하나님은 하나님만을 믿고 신뢰하고, 하나님이 몰라주시면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보아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받아야 하는 저주와 심판을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그 몸으로 다 받으셨습니다. 죄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심판과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내신 최후 최선의 방책인 그 아들 예수님이 자기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을 믿는 사람들을 다 구원해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도 받기 전에 의롭다는 말씀을 들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요,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우리의 아버지로 고백하면서 아들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하면서, 더럽고 추한 죄를 고백하면서 전폭 하나님만 신뢰하며, 하나님에게 맡긴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 주님이 다 해결해주셨다고 믿기만 하시면 그는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를 보시지 않고 아들의 의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
선한 행실은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선행 때문에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선하게 살고 남을 배려하고 사랑으로 살아가지만 그것 때문에 구원받은 것은 아니고, 우리의 믿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참된 믿음”이란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외줄타기 곡예사가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습니다. 곡예사는 반대편에 무사히 도착해 큰 박수를 받은 후 말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다시 건너편으로 갈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러자 사람들은 믿는다고 소리쳤고 곡예사는 다시 말했습니다. “저를 믿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분 중 저와 같이 건너편으로 건너갈 분은 제 어깨에 올라타십시오.”그러나 지원자가 없었습니다. 잠시 후 한 소년이 손을 들었고 곡예사는 그 소년을 어깨에 태우고 줄타기를 마쳤습니다. 사람들이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무섭지 않았니?” 소년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안 떨어질 줄 알았어요. 전 제 아버지를 믿거든요.” 곡예사는 아들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습니다.
저는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저의 더럽고 추한 죄악을 다 용서해주시고 아들 예수님을 내어주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내신 방법이 구원의 유일한 길인 알기에 것을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으로 확신 속에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벗으로 불린 사람
갈 3:6-9 / 문기태 목사
정채봉의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이라는 시입니다.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나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와 같은 만남이다
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닿았을 때는 던져 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와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니까
성경은 한계를 초월하는 우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혜자는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잠17:17),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잠18:24)고 말했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15: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떠나지도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히13:5). 예수님은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큰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친구가 되심을 증명하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서로 주님의 이름으로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라고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에 영국군 장교로 출연했던 Alex Quiness라는 영국의 유명한 성격배우가 있습니다.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였지만 어느날 영화에 신부로 출연하게 되어 프랑스의 어느 시골에 가게 되었습니다. 온종일 영화촬영을 끝낸 배우들과 기술진들은 자동차로 동네 마을의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Quiness는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프랑스의 고요한 시골길을 묵상하며 걷기로 작정하고 저녁 길을 홀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느 누가 그의 뒤를 숨이 차서 뛰어오고 있었습니다. 조그마한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옆 동네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시간가는 줄을 모르고 놀다가 어두운 밤이 되자 두려움에 가득 차 자기 집에 돌아가던 중 앞에 가는 Quiness를 보고 같이 길을 가기 위하여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영화에 신부로 출연하느라고 성직자 예복을 입은 Quiness를 그 소년은 진짜 신부인줄 알고 안심하고 Quiness의 손을 잡고 쉴사이 없이 하루종일 있었던 일을 말했습니다.
Quiness는 프랑스 말을 조금은 할 수 있었으나 외국인의 억양이 튀어나와 아이를 한 밤중에 놀라게 할 것이 두려워 간단한 말만 프랑스말로 대답하며 동네의 광장까지 같이 걸어왔습니다. 광장에 이르자 소년은 집에 다 온 기쁨에 Quiness의 손을 마지막으로 꼭 쥐고는 자기 집을 향하여 뛰어가는 것이었습니다. Quiness는 동네의 광장에서 홀로 깊히 생각에 잠기었다고 합니다. 내가 성직자의 예복을 입고 있었기에 저 아이는 내가 신부인줄 알고 나를 믿어주었다. 어두운 밤중에 안심하고 그의 손을 나에게 맡길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외로움과 공허감 속에서 인생을 홀로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소년이 나에게 안심하고 자기의 손을 맡긴 것 처럼 나도 절대자에게 나의 손을 맡기고 인생의 어두운 밤길을 안심하고 걸어갈 수는 없는 것인가?
Quiness는 그날 저녁 새로 거듭나는 체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서 2:23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함을 받았다고 증거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참으로 파격적인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처럼 하나님과 친할 수 있었을까요? 부럽지 않습니까? 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창세기를 다시 읽어보았더니 하나님께서 종종 그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극진히 대접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8:17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시면서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이어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심각하여 하나님께서 멸하실 것임을 알게 해 주십니다. 그 비밀을 듣고서 아브라함이 저 유명한 중보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매달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성중에 의인 오십명이 있다면 그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하마" 다시 "그 성중에 의인 사십 오명이 있다면 그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 성중에 의인 열 명이 있다면 그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친구처럼 여기실 정도로 신뢰하시고 비밀얘기까지 다 들려주셨던 상대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간청이라면 하나님께서 귀기울여 들으시고 거의 다 들어주셨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이방민족속에 홀로 살았으나 결코 외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절대 두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의 친구가 되시니 무엇이 두렵고 어찌 외로울 수 있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이 그렇게 가깝게 여기셨던 사람이니 얼마나 복을 많이 부어주셨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복주심을 따라 단신으로 가나안땅에 들어갔으나 거기에서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무명의 촌부였으나 하나님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는 약속대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맨 손으로 시작하였으나 남자 종들만도 3백여명이 넘고 소와 양 그리고 낙타가 셀 수 없이 많은 거부가 되었습니다. 오늘로 말한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크게 성공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2천년 교회사에서 3대 기적을 이룬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부자로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둘째, 그는 예수 믿은 사람 가운데 가장 선한 일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셋째, 그는 부자 가운데 유일하게 98세까지 장수한 사람입니다. 그가 바로 록 펠러입니다.
록 펠러는 예수 믿고 엄청난 축복을 받았으며 부자가 가질 수 없는 장수의 복까지 받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부자는 물질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장수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는 가진 물질로 선한 일을 하면서 보람과 마음에 평안을 얻었기 때문에 장수했습니다. 그는 노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날마다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그는 일생동안 24개의 대학을 세웠으며 4928개의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에 수많은 복지센터를 세웠고 수많은 자선사업을 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헌납했습니다. 그가 엄청난 부요를 누리면서도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일생을 움직인 어머니의 신앙적 교훈 때문입니다.
8살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에 다니던 어느날 어머니는 그에게 20센트의 돈을 주면서 가지라고 했습니다. 록 펠러가 너무 기뻐 돈을 호주머니에 넣으려고 할 때 어머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존아, 20센트의 이 돈은 네 것이지만 그 가운데서 십분의 일은 하나님 것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한다." 그는 2센트를 떼서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그 믿음으로 살으며 말년에 그 어머니를 기념하기 위해 맨하탄 허드슨 강변에 아름다운 석조건물로 'Riverside Church'를 짓고 22층의 종탑과 함께 헌당할 때 한 기자가 록 펠러를 인터뷰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이러한 축복을 받았습니까?" "우리 어머니로부터 받은 유산 때문입니다." "아니 선생님의 어머니는 가난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무슨 유산을 그렇게 남기셨습니까" "우리 어머니는 나에게 신앙의 유산을 남겨주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세 가지를 유언으로 주셨습니다. '첫째, 너는 언제나 교회에 가면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려라. 예배시간에 늦지 않도록 주일을 성수하면서 달려가 앞에서 은혜를 받거라. 둘째, 절대로 목사님 말씀에는 순종하여 네 인격을 성숙시켜라. 셋째,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니 절대로 쓰지 말고 하나님 앞에 바쳐라.' 이것이 어머니가 나에게 남긴 유산입니다."
그는 그 어머니의 신앙적 유산 때문에 세계적인 부호가 되었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가장 많이 한 위대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물질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부모가 아니라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적으로 훌륭한 교훈을 남길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받는 사람들이 주변에 수없이 나타나게 되엇습니다.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말씀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흘러갔습니다. 가족과 친척, 이웃과 지역, 후손과 민족 그리고 세계 만민에게 까지 어마어마한 복이 넘쳐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슴에 보면 중요한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6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의로 정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무엇이 하나님과 친밀함으로 들어가게 하였는가?를 명확하게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을 잘 믿으니까 친구삼아 주신 것입니다. 7절에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9절에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아브라함뿐 아니라 오늘날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게서 아브라함과 동일하게 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큰 복을 나누어 주십니다. 8절에는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에게 주시는 복은 너무나 크고 풍성하여 우리 자신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만민에게 흘러넘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오늘 그렇게 놀라운 아브라함의 복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이번에 영국에 가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이번 수련회를 통해 받은 은혜를 나누어 보자고 하였더니 젊은이들이 저마다 간증을 하였습니다. 지난 주일 말씀드린 마음의 큰 상처가 치유받고 사명을 회복하였다는 전도사님외에도 어떤 청년은 영국에 와서 그동안 막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주님과 대화식으로 기도생활을 했었는데 기도가 막히고 주님이 아무런 응답도 해 주시지 않아 힘들었는데 이번에 회복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어떤 청년은 치유수양회중에 성령님이 임하셔서 눈물이 솟아나고 충만한 기쁨을 맛보았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청년은 이제 어학원에 나오는 젊은이들에게 우리 교회에 가자고 전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어떤 국제 결혼을 한 부인은 전에는 교회에서 무엇을 공급받을 것만을 기대하고 나왔는데 이제는 내가 교회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다른 교인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을 깨달았고 그렇게 교회생활을 하겠노라고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외에도 자신안에 일어난 많은 변화를 고백했습니다.
그들의 간증을 들으며 하나님이 저를 영국에 왜 보내셨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세계에 흩어져 사는 만민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 들어가도록 돕는 것이 바로 복의 근원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을 엄청난 축복을 나누는 최선의 길은 복음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어 구원받게 하고 회복하게 하여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하나님의 축복안으로 들어가게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교회를 그렇게 존귀하게 쓰시고 계십니다. 더욱 크게 더욱 많은 사람들을 섬기게 하실 것입니다. 세계 만민에게 우리를 통하여 놀라운 복이 흘러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야러분 모두 그런 믿음을 가지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벗으로서 복의 근원, 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의 약속을 받은 자
갈 3:7-14 / 민경설 목사
어느 조사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전 소설은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 홍길동전 등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 고전에는 우리 나라 심성이 들어있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권선징악'입니다. 악하게 산 것은 심판과 징계가 있으니 선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나라 사람들의 보편적 심성이자 동서고금 어느 나라 어느 시대 사람이든 모두 갖고 있는 심성입니다. 인간의 심성 속에는 신앙인 이든 아니든 악은 심판 받고 선한 사람은 잘되고 상 받는 다는 사고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기에 영구불변의 진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가 갖는 혼란과 혼돈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끝까지 잘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과 싸우며 선을 위하여 힘쓴 사람이 끝까지 계속 잘되어야 하는데 나중에는 그렇지 못하다는데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200만을 이끌고 광야의 어려움을 견디며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이끌었지만 결국 가나안땅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다윗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며 남북통일을 일으킨 위대한 왕이지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므로 그의 인생도 끝은 어려웠습니다. 솔로몬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이렇게 나중까지 잘되지 못하게 된 것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행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시1:6]"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의인으로서 끝까지 살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그렇게 살기 때문에 결국 끝에서는 잘못되어지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는 선한 일,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갈3:10]"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 율법의 행위는 저주아래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온갖 일은 선하게 행해야 하는데 인간은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저주아래 있게 되므로 나중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중까지 잘되는 삶,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은 믿음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갈3:11]"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누구도 제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지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 때 처음도 잘되고 나중도 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 속에 계신 주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끝까지 잘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의 약속을 받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어 성령 받으면 승리합니다. 성령께서 내 속에서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갈3:16]"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이제 성령의 약속을 받은 자가 왜 복을 받는가를 알아보겠습니다.
1. 행위의 저주를 예수님이 다 갚으셨습니다.
[갈3:1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우리의 행위는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에 누구든지 죄를 지었기에 다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행위의 저주를 죽음으로 속량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예수를 믿어 성령 받으면 저주에서 벗어나고 복 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2. 예수께서 그 사람속에 친히 오셔서 동거 하십니다.
[요14: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성령의 약속을 받으면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며 그분이 나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함께 동거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거할 때 나중까지 잘되며 영원토록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내속에서 나를 위하여 대신 사시는 것입니다.
[고전15:10]"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제는 예수께서 내 속에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내 대신 사시는 것입니다. 나는 그분을 믿고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지배하시는 삶을 살 때 처음이 잘되고 나중, 영원까지 복 받는 자가 됩니다. - 아 멘 -
복받는 믿음
갈 3:9 / 강성찬 목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이를 의로 여기시고 또한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 중에도 가장 큰 복은 그를 믿음의 선조로 삼으신 것이며, 또한 그의 자손을 사막의 모래처럼 하늘의 뭇 별처럼 많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들이 하나님께 받아야 할 복 중에서도 가장 큰 복은 믿음에 믿음을 더하는 복입니다. 또한 영적인 분복, 즉 믿음으로 전도하고 낳은 자식들이 포도 열매처럼 주렁주렁 결실 맺는 복이 복 중의 복입니다.
(요삼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것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복 받는 믿음은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믿음입니다.
(출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출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달력의 주일 표시는 모두 빨강색으로 되어 있는데, 빨강색은 모든 사람이 가던 길도, 하던 일도 모두 멈추라는 정지 표시입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이므로 주님을 경외하는 일과 주님을 위한 일 외에는 하지 말라는 적신호임을 알게하는 의미로 받기도 합니다. 주님의 일 외에 하던 세상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면 위험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달력에 빨간 글씨로 되어 있는 주일은 세상 일을 멈추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던 신자들이 하와이에 가서 노동을 하는데 주일을 잘 지키므로 농장 주인은 그것이 못마땅하여 심하게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외국에 와서 노예가 되었으니 예수나 잘 믿어야 한다고 동맹하여 주일을 지켰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말하기를 “주일에 일을 하지 않으려면 대신 매를 맞아라.”라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 신자들은 일찍 주인을 찾아가서 “어서 때려 주시오. 주일예배에 가야겠소.”하였습니다. 주인은 그들이 이같이 열성으로 예배당에 가자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감동을 받아 주일을 잘 지키게 하고 자기도 예수를 믿고 교회까지 세웠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장로교회를 국교로 한 종교적인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서는 일요일 곧 주일에는 상점 문은 물론이요 영화관, 미술관, 박물관까지도 다 폐문한다고 합니다. 한번은 세계 관광협회에서 스코틀랜드의 관광협회에 관광단을 위하여 오락장소와 명문지의 문을 좀 열어달라고 요지의 발송된 서신이 전해온 것입니다. 그 때에 스코틀랜드의 일반 시민의 여론은 이를 거부할 뿐더러 반대 성명서를 발부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은 의미의 회답이 왔다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일요일이면 영화관, 미술관, 운동장의 문을 닫으나 교회의 문은 열립니다. 만일 스코틀랜드를 정말 보고 싶은 사람과 참으로 스코틀랜드를 알고 싶은 사람은 영화관이나 미술관 또는 운동장이 아니라 교회에 와 주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스코틀랜드의 생활도 보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상해 선시 공사는 각종 공장과 각 판매부가 있어 5천명을 거느리고 일하는 세계적 대 회사였다합니다. 이 공사에서 총지배인으로 장정광씨를 초청할 때에 기독 신자인 장씨는 주일 휴업의 조건부로 승낙했다합니다. 공사로서는 하루 수만 원의 이해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바로 맞은 편에 영안 공사란 경쟁자가 있어서 심히 난처하였으나 장씨를 맞아들이기 위해서 주일 휴업을 하니 영안 공사는 기뻐했다합니다. 그러나 장씨가 입사하고 주일 휴업 후 8천명의 종업원들은 기뻐하며 6일간 성실히 일하므로 선시 공사의 성적이 영안 공사보다 훨씬 나았다고 합니다
복 받는 믿음은 말씀대로 행하는 믿음입니다
(신 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경을 오해 하는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옛날 평안도에서 있었던, 일이라 합니다. 교회 나온지는 꽤 오래됐는데 성경을 읽지 않고 설교도 듣는 둥 마는 둥 항상 졸기만 해서 마태복음을 찾으라면 구약에서 뒤적거리고 창세기를 찾으라면 신약에서 뒤적거리는 한 성도가 하루는 목사님이 말씀을 읽어야 된다고 강조를 하자 큰 맘을 먹고 읽기를 시작했는데 한번은 이 사람이 목사님에게 성경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묻기를 [목사님, 예수님께서 개고기를 참 좋아하셨나 봅니다] 깜짝 놀란 목사님은 답변을 해 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개를 기르긴 했지만 개고기는 먹지않았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성도들이 킥킥거리면서 그 사람을 흉을 보는데 그런데 그는 성난 표정으로 성경을 뒤적거리더니 마태복음 16장 13절을 펼쳐 보이는 것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보세요 성경에 분명히 이렇게 나와 있는데요” 하면서 구절을 읽었습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밑줄을 그어 지명표시임을 나타내고 있는데도 이 사람은 평안도 사투리로 해석을 했던 것입니다. 평안도 사투리로 [가이]는 개를 얘기하고 [사랴]는 사려고'의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예수님이 개고기를 얼마나 좋아하셨으면 온 유태나라의 개를 다 잡수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바다를 건너서 [가이 사랴]즉, 개를 사려고 빌립보 지방에까지 가셨을까하는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한참동안은 그 구절을 읽을 때는 꼭 이렇게 읽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개를 사러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그렇게 읽었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일들도 그러 합니다.
한 할머니가 속이 아파 병원에 가셨습니다. 병명은 위(胃)가 안 좋은 것으로 나왔고 그래서 의사는 잔탁을 드시라는 처방을 내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 속만 안 좋으신 게 아니라 귀까지 안 좋아 잔탁을 장닭으로 잘못 알아들었고 할머니는 착실하게 의사선생님이 내려준 처방을 지키기 위해 시장에 가서 장닭을 큼지막한 것으로 사와서 이왕 먹을 것 인삼까지 넣어 푹 고아 먹었습니다. 안 그래도 속이 안 좋은데 기름진 닭에 인삼까지 넣었으니 탈이 날 수 밖에 없었고 병이 오히려 더 악화되자 이 할머니 화가 나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니 선상님이 하란 대로 했는데 속이 더 아프니 어찌된 일이요?” 그러자 의사선생님, “ 드시란 약은 드셨습니까?” “하모!” “어떻게 드셨는데요?” “인삼을 넣어 푹 고아 먹었지!” 잔탁에 인삼을 넣어 고아먹었다니 기절할 일 아닌가요?
이 이야기를 인용한 목사님은 “나이 들어서 말씀보고 싶을 때 눈 어두워 못 보고, 귀 어두워 말씀 못 들고 한탄하지 말고 젊었을 때 성경 많이 일고 주님 일 부지런히 하십시오.” 하셨답니다.
말씀이 대단한 위력을 발휘 하기도 합니다.
기가 막히도록 좋은 칼을 만드는 유명한 대장장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칼로 갑옷을 한칼에 두 조각낼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그 대장장이를 불러 자신의 갑옷을 두 조각 내보라고 명령했습니다. 만약 하지 못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 대장장이는 칼을 단 한번 휘두르고는 칼집에 꽂았습니다. 왕이 다시 호통을 치려 하자 대장장이는 '왕이여 몸을 한번 흔들어 보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몸을 흔들자 두 조각이 나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왕은 놀라운 칼잡이의 실력 때문에 자신의 몸이 두 동강난 줄도 몰랐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검의 위력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속에 있는 죄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위기를 만드시면 우리가 순간적으로 무언가 심오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윌리암 뮐러는 손이 하나뿐이었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의 공장에서 일하다가 기계에 잘린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병신이라고 멀리하고 흉을 보았지만 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뮐러 옆에는 항상 성경책이 있어서 희망과 용기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라서 튼튼한 두 다리를 가진 것을 항상 감사하며 우편배달부를 했습니다. 불편한 몸이지만 그의 배달은 빠르고 정확했습니다. 고된 배달이 끝나면 그는 주머니에서 성경을 꺼내 읽었습니다. 그는 이 좋은 책이 모두에게 읽힐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자신을 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영국 성서공회를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는 불구자에게 힘든 일이라고 거절했지만 성서를 보급시키고 싶은 그의 꿈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성서공회의 허락을 받고 부두노동자를 대상으로 성경 파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곳은 험악한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 처음에는 놀림을 받고 매를 맞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믿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의 정성이 노동자들에게도 전달되어 성경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렸습니다. 노동자에게 성경을 보급하는 일에 성공을 거두자 영국 성서공회는 그를 중국 선교사로 파송키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뮐러는 성경을 들고 낯선 중국 땅으로 떠났습니다. 힘겨운 중국어를 배우고 나서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팔았습니다. 중국에서도 그의 정성과 믿음은 받아들여져 성경책은 잘 팔렸습니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뮐러는 장님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몸소 한문으로 된 점자를 만들었습니다. 북경에서 그는 장님에게 점자를 가르쳐 성경을 읽게 하였고, 마침내 장님학교까지 만들었습니다. 한쪽 팔만 가진 그가 주님의 은혜로 양팔을 가진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말씀 중심할 때 위대한 역사를 이루게 합니다
1809년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 둘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주위에서는 이 아이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이의 미래를 내다 보고저녁 식사를 마친 후면 꼭 아이를 무릎에 앉혀 놓고 성경을 읽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아이가 아홉살 되던 해 어머니는 풍토병에 걸려 숨지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숨지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부자나 위인이 되기보다는 성경을 힘써 읽는 사람이 되라」 후에 이 아이는 미국에서 가장 존경과 관심을 받는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다. 링컨 이야기입니다.
복 받는 믿음은 시험을 참는 믿음입니다.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서양의 어머니들이 시집가는 딸에게 진주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이 진주를 흔히 '얼어붙은 눈물'이라고 부릅니다. 이 진주는 시집가서 흘려야 할 눈물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진주를 택했을까요? 그것은 진주의 생성과정을 알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주는 '아비큘리데'라는 특수한 조개에서 만들어집니다. 이 굴속에 모래가 들어오면 굴은 '나카'라는 물질을 생성하여 모래알을 감싸기 시작합니다. 나카가 많이 덮이면 진주가 큰 것이 되고 값이 비싸집니다. 이 나카는 아주 조금씩, 천천히 생성되기 때문에 진주가 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굴속에 모래가 들어오면 모든 모래가 진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래알이 들어오면 굴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카를 생성하여 모래를 코팅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모래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래알을 무시하면 나카를 만드는 고생은 하지 않지만 결국은 모래 때문에 상처를 입고 병들어 죽어버립니다. 재미있지요? 굴이 모래를 맞이하여 나카를 생성하여 힘들더라도 진주를 만들든지, 아니면 모래알을 무시하다가 병들어 죽던가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시련을 맞이하여 힘들더라도 건설적으로 극복하여 새로운 삶을 창조할 것인지, 아니면 자포자기하여 실패한 삶을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시련 뒤에 복된 역사가 임합니다.
독일의 얼라피 박사는 우리가 매우 자주 이용하고 있는 약품을 발견하고는 606호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왜 606호라고 했습니까? 606번째 실험에서 성공했기 때문에 약 이름을 606호라고 붙였습니다. 600번 실험해도 안되었습니다. 605번 실험해도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아니하고 흔들리지 아니했습니다. 에디슨은 어느 때는 한 가지 발명을 위해 일만 번이나 실험을 했다는데 그래도 흔들리거나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발명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많은 시험과 환난이 있었지만 자기 자리를 지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손이 언제나 그와 같이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에 중심의 심지를 보십니다. 마음을 보십니다. 일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시험이 오거나 어떠한 고난이 있을 지라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승리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젊은 재상이 왕에게 와서 어떻게 하면 시험에 들지 않고 맡은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왕은 기름이 가득한 잔을 주면서 한 시간 안에 지시하는 거리를 돌아오라고 했다. 기름을 쏟거나 시간이 늦으면 엄벌에 처한다고 하며 칼을 든 군인이 뒤따르게 했습니다. 젊은 재상은 땀방울을 흘리며 기름을 쏟지 않고 제 시간 안에 도착했다. 왕은 만족한 듯 웃으며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모퉁이 구두 가게를 보았는가?' '못 보았습니다' '그럼 쌀가게는?' '못 보았습니다' '그럼 가구점은?' '죄송합니다. 기름을 쏟지 않으려고 정신을 집중하느라 아무것도 못 보았습니다' 그렇다. 맡은 일에 충성하다보면 시험에 들 겨를이 없습니다.
토마스 에디슨이 나이가 많았을 때 한 젊은이가 '선생님, 살아 오시는 동안 시험에 든 적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시험? 나는 평생 너무 바쁘게 살다보니 시험에 들 여가가 없었다네' 라고 했다고 합니다.
복된 믿음은 십일조를 드리는 믿음입니다.
(말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챨리 페이지는 직장도 없는 무일푼의 청년이었습니다. 하루는 거리를 지나다가 구세군의 가두전도를 보게 되었습니다. 찬송과 전도설교가 끝난후에 한 젊은 여성이 탬버린을 바구니 삼아 들고는 헌금을 걷으면서 한 바퀴를 도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성이 페이지 앞에 왔을 때 페이지는 그녀에게, 자기는 헌금을 하고 싶으나 돈이 하나도 없고 실은 음식 사먹을 돈조차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성은 자기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더니 페이지에게 넘겨주는데 그것은 자기 돈 1불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여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돈을 받으세요, 그 중 10센트를 여기에 헌금하세요 그리고 앞으로도 수입이 있을 때마다 10분의 1을 하나님께 바치세요. 이렇게 평생동안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세요. 그러면 돈이 떨어져서 고생하는 일이 없을 겁니다.' 페이지는 감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 돈을 받았고 그 중에서 10센트를 헌금했습니다. 얼마후에 그는 곧 직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여성의 말을 믿고 계속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생활을 했습니다. 세월이 흘렀을 때 챨스 페이지의 이름은 백만장자의 명단에 올랐다. 그는 하나님께 십일조뿐만이 아니라 여러 개의 병원을 지어서 바쳤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많은 자선 사업도 하였다. 멋있는 출발이었습니다.
몽골에서 사역을 하시는 선교사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몽골교회에서 주일예배 때였습니다. 선교사님께서 말씀을 마치고 헌금을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때 한 성도님이 손을 높이 들더니 질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목사님, 아무거나 십일조해도 되는 겁니까?” “그럼요,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리면 되는 겁니다.”성도님은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헌금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도님이 큰 자루 하나를 들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작은 헌금 바구니에 도저히 넣을 수 없었기 때문에 헌금바구니 옆에 두었는데 목사님은 그것이 무엇인가해서 자루를 풀어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내용물은 다름 아닌 소똥이었습니다. 몽골에서 소똥은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겨울이 되어 벽에 소똥을 바르면 아주 난방효과가 탁월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소똥은 8월 중순부터 6월초까지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나라인 몽골에서는 땔감으로도 아주 유용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겨울을 나려면 적어도 26만 원 가량의 난방비가 필요한데 몽골에서 신입선생님의 월급이 4만 5천 원이니 땔감 비는 보통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정말 그 나라에서 소똥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소똥냄새가 교회를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목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 함께 기도합시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 이 성도님의 가정에 만 배의 축복을 허락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그런데 놀라운 일은 다음날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마을의 있는 모든 소들이 그 성도님 집 앞에 몰려와 볼일을 보더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소똥이 쌓여갔습니다. 그해 그 성도님은 엄청난 소똥덕분에 땔감비가 전혀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은 소똥은 이웃에 팔아 생활비를 벌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성도의 순수한 십일조 헌신을 기쁘게 받으신 것입니다.
복된 믿음은 주를 앙모하는 믿음입니다.
(시 33:12)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 63:1)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토마스 카알라일은 인간을 희망에 기초를 둔 존재로 정의하면서 “내 소유를 다 빼앗긴다 해도 나는 오직 한 가지, ‘희망’만은 가지기를 원한다”고 말했다합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영국군과 미군 포로 2만 명이 수용되어 있던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8,000명의 포로가 사망했는데, 대부분은 영양실조도, 질병도, 과로도 아닌 절망으로 죽었다는 사실이 전후 조사단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수백만 명의 유태인이 학살되었던 2차대전 당시 유태인들을 수감했던 한 지하 감옥의 벽에서 손톱으로 그린 다윗의 별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비록 태양 빛이 우리에게 비춰오지 않지만 저기 태양이 있는 것을 믿노라. 비록 사랑이 지금 내게 느껴지지 않지만 저기 진실 된 사랑이 있는 것을 나는 믿노라. 비록 하나님께서 침묵 가운데 계시지만 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노라.”
우리는 이 글에서 극한 죽음의 공포와 뒤엉킨 어두움의 절망 속에서도 낙심치 않으며, 그 건너편에 존재하는 하나님과 승리를 바라보고 확신했던 한 신앙을 발견하게 됩니다.
1850년 1월 6일, 영국의 콜체스터시는 심한 눈보라로 도시 전체가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한 십대 소년은 그가 늘 다니던 교회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까이에 있는 교회에 들어가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출타한 목사님을 대신하여 한 평신도가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가 설교한 본문은 이사야 45장 22절의 말씀이었습니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여러 달 동안 이 소년은 마음의 곤고함과 죄에 대한 괴로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목사여서 비록 교회에서 자랐다 할지라도, 그는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지 못했었습니다. 그 설교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다만 본문을 반복해 외칠 뿐이었습니다. '사람은 바라보는 것을 배우고자 대학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라도 볼 수 있습니다.' 그 설교자는 이렇게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이 설교자는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새 방문자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그 방문자를 쳐다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젊은이, 자네는 아주 피곤해 뵈는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그때 그 소년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는데, 이것이 바로 위대한 설교가 스펄젼의 회심의 경험이었습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교회가 복 받는 믿음으로 나아가되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믿음 말씀대로 행하는 믿음 시험을 참는 믿음 십일조를 드리는 믿음 주를 앙모하는 믿음으로 복 받는 모두가 되고 영광 돌리며 사명 감당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