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협 외 2편
김동헌
시간을 감당하지 못하고
물살은 먼 바람 속을 헤집고 들어갔다
바람의 속살은 푸르고, 깊고, 아늑하여
이율배반적이었다, 하긴 세상이 온통 이율배반이다
지상에서의 시간을 하나씩 죽여 가던
아버지는 절망하지 않았고
나는 울돌목의 변함없는 물살에 절망했다
나는 그때의 시간들을 헤어짐이라 생각했지만
아버지에게 그 시간들은 만남을 위한 설렘이었는지도 모른다
부쩍 할매를 뵈었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고
심지어 진도대교 아래서 저 빠르고 무심한 물살을 보며
이순신의 이야기를 마치 친구의 일인 것처럼 말씀하실 때
아,
산 사람은 시간을 감당하기가 두렵고
시간을 잘 감당한 사람은
죽음조차 귓전을 울리는 너울소리 쯤으로 여긴다는 것,
이제,
가끔,
홀로!
녹진 전망대에서
명량해협을 내려다보며
시간을 벗고
저 물의 푸른 살결 속으로
잠행할 수 있을 때를
가늠해 보며
새삼 느끼는 것이다.
흔들림에 대하여
우리가 흔들리는 건 바람 때문만이 아니다
때론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는 무력감에 흔들리고
한 사람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에도 흔들린다
우리 안에 자리 잡은 감정 때문에 흔들리고
그 감정이 울며 빠져나갈 때도 흔들린다
감정에는 균형을 맞춰줄 추가 없으므로
정情으로 추를 삼는 것인데
제어하기 힘든 정 때문에 우리는 흔들리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의식 때문에 흔들린다
그러므로 우리를 흔드는 것은 바람도 아니고, 타인도 아니다
우리 안에 자리한 감정들이
균형을 잡지 못하는 이유로
우리는 자주 흔들리고
자주 소란스럽다
그 속에서
드물게
웃음소리를 듣기도 하는데
그건 운명이
우리를
조소하는
소리다.
봄꽃
푸른 봄날에 베여 저리 붉은 피 흘리니 계절은,
참혹하기도 하다.
저 환장할 놈의 꽃,
처참하기도 하다.
그 칼날 같은 봄 위에 나도 아득히 핀다.
보아라,
피어나 서러운 꽃도 있다.
더러 피지 말았어야 할 처참함도 있다.
시를 생각하는 마음
시를 쓰고 난 뒤, 자신의 시에 대해 이러저러한 말을 하는 것은 겸연쩍은 일이다. 대저 시인은 시로 말해야 하는 법. 어쩌면 시 이외의 것. 소위 시론이라는 놈은 요설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자신의 시론대로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 대단한 사람일 것이다. 보통의 경우, 시론과 시는 불화하는 담론과 같다. 시인의 정신 중 한 단면이 그의 시론에 깃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에 시인 자신의 시론이 고스란히 담겨있기란 힘든 일이다. 적어도 부족함이 많은 나에게는 그렇다.
하여 나는 소위 시론에 대해 섣부른 말을 할 수 없다. 그러면 내게 시론이 없는 것인가 하면, 또 그것은 아니다. 체계화된 이론은 아니지만, 나 역시 ‘시는 이렇다’ 식의 되먹지 못한 시론이 있긴 하다. 하지만 나는 함부로 시론이라는 놈을 꺼내놓지 못한다. “이런 시도 있고 저런 시도 있다”1)는 대학원 은사님의 격려로 다시 시에 천착할 수 있게 된 이후, 나는 시법이나 시론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늘 변화하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어서 절망하고, 홀로 다시 일어선다. 이런 측면에서 내 삶은 저 들판에 피어나는 이름 모를 풀꽃과 같다. 내 시는 저 산에 새로 돋는 푸른 잎들 같다. 지면 다시 돋고 돋았다가 이내 스러지는.
‘거인자구去人滋久 사인자심思人滋深’2)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을 떠나보낸 지 오래될수록 그 사람 생각이 더 깊어진다는 뜻이다. 오늘 천암함에서 산화, 순직한 병사들의 장례식을 보면서 이 말의 의미를 다시 곱씹는다. 유족들의 저 울음은 핍진한 그리움의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숨 막히는 오열과 탈진하도록 부르짖는 단장의 외침은 앞으로 저들에게 닥칠 광포한 시간의 횡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세월이 지나가면 대중들의 뇌리에서 천안함과 병사들의 느닷없는 죽음은 잊혀 질 것이다. 그러나 오늘 영면한 이들을 진정으로 아는 몇몇 이들은 시간 속에서 그리움이 점점 커가는 것을 볼 것이다. 그것은 지독하게 개인적인 경험일 것이다. 졸시 「명량해협」은 그런 그리움과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아버지가 췌장암 진단을 받고 내 집 서재에서 투병 하실 때, 형제들은 주말이면 모두 목포로 내려와 아버지를 뵈었다. 아버지 역시 주말마다 내려오는 자식들을 기다리는 것이 큰 즐거움이신 것 같았다. 이렇게 내려왔던 자식들이 생업을 위해 길을 재촉하는 일요일 오후가 되면 당신은 몸살을 하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모시고 가까운 곳에 바람을 쐬러 나가곤 했다. 우수영의 명량해협3)도 그런 장소 중 하나다.
어느 일요일 오후, 어디라도 가야지 이러고 있으면 되겠냐는 아버지를 모시고 울둘목으로 향하던 일을 생각한다. 소년처럼 들뜬 아버지가 서울로 가는 작은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진도대교를 보러 간다고 자랑하던 일을 생각한다. 진도대교 아래 도도히 흐르던 물살과, 아버지를 업고 오르던 녹진 전망대를 생각한다. 딸아이의 웃음과 아버지의 찌푸린 미간을 생각한다. 그늘에 자리 깔고 다정히 앉으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지막 시간들을 찍으며 명치까지 엄습하던 통증을 생각한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내가 느꼈던 절망과, 아버지의 의연함을 생각한다. 시간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과 시간을 잘 감당한 사람은 삶을 보는 시각이 다르다. 젊은 나는 아버지의 병세에 일희일비했지만, 아버지는 일일청한 일일선一日淸閑 一日仙4)이라며 하루하루의 시간들을 감사했다. 거인자구去人滋久 사인지심思人滋深, 세월이 갈수록 떠나가신 분에 대한 그리움은 더 간절하다. 시간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에 대해 생각하며 이 시를 썼다. 내가 시간 속에서 스러질 때를 생각하며 이 시를 썼다.
또 다른 시, 「흔들림에 대하여」는 인간의 내면을 추적하려는 의도로 썼다.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 왔다. ‘너희 모든 것을 주께 맡기라’는 성서의 말이나 ‘하심’이라는 선사의 화두는 모두 ‘마음’ 문제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산물이다. 마음을 주께 맡기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까. 마음까지도 내려놓으면 흔들림이 없을까. 잘은 모르지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알아낸 사람이 아직 없는 것 같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조소만 들린다. 어느 때는 마음이 없고 어느 때는 많은 마음으로 마음이 산란하다. 어느 때는 고요하고 어느 때는 흔들리며 소란스럽다.
인생을 계획적으로 산다는 말을 겁 없이 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그들의 안위가 몹시 걱정된다. 삶은 자주 우리를 속이고 우리를 분노케 한다. 그러니 삶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당당할 수 있다는 이의 말이 위태롭게 들리는 것이다. 적어도 시간 앞에 겸손해야 할 것이다. 인생은 우리의 계획과는 전혀 상관없이 불가해하고 비가역적이다.
이 시를 제자들에게 주고 싶다. 젊은 나의 투사들은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면서 계획한 대로 삶을 살아갈 것이라 믿는다. 기꺼이 이 무모한 믿음에 박수를 보내지만, 나는 이 정도의 얄팍한 생각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고 있는 작금의 교육제도에 실망을 금치 못한다. 학업을 관리하고, 스팩을 관리하고, 인생을 관리하여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아주 어리석은 사람이거나 낭만적인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인생을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볼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대책 없이 호의적으로 보는 것 역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 사람을 마음에 온전히 담는 것도 힘든 현실에서 세계를 품으라고 말한다. 기실 세계는 자아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내면에 존재한다. 우리가 싸워 이겨야할 대상은 우리 자신임에도, 현대 교육은 불특정 다수의 타자를 적으로 상정하고 그들을 이기는 것이야 말로 인생에 승리자가 되는 길이라고 말하는 우를 범한다.
「봄꽃」은 밤에도 환한 입암산의 꽃들을 보며 썼다. 아름다운 것은 슬픈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에 맞닿아 있다. 이면을 보지 않으면 지천으로 피어서 봄밤마저 밝히는 꽃은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정말 그런가. 나는 봄꽃에서 장엄과 참혹을 동시에 본다. 봄은 날선 검처럼 겨울을 베어 버린다. 나무와 들판은 이 상처로 아픈 것이다. 우리는 봄 냄새에 취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봄날에 베인 계절의 흐느낌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유한성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처참하기도 하다. 시간 앞에서 생명은 영원히 약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부활을 꿈꾸고 윤회를 믿는다. 그리고, ‘자연은 순환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불혹不惑, 유혹에 흔들림이 없다는 나이. 그러나 불혹을 진즉에 넘긴 나 역시 늘 흔들리고 늘 다시 선다. 우리는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말처럼 “날마다 죽는”5) 연습을 하는 중에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죽으려는 사람은 없고, 지려는 사람도 없다. 모두들 살려고 발버둥이고, 모두들 이기려고 아우성이다. 흔들림의 원인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유한성으로 말미암은 것일 터.
그러면 시를 생각하는 마음은 무엇인가. 결국 삶을 생각하는 마음일 것이다. 나는 시를 통해 삶을 통찰하고 시를 통해 삶과 조우한다. 나에게 그 빌어먹을 시론이란 것이 있다면, 삶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것 정도이겠다. 내 사유와 철학을 시어 속에 담는 것이겠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6)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속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시를 통해 떠나간 사람들과 만나고 싶고, 살아있는 사람들과 교감하고 싶다.
각주) 1) 박찬일, 「이런 시도 있고 저런 시도 있다」, 『시를 말하다』, 연세대 출판부, 2007. 박찬일 선생님은 내가 존경하는 은사시다. 그분의 이 한마디. “이런 시도 있고 저런 시도 있다. 이것도 시고 저것도 시다.”는 말씀은 시 쓰기에 자신을 잃은 나를 다시 깨어나게 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나는 대학원에서 시 창작 강의를 들으면서 시 쓰기를 포기할 뻔 했었다. 논문심사가 통과되면 졸업인데 이 일을 어쩌나 고민하다가 연대 앞 어느 식당에서 선생님을 뵈었다. 그때 주신 이 말씀은 나를 다시 시와 살아갈 수 있게 해준 동력이었다.
2) 「장자」에 나오는 명언. 은사인 서무귀徐無鬼가 위 나라 무후를 배알하며 한 말. 원래는 언어의 진실성에 대한 담론 중에 나온 말이다.
3) 명량해협鳴梁海峽 또는 울돌목은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의 화원반도와 진도군 내내면 녹진리 사이에 있는 해협이다. 길이 약 1.5km이며, 폭이 가장 짧은 곳은 약 300m 정도가 된다. 밀물 때에는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한꺼번에 명량해협을 통과하여 서해로 빠져나가 조류가 5m/s 이상으로 매우 빠르다. 이를 이용하여 정유재란 당시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군이 승리하였다. 물길이 암초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소리가 매우 커 바다가 우는 것 같다고 하여 울돌목이라고도 불린다. 유속은 약 10노트(10knot, 시속 20km 정도)라고 한다. 「위키 백과사전」 참고.
4) 「명심보감」성심편에 나오는 말이다. 마음이 깨끗하고 한가로우면 그 하루는 신선이라는 말. 암이 아버지를 공격하다 지친 날이면 아버지는 이 말을 인용하며 즐거워 하셨다.
5) 고린도 전서 15장 31절. 여기서 바울이 말한 죽음은 ‘예수 안에서의 죽음’일 터. 성화에 대한 이 이야기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생각한다. 언제 철이 들 것인가.
6) 잠언에서 솔로몬이 한 말.
김동헌 / 계간 『열린시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반송터널에서 길을 잃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