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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 Skate:
Romancing the Bottom
by Otis Franks (전 미해군 준사관)
USS Skate. SSN-578
한 사건에 대한 나의 회상 :
미 해군 잠수함 스케이트(USS Skate. SSN578)는
1962년 가을 플로리다 키웨스트에서 버지니아
노폭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이 운항 작전명령에는 Task Group Alpha의 감시를
피해 셰익스피어 만에 진입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알파는 항공모함 Task force로 각별히 구성되어 적
(대항군) 잠수함을 찾아 격파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이 핵잠수함 스케이트가 운항하던 시절에는 Task Group
Alpha도 핵잠수함 탐지에 그렇게 큰 경험이 없던 상태였다.
작전명령에는 작전 동안 우리 위치를 통신으로 송신하지
말라는 명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모든 액티브 소나와
음향측심기(Fathometer)를 가동하며 해저의 용골을 피해
가야 한다.
[음향측심기 : 바닥이나 기타 해저 지형과 잠수함 표면의
거리를 측정해주는 기계. 항법과 같이 운영.]
이 항해는 만(gulf)의 거대한 조류를 통과해야하는데 이는
4노트 잠수함으로 대서양 해안을 따라 평행으로 가야하는
것으로 가끔은 해류를 타서 유리해진다.
당시 나는 파수장(Chief of the Watch)과 동시에 잠수장교로
근무하고 있었다. 웨슬리 헤위트 중위가 갑판장교 (OOD) 겸
함교-책임장교였고 로드 울프가 부-OOD였다.
항해는 계획에 따라 진행되었다. 잠수함은 수면 180미터에서
20노트에 가깝게 운항했다. (시간당 25마일 정도가 된다) 해류
를 통한 이동 이득은 제외한 수치다. 잠수함 스케이터의 실제
속도는 지상에서 보면 시간당 약 30마일에 가까웠다.
밤 11시,
조종실은 모든 하얀등을 끄고 빨간등을 켰다. 빨간등을 켜는
이유는 수병들이 전력 이상으로 암흑이 될 때 시야가 어둠에
빨리 적응하기 위함이고, 또한 잠망경을 보는 사람의 시야가
빠르게 적응되기 위함이다.
[밝은 빛 아래 있다가 밖의 야간 바다를 보려면 시야에 적응
시간이 걸린다. 특히나 함장은 야간 잠망경 접안구와 조종실
을 동시에 번갈아 봐야 한다. 잇빨 주]
또한 관측장교가 함교에 올라가 야간근무 서고 있을 때,
해치를 통해서 밖으로 나가는 빛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빨간등을 켠다.
그날 밤은 모든 게 타이밍에 달려 있었다. 해군의 관습과
전통에 따라 당직(파수)은 정시에서 15분 전에 교대된다.
우리 잠수함의 항법장인 준사관 프랭크 칼타는 매우 경험
이 많으며 조타수 자격증도 갖고 있었다.
바로 이때 칼타는 ‘up and about (약간 위로 올라가야 한다)'이란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조타수 2급인 C. E. 프로스트에게
원래 시간보다 일찍 조타를 교대하자고 했다. 프로스트는 부
-조타장으로 타고 있었다. 프로스트는 조타 자격이 있었으나
비교적 경험이 적은 까닭에 상급자의 감독이 요구되는 상황
이었다.
칼타 준사관이 항법실 탁자로 오더니 프로스트에게 차트 상으로
잠수함의 현 위치를 찍어달라고 했다. 스케이터에서는 부함장이
항법장교였다. 항법장교는 조타수를 포함한 병사 네 명을 데리고
있다. 그의 경험으로 나중에 'Night Order Book'이란 책을 썼다.
프로스트가 잠수함의 위치로 생각되는 지점을 찍어주었다.
잠수함은 노스캐롤라이나 해안의 대륙붕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러자 칼타가 즉각 현 상황을 파악하고 말했다.
“우린 지금 이런 깊이에서 너무 빠르게 달리고 있어.
그렇다면 우린 지금 우리가 정확히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말할 수 있어.”
칼타는 나와 갑판장교에게 재차 말했고,
그때 음향측심기에서 “핑!”하는 소리가 울렸다.
헤위트 중위가 입을 열었다.
“우린 지금 작전명령대로 가고 있어.”
그러자 칼타도
"난 모르겠습니다.
우린 지금 분명 문제가 있어"라고 말했다.
헤위트 중위도 핑! 소리에 문제가 있다는 데는 동의했다.
차트(해도) 상에서는 해저 바닥이 잠수함에서 밑으로 120
미터 거리에 있었으나, 바닥은 빠르게 잠수함을 향해 올라
오고 있었다.
칼타는 측심기 스위치를 계속 진행으로 놓고는 바다와 연안
중간 지대(medium range)로 조작스위치를 돌렸다. 그러나
해저면은 여전히 빠르게 우리를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이 일 직전에, 나는 훈련생(bowplanesman)과 교대하려 조종실
로 와 앉았다. 해군하사관 2급인 프레드 크릭맨은 훈련생으로
관측과 훈련을 같이 하고 있었다.
잠수함 수평판을 양쪽 모두 올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훈련생
크릭맨은 실수로 조종간 조이스틱을 딸깍 움직였다. 결국 다시
조종간을 컨트롤해 고물 수평판을 최고로 올렸다. 그러자 잠수함
이 즉각 35도 각도로 기울어진다.
[수평판 앞을 들면 상승, 내리면 하강. 잇빨 주]
칼타는 스위치를 얕은 지대(shallow range)로 바꾸고 스코프
스위치를 켰다. 화면에는 우리 잠수함 밑 7미터 정도 밑에
해저면이 지나가고 있는 게 보였다.
헤위트 중위가 명령했다. "전속 후진."
나도 소리쳤다.
"갑자기 그러면 안 돼. 속도가 필요해."
소크프 상에서는 해저면 돌기가 2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지나가고 있었다. 정말로 유별나게 긴 시간으로 느껴졌다.
그 긴 시간은 사실 1분 정도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공기 & 물 주입/배출 조작자인 기술하사관 1급 마샬
코발리식이 어금니를 깨물면서 두 번이나 물었다.
“붑니까(Blow)? 불어요(Blow)?”
이 말은
메인 밸러스트 탱크에 물을 빼고 공기를 넣을 거냐는 말이다.
난 “지금은 아냐! 함대가 우리 위에 있어!”라고 대답했다. 잠수함
은 욕조물에 코르크 마개가 뜨듯이 출렁했다. 이 모든 일이 진행
되는 동안 나에게 모든 것은 슬로우비디오처럼 보였다. 언제라도
내 얼굴이 diving panel을 쾅 때릴 것 같았다.
함장도 문제를 감지했고 상급사관실에서 조종실로 뛰어왔다.
함장이 상급사관실을 나와서 소나실을 지나치는데 문간에 소나
부사관 3급 히긴스가 서 있었고 충돌하면서 비틀했고 조종실에
들어서면서 손에 든 커피잔의 커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제 잠수함은 up-angle이 되어 각도가 45도로 증가했고 그로
인해 조종실에 들어서던 함장은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핵반응로실
구획으로 미끄러졌다. 미끄러지던 함장은 다가오던 통신부사관
로더릭 캐쉬스와 다시 부딪쳤다.
난 함장이 미끄러지는 걸 못 봤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함장이
조종실을 향해 위로 기어오르고 있는 건 봤다. 함장은 어떻게
해서든 잠망경 자리(Periscope Stand)에 도달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이때 나는 해저면과 융기가 잠수함에 더욱 가까워지는 걸 볼
수 있었고, 나는 수평판을 모두 0-도로 돌리라고 명령했다.
이제 우리는 수면 하 45미터에 도달했다. 그리고 헤위트 중위
는 60미터 후진하강을 명령했고 해저면에 적어도 60미터 이상
을 안전하게 두라고 명령했다.
당연하게,
함장은 어떻게 된 거냐고 수도 없는 질문을 퍼부어댔다.
이 상황 비상상황 진행에서 나온 실수는 갑판장교가 충돌경보
(collision alarm)를 울리지 않은 것이었고 나중에 혼란 중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결론에 합의했다.
항법사는 그의 야간명령을 다시 읽으면서 전파했다.
"well I'm covered(내가 해냈어)!"
그러나 나는 그의 'cover'란 단어에 주먹으로 면상을 날리고
싶었다. 항법장교는 우리가 만의 조류 속으로 들어가 밀리면서
우리 원래 지점에서 20마일이나 해변으로 밀려버린 치명적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 잠수함의 보급장인 부사관 제지 오웬스가 군중을
헤치고 자기 일을 했는데 그는 아주 태연하게 중요 정보를 조종
실에 전달했다.
나는 몰랐지만 오웬스는 스트레스 받아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내 모습을 즉각 알아봤다. 난 당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난 커피
한잔을 부어 한 모금 홀짝하려고 했는데, 내 손이 떨리고 있어서
컵을 내 입술에 제대로 댈 수가 없었다.
곧 헤위트 중위가 승무원들의 혼란을 잠재우면서 나에게는
어떠냐고 물었다. 그때는 그래도 내가 좀 안정이 된 상태였다.
그는 내가 한 행동에 칭찬하면서 비상상황 동안에 들어온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라’고 말했다.
나는 고맙다고 말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엄격하게 대하지
않고 차분하게 행동해준 것이 더 고마웠다. 당시 엔진실
당직이 방향타가 끌리는 기분이 든다고 보고했는데 내가
들어보니 그렇지 않았다.
다만 그때 내 마음은 혹시라도 몰라 정말 심란했다. 헤위트
중위는 그날 쓰던 지도 차트를 오늘 날까지 간직하고 있다.
나 역시 심도 바늘 지시한 걸 지금도 기억한다.
The Facts Emerge:
로드 울프는
이 잠수에 관해서 자세한 부분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 말한다. "누가 누구에게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빠르게
연속으로 음향측심기를 연속으로 고정해! 라고 말했다. 내 생각에 갑판
장교 같은데, 그가 명령하기를 긴급잠수함도를 30미터로 바꾸고 수평
판을 모두 최고로 들라고 했다. 그리고 급격하게 잠수함이 덜컹했다.
그때 내가 음향측심기 바늘을 봤는데 밑의 해저 융기에 아주 가까워서
바늘이 거의 zero에 가까웠다."
코발리식. "내 기억에 나는 고물 부력탱크(buoyancy tank)를 그냥 확
불어(blow)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상승각도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꾹 참았다. 사람들이 사방에 돌아다니고 있었다."
캐쉬스. "나는 조종실로 와서 전방잠시를 교대한다고 보고하러 갔었다.
그때 갑자기 잠수함 수평 앵글이 날카롭게 변했다. 난 뛰다가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출렁이면서 프랭크 조장을 봤다. 프랭크는 양쪽 수평판 조
종간을 잡고 있었고, 그 옆에 갑판장교가 서 있었는데 입이 크게 벌어져
있었다."
나중에 잠수함 기술장 패트릭 가너 중위가 말하길 우리가 충돌했다
하더라도 두통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을 거라고 했다. 왜냐하면 메인
터빈이 어뢰실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뢰 폭발로 폭사해서
순간적으로 갈 수 있었다는 뜻인지 모르겠음. 잇빨주]
Note: 이 일은 1968년 있었던 미 해군 잠수함 스콜피언의 침몰에
전조와 같은 사건이었다. 스콜피언은 엔진룸이 쪼개지면서 핵반응
-로와 조종실에도 충격을 주었다. 침몰한 장면을 수중에서 촬영한
사진을 봤는데 그 사진에 보이는 파손의 형태는 내가 글로 표현하기
힘들다. 아이러니칼하게도 미 해군 잠수함 트레셔의 부함장이 된
(우리 잠수함을 탔던 ) 가너는 1963년 4월 침몰로 인해 죽었다.
되돌아보면 항법사와 웨스 헤위트 모두 맞았다. standing order는
우리에게 융기 아래에서는 1노트 당 3미터를 유지하라고 쓰여 있
었다. 깊이가 가까워지는 걸 보고 있던 헤위트는 아마도 해저면이
좀 더 깊어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뭐가 잘못된 건가? 노트 당 3미터는 높은 속도에서 너무 낮은 곳으로
내려가게 했다. 너무 대범하게 생각했다. 다음에 조심하면 될 문제로
치부되었다. 이런 사고를 방지하려면 앞의 지시계를 주시하며 잠수함
속도와 수중 해류의 흐름, 방항을 끊임 없이 감시하며 여러 시나리오
에 대처하는 수밖에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더욱 더 염세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는 말이다. 우린 그렇게 보고 있었나?
어떤 것이 맞는 건가? 모두 맞다! 프랭크 칼타는 잠수팀 모두가 부정
할 수 없는 비상상황을 먼저 제기했다. 그래서 wake-up call을 울렸다.
웨스 헤위트는 양쪽 수평판을 최고각으로 올렸고 그로 인해 속도가
변하면서 차후에 일어날 비극적인 사건을 예방했다. 왜 그랬는지
당신은 추측이 가는가? 이런 특수상황에서는 누가 조종실을 잡고
있건 간에 무의식적으로 잠수장교의 판단이 우선되는 이유다.
헤위트의 입에서 명령이 다 나오기도 전에
1초 만에 수평판은 들려졌다.
나중에 알았지만
Task Group Alpha는 우리 머리 위에 없었다!
참 시기적절한 이야기가 된다.
진짜 시험대는 수중음파탐지 청취병과 조작병이었다. 이들의
업무는 1급 기밀이고 당시 뭐하고 있었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
다. 당시 소나 청취병들은 수면 위의 가상 적군의 배를 감지하
느라 관심이 온통 위에 가 있었다. 이 사실을 안 헤위트는 화가
났고 함장을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함장도 대서양 잠수함 사령관에게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사령관인 부제독 왈도 그렌펠드는 다음 날 잠수함 스케이트
에 직접 타고 바다로 나갔다.
사건을 정확히 보자.
이 사건은 단 1초 만에 잠수함 스케이트가 박살나고 모든
승무원이 수장될 뻔한 이야기다. (나중에 침몰하는) 트레셔
와 스콜피언 이전에 우린 흔적도 발견되지 못할 뻔했다.
그리고 각 승무원에게 훈장들이 수여되고
우린 조용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긴 기항거리와 무선침묵 때문에, 이 잠수함이 침몰했다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어 발견 가능성이 거의 없었을 것이
라고 말하고 있다. 잇빨 주]
마지막으로, 프랭크 칼타가 음향측심기 스위치를 medium
scale로 바꾼 것은 존경할만한 선택이었다. 프랭크 칼타는
1988년 폐암으로 죽었고 아내와 10대 자녀 둘을 남겼으며,
죽기 전에 하던 대로 우리에게 경보를 전파하지 않은 인생
의 유일한 오류를 남겼다.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 중에 다 죽거나,
누가 죽거나 살았을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잠수 다이버들은 가능했을까?
그때 잠수함에 같이 있었던 사람들은 이 글을 읽으면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마도 다른 시각에서 느
끼게 될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면 써서 보내
주기 바란다.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아쉽지만 시간이란 놈이 당신의 이름을 가져가 버렸다.
그러나 얼굴까지는 아니다.
이제 다시 옛 사진을 꺼내 얼굴들을 살펴보고 싶다.
Otis K. Franks
1962년 잠수장교 시절의 글쓴이 오티스 프랭크.
아래는 사건의 개요. 스케이트의 진행 차트
첫댓글 트레셔와 스콜피온의 침몰은 미국잠수함대 최악의 참사로 아직까지도 자주 회자되고 있습니다. 스콜피온의 경우 어뢰연습중에 어뢰가 스콜피온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설도 있죠 정확한 건 아무도 모릅니다.
러시아 잠수함 사고는 더 많고 프랑스도 60년대에 잠수함 2척을 잃고 영국도 과산화수소 어뢰로 한척을, 선박과 충돌로 한척을 사고로 잃죠
(이상 잠수함연맹 회원이...ㅋㅋ)
죽음이 바로 눈 앞에 확! 왔다가 갔군요
본문 글보다 차트가 더 실감이 나는군요.
챠트보니까 간신히 살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