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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신씨 예조정랑공 규의 따님 외가이야기
대한민국 안에서도 사는 곳이 다르면 보는 시각도 다르고 외국에 사시는 분들이 바라보는 시각도 다르고 정치이야기를 하면 문정부가 되어 좋다는 사람도 있지만 나의 경제적 측면만을을 바라보면 사실 문정부가 들어서면서 공을 민으로 주는 모든일들이 60프로 이상 없어졌다.
건설업을 하는 친구도 일이 없어졌다면 매번 바뀐 탓을 한다. 아무튼 이곳 부산은. 이전에도 일거리보다 서비스업이 주류이고 타도시보다 일자리가 부족한것은 사실이다.
본론으로 가서. 저의 10대조 이석보의 형님이시자 집안의 장남이신 이석관( 현재 안동수은종택 )에게 시집오신 할머님은 아주신씨 예조정랑 신규의 외동따님이셨다.
족친이신 남산 주원형님이 올리신 아주신씨 이야기에 추가하여 몇글자 올려두고자 한다.
많은 자료 중. 정확한 기록은 갈암집이다.
갈암 이현일이. 우암송시열과의 논쟁에서 폐하여 200-300년간 아무도 겁이 나서 보지않은 책이 갈암집이다.
이곳에. 우리 문중에. 시집오신 아주신씨 할머니의 외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갈암집(葛庵集)
통훈대부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증(贈)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 신공(申公) 묘갈명
공은 휘가 달도(達道), 자는 형보(亨甫)이고 본관은 아주(鵝洲)이며, 일찍이 자호(自號)를 만오(晩悟)라 하였다. 그 상세(上世)에 휘 우(祐)가 있어 고려 왕씨(王氏) 때 호남 안렴사(湖南按廉使)가 되었으니, 이분이 공에게 8세조가 된다.
증조 휘 수(壽)는 통사랑(通仕郞)이고, 조부 휘 원록(元祿)은 증(贈)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이며, 고 흘(仡)은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이다. 집안이 대대로 효우(孝友)로 향리에서 일컬어졌다. 비 순천 박씨(順天朴氏)는 전력부위(展力副尉) 휘 륜(倫)의 따님으로 만력(萬曆) 병자년(1576, 선조9) 8월 모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릴 적부터 체구가 커서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며, 독서할 줄 알 나이에 이르러서는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날마다 점차 글을 깨쳐 스스로 성년(成年)에 이르렀다.
나이 겨우 17세 때 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기근이 자주 들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지경이었다. 공은 몸소 장사를 하여 온 집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었다. 정유년(1597, 선조30)에 왜적이 다시 쳐들어와 남방이 전란의 와중에 들어가니 사람들은 허겁지겁 다투어 피난하였다.
공의 아우 열도(悅道)가 아직 어린이라 다리가 약해서 잘 걸을 수가 없었다. 이에 공이 손을 잡거나 등에 업고 다니면서도 자칫 아우를 잃을까 걱정하였으니, 그 우애의 도타움이 이와 같았다.
당시 왜적이 나라 안에 가득 설쳐 댄 지가 전후 7, 8년이라 학자들이 모두 몹시 해이해져서 서책을 가까이할 마음이 없어졌다. 그러나 공은 성품이 근면하고 식견과 사려가 있어 비록 다급하고 위태한 상황 속에서도 잠시 한가한 시간이 있으면 책을 손에서 놓고 보지 않는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 발휘된 문장은 기운이 왕성하고 힘찼으며 도도히 흐르는 장강대하(長江大河)처럼 가없이 드넓었다.
경술년(1610, 광해군2)에는 성균관에 들어가 상사생(上舍生)이 되었고, 갑인년(1614) 여름에는 거듭 친상(親喪)의 슬픔을 당하였는데 거상(居喪)의 의절(儀節)을 오로지 예(禮)에 따라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상기(喪期)를 마치자 마침 세상이 혼란한 때라 두문불출하며 자신의 뜻대로 자적(自適)하였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다. 공이 이에 정시(庭試)에서 제1인(第一人)으로 급제하였고 겨울에 성균관 전적을 거쳐 호서(湖西) 성환역(成歡驛)의 승우(丞郵)가 되었는데 이 역참(驛站)은 바로 큰 도로 곁에 있어 송영(送迎)의 경비가 많이 들어 몹시 피폐하였다. 공은 부임하자 곧 이해득실을 따져 보아 상황에 따라 적의(適宜)하게 시행할 것은 시행하고 폐지할 것은 폐지하는 한편 부역과 세금을 간편하게 줄이니 민력(民力)이 소생하였다.
그 이듬해 갑자년(1624)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어가(御駕)가 공주(公州)로 몽진하였다. 공은 뜻하지 않은 변고로 경황이 없는 때에 계책을 세워 어가를 맞이하는 데 필요한 역부(役夫)와 말을 준비하여 눈앞에 닥치는 상황에 신속하게 대처하니, 공이 응졸(應卒)의 재주를 가졌다는 것을 사람들이 더욱 잘 알게 되었다.
이괄이 패사(敗死)하고 어가가 환도(還都)하자 공은 이에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그해 겨울에 전주 판관(全州判官)에 제수되었다. 전주는 호남의 큰 고을로 평소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공은 번다한 업무를 처리하는 데 재주가 뛰어난 데다 성품도 공평하고 청렴하며 너그러워 관리와 백성들이 경외하면서도 사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직하였다.
병인년(1626, 인조4)에 형조와 예조의 정랑으로 자리를 옮겼고, 오래지 않아 사간원 정언으로 옮겨서는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논하니, 상이 가납(嘉納)하셨다.
정묘년(1627) 1월에 북쪽 오랑캐가 침입하였다. 상이 대신(大臣)과 재신(宰臣) 및 삼사(三司)의 관원들을 불러 적을 막을 계책을 물으니, 한 훈로(勳勞) 재신이 먼저 몽진(蒙塵)하자고 발의(發議)하였다.
공이 “원컨대 전하께서는 파주(坡州)에 머물러서 위무(威武)를 떨침으로써 먼저 상대방의 기(氣)를 빼앗는 모습을 보이셔야지 먼저 스스로 위축되어 나약함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라고 진언하자, 상이 “묘당(廟堂)과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시고 끝내 공의 계책을 채택하지 않으셨다. 이에 당시 여론이 애석해하였다.
어가가 강도(江都)로 몽진할 때 공이 호종하였는데 매양 의론이 있을 적마다 화의(和議)의 잘못됨을 깊이 논척하였다. 당시 명(明)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조선이 북로(北虜)와 교통하여 장차 가도를 습격하려 한다고 소문을 퍼뜨리니, 그 소문이 원근에 전파되자 시국이 예측할 수 없이 불안한 상황으로 변하고 있었다.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효유(曉諭)코자 하였으나 마땅한 적임자를 찾기 어려웠는데 공이 마침 선발되었다. 공은 명을 받고 모문룡의 군영(軍營)에 들어가 “조선이 대국(大國)을 섬김은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는 것과 같으니, 그러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면서 매우 간곡한 어조로 말하니, 모문룡이 감오(感悟)하여 의심이 모두 풀렸다. 이에 섬에 있던 조선 사람 수백 명을 쇄환(刷還)하였으며, 이윽고 또 관서(關西) 수령들의 능력 여부 및 청천강(淸川江) 이북의 지형의 편의(便宜)를 진술하여 하인을 시켜 역마(驛馬)로 달려 속히 보고하도록 하니, 상이 가상히 여겨 지평(持平)에 제수하여 소환하였다.
이때 훈신(勳臣)이 교만하게 전횡(專橫)하여 불법(不法)을 자행하는 정상을 대간(臺諫)이 논하자 상이 몹시 노하시어 대간을 엄히 다스리라는 명이 있었다. 공이 이에 용감하게 나서서 홀로 상주(上奏)하였으니, 그 대략에, “대간은 늘 공의(公議)를 견지하여 인주(人主)의 이목이 되니, 공의가 있는 곳에 대간이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윤황(尹煌)의 계(啓)와 조경(趙絅)의 소(疏)는 모두 공의에서 나온 것이지 터무니없는 죄를 엮어서 남을 모함하려는 의론이 아닙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그들을 꾸짖어 배척하고 억눌러 모욕함이 이와 같으니, 신은 직기(直氣)가 꺾이고 공론이 사라져 위망(危亡)의 화가 곧바로 닥쳐 올까 걱정입니다. 게다가 묘당(廟堂)과 대각(臺閣)이 둘로 나뉘어져 말하면 반드시 서로 어긋나고 계책을 내면 반드시 서로 맞지 않습니다.
오랑캐의 침입은 그 갑병(甲兵)이 많지 않으니 오늘날의 근심이 아니고 복심(腹心)이 병들어 가면 장차 위망의 화를 당하게 될 터이니, 이것이 참으로 오늘날의 근심입니다.” 하였다. 이에 좌상(左相) 신흠(申欽)과 우상(右相) 오윤겸(吳允謙)이 ‘묘당과 대각이 둘로 나뉘었다’는 구절이 있다는 이유로 연명(連名)으로 상소하여 사직하고 피혐(避嫌)하였다. 상이 노하시어 특별히 공을 공직에서 파면하자, 대신과 삼사(三司)가 번갈아 상소와 차자(箚子)를 올려 공을 변호하여 내려진 명이 환수되었다. 이에 공의 강직하다는 명성이 조야(朝野)를 진동하였다.
숭정(崇禎) 무진년(1628, 인조6)에 예조 정랑을 거쳐 시강원 문학이 되고 지평으로 옮기고 또 필선으로 옮겼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오래지 않아 장령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봄, 성균관 직강을 거쳐 사간원 헌납이 되었으나 역시 배명(拜命)하지 못하였고, 여름에 장령에 제수하는 소명(召命)을 받고 조정에 돌아왔다.
당시 한 훈신(勳臣)이 연중(筵中)에서 대신을 모독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거만하였다. 이에 공이 ‘대신을 능멸하면 조정의 체통이 서지 않는다’고 하면서 논핵(論劾)하여 마지않으니, 당시의 권귀(權貴)들이 모두 공을 미운 눈으로 흘겨 보았다. 그래서 마침내 병을 칭탁하여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경오년(1630)에 또 장령에 제수되어 애써 병든 몸을 이끌고 조정에 돌아왔다. 전(前) 대사헌 정공 온(鄭公蘊)이 구언(求言)으로 인하여 올린 상소에서 인성군(仁城君)의 관직을 회복시켜 줄 것을 청하자 삼사(三司)가 연명으로 상소하여 탄핵하였으며 중신(重臣) 중에는 극률(極律)에 처할 것을 청하는 자도 있었다. 이에 공이 ‘구언으로 인하여 소회(所懷)를 다 말하였으니 실로 논할 만한 죄가 없다.’ 하면서 마침내 정계(停啓)할 것을 발론하니, 공론이 옳다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령에서 체직되었고 이내 장악원 정에 제수되었으나 휴가를 내어 향리로 돌아왔으며 더욱 벼슬할 뜻이 없어졌다.
신미년(1631) 3월에 또 장령에 제수하여 상경(上京)을 재촉하는 소명(召命)을 받고 공은 애써 조정에 나아갔다. 당시 옥당(玉堂)이 원종대왕(元宗大王)의 부묘(祔廟)를 중지할 것을 청함으로 해서 상의 뜻을 거슬러 모두 ‘중죄(重罪)로 다스리라’는 명이 내리니 조정이 놀라 두려움에 떨었다. 공이 이에 상주(上奏)하기를, “전하께서 본친(本親)을 추숭(追崇)코자 하시는 뜻은 비록 지극한 효성에서 나온 것이지만 정신(廷臣)이 법에 의거하여 불가하다고 한 것은 전하로 하여금 예의(禮義)를 넘지 않도록 하고자 한 것입니다. 만약 가부(可否)를 묻지 않고 오직 임금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면 논사(論思)의 직책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말미에 충정을 진달하여 사퇴를 간청하였고, 마침내 체직되어 군자감 정(軍資監正)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홍문관 수찬으로 옮겼으나 병으로 사은(謝恩)하지 못하고 6월 병진일에 경저(京邸)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6세였다. 상이 부음을 듣고 슬피 탄식하시고 해사(該司)로 하여금 법식에 맞게 부의(賻儀)를 내리도록 하였다. 조정의 사대부들이 달려와 조문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모두 매우 슬피 곡(哭)하였다. 이에 상이 연도(沿道)의 각 고을로 하여금 여졸(輿卒)을 공급하여 고향집으로 운구(運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해 12월 임신일에 의성현(義城縣) 남쪽 오동산(梧桐山) 태향(兌向)의 둔덕에 안장하였다.
공은 종실(宗室)의 규수를 부인으로 맞았으니, 세조대왕(世祖大王)의 5세손 덕신정(德信正) 휘 난수(鸞壽)의 따님으로 집안에서 시례(詩禮)의 가르침을 익히 들었고 공에게 시집와서는 시부모와 남편을 섬김이 효성스럽고 공경스러웠으며 손님을 접대하거나 제사를 모시는 등의 일에는 반드시 정성스럽고 근신(謹愼)하였다. 이에 종족이 그 어짊을 칭찬하고 향리에서 그 덕에 탄복하였다. 공보다 28년 뒤에 둘째 아들 규(圭)의 고령(高靈) 임소(任所)에서 세상을 떠나시니, 무술년(1658, 효종9) 1월 7일이었다. 향년 73세였다. 모월 모일에 공의 묘혈(墓穴)을 파고 합장하였다. 공이 호성 공신(扈聖功臣)이 되어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됨으로 해서 부인 역시 숙부인(淑夫人)에 봉해졌다.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장(垚)은 뒤에 재(在)로 이름을 고쳤으며 사헌부 감찰이다. 둘째 규(圭)는 예조 좌랑이고, 막내는 무(堥)이다. 장녀는 사인 윤이관(尹以觀)에게 출가하였고, 막내는 참봉 박충기(朴忠基)에게 출가하였다. 감찰은 3남 4녀를 낳았다. 아들은 하석(夏錫), 진석(晉錫), 은석(殷錫)이다. 장녀는 사인 박세휘(朴世輝)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사인 이공익(李公翼)에게 출가하였고, 셋째는 도승지 이동로(李東老)에게 출가하였고, 그다음은 부사(府使) 성석기(成碩夔)에게 출가하였다.
좌랑은 아들이 없어 형의 아들 진석으로 후사(後嗣)를 삼았다. 1녀를 두었는데 사인 이석관(李碩觀)에게 출가하였다.
무는 4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휴석(休錫), 태석(泰錫), 비석(賁錫), 예석(禮錫)이다. 장녀는 사인 이수(李洙)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병사(兵使) 장한상(張漢相)에게 출가하였다. 하석은 1남을 낳았으니 렴(濂)으로 생원(生員)이고, 진석은 2남을 낳았으니 완(浣)과 숙(淑)이다. 은석은 아들은 없고 2녀만 두었다. 휴석은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덕함(德涵)으로 진사이고, 다음은 덕영(德泳)이다. 태석은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덕한(德漢)이다. 비석은 4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덕연(德演), 덕양(德瀁), 덕형(德瀅)이고 막내는 아직 어리다. 예석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현손(玄孫)은 남녀 모두 16명이다.
공의 아우 열도(悅道)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장령(掌令)에 이르렀고, 문장과 행의(行誼)로 당세에 이름이 알려졌다.
공은 천자(天資)가 매우 높고 흉금이 툭 틔여 세속의 이해득실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으며 어릴 적부터 충효(忠孝)의 대절(大節)을 세우리라 스스로 기약하였다. 독서하여 학문을 함에는 반드시 의리(義理)를 연구해 밝히고 명행(名行)을 갈고 닦아서 실사(實事)에 나타나는 곳을 힘썼으며, 두루 전고(前古)의 흥망의 자취와 당세(當世)의 치란(治亂)의 연고에까지 이르러 고금을 참작하여 오늘날에 그대로 시행해 보고자 하였다. 출사(出仕)한 이래 자신의 직분에 있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늘 생각하였다. 그래서 우승(郵丞)과 주좌(州佐)로 있을 때에는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은 없애고 이익이 되는 것은 일으키되 과감하고 신속하였으며, 백부(柏府)와 미원(薇垣)에 있을 때에는 일을 만나면 과감히 진언하여 임금의 위엄을 범할지언정 자신의 소회(所懷)를 숨기지 않았다. 시국이 위급할 때에 큰 계책을 세움에 이르러서는 당당한 논의가 적을 막고 무찌르는 작전에 그야말로 꼭 들어맞았으며, 국가의 근본과 안위를 논함에 이르러서는 그 말이 미덥고 징험(徵驗)이 있어 마치 촛불로 환히 비춰 보고 일일이 헤아려 본 듯이 실제 상황과 틀림없이 부합하였다. 비록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하여 자신의 능력을 다 펴지는 못하였지만 신하로서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공은 일찍이 조월천(趙月川), 장여헌(張旅軒) 두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군자의 입신(立身)과 행기(行己)의 요체를 들었으니, 그 학문 연원의 내력이 있었던 것이다.
공의 증손 상사생(上舍生) 렴(濂)이 묘소에 비석을 세워 공의 명성과 업적을 갖추어 드러내고자 하여 그의 증숙조(曾叔祖) 장령공(掌令公)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현일에게 주면서 “청컨대 명을 지어 주십시오.” 하였다. 현일이 그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사양하였으나 상사군(上舍君)이 굳이 부탁하여 마지않기에 드디어 서문을 쓰고 명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군자가 귀하게 여기는 바는 / 君子所貴
오직 강하고 곧은 것이니 / 惟剛與直
음유하고 손약한 것은 / 陰柔巽懦
바로 덕을 해치는 것일세 / 乃德之賊
위대하여라 신공이여 / 有偉申公
높은 뜻과 절개를 지녔어라 / 抗志勵節
이에 처음 벼슬길에 올라서는 / 爰初歷試
넉넉한 역량으로 고을 다스렸지 / 牛刀鷄割
발탁되어 상대에 올라서는 / 擢列霜臺
훈신에게 아부하지 않으니 / 弗媚而悅
임금도 놀라 정색을 하고 / 當宁動色
권귀(權貴)들이 기운을 빼앗겼지 / 貴彊氣奪
전란으로 대책을 의논할 때에는 / 及贊征謀
그 진언이 우뚝하고 탁월하였으나 / 奇偉卓絶
뭇사람이 의심하고 시기하여 / 羣疑衆猜
좌로 우로 마구 방해하였으므로 / 左牽右掣
계책은 비록 채택되지 못했지만 / 計雖不用
사람들은 그 장렬한 충절 우러렀지 / 人仰壯烈
만년에 나라 위하여 올린 계책은 / 晩節陳謨
근심이 깊고 말이 간절하였어라 / 憂深語切
지위가 능력에 차지 못하여 / 位不滿能
그 재주를 다 펼치지 못했으니 / 莫究厥施
공이야 무슨 유감이 있으랴마는 / 在公奚憾
후인들로서는 슬픈 일이로다 / 後人之悲
오동산 비탈에 / 桐山之原
불룩한 무덤이 있어라 / 宰如其宅
이 비석에 글을 새기노니 / 刻文茲石
후손들의 경사가 이에 도타워지리 / 嗣慶是篤
[주-D001] 응졸(應卒) : 갑작스럽게 닥치는 위급한 상황에 잘 대처하는 것이다. 《묵자(墨子)》 〈칠환(七患)〉에 “마음에 준비하는 생각이 없으면 응졸할 수 없다.〔心無備慮 無以應卒〕” 하였다.
출처 번역 고전번역원 | 이상하 (역) | 2002
아주신씨 예조 정랑공 규의 따님 할머님을 생각하며 한산이씨 수은공 설죽공 후손 이대원 삼가글을 게시하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조선후기 남인의 영수로 이조판서까지 지냈던 재령인 갈암 이현일 선생 (대산선생의 외증조부) 이 누군지 혹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단한 관련 동영상을 올려봅니다. 추가로, 갈암선생의 생모가 율곡 이이의 생모 신사임당에 견주는 정부인 장계향 할머니로 <음식디미방>의 저자로 항간에 유명한 분입니다. 조선시대 500년을 통털어 '여중군자'로 불렸던 여성은 오직 장계향 할머님밖에 없습니다만, 조선말기 200년동안 반역죄인으로 줄곳 몰렸던 아들 갈암선생땜에 장계향 할머니의 위상또한 전국구에 미치진 못했던듯 합니다. 최근에 할머니의 훌륭했던 삶이 재조명되는 분위기여서 다행이죠. ^^
https://youtu.be/brNRNooPL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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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김에 장계향 할머니의 관련 동영상도 마저 올려봅니다. 조선후기 200년동안 정치적 승자였던 노론의 사상적 스승 율곡선생의 어머니 신사임당 말고 이제는 장계향 할머니도 막 떠서 멋진 관련 사극드라마들이 나왔으면 합니다. 그러면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영남 남인들의 삶이 다른 각도에서 재조명되고 홍보가 많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사항이죠. ㅎ
https://youtu.be/zGWLEQkDg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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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에 한 번 나올까 하다는 천재적 이야기꾼, 한국현대문학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꼽히는 이문열씨는 갈암 선생의 바로 아랫동생 항재 이숭일의 12세손입니다. 아마도 이 작가의 소설을 한 두권정도는 예전에 읽어 보신 분들이 많을줄로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 9대(양)조모님 (대산선생의 생모)이 갈암선생의 손녀따님이었고, (생)증조모님 또한 재령이씨였지만 영해파 후손으로 추정할뿐 아직 그쪽의 자세한 가계도는 모릅니다. 단 증조모께서 키도 크시고 풍채가 좋으셨다니 혹 장계향 할머니의 특별음식요리법의 수혜자중 한 분이 아니었나 추측해 봅니다. ^^;;;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