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 부인
말리 부인은 ‘아약달’이란 장자의 하녀였다. 그녀의 임무는 말리 동산을 지키는 일이었다. 이름도 없는 천민이었기에 말리 동산을 지키는 사람이라서 ‘말리’라고 불렀다.
어느 날 당시 인도의 강대국 코살라의 ‘파사익’ 왕이 말리 동산에 사냥을 나갔다. 왕은 사냥감을 좇아 말을 달리다가 수행원들과 떨어져 혼자 남게 되었다. 길을 잃고 지친 왕은 말리 동산을 지키고 있는 말리 부인을 만나 몸을 안마받고 얼굴을 씻기고 발을 씻기는 극진한 간호를 받아 피로를 풀게 되었다.
또 맑은 물을 길어다 나뭇잎을 하나 띄워 마시게 했다. 왕인 줄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자비심으로 피곤한 사람을 정성으로 보살폈을 뿐이었다.
왕이 그녀에게 물었다.
“물에다 나뭇잎은 왜 띄워주는 거요?”
“목마른 나머지 급하게 드시면 체할 수 있으니까 나뭇잎을 불면서 천천히 드십시오.”
그의 지혜롭고 정성스러운 행동에 감동한 왕은 그녀의 주인에게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그녀를 데리고 가서 왕비로 삼았다.
말리는 왕비가 된 뒤에도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고 지혜롭게 처신하여 왕의 다른 부인들에게도 모두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어느 날 왕이 생각하기를 저렇게 나에게 헌신적인 여인은 다시 없을 것이다. 자기 자신보다 오히려 나를 더 사랑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말리 당신은 당신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요?”
한참을 생각하던 말리는 대답했다.
“대왕님께서 무슨 말씀을 듣고 싶어 하시는지 알지만 저는 대왕께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대왕님을 매우 사랑하지만, 저 자신보다.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대왕님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것도 저 자신을 사랑하는 지혜로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왕의 다른 여인들이 한결같이 진실하지 못한 말로 왕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하던 것에 비해 얼마나 당당하고 참된 모습인가?
“그렇소, 나를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당신 자신보다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요. 나에게 듣기 좋은 소리로 말을 꾸미지 않고 진실하게 대답해주어 고맙소. 당신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진실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요.”
그녀가 그렇게 지혜롭고 진실할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 가르치심을 늘 깊게 생각하고 생활에 실천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눈앞의 작은 욕심에 사로잡히기보다는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로 오늘을 슬기롭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부처님의 가장 알뜰한 신도였으며 그녀에게 감화받은 남편도 딸도 아들도 교단의 훌륭한 신도가 되었다.
훗날 남편과 부처님을 뵙고 부부가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을 말씀드렸더니 부처님께서 말리의 진실하고 지혜로움을 칭찬하시며 말씀하셨다.
"남을 괴롭히는 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남에게 외면을 받고 하는 일이 어려움이 많게 된다.
이웃에게 보시하지도 않으며 탐욕만 부리는 사람은 얼굴이 탐욕스럽게 보기 싫은 얼굴로 변하며 남에게 천대받게 된다. 자비심으로 남을 위해 보시하고 상냥한 얼굴로 어려운 이를 보살피면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넉넉한 생활을 즐기게 된다."
그녀의 딸은 승만이다. 승만은 ‘아요디아’의 ‘우칭왕’에게 시집가서 부처님 신도가 되어 열 가지 서원을 세우며 보살행을 다짐하는데 이로 인해 ‘승만경’이라는 경전이 생겨났다. 승만은 당시 유마거사와 더불어 남녀 신도를 대표하는 출중한 여신도로 꼽힌다.
신라에서는 승만경이 많이 읽히고 실천되어 승만이라는 이름을 쓰는 여인들이 더러 있었다. 신라 28대 진덕여왕(647~654)의 본명이 승만이었고, 진평왕의 후비 중에 승만이란 이름을 쓰는 여인이 있기도 했다. 승만의 서원과 실천행을 모두 본받고자 했던 사례라 하겠다.
승만으로 해서 생겨난 승만경은 승만이 어머니 말리에게서 영향받아 지혜로우면서도 진실을 다하는 보살행의 나눔과 함께함의 동체 대비를 실천하고자 하는 서원의 경전이다. 한국, 중국, 일본에서는 예전에 많이 읽히고 실천 교본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