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이 바둑광의 최후는?

컴퓨터의 컴자도 모르던 아내가 어느 날 고스톱을 가르쳐 줬더니 컴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 하더니 아내가 그짝이다.   사실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스트레스도 그렇게 푸는 것도 괜찮겠지 했는데 몇시간이고 죽치고 앉아 있는 걸 보니 그냥 두면 안 되겠다 싶어 컴을 빼앗아 앉은 것이 한 반년 전 일이다. 또한 타이젬과 인연을 맺게된 동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궁리 끝에 나름대로 대책을 세웠다. 어느 날 TV 바둑 방송을 틀어 놓고 "우와! 바둑 한 판에 상금이 1억인가, 2억이라 하네?" '억'자에 엑센트를 강하게 주며 혼잣말처럼 소리쳤더니 돈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아내가 예상대로 반응을 보여 왔다. "아니 무슨 판이 그렇게 커 정말 1억씩 걸어놓고 저 사람들 두고 있는 게야?" 아내는 바둑도 화투처럼 내기에 쓰이는 잡기로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여름 한 철, 앞집 문구점 박 원장님과 맥주내기 바둑 두는 것을 자주 봤기 때문이다. 나는 이때다 싶어 바둑에 대해 간단히 아내에게 설명했다. 주로 아내가 솔깃할 상금 이야기를 많이 했다. 바둑은 도박이 아닌 정신 스포츠로 각종 대회가 엄청 많이 열리고 상금 또한 보통 억대이고 이창호나 조훈현 같은 사람은 1년에 상금이 한 백억쯤 된다고 부풀려 이야기했더니 대뜸 아내가 말한다. “자기도 바둑대회 나가. 자기 바둑 잘 두잖아. 웅?" 바싹 다가앉으며 코맹맹이 소리를 내었다.   아내는 내가 바둑을 엄청 잘 두는 줄 알고 있다. 사실 나의 기력은 후하게 쳐도 6-7급 정도다. 기원 근처에도 못 가보고 순전히 어깨너머로 배운 바둑이라 비공식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내가 대단한 고수로 둔갑한 것은 순전히 신혼 때 우리 집 앞에 살던 박원장님 때문이다.   박 원장님은 본인 말로는 교육계에 종사하다 은퇴했다고 하는데 우리 집앞에서 희망 문구점 간판을 달고 할머니와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문구는 물론이고 술과 잡화 등 슈퍼도 겸하고 있었다. 그 앞에 한 평 남짓한 평상이 있어 겨울 빼고는 늘 그곳에서 바둑이 벌어졌는데 바로 옆에 가로등이 있어 여름에는 밤늦게까지 바둑을 두어 우리는 도둑 걱정 없이 편하게 지낼 정도였다.   어느 날 여름밤 맥주 사러 갔는데 그때도 박 원장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옆에서 누가 손님이 왔다고 하니 힐끔 쳐다보고는 안면이 있어 그런지 "아~ 잠시만요!"하고는 다시 바둑에 눈을 박아 버린다. 그때 나는 바둑 15급 정도의 초급 바둑으로 축도 일일이 손가락으로 짚어나가는 수준이었지만 자연스럽게 옆에서 그냥 구경하게 되었는데, 아마 승패가 갈리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던 것 같았다. 대마가 걸린 패사움이라 한수 삐걱 하면 끝장이 나는그런 판이라 모두를 숨죽이고 지켜보는데 굴꺽 하고 침넘기는 소리도 민망하게 크게 들릴 정도로 적막감까지 도는 그런 상황이었다.     드디어 원장님의 불계승으로 긴 승부가 끝이 나고 맥주 내기였는지 "얼른 맥주 가져와, 목부터 축이자고, 입에서 단내가 나누구먼 허허~ " 원장님은 한껏 기분을 내며 일어서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그때야 생각났는지 "아이고~ 이거 죄송합니다." 하며 몹시 미안해하며 어쩌줄 몰라 하였다.   "아닙니다. 저도 구경 잘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내가 직접 냉장고에서 캔 맥주 두 병 꺼내 들고 돈을 드렸는데 세상에, 거스름돈이라고 건네 주는데 보니까 물기가 촉촉한 하얀 바둑 돌이 아닌가. 여태 손에 들고 있다가 거스름 돈이라고 쥐여 준 것이었다. 내가 " 이게 뭡니까?"하며 웃으니 "아이고 내가 이거 정신이 나가 버렸네."하며 허둥지둥 돈통을 여는데 같이 있던 사람들 모두가 이사님 하여튼 못 말린다고 배꼽을 잡고 웃었다. 마을금고 명예이사라 모두 이사님이라고 하는데 유독 나만 원장님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이러하다 그날 밤의 해프닝으로 나도 자연히 '평상대국멤버'로 합류하게 되었는데 멤버들은 동네에서 모두 장사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원장님은 기원 6급 실력으로 제일 상수였고, 철물점 이씨는 8급(청년회장) 비디오가게 오씨는 9급 그리고 장어구이 집 원씨는 10급 등 다 고만고만한 하수들이라 실력보다는 주로 덜컥수로 승패가 많이 갈리는 언제나 화기애애한 골목기원이요, 맥주 한 잔 나누는 친목모임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모 국회의원 당원들이기도 했다. 물론 나도 당원이 되어 명절 때 선물 상자까지 받은 기억이 난다. 어쨌든 나는 박 원장님에게 여섯 점으로 출발하여 석 달 만에 정선까지 기력이 급상하여 평상기원 최고수에 오르는 영예를 누리게 되어 강 6급으로 인정받았다. 주로 맥주내기였는데 처음에는 물주에서 나중에는 대접받는 고수가 된 것이다. 저녁마다 평상으로 줄행랑치는 나에게 아내의 불만이 쌓여가고 잔소리 또한 심해졌다. 급기야 박 원장님은 문구점 영감탱이로 불리어지고 나머지는 동네 놈팽이가 되어 싸잡아 욕을 하기 시작했다. 또한, 나보고 한 번만 더 그들과 어울리면 가만 안 있겠다고 겁까지 주었다 그래서 나는 아내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박 원장님은 교장 선생님 출신인데 지금도 시내에 큰 바둑학원을 운영하는데 사범들 여럿을 두고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금고도 그분 것이고 국회위원 모씨도 그분한테 꺼벅 죽는다. 저사람 빽이 얼마나 좋은지 구청에서 가게 앞에 가로등까지 세워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방법 대장에 청년회 위원장 그리고 통장님 등 모두 이 동네 유지들이다 저 사람들 하고 친하면 여러모로 이득이 된다 당장 민방위 훈련도 안 가도 된다 그리고 저 원장님은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바둑고수인데 저분한테 바둑 배우려면 돈을 엄청 내야 하는데 우리는 이웃이라 그냥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머리가 좋다고 특별히 지도도 많이 해주어 거의 비슷한 실력이 되었다 그러니 앞으로 원장님 보면 깍듯이 인사나 하라구. 알았어?   사실 박 원장님은 향상 모시옷에 합죽선을 폈다 접었다 하면서 어허!하고 헛기침을 하며 몸을 뒤로 젖히며 거드름을 피우곤 했는데 그럴 때에는 누가 봐도 엄청난 내공을 지닌 고수처럼 보인다. 그런 좋은 풍채와 나의 뻥튀기 우상화로 아내도 수긍하게 되었고 그 다음부터 원장님이 기원 갈 때 아내는 "어머 원장님 학원 가세요? 하고 인사까지 하였다. 원장님은 가게를 낮에는 할머니한테 맡기고 매일 기원에 다녔는데 기원을 젊은 사람들이 학원이라 하는 줄 아셨는지 아내의 인사에 당연히 “아! 네~” 하고 잘 응대하여 나의 평상 대국을 계속할수가 있었는데, 우리가 이사를 오면서 그 인연도 끝이나고 바둑도 멀어졌는데 벌써 십 년 전 일이기고 하다. 그런 고수들을 이기는 바둑이니 아내는 자연히 나를 바둑고수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 뻥 아니야? 바둑 잘 둔다는 것." "이사람이 누가 뻥이래?" 하고 성질을 내니 그러면 왜 그때 대회 같은데 나가지 안 나갔느냐며 아내가 큰 돈에 잠시 홀렸던 정신을 차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못미더워 하는 눈치를 보였다.   나는 여기서 잘못하면 나의 작전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위기감에 정신을 가다듬어 얼른 수습에 나섰다 그 당시에는 상금이 수억씩 하는 세계대회도 없었고 국내 대회는 상금이 일 이백 밖에 안되었다. 그래서 만일 우승 못하면 처자식 밥 굶기겠다 싶어 깨끗이 접었는데, 지금처럼 이렇게 커질 줄 알았다면 계속 공부 했을 텐데 하고 사뭇 애통해하자 "어이구 등신. 그래 당신은 어떻게 한 치 앞도 못 내다 보는 거야! 당신하는 일이 그렇지!!" 하면서 아내는 나를 원망하다 아쉬운 표정으로 "자갸 지금은 영 안되겠어? 하며 미련을 두었다.   "왜 어디 학원 같은데 가서 조금만 공부하면 못 따라갈까 ?저봐!" 하면서 화면 속의 조훈현 국수를 가리키며, "저기 저 사람은 당신보다 훨씬 나이도 많구먼 엉? 어떻게 안 되겠어? "하며 허벅지를 쥐고 흔든다. "저사람은 어릴 때부터 공부하고 일본 유학까지 갔다 왔는데 나는 못 따라가." 퉁명스럽게 말 하니 아내는 체념하듯 “에구 그렇지 뭐. 내 복에 무슨?” 하면서 신세 한탄을 하였다. 그 순간 나는 혼잣말처럼 "글쎄? 공부 좀 하면 큰 대회는 아니더라도 작은 대회는 나갈 수 있을라나?" 하고 아내를 흘깃 보며 시큰둥하게 말하자 아내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작은 대회는 상금이 얼마냐 한다. 한 오백에서 몇천까지 대중없다 하니 다시 아내의 얼굴이 박꽃같이 환해지면서 "할 수 있겠어 자기? 그럼 어떻게 공부하면 되는데? 공부만 하면 자신있는거지?" 하며 바싹 다가앉았다.   어허! 나는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어디 고수나 학원같은데서 배우려면 한 달에 한 백만 원 정도 나가는데 요사이 인터넷 바둑사이트에 들어가면 적은 돈으로 고수들한테 배울 수 있다, 십만 원만 하면 된다고 하니 당장 시작하라 하면서 손에 거금 이십 만원을 쥐어 주는 게 아닌가. 나의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아내는 그 뒤 한 번도 컴 앞에 앉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무료였던 타이젬 바둑 사이트에 석 달 정회원으로 가입하고 밤마다 컴을 차지하여 마음 놓고 바둑을 즐길 수 있었다. 가끔 아내가 내 공부들 보러 올 때가 있었는데 접속해 있는 수 많은 회원을 보고는 모두 나처럼 바둑을 배우는 사람인 줄 알고 몹시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럴 때 나는 대기실 목록의 하수들을 클릭하여 전부 나보다 한 수 아래니까 걱정 말라고 했다.   당시 나는 7급부터 시작했는데 아내가 몇 급이 제일 세냐고 묻길래 1급이라고 했다. 한 일 년만 하면 1급 될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면서 아내를 안심시켰다. 정회원이 되고 나니 가볼 곳이 정말 많았다. 음방에도 가야 되고 만화도 봐야 하고, 소설도 읽고 답글도 달아야 하고 고수 바둑에 베팅하고 구경도 하고 하니 보통 새벽 한 두 시였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아내는 쉬엄쉬엄 하세요 하면서 밤마다 과일이나 아이스크림, 캔맥주 등 간식거리를 쉴 새 없이 갖다 날랐다. 그 바람에 체중이 5킬로그램이나 늘어 아랫배가 불룩하였다. 아내가 보약까지 지으려 하는 것을 양심상 그것은 막아야 하겠다 싶어 지금 체중이 불어 있는데 여기서 보약 먹고 살이 더 찐다면 대회출전 못 한다고 했다. 체중도 상관이 있다 했더니 다음날부터 아이스크림 등 살찌는 간식이 없어져 버렸다. 맥주도 안 주려고 했는데 체중관리 잘 하겠다며 사정하여 겨우 마실 수 있었다.   어째던 나는 결혼하고 처음으로 아내에게 큰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다. 반찬부터 시작하여 잠자리까지 아내는 나를 끔찍이 챙겨주었다. 나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내의 그런 지극 정성이 커질수록 나의 심적 부담 또한 커질 수밖에 없었다.   쉬는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타이젬에 접속하여 음방에서 키득대며 채팅하는데 아들놈이 자꾸 게임 하고 싶다고 비켜 달라는 게 아닌가? 나는 안된다, 아들놈은 비켜라 하고 옥신각신하는데 문이 덜컹 열리더니 아내의 고함이 이어졌다. "너 빨리 나와! 너 아빠 공부하는데 방해 말라 했지?“ 하면서 손에 빗자루를 높이 쳐들고 있는데 장판교에 창을 꼬나 들고 서 있는 영락없는 장비 모습이다.   아이가 볼 멘 소리로 "이거 아빠 게임하는거란 말이야 아까 킥킥대고 있었는데 엄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래" 하며 항의하자 "시끄러 콱!! 너 맞고 싶어 ?"하면서 당장 내리칠 기세다. (임마 저게 얼마나 돈 되는 것인데 노다지야 노다지 ) 아내는 차마 그 소리를 아이한테 하지는 않았지만 돈 앞에 그 무엇이던 아내에게는 통하지 않기에 아들놈은 그 뒤로 내가 앉아 있으면 아예 포기하고 피시방이나 친구 집으로 놀러 갔다.   아들놈은 내가 특별대우 받는 것을 보고 자기도 바둑 배우고 싶다 하는 것을 내가 안 된다 했다. 인격형성이 된 뒤에 배워야 하는데 일찍 배우면 잘못하여 잡기가 되어 사람 버린다 하며 안된다 하였다. 바둑을 알면 나의 허풍이 들통 나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들에게조차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아내의 그런 집착과 관심이 일말의 불안감으로 즐거운 타이젬 생활에 반감이 되었지만, 그것은 나중 일이라 치부하고 나의 신나는 타이젬 바둑공부는 계속되었고 별로 대국을 하지 않았는데도 어느덧 1급이 되었다. 아이디 옆에 1급이라는 기력표시가 된 것을 본 아들이 엄마에게 일러주었고 한걸음에 달려온 아내는 흥분된 목소리로 이제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동급 1급들을 쭉 보여 주면서 이 사람들 모두 이겨야 한다고 했다. "뭔 1급들이 이렇게 많아요?" 한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쉬운게 아니다, 바둑이 돈 된다 하니 너나없이 바둑을 두려고 난리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그러니 조용히 기다려라, 1급에서 다시 2급으로 떨어질 수 있으니 이 자리를 잘 지켜야 한다, 대충 그런 식으로 나는 시간을 벌어 놓았고 한동안 대국을 멀리하였다.   아내가 왜 바둑은 안 두느냐 하면 내가 너무 고수라 아무도 나하고 붙으려 하지 않는다 원래 고수끼리는 잘 안 붙으려 하는 법이다 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사달은 그만 내가 내고 말았다. 일말의 불안감이 검은 그림자가 되어 현실로 다가 온 것이다.   어느 토요일이었다. 모처럼 쉬는 날이라 늦은 아침을 먹고 컴앞에 앉아 타이젬에 접속을 하였다. 갑자기 대국을 하고 싶어 설정을 대국허용으로 바꾸고 만만한 하수를 기다렸다. 사실 2승만 올리면 꿈에 그리던 1단이 되는 순간이었다. 내심 단의 반열에 한번 올라 보고 싶었기에 마우스를 잡은 손에 작은 흥분으로 손끝이 다 떨리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드디어 대국이 시작되고 한 판씩 주고받아 단에 오르는데 1승을 남겨놓고 다시 다른 사람과 대국을 했는데 강자여서 얼른 항복하고 다시 만만한 상대를 희망하며 다른 상대와 두게 되었는데 출발이 좋았다. 느낌이 온 것이다. 그때 아까부터 김치냉장고 사러 가자고 조르던 아내가 들어왔다. 잠시만 잠시만 한 것이 벌써 한 시간이 지난 모양이다.   갔다 와서 하라며 채근하는 아내에게 조금 더 기다려 이 판만!했더니 아이참~ 하며 다른 날과 달리 신경질을 내며 코드를 뽑으려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 뭐야!!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그만 해서는 안될 말을 해버렸다. 유리했기에, 꼭 단에 오르고 싶었기에, "당신 이 대국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이 바둑만 이기면 드디어 단이 된다고 단"하니 "단은 또 뭐에요?" 하는 아내에게 나는 1급 중에 최고수가 되는 것이다, 단이 된다면 대회 나갈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진다, 그래서 이 한판에 목이라도 걸어야 한다, 어쩌면 내가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가만있어라~ 이제 당신 고생 끝났다~ 나는 바둑에 몰두해 있었기에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체 아무 생각없이 그런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아내는 깜짝 놀라며 “헉~그렇게 중요한 바둑이면 진작 말을 해야지 아이구 내가 미친년이지. 이 성질 때문에 큰일 낼 번 했구먼!"하며 스스로 책망하며 나가더니 어느새 유자차 한 잔 옆에 살며시 갖다놓고 뒤쪽에 무릎 꿇고 앉아 손을 모으며 눈을 감았다. 아무런 종교도 없는 아내가 누구에게 비는지는 모르지만 나의 승리를 비는 것은 틀림이 없었다.   나중에 올 파장은 걱정도 없이 나는 그저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두어서 드디어 승리를 거두었다. 와! 만세 이겼다!!는 나의 함성과 동시에 아내가 벌떡 일어나 나를 끌어안고는 "여보 나는 당신이 해낼 줄 알았어요. 정말 장해요~"아내는 울먹이며 소리쳤다. 나는 이래도 되냐 싶었지만 나도 기뻤기에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아내의 눈물을 닦아주며 정겨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동안 당신이 정말 수고했어. 이 영광은 모두 당신 덕분이야." 울고 싶은데 고춧가루 뿌려 준 격으로 아내는 더욱 감격하여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날 저녁엔 수라상 같은 밥상이 차려졌다. 제사때나 나오는 큰 상에 차려놓았는데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았다. 낮에 누님과 동생을 부르려고 하는 것을 나중에 대회에 나가서 상금을 타면 그때 식구들 모두 불러서 잔치하고 오늘은 우리끼리 자축하자고 했더니 손이 큰 아내는 네 명의 식구가 사흘 먹어도 못 먹을 음식을 해버렸다.   나는 프로 입단식이라고 자위하며 찔리는 양심을 애써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작은 상에 따로 차려진 술상이었는데 가관이었다. 그 이름도 찬란한 임페리얼 17년산이 상 중앙에 우뚝 서 있는 게 아닌가. 비록 작은 병이지만 12년 산도 아닌, 17년 산이 올라와 있는 것이었다. 맨날 소주인데 양주라니 그것만 보아도 아내는 이 저녁상에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 또 한번 가슴이 미어져 왔다. 어디서 보았는지 보온 도시락에 얼음도 가득하였고 우유에 실론티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아내가 먼저 한 잔을 올리면서 다시 한번 축하 인사를 해준다. "참으로 당신 대단해요. 해 준 것도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에 바둑왕이 되었는지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하면서 눈물을 찍어낸다. 나는 그저 두 눈 질끈 감고 시치미를 뗄 수밖에 없었다. 아들이 "엄마 아빠 바둑왕 되었어? 하니 "그렇단다. 너도 아빠께 축하주 한 잔 올리거라" 한다. 아들이 아빠 축하해요 하면서 한 잔 올리고 딸이 또 한 잔 올리고 몇 잔 들어가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간이 부어오른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 수가 나겠지 하고 아내에게도 한 잔 주면서 “마 그동안 당신이 수고했어요. 자 한 잔 받으시오!" 하고 잔을 권하니 아내의 자태가 요상하다. 반 무릎의 자세로 공손히 두 손으로 잔을 받더니 살짝 고개를 돌리고 마시는 것이 아닌가. 평소 나보다 술을 더 마시며 불쑥 한 손으로 잔을 내밀며 자 따라라 하는 아내가 이렇게 변하다니, 분명 아내는 지금 고상해지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아침 방송에 나온 조훈현 국수의 부인을 보고는 참 보기 좋더라 하더만 자기도 언젠가는 그렇게 텔레비젼에 출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고상을 떠는 게 틀림이 없었다. "너희들 아버지께서 얼마나 훌륭한 줄 아느냐? 고모도 그랬다. 너희 아버지 뒷바라지만 잘 해주었다면 아주 큰 인물이 되었을 것이라고. 그러니 너희는 앞으로 아버지께 항상 공손히 하고 행동거지 조심하여라" 목소리를 낮게 깔면서 말하는 게 우스워 나와 아이들은 마주 보며 킥킥 웃었다. 딸애가 "엄마! 왜 그래? "하니 "콱! 가시내가." 하고는 금방 본색을 드러낸다.   나는"어허~ 내가 한마디 하리다~"하며 마치 황제가 된 듯 무게를 잡으니 아이들이 또 킥킥거린다. 아내가 도끼눈을 하고야 모두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다. "비록 내가 오늘 바둑왕이 되었지만 세상에는 고수들이 엄청 많을 것이다. 내가 공부한 곳에서 바둑왕이 된 것이지 우리나라 바둑왕이 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바둑왕이 되려면 또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벼도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이 사람도 내적 소양이 쌓이면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것이다.  내가 언제 대회에 출전할지는 모르지만, 그때까지 내가 바둑왕이 된 것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된다. 지금 세상이 어수선하여 잘못하면 대회 나가기도 전에 잘못될 수도 있어요. 얼마 전에 인천의 한 바둑왕이 칼을 맞은 적이 있단다. 상대방이 미리 손을 쓴 것이란다." “어머나 여보 어떡해요~" "아빠 어떡해" 하며 호들갑이다. "어허! 조용히~ 그래서 소문을 내지 말란 말이야." 저녁 내내 내 딴에 생각해 둔 묘수였다. 소문나면 무슨 쪽 팔림인가, 또한 그것을 안 아내로부터 나는 죽음이기에 내가 생각해 둔 강구책이었다.   아내가 아이들에게 다시 한번 입단속을 강조하더니 여보 친구는 괜찮지? 하는 게 아닌가. 이 사람 무슨 소리 하는 게야. 혹시 어디 말한 것 아니야! 하니 아직 못했고 내일 하려고 했다는 게 아닌가. 분명 자랑할 게 틀림이 없다. " 어허, 내가 이럴 줄 알고 입조심 하라고 하는 거야,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말 몰라? 나 칼 맞는 것 보고 싶어?" 하고 으름을 놓으니 "알았어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동서에게도..." 하며 아내가 꼬리를 내린다.    일단은 안심이었다. 시간은 일단 벌어 놓았는데 대마가 절체절명이다. 일단 장고 하는 수 밖에는... 분명 묘수는 있을 것이다. 대마불사라 했으니. 아내의 눈치가 작은 대회라도 나가 몇백 상금이라도 벌어 왔으면 하는 눈치인데 큰일이다.   괜히 아들 녀석하고 오목을 둔다고 먼지가 쌓여 있던 바둑판을 반들반들 닦는 게 무언의 시위로 느껴진다. 트로피야 짜가 하나 만들면 되지만 상금이 문제이다. 또한 내가 허풍 떤 일을 아는 날에는 그동안 월 이십 만원씩 타서 술 먹은 것 모두 토해 놓고 두 번 다시 '바둑의 바자도 못 끄집어낼 지도 모른다. 낭패다. 패 중에서도 참으로 고약한 낭패가 난 것이다. 나는 지금 장고 중이다. 진신두 같은 묘수를 찾기 위해 장고 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