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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생명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인간이 지구에 존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것은 사람들이 속 시원히 알 수 없는
인류의 수수께끼에 해당합니다.
생명의 기원과 지구에 인간이 존재하게 된 이유, 그리고 인생의 목적에 대하여 그 어떤 경전에도
자세한 내용이 없는데, 이에 대한 李洪志 사부님의 가르침을 소개해드립니다.
왜 예수나 붓다 같은 깨달은 성자들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권하고
왼 빰을 때리거든 오른 빰도 내밀라 하는지
원한을 원한으로 되갚지 말고
때려도 맞받아 치지 말라고 하는지
그 도리를 깨우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신을 집중해서 차분하게 읽어보시고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여
밝은 미래를 만들어가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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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내가 말한 적이 있지만, 조예가 있는 과학자라면, 그는 감정으로 이지를 대체하는 많은 사람처럼 고집스러운 인식으로 현대의 과학을 굳어진 틀에 고정하고, 실증과학 이외의 것은 모두 과학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인류가 인식하지 못한 것을 우리가 과학적 방법으로 인식했을 때, 그것은 과학이 아닌가? 그것도 과학으로 된 것이 아닌가. 인류는 끊임없이 자신을 완벽히 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이 비로소 발전할 수 있으며 최후에는 진정하게 우주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현재 실증과학의 발전 형식은 대단히 우둔하고 대단히 느리다. 정말로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격으로, 그는 전반 우주의 물질 존재 형식을 인식하지 못하며 우주 특성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는 조금 만지고도 전부라고 여긴다.
그들은 단지 이 코끼리의 다리만 만지고는 “오, 과학은 이러하다. 이것이 진정으로 생명・물질을 인식하는 과학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 코끼리의 전체가 어떤 모양인지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주가 무수한 같지 않은 시공으로 구성된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다른 공간과 다른 생명 및 물질형식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이리하여 두뇌가 단순하고 또 완고한 그런 사람들은 전부 미신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우리 인류 도덕을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게 한 가장 관건적인 원인이다.
많은 사람이 과학이라는 몽둥이를 휘둘러 가장 오래되고 가장 본질적인 사람의 덕성(德性)을 타격하고 있다. 위험하다!
사람에게 德이 없으면 신(神)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만약 하늘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을 때면 그 사람은 도태(淘汰)되고 새롭게 발전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우리 인류는 진보한 것으로 원인(猿人)에서부터 오늘날로 발전하기까지 이미 아주 휘황하다! 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알려주는데, 역사적으로 사전시기(史前時期), 십 만년 이전 혹은 더욱 멀고 더욱 먼 예전, 일억 년도 넘는 예전에 이르기까지 이 지구에는 줄곧 고도의 문명이 존재했지만, 부동한 시기에 훼멸되었을 뿐이다.
왜 훼멸되었는가? 이는 문명이 물질적으로 아주 빨리 발전되고 기술적으로 아주 빨리 발전되어 도덕이 따라가지 못했거나 혹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것이 더 존재해 내려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으므로 훼멸되었다.
현대과학의 인식에 의하면 물질운동에는 법칙이 있는데, 그것이 운동하여 일정한 형식에 이르면 필연적으로 다른 형식이 나타날 수 있다.
예컨대 지구는 이 우주의 운행 중에서 어느 한 별과 부딪쳐 파괴될 수도 있다. 아무튼, 어떤 원인이든지 현재 과학자들은 우리의 별에 많고도 많은 오래된 문명유적이 존재했으며 게다가 이런 문명유적은 현재로부터 모두 비교적 먼 것으로, 어떤 것은 몇십만 년 이전의 것이고 몇백만 년 이전의 것이고 또 몇천만 년 이전의 것이었음을 확실하게 발견했다.
매 한 시기에 존재한 문명, 남겨 놓은 유적은 다 같지 않으며 모두 한 시기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과학자는 이 문제를 사고하고 있다.
어떤 과학자는 이미 이런 하나의 논점을 제출했는데, 사전문명(史前文明)이 존재하고 사전문화(史前文化)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자가 말한 것이다.
우리 수련계에서는 더욱 똑똑하게 보았다. 우리 이번 시기 인류문명 이전에 아주 많은 여러 차례의 인류문명이 존재한 것은 아주 확실하다. 도덕이 부패함으로 말미암아, 물론 우리가 본 것은 이러한 것으로, 나중에 이 문명은 없어졌다. 훼멸된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당시 인류의 부패, 타락한 흔적을 보아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 사람은 원인(猿人)에서 진화해 온 것이라고 한다. 사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데, 사람은 원인(猿人)에서 진화해 온 것이 전혀 아니다.
다윈의 이론은, 사람은 원인(猿人)에서 진화해 온 것이라고 한다. 당초 이 한 세트의 이론을 내놓을 때 그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내놨다.
그의 이론은 허점투성이로 완벽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 오늘날에까지 이르렀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그가 제출한 원인(猿人)에서 사람으로 진화되었다고 하는 그 진화과정, 천백만 년의 이렇게 긴 과정을 찾아볼 수가 없다.
왜 사람과 원숭이 사이의 이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가? 다른 생물체, 사람뿐만이 아니라 이른바 그가 말하는 진화된 동물도 중간 과정이 없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존재하는 종과 다른 대륙에 존재하는 종은 왜 같지 않은가? 그는 모두 해석하지 못했다. 이 허점투성이인 진화론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이것이야말로 기괴한 것이다!
사실 우리가 보기에 사람은 원인(猿人)에서 진화해 온 것이 전혀 아니며 매 한 시기마다 다른 생물이 존재했을 따름이다. 인류가 생존하는 지구의 대륙판은 이동을 거쳐 위치가 변경된 것이다.
지질학자는 아시아 주・유럽 주・미주・남아메리카・북아메리카의 육지를 대륙판이라고 부른다. 대륙판은 늘 변경되는 것으로서 이 위의 문명이 물밑으로 가라앉을 수 있다. 그러면 다른 대양 속에서 육지가 올라오게 되는데 바로 이렇듯 끊임없이 변경되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도 태평양이라든가, 대서양이라든가, 인도양이라든가, 많은 대양의 밑에 오래된 거대한 건축물이 있고 문명이 존재했던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조사에 의하면 모두 몇십만 년, 몇백만 년, 더욱 오래고 먼 연대에 존재했던 것들이다.
우리 현재의 인류는 최소한 이 몇십만 년 사이 대륙판에 변동이 발생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느 때에 물밑으로 가라앉은 것인가? 그것은 분명 아주 오래 전 몇십만 년 전 혹은 더욱 오래전에 가라앉은 것이다.
그러므로 부동한 대륙판이 변경될 때, 위의 종(物種)은 같지 않은 것으로서 진화해 온 것이 아니다. 비슷한 것이 있지만, 같은 종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물론 나는 佛法을 말하기 때문에 속인 중의 이론과는 같지 않다. 우리는 더욱 높은 인식이며 진정하게 인류를 인식하고 있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데, 사람은 원인(猿人)에서 진화해 온 것이 아니며, 우주 중에서 생긴 것이다.
여러분은 중국에 도가(道家)의 태극학설이 있음을 알고 있다. 이 태극학설은 음양 양기(陰陽兩氣)를 말한다. 음양 양기가 생기지 않았을 때는 혼돈 상태로, 그것을 무극(無極)이라고 부른다. 그런 다음 그것이 태극을 낳게 되어 음양 양기가 있게 되고, 그다음 태극이 만사만물을 낳았다. 이것은 도가의 이론이다. 나는 이것이 아주 과학적 이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는 한 가지 상황을 발견했는데, 물론 이는 또 나만 발견한 것이 아니지만, 이 우주 중의 방대한 물질의 운동 하에서 생명이 생길 수 있다.
우리는 이 물질을 보아내지 못하지만,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이 공기를 사람의 눈이 그것을 보지 못한다고 하여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가?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공기보다 더욱 미시적인 물질이 있는가, 없는가? 많고도 많다. 더욱 미시적인 물질보다도 더 미시적인 물질도 많고도 많다. 이런 방대한 물질, 그것이 왜 이렇게 생존할 수 있는가?
사실 모두가 생명의 존재이다. 어떠한 물체이든지 모두 생명이 있는 것으로 다만 우리 속인 이 공간에 표현되지 않아 그의 생명 존재를 보지 못할 따름이다.
잠시 후 내가 무엇 때문인지를 말하겠다. 어떠한 물체든 모두 생명이 있다. 이런 방대한 물질의 운동 하에서 생명이 생겼고, 이런 생명은 더욱 높은 층차 중에서 다수는 무형적이며 소수는 인류의 형태거나 혹은 동물의 형태거나 혹은 물질의 형태거나 혹은 식물의 형태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 여기로 왔는가? 왜냐하면, 최초에는 사람이라는 이 단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우주 물질의 운동 하에서 생긴 생명은 모두 우주의 특성에 동화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우주 중의 이 법리(法理)에 동화되었으며 眞・善・忍에 동화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眞・善・忍 중에서 생겨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 생명이 고층공간에 많이 생기면 그의 생존환경은 복잡하게 변하며 그들 사회의 생존형식이 있게 된다.
마치 우리 인류사회가 사람이 어떻게 생존해야 한다는 것이 있는 것처럼 그에게는 그의 사회형식이 존재한다. 그에게 그의 사회형식이 있게 되자 이런 생명은 점차 변화가 발생해 복잡하게 변해 갔다.
어떤 생명은 이기적인 생각이 생겨 그 한 층의 생명에 대한 우주특성의 요구에서 빗나감으로써 이 한 경지 중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낮은 층차로 떨어지게 된다.
그런데 그가 낮은 층에서 또 더욱 좋지 않게 변하게 되면 그는 또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바로 이렇듯 생명은 오랜 역사의 세월 속에서 끊임없이 좋지 않게 변하여 점차 한 층 공간, 한 층 공간씩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으며 인류 이 한 층 공간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저급한 생활을 하고 저급한 방식으로 후대를 번식, 육성하고 있다.
그러나 당초에는 인류 이 층 공간이 없었다. 그리하여 이런 覺者, 고급 생명은 사람에게 다시 하나의 공간을 만들고 하나의 가장 미혹된 공간을 만들어 사람의 요만한 본성을 잃을 수 있는지 없는지, 그가 되돌아올 수 있는지 없는지를 보려 했다.
이렇게 하나의 공간을 만들었다. 당시 사람에게, 생명에 최후의 기회를 주고자 했을 뿐 더 많은 문제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와서는 이 공간이 너무나도 특수한 것을 발견했다.
왜냐하면, 이 공간 중의 생물은 모두 다른 공간을 보지 못하고 다른 공간의 생명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의 다른 공간 중에서는 모두 다른 공간의 광경을 볼 수 있다.
다른 공간의 생명, 그의 신체는 모두 공간 중에서 날 수 있고 떠다닐 수 있으며 모두 신체를 크게 변화시키거나 작게 변화시킬 수 있다.
현재 과학자들은 사람의 사유는 물질이며 마치 전파와 같은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당신은 전파가 물질이라는 것을 시인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공간에서는 그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의 사상은 상상한 것을 실제로 생기게 할 수 있으며 당신이 생각한 것을 현실로 이루어지게 할 수 있다. 사람은 에너지가 없으므로 그것은 생겨서 잠시 후에 흩어져 버린다.
그러나 에너지가 있는 대각자・천인(天人)・고급 생명이 생각해 낸 것은 확실히 존재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당신이 무엇을 가지려고 생각하면, 생각과 동시에 그것이 생길 수 있다.
그러므로 예전에 사람들은 말하기를, 부처는 무엇을 가지려고 하면 무엇이 있다고 하는데 대단히 자유롭지 않은가. 그러한 생명은 모두 이렇게 존재한다. 그러나 인류는 이 공간으로 밀려와서는 이런 존재로 변했다.
여러분은 모두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것으로서 자신은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장사를 아주 잘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벼슬을 아주 크게 했고, 어떤 사람은 아주 편안하게 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비하여 낫다고 생각한다.
사실 당신도 아주 고생스럽다! 당신은 당신이 예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종교에서는 사람은 사는 것이 곧 고생이라고 한다.
무엇 때문인가? 당신이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당신은 분자로 구성된 이런 하나의 물질 신체가 있게 된다. 다른 공간 속의 그는 분자로 구성된 이 한 층 신체가 없으며 가장 표면적인 신체는 원자로 구성됐다.
분자로 구성된 표면물질이 이 공간을 조성했다. 사람의 육체를 포함하여 역시 이 분자로 구성된 것이다. 이 한 층 물질로 구성된 이 신체, 당신은 태어나자마자 이 육체가 있게 되었다.
당신에게 이런 한 쌍의 분자로 구성된 눈을 줌으로써 당신은 다른 공간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 미혹 속에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미혹 속에서 우주의 진상을 보지 못하는데 당신이 말해 보라. 당신이 산다는 것은 마치 우물 안에 앉아 하늘을 보는 것과 같은데 사는 자체가 이미 아주 가련한 것이 아닌가.
게다가 사람은 이 신체가 있게 된 후, 신체는 괴로움을 두려워하므로 추워도 안 되고, 더워도 안 되며, 갈증이 나도 안 되고, 길을 걷다 지쳐도 안 된다. 아무튼, 당신에게 아주 많은 불편을 가져왔으며 아주 많은 고통을 가져왔다.
그뿐만 아니라 또한,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존재하고 늘 병이 있게 된다. 당신은 아주 편안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당신 역시 그 고통 속에서 다른 사람에 비하여 좀 낫고 고통이 좀 적은 것 같음에 불과한데, 당신은 자신이 아주 편안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바로 이렇게 살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런 생존 환경 속에서 점차 사람의 본성을 잃어 가는데, 갈수록 신(神)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게다가 실증과학이 완벽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또 사람의 도덕 표준을 잃었으며 가장 위험한 경지로 미끄러져 왔다.
하지만 인류사회는 또 하나 매우 크고 좋은 점이 있다. 즉, 고생스럽기 때문에 수련할 수 있다. 왜 부처는 늘 그런 부처 경지 중에만 있는가? 왜 그는 더욱 높이 제고하지 못하는가? 왜 보살은 부처로 수련하지 못하는가?
당신이 고생을 좀 겪으려 해도 찾을 곳이 없다. 그는 미혹 속에서 불성(佛性)을 확고히 해야만 비로소 수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에서 전혀 미혹됨이 없어 무엇이든 다 볼 수 있다고 한다. 무엇이든 다 보면서 하는 수련은 수련으로 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련이 선차적이고 깨달음이 선차적이며 보는 것은 후차적이다.
어떤 사람은, 보면 수련하고 보지 못하면 수련하지 않겠다고 한다. 만약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보게 한다면 속인 사회는 인류사회가 아니며 바로 신(神)의 사회이다.
이러면 백이면 백, 한 사람도 빠짐없이 누구나 모두 수련할 것인즉 십악불사(十惡不赦)하고 더없이 나쁜 사람마저도 수련하려고 할 것이다.
당신이 생각해 보라. 그것이 여전히 인류사회인가? 사람이 좋지 못하게 변했기 때문에 이 환경으로 떨어져 온 것이다. 만약 당신이 되돌아가려면 이 두 가지 요소를 반드시 갖춰야 한다. 즉, 하나는 고생을 겪는 것이고 하나는 깨달음이다.
깨달음이란, 예수는 믿음을 말하고 동방에서는 깨달음을 말한다. 당신이 이러한 것을 잃어버리면 수련하지 못한다.
하지만 흔히 사람들이 수련하고자 하지만, 왜 수련하기가 몹시 어렵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수련은 그다지 어렵지 않으며 어려운 것은 속인의 마음을 내려놓기가 어렵다.
역사적으로 무엇이 불법(佛法)인지를 모두 사람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석가모니 부처가 말한 것을 체계적인 불법으로 여긴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이 방대한 우주, 그는 무척 완비하고 무척 지혜롭다. 석가모니 부처는 다만 부처 이치(佛理)의 한 자그마한 부분을 말했을 뿐이며 게다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전부 말해 주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사람이 응당 알아야 할 것만 말했다.
그러므로 지금 인류사회에 남겨진 불법은 다만 불법 중의 조그마한 한 점, 조그마한 한 점일 뿐이다. 내가 방금 말했지만, 나는 인류사회에 아주 많은 것을 남겨 놓았으며 나는 앞사람이 여태껏 하지 못한 일을 했다.
내가 쓴 이 『전법륜』은 언어가 규범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현재의 규범적인 언어로서는 더욱 높은 층차, 더욱 큰 내포를 포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구어체로 썼다.
이렇게 많이 말했다. 오늘 시간이 아주 많은 것 같아 나는 여러분에게 좀 더 말해 주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앉은 어떤 사람은 아마 내가 너무 높게 말함으로써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전혀 배우지 못했으나 아주 좋다고 여겨 좀 들어보려고 온 것이며, 일부 사람은 아마 어떤 것을 좀 얻으려 하거나 혹은 내가 무엇을 연출하는지를 좀 보려고 온 것으로, 여러 가지 심태(心態)를 품고 왔다.
만약 오늘 내가 여기에서 당신에게 연출한다면 당신은 허허 하고 웃으며 마치 마술을 보고 요술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할 것이며 당신은 나와 법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불법을 전함에도 이렇게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에게 다만 이 불법을 말했을 뿐이며 믿고 안 믿고는 당신에게 달렸다. 하지만 그의 위력은 아주 큰 것으로 나는 내가 사람에게 주어야 할 것과 사람에게 주어 능히 수련할 수 있는 것을 모두 그 한 부의 법(法) 속에 담았다. (중략)
나는 또 한 가지 문제를 강조하겠다. 즉, 우리 수련하는 사람들은 전일(專一)을 중시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데, 여러 가(家)의 장점을 취한다는 이 한마디 말은 속인 중의 언어이지 수련계의 언어가 아니다.
기술을 배움에 누구의 기술이 좋으면 그의 기술을 배우는 이것은 문제가 없다. 그러나 고층공간에서 볼 때 인류의 이치는 거꾸로 되어 있다.
인류가 좋다고 여기는 것이 좋지 않을 수 있는 것으로, 전부 반대로 된다. 당신이 보라, 우리 이쪽은 대낮이나 저쪽은 밤이며 당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도 옳지 않을 수 있다. 무엇 때문인가? 내가 여러분에게 간단한 이치를 말하겠다.
여러분 다 알다시피 사람들은 고통스러우면 좋지 않다고 여기거나 혹은 누가 당신을 업신여겼다면 불편함을 느끼고 좋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데, 사람이 고생을 좀 겪고 고통을 좀 당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당신이 보라. 내가 당신에게 말하는 것은 같지 않다.
무엇 때문인가? 고층공간에 이르면 이 이치는 다 거꾸로 되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이 사람으로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본다.
당신이 인류사회에서 고통을 좀 겪음으로써 전세에 빚진 업력을 갚아 버린다면 당신은 더 높은 고층공간으로 돌아갈 수 있으며 심지어 당신은 당신이 생겨난 곳,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 설령 제고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다음 한 생에 업력이 작아져 마난(魔難)이 적어진다.
그러나 당신이 만일 빚진 업력을 갚지 않는다면 당신은 고층세계로 갈 수 없다. 바로 내가 이 이치를 말한 것처럼, 병 속에 더러운 것을 가득 채워 넣고 병마개를 꽉 틀어막고서 물속에 던지면 쿵 하고 대번에 가라앉는다.
만약 당신이 이 속의 더러운 것을 좀 쏟아내면 그것은 조금 떠올라 오고, 좀 쏟아버리면 좀 떠올라 오며, 더욱 많이 쏟아버리고 마개를 막은 후에 보면 내리눌러도 내려가지 않으며 저절로 떠오른다.
마치 우리 사람들이 수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서 당신의 신체는 생생세세(生生世世)에, 다시 말해서 당신은 아마 매 일생, 매 일세(一世)에 다른 사람을 업신여겼거나 다른 사람을 속였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해쳤거나 살생을 했다던가 하는 등등 일이 있을 수 있으며 더욱 나쁜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런 빚진 업력을 갚아야 한다.
이 우주에는 하나의 이치가 있는데,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하며 얻으려면 곧 잃어야 한다.”는 것이다. 빚진 것은 갚아야 하며 금생에 갚지 않으면 내세에라도 갚아야 하는데, 확실히 이러하다.
지금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면 우연한 것이고 다른 사람이 그를 공평하게 대하지 않은 것이며 다른 사람이 나쁘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데, 모두 우연한 것이 아니며 모두 예전에 빚진 업력이 조성한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이 업력이 없다면 거리에서 걸어가도 누구든지 모두 당신을 보고 웃을 것이며 알지도 못하는 사람마저도 주동적으로 당신을 위해 봉사할 것인즉 당신은 그야말로 편안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 그는 보증하고 인류 공간에서 생활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야 할 것이다.
사람은 바로 이러하다. 사람은 업력이 있기 때문에 사상이 정화되지 못하면 영원히 수련해 올라가지 못한다. 바로 내가 방금 말한 이치와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고생을 좀 겪고 고통을 좀 당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당신이 고생을 좀 당하면 업력을 갚아버릴 수 있고 진정하게 아름다운 곳으로 갈 수 있으며 영원히 다시 고통을 받지 않게 된다.
당신이 인류사회에서 아무리 행복하게 생활하고, 당신 집에 억만 원이 있으며, 당신의 벼슬이 아무리 높다 해도 몇십 년에 불과함이라, 아주 빨리 지나간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전생(轉生)할 때, 당신은 빈손으로 왔으며 갈 때도 빈손이다. 당신이 무엇을 갖고 갈 수 있는가? 아무것도 갖고 가지 못한다.
당신은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가? 당신은 당신의 후손에게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이 다음번에 다시 전생(轉生)할 때에 그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하므로 당신이 그한테 가서 품팔이하고 청소부가 되어도 그는 좋은 낯으로 대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당신에게 한 푼도 더 주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이러하다! 사람은 바로 이 속에 미혹되어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생의 본질적 이치를 말하고 있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특히 우리 수련하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다른 사람이 당신을 업신여길 때,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번거로움을 조성했을 때, 당신이 어떤 물질 이익에서 손해를 봤을 때, 내가 보기에는 그 무슨 나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 중에는 하나의 이치가 있는데,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하며 얻으려면 곧 잃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특점이 있다.
당신이 얻고 잃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것이 잃게끔 강화(强化)하는데, 이것이 우주의 특성이다. 방대한 우주의 일체 물질은 모두 생명이며 일체 물질은 모두 眞・善・忍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돌・강철・공기 같은 어떠한 물체든지, 인류가 만들어 낸 어떤 제품, 물질도 미시적인 구성은 모두 眞・善・忍 이런 특성으로 구성된 물질이다.
이 방대한 우주는 바로 眞・善・忍으로 구성된 것이며 그가 우주 중의 일체에 균형을 잡아 준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때리고, 욕하며, 업신여기고,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아주 기뻐하며 그가 얻은 일방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속인은 그에게 말한다. 당신은 정말로 능력이 있고, 대단하다! 당신은 손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가 손해를 보아도 아주 크게 보았다고 생각한다. 무엇 때문인가?
그가 좋지 못한 일을 했을 때, 그는 얻은 일방에 속하며 그가 다른 사람을 업신여겼기에 그는 얻은 셈이므로 잃어야 한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고통을 얻었기 때문인데, 이는 그가 행복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그렇다면 상대방은 응당 얻어야 한다.
어떻게 얻는가? 당신이 그를 한 방 치고 그에게 한마디 욕을 하는데, 당신이 얼마나 심하게 욕을 하고 얼마나 세게 치느냐에 따라 한 덩이 희고도 흰, 상등 하는 수량의 물질이 당신 신체 주위에서 날아가게 된다.
이런 물질을 德이라고 하는데 상대방에 떨어트려 준다. 상대방의 몸에 떨어트려 준다. 상대방, 그 역시 사람인지라 그도 이런 이치를 모를 수 있다.
당신이 나를 쳤지 하며 화가 나서 야단이다. 그가 화를 내면 그는 이 德을 되돌려 밀어주는 것과 같다. 그가 다시 그를 맞받아 한 방 치고, 그에게 한마디 욕을 할 때 그는 이 德을 되돌려 던져 준다.
두 사람은 모두 잃지도 않고 얻지도 않았으며 누구도 얻지 못했다. 우주의 법리(法理)는 공정하다.
만약 수련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마음속으로 내려놓을 수 있다. 즉, ‘당신이 나를 때리고 욕하지만, 내 마음속은 아주 태연한바, 나는 아무 일로도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수련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속인이기에 나는 당신과 견해를 같이할 수 없다.’라고 한다면 여러분 생각해 보라. 이 사람의 도덕표준이 올라온 것은 이미 일반사람을 초월한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이 그를 때릴 때, 그에게 德을 주는 것이 아닌가? 德이란 이런 물질은 공(功)으로 연화(演化)될 수 있다.
당신의 공은 어디에서 오는가,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데, 바로 德이 연화(演化)되어 오는 것으로, 우주 중에서 채집한 일부 물질에 당신의 德을 더해야만 비로소 당신의 공으로 연화(演化)해 낼 수 있다.
당신에게 이 德이 없으면 당신은 공을 수련해 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가 당신을 때릴 때에 그가 그의 德을 당신에게 줌으로써 당신은 德이 증가하여 더 높이 수련할 수도 있는데, 이런 이치가 아닌가?
당신이 얻은 것은 이 속인이 당신에게 고통을 만들어 주어 얻은 보상보다 훨씬 더 큰 것이 아닌가? 그가 당신을 때리거나 혹은 당신을 욕하거나 당신에게 어떤 번거로움을 조성해 주었기 때문에, 당신은 고통을 당했다.
당신은 고통 중에서 당신 자신의 몸에 가진 업력, 전세(前世)에 빚진 그런 업력이라고 하는 시커먼 물질, 그것 또한 德으로 전화될 것이며, 그것은 또 상응하는 한 몫의 德을 주게 될 것이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한 속인에게는 일거양득(一舉兩得)이다. 당신이 나에게 고통을 좀 만들었지만, 나는 오히려 두 몫의 보상을 받게 된 셈이다.
그러나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그는 네 가지를 얻을 수 있다. 이 일체를 당했을 때, 당신은 그와 견해를 같이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아주 태연한바,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았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마음속으로 아주 태연할 때, 당신의 心性은 수련하여 올라온 것이 아닌가? 만약 그가 당신에게 이 번거로움을 만들어 주지 않고 고통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수련하겠는가?
당신이 거기에 편안히 앉아서 차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수련되어 올라오고 원하는 대로 높게 수련되는 이것은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바로 이 복잡한 환경 속에서, 고난을 겪는 중에서, 마난 속에서라야 당신은 그 마음을 제고할 수 있으며, 당신은 높은 표준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당신의 心性이 그와 같지 않다면, 당신의 心性은 수련되어 올라온 것이 아닌가.
당신은 일거삼득(一舉三得)이다! 그렇다면 연공인으로서 당신은 층차를 제고하여 하루빨리 원만해야 하지 않는가? 당신의 心性이 수련되어 올라왔다면 당신의 공도 올라온 것이 아닌가?
틀림없다! 이런 하나의 이치가 있다. 즉 心性이 얼마나 높으면 공도 그만큼 높다고 한다. 이 사람의 心性이 고만큼뿐인데 공만 자랄 수 있는가? 그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으며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어떤 수련하는 사람은 心性이 나보다도 못한데 어찌하여 공이 있는가? 그가 이 방면에는 당신만 못하지만, 아마 다른 방면은 당신보다 나을 수 있다.
사람은 수련 중에서 마음을 하나씩 제거하는 것이기에 버리지 못한 마음이 표현되어 나오면 여전히 속인과 같다. 그러나 제거해 없어진 마음은 물론 표현되지 않는다.
수련인으로서 당신이 고통을 받으면 당신은 일거사득(一舉四得)이다. 농담을 한마디 하자면, 당신이 어디 가서 이런 좋은 일을 찾겠는가?
어떤 사람은 누구에게 매를 맞고 욕을 먹었다 하여 화가 나서 야단이며 마음속으로 격분하여 평형을 이루지 못하고, 또는 다른 사람이 그의 이익을 차지하고 그의 돈을 벌어 갔다 하여 그야말로 참지 못한다!
사람은 이런 것을 아주 중하게 여기며 심지어는 파리 대가리만 한 작은 이익마저도 잃으려 하지 않는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이 사람이 사는 것이 얼마나 가련한가!
그는 그런 조그마한 공짜를 위해, 공짜를 조금만 얻어도 정말로 기뻐서 난리인데. 지금 사람은 이러하다. 그는 그가 진정으로 잃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는데, 이는 가장 두려운 것이다!
이 德은 왜 이렇듯 진귀한 것인가? 여러분이 알다시피 동양의 노인들은 모두 德이 있어야만 복이 있다고 한다. 이 복은 몇 개 면을 포함한다.
즉 큰 벼슬을 하거나, 큰돈을 벌거나, 집이 있고 땅이 있거나, 행복이 있는 등등으로서 모두 그 德으로 바꾸어 온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생명에 따라 가며 사람이 죽으면 그것은 元神을 따라가고 당신이 전생(轉生)하면 그것은 또 당신이 전생함에 따라간다.
德뿐만이 아니라 흑색물질, 바로 내가 방금 말한 업력, 이런 업력도 사람의 생명을 따라간다. 이 두 가지 물질은 모두 사람을 따라간다.
과거에 노인들이 말하기를 나쁜 일을 하면 응보를 받는다고 했다. 누가 당신을 응보 받게 하는가? 누가 당신의 그 빚을 기록해 주는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상관해 주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이 德, 그것은 당신의 몸에 있으며 그것이 당신에게 단단히 붙어 있는 것으로 내세는 이 德에 달려 있다.
업력이 많으면 당신의 이 일생은 고생이 많고 병이 많고 재난이 많으며, 德이 많으면 당신 이 일생에 돈이 많고 복이 많으며 벼슬을 크게 한다. 바로 이렇게 조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연공인에게는 이 德이 더욱 진귀하다. 그것은 공(功)으로 전화될 수 있는데, 바로 이런 이치이다.(중략)
출처 ㅡ 李洪志 사부님의 97년 시드니 설법 중에서 발췌
전체보기 ㅡ https://kr.falundafa.org/book/HTML/sydney.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