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에서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이공계 기피현상은 이제 국가적 근심거리가 돼버렸다.
덩달아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전기공학도 존립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사회적 기술경시풍조와 맞물리며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전기공학 기피현상의 실태와 원인, 해결책 등을 짚어봤다.
◆인력대란 우려
산학협력과 연구개발, 기술인력양성 등은 우리나라 산업.교육정책의 일관된 목표다. 전기분야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현실은 그러나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지난달 마감된 2003학년도 대입 1학기 수시모집 접수결과는 인문계와 이공계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뚜렷이 보여줬다. 의대와 치대, 약대 등 일부 인기학과를 제외하고 이공계는 미달사태를 빚는 등 인문계에 비해 지원율이 저조했다.
대한전기학회(회장 곽희로)가 올 4월 전국의 52개 대학 전기공학과를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학부제 시행전인 90년대 중반 전기공학과의 입학정원은 한 때 4천명에 육박했으나 학부제가 정착단계에 접어든 2001년 현재 1천890명으로 줄어들어 무려 47.3%나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기공학은 특히 공학내에서도 타 분야에 밀려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특히 학부제 전환이 대세를 이룬 90년대 말 이후에는 전기공학과를 외면하는 학생들이 더욱 늘어 건국대와 명지대 등 일부 대학에서는 학부제를 다시 학과제로 전환하기도 했다.
대다수 대학들은 대학원 진학률이 높은 서울대 등 일부 특정대학에서만 학부제가 유용할 뿐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산업자원부등 관계당국은 전기인력의 대란우려와 관련, 전력산업기반조성사업에서 인력양성을 지원키로 결정했으나 ‘수박 겉핥기’식 대책이라는 비난에 직면해 있다.
전기관련 교수들은 전국 52개 대학과 전문대, 공업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전력산업기반기금의 약 0.4%에 불과한 총 35억원 정도의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발상은 정보통신인력양성책과 비교할 때 너무나 빈약한 지원일 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전기공학의 외면이 고스란히 전력분야의 ‘인력대란’을 몰고 올 것이라는 점이다.
신중린 건국대교수가 5월 발표한 ‘전력시장을 대비한 인력자원의 관리 및 양성방안’에 따르면 발전경쟁체제인 현 단계에서도 전력분야 전문인력이 최소 730명에서 최대 1천140명 부족한 실정이다.
신교수는 도매경쟁체제가 본격화되면 배전과 대규모 수용가 등에서 인력수요가 급증해 2천680~5천160명의 전문가를 새로 고용해야 하며 전력산업구조개편이 완성단계에 이르는 소매경쟁체제에서는 8천600명~1만5천510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사회구조적 문제
이공계 기피현상의 심화와 전기공학 침체에 관한 원인분석 및 해결책은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우선 이공계 대학을 나온 졸업생이 지금보다 취업이 잘되고 사회에서 대우받는다면 전기공학의 부활도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시각이 많다. 의사나 변호사가 되기 위해 인재가 몰리는 것은 직업이 주는 매력 때문이라는 얘기다.
김호용 전기연구원 전력연구단장은 “노력에 대한 대가의 합당성이 젊은이들의 학문 선호도를 좌우하고 있는데 이공계는 상대적으로 보수체계가 낮고 권력과 명예도 크지 않다”며 “이같은 사회구조적 문제가 고교평준화로 인한 학력저하와 맞물리며 청소년들의 이공계 기피가 점점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단장은 “이를 해결하려면 무엇보다 우수한 인력에게 강력한 인센티브를 줄 수 있는 이공계 우대정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일선 과학기술자들도 이공계 진학기피의 가장 큰 원인으로 ‘과학기술자에 대한 낮은 경제적 대우’를 꼽고 있다.
대덕밸리 과학기술자 모임인 (사)대덕클럽이 과학기술자 208명을 대상으로 학생들의 이공계 진학기피 원인을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43.1%가 과학기술자에 대한 낮은 경제적 대우를 꼽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도 과학기술자에 대한 경제적 보상이 23.1%로 가장 많았다.
◆정부지원이 열쇠
이공계 고사위기의 열쇠는 결국 정부가 쥐고 있다는 지적이 대세를 이룬다. 동일한 맥락에서 정부의 정책적인 뒷받침만이 ‘전기공학의 부활’을 유도할 수 있다는 공감대도 확산되고 있다.
특히 정부가 전력산업기반조성사업기금 9천100억원 가운데 전기분야 인력양성을 위해 일부 예산을 편성해 놓고는 있으나 다분히 비현실적이라는 지적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황석명 충남대 교수는 “전기공학은 전력산업의 저변을 형성하고 있음에도 전력당국의 정책적 오류가 전기공학의 고사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며 “전력산업 구조개편을 성공적으로 진행시키고 국가기반산업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전력기술인 양성을 위한 전기공학 지원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중린 건국대 교수는 “정부가 빈약한 지원액수에도 불구하고 대학들이 경쟁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은 인력양성의 토대를 조성하는 것과 한참 동떨어져 있다”며 “전기분야 인력을 양성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모든 대학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줘야만 고사위기에 처한 전기공학을 ‘부활’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곽희로 대한전기학회장은 “정통부가 과거 전파공학과를 신설하는 대학에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 것이 오늘날 결실을 맺고 있다”며 “전기공학과에 대한 연구개발자금 지원 강화, 전력거래사 자격증 신설, 특수대학 설립 등 정부가 실질적인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반면 공학기피현상이 심각하기는 해도 일시적인 유행에 불과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임근희 전기연구원 산업전기연구단장은 “이공계 외면으로 인한 전기분야 인력부족은 일종의 유행현상으로 현 사회의 트렌드를 반증하고 있다”며 “소신있게 자신이 공부하고 싶은 분야에 매달릴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길식 텍사스대 전기공학부 교수도 “직업에 대한 불안감, 인기학문으로의 쏠림 현상 등이 맞물리며 공학기피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나 이 현상이 결코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라며 “전기공학이 지속적인 변화를 모색해 학문의 유연성을 높여나가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오명환 한국전기전자재료학회장은 “80년대 이후 산업기반시설이 갖춰지면서 이공계 인력을 필요로 하는 시장이 이전보다 줄어들었기 때문에 이공계기피는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인력양성도 중요하지만 올바른 교육을 통해 제대로 된 전문가를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일각에서는 공학 교육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보다 현실적인 지적도 고개를 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이공계 기피 현상은 지식공급자인 교수들의 질이 낮은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며 “대부분의 공대교수들이 이론에는 뛰어나지만 현장경험이 부족해 기업체가 요구하는 인력을 육성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