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첫 장편소설 [[황산강]]을 주 4회 정도로 연재할까 합니다.
1부 아수라장, 2부 코피, 3부 모순, 4부 내 속에 하나의 우주, 5부 더덕 냄새, 6부 한없이 가벼운 사랑
우리 둘 다 자퇴 후 새로 시험을 쳐서 지금 우리 학교로 입학했으니 나이가 같다.
“내 여기서 잠깐 자고 갈 끼다.”
“그래, 쉬는 시간에 올게. 그때까지 자라.”
나와서 도서관 문을 잠그는데 알 수 없는 현기증 같은 것이 올라왔다. 문손잡이를 잡고 도서관 강화유리문에 잠시 이마를 기대었다.
제1부 아수라장 (2회)
보리 수확이 끝나고 모내기까지 끝났다. 마을 사람들이 삼밭에서 삼(대마)을 쪄냈다. 쪄낸 삼을 대밭각단 아래 있는 양접장 집 뒤쪽 담장 너머 삼솥으로 옮겼다.
아침나절 내도록 계속 불 때는 연기가 담장을 넘어왔다.
좀 전부터는 사람들 소리가 계속 왁자지껄 이어졌다. 불에 단 돌 위에 물을 부어 치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잇달아 물씬물씬 허연 연기가 구름처럼 솟구쳤다.
이어서 삼 찌는 쌉싸름한 냄새가 담을 넘었다. 소여물 익는 냄새에 쌉싸름하고 아릿한 향이 진하게 섞인 삼 찌는 냄새가 양 접장 집안을 가득 채우고 아래쪽 솔밭으로 흘러갔다.
전날부터 양 접장 집 머슴 한돌이랑 대밭마을 어른들이 집 뒤 삼밭 아래쪽에 삼솥을 건다고 했다. 양 접장 집에 하나밖에 없는 손녀 일곱 살 수연이는 제 키로 두 길은 되게 자란, 저렇게 키 큰 삼을 찔 솥 크기를 상상했다.
그리고 넓은 삼밭 가득 빽빽하게 자란 저 많은 삼을 몇 번이나 나누어 넣어 쪄야 할까를 손가락으로 헤아려 봤다. 양손으로 헤아릴 수가 없었다. 어린 수연이가 본 무쇠솥 가운데 가장 큰 게 쇠죽 끓이는 가마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삼 찌는 솥은 무쇠가 아니었다.
집 뒤 조금 경사진 자갈밭 아래쪽 돌과 흙을 걷어내자 방구들 같은 것이 나왔다. 무너진 곳, 흙으로 메인 곳을 고쳤다. 그 위에 걷어낸 것들을 골라서 돌들로 두껍게 덮었다.
구들 높이가 높아서 일곱 살 수연이 같으면 고개 숙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아궁이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른들이 고래 안쪽까지 앉은걸음으로 들어가 참나무 장작을 얼기설기 성글게 쌓았다.
그러고 보니 구들 끝 쪽에는 새로 돌로 쌓아 고친 굴뚝도 있었다. 이것들을 삼솥이라 했다.
해마다 삼솥을 걸었다는데 수연이가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작년에도 했던 일이라지만 일곱 살 수연이에게 전혀 기억에 없는 일이었다.
아침부터 그 삼솥에 불을 세차게 땠다. 밭에서 쪄 온 삼단을 삼솥에 빽빽하게 채워 세우고 둘레를 새끼로 묶었다. 그리고 바깥에 이엉과 멍석 같은 것으로 두껍게 둘렀다. 돌로 쌓은 굴뚝 위로 연기가 뭉게뭉게 치솟았다. 나중엔 벌건 불길이 굴뚝 위로 솟구쳤다.
삼단 밑에 구들돌과 구들돌 위에 얹어둔 돌들이 알맞게 달아올랐는지 몇 번이나 시침돌을 꺼내어 확인했다. 시침돌이 적당하게 달아올랐을 때 삼솥 위에 물을 들이부었다. 허연 연기가 구름처럼 솟구쳤다. 준비해 두었던 멍석이랑 가마니, 털어둔 삼닢으로 위쪽을 꽉 덮었다.
그 위로 물을 부을 때마다 허연 구름 같은 연기가 물씬물씬 솟구쳤다. 연기가 수연이 집 마당을 채우고 넘쳐서 아래쪽 솔숲을 거쳐 화제천을 따라 흘러내려 갔다. 소여물 익는 냄새에 톡 쏘는 듯한 연기 냄새가 섞인 쌉싸름하고 아릿한 냄새였다.
외화 뒷산 산그늘이 늘어지고 있었다.
“애씨는 이제 집에 가이소. 이 냄시 마이 맡으만 어지러버요.”
“한돌이 아재. 나 안 어지러운데.”
“애씨, 아재는 뭔 아재. 그냥 한돌이라고 불러요.”
“그렇게 부르면 엄마한테 혼나요.”
머슴 한돌이가 수연이더러 집으로 가라고 재촉했다.
약간 몽롱해진 수연이가 열어 둔 동쪽 샛문으로 들어왔다. 마당을 가로질러 남향으로 앉은 본채 앞에 섰다. 대청마루를 한 번 올려본 다음 마당에서 세 층계 위 뜨럭(기단)에 올랐다.
약간 어질했다. ‘왜 어지럽지?’라며 뜨럭 댓돌 위에 얌전히 고무신을 벗어 놓고 안방 대청마루에 올랐다.
오른쪽엔 대청마루보다 한 자 가량 높은, 난간을 두른 사랑마루가 있다. 사랑마루는 여름철 서당으로 쓸 수 있도록 높고 넓게 지었다. 사랑마루는 특별히 높아서 마루 아래로 웬만한 아이들은 서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사랑마루 아래엔 커다란 무쇠솥이 걸린 아궁이가 있다. 아궁이 옆에 잘 마른 장작이 줄 맞춰 쌓여있다. 대청마루도 시원하게 넓었다. 학동들이 많을 때는 대청마루에 앉아서도 글공부를 했다.
마루 끝 대청 기둥에 기대어 수연이가 멀리 토교나루 쪽을 내려다보았다. 먹물 들인 중우적삼을 입은 오빠 수철이가 책보를 메고 명언마을과 대밭마을 중간쯤에 있는 냉거랑다리를 건너는 모습이 보였다.
벌떡 일어서서 ‘오빠~’라고 외쳐 부르려고 했다. 수연이가 그랬다면 계집애가 집안에서 큰소리 낸다고 사랑방 할아버지한테 꾸중을 들었을 터였다. 그런데 몸과 목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오빠 수철이가 대청마루에서 내려다보는 수연이를 본 듯 손을 크게 흔들었다. 수연이가 삼 찌는 쌉싸름한 냄새를 따라 담장을 넘어 날아서 손을 흔드는 오빠에게로 갔다.
나비가 된 것 같았다. 오빠 주위를 날아다녔다. 오빠는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수연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할아버지, 학교 다녀왔습니다.”
“그래, 힘들었제. 손 씻고 들어가 옷 갈아입어라.”
“예.”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수연이를 오빠도 할아버지도 알아보지 못했다. 날아다니던 수연이가 대청마루에 기대어 있는 수연이 속으로 돌아갔다.
수철이가 마당에서 대청마루를 보니 수연이가 높다란 마루 끝, 대청마루 기둥에 기대어 잠들어 있다.
“수연아, 여기서 자냐! 위험하다. 일나라.”
“…….”
오빠 목소리는 다 들리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엄마, 수연이가 이상해. 눈은 떴는데 애가 축 늘어지네.”
“삼 찌는 냄시를 넘 많이 맡아 글나? 한숨 자고 나만 괘안을 기다. 건넌방에 델다 눕히라.”
아홉 살 수철이가 일곱 살 수연이를 번쩍 안아 들어 작은방에 눕혔다.
어지럼증이 가라앉았다.
기대고 있던 도서관 강화유리문에서 머리를 떼고 교실로 가려고 눈을 떴는데 낯선 꼬맹이 얼굴이 보였다.
‘이 뭐지?’
낯선 꼬맹이가 나를 바닥에 눕히고 베개를 고여 준다. 잠이 몰려왔다.
눈을 뜨니 낯선 방 안이다.
조금 어둡다. 서까래가 드러나 있는 천정엔 한지가 발라져 있다. 창호지를 바른 한옥 완자살창문이 보였다. 벽에도 한지가 발라져 있다. 방바닥도 콩댐한 한지다.
익숙하지 않은 냄새 때문인지 코끝이 간질거려 손으로 코를 만지다 보니 꼬맹이 손이다. 무명적삼에 무명속곳, 무명치마를 입고 있는 꼬맹이가 나였다. 꿈속인 게 틀림없다. 일어나 앉으려고 하는데 심한 현기증이 났다.
머릿속으로 낯선 정보들이 밀려들어 왔다. 대밭마을 양 접장 댁 하나밖에 없는 손녀가 나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오빠 아홉 살 수철이가 조금 전에 대청마루 기둥에 기대어 졸고 있던 나를 안아 들어 이 방에 눕혀 주었다.
그럼 고등학교 2학년 ‘칼장’인 ‘조아라’는 누굴까?
조아라를 떠올리자 심한 멀미 같은 게 올라왔다. 토할 것 같았다. 억지로 수철이 오빠를 떠올렸다. 조아라에 대한 생각을 밀어냈다. 울렁거림이 가라앉았다.
그런데 이내 고등학생 조아라가 떠올랐다. 다시 멀미가 났다. 울렁증을 견딜 수 없어서 낮에 삼 찌던 장면을 떠올려 조아라를 밀어냈다. 괜찮아졌다.
사랑방으로 엄마가 밥상 차려 내는 소리가 들렸다.
“수연아, 밥 묵자.”
안방에서 할매 목소리가 건너왔다. 사랑방에서 할아버지는 독상, 아버지와 오빠는 겸상으로 저녁 진지를 드셨다.
할매와 엄마, 나는 안방에서 도리소반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쌀보다 보리쌀이 훨씬 많은 거뭇한 보리밥이다. 된장 푼 아욱국, 애호박새우젓볶음, 열무짠지가 다다.
한돌이 아재와 삼월이 아지매는 아래채로 상을 내어가서 먹을 거다. 한돌이 아재는 우리 집 종이었다가 머슴이 되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한돌이 아재 부모가 종이었다. 삼월이 아지매 부모도 명언마을 허진사 댁 가야부인 본가 종이었다고 했다.
올봄에 둘이 혼례를 올리고 우리 집 아래채에 살고 있다. 둘 다 새경을 받으며 우리 집 일을 하고 있다.
삼을 찌는 오늘부터 배내마을에서 아지매들 다섯과 처녀 셋이 대밭마을로 삼(대마)일을 하러 왔다. 우리 마을과 명언 마을, 내화 마을에서 일하며 먹고 자고를 보름 넘게 할 거라고 했다.
마을 공터에 있는 동구나무(늙은 팽나무) 넓은 그늘에 일터를 만들었다.
한돌이 아재랑 마을 아재들이 삼솥에 찐 후 살짝 겉물기만 말린 삼단을 지고 와서 마을 아지매들과 배내마을에서 온 일꾼들에게 나눠주면 한 무리의 일꾼들은 껍질을 벗기고 다른 한 패는 벗긴 껍질을 넘겨받아 겉껍질을 훑어내어 계추리바래기(햇볕에 표백하는 일)로 햇볕에 가져다 널었다.
마을 공터 주변이 삼 속껍질과 껍질 벗긴 대마 속대인 즈릅대로 허옇게 덮였다. 동구나무 아래에는 쌉싸름한 삼(대마) 냄새가 아른아른한 달빛처럼 가득 차서 화제천으로 넘쳐흘렀다.
“이 노무 손들, 일하는데 걸치적거린다. 집에 가라.”
배내마을에서 온 머리 희끗한 아지매가 손을 내저었지만 아이들은 들은 척도 안했다.
“얼른 안 가나!”
삼단을 지고 온 외화마을 눈딱부리 아재가 눈알을 굴리며 아이들을 쫓아내다가 나를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애씨, 햇살도 그렇고 삼 냄시 땜에 어제처럼 씨러지만 이번엔 저도 혼나요.”
한돌이 아재가 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애씨가 삼 냄시가 좋은 갑다.”
“하마, 좋지. 저녁에 모깃불 놓을 때 삼닢 넣은 냄시는 정말로 좋지.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나와서 한데 잠을 자가며 일해도 좋은 게 그 냄시 때문 아잉가.
애씨, 그때 와서 맡아봐요. 지금은 햇살도 따가운데 집에 가시고.”
배내에서 온 아지매들과 마을 아낙들, 할매들이 나를 보고 왁자하게 웃었다. 동네 아이들이 모두 쫓겨났다. 날 쫓아낼 사람은 없었지만, 집으로 올라왔다.
삼 째기와 삼 삼기까지는 배내마을 일꾼들과 마을 사람들 공동작업으로 할 거라고 했다.[삼을 삼는 일은 삼 째기 다음 단계로 실을 만드는 작업, 방적(紡績)]
대밭마을 일꾼들에다가 배내마을에서 온 일꾼 여덟 명과 외화마을 일꾼 다섯을 더해서 서른 명 남짓한 남녀 일꾼들 참과 때를 우리 집에서 했다.
삼월이 아지매랑 동네 아지매 서넛이 우리 집 부엌과 헛간에 걸어둔 솥을 오가며 분주했다.
대청마루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니 마을 공터에서 쫓겨난 아이들이 무리 지어 화제천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나도 끼고 싶지만, 사내아이들도 있는 저기 갔다가는 할아버지 불호령을 감당할 수 없다.
가만, 그러고 보니 사랑에 할아버지가 안 계신다. 아침나절에 출타하셨다. 그래도 저기에 낄 수는 없다. 별말씀 안 계셨으니 멀리 가시지는 않았을 거다.
명언 마을 석이 오빠네, 허 진사 댁에 가셨을까? 사랑마루에서 바둑 한 수 하시거나 운자를 주고받으며 한시라도 짓고 계실까?
요즘은 고양이 손도 빌린다는 농번기다. 그래서 서당은 한 달째 열지 않고 있다. 실질적으로 서당을 맡은 아버지도 할아버지처럼 요즘 할 일이 없다. 그렇다고 아랫사람들 하는 들일을 거들기도 체통이 서지 않았다.
아버지도 어딘가로 출타했다가 저녁 늦게 오시는 경우가 많았다. 보리 수확부터 시작해서 모내기, 삼밭 일까지 끝나야 서당을 다시 연다.
오늘은 쇼와 8년(1933년) 7월 7일, 음력으로 윤오월 보름이다.
어둑해졌다. 일꾼들은 저녁 먹고 모깃불을 피웠다. 모깃불이 얕게 깔린 마을 공터 동구 나무 아래 일꾼들이 멍석을 깔고 누워 잠시 두런거렸다.
그러나 이내 조용해졌다. 코고는 소리들이 어우러졌다. 삼닢을 넣은 모깃불 향이 마을 공터를 가득 채우고 화제천을 따라 천천히 흘러서 내려갔다.
수철이 오빠가 잦아드는 모깃불 더미에 막대기로 숨구멍을 만들어 모깃불을 살렸다. 그 위에 설마른 삼닢을 흩뿌리는 것처럼 덮었다. 다시 연기가 솟아올랐다.
동쪽 작은오봉산 마루가 훤하게 밝아지더니 불그스레한 얼굴로 보름달이 솟았다.
“이쁜 애씨는 나중에 뭐 할라요?”
배내마을에서 온 아지매다. 누워서 자던 일꾼들이 일어나서 둘씩 셋씩 둘러앉아 두런거리며 낮에 벗겨놓았던 삼 껍질 뭉치를 옆에 두고 겉껍질 훑어내기를 하고 있다.
“공부 마이 해서 여슨상님 하믄 조컸다. 구두 신고 양장하믄 이쁜 애씨가 을매나 더 이쁠꼬?”
“여자도 슨상님 할 수 있나?”
“하모. 공부만 마이 하믄 다 할 수 있다.”
자기들끼리 나를 이쁜 여선생님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