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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똑바로 사는 고민을 함께하는 모임 무위경조 원문보기 글쓴이: 무위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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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치주의’와 ‘천하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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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의 과대망상인가? 치밀한 계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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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과 당쟁으로 비극을 막지 못했는가? 일본이 힘을 기르고 전쟁을 준비하는 사이에 조선과 명나라는 정치 혼란과 체제 모순 심화가 진행되면서 제대로 대처할 여유를 찾지 못했다. 특히 조선은 오랜 훈척정치(공신과 친척이 국정 전반을 도맡아 하는 것)로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성리학적 이념은 아랑곳없이 여성(문정왕후), 승려(보우), 외척(윤원형) 등이 날뛰는 세상이 된 것을 깊이 반성하면서, 이름난 선비들이 정승에서 언관까지 조정을 장악함으로써 원칙과 상식에 맞는 정치를 펴고자 하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내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지식인 특유의 소심함 때문에 그리 중대하지 않은 문제도 심각한 갈등으로 불거질 수 있었고, 여기에 많지 않은 주요 관직을 둘러싼 경쟁이 맞물리면서, ‘당쟁’이 발생하고 나날이 격렬해졌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퍼진 ‘당쟁망국론’에서처럼 이 당쟁 때문에 조선이 왜란에 아무런 대비도 못한 것은 아니지만, 국론을 통일하고 효과적으로 정책을 도출하는 데는 확실히 장애가 되었다. 그것은 이이를 비롯한 국방-민생 개혁론자들이 진정성을 의심받은 상대 당파의 공격으로 제때 개혁을 추진하지 못한 사실과, 일본의 동태를 파악하는 일조차 의견의 불일치 때문에 효과적인 대응책 마련이 어려워진 사실 등에서 찾을 수 있다(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황윤길과 김성일이 서로 정반대의 말을 남겼음은 유명한데, 김성일은 일본의 침략 의도를 알았으나 혼란을 우려해 침략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고 변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혼란이 있어도 무방비 상태로 병란을 맞는 것만큼 할까?).
한편 이처럼 필요한 개혁이 지연되고 정치리더십이 실종된 가운데 국방체제의 부실함이 심해졌다. 그것은 사실 선조대에 시작되었다기보다 조선 건국 후 2백 년이 지나면서 체제가 변형되고 해이해진 누적된 결과이기도 했다. 조선 초의 병제는 천민을 제외한 모든 양민이 병역을 지는 병농일치적 개병제였으나 차차 양반들이 병역에서 빠져나갔으며, 농민의 경우도 점차 군포를 내고 역을 면제받는 방군수포제를 따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장부상으로는 병사가 있지만 죽거나 도망한 상황에서 새로 군적을 정리하지 않음으로써 실제 근무병은 없는 폐단이 점점 늘어났다. 그래서 왜란 직전 조선군은 17만 명 정도로, 20만이 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국 초기에 비하면 축소되어 있었으며 그나마 허수(虛數)가 많았다. 한편 왜란 동안에 일본은 20만 명 정도를 조선에 파병했는데 따라서 수적으로는 그렇게 압도적이 아니었으나, 전문성이 떨어졌던 조선의 병력은 패배하면 흩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실제로는 늘 병력 부족 상태에서 전쟁을 해야 했다.
이렇게 되니 전통적인 진관 체제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진관 체제는 거점 방어에 주력하여 적이 침략하면 해당 진에서 최선을 다해 막고, 역부족으로 그 진이 뚫리면 다음 진이 막는 사이에 중앙군이 도착해 적을 섬멸한다는 개념이었다. 그런데 각 진마다 병력이 부족하다 보니 버티지 못하고 연속으로 격파되었으며, 1555년의 을묘왜변에서는 전라도가 깊숙이까지 유린되고 전라 병사 원적이 전사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를 계기로 진관 체제를 제승방략 체제로 전환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거점 방어 대신 지역 방어 개념을 써서, 적이 침입하면 그 지역의 병력을 한데 집결시킨 다음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의 지휘로 적과 일대 결전을 벌여 격퇴한다는 것이었다. 소수의 병력으로 각개격파되기보다 초기의 희생을 감수하며 집중된 전력으로 승부한다는 것인데, 일리는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임진왜란 초기의 전황을 더욱 불리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국방의 부실은 민생의 불안, 민심의 이반과 이어져 있었다. 양반은 병역을 기피하며, 평민도 여유가 있으면 군포를 내어 면제받고 가난하면 도망해 버리는 가운데 죽은 이나 도망한 이의 군포를 친인척에게 강제 징수시킴으로써 원성이 컸다. 여기에 국초에 만든 방물 목록이 오랫동안 개정되지 않음으로써 바뀐 현실을 반영하지 못해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토산품’을 구해 바치느라 방납업자에게 등골이 빠지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왜란 당시 일본군에게 호응하여 아군 관리들을 붙잡아 바친 고을도 적지 않을 정도였다. 병력의 대부분이 일반 백성인 나라에서, 민심의 이반은 곧 사기 저하, 전투력의 저하로 이어졌다. |
소통의 부재와 오해, 또 하나의 전쟁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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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죽지세의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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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임진강, 마침내 대동강까지 건넌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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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멈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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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장군’, 일본군을 밀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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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에 앉아 서로 노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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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교섭의 희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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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왜 백의종군을 해야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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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문이 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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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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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대신 경직된 사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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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만두를 먹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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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 재조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