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소성지(修所成地)는 갖추어 말하면 수혜소성지(修慧所成地)라고 한다. 수(修)는 수습(修習) 즉 승정(勝定)에 의하여 지혜를 발생시키고 대치(對治)를 수습(修習)하기 때문에 수(修)라고 하며, 정(定)에 의해서 발생한 이사(理事)를 이해하기 때문에 수혜(修慧)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 혜(慧)와 상응하는 심(心) 심소(心所) 등과 유위(有爲)이든 무위(無爲)이든 소득(所得)의 과(果)가 모두 이 지(地)의 체(體)가 된다. 수소성지(修所成地)는 크게 네 가지[四處]로 나뉘며 또한 일곱 가지의 지(支)로 나누어져 설명된다.
2) 첫 번째의 1지(支)는 생원만(生圓滿)의 수(修)에 포함되며,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의 3지(支)는 수(修)의 인연(因緣)에 포함되며, 다섯 번째의 1지(支)는 수(修)의 유가(瑜伽)에 포함되며, 여섯 번째 일곱 번째의 2지(支)는 수(修)의 과(果)에 포함된다.
중동분(衆同分)의 원만(圓滿)이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사람[人]으로 태어나서[生在] 장부(丈夫)의 몸을 얻고 남근(男根)을 성취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처소(處所)의 원만(圓滿)이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사람[人]으로 태어나
3) 이하는 7지(支)의 상(相)을 해석하는 가운데 그 첫 번째로 생(生)의 원만(圓滿)을 해석한다. 생(生)의 원만(圓滿)은 4처(處) 가운데 수(修)의 처소(處所)에 해당되며 총 열 가지가 있다. 열 가지란 내(內)에 의지한 중동분(衆同分)의 원만(圓滿)과 처소(處所)의 원만(圓滿)과 의지(依止)의 원만(圓滿)과 무업장(無業障)의 원만(圓滿)과 무신해장(無信解障)의 원만(圓滿)과 외(外)에 의지한 대사(大師)의 원만(圓滿)과 세속(世俗)의 정법시설(正法施設)의 원만(圓滿)과 승의(勝義)의 정법수전(正法隨轉)의 원만(圓滿)과 정행불멸(正行不滅)의 원만(圓滿)과 수순자연(隨順資緣)의 원만(圓滿)을 말한다.
서 또한 중국(中國)4)에 처(處)하게 되고 변지(邊地)에 태어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이 곳에 4중(衆)의 행(行)이 있으니, 필추(苾芻)5)와 필추니(苾芻尼)6)와 근사남(近事男)7)과 근사녀(近事女)8)이다. 말하자면 이 곳에 4중(衆)의 행(行)이 없고 또한 현성(賢聖) 정지(正至) 정행(正行)의 여러 좋은 장부[善丈夫]가 없는 곳에 달수(達須)9)와 멸려차(蔑戾車)10)로 태어나지 않는다.
의지(依止)의 원만(圓滿)이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중국(中國)에 태어나 처(處)하면서 눈과 귀 등의 어떤 하나의 지분(支分)11)에 결함이 없고 성질이 완악[頑囂]12)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벙어리도 아니어서 능히 선설(善說)과 악설(惡說)의 모든 법의(法義)를 완전히 이해[解了]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업장(無業障)의 원만(圓滿)이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의지(依止)13)가 원만(圓滿)하고 5무간(無間;無間業)의 어떤 하나의 업장(業障)을 스스로 짓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짓지 않게끔 하는 것과 같다. 만약 이것을 짓는 일이 있으면 현재의 몸이 있는[現身] 동안에는 반드시 성현(聖賢)을 증득하는 법기(法器)가 아니다.
무신해장(無信解障)의 원만(圓滿)이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반드시 5무간업(無間業)을 성취하지 않고, 악처(惡處)에 대해서 신해(信解)를 일으키
4) 5천축(天竺)을 말한다. 그 나머지 나라를 변지(邊地)라고 한다.
5) 비구(比丘)를 말한다.
6) 비구니(比丘尼)를 말한다.
7) 범어 Up sak 의 의역(意譯)으로서 3보(寶)에 귀의하고 5계(戒)를 받은 재가남성의 불교신자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음사하여 우바새(優婆塞)라고도 한다.
8) 범어 Up sik 의 의역(意譯)으로서 3보(寶)에 귀의하고 5계(戒)를 받은 재가여성의 불교신자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음사하여 우바이(優婆夷)라고도 한다.
9) Dasyu의 음사어로서 졸렬하고 악하며 하천하고 더러운 무리를 말한다. 이것은 총령(總嶺)의 동쪽에 있는 여러 나라를 총칭한다.
10) Mleccha의 음사어로서 더러운 것을 좋아하는 하천한 무리들을 말한다. 이것은 돌궐족(突闕族)을 총칭한다.
지 않으며 악처(惡處)에 대해서 청정심(淸淨心)을 일으키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니, 갖가지 삿된 천[邪天]의 처소에서와 갖가지 외도(外道)의 처소에 대해서이다. 그는 전생(前生)에 부처님의 성교(聖敎)와 선설(善說)의 법처(法處)에서 깨끗한 믿음[淨信]을 수습하고 오랜 세월 동안 상속(相續)하였기 때문에 이 인연에 의해서 금생(今生)에 오직 성처(聖處)에만 신해(信解)를 일으키고 청정(淸淨)하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생(生)의 원만(圓滿) 가운데에 외(外)에 의지한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대사(大師)의 원만(圓滿)이란 말하자면 곧 그 보특가라(補特伽羅)는 내(內)의 다섯 가지 생(生)의 원만(圓滿)을 갖추고 나서 다시 대사(大師)의 출세(出世)를 만나게 되는 것[直遇]과 같다. 즉 일체의 경계에서 무장애(無障礙)를 얻은 여래(如來) 응공[應] 정등각(正等覺) 일체지자(一切智者) 일체견자(一切見者)를 만나는 것이다.
세속(世俗)의 정법시설(正法施設)의 원만(圓滿)이란 곧 그 보특가라(補特伽羅)가 부처님의 출세(出世)를 만나고, 또한 선(善) 불선법(不善法)과 유죄(有罪) 무죄(無罪) …… 여러 연생법(緣生法) 및 광분별(廣分別)에 이르기까지, 즉 계경(契經) 응송(應頌) 기별(記別) 풍송(諷誦) 자설(自說) 연기(緣起) 비유(譬喩) 본사(本事) 본생(本生) 방광(方廣) 희법(希法) 그리고 논의(論議)를 개시(開示)하는 것을 만나는 것이다.
승의(勝義)의 정법수전(正法隨轉)의 원만(圓滿)이란 말하자면 즉 대사(大師)께서 세속의 정법(正法)을 잘 개시(開示)하고 나자, 여러 제자(弟子)들은 이 정법(正法)에 의지하고 다시 다른 사람들이 얻도록 하기 위해서 교계(敎誡) 교수(敎授)를 수순(隨順)하여 설하고, 37보리분법(菩提分法)을 닦아서 사문과(沙門果)를 얻으며, 사문과(沙門果)를 증득한 것을 원만히 할뿐만 아니라 점차[展轉] 보다 뛰어나게[勝上] 증장(增長)하고 광대(廣大)해지면서 모든 공덕(功德)을 증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정행불멸(正行不滅)의 원만(圓滿)이란 불(佛) 세존(世尊)께서는 반열반(般涅槃)하더라도 세속의 정법(正法)은 오히려 머물러 여전히 사라지지 아니하여 승의(勝義)의 정법(正法)은 숨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는 것을 말한다.
수순자연(隨順資緣)의 원만(圓滿)이란 말하자면 네 가지로서 정법(正法)을 수용(受用)하는 인연이 현전(現前)하여 정법(正法)을 수용(受用)할 때, 모든 바른 믿음[正信]을 지닌 장자(長者) 거사(居士) 바라문(婆羅門)들은 그가 정법(正法)을 수용하여 굴린다고는 알지만 자연(資緣)이 모자라서 이와 같이 받은 정법(正法)을 잃을까봐 이 때문에 은근(慇懃)하게 갖가지 의복 음식 여러 앉고 눕는 기구[諸坐臥具] 병(病)에 대한 의약(醫藥) 등 몸의 집물(什物)14)을 받들어 공급하는 것[施]이다.
이와 같은 열 가지를 내(內) 외(外)에 의지한 생(生)의 원만(圓滿)이라고 하며, 곧 이 열 가지의 생(生)의 원만(圓滿)을 유가(瑜伽)를 닦는 처소(處所)라고 한다.
이 의지할 바[所依]와 건립할 바[所建立]의 처소[處]를 의지(依止)로 삼기 때문에 여래(如來)와 그 제자(弟子)들의 모든 성법(聖法)을 증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법(聖法)에는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유학법(有學法)이며 둘째는 무학법(無學法)이다.
지금 여기에서의 의미는 무학(無學)의 모든 성법(聖法), 즉 무학(無學)의 정견(正見) …… 무학(無學)의 정지(正智)에 이르기까지를 말한다.
왜냐 하면 유학(有學)들은 성법(聖法)이 있다고 하더라도 상속(相續)하는 가운데 성법이 아닌[非聖] 번뇌(煩惱)가 뒤따르게 되어 실재로[現]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첫 번째[初支]의 생(生)의 원만(圓滿)은 자세한 성교(聖敎)의 이치[義]로써 이러한 열 가지가 있으니,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그 밖의 지나치거나 증가하는 생(生)의 원만(圓滿)은 없다.
무엇을15) 정법(正法)을 듣는 데의 원만(圓滿)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바르게 법을 설하거나 또는 바르게 법을 듣거나 간에 두 가지를
14) 집(什)은 잡(雜) 취(聚)의 뜻으로 가재도구 가구 도구를 총칭한다.
15) 이하는 7지(支)의 상(相)을 해석하는 가운데 두 번째로 정법(正法)을 듣는 데의 원만(圓滿)을 해석한다.
모두 정법(正法)을 듣는 데의 원만(圓滿)이라고 한다. 또한 바르게 법을 설하는 데에는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수순(隨順)과 무염오(無染汚)이다. 자세히 설하면 스무 가지 종류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하며, 보살지(菩薩地)에서 설명될 것과 같다. 또한 바르게 법을 듣는 데에도 간략하게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거만[憍傲]을 멀리 여의는 것이며, 둘째는 경멸(輕蔑)을 멀리 여의는 것이며, 셋째는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는 것이며, 넷째는 산란(散亂)을 멀리 여의는 것이다. 위와 같은 네 가지 과실(過失)을 멀리 여의고 법을 듣는 것을 바르게 법을 듣는 것이라고 한다. 자세히 설하면 열 여섯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하며, 역시 보살지(菩薩地) 중에 설명될 것과 같다.
무엇을16) 열반(涅槃)을 상수(上首)로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여래(如來)의 제자(弟子)가 생(生)의 원만(圓滿)에 의지하여 움직일 때, 먼저 설해진 상(相)과 같이 하여 정법(正法)을 청문(聽聞)하고, 오직 열반(涅槃)을 상수(上首)로 삼는 것이다. 오직 열반(涅槃)만을 구하고, 오직 열반(涅槃)만을 연(緣)하여 법을 청문(聽聞)하고, 다른 것을 끌어들여 자기를 믿게끔 하지 않으며, 이득[利養]과 공경(恭敬)과 칭찬[稱譽]을 위해서 하지 않는다.
또한 열반(涅槃)을 연(緣)하여 법(法)을 청문(聽聞)하는 자에게는 열반(涅槃)을 상수[首]로 하는 10법전(法轉)이 있다. 말하자면 유여의열반계(有餘依涅盤界)와 무여의열반계(無餘依涅槃界)를 의지하는 것이다. 유여의열반계(有餘依涅盤界)를 의지하여 열반을 상수로 하는 9법전(法轉)이 있고 무여의열반계(無餘依涅槃界)를 의지하여 열반을 상수로 하는 1법전(法轉)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즉 문소성(聞所成)의 혜(慧)를 인(因)으로 삼는 것이다.
도(道)와 도과(道果)인 열반(涅槃)에 대하여 세 가지 신해(信解)를 일으키는 것이니, 첫째는 실유성(實有性)을 믿는 것이고, 둘째는 공덕이 있음[有功德]을 믿는 것이며, 셋째는 자기에게 능히 즐거움을 얻는 방편(方便)이 있
16) 이하는 7지(支)의 상(相)을 해석하는 가운데 세 번째로 열반(涅槃)을 상수(上首)로 하는 것을 해석한다.
또한 설법사(說法師)는 이러한 이치[義]를 위해서 정법(正法)을 선설(宣說)하고, 그 청법자(請法者)는 이러한 뜻[意]으로 정법(正法)을 듣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때를 다른 이를 요익(饒益)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선심(善心)으로써 정법(正法)을 청문(聽聞)하고 곧바로 설한 법의(法義)의 깊고 깊은[甚深] 으뜸가는 맛[上味]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광대한 환희(歡喜)를 증득하고 또한 능히 출리(出離)의 선근(善根)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때를 능히 스스로를 요익(饒益)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바르게 법(法) 수법행(隨法行)을 닦는 대사(大師)가 있으면 정법(正法)을 건립(建立)하고자 하기 위해서 방편을 시현(示現)하고 정등각(正等覺)을 이루는데 어떻게 그로 하여금 바른 수행(修行)을 굴리도록 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그가 정법(正法)의 행(行)을 수습할 때 곧 이 법이(法爾)로써 대사(大師)를 공양(供養)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것을 설하여 다른 사람을 요익(饒益)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행(正行)으로 인하여 능히 적정(寂靜)의 청량(淸凉)을 증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유여의열반계(有餘依涅盤界)이니, 이 때문에 이것을 능히 스스로를 요익(饒益)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만약 무여의열반계(無餘依涅槃界)에서 반열반(般涅槃)할 때에는 뭇 괴로움[苦]의 변제(邊際)를 증득하였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을 열반(涅槃)을 상수(上首)로 하여 정법(正法)을 청문(聽聞)한 데서 얻는 뛰어난 이익[勝利]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열반(涅槃)을 상수(上首)로 하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이것을 제외하고 모든 자세한 이치[廣義]는 다시 지나치거나 증가하는 것이 없다.
무엇을18) 능히 해탈을 성숙하는 혜(慧)의 성숙(成熟)이라고 하는 것인가?
비발사나지(毘鉢舍那支)를 성숙(成熟)하기 때문에 또한 혜(慧)의 성숙(成熟)이라고 하며, 사마타지(奢摩他支)를 성숙(成熟)하기 때문에 또한 혜(慧)의 성숙(成熟)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정심(定心) 가운데의 혜(慧)는
18) 이하는 7지(支)의 상(相)을 해석하는 가운데 네번째로 능히 해탈을 성숙하는 혜(慧)의 성숙(成熟)을 해석한다.
소지경(所知境)에 대하여 청정(淸淨)하게 구르기 때문이다. 또한 비발사나지(毘鉢舍那支)는 맨 처음에 반드시 선우(善友)로써 의지[依]로 삼고 사마타지(奢摩他支)는 시라(尸羅)의 원만(圓滿)에 섭수(攝受)된다. 또한 선우(善友)에 섭수(攝受)되는 것에 의하여 소지경(所知境)인 진실성(眞實性)에 대하여 각료욕(覺了欲)19)이 있는 것이다. 시라(尸羅)의 원만(圓滿)에 섭수(攝受)되는 것에 의하여 증상시라(增上尸羅)에 대하여 정계(淨戒)를 훼범(毁犯)하고 비법(非法)을 현행(現行)하고 궤범(軌範)을 무너뜨리는 것에 대하여, 만약 지혜있는 자와 범행(梵行)을 같이하는 자가 보고 듣고 의심하였기 때문에, 혹은 그 죄를 들추거나 혹은 기억하도록 하거나 혹은 수학(隨學)하게끔 한다면 이소(爾所)의 때에 기론(譏論)을 감인(堪忍)20)하는 것이다.
또한 소지(所知)인 진실경[眞實;眞實境]21)을 각료(覺了)하려는 욕구[欲]에 의하기 때문에22) 청문(聽聞)을 애락(愛樂)하는 것23)이다.
청문을 애락하는 것[樂聞]에 의하기 때문에 곧바로 청문(請問)을 일으키는 것24)이다.
청문(請問)에 의하기 때문에 옛날에 듣지 못했던 깊고 깊은[甚深] 법의(法義)를 듣는 것25)이다.
자주 자주 청문(聽聞)하길 끊임없이 하기 때문에 그 법의(法義)에 대해서 굴러서 명정(明淨)을 얻으며 또한 능히 앞서 생긴 의심[疑]을 제거[除遣]하는 것26)이다.
이와 같이 각혜(覺慧)가 굴러서 명정(明淨)하기 때문에 여러 세간의 모든 성사(盛事)에 대하여 능히 과환(過患)을 보고 깊게 마음으로 염리(厭離)하는 것27)이다.
이와 같이 염심(厭心)이 잘 작의(作意)하기 때문에 그 일체의 세간의 성사(盛事)에 대해서 원락(願樂)을 일으키지 않는 것28)이다.
그는 이와 같이 여러 세간의 증상(增上)의 생도(生道)에 대해서 원심(願心)이 없기 때문에 여러 악취법(惡趣法)을 끊어 없애기 위해서 마음으로 바른 원[正願]을 내는 것29)이다.
또한 능히 그것을 대치(對治)하는 모든 선법(善法)을 수습하기 때문에 일체의 번뇌(煩惱)를 대치하는 모든 선법(善法)을 수습하는 것30)이다.
그 대치의 과(果)를 증득하고자 하기 때문에 또한 스스로의 마음[自心]에 청정(淸淨)을 얻고자 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바른 원[正願]을 내는 것31)이다.
위와 같은 열 가지는 능히 해탈(解脫)을 성숙(成熟)하는 혜(慧)를 성숙(成熟)하는 법(法)이며,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점차로 능히 해탈(解脫)을 원만(圓滿)하게끔 하는 것이다.
또한 순서대로 이미 3지(支), 즉 정법(正法)을 듣는 데의 원만(圓滿)과 열반(涅槃)을 상수(上首)로 하는 것과 능히 해탈을 성숙하는 혜(慧)의 성숙(成熟)을 설하였다. 이와 같은 3지(支)는 자세한 성교(聖敎)의 이치이니, 열 가지를 말한다.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지나치거나 증가하는 것이 없다.
또한 이 3지(支)는 유가(瑜伽)를 닦는 인연(因緣)인 줄 알아야만 한다. 왜냐 하면 이것의 차제(次第), 이것의 인(因), 이것의 연(緣)에 의해서 유가(瑜伽)를 수습해서 비로소 원만을 이루게[成滿]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법(正法)을 듣는 데의 원만(圓滿)과 열반(涅槃)을 상수(上首)로 하는 것과 능히 해탈을 성숙하는 혜(慧)의 성숙하는 것[成熟]에 의하기 때문이다.
무엇을32) 대치(對治)를 수습(修習)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인가?
간략히 설하면 3위(位) 중에 열 가지 유가(瑜伽)를 수습하는 대치해야 할
28) 해탈을 성숙하는 혜(慧)를 성숙하는 10가지 법(法) 가운데 일곱 번째이다.
29) 해탈을 성숙하는 혜(慧)를 성숙하는 10가지 법(法) 가운데 여덟 번째이다.
30) 해탈을 성숙하는 혜(慧)를 성숙하는 10가지 법(法) 가운데 아홉 번째이다.
31) 해탈을 성숙하는 혜(慧)를 성숙하는 10가지 법(法) 가운데 열 번째이다.
32) 이하는 7지(支)의 상(相)을 해석하는 가운데 다섯 번째로 대치(對治)를 수습(修習)하는 것을 해석한다.
재가위(在家位)에서는 여러 처실(妻室)34)에 대하여 음욕( 欲)과 상응하는 탐욕[貪]이 있고, 그 밖의 친족[親屬]과 여러 재보(財寶)에 대하여 수용(受用)과 상응하는 탐애[愛]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재가(在家)가 속한 위(位)의 소대치법(所對治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러한 장애로 인하여 모든 종류[一切種]에서 출리(出離)할 수가 없으며, 설사 출가(出家)하게 되더라도 이것의 심사(尋思)로 요동(擾動)치는 것으로 인하여 장애를 받기 때문에 희락(喜樂)을 내지 못한다.
위와 같은 두 가지 소대치법(所對治法)을 그 차례대로 부정상(不淨想)35)을 닦고 무상상(無常想)36)을 닦는다. 이것이 그것의 대치를 수습하는 것인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출가자(出家者)는 출가위(出家位)에 있어서 때에 맞춰[時時] 간략하게 네 가지 소작(所作)이 있다.
첫째는 항상 방편으로 선법(善法)을 닦는 소작(所作)이니, '나는 제 법(法)에 대해서 항상 방편으로 닦는 것을 의지로 삼기 때문에 애미(愛味)의 즐거움에 따르는 일체의 심식(心識)을 능히 제복(制伏)하리라'고 하고, 또한 '능히 여실(如實)히 고성(苦性)을 각료(覺了)하리라'고 하는 것이다.
둘째는 희론이 없는[無恚論] 열반(涅槃)에 대해서 신해(信解)하고 애락
33) 소대치(所對治)란 범어 Vipak a의 의역(意譯)으로서 수행에 의하여 다스려져야 할 법을 의미한다.
34) 좁게는 아내를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성적인 대상을 모두 의미하는 것이다.
35) 처실(妻室)에 대한 음욕과 상응하는 탐욕이 일어날 때에는 부정상(不淨想)을 닦는 것이다.
36) 친족과 여러 재보에 대하여 수용과 상응하는 탐애가 일어날 때에는 무상상(無常想)을 닦는 것이다.
(愛樂)하는 소작(所作)이니, '나는 희론이 없는[無恚論] 열반涅槃)에서 마음이 물러나지 않도록 우려(憂慮)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하며, '우리들은 지금 어떤 곳에 있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셋째는 때에 맞춰[時時] 취락(聚落)에 유행(遊行)하고 걸식(乞食)하는 소작(所作)이니, '나는 음식을 구걸하여 수용(受用)하는 것이 인(因)이 되어 오래 머무를[久住] 수 있는 몸을 얻으며 적당한[調適] 힘이 있으니, 항상 방편으로 여러 선법(善法)을 닦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넷째는 원리처(遠離處)에 안주(安住)하는 소작(所作)이니, '여러 재가(在家)들과 출가(出家)의 대중[衆]이 섞여 함께 머무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의 경우는 바로 갖가지 세간과 상응하는 견문(見聞)이 있고 수용(受用)하는 데에 여러 가지 산란(散亂)한 일이 있는데, 나는 그들에 대해서 곧바로 자세히 관찰하지나 않을까? 심일경(心一境)의 위(位)에 마땅히 장애가 될 것이다'고 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소작사(所作事) 가운데에 네 가지 대치해야 할 법[所對治法]이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처음 소작(所作)에 난타(嬾墮)37) 해태(懈怠)가 있으며, 두 번째의 소작(所作)에 살가야견(薩迦耶見)이 있으며, 세 번째의 소작(所作)에 애미(愛味)의 탐애[貪]가 있으며, 네 번째 소작(所作)에 세간에 갖가지 락욕(樂欲)의 탐애(貪愛)가 있다.
위와 같은 네 가지 소대치법(所對治法)은 그 차례대로 또한 네 가지 수습의 대치가 있다.
첫째는 무상(無常)에 대하여 고상(苦想)을 수습하는 것이고, 둘째는 뭇 고(苦)에 대하여 무아상(無我想)을 수습하는 것이며, 셋째는 음식에 대하여 염역상(厭逆想)을 수습하는 것이며, 넷째는 일체 세간에 대하여 불가락상(不可樂想)을 수습하는 것이다.
또한 멀리 떨어져 한가로운 곳[閑居]에서 방편(方便)으로 작의(作意)하는 위(位)에서는 간략하게 네 가지의 소치(所治)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사마타(奢摩他) 비발사나품(毘鉢舍那品)에 암매(闇昧)의 마음이 있는 것이며, 둘째는 여러 정(定)에 애미(愛味)를 따르는 마음이 있는 것이며, 셋째는 생(生)에 움직이는 상의 마음[動相]을 따르는 마음이 있는 것이며, 넷째는 뒷날을 미루어서 남은 시간을 고대(顧待)하여 불사(不死)의 심사[尋 : 尋思]를 따르는 마음이 있어서 불같이[熾然] 부지런하게 방편을 닦을 수가 없는 것이다.
위와 같은 네 가지 대치해야 할 법[所對治法]에 또한 네 가지 수습의 대치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첫 번째 것에서는 광명상(光明想)을 닦으며, 두 번째 것에서는 이욕상(離欲想)을 닦으며, 세 번째 것에서는 멸상(滅想)을 닦으며, 네 번째 것에서는 사상(死想)을 닦는 것이다. 또한 부정상(不淨想)에는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사택력(思擇力)에 포함되는 것이며, 둘째는 수습력(修習力)에 포함되는 것이다. 사택력(思擇力)에 포함되는 부정상(不淨想)에서 5법(法)을 소대치(所對治)라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 등을 5라고 하는가?
첫째는 모읍(母邑)을 가까이 하는 것[親近]이며,38) 둘째는 드러난 곳[顯處]39)에 있으며 실념(失念)하는 것이며, 셋째는 비밀한 곳[隱]에 머물며 방일(放逸)하는 것이며, 넷째는 관습력(串習力)40) 때문에 비밀한 곳[隱]과 드러난 곳[顯處]에 모두 있는 것이며, 다섯째는 비록 부지런한 방편[勤方便]으로 부정(不淨)41)을 수습할지라도 작의(作意)가 착란(錯亂)한 것이니, 부정(不淨)을 관(觀)하지 않고 정상(淨相)을 쫓아서 구르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것을 작의(作意)의 착란(錯亂)이라고 이름한다.
수습력(修習力)에 포함되는 부정상(不淨想)에서 7법(法)을 소대치(所對治)라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 등을 7이라고 하는가?
38) 자주 여인을 가까이 하는 것을 말한다.
39) 드러난 곳[顯處]이란 남들이 다 볼 수 있는 곳을 의미한다. 뒤의 비밀한 곳[隱處]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본소작사(本所作事)42)로 마음이 산란(散亂)해지는 성품[性]과 본소작사(本所作事)로 작용(作用)하려는 성품과 방편작의불선교(方便作意不善巧)43)의 성품[性]을 말하니, 공경(恭敬)하여 부지런히 청문(請問)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근문(根門)을 능히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조용한 곳[空閑]에 있더라도 오히려 갖가지 염오(染汚)의 심사(尋思)가 있어서 그 마음을 요란(擾亂)하며, 또한 음식에 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몸이 적절하지[調適] 못하며, 또한 심사(尋思)로 인하여 요란(擾亂)해지기 때문에 원리(遠離)하여 내심적정(內心寂靜)한 사마타정(奢摩他定)을 즐기지 못하며, 또한 그 몸이 적절하지[調適] 못하기 때문에 비발사나(毘鉢舍那)를 잘 닦을 수가 없어서 여실(如實)하게 제 법(法)을 관찰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모든 소대치법(所對治法)은 종합하여 설하면 1문(門)에 12가, 1문(門)에 14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곧 이와 같은 소대치법(所對治法)을 능히 대치하는 백법(白法)에 도로 그와 같은 것이 있다.
두 가지의 부정상(不淨想)을 수습하는 데에 많은 소작(所作)이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무상소(無常所)에서 고상(苦想)을 닦는 데에 간략하게 여섯 가지 소대치법(所對治法)이 있다.
무엇 등을 여섯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未生] 선법(善法)에서 맨 처음 응당 생겨날 때에는 난타(嬾墮)가 있는 것이다. 둘째는 이미 생겨난[已生] 선법(善法)에서 응당 머물러 잊지 않도록 수습하고 원만(圓滿)하여 배로 증광(增廣)하는 데에는 해태(懈怠)가 있게 되는 것이다. 셋째는 사장(師長)을 공경하고 가서 청문(請問)하는 데에는 항상 상속(相續)하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다. 넷째는 항상 선법(善法)을 닦고 항상 스승을 쫓아서 움직이는 데에는 깨끗한 믿음[淨信]을 멀리 하는 것[遠離]이 있는 것이다. 다섯째는 깨끗한 믿음[淨信]을 멀리 하기[遠離] 때문에 항상 닦을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여섯째는 안에서 방일(放逸)하고 방일 때문에 항상 여러 선법(善法)을 수습하는 데에는 항상 따라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여섯 가지의 소대치법(所對治法)에는 되돌려 6법(法)이 있어서 능히 대치한다[能對治]고 하며 많은 소작(所作)이 있다. 이것44)과 상위(相違)하여 그 상(相)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광명상(光明想)은 많은 광명(光明)을 연(緣)하는 것을 경계로 삼으니, 삼마희다지(三摩 多地)45)에서 이미 설한 것과 같다.
지금 여기에서의 의미는 법(法)의 광명(光明)을 연(緣)하는 것을 경계로 삼아서 광명상(光明想)을 닦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들은 바대로 하여 이미 구경(究竟)을 얻은 불망념법(不忘念法)을 법(法)의 광명(光明)이라고 하며, 그것과 함께 작용하는[俱行] 그 상응상(相應想)을 광명상(光明想)이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왜냐 하면 진실(眞實)에 능히 마음을 어둡게[闇昧] 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방편으로 지관품(止觀品)을 닦을 때에 제 법(法)에 대해서 망실(忘失)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과 상위(相違)한 것이 곧 광명(光明)인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제일의(第一義) 사소성(思所成)의 혜(慧)와 그리고 수소성(修所成)의 혜(慧)와 함께하는 광명상(光明想)에는 소대치(所對治)라고 하는 열 한 가지 법이 있다.
무엇을 열 한 가지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사소성(思所成)의 혜(慧)와 함께하는 광명상(光明想)에 4법(法)이 있고 수소성(修所成)의 혜(慧)와 함께하는 광명상(光明想)에 7법(法)이 있어서, 이와 같이 소치법[所治 : 所治法]에 도합 열 한 가지가 있다.
사소성(思所成)의 혜(慧)와 함께하는 광명상(光明想)에 4법(法)이 있다고 하는 것은 첫째 잘 관찰하지 않기 때문에, 잘 결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유하는 대상[所思惟]에 의심[疑]이 뒤따르는 것이며, 둘째는 밤[夜分]에 머물러 난타(嬾墮) 해태(懈怠)하기 때문에, 많은 수면(睡眠)을 수습하기 때문에 헛되이 시분(時分)을 헤아리는 것이며, 셋째는 낮[晝分]에 머물러 사악한 음식을 가까이 익혔기[習近] 때문에 몸이 조유(調柔)46)하지 못하여 그에 따라 진리[諦]
로써 제 법(法)을 관(觀)하지 못하는 것이며, 넷째는 재가(在家)와 출가(出家)가 함께 서로 뒤섞여 머물러[雜住] 그에 따라 들어야 하고 마쳐야[究竟] 할 법에 대해서 이치에 맞게[如理]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의심[疑]이 뒤따르기 때문에 능히 의심을 제거하는 것[遣]을 장애(障礙)하는 인연 때문에 이 네 가지 법은 사소성(思所成)의 혜(慧)와 함께하는 광명상(光明想)의 대치해야 할 것[所對治]이며, 지(智)이건 견(見)이건 간에 사소성(思所成)으로 하여금 청정(淸淨)을 얻지 못하도록 한다.
무엇 등을 수소성(修所成)의 혜(慧)와 함께하는 광명상(光明想)의 소치(所治)의 7법(法)이라고 하는 것인가?
첫째는 거상(擧相)에 의하여 수습하는 매우 용맹한 정진(精進)은 소대치법(所對治法)이다. 둘째는 지상(止相)에 의하여 수습하는 매우 열악한 정진(精進)은 소대치법(所對治法)이다. 셋째는 사상(捨相)에 의하여 수습하는 데에 선정의 맛[定味]에 탐착(耽著)하여 애착[愛]과 함께 작용하는 모든 희열(喜悅)은 (소대치법[所對治法])이다. 넷째는 반열반(般涅槃)에 대하여 마음으로 공포를 품는 것과 진에(瞋恚)와 함께하여 그 마음이 겁약(怯弱)하게 되는 것은 두 가지 소치법(所治法)이다. 다섯째는 즉 이와 같은 방편작의(方便作意)에 의해서 법(法)에 대해서 정근(精勤)하고 논의(論義) 결택(決擇)하여 입론[立]을 논파[破]하는 문(門)에 대해서 많은 언론(言論)을 일으키고 상속하여 버리지 않는 것은 (소대치법[所對治法])이니, 이것은 적정(寂靜)한 정사유(正思惟) 시(時)에 능히 장애가 된다. 여섯째는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에 대해서 정리(正理)와 맞지 않게 상호(相好)를 집취(執取)하여 바르게 심사(尋思)하지 않는 것은 (소대치법[所對治法])이니, 마음을 산란(散亂)하게끔 하는 것이다. 일곱째는 상응하지 않아야 할 사처[不應思處]에 대하여 억지로 그 마음을 섭수하여 제 법(法)을 사택(思擇)하는 것은 (소대치법[所對治法])이다.
위와 같은 일곱 가지가 이 수소성(修所成)의 혜(慧)와 함께하는 광명상(光明想)의 소대치법(所對治法)이다. 수소성(修所成)의 혜(慧)와 함께하는 광명상(光明想)을 극히 장애(障礙)할 수 있으며, 지(智)이건 견(見)이건 간에 수소성(修所成)을 청정하게 구르지 못하게끔 한다.
이 소치법(所治法)을 돌리면 열 한 가지가 있으며 이것과 상위(相違)한 능대치법(能對治法)은 능히 그것47)을 끊을 수 있다. 이것 역시 지(智)건 견(見)이건 간에 사(思) 수소성(修所成)을 청정하게 구르게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바른 방편[正方便]으로 제 상(想)을 닦는 사람에게는 능히 소치법(所治法)을 단멸(斷滅)하려는 욕구[欲]가 있으며, 또한 소치(所治)의 현행법(現行法)에 대하여 마음으로 염착(染著)하지 않고 속히 단멸(斷滅)하려고 하며, 또한 능히 능대치법(能對治法)에 자주 머물러서 모든 소대치법(所對治法)을 단멸(斷滅)한다.
위와 같은 3법(法)은 일체(一切)의 대치수(對治修)48)를 따라다니기 때문에 소작(所作)이 많다고 하며, 이와 같은 것을 대치를 수습하는 것[修習對治]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치(對治)를 수습하는 것이 곧 유가(瑜伽)를 수습(修習)하는 것인 줄 알아야만 한다.
이 제 5지[第五支]의 대치를 수습하는 것[修習對治]에 대한 자세한 성교(聖敎)의 이치[義]는 오직 위와 같은 10상(相)만이 있으며,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지나치거나 증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49) 세간(世間)의 모든 종류[一切種]의 청정(淸淨)이라고 하는가?
간략하게 세 가지가 있다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삼마지(三摩地)를 얻는 것50)이며, 둘째는 삼마지(三摩地)가 원만(圓滿)한 것51)이며, 셋째는 삼마지(三摩地)가 자재(自在)한 것52)이다.
이 가운데에 맨 처음의 삼마지(三摩地)를 얻는 데에 20가지의 소대치법(所對治法)이 있어서 능히 뛰어난 삼마지[勝三摩地]를 얻지 못하도록 한다.
47) 열 한 가지의 소치법(所治法)을 말한다.
48) 4수(修) 가운데의 하나로서 자세한 설명은 『구사론(俱舍論)』 제 26권을 참조하라.
49) 이하는 7지(支)의 상(相)을 해석하는 가운데 여섯 번째로 세간(世間)의 모든 종류[一切種]의 청정(淸淨)을 해석한다.
50) 비로소 초정려(初靜慮)의 미지정(未至定)을 얻는 것을 말한다.
51) 근본지(根本地)를 얻는 것을 말한다.
52) 모든 장애의 염오(染汚)를 여의고 특별한 통혜(通慧)를 얻고 청정(淸淨) 선백(鮮白)한 것을 말한다.
첫째는 끊음[斷]을 즐기지 않는 범행을 같이하는 자[同梵行者]를 도반[伴]으로 삼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둘째는 도반[伴]에게는 비록 덕(德)이 있지만 정을 닦는 방편[修定方便]을 선설(宣說)하는 스승[師]에게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니, 정을 닦는 방편을 전도(顚倒)하여 설하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스승[師]에게 덕(德)이 있을지라도 설해진 정을 닦는 방편[修定方便]에 대하여 그 듣는 자[能聽者]의 욕락(欲樂)이 리열[羸劣]하고 마음이 산란(散亂)하기 때문에 능히 받아들이지[領受] 못하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넷째는 그 듣는 자에게 비록 락욕(樂欲)이 있어서 귀를 모아서 들을지라도 암둔(闇鈍)하기 때문에, 각혜(覺慧)가 리열[羸劣 : 劣]하기 때문에 능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다섯째는 지(智)와 덕(德)이 있을지라도 애행(愛行)이 있어서 많은 이득[利養]과 공경(恭敬)을 구하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여섯째는 많은 걱정과 근심[憂愁]으로 기르기 어렵고 원만하기 어려워서 희족(喜足)을 알지 못하는 과실이 있는 것이다. 일곱째는 즉 이와 같은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여러 사무(事務)가 많은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여덟째는 비록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해태(懈怠) 난타(嬾墮)가 있기 때문에 가행(加行)을 버리는[棄捨] 과실이 있는 것이다. 아홉째는 비록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다른 것으로 인하여 갖가지 장애(障礙)를 일으키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열째는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춥고 더운 등의 괴로움[苦]에 대하여 능히 참아내지[堪忍] 못하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열 한째는 비록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만(慢) 에(恚)의 과실이 있기 때문에, 교회(敎誨)53)를 능히 받아들일 수 없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열 둘째는 비록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가르침[敎]에 대하여 전도(顚倒)하여 사유(思惟)하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열 셋째는 비록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받아들인 가르침[敎]에 대하여 망념(妄念)하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열 넷째는 비록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재가(在家)와 출가(出家)가 섞여서 머무르는[雜住]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열 다섯째는 비
록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5실(失)과 상응(相應)하는 와구(臥具)를 수용(受用)하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5실(失)과 상응하는 와구(臥具)란 성문지(聲聞地)에서 설하게 될 것과 같은 줄 알아야만 한다. 열 여섯째는 비록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멀리 떨어진 곳[遠離處]에서 제 근(根)을 수호(守護)하지 않기 때문에, 바르지 않은 심사[不正尋思]의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열 일곱째는 비록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식사[食]가 평등(平等)하지 않기 때문에 몸이 무겁게 가라앉아서[沈重] 감능(堪能)할 수 없게 되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열 여덟째는 비록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수면(睡眠)을 많이 하는 성품[性] 때문에 자주 수면(睡眠)의 수번뇌(隨煩惱)가 현행(現行)하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열 아홉째는 비록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앞서 사마타품(奢摩他品)을 수행(修行)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심(內心)의 적지(寂止) 원리(遠離)에 대하여 흔락(欣樂)하지 않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스무째는 비록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앞서 비발사나품(毘鉢舍那品)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증상혜법(增上慧法)의 비발사나(毘鉢舍那) 여실관(如實觀)에 대하여 흔락(欣樂)하지 않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20가지의 법은 사마타(奢摩他) 비발사나품(毘鉢舍那品)에서 심일경성(心一境性)을 증득하는 데에 소대치(所對治)이다.
또한 이러한 20가지의 소대치법(所對治法)은 간략하게 4상(相) 때문에 생기(生起)하게 되는 것으로서 삼마지(三摩地)에 능히 장애가 될 수 있다.
무엇 등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삼마지(三摩地)의 방편(方便)에 대하여 선교(善巧)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모든 정을 닦는 방편[修定方便]에 대하여 전혀 가행(加行)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전도(顚倒)된 가행(加行) 때문이다. 넷째는 가행(加行)이 느슨하기[縵緩] 때문이다.
이 삼마지(三摩地)의 소대치법(所對治法)에 22가지의 백법(白法)의 대치(對治)가 있어서 이것과 상위(相違)하여 그 상(相)을 알아야만 한다. 이러한 소대치(所對治)를 능히 끊는 법(法)에 소작(所作)이 많기 때문에, 빨리 빨리 능히 그 마음을 바르게 머물게 하여 삼마지(三摩地)를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삼마지(三摩地)를 얻는 것은 곧 초정려(初靜慮)의 근분정(近分定)을 얻는 미지(未至)의 위(位)에 포함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삼마지(三摩地)를 얻는 데에 상위한 법(法)과 삼마지(三摩地)를 얻는 데에 수순(隨順)하는 법(法)의 자세한 성교(聖敎)의 이치[義]는 오직 이러한 20가지만이 있다.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지나치거나 증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러한 인연(因緣) 때문에 처음 세간(世間)의 모든 종류[一切種]의 청정(淸淨)에 의지하여 이 정법(正法)에 대하여 보특가라(補特伽羅)는 삼마지(三摩地)를 얻는다는 것을 이미 잘 선설(宣說)하였고 이미 잘 개시(開示)하였다.
다음에 이와 같이 이미 삼마지(三摩地)를 얻은 자는 이러한 소소(少小)한 수승(殊勝)한 정(定)에 대하여 희족(喜足)을 내지 않고, 수승한 삼마지(三摩地)의 원만(圓滿)에 대하여 다시 구원(求願)을 일으킨다.
또한 곧 그곳54)에 대해서 수승한 공덕(功德)을 본다.
또한 구원(求願)에 의하여 수승한 공덕(功德)을 보고서 그것을 구하려 하기 때문에 용맹정진(勇猛精進)하고 책려(策勵)하며 머무른다.
또한 그는 색(色)과 상응(相應)하는 애미(愛味)와 함께 작용하는[俱行] 번뇌(煩惱)의 일체(一切) 모두를 능히 영원히 끊지 않았기 때문에, '수승을 얻은 것이 아닌 것[非得勝]'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여러 선법(善法)에 대하여 모두를 부지런히 닦지는 않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수승해지는 것[他所勝]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광대(廣大)한 정천(淨天)의 생처(生處)에 침몰(沈沒)하는 일이 없다.
또한 그는 하열(下劣)한 신해(信解)의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자기[己]를 능히 능멸(陵蔑)55)하는 일이 없다.
또한 그는 이와 같은 마음이 침몰(沈沒)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또한 정
54) 수승한 삼마지(三摩地)의 원만(圓滿)을 가리킨다.
55)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에는 능멸(陵篾)로 되어 있으나, 의미상 능멸(陵蔑)의 오자(誤字)인 듯하여 수정하여 해석한다.
(定)의 소연(所緣)의 경계(境界)의 법(法)에 대하여 즉 먼저 얻은 지(止) 거(擧) 사상(捨相)을 끊임없이[無間] 은중(殷重)하게 방편(方便)을 닦기 때문에 수순(隨順)하며 구른다.
또한 그는 이와 같은 법상(法相)에 따라서 구르며 수입(數入) 수출(數出)하며, 빠르게 통혜(通慧)를 증득하고자 하기 때문에 정(定)의 원만(圓滿)에 의지하며, 정법(正法)을 듣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때때로 은근(慇懃)하게 청문(請問)한다.
또한 이와 같은 삼마지(三摩地)의 원만(圓滿)에 의지하기 때문에 정방편(正方便)으로 근본정(根本定)에 포함되는 내심(內心)의 삼마지(三摩地)에 대하여 멀리 떨어지려는[遠離] 애락(愛樂)을 증득(證得)하고 또한 법(法)의 비발사나(毘鉢舍那)를 증득한다.
이와 같이 치성[熾然]한 명정(明淨)의 모든 애락(愛樂)을 관찰하면 여기까지를 능히 근본정려(根本靜慮)를 증득하여 들어갔다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삼마지(三摩地)의 원만(圓滿)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이 삼마지(三摩地)의 원만(圓滿)에 대한 자세한 성교(聖敎)의 이치[義]는 오직 위와 같은 10상(相)만이 있을 뿐이며,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지나치거나 증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다음에 근본(根本)의 삼마지(三摩地)를 이미 증득하였기 때문에 비록 삼마지(三摩地)의 원만(圓滿)이라고 이름할지라도 그 마음은 오히려 삼마지(三摩地)로 인해 애미(愛味)를 내어서 만(慢) 견(見) 의(疑) 무명(無明) 등의 여러 수번뇌(隨煩惱)에 물들게 되기 때문에(日되면??) 아직은 원만(圓滿) 청정(淸淨) 선백(鮮白)이라고 이름하지는 않는다.
위와 같이 여러 수번뇌(隨煩惱)를 현행(現行)하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 마음을 단련하기 위해서, 마음을 조적하게[調] 하기 위해서 그는 '나는 응당 마음의 자재성(自在性)과 정(定)의 자재성(自在性)을 증득해야겠다. 4처소(處所)에서 22가지 상(相)으로써 마땅히 잘 관찰해야겠다'고 이와 같은 생각을 한다.
만약 일체의 고뇌(苦惱)를 끊기 위해서 이 3처(處)를 받는다면 응당 뭇 괴로움[苦]이 뒤따르는지를 바로 살펴야만 한다.
수염과 머리카락을 까까서 없애기 때문에, 세속[俗]의 형호(形好)56)를 버렸기 때문에, 괴색의 옷[壞色衣]57)을 입었기 때문에, 스스로 형색(形色)이 다른 사람인가를 관찰해야만 한다. 이와 같은 것을 하열(下劣)한 형상(形相)을 받겠다고 서원한 것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한다.
행(行) 주(住) 좌(坐) 와(臥) 어(語) 묵(默) 등 가운데에서 욕심을 따라 행하지 않고, 교만(憍慢)을 제압[制伏]하면서 다른 집에 나아가며, 자세하고 바르게 관찰하면서 유행(遊行)하고 걸식(乞食)한다. 이와 같은 것을 하열(下劣)한 위의(威儀)를 받겠다고 서원한 것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바르게 관찰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은 여러 가지 몸을 돕는 도구[供身具]를 저축하는 일이 없다. 이와 같은 것을 하열(下劣)한 뭇 도구(具)를 받겠다고 서원한 것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5상(相)에 의하는 것을 처음 처소[初處]에서의 관찰이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로 출가(出家)한 사람들이 받게 되는 시라(尸羅)는 간략하게 2사(事)를 버리는 데에서 현현(顯現)하게 되는 것이다. 첫째는 부모(父母) 처자(妻子) 노비(奴婢) 노복[僕使] 붕우(朋友) 권속(眷屬) 재물과 곡식[財穀] 값진 보물[珍寶] 등을 버리는 데에서 현현(顯現)하는 것이며, 둘째는 노래 춤 창기(倡伎) 웃으며
56) 세속[俗]의 형호(形好)란 좋다고 여기는 모습을 의미한다.
57) 인도에서는 수행승의 옷을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의 5정색(正色)을 피하고 섞인 색깔, 즉 중간색을 ?기 때문에 괴색(壞色) 또는 부정색(不正色)이라고 한다. 즉 화려한 색깔을 피하고 원색을 파괴한 탁한 색깔의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정근(精勤)하여 선품(善品)을 수습하는 자에게는 간략하게 네 가지 괴로움이 뒤따르게 된다. 말하자면 4사문과(沙門果)에서 뒤따라 증득한 것이 아직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악취고(惡趣苦)가 뒤따르는 것이다. 이 몸은 생(生) 로(老) 병(病) 사(死)의 법이기 때문에 안의 괴고(壞苦)가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랑하는 것은 이별하는 법[離別法] 때문에 애(愛)의 괴고(壞苦)가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업의 소작(所作)이기 때문에 일체의 고인(苦因)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는 위와 같은 네 가지 괴로움이 뒤따르게 되므로, 응당 7상(相)으로써 자세하고 바르게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7상(相)에 의한 것을 제 4처(處)에서의 관찰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는 위와 같은 4처(處)에 대하여 22상(相)으로써 바르게 관찰할 때 곧 다음과 같은 이치에 맞는 작의[如理作意]를 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이와 같은 현상[事]을 구하려 하기 때문에 하열(下劣)한 형상(形相)과 위의(威儀)와 그리고 몸을 돕는 도구[資身具]를 받겠다고 서원하는 것이며, 금계(禁戒)를 받겠다고 서원하는 것이며, 정근(精勤)을 받겠다고 서원하는 것이다. 항상 선법(善法)을 닦아서 '나는 지금 네 가지의 괴로움에서 어떤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또한 내가 이와 같이 스스로 책려(策勵)하여 3처(處)를 받겠다고 서원하였는 데도 여전히 네 가지 괴로움[四苦]이 항상 뒤따르게 되기 때문에 아직 해탈을 얻을 수 없고, 나는 이제 괴로움[苦]이 뒤따라서 아직 뛰어난 정[勝定]에서 자재(自在)를 획득할 수 없을지라도 중도에 그만두거나 혹은 다시 물러나지 않으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근(精勤)하여 이치에 맞게 작의[如理作意]해야 이에 출가(出家)의 상(想)과 사문(沙門)의 상(想)이라고 하는 것은 얻을 수 있다.
그는 원만(圓滿)에 대하여 많은 방편을 닦는 것을 의지(依止)로 삼아서 세간도(世間道)에 의하여 삼마지(三摩地)의 원만(圓滿)을 증득하기 때문에 번뇌의 끊음[煩惱斷]을 여전히 아직 증득하지 못했을지라도 다시 즐겨 끊음
[樂斷]에 의지하여 항상 부지런히 수습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잘 세간도(世間道)를 얻고서 수시로 삼마지(三摩地)의 자재(自在)를 얻기 위해서 즐겨 닦음[樂修]을 의지하여 끊임없이 굴리는 것이다.
또한 바른 믿음[正信]의 장자(長者) 거사(居士) 바라문(婆羅門) 등한테서 갖가지 이득[利養]과 공경(恭敬)을 획득하게 되지만 이 이득과 공경에 의지하여 탐착(耽著)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또한 다른 이득과 공경과 그 밖의 믿지 않는 바라문(婆羅門) 등이 눈앞과 등뒤에서 여러 불가의(不可意)의 신업(身業) 어업(語業)이 현행(現行)하는 일 가운데에서도 마음으로 분에(憤恚)를 일으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에게 손해를 끼치려는 마음도 없는 것이다. 또한 애(愛) 만(慢) 견(見) 무명(無明) 의(疑)의 갖가지 정(定) 가운데의 여러 수번뇌(隨煩惱)는 다시는 현행하지 않으며, 잘 염(念)을 지켜 머무르고, 또한 뛰어난 사마타(奢摩他)를 증득하고서 곧 이와 같은 사마타(奢摩他) 때문에 '자기가 일체의 소작(所作)을 이미 성취[辨]하였다'고 말하지 아니하며,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이 증득한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위와 같이 즐겨 끊고[樂斷] 즐겨 닦기[樂修] 때문에 마음에 탐에(貪恚)가 없고 정념(正念)이 현전(現前)하며, 증상만(增上慢)을 여의기 때문에 모든 의복(衣服)에 있어서 마땅함에 따라 획득하고서 곧바로 희족(喜足)을 내는 것이다. 의복에 있어서와 같이 그 밖의 음식(飮食) 와구(臥具) 등에 대하여 희족(喜足)을 내는 것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바르게 알면서[正了知] 수용(受用)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등의 여러 자생구(資生具)들은 단지 무너지지 않도록 몸을 다스리게끔 만 하고 잠깐동안 굶주림을 그치게 하면서 범행(梵行)을 섭수(攝受)하는 것이라고 하고, 자세히 설하면 음식에 대해서 그 양을 아는 것까지에 이른다.
그는 이와 같이 바르게 수행하기 때문에 삼마지(三摩地)에서 자재(自在)를 획득하고, 그것을 의지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맑고 희어서[淸白] 흠과 더러움이 없어서 수번뇌(隨煩惱)를 여의고, …… 부동(不動)을 획득하여 능히 모든 뛰어난 신통(神通)의 혜(慧)를 이끄는 데까지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삼마지(三摩地)의 자재(自在)라고 한다.
이러한 삼마지(三摩地)의 자재(自在)에 대한 자세한 이치[廣義]는 오직 설한 것과 같은 상(相)에만 있으며,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지나치거나 증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또한 먼저 설한 삼마지(三摩地)를 얻는 것과 중간에 설한 삼마지(三摩地)의 원만(圓滿)과 그리고 지금 설한 삼마지(三摩地)의 자재(自在)를 모두 무상세간(無上世間)의 모든 종류[一切種]의 청정(淸淨)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청정(淸淨)은 오직 정법(正法)에만 있고 외도(外道)들에게는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60) 출세간(出世間)의 모든 종류[一切種]의 청정(淸淨)이라고 하는가?
간략하게 다섯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 등을 다섯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성제현관(聖諦現觀)에 들어가는 것이며, 둘째는 성제현관(聖諦現觀)에 들어가고 나서 모든 장애를 여의는 것이며, 셋째는 성제현관(聖諦現觀)에 들어가고 나서 빠르게 통혜(通慧)를 증득하고자 하기 위해서 여러 환희사(歡喜事)를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하는 것이며, 넷째는 얻었던 도(道) 그대로를 수습하는 것61)이며, 다섯째는 극청정도(極淸淨道)와 과(果)의 공덕(功德)을 증득(證得)하는 것이다.
무엇을 성제(聖諦)의 현관(現觀)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어떤 여래(如來)의 여러 제자(弟子)들은 이미 세간(世間)의 청정(淸淨)을 잘 수습하고 나서 오랜 세월동안 묘오욕(妙五欲)에 의하여 그 마음을 적집(積集)하며, 음식으로 지탱시켰기 때문에 그 마음을 장양(長養)하며, 그 여러 욕[諸欲]에 대하여 애락(愛樂)을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여러 욕[諸欲]에 대해서 깊이 과환(過患)을 보고, 상승(上勝)의 경계에서는 적정의 덕(德)을 보는 것이다. 그는 희론계(戲論界)에 쉽게 안주(安住)할 수 있으니, 세간(世間)의 모든 종류[一切種]의 청정(淸淨)을 말한다.
60) 이하는 7지(支)의 상(相)을 해석하는 가운데 일곱번째로 출세간(出世間)의 모든 종류[一切種]의 청정(淸淨)을 해석한다.
61) 앞에서 얻은 환희(歡喜)의 경사(境事)를 사유하고 장애를 끊어 없애기 위하여 다시 수습하는 것이 앞과 같다는 것이다.
무희론계(無恚論界)에 어렵게 안주할 수 있으니, 출세간(出世間)의 모든 종류[一切種]의 청정(淸淨)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악(惡)을 싫어하는 데에 머무르지만 악(惡)을 싫어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정법(正法)에 머무르는 사람은 무희론열반계(無恚論涅槃界)에 마음으로 즐겨 안주하고 즐겨 증득하려고 한다. 사문과(沙門果)를 증득하려는 증상력(增上力)을 결여하기 때문에 자기[己]가 잡염(雜染)과 상응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내며, 자기[己]가 청정(淸淨)과 상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내며, 자기[己]가 잡염(雜染)과 상응하는 과환(過患)에 대해서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내며, 자기[己]가 청정(淸淨)과 상응하지 않는 과환(過患)에 대해서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내며, 자기[己]가 청정(淸淨)에 대하여 성취[成辦]하기 어려움을 보고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낸다.
이 가운데에 간략하게 세 가지의 잡염(雜染)과 상응(相應)하는 것이 있다. 첫째는 미처 조절하지도 못하고 미처 따르지도 못하고서 죽는 잡염(雜染)과 상응(相應)하는 것이며, 둘째는 죽고 나서 번뇌의 큰 구덩이에 떨어지게 될 잡염(雜染)과 상응(相應)하는 것이며, 셋째는 그 번뇌의 자재력(自在力)에 의하기 때문에 갖가지 악(惡) 불선업(不善業)을 현행(現行)시켜서 두려운 곳에 가게 되는 잡염(雜染)과 상응(相應)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自身)이 사문과(沙門果)의 증득을 결여하였고 그것을 결여하였기 때문에 세 가지 잡염(雜染)과 상응하는 것을 위와 같이 관찰하고 나서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낸다.
청정(淸淨)과 상응하지 않는 것에도 또한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제 번뇌(煩惱)가 끊어진 구경열반(究竟涅槃)을 두려움 없는 곳[無怖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둘째는 이것을 능히 증득하는 것이니, 증상심학(增上心學)에 의지한 선심(善心)의 삼마지(三摩地)를 말한다. 셋째는 이것을 능히 증득하는 것이니, 증상혜학(增上慧學)에 있어서 정견(正見)에 포함되는 미묘한 성도(聖道)를 말한다.
그는 자신과 이 세 가지 청정(淸淨)이 상응하지 않다는 것을 관찰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낸다.
잡염(雜染)과 상응하는 과환(過患)에 또한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노(老) 병(病) 사(死)의 괴로움이니, 근본(根本)의 태어남[生]이며, 둘째는 자성(自性)의 괴로움이니, 여유가 없는 곳[無瑕處]에 태어나는 것이며, 셋째는 일체처(一切處)에서 생기는 무상성(無常性)이다.
그는 자신이 이러한 세 가지의 잡염(雜染)과 상응하는 과환(過患)이 있다는 것을 관찰해야만 하고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낸다.
청정(淸淨)과 상응하지 않는 과환(過患)에 다섯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변지(邊地)에 태어나는 것을 아직 그치게[止息] 할 수 없는 것이며, 둘째는 악도(惡道)에 태어나는 것을 아직 그치게 할 수 없는 것이며, 셋째는 재가중(在家衆)의 여러 무간업(無間業)을 아직 막을 수 없는 것이며, 넷째는 출가중(出家衆)의 무량(無量)한 견취(見趣)에 대해서 상응하지 않는 것이 아닌 것이며, 다섯째는 비록 세간도(世間道)에 의하여 정(定)이건 생(生)이건 간에 유정(有頂)에까지 이를지라도 초(初) 후제(後際)가 없는 데에 생사유전(生死流轉)하여 아직 변제(邊際)62)를 짓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이러한 다섯 가지 청정(淸淨)과 상응하지 못하는 과환(過患)이 있다는 것을 관찰해야만 하고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낸다.
자신의 청정(淸淨)에 대하여 성취[成辦]하기 어렵다고 보는 데에도 다섯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만약 버리면[捨] 되지 않으니, 능히 스스로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 밖의 일[所餘事]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청하지 않으니, 능히 성취하는 것[成辦]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결정코 마땅히 지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서 아직 청정하지 못하여 반드시 뭇 괴로움[苦]에서 능히 해탈(解脫)하지만 길상(吉祥)의 성품[性]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넷째는 악업(惡業)에 대해서 현재 짓지 않는 것도 아니면서 곧 그것을 '자기는 청정(淸淨)을 지었다'고 하고 곧 '이미 현견법(現見法)에서 영원히 치성[熾燃]을 여의는 것을 얻었다고 하리라'고 하면서 대치도(對治道)가 없는 것이다.
먼저 조작(造作)한 악(惡) 불선업(不善業)은 반드시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저 청정(淸淨)한 학(學) 무학도(無學道)는 증득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청정을 관(觀)하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상(相)은 성취[成辦]하기 어렵기 때문에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낸다.
또한 다시 견고(堅固)한 정진(精進)을 일으키니, 증득(證得)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또한 잡염(雜染) 청정(淸淨)의 상응(相應) 불상응(不相應)을 관찰하여 보기[觀見] 때문에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일으킨다. 또한 잡염(雜染) 청정(淸淨)의 상응(相應) 불상응(不相應)의 과환(過患)을 관찰하여 보기[觀見] 때문에 마음으로 포외(怖畏)를 일으킨다. 또한 청정(淸淨)의 증득(證得)과 잡염(雜染)의 단멸(斷滅) 가운데에 난타(嬾惰)와 해태(懈怠)가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 곧바로 차지(遮止)한다. 또한 그 상(相)을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일으키며, 곧 그 상(相)에 소작(所作)이 많기 때문에 마음으로 극염환(極厭患)을 일으킨다.
염환(厭患) 극염환(極厭患)과 같이, 포외(怖畏) 극포외(極怖畏)와 차지(遮止) 극차지(極遮止)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위와 같이 그는 염환과 함께 작용하는[俱行] 상(想)에 의하여 5처소(處所)63)에서 20가지의 상(相)64)으로써 작의(作意) 사유(思惟)하기 때문에, 대치를 잘 닦았다[善修治]고 이름하는 것이다.
다시 5인(因)이 있어서 20가지의 상(相)을 섭수(攝受)하게 된다.65)
63) 자기[己]가 잡염(雜染)과 상응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내며, 자기[己]가 청정(淸淨)과 상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내며, 자기[己]가 잡염(雜染)과 상응하는 과환(過患)에 대해서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내며, 자기[己]가 청정(淸淨)과 상응하지 않는 과환(過患)에 대해서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내며, 자기[己]가 청정(淸淨)에 대하여 성취[成辦]하기 어려움을 보고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내는 것을 말한다.
64) 5처소(處所) 가운데에 앞의 3처소(處所)에 각각 3상(相)이 있고, 뒤의 2처소에 각각 5상(相)이 있어서 19상(相)이 되며, 여기에다 견고한 정진(精進)을 일으키는 1상(相)을 합하여 총 20상(相)이 되는 것이다.
65) 첫 번째의 인(因)에 6상(相)이 있으며, 두 번째의 인(因)에 4상(相)이 있으며, 세 번째의 인(因)에 2상(相)이 있으며, 네 번째의 인(因)에 5상(相)이 있으며, 다섯 번째의 인(因)에 3상(相)이 있다.
의(作意)를 따라 들어가는[隨入] 데에 있어서68) 미세하게 현행(現行)하고 유간(有間) 무간(無間)으로 따라 구르는[隨轉] 아만(我慢)69)과 함게 작용하는 심상(心相)은 능히 현관작의(現觀作意)의 정통달(正通達)을 장애하기 때문이다. 이미 통달하고 나서는 작의(作意)와 함께 작용하는 마음이 자유자재[任運]로 구르는 가운데에 능히 잘 버리고 무간멸(無間滅)시킨다.70) 무간멸심(無間滅心)에 의지하여 새롭게 일어나게 되는 작의(作意)에 의하여 무상(無常) 등의 행(行)을 여실히 사유한다. 이러한 작의(作意)를 수습하고 자주 수습하기 때문에 소연(所緣) 능연(能緣)의 평등(平等) 불평등(不平等)의 지(智)를 일으킨다. 그는 이 때에 능히 현관(現觀)을 장애하는 아만(我慢)과 난심(亂心)을 곧바로 영원히 단멸(斷滅)하고 심일경성(心一境性)을 증득한다. 곧바로 '나는 이미 심일경성(心一境性)을 증득하여 여실하게 알았다'고 스스로 사유(思惟)하니, 이것을 통달작의(通達作意)에 의하기 때문에 성제현관[諦現觀]에 들어간다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71) 만약 먼저 세간도(世間道)로써 삼마지(三摩地)를 얻고 또한 원만(圓滿)을 얻고 또한 자재(自在)를 얻었다면 그는 어떤 경우에는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간 상(相)에 대하여 '이것에 의하여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갔다'고 하며, 어떤 경우에는 삼마지(三摩地)에 머무르는 상(相)에 대해서 '이것에 의하여 삼마지(三摩地)에 머무른다'고 하며, 어떤 경우에는 삼마지(三摩地)에서 나오는 상(相)에 대해서 '이것에 의하여 삼마지(三摩地)를 나온다'고 한다.
이 제 상(相)에 대하여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하여 그 마음을 안주(安住)하여 성제현관[諦現觀]에 들어간다.
만약 삼마지(三摩地)를 얻었으나 아직 원만(圓滿)하지 못하고 또한 자재(自在)하지 않으면 그는 어떤 경우에는 지상(止相)을 사유(思惟)하고, 어떤
68) 이하는 20가지의 상(相)을 해석한다. 먼저 첫 번째의 인(因)의 6상(相)을 분별한다.
69) 유간(有間)에 수전(隨轉)하는 아만(我慢)은 제 6식(識)과 구행(俱行)하는 아만(我慢)을 말하고, 무간(無間)에 수전(隨轉)하는 아만(我慢)은 제 7식(識)과 구행(俱行)하는 아만(我慢)을 말한다.
첫째는 부정심사(不正尋思)의 소작(所作)으로 요란(擾亂)하여, 마음이 안정(安靜)하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는 알아야 할 대상[所知事]에 대하여 그 마음이 전도(顚倒)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장애를 대치(對治)하고자 하기 때문에 두 가지 소연경(所緣境)에 그 마음을 안주(安住)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말하자면 첫 번째 장애를 대치(對治)하기 위해서 아나파나염(阿那波那念)73)을 수습하고 두 번째 장애(障礙)를 대치하기 위해서 여러 염주(念住)들을 수습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경계에 들어가는 문(門)에 의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안주(安住)하는 것인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74) 묘오욕(妙五欲)에 대하여 즐겨 가까이 익히는[習近] 자는 성스러운 법과 비나야(毘奈耶)에 대하여 소행처(所行處)로 삼지 않으며, 또한 그때 그때에 따라서 얻게 되는[隨宜所得] 의복 음식 여러 앉고 눕는 자구[諸坐臥具]에 대해서 곧바로 희족(喜足)을 일으키고 획득된 이득[利養]과 공경(恭敬)에 따라가며 그 마음을 굴복[制伏]시킨다.
묘오욕(妙五欲)에 의하여 얻게 되는 이득[利養]과 공경(恭敬)에 의하여 마음이 곧바로 견고하게 머물지 않으며, 이러한 인연 때문에 일체(一切)의 소행처(所行處)가 아닌 것을 멀리 여의는 것이다.
72) 이하는 제 3의 인(因)에 의한 2상(相)을 분별하는 것이다.
73) 아나파나(阿那波那)는 n p na(; na-ap na)의 음사어로서 na(;阿那)는 입식(入息), ap na(;波那)는 출식(出息)으로 번역된다. 아나파나념(阿那波那念)이란 수식관(數息觀)이다.
이미 원리(遠離)하고 나서 여러 염주(念住)에 의지하여 즐겨 끊고[樂斷] 즐겨 닦는다[樂修].
밤낮으로 때때로 자타(自他)의 모든 쇠(衰)하고 성(盛)하는 등의 현상[事]을 관찰하여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낸다.
또한 다시 불수념(佛隨念)75) 등을 수습하여 마음을 청정하게끔 한다.
또한 다시 여러 성종(聖種) 가운데에 안주(安住)한다.
이와 같은 것을 자량(資糧)에 의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안주하며, 이는 최승(最勝)의 자량도(資糧道)에 의지하여 설하는 것인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76) 그에게는 위와 같이 자량(資糧)에 머무르고 나서는 작의(作意)와 상응하는 가행[相應加行]을 수습하고자 하기 때문에 두 가지의 가행방편(加行方便)이 있다.
무엇을 두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계경(契經)과 아비달마(阿毘達磨)를 독송(讀誦)하고 수지(受持)하며 바른 작의(作意)를 수습하고 온(蘊) 등의 현상[事]에 대하여 극히[極] 선교(善巧)하게끔 하는 것이다. 둘째는 다른 스승의 가르침에 의지하는 것이다. 소위 대사(大師) 오파타야((波柁耶)77) 아차리야(阿遮利耶)78)에게 시시때때로 교수(敎授)받고 교계(敎誡)받으며 섭수(攝受)받아서 의지하고, 또한 정가행(正加行)을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하는 것이다. 이를 제 3의 방편(方便)이라고 이름하며 이러한 바른 가행(加行)의 작의(作意)와 사유(思惟)를 정가행(正加行)이라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여기에서의 이치[義]는 시라(尸羅)가 청정(淸淨)한 모든 작의(作意)를 정가행(正加行)의 작의(作意) 사유(思惟)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시라(尸羅)의 청정(淸淨)을 사유(思惟)하기 때문에 후회[悔]의 시달림[惱]이 없고, 후회의 시달림이 없기 때문에 곧바로 환희(歡喜)를 일으키며 …… [廣說] 내지 마음이 정정(正定)에
75) 염불(念佛)을 의미한다.
76) 이하는 제 5의 인(因)에 의한 3상(相)을 분별하는 것이다.
77) 범어 Up dhy ya의 음사어로서 친교사(親敎師)라고 번역된다.
78) 범어 c rya의 음사어로서 아사리(阿闍梨)로도 음사된다. 이것은 궤범(軌範) 또는 교수(敎授)라고 번역된다.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정가행(正加行)의 작의(作意) 사유(思惟)를 선설(宣說)하여 마음이 방편에 머문다[心住方便]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편(方便)에 의하기 때문에 마음이 속히 안주하며 그는 이 때에 이 5인(因)의 20가지 상(相)에 의하여 그 마음을 섭지(攝持)한다.
애욕[愛]이 다한 적멸열반계(寂滅涅槃界)에 잘 안주하게끔 하고는 다시는 퇴전(退轉)함이 없게 하며, 마음에 놀랍고 두려움[驚怖]이 없게 한다. '우리들은 지금 어느 곳에 있는 것인가?'라고 한다. 이와 같이 마음이 안주(安住)할 때에 마땅히 이미 진리[諦]의 현관(現觀)에 들어갔으며, 이와 같은 것을 입성제현관(入聖諦現觀)이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이 성제현관(聖諦現觀)의 이치[義]에 대하여 자세히 설한 것은, 즉 마음의 염환상(厭患相)에 20가지가 있고, 마음의 안주상(安住相)에 또한 20가지가 있으며,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지나치거나 증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성제현관(聖諦現觀)에 들어가고 나서 장애들을 여읜다고 하는 것인가?
이 장애에는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행처(行處)의 장애(障礙)이며, 둘째는 주처(住處)의 장애이다.
행처(行處)의 장애란 성제자(聖弟子)가 어떤 경우에는 대중[衆]과 동거(同居)하여 그에 따라서 승가[僧]의 소작사(所作事)를 일으켜서 선품(善品)을 버리고 자주 대중과 모이며, 어떤 경우에는 다시 항상 걸식법(乞食法)에 안주하여 음식을 애중(愛重)히 여기며, 어떤 경우에는 두 가지 것을 겸하여 좋아하고[好樂] 의발(衣鉢) 등의 도구[事]를 영위(營爲)하며, 어떤 경우에는 경전(經典)을 독송(讀誦)하면서 담화(談話)를 좋아하며[好樂], 어떤 경우에는 밤에 수면(睡眠)을 락착(樂著)하며, 어떤 경우에는 낮에 왕적(王賊) 등의 잡염(雜染)의 언론(言論)을 락착(樂著)하며, 어떤 경우에는 친척(親戚) 교유(交遊) 담학(談謔) 등이 있는 곳에 머물러서 이러한 것에 대하여 원리(遠離)를 좋아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오랜 세월 동안 즐겨 익히고[樂習] 그것과 함께 있는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혹은 다시 즐겨 두 번째 것[第二]과 함께 머무는[共住] 이와 같은 것들을 행처(行處)의 장애라고 이름
주처(住處)의 장애란 공한처[空閑]에 있으면서 사마타(奢摩他) 비발사나(毘鉢舍那)를 닦는 것을 모두 머무름[住]이라고 이름하는데, 사마타(奢摩他) 비발사나(毘鉢舍那)에 의지하여도 다시 네 가지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비발사나지(毘鉢舍那支)에 수순(隨順)하지 않는 성품[性]이며, 둘째는 사마타지(奢摩他支)에 수순(隨順)하지 않는 성품[性]이며, 셋째는 그 두 가지 품(品)의 염(念)에 수순(隨順)하지 않는 성품[性]이며, 넷째는 처소(處所)에 수순(隨順)하지 않는 성품[性]이다.
또는 자기[己]가 총명(聰明)하다고 말하고서 고거(高擧)79)를 일으켜서 다른 사람을 쫓아서 순관(順觀)의 정법(正法)을 듣지 않으니, 이를 비발사나지(毘鉢舍那支)에 수순(隨順)하지 않는 성품[性]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는 신(身) 어(語) 의행(意行)을 안정(安靜)시키지 않아서 조급히 움직이고 가벼이 들떠있으며 수시로 시라(尸羅)를 범하여 근심[憂]과 후회[悔] 등을 일으키고 내지 마음이 잘 안주(安住)할 수 없는 것이니, 이를 사마타지(奢摩他支)에 수순(隨順)하지 않는 성품[性]이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또는 망념(忘念)의 증상력(增上力)이 있기 때문에 혼침[沈]과 도거[掉] 등의 여러 수번뇌(隨煩惱)에 마음이 차호(遮 )80)되지 않으니, 이를 그 두 가지 품(品)의 염(念)에 수순(隨順)하지 않는 성품[性]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는 5실(失)과 상응하는 여러 앉고 눕는 자구[坐臥具]에 가까이 익히는 것[習近]이 있으니, 이를 처소(處所)에 수순(隨順)하지 않는 성품[性]이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혹은 낮에는 방일[諠逸]하는 일이 많고, 밤에는 모기와 등에 등의 뭇 괴로움에 접촉되는 일이 많으며, 또한 두려움이 많고 재앙들이 많으며 뭇 도구들은 모자라서 애락(愛樂)할 수 없으며, 악우(惡友)들에게 섭지(攝持)되어 선우(善友)들이 없으니, 이와 같은 등을 주처(住處)의 장애라고 한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자주 여러 정(定)들을 즐기는 것이며, 둘째는 자주 여러 사택(思擇)을 하는 것이다.
자주 여러 정(定)들을 즐기는 것에는 간략하게 여섯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말하자면 만약 이미 삼마지(三摩地)를 얻었으나 아직 원만(圓滿)을 얻지도 못하고 자재(自在)를 얻지도 못했다면 그는 지(止) 거(擧) 사(捨)의 세 가지 선교(善巧)를 수습해야만 한다. 이것에 의하여 자주 여러 정(定)의 즐거움이 발생하는 것이다. 만약 삼마지(三摩地)에서 이미 원만(圓滿)을 얻고 또한 자재(自在)를 얻었다면 그는 정에 들어가고[入] 머무르며[住] 나오는[出] 세 가지 선교(善巧)를 수습해야만 한다. 이것에 의하여 자주 여러 정(定)의 즐거움이 발생하는 것이다.
무엇을 자주 여러 사택(思擇)을 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승선(勝善)의 혜(慧)를 사택(思擇)이라고 이름하며, 이 혜(慧)에 의하기 때문에 밤낮으로 자기(自己)의 모든 선법(善法)의 증장(增長)을 여실(如實)하게 알며[了知], 불선법(不善法)의 증장을 여실하게 알며, 선법(善法)의 쇠퇴(衰退)를 여실하게 알며, 불선법(不善法)의 쇠퇴를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또한 그는 밤낮의 경우와 같이, 행하거나 머물거나 간에 의복 음식과 사는 데의 인연[命緣]을 가까이 익힌다. 가까이 익히기 때문에 불선법(不善法)의 증장(增長)과 선법(善法)의 쇠퇴(衰退)와, 혹은 선법(善法)의 증장과 불선법(不善法)의 쇠퇴를 모두 여실히 아는 것이다.
곧 이러한 사택(思擇)을 의지로 삼기 때문에 생겨나는 모든 불선법(不善法)에 대하여 방편(方便)의 도리(道理)를 굳게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내쫓고[驅擯] 원리(遠離)하는 것이다.
제 선법(善法)에 대한 이와 같은 2처(處)의 열 가지 선교(善巧)81)를 능히 부지런히 수습(修習)하여서 2처소(處所)의 열 한 가지 장애82)를 능히 단멸
81) 자주 여러 정(定)을 즐기는 것의 여섯 가지 선교(善巧)와 자주 여러 사택(思擇)을 하는 것의 네 가지 선교(善巧)를 합해서 2처(處)의 열 가지 선교(善巧)라고 한다.
82) 행처(行處)의 6처(處)와 주처(住處)의 5처(處)를 합해서 2처소(處所)의 열 한 가지 장애라고 한다.
(斷滅)시켜서 생겨나는 대로 곧바로 원리(遠離)하니, 이와 같은 것을 장애를 원리하는 것[遠離障礙]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이 장애를 원리하는 이치[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설한 바 상(相)과 같으며,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지나치거나 증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성제현관(聖諦現觀)에 들어가고 나서 빠르게 통혜(通慧)를 증득하고자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환희사(歡喜事)를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한다고 하는 것인가?
성제(聖諦)를 이미 보고 증정(證淨)을 이미 얻은 성제자(聖弟子)는 곧 증정(證淨)83)으로서 의지를 삼기 때문에 불(佛) 법(法) 승(僧)의 뛰어난 공덕전(功德田)에 대하여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하여 환희(歡喜)를 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스스로 증상(增上)의 생사(生事)와 결정(決定)의 승사(勝事)에 의지하여, 즉 자신의 재보(財寶)와 증득한 성사(盛事)를 작의하고 사유하여 환희를 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질투가 없는 것[無嫉]에 의지하여 자신에 있어서와 같이 다른 이에게도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또한 지은(知恩)에 의지해서는 '은혜로운 사람이다'고 말하며, 대사(大師)의 은혜를 기억하여 작의하고 사유하여서 환희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한 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뭇 괴로움[苦]과 고인(苦因)을 원리(遠離)하고 뭇 즐거움[樂]과 락인(樂因)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와 같이 수도(修道)에 수순(隨順)하는 환희사(歡喜事)를 사유하기 때문에 빠르게 통혜(通慧)를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수도(修道)를 수순하는 환희사(歡喜事)를 사유하는 이러한 이치[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설한 바 상(相)과 같으며,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지나치거나 증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얻었던 도(道) 그대로를 수습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그는 이와 같이 생겨난 광대(廣大)하고 무죄(無罪)의 환희(歡喜)를 그 마
83) 범어 Pras da의 의역(意譯)으로서 신앙의 결과로서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구사론(俱舍論)』 제 4권을 참조하라.
음에 끌어대어 구경(究竟)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현법(現法)에서 마음으로 극히 사모(思慕)하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마음으로 사모(思慕)를 일으키기 때문에 출리(出離)의 락욕(樂欲)이 자주 자주 현행(現行)하여 '나는 어떻게 구족(具足)하게 이와 같은 성처(聖處)에 능히 머물러야 만이 아라한(阿羅漢)이 구족(具足)하게 머무르는 것과 같아지겠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욕락(欲樂)을 일으키고 나서 부지런한 정진(精進)을 일으켜서 끊임없이 상위(常委)로 37보리분법(菩提分法)에 대한 방편(方便)을 부지런히 닦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와 같이 부지런히 정진하기 때문에 재가(在家)와 출가(出家)의 대중에 서로 섞여 머무르지 않고, 맨 마지막[邊際]의 여러 앉고 눕는 자구[諸坐臥具]를 가까이 익히며 마음으로 원리(遠離)를 좋아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와 같은 욕락(欲樂)을 일으키고 부지런한 정근(精勤)을 일으켜서 원리(遠離)를 좋아하고 나서는 희족(喜足)을 일으키지 않고, 적은 부분의 수승한 소증(所證)에 대해서 마음으로 희족(喜足)하는 일이 없으며, 모든 선법(善法)이 위로 구르며 뛰어나게 구르고 미묘하게 구르는 곳을 희구(希求)하여 머무르는 것이다.
이 네 가지 법에 의지하여 수도(修道)를 섭수(攝受)하고 극히 잘 섭수(攝受)하는 것이니, 곧 이 네 가지는 수도(修道)에 의지가 된다. 먼저 설한 여러 환희사(歡喜事)로부터 생기게 되는 환희와 같이, 그는 이 때에 원만하고 가장 지극한 손감[圓滿最極損減]의 방편도리(方便道理)84)를 수득(修得)85)하는 것이다.
번뇌가 끊어지기 때문에,86) 수승한 소증법(所證法)을 획득하기 때문에, 또한 희열원만(喜悅圓滿)을 수득(修得)하는 것이다.
또한 수도단(修道斷)의 혹품(惑品)의 추중(麤重)을 이미 원리(遠離)하였기
84) 환희에서 닦아 얻고 원만히 하여 욕계를 떠나는 것을 말한다.
85) 수행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태어나면서 얻는 생득(生得)과 대비된다.
86)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번뇌를 끊는 것이다. 그리하여 승도희열원만(勝道喜悅圓滿)을 얻는다.
경안(輕安) 때문에 몸과 마음의 청량(淸凉)을 일으켜서 극히 섭수(攝受)하게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두 가지 원만(圓滿)을 수득(修得)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유학(有學)이 금강유정(金剛喩定)의 구경(究竟)에 이를 때까지 원만(圓滿)을 수득(修得)하니, 이를 얻었던 도(道) 그대로를 수습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이 얻었던 도(道) 그대로를 수습하는 이치[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네 가지 법을 의지로 삼기 때문에 능히 다섯 가지 법을 원만하도록 수습하는 것이며,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지나치거나 증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극청정(極淸淨)의 도과(道果)의 공덕(功德)을 증득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세 가지 위(位), 즉 락위(樂位) 고위(苦位) 불고불락위(不苦不樂位)에 있어서를 말한다. 제 번뇌(煩惱) 때문에 수면(隨眠)을 받아서 대부분 나타나게 되는[所顯] 두 가지 종류의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다. 첫째는 이생(異生)이며, 둘째는 유학(有學)이다.
또한 두 가지가 있어서 능히 잡염품(雜染品)을 일으킨다. 첫째는 취(取)의 잡염품(雜染品)87)이며, 둘째는 행(行)의 잡염품(雜染品)88)이다. 즉 이러한 두 가지 잡염품(雜染品)을 끊기 위해서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에 들어갈 때, 능히 장애가 되는 모든 번뇌이다. 이러한 제 번뇌들은 능히 수면(隨眠)이 되어서 깊고 멀리 마음으로 들어가며, 또한 능히 갖가지 괴로움들을 발생시킨다.
만약 이것에 대해서 능히 남김없이 영원히 끊으면 극청정[極淨]의 도과(道果)를 증득하였다고 이름한다. 또한 열 가지 무학지(無學地)에 포함되는 다섯 가지 무학(無學)의 온(蘊)89)이 있으니, 소위 계온(戒蘊) 정온(定蘊) 혜온
만약 위와 같은 열 가지 과실(過失)에 대하여 영원히 상응하지 않고 오직 최후신(最後身)에 의해서만 지니게[任持] 된다면, 필경 제 2의 나머지 몸[餘身]98)은 일어나지 않으며, 최고의 적정(寂靜)한 열반계(涅槃界)에서 끝내[究竟] 안주(安住)하며, 일체 유정(有情)으로부터 위로 제일유(第一有)99)에 태어나는 자에 이르기까지 그 일체의 모든 유정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것[最勝]을 얻는다. 그러므로 성인이 머무르는 곳[聖所住]에 머무른다고 하는 것이다. 능히 열 가지 과실(過失)을 원리(遠離)하고 또한 능히 성인이 머무르는 곳[聖所住處]에 안주하기 때문에 공덕(功德)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의 과(果)나 혹은 극청정도[極淨道]나 혹은 그것의 공덕(功德)의 이와 같은 일체를 총략(總略)하여 극청정(極淸淨)의 도과(道果)의 공덕(功德)을 증득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극청정(極淸淨)의 도과(道果)의 공덕(功德)을 증득하는 이치[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설한 바 상(相)과 같으며,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지나치거나 증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와 같이 최상(最上)의 무학(無學)의 여러 성법(聖法)을 얻은 자라면 이와 같은 성법(聖法)과 상응하는 마음은 묘오욕(妙五欲)에 대하여 극히 싫어하고[厭背] 이숙(異熟)이 없기 때문에 뒤에 다시 잇지 않는다. 만약 세간심(世間心)이 비록 이미 끊어진 것을 되살려서 여전히 현행(現行)을 얻을지라도 그는 후시(後時)에 있어서 자유자재로[任運] 멸(滅)한다.
또한 번뇌도(煩惱道)의 이후에 업도(業道)가 있어서도 현법(現法)에서 이미 영원히 단절(斷絶)하며, 그것을 단절하였기 때문에 미래의 고도(苦道)는 또 다시 구르지 않는다. 인과(因果)가 영원히 멸진(滅盡)했기 때문에 곧 고변(苦邊)이라고 이름하며, 다시 남는 것[所餘]도 없고 위[上]도 없으며, 뛰어난 것[勝]도 없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 성제현관(聖諦現觀)에 들어가는 것과 장애(障礙)를 여의는 것과 빠르게 통혜(通慧)를 증득하기 위해서 여러 환희사(歡喜事)를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하는 것과 얻었던 그대로의 도(道)를 수습하는 것과 극청정(極淸淨)의 도과(道果)의 공덕(功德)을 증득하는 이와 같은 것을 출세간
1) 수소성지(修所成地)는 갖추어 말하면 수혜소성지(修慧所成地)라고 한다. 수(修)는 수습(修習) 즉 승정(勝定)에 의하여 지혜를 발생시키고 대치(對治)를 수습(修習)하기 때문에 수(修)라고 하며, 정(定)에 의해서 발생한 이사(理事)를 이해하기 때문에 수혜(修慧)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 혜(慧)와 상응하는 심(心) 심소(心所) 등과 유위(有爲)이든 무위(無爲)이든 소득(所得)의 과(果)가 모두 이 지(地)의 체(體)가 된다. 수소성지(修所成地)는 크게 네 가지[四處]로 나뉘며 또한 일곱 가지의 지(支)로 나누어져 설명된다.
2) 첫 번째의 1지(支)는 생원만(生圓滿)의 수(修)에 포함되며,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의 3지(支)는 수(修)의 인연(因緣)에 포함되며, 다섯 번째의 1지(支)는 수(修)의 유가(瑜伽)에 포함되며, 여섯 번째 일곱 번째의 2지(支)는 수(修)의 과(果)에 포함된다.
중동분(衆同分)의 원만(圓滿)이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사람[人]으로 태어나서[生在] 장부(丈夫)의 몸을 얻고 남근(男根)을 성취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처소(處所)의 원만(圓滿)이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사람[人]으로 태어나
3) 이하는 7지(支)의 상(相)을 해석하는 가운데 그 첫 번째로 생(生)의 원만(圓滿)을 해석한다. 생(生)의 원만(圓滿)은 4처(處) 가운데 수(修)의 처소(處所)에 해당되며 총 열 가지가 있다. 열 가지란 내(內)에 의지한 중동분(衆同分)의 원만(圓滿)과 처소(處所)의 원만(圓滿)과 의지(依止)의 원만(圓滿)과 무업장(無業障)의 원만(圓滿)과 무신해장(無信解障)의 원만(圓滿)과 외(外)에 의지한 대사(大師)의 원만(圓滿)과 세속(世俗)의 정법시설(正法施設)의 원만(圓滿)과 승의(勝義)의 정법수전(正法隨轉)의 원만(圓滿)과 정행불멸(正行不滅)의 원만(圓滿)과 수순자연(隨順資緣)의 원만(圓滿)을 말한다.
서 또한 중국(中國)4)에 처(處)하게 되고 변지(邊地)에 태어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이 곳에 4중(衆)의 행(行)이 있으니, 필추(苾芻)5)와 필추니(苾芻尼)6)와 근사남(近事男)7)과 근사녀(近事女)8)이다. 말하자면 이 곳에 4중(衆)의 행(行)이 없고 또한 현성(賢聖) 정지(正至) 정행(正行)의 여러 좋은 장부[善丈夫]가 없는 곳에 달수(達須)9)와 멸려차(蔑戾車)10)로 태어나지 않는다.
의지(依止)의 원만(圓滿)이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중국(中國)에 태어나 처(處)하면서 눈과 귀 등의 어떤 하나의 지분(支分)11)에 결함이 없고 성질이 완악[頑囂]12)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벙어리도 아니어서 능히 선설(善說)과 악설(惡說)의 모든 법의(法義)를 완전히 이해[解了]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업장(無業障)의 원만(圓滿)이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의지(依止)13)가 원만(圓滿)하고 5무간(無間;無間業)의 어떤 하나의 업장(業障)을 스스로 짓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짓지 않게끔 하는 것과 같다. 만약 이것을 짓는 일이 있으면 현재의 몸이 있는[現身] 동안에는 반드시 성현(聖賢)을 증득하는 법기(法器)가 아니다.
무신해장(無信解障)의 원만(圓滿)이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반드시 5무간업(無間業)을 성취하지 않고, 악처(惡處)에 대해서 신해(信解)를 일으키
4) 5천축(天竺)을 말한다. 그 나머지 나라를 변지(邊地)라고 한다.
5) 비구(比丘)를 말한다.
6) 비구니(比丘尼)를 말한다.
7) 범어 Up sak 의 의역(意譯)으로서 3보(寶)에 귀의하고 5계(戒)를 받은 재가남성의 불교신자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음사하여 우바새(優婆塞)라고도 한다.
8) 범어 Up sik 의 의역(意譯)으로서 3보(寶)에 귀의하고 5계(戒)를 받은 재가여성의 불교신자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음사하여 우바이(優婆夷)라고도 한다.
9) Dasyu의 음사어로서 졸렬하고 악하며 하천하고 더러운 무리를 말한다. 이것은 총령(總嶺)의 동쪽에 있는 여러 나라를 총칭한다.
10) Mleccha의 음사어로서 더러운 것을 좋아하는 하천한 무리들을 말한다. 이것은 돌궐족(突闕族)을 총칭한다.
지 않으며 악처(惡處)에 대해서 청정심(淸淨心)을 일으키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니, 갖가지 삿된 천[邪天]의 처소에서와 갖가지 외도(外道)의 처소에 대해서이다. 그는 전생(前生)에 부처님의 성교(聖敎)와 선설(善說)의 법처(法處)에서 깨끗한 믿음[淨信]을 수습하고 오랜 세월 동안 상속(相續)하였기 때문에 이 인연에 의해서 금생(今生)에 오직 성처(聖處)에만 신해(信解)를 일으키고 청정(淸淨)하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생(生)의 원만(圓滿) 가운데에 외(外)에 의지한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대사(大師)의 원만(圓滿)이란 말하자면 곧 그 보특가라(補特伽羅)는 내(內)의 다섯 가지 생(生)의 원만(圓滿)을 갖추고 나서 다시 대사(大師)의 출세(出世)를 만나게 되는 것[直遇]과 같다. 즉 일체의 경계에서 무장애(無障礙)를 얻은 여래(如來) 응공[應] 정등각(正等覺) 일체지자(一切智者) 일체견자(一切見者)를 만나는 것이다.
세속(世俗)의 정법시설(正法施設)의 원만(圓滿)이란 곧 그 보특가라(補特伽羅)가 부처님의 출세(出世)를 만나고, 또한 선(善) 불선법(不善法)과 유죄(有罪) 무죄(無罪) …… 여러 연생법(緣生法) 및 광분별(廣分別)에 이르기까지, 즉 계경(契經) 응송(應頌) 기별(記別) 풍송(諷誦) 자설(自說) 연기(緣起) 비유(譬喩) 본사(本事) 본생(本生) 방광(方廣) 희법(希法) 그리고 논의(論議)를 개시(開示)하는 것을 만나는 것이다.
승의(勝義)의 정법수전(正法隨轉)의 원만(圓滿)이란 말하자면 즉 대사(大師)께서 세속의 정법(正法)을 잘 개시(開示)하고 나자, 여러 제자(弟子)들은 이 정법(正法)에 의지하고 다시 다른 사람들이 얻도록 하기 위해서 교계(敎誡) 교수(敎授)를 수순(隨順)하여 설하고, 37보리분법(菩提分法)을 닦아서 사문과(沙門果)를 얻으며, 사문과(沙門果)를 증득한 것을 원만히 할뿐만 아니라 점차[展轉] 보다 뛰어나게[勝上] 증장(增長)하고 광대(廣大)해지면서 모든 공덕(功德)을 증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정행불멸(正行不滅)의 원만(圓滿)이란 불(佛) 세존(世尊)께서는 반열반(般涅槃)하더라도 세속의 정법(正法)은 오히려 머물러 여전히 사라지지 아니하여 승의(勝義)의 정법(正法)은 숨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는 것을 말한다.
수순자연(隨順資緣)의 원만(圓滿)이란 말하자면 네 가지로서 정법(正法)을 수용(受用)하는 인연이 현전(現前)하여 정법(正法)을 수용(受用)할 때, 모든 바른 믿음[正信]을 지닌 장자(長者) 거사(居士) 바라문(婆羅門)들은 그가 정법(正法)을 수용하여 굴린다고는 알지만 자연(資緣)이 모자라서 이와 같이 받은 정법(正法)을 잃을까봐 이 때문에 은근(慇懃)하게 갖가지 의복 음식 여러 앉고 눕는 기구[諸坐臥具] 병(病)에 대한 의약(醫藥) 등 몸의 집물(什物)14)을 받들어 공급하는 것[施]이다.
이와 같은 열 가지를 내(內) 외(外)에 의지한 생(生)의 원만(圓滿)이라고 하며, 곧 이 열 가지의 생(生)의 원만(圓滿)을 유가(瑜伽)를 닦는 처소(處所)라고 한다.
이 의지할 바[所依]와 건립할 바[所建立]의 처소[處]를 의지(依止)로 삼기 때문에 여래(如來)와 그 제자(弟子)들의 모든 성법(聖法)을 증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법(聖法)에는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유학법(有學法)이며 둘째는 무학법(無學法)이다.
지금 여기에서의 의미는 무학(無學)의 모든 성법(聖法), 즉 무학(無學)의 정견(正見) …… 무학(無學)의 정지(正智)에 이르기까지를 말한다.
왜냐 하면 유학(有學)들은 성법(聖法)이 있다고 하더라도 상속(相續)하는 가운데 성법이 아닌[非聖] 번뇌(煩惱)가 뒤따르게 되어 실재로[現]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첫 번째[初支]의 생(生)의 원만(圓滿)은 자세한 성교(聖敎)의 이치[義]로써 이러한 열 가지가 있으니,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그 밖의 지나치거나 증가하는 생(生)의 원만(圓滿)은 없다.
무엇을15) 정법(正法)을 듣는 데의 원만(圓滿)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바르게 법을 설하거나 또는 바르게 법을 듣거나 간에 두 가지를
14) 집(什)은 잡(雜) 취(聚)의 뜻으로 가재도구 가구 도구를 총칭한다.
15) 이하는 7지(支)의 상(相)을 해석하는 가운데 두 번째로 정법(正法)을 듣는 데의 원만(圓滿)을 해석한다.
모두 정법(正法)을 듣는 데의 원만(圓滿)이라고 한다. 또한 바르게 법을 설하는 데에는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수순(隨順)과 무염오(無染汚)이다. 자세히 설하면 스무 가지 종류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하며, 보살지(菩薩地)에서 설명될 것과 같다. 또한 바르게 법을 듣는 데에도 간략하게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거만[憍傲]을 멀리 여의는 것이며, 둘째는 경멸(輕蔑)을 멀리 여의는 것이며, 셋째는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는 것이며, 넷째는 산란(散亂)을 멀리 여의는 것이다. 위와 같은 네 가지 과실(過失)을 멀리 여의고 법을 듣는 것을 바르게 법을 듣는 것이라고 한다. 자세히 설하면 열 여섯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하며, 역시 보살지(菩薩地) 중에 설명될 것과 같다.
무엇을16) 열반(涅槃)을 상수(上首)로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여래(如來)의 제자(弟子)가 생(生)의 원만(圓滿)에 의지하여 움직일 때, 먼저 설해진 상(相)과 같이 하여 정법(正法)을 청문(聽聞)하고, 오직 열반(涅槃)을 상수(上首)로 삼는 것이다. 오직 열반(涅槃)만을 구하고, 오직 열반(涅槃)만을 연(緣)하여 법을 청문(聽聞)하고, 다른 것을 끌어들여 자기를 믿게끔 하지 않으며, 이득[利養]과 공경(恭敬)과 칭찬[稱譽]을 위해서 하지 않는다.
또한 열반(涅槃)을 연(緣)하여 법(法)을 청문(聽聞)하는 자에게는 열반(涅槃)을 상수[首]로 하는 10법전(法轉)이 있다. 말하자면 유여의열반계(有餘依涅盤界)와 무여의열반계(無餘依涅槃界)를 의지하는 것이다. 유여의열반계(有餘依涅盤界)를 의지하여 열반을 상수로 하는 9법전(法轉)이 있고 무여의열반계(無餘依涅槃界)를 의지하여 열반을 상수로 하는 1법전(法轉)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즉 문소성(聞所成)의 혜(慧)를 인(因)으로 삼는 것이다.
도(道)와 도과(道果)인 열반(涅槃)에 대하여 세 가지 신해(信解)를 일으키는 것이니, 첫째는 실유성(實有性)을 믿는 것이고, 둘째는 공덕이 있음[有功德]을 믿는 것이며, 셋째는 자기에게 능히 즐거움을 얻는 방편(方便)이 있
16) 이하는 7지(支)의 상(相)을 해석하는 가운데 세 번째로 열반(涅槃)을 상수(上首)로 하는 것을 해석한다.
또한 설법사(說法師)는 이러한 이치[義]를 위해서 정법(正法)을 선설(宣說)하고, 그 청법자(請法者)는 이러한 뜻[意]으로 정법(正法)을 듣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때를 다른 이를 요익(饒益)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선심(善心)으로써 정법(正法)을 청문(聽聞)하고 곧바로 설한 법의(法義)의 깊고 깊은[甚深] 으뜸가는 맛[上味]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광대한 환희(歡喜)를 증득하고 또한 능히 출리(出離)의 선근(善根)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때를 능히 스스로를 요익(饒益)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바르게 법(法) 수법행(隨法行)을 닦는 대사(大師)가 있으면 정법(正法)을 건립(建立)하고자 하기 위해서 방편을 시현(示現)하고 정등각(正等覺)을 이루는데 어떻게 그로 하여금 바른 수행(修行)을 굴리도록 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그가 정법(正法)의 행(行)을 수습할 때 곧 이 법이(法爾)로써 대사(大師)를 공양(供養)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것을 설하여 다른 사람을 요익(饒益)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행(正行)으로 인하여 능히 적정(寂靜)의 청량(淸凉)을 증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유여의열반계(有餘依涅盤界)이니, 이 때문에 이것을 능히 스스로를 요익(饒益)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만약 무여의열반계(無餘依涅槃界)에서 반열반(般涅槃)할 때에는 뭇 괴로움[苦]의 변제(邊際)를 증득하였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을 열반(涅槃)을 상수(上首)로 하여 정법(正法)을 청문(聽聞)한 데서 얻는 뛰어난 이익[勝利]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열반(涅槃)을 상수(上首)로 하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이것을 제외하고 모든 자세한 이치[廣義]는 다시 지나치거나 증가하는 것이 없다.
무엇을18) 능히 해탈을 성숙하는 혜(慧)의 성숙(成熟)이라고 하는 것인가?
비발사나지(毘鉢舍那支)를 성숙(成熟)하기 때문에 또한 혜(慧)의 성숙(成熟)이라고 하며, 사마타지(奢摩他支)를 성숙(成熟)하기 때문에 또한 혜(慧)의 성숙(成熟)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정심(定心) 가운데의 혜(慧)는
18) 이하는 7지(支)의 상(相)을 해석하는 가운데 네번째로 능히 해탈을 성숙하는 혜(慧)의 성숙(成熟)을 해석한다.
소지경(所知境)에 대하여 청정(淸淨)하게 구르기 때문이다. 또한 비발사나지(毘鉢舍那支)는 맨 처음에 반드시 선우(善友)로써 의지[依]로 삼고 사마타지(奢摩他支)는 시라(尸羅)의 원만(圓滿)에 섭수(攝受)된다. 또한 선우(善友)에 섭수(攝受)되는 것에 의하여 소지경(所知境)인 진실성(眞實性)에 대하여 각료욕(覺了欲)19)이 있는 것이다. 시라(尸羅)의 원만(圓滿)에 섭수(攝受)되는 것에 의하여 증상시라(增上尸羅)에 대하여 정계(淨戒)를 훼범(毁犯)하고 비법(非法)을 현행(現行)하고 궤범(軌範)을 무너뜨리는 것에 대하여, 만약 지혜있는 자와 범행(梵行)을 같이하는 자가 보고 듣고 의심하였기 때문에, 혹은 그 죄를 들추거나 혹은 기억하도록 하거나 혹은 수학(隨學)하게끔 한다면 이소(爾所)의 때에 기론(譏論)을 감인(堪忍)20)하는 것이다.
또한 소지(所知)인 진실경[眞實;眞實境]21)을 각료(覺了)하려는 욕구[欲]에 의하기 때문에22) 청문(聽聞)을 애락(愛樂)하는 것23)이다.
청문을 애락하는 것[樂聞]에 의하기 때문에 곧바로 청문(請問)을 일으키는 것24)이다.
청문(請問)에 의하기 때문에 옛날에 듣지 못했던 깊고 깊은[甚深] 법의(法義)를 듣는 것25)이다.
자주 자주 청문(聽聞)하길 끊임없이 하기 때문에 그 법의(法義)에 대해서 굴러서 명정(明淨)을 얻으며 또한 능히 앞서 생긴 의심[疑]을 제거[除遣]하는 것26)이다.
이와 같이 각혜(覺慧)가 굴러서 명정(明淨)하기 때문에 여러 세간의 모든 성사(盛事)에 대하여 능히 과환(過患)을 보고 깊게 마음으로 염리(厭離)하는 것27)이다.
이와 같이 염심(厭心)이 잘 작의(作意)하기 때문에 그 일체의 세간의 성사(盛事)에 대해서 원락(願樂)을 일으키지 않는 것28)이다.
그는 이와 같이 여러 세간의 증상(增上)의 생도(生道)에 대해서 원심(願心)이 없기 때문에 여러 악취법(惡趣法)을 끊어 없애기 위해서 마음으로 바른 원[正願]을 내는 것29)이다.
또한 능히 그것을 대치(對治)하는 모든 선법(善法)을 수습하기 때문에 일체의 번뇌(煩惱)를 대치하는 모든 선법(善法)을 수습하는 것30)이다.
그 대치의 과(果)를 증득하고자 하기 때문에 또한 스스로의 마음[自心]에 청정(淸淨)을 얻고자 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바른 원[正願]을 내는 것31)이다.
위와 같은 열 가지는 능히 해탈(解脫)을 성숙(成熟)하는 혜(慧)를 성숙(成熟)하는 법(法)이며,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점차로 능히 해탈(解脫)을 원만(圓滿)하게끔 하는 것이다.
또한 순서대로 이미 3지(支), 즉 정법(正法)을 듣는 데의 원만(圓滿)과 열반(涅槃)을 상수(上首)로 하는 것과 능히 해탈을 성숙하는 혜(慧)의 성숙(成熟)을 설하였다. 이와 같은 3지(支)는 자세한 성교(聖敎)의 이치이니, 열 가지를 말한다.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지나치거나 증가하는 것이 없다.
또한 이 3지(支)는 유가(瑜伽)를 닦는 인연(因緣)인 줄 알아야만 한다. 왜냐 하면 이것의 차제(次第), 이것의 인(因), 이것의 연(緣)에 의해서 유가(瑜伽)를 수습해서 비로소 원만을 이루게[成滿]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법(正法)을 듣는 데의 원만(圓滿)과 열반(涅槃)을 상수(上首)로 하는 것과 능히 해탈을 성숙하는 혜(慧)의 성숙하는 것[成熟]에 의하기 때문이다.
무엇을32) 대치(對治)를 수습(修習)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인가?
간략히 설하면 3위(位) 중에 열 가지 유가(瑜伽)를 수습하는 대치해야 할
28) 해탈을 성숙하는 혜(慧)를 성숙하는 10가지 법(法) 가운데 일곱 번째이다.
29) 해탈을 성숙하는 혜(慧)를 성숙하는 10가지 법(法) 가운데 여덟 번째이다.
30) 해탈을 성숙하는 혜(慧)를 성숙하는 10가지 법(法) 가운데 아홉 번째이다.
31) 해탈을 성숙하는 혜(慧)를 성숙하는 10가지 법(法) 가운데 열 번째이다.
32) 이하는 7지(支)의 상(相)을 해석하는 가운데 다섯 번째로 대치(對治)를 수습(修習)하는 것을 해석한다.
재가위(在家位)에서는 여러 처실(妻室)34)에 대하여 음욕( 欲)과 상응하는 탐욕[貪]이 있고, 그 밖의 친족[親屬]과 여러 재보(財寶)에 대하여 수용(受用)과 상응하는 탐애[愛]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재가(在家)가 속한 위(位)의 소대치법(所對治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러한 장애로 인하여 모든 종류[一切種]에서 출리(出離)할 수가 없으며, 설사 출가(出家)하게 되더라도 이것의 심사(尋思)로 요동(擾動)치는 것으로 인하여 장애를 받기 때문에 희락(喜樂)을 내지 못한다.
위와 같은 두 가지 소대치법(所對治法)을 그 차례대로 부정상(不淨想)35)을 닦고 무상상(無常想)36)을 닦는다. 이것이 그것의 대치를 수습하는 것인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출가자(出家者)는 출가위(出家位)에 있어서 때에 맞춰[時時] 간략하게 네 가지 소작(所作)이 있다.
첫째는 항상 방편으로 선법(善法)을 닦는 소작(所作)이니, '나는 제 법(法)에 대해서 항상 방편으로 닦는 것을 의지로 삼기 때문에 애미(愛味)의 즐거움에 따르는 일체의 심식(心識)을 능히 제복(制伏)하리라'고 하고, 또한 '능히 여실(如實)히 고성(苦性)을 각료(覺了)하리라'고 하는 것이다.
둘째는 희론이 없는[無恚論] 열반(涅槃)에 대해서 신해(信解)하고 애락
33) 소대치(所對治)란 범어 Vipak a의 의역(意譯)으로서 수행에 의하여 다스려져야 할 법을 의미한다.
34) 좁게는 아내를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성적인 대상을 모두 의미하는 것이다.
35) 처실(妻室)에 대한 음욕과 상응하는 탐욕이 일어날 때에는 부정상(不淨想)을 닦는 것이다.
36) 친족과 여러 재보에 대하여 수용과 상응하는 탐애가 일어날 때에는 무상상(無常想)을 닦는 것이다.
(愛樂)하는 소작(所作)이니, '나는 희론이 없는[無恚論] 열반涅槃)에서 마음이 물러나지 않도록 우려(憂慮)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하며, '우리들은 지금 어떤 곳에 있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셋째는 때에 맞춰[時時] 취락(聚落)에 유행(遊行)하고 걸식(乞食)하는 소작(所作)이니, '나는 음식을 구걸하여 수용(受用)하는 것이 인(因)이 되어 오래 머무를[久住] 수 있는 몸을 얻으며 적당한[調適] 힘이 있으니, 항상 방편으로 여러 선법(善法)을 닦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넷째는 원리처(遠離處)에 안주(安住)하는 소작(所作)이니, '여러 재가(在家)들과 출가(出家)의 대중[衆]이 섞여 함께 머무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의 경우는 바로 갖가지 세간과 상응하는 견문(見聞)이 있고 수용(受用)하는 데에 여러 가지 산란(散亂)한 일이 있는데, 나는 그들에 대해서 곧바로 자세히 관찰하지나 않을까? 심일경(心一境)의 위(位)에 마땅히 장애가 될 것이다'고 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소작사(所作事) 가운데에 네 가지 대치해야 할 법[所對治法]이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처음 소작(所作)에 난타(嬾墮)37) 해태(懈怠)가 있으며, 두 번째의 소작(所作)에 살가야견(薩迦耶見)이 있으며, 세 번째의 소작(所作)에 애미(愛味)의 탐애[貪]가 있으며, 네 번째 소작(所作)에 세간에 갖가지 락욕(樂欲)의 탐애(貪愛)가 있다.
위와 같은 네 가지 소대치법(所對治法)은 그 차례대로 또한 네 가지 수습의 대치가 있다.
첫째는 무상(無常)에 대하여 고상(苦想)을 수습하는 것이고, 둘째는 뭇 고(苦)에 대하여 무아상(無我想)을 수습하는 것이며, 셋째는 음식에 대하여 염역상(厭逆想)을 수습하는 것이며, 넷째는 일체 세간에 대하여 불가락상(不可樂想)을 수습하는 것이다.
또한 멀리 떨어져 한가로운 곳[閑居]에서 방편(方便)으로 작의(作意)하는 위(位)에서는 간략하게 네 가지의 소치(所治)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사마타(奢摩他) 비발사나품(毘鉢舍那品)에 암매(闇昧)의 마음이 있는 것이며, 둘째는 여러 정(定)에 애미(愛味)를 따르는 마음이 있는 것이며, 셋째는 생(生)에 움직이는 상의 마음[動相]을 따르는 마음이 있는 것이며, 넷째는 뒷날을 미루어서 남은 시간을 고대(顧待)하여 불사(不死)의 심사[尋 : 尋思]를 따르는 마음이 있어서 불같이[熾然] 부지런하게 방편을 닦을 수가 없는 것이다.
위와 같은 네 가지 대치해야 할 법[所對治法]에 또한 네 가지 수습의 대치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첫 번째 것에서는 광명상(光明想)을 닦으며, 두 번째 것에서는 이욕상(離欲想)을 닦으며, 세 번째 것에서는 멸상(滅想)을 닦으며, 네 번째 것에서는 사상(死想)을 닦는 것이다. 또한 부정상(不淨想)에는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사택력(思擇力)에 포함되는 것이며, 둘째는 수습력(修習力)에 포함되는 것이다. 사택력(思擇力)에 포함되는 부정상(不淨想)에서 5법(法)을 소대치(所對治)라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 등을 5라고 하는가?
첫째는 모읍(母邑)을 가까이 하는 것[親近]이며,38) 둘째는 드러난 곳[顯處]39)에 있으며 실념(失念)하는 것이며, 셋째는 비밀한 곳[隱]에 머물며 방일(放逸)하는 것이며, 넷째는 관습력(串習力)40) 때문에 비밀한 곳[隱]과 드러난 곳[顯處]에 모두 있는 것이며, 다섯째는 비록 부지런한 방편[勤方便]으로 부정(不淨)41)을 수습할지라도 작의(作意)가 착란(錯亂)한 것이니, 부정(不淨)을 관(觀)하지 않고 정상(淨相)을 쫓아서 구르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것을 작의(作意)의 착란(錯亂)이라고 이름한다.
수습력(修習力)에 포함되는 부정상(不淨想)에서 7법(法)을 소대치(所對治)라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 등을 7이라고 하는가?
38) 자주 여인을 가까이 하는 것을 말한다.
39) 드러난 곳[顯處]이란 남들이 다 볼 수 있는 곳을 의미한다. 뒤의 비밀한 곳[隱處]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본소작사(本所作事)42)로 마음이 산란(散亂)해지는 성품[性]과 본소작사(本所作事)로 작용(作用)하려는 성품과 방편작의불선교(方便作意不善巧)43)의 성품[性]을 말하니, 공경(恭敬)하여 부지런히 청문(請問)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근문(根門)을 능히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조용한 곳[空閑]에 있더라도 오히려 갖가지 염오(染汚)의 심사(尋思)가 있어서 그 마음을 요란(擾亂)하며, 또한 음식에 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몸이 적절하지[調適] 못하며, 또한 심사(尋思)로 인하여 요란(擾亂)해지기 때문에 원리(遠離)하여 내심적정(內心寂靜)한 사마타정(奢摩他定)을 즐기지 못하며, 또한 그 몸이 적절하지[調適] 못하기 때문에 비발사나(毘鉢舍那)를 잘 닦을 수가 없어서 여실(如實)하게 제 법(法)을 관찰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모든 소대치법(所對治法)은 종합하여 설하면 1문(門)에 12가, 1문(門)에 14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곧 이와 같은 소대치법(所對治法)을 능히 대치하는 백법(白法)에 도로 그와 같은 것이 있다.
두 가지의 부정상(不淨想)을 수습하는 데에 많은 소작(所作)이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무상소(無常所)에서 고상(苦想)을 닦는 데에 간략하게 여섯 가지 소대치법(所對治法)이 있다.
무엇 등을 여섯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未生] 선법(善法)에서 맨 처음 응당 생겨날 때에는 난타(嬾墮)가 있는 것이다. 둘째는 이미 생겨난[已生] 선법(善法)에서 응당 머물러 잊지 않도록 수습하고 원만(圓滿)하여 배로 증광(增廣)하는 데에는 해태(懈怠)가 있게 되는 것이다. 셋째는 사장(師長)을 공경하고 가서 청문(請問)하는 데에는 항상 상속(相續)하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다. 넷째는 항상 선법(善法)을 닦고 항상 스승을 쫓아서 움직이는 데에는 깨끗한 믿음[淨信]을 멀리 하는 것[遠離]이 있는 것이다. 다섯째는 깨끗한 믿음[淨信]을 멀리 하기[遠離] 때문에 항상 닦을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여섯째는 안에서 방일(放逸)하고 방일 때문에 항상 여러 선법(善法)을 수습하는 데에는 항상 따라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여섯 가지의 소대치법(所對治法)에는 되돌려 6법(法)이 있어서 능히 대치한다[能對治]고 하며 많은 소작(所作)이 있다. 이것44)과 상위(相違)하여 그 상(相)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광명상(光明想)은 많은 광명(光明)을 연(緣)하는 것을 경계로 삼으니, 삼마희다지(三摩 多地)45)에서 이미 설한 것과 같다.
지금 여기에서의 의미는 법(法)의 광명(光明)을 연(緣)하는 것을 경계로 삼아서 광명상(光明想)을 닦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들은 바대로 하여 이미 구경(究竟)을 얻은 불망념법(不忘念法)을 법(法)의 광명(光明)이라고 하며, 그것과 함께 작용하는[俱行] 그 상응상(相應想)을 광명상(光明想)이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왜냐 하면 진실(眞實)에 능히 마음을 어둡게[闇昧] 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방편으로 지관품(止觀品)을 닦을 때에 제 법(法)에 대해서 망실(忘失)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과 상위(相違)한 것이 곧 광명(光明)인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제일의(第一義) 사소성(思所成)의 혜(慧)와 그리고 수소성(修所成)의 혜(慧)와 함께하는 광명상(光明想)에는 소대치(所對治)라고 하는 열 한 가지 법이 있다.
무엇을 열 한 가지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사소성(思所成)의 혜(慧)와 함께하는 광명상(光明想)에 4법(法)이 있고 수소성(修所成)의 혜(慧)와 함께하는 광명상(光明想)에 7법(法)이 있어서, 이와 같이 소치법[所治 : 所治法]에 도합 열 한 가지가 있다.
사소성(思所成)의 혜(慧)와 함께하는 광명상(光明想)에 4법(法)이 있다고 하는 것은 첫째 잘 관찰하지 않기 때문에, 잘 결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유하는 대상[所思惟]에 의심[疑]이 뒤따르는 것이며, 둘째는 밤[夜分]에 머물러 난타(嬾墮) 해태(懈怠)하기 때문에, 많은 수면(睡眠)을 수습하기 때문에 헛되이 시분(時分)을 헤아리는 것이며, 셋째는 낮[晝分]에 머물러 사악한 음식을 가까이 익혔기[習近] 때문에 몸이 조유(調柔)46)하지 못하여 그에 따라 진리[諦]
로써 제 법(法)을 관(觀)하지 못하는 것이며, 넷째는 재가(在家)와 출가(出家)가 함께 서로 뒤섞여 머물러[雜住] 그에 따라 들어야 하고 마쳐야[究竟] 할 법에 대해서 이치에 맞게[如理]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의심[疑]이 뒤따르기 때문에 능히 의심을 제거하는 것[遣]을 장애(障礙)하는 인연 때문에 이 네 가지 법은 사소성(思所成)의 혜(慧)와 함께하는 광명상(光明想)의 대치해야 할 것[所對治]이며, 지(智)이건 견(見)이건 간에 사소성(思所成)으로 하여금 청정(淸淨)을 얻지 못하도록 한다.
무엇 등을 수소성(修所成)의 혜(慧)와 함께하는 광명상(光明想)의 소치(所治)의 7법(法)이라고 하는 것인가?
첫째는 거상(擧相)에 의하여 수습하는 매우 용맹한 정진(精進)은 소대치법(所對治法)이다. 둘째는 지상(止相)에 의하여 수습하는 매우 열악한 정진(精進)은 소대치법(所對治法)이다. 셋째는 사상(捨相)에 의하여 수습하는 데에 선정의 맛[定味]에 탐착(耽著)하여 애착[愛]과 함께 작용하는 모든 희열(喜悅)은 (소대치법[所對治法])이다. 넷째는 반열반(般涅槃)에 대하여 마음으로 공포를 품는 것과 진에(瞋恚)와 함께하여 그 마음이 겁약(怯弱)하게 되는 것은 두 가지 소치법(所治法)이다. 다섯째는 즉 이와 같은 방편작의(方便作意)에 의해서 법(法)에 대해서 정근(精勤)하고 논의(論義) 결택(決擇)하여 입론[立]을 논파[破]하는 문(門)에 대해서 많은 언론(言論)을 일으키고 상속하여 버리지 않는 것은 (소대치법[所對治法])이니, 이것은 적정(寂靜)한 정사유(正思惟) 시(時)에 능히 장애가 된다. 여섯째는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에 대해서 정리(正理)와 맞지 않게 상호(相好)를 집취(執取)하여 바르게 심사(尋思)하지 않는 것은 (소대치법[所對治法])이니, 마음을 산란(散亂)하게끔 하는 것이다. 일곱째는 상응하지 않아야 할 사처[不應思處]에 대하여 억지로 그 마음을 섭수하여 제 법(法)을 사택(思擇)하는 것은 (소대치법[所對治法])이다.
위와 같은 일곱 가지가 이 수소성(修所成)의 혜(慧)와 함께하는 광명상(光明想)의 소대치법(所對治法)이다. 수소성(修所成)의 혜(慧)와 함께하는 광명상(光明想)을 극히 장애(障礙)할 수 있으며, 지(智)이건 견(見)이건 간에 수소성(修所成)을 청정하게 구르지 못하게끔 한다.
이 소치법(所治法)을 돌리면 열 한 가지가 있으며 이것과 상위(相違)한 능대치법(能對治法)은 능히 그것47)을 끊을 수 있다. 이것 역시 지(智)건 견(見)이건 간에 사(思) 수소성(修所成)을 청정하게 구르게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바른 방편[正方便]으로 제 상(想)을 닦는 사람에게는 능히 소치법(所治法)을 단멸(斷滅)하려는 욕구[欲]가 있으며, 또한 소치(所治)의 현행법(現行法)에 대하여 마음으로 염착(染著)하지 않고 속히 단멸(斷滅)하려고 하며, 또한 능히 능대치법(能對治法)에 자주 머물러서 모든 소대치법(所對治法)을 단멸(斷滅)한다.
위와 같은 3법(法)은 일체(一切)의 대치수(對治修)48)를 따라다니기 때문에 소작(所作)이 많다고 하며, 이와 같은 것을 대치를 수습하는 것[修習對治]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치(對治)를 수습하는 것이 곧 유가(瑜伽)를 수습(修習)하는 것인 줄 알아야만 한다.
이 제 5지[第五支]의 대치를 수습하는 것[修習對治]에 대한 자세한 성교(聖敎)의 이치[義]는 오직 위와 같은 10상(相)만이 있으며,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지나치거나 증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49) 세간(世間)의 모든 종류[一切種]의 청정(淸淨)이라고 하는가?
간략하게 세 가지가 있다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삼마지(三摩地)를 얻는 것50)이며, 둘째는 삼마지(三摩地)가 원만(圓滿)한 것51)이며, 셋째는 삼마지(三摩地)가 자재(自在)한 것52)이다.
이 가운데에 맨 처음의 삼마지(三摩地)를 얻는 데에 20가지의 소대치법(所對治法)이 있어서 능히 뛰어난 삼마지[勝三摩地]를 얻지 못하도록 한다.
47) 열 한 가지의 소치법(所治法)을 말한다.
48) 4수(修) 가운데의 하나로서 자세한 설명은 『구사론(俱舍論)』 제 26권을 참조하라.
49) 이하는 7지(支)의 상(相)을 해석하는 가운데 여섯 번째로 세간(世間)의 모든 종류[一切種]의 청정(淸淨)을 해석한다.
50) 비로소 초정려(初靜慮)의 미지정(未至定)을 얻는 것을 말한다.
51) 근본지(根本地)를 얻는 것을 말한다.
52) 모든 장애의 염오(染汚)를 여의고 특별한 통혜(通慧)를 얻고 청정(淸淨) 선백(鮮白)한 것을 말한다.
첫째는 끊음[斷]을 즐기지 않는 범행을 같이하는 자[同梵行者]를 도반[伴]으로 삼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둘째는 도반[伴]에게는 비록 덕(德)이 있지만 정을 닦는 방편[修定方便]을 선설(宣說)하는 스승[師]에게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니, 정을 닦는 방편을 전도(顚倒)하여 설하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스승[師]에게 덕(德)이 있을지라도 설해진 정을 닦는 방편[修定方便]에 대하여 그 듣는 자[能聽者]의 욕락(欲樂)이 리열[羸劣]하고 마음이 산란(散亂)하기 때문에 능히 받아들이지[領受] 못하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넷째는 그 듣는 자에게 비록 락욕(樂欲)이 있어서 귀를 모아서 들을지라도 암둔(闇鈍)하기 때문에, 각혜(覺慧)가 리열[羸劣 : 劣]하기 때문에 능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다섯째는 지(智)와 덕(德)이 있을지라도 애행(愛行)이 있어서 많은 이득[利養]과 공경(恭敬)을 구하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여섯째는 많은 걱정과 근심[憂愁]으로 기르기 어렵고 원만하기 어려워서 희족(喜足)을 알지 못하는 과실이 있는 것이다. 일곱째는 즉 이와 같은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여러 사무(事務)가 많은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여덟째는 비록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해태(懈怠) 난타(嬾墮)가 있기 때문에 가행(加行)을 버리는[棄捨] 과실이 있는 것이다. 아홉째는 비록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다른 것으로 인하여 갖가지 장애(障礙)를 일으키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열째는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춥고 더운 등의 괴로움[苦]에 대하여 능히 참아내지[堪忍] 못하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열 한째는 비록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만(慢) 에(恚)의 과실이 있기 때문에, 교회(敎誨)53)를 능히 받아들일 수 없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열 둘째는 비록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가르침[敎]에 대하여 전도(顚倒)하여 사유(思惟)하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열 셋째는 비록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받아들인 가르침[敎]에 대하여 망념(妄念)하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열 넷째는 비록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재가(在家)와 출가(出家)가 섞여서 머무르는[雜住]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열 다섯째는 비
록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5실(失)과 상응(相應)하는 와구(臥具)를 수용(受用)하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5실(失)과 상응하는 와구(臥具)란 성문지(聲聞地)에서 설하게 될 것과 같은 줄 알아야만 한다. 열 여섯째는 비록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멀리 떨어진 곳[遠離處]에서 제 근(根)을 수호(守護)하지 않기 때문에, 바르지 않은 심사[不正尋思]의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열 일곱째는 비록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식사[食]가 평등(平等)하지 않기 때문에 몸이 무겁게 가라앉아서[沈重] 감능(堪能)할 수 없게 되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열 여덟째는 비록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수면(睡眠)을 많이 하는 성품[性] 때문에 자주 수면(睡眠)의 수번뇌(隨煩惱)가 현행(現行)하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열 아홉째는 비록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앞서 사마타품(奢摩他品)을 수행(修行)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심(內心)의 적지(寂止) 원리(遠離)에 대하여 흔락(欣樂)하지 않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스무째는 비록 이러한 과실이 없을지라도 앞서 비발사나품(毘鉢舍那品)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증상혜법(增上慧法)의 비발사나(毘鉢舍那) 여실관(如實觀)에 대하여 흔락(欣樂)하지 않는 과실(過失)이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20가지의 법은 사마타(奢摩他) 비발사나품(毘鉢舍那品)에서 심일경성(心一境性)을 증득하는 데에 소대치(所對治)이다.
또한 이러한 20가지의 소대치법(所對治法)은 간략하게 4상(相) 때문에 생기(生起)하게 되는 것으로서 삼마지(三摩地)에 능히 장애가 될 수 있다.
무엇 등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삼마지(三摩地)의 방편(方便)에 대하여 선교(善巧)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모든 정을 닦는 방편[修定方便]에 대하여 전혀 가행(加行)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전도(顚倒)된 가행(加行) 때문이다. 넷째는 가행(加行)이 느슨하기[縵緩] 때문이다.
이 삼마지(三摩地)의 소대치법(所對治法)에 22가지의 백법(白法)의 대치(對治)가 있어서 이것과 상위(相違)하여 그 상(相)을 알아야만 한다. 이러한 소대치(所對治)를 능히 끊는 법(法)에 소작(所作)이 많기 때문에, 빨리 빨리 능히 그 마음을 바르게 머물게 하여 삼마지(三摩地)를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삼마지(三摩地)를 얻는 것은 곧 초정려(初靜慮)의 근분정(近分定)을 얻는 미지(未至)의 위(位)에 포함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삼마지(三摩地)를 얻는 데에 상위한 법(法)과 삼마지(三摩地)를 얻는 데에 수순(隨順)하는 법(法)의 자세한 성교(聖敎)의 이치[義]는 오직 이러한 20가지만이 있다.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지나치거나 증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러한 인연(因緣) 때문에 처음 세간(世間)의 모든 종류[一切種]의 청정(淸淨)에 의지하여 이 정법(正法)에 대하여 보특가라(補特伽羅)는 삼마지(三摩地)를 얻는다는 것을 이미 잘 선설(宣說)하였고 이미 잘 개시(開示)하였다.
다음에 이와 같이 이미 삼마지(三摩地)를 얻은 자는 이러한 소소(少小)한 수승(殊勝)한 정(定)에 대하여 희족(喜足)을 내지 않고, 수승한 삼마지(三摩地)의 원만(圓滿)에 대하여 다시 구원(求願)을 일으킨다.
또한 곧 그곳54)에 대해서 수승한 공덕(功德)을 본다.
또한 구원(求願)에 의하여 수승한 공덕(功德)을 보고서 그것을 구하려 하기 때문에 용맹정진(勇猛精進)하고 책려(策勵)하며 머무른다.
또한 그는 색(色)과 상응(相應)하는 애미(愛味)와 함께 작용하는[俱行] 번뇌(煩惱)의 일체(一切) 모두를 능히 영원히 끊지 않았기 때문에, '수승을 얻은 것이 아닌 것[非得勝]'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여러 선법(善法)에 대하여 모두를 부지런히 닦지는 않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수승해지는 것[他所勝]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광대(廣大)한 정천(淨天)의 생처(生處)에 침몰(沈沒)하는 일이 없다.
또한 그는 하열(下劣)한 신해(信解)의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자기[己]를 능히 능멸(陵蔑)55)하는 일이 없다.
또한 그는 이와 같은 마음이 침몰(沈沒)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또한 정
54) 수승한 삼마지(三摩地)의 원만(圓滿)을 가리킨다.
55)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에는 능멸(陵篾)로 되어 있으나, 의미상 능멸(陵蔑)의 오자(誤字)인 듯하여 수정하여 해석한다.
(定)의 소연(所緣)의 경계(境界)의 법(法)에 대하여 즉 먼저 얻은 지(止) 거(擧) 사상(捨相)을 끊임없이[無間] 은중(殷重)하게 방편(方便)을 닦기 때문에 수순(隨順)하며 구른다.
또한 그는 이와 같은 법상(法相)에 따라서 구르며 수입(數入) 수출(數出)하며, 빠르게 통혜(通慧)를 증득하고자 하기 때문에 정(定)의 원만(圓滿)에 의지하며, 정법(正法)을 듣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때때로 은근(慇懃)하게 청문(請問)한다.
또한 이와 같은 삼마지(三摩地)의 원만(圓滿)에 의지하기 때문에 정방편(正方便)으로 근본정(根本定)에 포함되는 내심(內心)의 삼마지(三摩地)에 대하여 멀리 떨어지려는[遠離] 애락(愛樂)을 증득(證得)하고 또한 법(法)의 비발사나(毘鉢舍那)를 증득한다.
이와 같이 치성[熾然]한 명정(明淨)의 모든 애락(愛樂)을 관찰하면 여기까지를 능히 근본정려(根本靜慮)를 증득하여 들어갔다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삼마지(三摩地)의 원만(圓滿)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이 삼마지(三摩地)의 원만(圓滿)에 대한 자세한 성교(聖敎)의 이치[義]는 오직 위와 같은 10상(相)만이 있을 뿐이며,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지나치거나 증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다음에 근본(根本)의 삼마지(三摩地)를 이미 증득하였기 때문에 비록 삼마지(三摩地)의 원만(圓滿)이라고 이름할지라도 그 마음은 오히려 삼마지(三摩地)로 인해 애미(愛味)를 내어서 만(慢) 견(見) 의(疑) 무명(無明) 등의 여러 수번뇌(隨煩惱)에 물들게 되기 때문에(日되면??) 아직은 원만(圓滿) 청정(淸淨) 선백(鮮白)이라고 이름하지는 않는다.
위와 같이 여러 수번뇌(隨煩惱)를 현행(現行)하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 마음을 단련하기 위해서, 마음을 조적하게[調] 하기 위해서 그는 '나는 응당 마음의 자재성(自在性)과 정(定)의 자재성(自在性)을 증득해야겠다. 4처소(處所)에서 22가지 상(相)으로써 마땅히 잘 관찰해야겠다'고 이와 같은 생각을 한다.
만약 일체의 고뇌(苦惱)를 끊기 위해서 이 3처(處)를 받는다면 응당 뭇 괴로움[苦]이 뒤따르는지를 바로 살펴야만 한다.
수염과 머리카락을 까까서 없애기 때문에, 세속[俗]의 형호(形好)56)를 버렸기 때문에, 괴색의 옷[壞色衣]57)을 입었기 때문에, 스스로 형색(形色)이 다른 사람인가를 관찰해야만 한다. 이와 같은 것을 하열(下劣)한 형상(形相)을 받겠다고 서원한 것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한다.
행(行) 주(住) 좌(坐) 와(臥) 어(語) 묵(默) 등 가운데에서 욕심을 따라 행하지 않고, 교만(憍慢)을 제압[制伏]하면서 다른 집에 나아가며, 자세하고 바르게 관찰하면서 유행(遊行)하고 걸식(乞食)한다. 이와 같은 것을 하열(下劣)한 위의(威儀)를 받겠다고 서원한 것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바르게 관찰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은 여러 가지 몸을 돕는 도구[供身具]를 저축하는 일이 없다. 이와 같은 것을 하열(下劣)한 뭇 도구(具)를 받겠다고 서원한 것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5상(相)에 의하는 것을 처음 처소[初處]에서의 관찰이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로 출가(出家)한 사람들이 받게 되는 시라(尸羅)는 간략하게 2사(事)를 버리는 데에서 현현(顯現)하게 되는 것이다. 첫째는 부모(父母) 처자(妻子) 노비(奴婢) 노복[僕使] 붕우(朋友) 권속(眷屬) 재물과 곡식[財穀] 값진 보물[珍寶] 등을 버리는 데에서 현현(顯現)하는 것이며, 둘째는 노래 춤 창기(倡伎) 웃으며
56) 세속[俗]의 형호(形好)란 좋다고 여기는 모습을 의미한다.
57) 인도에서는 수행승의 옷을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의 5정색(正色)을 피하고 섞인 색깔, 즉 중간색을 ?기 때문에 괴색(壞色) 또는 부정색(不正色)이라고 한다. 즉 화려한 색깔을 피하고 원색을 파괴한 탁한 색깔의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정근(精勤)하여 선품(善品)을 수습하는 자에게는 간략하게 네 가지 괴로움이 뒤따르게 된다. 말하자면 4사문과(沙門果)에서 뒤따라 증득한 것이 아직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악취고(惡趣苦)가 뒤따르는 것이다. 이 몸은 생(生) 로(老) 병(病) 사(死)의 법이기 때문에 안의 괴고(壞苦)가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랑하는 것은 이별하는 법[離別法] 때문에 애(愛)의 괴고(壞苦)가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업의 소작(所作)이기 때문에 일체의 고인(苦因)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는 위와 같은 네 가지 괴로움이 뒤따르게 되므로, 응당 7상(相)으로써 자세하고 바르게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7상(相)에 의한 것을 제 4처(處)에서의 관찰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는 위와 같은 4처(處)에 대하여 22상(相)으로써 바르게 관찰할 때 곧 다음과 같은 이치에 맞는 작의[如理作意]를 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이와 같은 현상[事]을 구하려 하기 때문에 하열(下劣)한 형상(形相)과 위의(威儀)와 그리고 몸을 돕는 도구[資身具]를 받겠다고 서원하는 것이며, 금계(禁戒)를 받겠다고 서원하는 것이며, 정근(精勤)을 받겠다고 서원하는 것이다. 항상 선법(善法)을 닦아서 '나는 지금 네 가지의 괴로움에서 어떤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또한 내가 이와 같이 스스로 책려(策勵)하여 3처(處)를 받겠다고 서원하였는 데도 여전히 네 가지 괴로움[四苦]이 항상 뒤따르게 되기 때문에 아직 해탈을 얻을 수 없고, 나는 이제 괴로움[苦]이 뒤따라서 아직 뛰어난 정[勝定]에서 자재(自在)를 획득할 수 없을지라도 중도에 그만두거나 혹은 다시 물러나지 않으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근(精勤)하여 이치에 맞게 작의[如理作意]해야 이에 출가(出家)의 상(想)과 사문(沙門)의 상(想)이라고 하는 것은 얻을 수 있다.
그는 원만(圓滿)에 대하여 많은 방편을 닦는 것을 의지(依止)로 삼아서 세간도(世間道)에 의하여 삼마지(三摩地)의 원만(圓滿)을 증득하기 때문에 번뇌의 끊음[煩惱斷]을 여전히 아직 증득하지 못했을지라도 다시 즐겨 끊음
[樂斷]에 의지하여 항상 부지런히 수습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잘 세간도(世間道)를 얻고서 수시로 삼마지(三摩地)의 자재(自在)를 얻기 위해서 즐겨 닦음[樂修]을 의지하여 끊임없이 굴리는 것이다.
또한 바른 믿음[正信]의 장자(長者) 거사(居士) 바라문(婆羅門) 등한테서 갖가지 이득[利養]과 공경(恭敬)을 획득하게 되지만 이 이득과 공경에 의지하여 탐착(耽著)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또한 다른 이득과 공경과 그 밖의 믿지 않는 바라문(婆羅門) 등이 눈앞과 등뒤에서 여러 불가의(不可意)의 신업(身業) 어업(語業)이 현행(現行)하는 일 가운데에서도 마음으로 분에(憤恚)를 일으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에게 손해를 끼치려는 마음도 없는 것이다. 또한 애(愛) 만(慢) 견(見) 무명(無明) 의(疑)의 갖가지 정(定) 가운데의 여러 수번뇌(隨煩惱)는 다시는 현행하지 않으며, 잘 염(念)을 지켜 머무르고, 또한 뛰어난 사마타(奢摩他)를 증득하고서 곧 이와 같은 사마타(奢摩他) 때문에 '자기가 일체의 소작(所作)을 이미 성취[辨]하였다'고 말하지 아니하며,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이 증득한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위와 같이 즐겨 끊고[樂斷] 즐겨 닦기[樂修] 때문에 마음에 탐에(貪恚)가 없고 정념(正念)이 현전(現前)하며, 증상만(增上慢)을 여의기 때문에 모든 의복(衣服)에 있어서 마땅함에 따라 획득하고서 곧바로 희족(喜足)을 내는 것이다. 의복에 있어서와 같이 그 밖의 음식(飮食) 와구(臥具) 등에 대하여 희족(喜足)을 내는 것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바르게 알면서[正了知] 수용(受用)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등의 여러 자생구(資生具)들은 단지 무너지지 않도록 몸을 다스리게끔 만 하고 잠깐동안 굶주림을 그치게 하면서 범행(梵行)을 섭수(攝受)하는 것이라고 하고, 자세히 설하면 음식에 대해서 그 양을 아는 것까지에 이른다.
그는 이와 같이 바르게 수행하기 때문에 삼마지(三摩地)에서 자재(自在)를 획득하고, 그것을 의지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맑고 희어서[淸白] 흠과 더러움이 없어서 수번뇌(隨煩惱)를 여의고, …… 부동(不動)을 획득하여 능히 모든 뛰어난 신통(神通)의 혜(慧)를 이끄는 데까지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삼마지(三摩地)의 자재(自在)라고 한다.
이러한 삼마지(三摩地)의 자재(自在)에 대한 자세한 이치[廣義]는 오직 설한 것과 같은 상(相)에만 있으며,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지나치거나 증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또한 먼저 설한 삼마지(三摩地)를 얻는 것과 중간에 설한 삼마지(三摩地)의 원만(圓滿)과 그리고 지금 설한 삼마지(三摩地)의 자재(自在)를 모두 무상세간(無上世間)의 모든 종류[一切種]의 청정(淸淨)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청정(淸淨)은 오직 정법(正法)에만 있고 외도(外道)들에게는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60) 출세간(出世間)의 모든 종류[一切種]의 청정(淸淨)이라고 하는가?
간략하게 다섯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 등을 다섯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성제현관(聖諦現觀)에 들어가는 것이며, 둘째는 성제현관(聖諦現觀)에 들어가고 나서 모든 장애를 여의는 것이며, 셋째는 성제현관(聖諦現觀)에 들어가고 나서 빠르게 통혜(通慧)를 증득하고자 하기 위해서 여러 환희사(歡喜事)를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하는 것이며, 넷째는 얻었던 도(道) 그대로를 수습하는 것61)이며, 다섯째는 극청정도(極淸淨道)와 과(果)의 공덕(功德)을 증득(證得)하는 것이다.
무엇을 성제(聖諦)의 현관(現觀)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어떤 여래(如來)의 여러 제자(弟子)들은 이미 세간(世間)의 청정(淸淨)을 잘 수습하고 나서 오랜 세월동안 묘오욕(妙五欲)에 의하여 그 마음을 적집(積集)하며, 음식으로 지탱시켰기 때문에 그 마음을 장양(長養)하며, 그 여러 욕[諸欲]에 대하여 애락(愛樂)을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여러 욕[諸欲]에 대해서 깊이 과환(過患)을 보고, 상승(上勝)의 경계에서는 적정의 덕(德)을 보는 것이다. 그는 희론계(戲論界)에 쉽게 안주(安住)할 수 있으니, 세간(世間)의 모든 종류[一切種]의 청정(淸淨)을 말한다.
60) 이하는 7지(支)의 상(相)을 해석하는 가운데 일곱번째로 출세간(出世間)의 모든 종류[一切種]의 청정(淸淨)을 해석한다.
61) 앞에서 얻은 환희(歡喜)의 경사(境事)를 사유하고 장애를 끊어 없애기 위하여 다시 수습하는 것이 앞과 같다는 것이다.
무희론계(無恚論界)에 어렵게 안주할 수 있으니, 출세간(出世間)의 모든 종류[一切種]의 청정(淸淨)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악(惡)을 싫어하는 데에 머무르지만 악(惡)을 싫어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정법(正法)에 머무르는 사람은 무희론열반계(無恚論涅槃界)에 마음으로 즐겨 안주하고 즐겨 증득하려고 한다. 사문과(沙門果)를 증득하려는 증상력(增上力)을 결여하기 때문에 자기[己]가 잡염(雜染)과 상응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내며, 자기[己]가 청정(淸淨)과 상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내며, 자기[己]가 잡염(雜染)과 상응하는 과환(過患)에 대해서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내며, 자기[己]가 청정(淸淨)과 상응하지 않는 과환(過患)에 대해서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내며, 자기[己]가 청정(淸淨)에 대하여 성취[成辦]하기 어려움을 보고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낸다.
이 가운데에 간략하게 세 가지의 잡염(雜染)과 상응(相應)하는 것이 있다. 첫째는 미처 조절하지도 못하고 미처 따르지도 못하고서 죽는 잡염(雜染)과 상응(相應)하는 것이며, 둘째는 죽고 나서 번뇌의 큰 구덩이에 떨어지게 될 잡염(雜染)과 상응(相應)하는 것이며, 셋째는 그 번뇌의 자재력(自在力)에 의하기 때문에 갖가지 악(惡) 불선업(不善業)을 현행(現行)시켜서 두려운 곳에 가게 되는 잡염(雜染)과 상응(相應)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自身)이 사문과(沙門果)의 증득을 결여하였고 그것을 결여하였기 때문에 세 가지 잡염(雜染)과 상응하는 것을 위와 같이 관찰하고 나서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낸다.
청정(淸淨)과 상응하지 않는 것에도 또한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제 번뇌(煩惱)가 끊어진 구경열반(究竟涅槃)을 두려움 없는 곳[無怖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둘째는 이것을 능히 증득하는 것이니, 증상심학(增上心學)에 의지한 선심(善心)의 삼마지(三摩地)를 말한다. 셋째는 이것을 능히 증득하는 것이니, 증상혜학(增上慧學)에 있어서 정견(正見)에 포함되는 미묘한 성도(聖道)를 말한다.
그는 자신과 이 세 가지 청정(淸淨)이 상응하지 않다는 것을 관찰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낸다.
잡염(雜染)과 상응하는 과환(過患)에 또한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노(老) 병(病) 사(死)의 괴로움이니, 근본(根本)의 태어남[生]이며, 둘째는 자성(自性)의 괴로움이니, 여유가 없는 곳[無瑕處]에 태어나는 것이며, 셋째는 일체처(一切處)에서 생기는 무상성(無常性)이다.
그는 자신이 이러한 세 가지의 잡염(雜染)과 상응하는 과환(過患)이 있다는 것을 관찰해야만 하고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낸다.
청정(淸淨)과 상응하지 않는 과환(過患)에 다섯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변지(邊地)에 태어나는 것을 아직 그치게[止息] 할 수 없는 것이며, 둘째는 악도(惡道)에 태어나는 것을 아직 그치게 할 수 없는 것이며, 셋째는 재가중(在家衆)의 여러 무간업(無間業)을 아직 막을 수 없는 것이며, 넷째는 출가중(出家衆)의 무량(無量)한 견취(見趣)에 대해서 상응하지 않는 것이 아닌 것이며, 다섯째는 비록 세간도(世間道)에 의하여 정(定)이건 생(生)이건 간에 유정(有頂)에까지 이를지라도 초(初) 후제(後際)가 없는 데에 생사유전(生死流轉)하여 아직 변제(邊際)62)를 짓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이러한 다섯 가지 청정(淸淨)과 상응하지 못하는 과환(過患)이 있다는 것을 관찰해야만 하고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낸다.
자신의 청정(淸淨)에 대하여 성취[成辦]하기 어렵다고 보는 데에도 다섯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만약 버리면[捨] 되지 않으니, 능히 스스로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 밖의 일[所餘事]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청하지 않으니, 능히 성취하는 것[成辦]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결정코 마땅히 지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서 아직 청정하지 못하여 반드시 뭇 괴로움[苦]에서 능히 해탈(解脫)하지만 길상(吉祥)의 성품[性]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넷째는 악업(惡業)에 대해서 현재 짓지 않는 것도 아니면서 곧 그것을 '자기는 청정(淸淨)을 지었다'고 하고 곧 '이미 현견법(現見法)에서 영원히 치성[熾燃]을 여의는 것을 얻었다고 하리라'고 하면서 대치도(對治道)가 없는 것이다.
먼저 조작(造作)한 악(惡) 불선업(不善業)은 반드시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저 청정(淸淨)한 학(學) 무학도(無學道)는 증득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청정을 관(觀)하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상(相)은 성취[成辦]하기 어렵기 때문에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낸다.
또한 다시 견고(堅固)한 정진(精進)을 일으키니, 증득(證得)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또한 잡염(雜染) 청정(淸淨)의 상응(相應) 불상응(不相應)을 관찰하여 보기[觀見] 때문에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일으킨다. 또한 잡염(雜染) 청정(淸淨)의 상응(相應) 불상응(不相應)의 과환(過患)을 관찰하여 보기[觀見] 때문에 마음으로 포외(怖畏)를 일으킨다. 또한 청정(淸淨)의 증득(證得)과 잡염(雜染)의 단멸(斷滅) 가운데에 난타(嬾惰)와 해태(懈怠)가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 곧바로 차지(遮止)한다. 또한 그 상(相)을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일으키며, 곧 그 상(相)에 소작(所作)이 많기 때문에 마음으로 극염환(極厭患)을 일으킨다.
염환(厭患) 극염환(極厭患)과 같이, 포외(怖畏) 극포외(極怖畏)와 차지(遮止) 극차지(極遮止)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위와 같이 그는 염환과 함께 작용하는[俱行] 상(想)에 의하여 5처소(處所)63)에서 20가지의 상(相)64)으로써 작의(作意) 사유(思惟)하기 때문에, 대치를 잘 닦았다[善修治]고 이름하는 것이다.
다시 5인(因)이 있어서 20가지의 상(相)을 섭수(攝受)하게 된다.65)
63) 자기[己]가 잡염(雜染)과 상응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내며, 자기[己]가 청정(淸淨)과 상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내며, 자기[己]가 잡염(雜染)과 상응하는 과환(過患)에 대해서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내며, 자기[己]가 청정(淸淨)과 상응하지 않는 과환(過患)에 대해서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내며, 자기[己]가 청정(淸淨)에 대하여 성취[成辦]하기 어려움을 보고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내는 것을 말한다.
64) 5처소(處所) 가운데에 앞의 3처소(處所)에 각각 3상(相)이 있고, 뒤의 2처소에 각각 5상(相)이 있어서 19상(相)이 되며, 여기에다 견고한 정진(精進)을 일으키는 1상(相)을 합하여 총 20상(相)이 되는 것이다.
65) 첫 번째의 인(因)에 6상(相)이 있으며, 두 번째의 인(因)에 4상(相)이 있으며, 세 번째의 인(因)에 2상(相)이 있으며, 네 번째의 인(因)에 5상(相)이 있으며, 다섯 번째의 인(因)에 3상(相)이 있다.
의(作意)를 따라 들어가는[隨入] 데에 있어서68) 미세하게 현행(現行)하고 유간(有間) 무간(無間)으로 따라 구르는[隨轉] 아만(我慢)69)과 함게 작용하는 심상(心相)은 능히 현관작의(現觀作意)의 정통달(正通達)을 장애하기 때문이다. 이미 통달하고 나서는 작의(作意)와 함께 작용하는 마음이 자유자재[任運]로 구르는 가운데에 능히 잘 버리고 무간멸(無間滅)시킨다.70) 무간멸심(無間滅心)에 의지하여 새롭게 일어나게 되는 작의(作意)에 의하여 무상(無常) 등의 행(行)을 여실히 사유한다. 이러한 작의(作意)를 수습하고 자주 수습하기 때문에 소연(所緣) 능연(能緣)의 평등(平等) 불평등(不平等)의 지(智)를 일으킨다. 그는 이 때에 능히 현관(現觀)을 장애하는 아만(我慢)과 난심(亂心)을 곧바로 영원히 단멸(斷滅)하고 심일경성(心一境性)을 증득한다. 곧바로 '나는 이미 심일경성(心一境性)을 증득하여 여실하게 알았다'고 스스로 사유(思惟)하니, 이것을 통달작의(通達作意)에 의하기 때문에 성제현관[諦現觀]에 들어간다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71) 만약 먼저 세간도(世間道)로써 삼마지(三摩地)를 얻고 또한 원만(圓滿)을 얻고 또한 자재(自在)를 얻었다면 그는 어떤 경우에는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간 상(相)에 대하여 '이것에 의하여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갔다'고 하며, 어떤 경우에는 삼마지(三摩地)에 머무르는 상(相)에 대해서 '이것에 의하여 삼마지(三摩地)에 머무른다'고 하며, 어떤 경우에는 삼마지(三摩地)에서 나오는 상(相)에 대해서 '이것에 의하여 삼마지(三摩地)를 나온다'고 한다.
이 제 상(相)에 대하여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하여 그 마음을 안주(安住)하여 성제현관[諦現觀]에 들어간다.
만약 삼마지(三摩地)를 얻었으나 아직 원만(圓滿)하지 못하고 또한 자재(自在)하지 않으면 그는 어떤 경우에는 지상(止相)을 사유(思惟)하고, 어떤
68) 이하는 20가지의 상(相)을 해석한다. 먼저 첫 번째의 인(因)의 6상(相)을 분별한다.
69) 유간(有間)에 수전(隨轉)하는 아만(我慢)은 제 6식(識)과 구행(俱行)하는 아만(我慢)을 말하고, 무간(無間)에 수전(隨轉)하는 아만(我慢)은 제 7식(識)과 구행(俱行)하는 아만(我慢)을 말한다.
첫째는 부정심사(不正尋思)의 소작(所作)으로 요란(擾亂)하여, 마음이 안정(安靜)하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는 알아야 할 대상[所知事]에 대하여 그 마음이 전도(顚倒)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장애를 대치(對治)하고자 하기 때문에 두 가지 소연경(所緣境)에 그 마음을 안주(安住)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말하자면 첫 번째 장애를 대치(對治)하기 위해서 아나파나염(阿那波那念)73)을 수습하고 두 번째 장애(障礙)를 대치하기 위해서 여러 염주(念住)들을 수습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경계에 들어가는 문(門)에 의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안주(安住)하는 것인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74) 묘오욕(妙五欲)에 대하여 즐겨 가까이 익히는[習近] 자는 성스러운 법과 비나야(毘奈耶)에 대하여 소행처(所行處)로 삼지 않으며, 또한 그때 그때에 따라서 얻게 되는[隨宜所得] 의복 음식 여러 앉고 눕는 자구[諸坐臥具]에 대해서 곧바로 희족(喜足)을 일으키고 획득된 이득[利養]과 공경(恭敬)에 따라가며 그 마음을 굴복[制伏]시킨다.
묘오욕(妙五欲)에 의하여 얻게 되는 이득[利養]과 공경(恭敬)에 의하여 마음이 곧바로 견고하게 머물지 않으며, 이러한 인연 때문에 일체(一切)의 소행처(所行處)가 아닌 것을 멀리 여의는 것이다.
72) 이하는 제 3의 인(因)에 의한 2상(相)을 분별하는 것이다.
73) 아나파나(阿那波那)는 n p na(; na-ap na)의 음사어로서 na(;阿那)는 입식(入息), ap na(;波那)는 출식(出息)으로 번역된다. 아나파나념(阿那波那念)이란 수식관(數息觀)이다.
이미 원리(遠離)하고 나서 여러 염주(念住)에 의지하여 즐겨 끊고[樂斷] 즐겨 닦는다[樂修].
밤낮으로 때때로 자타(自他)의 모든 쇠(衰)하고 성(盛)하는 등의 현상[事]을 관찰하여 마음으로 염환(厭患)을 낸다.
또한 다시 불수념(佛隨念)75) 등을 수습하여 마음을 청정하게끔 한다.
또한 다시 여러 성종(聖種) 가운데에 안주(安住)한다.
이와 같은 것을 자량(資糧)에 의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안주하며, 이는 최승(最勝)의 자량도(資糧道)에 의지하여 설하는 것인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76) 그에게는 위와 같이 자량(資糧)에 머무르고 나서는 작의(作意)와 상응하는 가행[相應加行]을 수습하고자 하기 때문에 두 가지의 가행방편(加行方便)이 있다.
무엇을 두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계경(契經)과 아비달마(阿毘達磨)를 독송(讀誦)하고 수지(受持)하며 바른 작의(作意)를 수습하고 온(蘊) 등의 현상[事]에 대하여 극히[極] 선교(善巧)하게끔 하는 것이다. 둘째는 다른 스승의 가르침에 의지하는 것이다. 소위 대사(大師) 오파타야((波柁耶)77) 아차리야(阿遮利耶)78)에게 시시때때로 교수(敎授)받고 교계(敎誡)받으며 섭수(攝受)받아서 의지하고, 또한 정가행(正加行)을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하는 것이다. 이를 제 3의 방편(方便)이라고 이름하며 이러한 바른 가행(加行)의 작의(作意)와 사유(思惟)를 정가행(正加行)이라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여기에서의 이치[義]는 시라(尸羅)가 청정(淸淨)한 모든 작의(作意)를 정가행(正加行)의 작의(作意) 사유(思惟)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시라(尸羅)의 청정(淸淨)을 사유(思惟)하기 때문에 후회[悔]의 시달림[惱]이 없고, 후회의 시달림이 없기 때문에 곧바로 환희(歡喜)를 일으키며 …… [廣說] 내지 마음이 정정(正定)에
75) 염불(念佛)을 의미한다.
76) 이하는 제 5의 인(因)에 의한 3상(相)을 분별하는 것이다.
77) 범어 Up dhy ya의 음사어로서 친교사(親敎師)라고 번역된다.
78) 범어 c rya의 음사어로서 아사리(阿闍梨)로도 음사된다. 이것은 궤범(軌範) 또는 교수(敎授)라고 번역된다.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정가행(正加行)의 작의(作意) 사유(思惟)를 선설(宣說)하여 마음이 방편에 머문다[心住方便]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편(方便)에 의하기 때문에 마음이 속히 안주하며 그는 이 때에 이 5인(因)의 20가지 상(相)에 의하여 그 마음을 섭지(攝持)한다.
애욕[愛]이 다한 적멸열반계(寂滅涅槃界)에 잘 안주하게끔 하고는 다시는 퇴전(退轉)함이 없게 하며, 마음에 놀랍고 두려움[驚怖]이 없게 한다. '우리들은 지금 어느 곳에 있는 것인가?'라고 한다. 이와 같이 마음이 안주(安住)할 때에 마땅히 이미 진리[諦]의 현관(現觀)에 들어갔으며, 이와 같은 것을 입성제현관(入聖諦現觀)이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이 성제현관(聖諦現觀)의 이치[義]에 대하여 자세히 설한 것은, 즉 마음의 염환상(厭患相)에 20가지가 있고, 마음의 안주상(安住相)에 또한 20가지가 있으며,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지나치거나 증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성제현관(聖諦現觀)에 들어가고 나서 장애들을 여읜다고 하는 것인가?
이 장애에는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행처(行處)의 장애(障礙)이며, 둘째는 주처(住處)의 장애이다.
행처(行處)의 장애란 성제자(聖弟子)가 어떤 경우에는 대중[衆]과 동거(同居)하여 그에 따라서 승가[僧]의 소작사(所作事)를 일으켜서 선품(善品)을 버리고 자주 대중과 모이며, 어떤 경우에는 다시 항상 걸식법(乞食法)에 안주하여 음식을 애중(愛重)히 여기며, 어떤 경우에는 두 가지 것을 겸하여 좋아하고[好樂] 의발(衣鉢) 등의 도구[事]를 영위(營爲)하며, 어떤 경우에는 경전(經典)을 독송(讀誦)하면서 담화(談話)를 좋아하며[好樂], 어떤 경우에는 밤에 수면(睡眠)을 락착(樂著)하며, 어떤 경우에는 낮에 왕적(王賊) 등의 잡염(雜染)의 언론(言論)을 락착(樂著)하며, 어떤 경우에는 친척(親戚) 교유(交遊) 담학(談謔) 등이 있는 곳에 머물러서 이러한 것에 대하여 원리(遠離)를 좋아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오랜 세월 동안 즐겨 익히고[樂習] 그것과 함께 있는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혹은 다시 즐겨 두 번째 것[第二]과 함께 머무는[共住] 이와 같은 것들을 행처(行處)의 장애라고 이름
주처(住處)의 장애란 공한처[空閑]에 있으면서 사마타(奢摩他) 비발사나(毘鉢舍那)를 닦는 것을 모두 머무름[住]이라고 이름하는데, 사마타(奢摩他) 비발사나(毘鉢舍那)에 의지하여도 다시 네 가지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비발사나지(毘鉢舍那支)에 수순(隨順)하지 않는 성품[性]이며, 둘째는 사마타지(奢摩他支)에 수순(隨順)하지 않는 성품[性]이며, 셋째는 그 두 가지 품(品)의 염(念)에 수순(隨順)하지 않는 성품[性]이며, 넷째는 처소(處所)에 수순(隨順)하지 않는 성품[性]이다.
또는 자기[己]가 총명(聰明)하다고 말하고서 고거(高擧)79)를 일으켜서 다른 사람을 쫓아서 순관(順觀)의 정법(正法)을 듣지 않으니, 이를 비발사나지(毘鉢舍那支)에 수순(隨順)하지 않는 성품[性]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는 신(身) 어(語) 의행(意行)을 안정(安靜)시키지 않아서 조급히 움직이고 가벼이 들떠있으며 수시로 시라(尸羅)를 범하여 근심[憂]과 후회[悔] 등을 일으키고 내지 마음이 잘 안주(安住)할 수 없는 것이니, 이를 사마타지(奢摩他支)에 수순(隨順)하지 않는 성품[性]이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또는 망념(忘念)의 증상력(增上力)이 있기 때문에 혼침[沈]과 도거[掉] 등의 여러 수번뇌(隨煩惱)에 마음이 차호(遮 )80)되지 않으니, 이를 그 두 가지 품(品)의 염(念)에 수순(隨順)하지 않는 성품[性]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는 5실(失)과 상응하는 여러 앉고 눕는 자구[坐臥具]에 가까이 익히는 것[習近]이 있으니, 이를 처소(處所)에 수순(隨順)하지 않는 성품[性]이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혹은 낮에는 방일[諠逸]하는 일이 많고, 밤에는 모기와 등에 등의 뭇 괴로움에 접촉되는 일이 많으며, 또한 두려움이 많고 재앙들이 많으며 뭇 도구들은 모자라서 애락(愛樂)할 수 없으며, 악우(惡友)들에게 섭지(攝持)되어 선우(善友)들이 없으니, 이와 같은 등을 주처(住處)의 장애라고 한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자주 여러 정(定)들을 즐기는 것이며, 둘째는 자주 여러 사택(思擇)을 하는 것이다.
자주 여러 정(定)들을 즐기는 것에는 간략하게 여섯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말하자면 만약 이미 삼마지(三摩地)를 얻었으나 아직 원만(圓滿)을 얻지도 못하고 자재(自在)를 얻지도 못했다면 그는 지(止) 거(擧) 사(捨)의 세 가지 선교(善巧)를 수습해야만 한다. 이것에 의하여 자주 여러 정(定)의 즐거움이 발생하는 것이다. 만약 삼마지(三摩地)에서 이미 원만(圓滿)을 얻고 또한 자재(自在)를 얻었다면 그는 정에 들어가고[入] 머무르며[住] 나오는[出] 세 가지 선교(善巧)를 수습해야만 한다. 이것에 의하여 자주 여러 정(定)의 즐거움이 발생하는 것이다.
무엇을 자주 여러 사택(思擇)을 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승선(勝善)의 혜(慧)를 사택(思擇)이라고 이름하며, 이 혜(慧)에 의하기 때문에 밤낮으로 자기(自己)의 모든 선법(善法)의 증장(增長)을 여실(如實)하게 알며[了知], 불선법(不善法)의 증장을 여실하게 알며, 선법(善法)의 쇠퇴(衰退)를 여실하게 알며, 불선법(不善法)의 쇠퇴를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또한 그는 밤낮의 경우와 같이, 행하거나 머물거나 간에 의복 음식과 사는 데의 인연[命緣]을 가까이 익힌다. 가까이 익히기 때문에 불선법(不善法)의 증장(增長)과 선법(善法)의 쇠퇴(衰退)와, 혹은 선법(善法)의 증장과 불선법(不善法)의 쇠퇴를 모두 여실히 아는 것이다.
곧 이러한 사택(思擇)을 의지로 삼기 때문에 생겨나는 모든 불선법(不善法)에 대하여 방편(方便)의 도리(道理)를 굳게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내쫓고[驅擯] 원리(遠離)하는 것이다.
제 선법(善法)에 대한 이와 같은 2처(處)의 열 가지 선교(善巧)81)를 능히 부지런히 수습(修習)하여서 2처소(處所)의 열 한 가지 장애82)를 능히 단멸
81) 자주 여러 정(定)을 즐기는 것의 여섯 가지 선교(善巧)와 자주 여러 사택(思擇)을 하는 것의 네 가지 선교(善巧)를 합해서 2처(處)의 열 가지 선교(善巧)라고 한다.
82) 행처(行處)의 6처(處)와 주처(住處)의 5처(處)를 합해서 2처소(處所)의 열 한 가지 장애라고 한다.
(斷滅)시켜서 생겨나는 대로 곧바로 원리(遠離)하니, 이와 같은 것을 장애를 원리하는 것[遠離障礙]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이 장애를 원리하는 이치[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설한 바 상(相)과 같으며,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지나치거나 증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성제현관(聖諦現觀)에 들어가고 나서 빠르게 통혜(通慧)를 증득하고자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환희사(歡喜事)를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한다고 하는 것인가?
성제(聖諦)를 이미 보고 증정(證淨)을 이미 얻은 성제자(聖弟子)는 곧 증정(證淨)83)으로서 의지를 삼기 때문에 불(佛) 법(法) 승(僧)의 뛰어난 공덕전(功德田)에 대하여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하여 환희(歡喜)를 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스스로 증상(增上)의 생사(生事)와 결정(決定)의 승사(勝事)에 의지하여, 즉 자신의 재보(財寶)와 증득한 성사(盛事)를 작의하고 사유하여 환희를 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질투가 없는 것[無嫉]에 의지하여 자신에 있어서와 같이 다른 이에게도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또한 지은(知恩)에 의지해서는 '은혜로운 사람이다'고 말하며, 대사(大師)의 은혜를 기억하여 작의하고 사유하여서 환희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한 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뭇 괴로움[苦]과 고인(苦因)을 원리(遠離)하고 뭇 즐거움[樂]과 락인(樂因)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와 같이 수도(修道)에 수순(隨順)하는 환희사(歡喜事)를 사유하기 때문에 빠르게 통혜(通慧)를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수도(修道)를 수순하는 환희사(歡喜事)를 사유하는 이러한 이치[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설한 바 상(相)과 같으며,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지나치거나 증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얻었던 도(道) 그대로를 수습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그는 이와 같이 생겨난 광대(廣大)하고 무죄(無罪)의 환희(歡喜)를 그 마
83) 범어 Pras da의 의역(意譯)으로서 신앙의 결과로서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구사론(俱舍論)』 제 4권을 참조하라.
음에 끌어대어 구경(究竟)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현법(現法)에서 마음으로 극히 사모(思慕)하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마음으로 사모(思慕)를 일으키기 때문에 출리(出離)의 락욕(樂欲)이 자주 자주 현행(現行)하여 '나는 어떻게 구족(具足)하게 이와 같은 성처(聖處)에 능히 머물러야 만이 아라한(阿羅漢)이 구족(具足)하게 머무르는 것과 같아지겠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욕락(欲樂)을 일으키고 나서 부지런한 정진(精進)을 일으켜서 끊임없이 상위(常委)로 37보리분법(菩提分法)에 대한 방편(方便)을 부지런히 닦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와 같이 부지런히 정진하기 때문에 재가(在家)와 출가(出家)의 대중에 서로 섞여 머무르지 않고, 맨 마지막[邊際]의 여러 앉고 눕는 자구[諸坐臥具]를 가까이 익히며 마음으로 원리(遠離)를 좋아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와 같은 욕락(欲樂)을 일으키고 부지런한 정근(精勤)을 일으켜서 원리(遠離)를 좋아하고 나서는 희족(喜足)을 일으키지 않고, 적은 부분의 수승한 소증(所證)에 대해서 마음으로 희족(喜足)하는 일이 없으며, 모든 선법(善法)이 위로 구르며 뛰어나게 구르고 미묘하게 구르는 곳을 희구(希求)하여 머무르는 것이다.
이 네 가지 법에 의지하여 수도(修道)를 섭수(攝受)하고 극히 잘 섭수(攝受)하는 것이니, 곧 이 네 가지는 수도(修道)에 의지가 된다. 먼저 설한 여러 환희사(歡喜事)로부터 생기게 되는 환희와 같이, 그는 이 때에 원만하고 가장 지극한 손감[圓滿最極損減]의 방편도리(方便道理)84)를 수득(修得)85)하는 것이다.
번뇌가 끊어지기 때문에,86) 수승한 소증법(所證法)을 획득하기 때문에, 또한 희열원만(喜悅圓滿)을 수득(修得)하는 것이다.
또한 수도단(修道斷)의 혹품(惑品)의 추중(麤重)을 이미 원리(遠離)하였기
84) 환희에서 닦아 얻고 원만히 하여 욕계를 떠나는 것을 말한다.
85) 수행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태어나면서 얻는 생득(生得)과 대비된다.
86)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번뇌를 끊는 것이다. 그리하여 승도희열원만(勝道喜悅圓滿)을 얻는다.
경안(輕安) 때문에 몸과 마음의 청량(淸凉)을 일으켜서 극히 섭수(攝受)하게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두 가지 원만(圓滿)을 수득(修得)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유학(有學)이 금강유정(金剛喩定)의 구경(究竟)에 이를 때까지 원만(圓滿)을 수득(修得)하니, 이를 얻었던 도(道) 그대로를 수습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이 얻었던 도(道) 그대로를 수습하는 이치[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네 가지 법을 의지로 삼기 때문에 능히 다섯 가지 법을 원만하도록 수습하는 것이며,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지나치거나 증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극청정(極淸淨)의 도과(道果)의 공덕(功德)을 증득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세 가지 위(位), 즉 락위(樂位) 고위(苦位) 불고불락위(不苦不樂位)에 있어서를 말한다. 제 번뇌(煩惱) 때문에 수면(隨眠)을 받아서 대부분 나타나게 되는[所顯] 두 가지 종류의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다. 첫째는 이생(異生)이며, 둘째는 유학(有學)이다.
또한 두 가지가 있어서 능히 잡염품(雜染品)을 일으킨다. 첫째는 취(取)의 잡염품(雜染品)87)이며, 둘째는 행(行)의 잡염품(雜染品)88)이다. 즉 이러한 두 가지 잡염품(雜染品)을 끊기 위해서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에 들어갈 때, 능히 장애가 되는 모든 번뇌이다. 이러한 제 번뇌들은 능히 수면(隨眠)이 되어서 깊고 멀리 마음으로 들어가며, 또한 능히 갖가지 괴로움들을 발생시킨다.
만약 이것에 대해서 능히 남김없이 영원히 끊으면 극청정[極淨]의 도과(道果)를 증득하였다고 이름한다. 또한 열 가지 무학지(無學地)에 포함되는 다섯 가지 무학(無學)의 온(蘊)89)이 있으니, 소위 계온(戒蘊) 정온(定蘊) 혜온
만약 위와 같은 열 가지 과실(過失)에 대하여 영원히 상응하지 않고 오직 최후신(最後身)에 의해서만 지니게[任持] 된다면, 필경 제 2의 나머지 몸[餘身]98)은 일어나지 않으며, 최고의 적정(寂靜)한 열반계(涅槃界)에서 끝내[究竟] 안주(安住)하며, 일체 유정(有情)으로부터 위로 제일유(第一有)99)에 태어나는 자에 이르기까지 그 일체의 모든 유정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것[最勝]을 얻는다. 그러므로 성인이 머무르는 곳[聖所住]에 머무른다고 하는 것이다. 능히 열 가지 과실(過失)을 원리(遠離)하고 또한 능히 성인이 머무르는 곳[聖所住處]에 안주하기 때문에 공덕(功德)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의 과(果)나 혹은 극청정도[極淨道]나 혹은 그것의 공덕(功德)의 이와 같은 일체를 총략(總略)하여 극청정(極淸淨)의 도과(道果)의 공덕(功德)을 증득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극청정(極淸淨)의 도과(道果)의 공덕(功德)을 증득하는 이치[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설한 바 상(相)과 같으며,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지나치거나 증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와 같이 최상(最上)의 무학(無學)의 여러 성법(聖法)을 얻은 자라면 이와 같은 성법(聖法)과 상응하는 마음은 묘오욕(妙五欲)에 대하여 극히 싫어하고[厭背] 이숙(異熟)이 없기 때문에 뒤에 다시 잇지 않는다. 만약 세간심(世間心)이 비록 이미 끊어진 것을 되살려서 여전히 현행(現行)을 얻을지라도 그는 후시(後時)에 있어서 자유자재로[任運] 멸(滅)한다.
또한 번뇌도(煩惱道)의 이후에 업도(業道)가 있어서도 현법(現法)에서 이미 영원히 단절(斷絶)하며, 그것을 단절하였기 때문에 미래의 고도(苦道)는 또 다시 구르지 않는다. 인과(因果)가 영원히 멸진(滅盡)했기 때문에 곧 고변(苦邊)이라고 이름하며, 다시 남는 것[所餘]도 없고 위[上]도 없으며, 뛰어난 것[勝]도 없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 성제현관(聖諦現觀)에 들어가는 것과 장애(障礙)를 여의는 것과 빠르게 통혜(通慧)를 증득하기 위해서 여러 환희사(歡喜事)를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하는 것과 얻었던 그대로의 도(道)를 수습하는 것과 극청정(極淸淨)의 도과(道果)의 공덕(功德)을 증득하는 이와 같은 것을 출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