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R시대의 소설과 영화
대담자: 장정일 / 이인화
일시: 1994일 1월 20일
쥬라기 공원의 입구에서
이인화: 안녕하십니까. 날씨가 많이 풀렸습니다.
장정일: 예, 뭐, 풀리나 마나 요즘 겨울은 도무지 춥지 않군요. 이렇게 기후 상승이 계속되면 앞으로 아이들은 "아이구 귀 시려, 귀 떨어지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것 같습니다. 우울하군요. 계속 날은 따뜻해지고 해수면은 점점 올라가고, 오존층 구멍도 점점 넓어지고 - - - .
이인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주 타임지를 보니 지금은 오히려 새로운 빙하기로 접어드는 시기 같다는군요. 빙하기와 간(間)빙하기가 교차되는 기간을 보면 지금은 간빙하기가 끝나가는 싯점이라는 거예요. LA 지진 탓에 큰 주목을 끌진 못했지만 요즘 미국은 입김이 입술에 얼어붙는 엄청난 이상 한파랍니다. 내륙의 캔터키 같은 곳은 영하 30도. 얼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한데요.
장정일: 에이, 양키들 생각이야 늘 그런 식이죠. 뭐든지 자기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확대하고 보편화시켜서 온갖 이론들을 내놓습니다. 얼어죽을 아메리카니즘.
이인화: (웃음) 어쨋든 지난 연말에 그토록 말썽 많던 우르과이 라운드(UR)협상이 타결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겨울은 온도와 상관없이 춥고 냉혹하게 느껴지는군요. 이제 막 펼쳐지는 UR시대는 우리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으시시한 <쥬라기 공원> 같습니다. 첫째는 그것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전혀 다른 세계라는 점에서, 둘째는 그 속에 사는 공륭들이 언제 약육강식의 무자비한 국가이기주의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장정일: 그렇습니다. 지난 연말 쌀시장 개방의 파란을 경험한 우리에게 UR의 첫 인상은 불쾌하고 곤혹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UR은 '모든 생산품의 예외없는 관세화' 즉 관세를 제외한 모든 무역장벽의 철폐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당장에 UR이 초래할 현실은 정운영 교수의 지적처럼 <생산력의 개방이 없는 생산품만의 개방> 입니다. 현실적으로 우리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미국시장에 진출하여 달러를 벌어온다는 것이 어디 쉬운가요? UR은 결국 생산력의 공평한 경쟁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미국시장이 생산한 상품만이 개방되는 기형적인 구조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인화: 전기 울타리(무역장벽)가 사라진 쥬라기공원은 적어도 당장은 티라노사우러스-렉스가 최고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UR은 국제 무역환경의 '합리화'라는 미명하에 철저히 서구 강대국의 이해를 관철시킨 억지처럼 느껴지는 측면이 많습니다. 막스 베버는 '합리화'를 합리적 결단을 통해 이룩되는 사회 영역의 확장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베버적 의미의, 나아가 서구적 의미의 '합리화'이란 오늘의 UR에서도 증명되듯이 <이미 주어진 상황 속에서> <미리 설정된 목표에 맞게> 응용된 합리화인 것 같습니다. 기존의 체제에 깔린 서구적인 이해관계의 역학을 전제한 상태에서 그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이성적인 재구성을 시도하지 않는 합리화인 것입니다.
UR시대와 문화적 상황의 변화
장정일: 아뭏든 UR시대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UR시대의 규정력은 앞으로 우리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한 시대의 문화가 그 시대의 정치, 경제, 과학기술과 같은 다른 영역들이 중층적으로 결정하는 규정력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화가 다른 영역과의 연관에서 벗어나 특출나게 발전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예컨대 증기기관에 대한 학문은 이미 알렉산드리아 시대의 이집트에서 이론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노예의 무임 노동력을 무제한으로 착취할 수 있었던 로마시대에 증기기관의 실용화는 그 시대의 사회적인 조건과 어울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때 그 좋은 학문은 도리어 그 시대의 안정과 사회의 결속을 파괴하는 재앙이 됩니다. 이같은 사실은 로마제국에서 증기선이 발명되자 밥줄이 끊기게 된 갈리선의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배를 부수고 만다는 윌리엄 골딩의 소설 {황제특명전권공사}에 재미있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인화: 정말 옳은 말씀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실제로 지금 장정일형 같은 탁견을 가진 분은 얼마 안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어쩌면 역사 자체가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시기인지도 모릅니다. 비숍여사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을 읽어 보면 100년전의 우리 할아버지들, 즉 1894년의 한국인들도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변화들이 전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는 것을 잘 깨닫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외국조계(租界)가 생기고 일본인들이 행패를 부리고 갖가지 외제품들이 쏟아져 들어오니 혼란을 느끼고 민족적 의분을 느끼는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것이 근대(近代)였습니다. 마치 요즈음의 이런 저런 일들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그저 위기다, 혼란이다 하며 싸잡아 말하는 것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정일: 우리의 현실이 달라졌다, 앞으로는 더 달라질 것이다, 하는 견해에 의외로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신세대 문화론>이다 뭐다 레텔을 붙이고는 멋모르고 날뛰는 꼭두각시 놀음 정도로 치부하려 합니다. 교만한 마음, 그래서 한없이 게으르고 싶은 마음이란 종종 조용히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마음과 통한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소홀히 해서는 안될 큰 일 앞에서 그것은 어떤 악덕보다도 더 참혹한 악덕일 것입니다.
이인화: 그렇습니다. 저는 본래 아무 재주도 없는 촌놈으로, 이제껏 그저 여러 선배들의 지도와 보살핌 덕에 근근히 지내왔습니다. 돌아보면 그동안 작품으로, 논쟁으로 우리 문학을 이끌어온 선배들은 참으로 현명했고 상황 판단이 정확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저는 그런 현명한 선배들이 자꾸 1인당 GNP 87달러 시대만 추억하는 완고한 고집쟁이로 변해가는 것 같아 쓸쓸하고 안타깝습니다. 다시 <단편소설의 시대로 돌아가자>느니, <문학의 위기>라느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 정말 세월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물론 여기에는 새 시대를 짊어진 자의 미더운 자세를 보여주지 못하는 저같은 사람의 잘못도 큽니다.
장정일: 그렇지요. 모든 문제를 일단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 해답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형은 UR시대의 구체적인 변화가 우리 문화에 어떻게 나타나리라고 보십니까?
이인화: 문화에 나타나는 UR시대의 변화는 광범위하고 심층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UR시대의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쟝르는 소설과 영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두 쟝르는 후기자본주의사회의 정보통신산업 발달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과 영화는 그 시대, 그 사회의 문화적 이념적 가치를 창조하고 보존하고 전파하는 정신적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각각 출판산업과 영상소프트산업의 총아로써 극히 물질적이고 상품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또 이 두 쟝르는 소설의 영화화, 소설의 드라마화, 영화의 소설화 등 다양하게 결합,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멀티 미디어화라는 정보통신산업의 대세에 부응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같은 추세가 얼마나 긍정적인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장정일: UR시대가 그같은 정보통신산업의 대세를 촉진한다면 상당히 바람직한 일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소설의 영화화가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봅니다. 소설의 영화화는 문학의 민주화와 전문화에 기여합니다. 우리의 문학 제도 아래서 현실적으로 재능있는 신인이 등단할 수 있는 통로는 상당히 좁습니다. 이 통로가 좁다는 말은 그 절대적인 숫자가 작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90년대의 변화한 현실에 걸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일간지의 신춘문예나 문예지의 현상공모, 신인 추천이 그 현실적인 통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통로는 보수적이고 무성의하며 편협한 평론가들이 장악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몇권 번역이론서를 읽고 외운 애매모호한 용어로 작품을 난도질한다든가, 특정한 이념적 입장으로 말도 안되는 아마추어의 습작들을 칭찬하는 그들의 평론을 읽어 보면 왜 많은 재능있는 신인들이 기존의 등단 절차에 거북한 표정을 짓는지 십분 이해가 갑니다. 이런 통로에서 탈락한, 혹은 그것을 거부한 신인이 작품을 출판할 때는 <영화화>라는 장치가 큰 의미를 갖습니다. 영화화는 그 신인의 작품을 새롭게 조명받도록 해주며, 판권료에 따른 현실적인 보상도 해줍니다.
이인화: 하지만 소설과 영화는 어디까지나 다른 것이니까요. 아주 잘된 소설도 <영화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UR시대가 오로지 영화적인 소설만의 생산을 촉진한다면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장정일: 글쎄요 - - - 버지니아 울프의 {올란도} 같은 심리주의 소설까지 영화화되는 시대에 그런 구분이 의미가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작가의 원작소설이 영화화된다든지 드라마화된다든지 하는 현상은 굳이 UR시대가 아니더라도 옛날부터 있었던 것 아닙니까? {결혼 이야기}처럼 최근에는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한 예가 있지만 그 이전까지 많은 영화 흥행작들은 원작 소설에 의지한 것이었습니다.
이인화: 물론 그 말씀은 옳습니다. 원작소설의 영화화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UR시대의 특징은 그같은 현상이 보다 기업화되며 보다 산업적으로 조직화된다는 것 같습니다. 가까운 일본을 살펴보면 10대 메이저 출판사들(講談社, 集英社, 小學館, 學習硏究社, 福武書店, 교오세이, 角川社, 광문사, 매거진하우스, 日經PB)이 거의 대부분 다른 미디어산업을 같이 경영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가도가와(角川)는 영화사와 뮤직비디오 제작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고단샤(講談社)는 CATV와 위성방송 사업에 진출했고 만화영화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슈에이샤(集英社)는 비디오게임 제작사를, 산세이도(三省堂)은 전자북 제작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자사의 소프트 자본(원작소설/저작권 등록된 만화의 주인공)을 기본으로 멀티-미디어 전략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설 한 권의 출판 계약에는 영화 판권, TV 판권, 비디오 판권, 전자게임 판권의 계약이 당연히 부수됩니다. 이런 대세에 무감각한 출판사는 도태됩니다. 시바 료타로와 무라카미 하루키를 가진 천하의 문예춘추(文藝春秋社)도 매년 순위가 떨어져 이제는 10위권 밖으로 멀리 밀려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나미(岩波)의 잇달은 매각사태라든가, 88년 츠쿠마쇼보(筑摩書房)의 도산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장정일: 일종의 출판의 대기업화군요. 마치 영상산업에서 VTR회사인 니혼(日本)빅터가 영화 [니키타], [미스테리 트레인] 등을 제작한 것과 비슷하군요. 쏘니가 미국의 콜롬비아-트라이스타를 매입.경영하고, 마쓰시다가 MCA-유니버셜을 매입 경영하고 있는 것과도 대기업화란 맥락에서 같은 의미가 아닐까요.
이인화: 그렇습니다. 대기업화란 UR시대를 살아남는 비교적 보편적인 방법이니까요. 정보통신산업은 소프트웨어 생산자, 하드웨어 생산자, 네트워크 사업자의 3각 구조를 갖습니다. 출판산업의 경우 이것은 작가, 출판사, 서점이며, 영상산업의 경우는 제작사, 극장(VTR/TV), 영화배급사가 되겠지요. 우리 출판산업은 내년부터 네트워크, 즉 서적 유통과 서점 도소매업이 개방되며, 97년부터는 하드웨어 생산, 즉 출판제작이 개방됩니다. 그 소프트웨어, 작가는 기왕 개방된 것이니 말할 것도 없고요. 내년에 우리 고교생들은 동일본북서어비스가 운영하는 24시간 편의점 같은 예쁜 서점에서 책을 살 지도 모릅니다. 아주 극단적인 경우에는 교보문고, 종로서적 같은 대기업화된 서점만 남고 우리의 우중충한 동네 서점들은 상당수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출판사도 마찬가지구요.
UR시대의 소설.
장정일: 그러니까 완전 개방의 국제 경쟁이 촉발하는 문화산업의 대기업화, 그같은 대기업화 생존전략으로서의 멀티-미디어화란 말로 UR시대 문화산업의 추세를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같은 대세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며 그 속에서 우리의 소설과 영화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논의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인화: UR시대의 대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 - - 하는 문제는 확실히 곤혹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UR시대 문화산업의 논리에는 적극적인 상업주의가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국내의 모(某) 대기업이 출판 및 영상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만든 93년 말의 현황 보고서를 보면 이런 문제제기가 있습니다. <한 대기업이 산하에 어떤 소프트웨어 생산회사를 운영한다고 할 때 그 산하 계열사가 작품을 공급하더라도 다른 회사들이 공급을 외면해버리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보고서의 대답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산하 계열사가 총력을 기울여 만든 <재미있는 한 개의 작품, 어떻게 해서라도 보고 싶은 작품 하나는 다른 회사가 공급하는 재미없는 작품 1000편보다 모든 면에서 효과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 예로 MCA-유니버셜의 마쓰시다 그룹이 제작 배급한 {쥬라기 공원}, 콜롬비아-트라이스타의 쏘니 그룹이 제작 배급한 {원초적 본능} {어 퓨 굿맨} {드라큐라} {클리프 행어} 등, 그리고 타임-워너 그룹이 출판하는 주간지 {타임}을 들고 있습니다.
장정일: 일종의 베스트셀러 제일주의군요.
이인화: 그렇습니다. 영화부문 한 해 매출액이 2조6천320억원인 쏘니 그룹이 한 해에 찍는 영화는 10편 내외라는 사실. 여기에 UR시대 문화사업의 본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장정일: 뭐라고 할 말이 떠오르지 않네요. 자본주의사회를 사는 이상 물론 시장에서의 경쟁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라면 너무 참혹하지 않습니까. 외국의 메이저 기업들 그리고 앞으로 내수시장에 진출할 국내의 대기업들이 그런 노선을 강요한다면 저 같은 사람은 정말 참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요즘 열심히 만들고 있는 독립 프로덕션 영화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지금 문단에서 행세하는 모모한 작가들도 99%는 자비출판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면 아예 붓을 꺾고 술집을 차리겠지요. 이건 마치 고결하게 죽을 것인가, 더럽게 살 것인가 양자택일의 제로섬-게임 같습니다.
이인화: 설마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변할 리야 있겠습니까 - - - 뭐라고 확실한 해답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저도 마찬가집니다. 저희들뿐만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해 뭔가 글을 쓴 다른 작가나 평론가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글들의 기저에는 <이 뜨거운 감자같은 대중문화의 침략에 대항하여 이 좋은 문학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는 이분법적 전제가 항상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장정일: 저 역시 그런 대중문화, 고급문화 하는 이분법에 찬성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저도 그저 생각하는 것이라곤 제 콧구멍에 들어가는 것밖에 모르는 평론가들의 소리에 답답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세상이야 어떻게 되건 "내가 노는 이 골목" "이 좋은 문단 골목"만 마르고 닳도록 남아 있으면 된다는 식의 에고이즘이 요즘 세상에 어떻게 통하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방금 이형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그런 극단적인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은 과연 올바른 문학은 무엇이며, 우리가 무엇 때문에 문학을 해야 하는가 하는 가치관의 문제까지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이인화: 옳은 말씀입니다. 사실 UR시대와 대결하는 우리 문화의 입장은 얼마전 조선일보에 실린 유홍준 교수의 글에서 이미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UR타결 이후의 국제 질서속에서 우리 삶의 조건은 달라질 수 밖에 없으며 삶의 조건이 달라지면 문화도 달라져야 한다. 달라진 삶의 조건에 문화가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그 삶은 피폐해지고 그 문화는 시들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문학에 대한 우리의 가치관이 지난 80년간의 근대문학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8, 90년 동안 우리 문학은 서구화의 모범생들이었습니다. 서구적인 의미에서 근대적인 소설은 보편적으로 올바른 소설이었습니다. 그런 가치관을 일조일석에 바꿀 수 없고 보면 이 따위 현실과 타협하느니 차라리 고결하게 패배하고 싶다는 생각이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장정일: 그렇다면 UR시대 우리의 소설과 영화가 나아갈 방향이란 상당히 난감한 것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좀 힘이 빠지는 대목이군요.
이인화: 예, 그러나 한 편으로 저는 가장 능력없는 인간의 가장 뛰어난 능력은 다른 사람의 착한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라는 옛 말을 떠올립니다. 당장 우리 문단 속에서 해답이 없다면 눈을 돌려 국제화시대를 맞는 다른 정치, 경제, 사회, 문화계의 의견들을 참조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노자께서 {도덕경}에서 말씀하시길 강강(剛强)하고 억센 자는 제 명에 죽지 못하며 먼저 자기를 낮추어 겸하(謙下)하는 자는 남의 윗 자리에 있게 된다 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문화가 몸을 낮추어 사회의 다른 영역들과 마찬가지로 대중적인 문화산업의 대세와 일정하게 타협하고, 그러는 가운데 우리 고유의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개발하여 국제화시대에 살아남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장정일: 글쎄요. 글을 쓰는 사람들이란 너나 없이 순수한 명분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타협한다는 말을 감히 용납할 수 있을까요.
이인화: 그 말씀은 아름답지만 대국을 보는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 때 몸을 아껴 백년의 큰 계획을 도모한다면 후세에 무슨 부끄러움이 있겠습니까. 수치를 안고 치욕을 참으며 하기 싫은 일도 하는 것이 남자가 아닙니까. <올바른 삶>에대해 잘 모르겠다면 그 차선으로 <좋은 삶>을 선택하여 살아남는 것이 진정 옳은 것입니다. UR시대는 우리에게 바로 그와 같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눈을 단호히 삶의 방향으로, <살림>의 길로 향하게 해야 합니다.
장정일: 글쎄요. 말씀이 좀 추상적이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식의 말이라면 너무 진부한 것 아닙니까.
이인화: 진부해도 할 수 없지요. 어떻게든 세계시장에 우리의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각인시키고 우리의 민족문화를 살려서 확대하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고유의 논리와 문화를 상품화하지 않고는 전면적인 국제화시대의 무차별경쟁속에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학마다 서구문화의 수입 오파상을 차리고 그 지적 상품들을 들여와 정리, 광고하던 시대, 그렇게 학자 혹은 평론가로, 소설가로 행세하던 말류(末流)들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그런 위학(僞學)으로 남을 속이고 자기를 속이며 우리 문화의 결과물들을 난도질하는 논리는, 그것이 헤겔이 아니라 설사 천금 같은 진리라 해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장정일: 글쎄요 - - - 우리 식의 고유성을 확대, 재생산하겠다는 단호한 문화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말씀인데요. 그 단호함이 자칫 국수주의적인 민족주의로 흐르지는 않겠습니까? 그같은 국수주의는 일견 매우 선명하고 힘있는 것 같지만 대세의 판단을 그르친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완전히 무력하고 공허한 것입니다. 옛날 개화기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노정하고 말았던 한계가 그런 것이 아닐까요.
이인화: 그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개화기의 그것이 완전히 폐쇄된 국가에 갑자기 강요된 개항에 대한 방어적, 소극적 민족주의였다면, 오늘날의 그것은 무한경쟁의 국제시장을 향해 우리 문화의 고유한 아이덴티티와 이미지, 우리의 지적 상품을 팔겠다고 나서는 공세적, 적극적 민족주의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문화의 장점과 결점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세계시장의 대세에 부응하지 않는 민족주의란 우리 자신의 삶을 가꾸는데 도움이 되지 못할 뿐더러, 경쟁력도 갖지 못합니다.
장정일: 글쎄요, 말을 맞지만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군요.
이인화: 그러시다면 93년 깐느영화제에서 경쟁한 {서편제}와 {패왕별희}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결과부터 말하면 {패왕별희}가 대상을 받았고 세계적인 흥행작으로 떠올랐으며, 우리 {서편제}는 탈락하고 상대적으로 반응도 시원치 않았습니다. 저는 영화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그 원작 소설에서 나타나는 우열의 차이는 충분히 이해할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세계시장의 수준에 부응할 수 있는 '우리 것'과 그렇지 못한 '우리 것'의 차이가 아닌가 합니다. 이벽화(릴리안 리)의 {패왕별희}는 영혼의 풍경이랄까, 흔히 말하는 섬세한 내면 묘사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 종래의 관점에서만 보자면 통속소설에 가까운 작품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패왕별희}는 경극이라는 지극히 중국적으로 세련되고 상업화된 전통극에서 서사시적 환상을 가져옵니다. 그 덧없고 화려한 환상 위에 평생 단(旦:여자역)역을 하도록 운명지워진 남자배우와 평생 생(生:남자역)을 하도록 운명지워진 남자배우의 인생의 전폭을 담았습니다. 그 강렬하고 유장한 이야기성, 인생의 파란과 업보(業報)를 연결시키는 관점, 내면묘사 - - - 이 모두가 {홍루몽}의 전통을 잇는 가장 중국소설적인 특징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이청준의 {서편제}는 어떻습니까. 이미 지적된 것처럼 이청준의 {서편제}는 슈니츨러 {눈먼 제로니모와 그의 형}의 구성에 우리 판소리 광대의 에피소드들을 결합한 것 같은 작품입니다. 결과적으로 딸의 눈을 멀게 하면서까지 예술에 매진하게 하는 아버지 같은 이야기 설정이 지극히 서구적인 것이 되었고 그래서 그것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독일 단편소설의 구성이 판소리라는 우리 전통극의 특징과 판소리 광대의 파란만장한 삶을 재구하기에 도무지 적당하지 않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당연히 다른 유럽 영화와 변별력도 없구요.
장정일: 듣고 보니 이형이 생각하는 세계시장으로의 국제화와 기존의 소설가들이 생각하는 국제화는 상당히 다른 것 같습니다. 국제화를 의식하는 기존의 소설가들은 세계 문학의 가장 선진적인 추세에 부응하여 실험적, 비전형적 소설쓰기 전략을 수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이야기는 독자에게 기성품으로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조립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논리는 이미 해체되어 있는 채로 그 전체적인 모습이 재구성되기를 독자로부터 기대하고 있다"하는 식의 생각이지요. 중층의 서술, 전형화 되지 않는 인물들이 이런 맥락에서 나타납니다. 또 그런 소설쓰기 전략의 연장선상에서 언어에 대한 반성이 잇다르고 작가가 전지적인 관점에서 사건을 다 설명해주는 <사건의 소유화>를 반대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최윤의 소설을 둘러싼 정과리-김명인 논쟁 역시 이같은 생각들의 일단을 보여준 예였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비해 이형이 생각하는 국제화는 너무 대중적인 반응만을 의식하는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인화: 그런 소설쓰기 전략이 세계문학의 가장 선진적인 추세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열등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한 제 3세계 지식인의 환상입니다. 그런 소설은 세계문학의 선진적인 흐름이기는 커녕 자국의 독자들에게조차 외면당하는 서구 작가주의소설의 막다른 골목입니다. 루카치 {소설의 이론}에 나오는 "내 혼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떠난다"라는 말은 그같은 작가주의 정신의 강령이었습니다. 주인공은 세계와 타협할 줄 모르는 강한 내면성을 지니고 자신의 참된 존재를 향해 방황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가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궁극적으로 그 모든 방황들은 <내가 누구인가>에 도달하기 위한 외부적인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인식을 극단으로 몰고갈 때 그 외부적인 과정들을 모두 생략하고 처음부터 언어에 대한 반성을 통해 바로 자기 내부로 들어가려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인물도, 사건도, 극적 논리도 해체된 자아의 낯선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같은 추구가 정말 작가 자신에게 스스로 사랑할 수 있는 자기의 모습과 타인을 설득할 수 있는 미학적 형상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천만에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작가가 발견하는 것은 해체된 자아의 쓰레기더미, 헤어날 수 없이 질퍽거리는 자의식의 똥통 뿐입니다.
장정일: 이야기가 너무 관념적으로 흐르는 것 같습니다. 서구적인 작가주의 소설의 한계와 우리 소설의 한계를 바로 동일시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 작가들의 내면 탐구에는 언제나 일정하게 역사적인 중압이 무겁게 덧씌워져 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또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과연 이형의 말씀처럼 그같은 서구의 작가주의소설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면 세계문학의 구체적인 지향점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인화: 저가 그런 소설쓰기 전략을 부정하는 것 역시, 이 땅에서 그런 소설쓰기 자체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같은 소설들도 씌어져야 하며 우리 문학을 풍요롭게 해줄 아름다운 예외로써 소수의 전문 독자에게 수용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진정한 소설은 동시대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독자 전체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정한 소설은 평론가들이 끼리끼리 추켜주는 지금의 문단골목소설이 아니라 실제로 동시대의 일반 독자들에게 충분히 이해되고, 그들을 감동시키고, 그들의 가슴에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인생의 모델을 심어줌으로써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그런 소설인 것입니다.
장정일: 그런 소설이 구체적으로 어떤 소설입니까?
이인화: 1980년대를 말하면 당연히 이문열과 조정래의 소설들이 될 것입니다. 서적 마케팅의 영향력이 비약적으로 신장된 90년대는 선뜻 누구라고 지목하기 힘듭니다. 쉽게 미국의 예를 들자면 존 그리셤의 {펠리칸 브리프}(1992)같은 것이 아닐까요. 이 소설은 93년 3월 24일 현재 미국에서 585만부(하드커버 135만, 페이퍼백 450만)가 팔렸습니다. 저는 최근 이토록 강렬한 이념성을 드러내면서 이만큼 훌륭한 대중적 반응을 얻은 책을 달리 찾을 수 없습니다. 물론 전문적인 문학 수업을 받은 작가가 아닌 까닭에 인물들의 소설적 육체가 풍부하지 못하고 사색의 깊이를 찾아보기 힘든 한계는 있습니다만. 어떤 자본가의 사주를 받은 테러리스트가 대법관 두 명을 죽입니다. FBI도 해결하지 못하고 백악관에서도 손대지 않으려는 이 사건의 실마리를 우연히 튤레인 법대생인 여주인공 다비 쇼가 발견합니다. 여대생은 이 사건을 추리한 허구의 소장(訴狀)을 쓰는데 이것이 펠리칸 브리프입니다. 이 브리프가 외부에 알려지면서 브리프를 빼앗으려는 자본가측과 여주인공의,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추격전이 벌어집니다.
줄거리는 이렇게 평범한 스릴러물인데 이것을 끌어가는 작가의 이념은 여간 비범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의 서두는 국가주의와 미국우월주의에 물든 공화당 출신의 미국대통령(부시)을 철저히 까발기면서 시작합니다. 백악관과 대법원 주변의 파워엘리트들이 대통령을 조종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 확대해가는 모습이 리얼하게 묘사됩니다. 멸종 위기의 펠리칸을 보호하려는 대법원의 입장과 펠리칸 서식지를 개발하려는 자본가 계급의 갈등에서 오늘의 환경운동이 처하고 있는 현실이 적확하게 지적됩니다. 여주인공의 위태위태한, 그러나 명민한 도주 행로는 미국의 보통사람들이 가진 가능성과 지성에 대한 작가의 신뢰를 보여줍니다. 작가는 이익에 눈이 먼대자본가계급을 비판하고, 부패한 관료와 법조계를 비판합니다. 또 작가는 많은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민주적 절차를 통해 구성된 의회를 믿고, 언론을 믿습니다. 말하자면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적 이상을 강렬하게 옹호하면서 그것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미국의 현실을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판에는 작가의 따뜻한 휴머니즘과 함께 C.W.밀즈({파워엘리트})에서 제레미 리프킨({엔트로피})에 이르는 미국지성사의 흐름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보통의 독자가 한 권의 소설에서 이 이상 더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존 그리셤은 우리 시대가 가진 가장 진보적인 작가의 한 사람입니다.
신세대 소설과 신세대 영화
장정일: 그렇다면 UR시대에 대응하는 소설의 방향이라는 것은 결국 <강한 이야기성>으로의 회귀이군요. 말하자면 유기적인 구조가 있고 그 구조가 만들어내는 강한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가 목표하는 찡한 감동이 있는 소설 말입니다. 그런 것이 앞으로의 방향성이라면 구효서, 박상우, 하재봉 등 90년대 작가들의 최신작은 상당히 걸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들의 소설에는 먼저 유기적인 구조가 없고, 강력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감동에 호소하기 보다는 지적 유희를 더 중시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적인 문학적 규범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형식 해체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는 신세대 소설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이인화: 글쎄요 - - - 신세대 소설의 경향을 단순히 형식 해체적인 경향으로 한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90년대 초에 나타난 신세대 소설의 본질은 창작방법에 있어 <작가주의로부터 쟝르주의로의 전환>, 세계관에 있어 <80년대적 이념성의 거부와 자유 민주주의적 가치의 확신>, 쟝르선택에 있어 <장편소설적 발상>이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정일: 작가주의와 쟝르주의라는 구분은 영화는 모르겠지만 문학에서는 좀 생경한 개념 같습니다.
이인화: 작가주의와 쟝르주의라는 구분은 우리 소설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애초에 우리 소설의 출발은 당나라 전기소설(傳奇小說)의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명나라 구우(瞿佑)의 {전등신화}가 이같은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으며 이 {전등신화}의 영향으로 우리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가 나타났으니 말입니다. 유가(儒家)들, 사실주의자들이 지배하는 문화속에서 이런 최초의 소설이 가진 도가적, 비현실적 소재와 설화적 구성은 <소설>이 고급문화로 수용되기 어려운 결정적인 한계였습니다.
그러다가 조선 중기에 이르러 명나라 연의소설(演義小說), 특히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전래되면서 <소설>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바뀝니다. 그 영향하에 우리의 수많은 군담소설들이 나타났으며, {쌍천기봉}같이 {삼국지연의}를 고도로 패러디한 소설까지 나타납니다. {삼국지연의}의 의미는 <소설>이 <역사>를 포회함으로써 고급문화에 부분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는 데 있습니다. 청나라의 대학자 장학성(章學誠)이 {삼국지연의}를 "칠실삼허(七實三虛:사실이 7, 허구가 3)"라고 평가함으로써 소설이 일반적인 독자에게 훌륭한 역사교육의 매체로 쓰일 수도 있음을 인정한 것이 그런 예입니다.
그러다가 8,90년 전부터는 서구 자연주의소설이 전래되면서 <소설>도 하나의 <문학>으로써 <역사>와 비등한 고급문화라는 급진적인 생각이 나타납니다. 플로베르가 {보봐리부인}을 쓰게된 동기가 바로 그런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그 모델이 되는 서구 소설이 우리의 전통적인 <문학>개념, 특히 고급한 산문으로서의 <문>개념과 너무 맞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말하자면 <명 名>과 <실 實>이 서로 어긋난 것입니다. {용재총화}의 척도를 빌리면 전통적인 의미의 좋은 <문>은 내용이 다양해야 하고, 작자의 학문과 식견과 경험이 풍부해야 하며, 세상에 대한 관찰이 예민하고 견해가 타당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인생을 달관하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요건들을 충족시키기에는 서구 자연주의 소설은 너무나 다른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주의소설의 극복을 주장하는 서구 현대소설의 문제의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다른 역사적 맥락이라는 것이 아까 제가 "내 혼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떠난다"라는 생각을 예로 들어 설명한 작가주의 정신입니다.
장정일: 논의가 너무 장황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에 대비되는 쟝르주의란 무엇입니까.
이인화: 작가주의는 <소설가>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과 같은 존재, 즉 작품의 창조자로 간주합니다. 그런 환상을 버리고 누천년 동안 우리가 익히 듣고, 배우고 체험해왔던 전통적인 소설가의 자리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야깃꾼으로서의 작가입니다. 소설은 이야기를 가장 감동적으로 구연하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소설다운 소설을 '만드는' 작가, 철저히 소설적인 소설의 장인(匠人). 그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온 우리의 자리입니다.
장정일: 글쎄요 - - - 그러나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신세대 소설들은 이 형의 원칙론과 괴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며칠전에 저는 <신세대 소설>이라고 뒷표지에 광고까지 하고 있는 젊은 작가의 신작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남자주인공이 魷금없이 집을 나가 방황하고, 무슨 오렌지족처럼 여자를 유혹하고, 섹스하고, 턱없는 감상주의에 빠져 외로워하고, 소설쓰기가 어렵다고 엄살을 떨고 - - - 한 마디로 한심했습니다. 모모(某某)한 소설의 재탕, 삼탕이 아닙니까. 문장도 형편없고요. 이런 말도 안되는 아마추어의 습작들이 신세대 문학을 자처하며 쏟아져나오는 형편입니다. 신세대 문학의 현실이 정말 이런 것이라면 저는 앞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극렬 반동, 보수, 구세대 문학을 할 것 같습니다.
이인화: 그런 소설들이 있었습니까? 제가 요즘 게을러져서 미처 그런 작품들을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소설들은 신세대 문학의 본질을 오해한 결과인 것 같습니다. 장형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경박한 평론가들이 즉흥적으로 논단한 신세대 문학의 성격을 그대로 확대 재생산하겠다는 태도가 아닙니까.
장정일: 그런 현상은 비단 소설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방금 말씀드린 작가도 영화에 관계하는 사람이지만 영화계 역시 작년 {첫사랑}의 70년대적 감성이 실패하고 차라리 {그대안의 블루} 같은 포스트모던한 분위기의 작품이 성공한 사실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결과에 집착하기 보다 더 가시적인 현상, 예컨대 {서편제}가 왜 그토록 큰 호소력을 발휘했던가를 다시 냉정히 반성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88년 미국 영화의 직배가 시작된 이후 불과 몇년 사이에 외국영화는 국내영화시장의 85%를 점유했습니다. 이제 146일 동안 의무적으로 한국영화를 상영해야 한다는 법(스크린 쿼터제)을 지키는 극장은 전국에 한 군데도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극장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니까요. 더구나 올해부터는 프린트벌 수 제한이 해제됩니다. 이것 역시 한국영화의 커다란 위기입니다.
이인화: 프린트 벌수 제한이 뭡니까?
장정일: 이제까지는 아무리 흥행이 확실한 외국영화라도 가령 {원초적 본능} 같은 영화도 전국에 12개 이상의 극장이 동시에 상영하기는 제도상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프린트벌 수가 12개로 제한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올해부터는 {원초적 본능}이나 {클리프 행어} 같은 영화가 30벌, 60벌, 100벌씩 무제한 배급되어 여름시장을 완전히 점령해버릴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한국영화가 흥행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만큼 더 줄어드는 것이죠. 자, 한국영화의 형편이 이렇게 어렵다는 사실은 전국의 모든 관객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서편제}의 성공은 이렇게 어렵다, 어렵다, 어렵겠다, 힘들겠다 하는 우리 관객들의 걱정하는 마음에 크게 기대고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그런 마음이 우러나도록 하는 계기를 영화제작자와 그 주변의 비평가들이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편제}의 경우 그것은 '우리 것' '판소리'라는 상징과 임권택 감독이라는 상징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세대 영화를 생각하는 분들은 이 점을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UR시대와 우리의 비평.
이인화: 방금도 비평가들의 역할을 강조하셨는데, 역시 UR시대는 새로운 시대의 추이와 객관적 조건들을 읽고 우리 문화의 가능성들을 보호, 발전시킬 비평가들의 역할이 더욱 요망되는 때가 아닌가 합니다. 이는 비단 영화계 뿐만 아니라 우리 문학쪽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장정일: 예, 원론적으로 말하면 그렇지요 - - -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작가들이 현재로서는 평론가들에게 기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정도가 현실인 것 같습니다. 요 근래 나온 젊은 평론가들의 평론집을 보면 읽히는 것은 충전된 정신의 긴장이 아니라 문단의 지형도와 이론의 유행 정보입니다. 말하자면 요즘 문단의 원로들이 누구를 예뻐하는가와 요즘 누구의 이론이 유행하고 있는가 하는 두 가지 고민이 평론집 목차부터 보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다루고 있는 작가와 시인들이 비슷비슷할 수 있습니까. 또 그 비평의 논지가 참으로 정중하기 이를 때 없습니다. 아무도 기성의 문학에 대해 비판을 가하지 않습니다. 어쩌다 비판적인 말을 한 마디 달면서 그 앞에 온갖 췌사와 유보조항을 다 늘어놓습니다. 이토록 문제의식이 없다면 무엇하러 평론을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선배 비평가들은 자기 앞의 막강한 문협정통파들과 싸우면서 가시밭길을 걸어왔습니다. 선배들이 깔아놓은 꽃길을 걸으며 그들의 눈치를 보고 황송하는 우리 세대의 젊은 비평가들은 한번쯤 어느 시대에도 눈칫꾼들이 존경받은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새겨보아야 하겠습니다.
이인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저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 정말 부끄럽습니다. 사실 우리의 선배인 이어령이나 유종호 같은 분들은 비단 문학평론가였을 뿐만 아니라 그 문명(文名)이 한 시대를 명동(鳴動)시킨 일류의 지식인들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 분들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대국(大局)을 볼 줄 아는 안목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아사히나 요미우리를 읽고 주마다 시사지를 보고, 그리고 다달이 외국의 여러 문예지를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축척되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우리 세대의 평론가들은 어떻습니까. 영어도 못하고, 일어도 못하고, 한문도 모르며, 학교 공부까지 지지리도 못합니다.
장정일: (웃음) 그만둡시다. 어차피 그런 대가들이 한 시대에 여러명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요. 문제는 그런 거시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인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정식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은 작가들이 대거 쏟아져나와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현상이 일반화되었습니다. 그 작가들이 모모한 문예지에서 평론가들이 서구적이고 단편소설적인 척도로 재단하여 계절마다 양산하는 신인들보다 정말 문학적으로 열등한 사람들인지 의심스럽습니다. 또 작년 게간지에서 문학상을 받아나온 한 작품을 보고나서 저는 그런 작품들과 이 작품이 과연 문학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인화: 저 역시 최근에 오세영의 {베니스의 개성상인}을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무엇보다 패권적 민족주의에 함몰되지 않는 작가의 균형감각, 민족의 역량에 대한 신뢰, 16세기 말의 조선과 일본, 이탈리아를 잇는 거대한 스케일, 박진감 있는 구성, 작가의 노력이 돋보이는 해박한 지식 등 근래에 나온 한국 소설 중에 단연 수작이라 할만 했습니다. 문제는 평론가 중심의 우리 문단이 오세영 같은 작가의 존재 자체를 전혀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는 것 같습니다.
장정일: UR시대가 본격화되면 될수록 기존의 등단 및 출판의 절차에 대한 심각한 재고가 진행될 것 같습니다.
이인화: 그렇습니다. 사실 어떤 비평도 다양한 작품들을 일정한 논리로 환원해야 하는 이상 작품의 실상과 약간씩 괴리될 수 밖에 없으며 비평가의 주관적인 견해가 개입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작품과 비평의 괴리는 종종 정신과 정신이 부딪히는 아름다운 긴장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방금 말씀하신 것 같은 문제는 우리 문화의 상황이 아직까지 비평의 주관주의가 그 자체로 아름답게 개화할 만한 여건이 아니라는 데서 생기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프랑스의 비평은 우리보다 더 주관적이고 어떤 의미에서 더 편협합니다. 그러나 그같은 십인십색(十人十色)의 비평은 실제 작품의 운명을 결정하는 권력과 엄격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바로 에르베 아몽.파트릭 로트망의 {지식귀족들}에 나오는 <전문화된 에디터(편집자)>들의 존재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문학출판의 전문 에디터가 예로부터 손꼽을 정도로 희귀합니다. 출판의 영세성 때문이죠. 실제 독자의 판단을 예의주시하며 좋은 작품과 시장을 이어주는 에디터의 부재로 인해 우리 사회는 평론가들에게 그 능력 이상의 역할을 요구하게 되고, 필연적으로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야기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UR시대는 이같은 제도상의 문제점들이 개선되는 방향으로 작용하리라고 봅니다.
장정일: 정보화사회는 1차 정보, 즉 창조적인 정보가 곧장 자본으로 전화되는 시대라는 점에서 산업사회와 변별됩니다. 좋은 작품을 제대로 보호해주려는 노력들이 더욱 절실히 요청됩니다. 좋은 작가가 좋은 작품을 쓸 수 있고, 또 그런 작품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여러가지 문화 제도들이 갖추어질 때 UR시대는 순치되고 아름다운 쥬라기 공원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인화: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장정일: 감사합니다.
편집자의 말.
본격적인 U R시대가 시작되었다.
<세계로, 미래로>란 소박한 구호를 필두로 국제화, 개방화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새삼 국제화를 말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 사회가 얼마나 국제화하기 어려운 사회인가를 반증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의 현대사는 국제화시대에 적응할 다양성의 경험이 없다는 소리도 들린다. 전후세대, 4.19세대, 유신세대, 광주세대로 명명되는 세대 개념도 바로 저 힘들고 팍팍했던 시대와 그 시대적 과제의 단순성 단일성을 암시하는 것 같다.
솔직히 우리에겐 북경 하늘에 펄럭이는 나비의 날개짓이 뉴욕의 날씨를 바꾼다는 글로벌 시대가 아직도 낯설다. 다시 한번 문학의 역할을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 이것이다. 문학은 어떤 급변하는 인간 조건속에서도 언제나 삶의 의미와 인간의 기품에 대해 생각하고 발언해 온 소중한 지적 양식이었다. {상상}은 문학이 계속 진취적이고 활기찬 모습으로 새로운 국제화 시대에 새로운 문화적 지평을 열어나가기를 바란다. {상상}이 때로 우리 문화의 부정적인 단면들에 대해 과격한 비판을 하는 것은 이같은 문학의 가능성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문제의식 아래 이번 호는 국제화 시대 우리 문화의 여러 문제들을 논의한 {UR시대의 소설과 영화}를 {특집 1}로 꾸몄다. 90년대의 대표적인 젊은 작가들인 장정일, 이인화씨의 진지한 대담과 새로운 상황에 응전하는 90년대 소설의 상상력을 분석한 진형준 교수의 비평을 실었다. {특집 2} {이성주의의 저 편-포르노와 악마}는 앞서의 논의를 각론의 차원에서 심화시킨 기획이다. 서구적인 합리주의, 이성중심주의가 배척하고 이단시해온 우리 정신의 두 가지 영역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서구 문화와 서구 중심의 지구촌문화를 비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다. 90년대의 대표적인 젊은 비평가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신범순 교수와 서영채씨가 이 흥미진진하고 날카로운 문명비판론을 집필했다.
창작란에는 윤대녕, 최인석, 박덕규, 원재길씨의 소설을 싣고 장석남씨의 시를 집중 소개, 분석하는 장을 마련했다. 비평란에는 강상희씨의 작가론이 실리며, 번역란에는 신비평 이후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비평가였던 폴 드 만의 라디오 강좌를 서울대 장경렬 교수의 번역으로 실었다. 라디오 강좌라는 형식을 통해 심오한 철학적 깊이를 자랑하는 폴 드 만의 비평세계를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상상의 선택}은 언제나 새로운 대중문화가 깃들어 풍요롭게 꽃필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을 모색하는 장이다. 이 첨예한 현장비평을 문학평론가 박해현씨, 음악평론가 강현씨, 영화평론가 전찬일씨가 맡아 주었다.
이번 호 {상상의 산책}은 명징한 시어와 유니크한 상상력으로 잘 알려진 시인 이문재씨의 글을 싣는다. 광고와 간판, 네온사인이 숲을 이룬 거리. 서울의 거리를 산책하는 시인이 느끼는 시적 이미지의 습격을 다루었다. 이문재씨의 주제와 연결되는 {상상에서 만난 사람들}은 젊은 광고인들의 고뇌와 희망을 열띤 좌담의 형식으로 다루었다.
지난 호까지 기획을 맡았던 임재철, 서영채, 강헌, 김종엽, 주인석 다섯 분의 편집진이 바뀌게 되었다. 이번 호부터는 서울대 영문과의 장경렬 교수, 이화여대 중문과의 정재서 교수, 홍익대 불문과의 진형준 교수, 문학평론가 류철균씨의 새로운 편집진이 시작하게 되었다. 그동안 애써주신 전임 편집위원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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