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고학 자료에는 고조선의 강역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
1. 고조선의 강역은 지배층의 문화 분포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고고학 자료로 고조선의 강역을 밝히는 데는 다음 세 가지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첫째는 유적과 유물을 검토할 때 그 유적이나 유물이 고조선 문화의 상부구조를 형성했는가 아니면 하부구조를 형성햇는가를 먼저 파악해야 할 것이다. 지배계층의 것인가 아니면 피지배계층의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 유적이나 유물이 어느 곳에서나 또는 누구나 쉽게 만들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지역 또는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만 제작이 가능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을 만드는 데 필요했던 권력·재력·기술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다.
셋째는 현재 이용이 가능한 고고학 자료는 당시의 문화 가운데 지극히 적은 일부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 이미 발견된 것들과 동일한 성격 또는 전혀 새로운 성격의 유적과 유물을 많이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영역을 고증하는 데서는 고조선문화의 상부구조를 형성했던 유적과 유물이 하부구조를 형성했던 것보다 중요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고조선의 지배계층 문화이기 때문에 그러한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는 지역은 고조선의 지배계층이 활동했던 지역으로서 고조선의 강역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 유적과 유물이 특정한 사람들만 제작하였을 경우에는 그 의미가 더욱 더 커진다. 청동기가 그 대표적인 것이 될 것이다. 반면에 피지배계츠의 하부문화 유적이나 유물로서 어느 곳에서나 또는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것들은 강역을 밝히는 자료로 이용하는 데 조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고조선의 것이라 할지라도 지역에 따라 그 특징에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질그릇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러한 구분이나 생각 없이 모든 유적과 유물을 동등하게 다루었을 경우 사실과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할 위험이 있다.
위에 언급한 점들을 염두에 두고, 고조선문화의 상부구조를 형성했던 대표적인 유물과 유적을 들면 청동기와 돌무지무덤·돌상자무덤·돌곽무덤·고인돌무덤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에 청동기는 지배계층의 독점물이었는데 고조선은 청동기시대였다. 청동기 제작에는 막대한 재력과 특수한 기술이 필요했고 원료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나 쉽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청동기는 주로 무기와 예기(禮器)였는데, 그것들은 모두 통치와 권위를 뒷받침하는 도구였다. 무기는 통치에 필요한 무력(武力)으로 사용되었으며, 예기는 고대사회를 지배한 종교의식의 도구였던 것이다. 이러한 청동기를 독점함으로써 지배계층은 그들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돌무지무덤·돌상자무덤·돌곽무덤·고인돌무덤 등은 청동기처럼 특수한 기술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만드는 데는 많은 사람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과 재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지배계층의 유적일 수밖에 없다. 이상의 지배계층의 유물과 유적 가운데 가장 특징이 잘 나타나는 것은 역시 제작에 특수한 기술을 필요로 했던 청동기일 것이다.
따라서 같은 성격의 청동기가 출토되는 지역은 같은 통치 집단이 지배했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보고 있다. 예를 들면 중국의 경우 상(商)문화에 속하는 청동기가 출토되는 지역은 상나라의 강역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질그릇만을 기준으로 하여 상나라의 강역을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같은 상나라의 강역 안에서도 질그릇은 지역에 따라 다른 특징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강역을 밝히자면, 먼저 고조선문화에 속하는 청동기의 출토범위를 확인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근래 고고학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고조선은 초기부터 청동기시대였다. 북경 근처에 있는 난하를 경계로 하여 그 동쪽에는 황하 유역의 초기 청동기문화인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나 상문화(商文化)와는 다른 청동기문화인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가 있는데, 방사성탄소측정에 다라 서기전 2410년 무렵의 문화로 확인되었다. 실제로 이 문화가 시작된 연대는 이보다 앞설 것이다. 이 문화 유적은 지금까지의 조사결과로는 요령성과 길림성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문화가 고조선의 영토 범위에 들어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문화의 전체적 분포 범위를 말하기는 아직 발굴 자료가 충분하지 못하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하여 고조선의 강역을 논하는 것은 아직 불가능하다.
2. 비파형동검의 분포는 고조선 강역을 밝히는 기준이 된다
서기전 16세기~14세기 무렵부터 나타난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은 그 동안 여러 지역에서 꽤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그 성격과 분포 범위를 논하는 것이 가능하다. 고조선의 건국 연대를 서기전 2333년으로 본다면 이 문화의 개시 연대인 서기전 16세기~14세기는 고조선의 중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비파형동검의 분포 지역을 기준으로 하여 확인된 고조선의 강역은 그 중기 이후의 강역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청동기시대의 무기 가운데 청동단검(靑銅短劍)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은 당시 싸움터의 육박전에서 사용되었던 주된 무기였으며 통치권력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청동단검은 그것을 사용했던 정치세력에 따라 저마다 다른 특징이 있는데,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는 비파형동검을 사용했던 것이다. 비파형동검은 지역이나 시기에 따라 그 모양이 어느 정도 다르기는 하지만 공통된 특징은 검신(劍身)과 손잡아, 칼자루맞추개틀, 칼자루맞추개돌 등으로 이루어져 조립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검신은 옛날 악기인 비파처럼 날의 아래 부분이 둥글고 양쪽의 칼날 중간 부분에는 뾰족한 돌기부가 있다. 이 비파형동검에 나타난 지역이나 시기에 따른 모양의 차이는 이 문화 전반의 공통성에 견주면 지극히 미미하다. 따라서 이로 말미암아 이 문화의 공통성, 단일성이 약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비파형동검이 사용되던 시기에 중국의 황하 유역과 그 북부인 오르도스(Ordos) 지역에서는 비파형동검과는 전혀 다른 동검문화가 있었다. 황하 유역의 동검문화는 고대 중국문화로서 일반적으로 ‘동주식 동검문화(東周式銅劍文化)’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문화의 분포 범위는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북쪽은 하북성(河北省)·산서성(山西省)·섬서성(陝西省)의 남부에 이르렀고 남쪽은 장강(長江) 북부 유역까지 이르렀다. 이 영역은 춘추전국시대의 중국 영역이엇다. 오르도스 지역의 동검문화는 ‘북방계문화’ 또는 ‘오르도스식 동검문화’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 문화는 북쪽에서 황하 중류가 북상하였다가 다시 남하하는 오르도스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내몽고자치구와 하북성 북부, 외몽고와 남시베리아를 포괄한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이 문화는 중국의 서주시대 이전에 성립되어 서주와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서한 초기에 이르는 시기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동검의 형태를 보면 동주식 동검은 검신과 칼자루를 함께 붙여 만들었으며 검신이 일반적으로 좀 길고 능형의 칼코가 있다. 자루에는 2줄~3줄의 돋친 띠가 있는 것이 많고 자루 끝은 모두 작은 원판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동검에는 짐승이나 그 밖의 것들을 형상화한 것을 볼 수 없다. 오르도스식 동검은 동주식 동검과 같이 검신과 칼자루를 함께 붙여 만들었는데 칼날은 곧다. 칼자루의 끝은 초기에는 짐승 대가리 모양이나 방울 모양의 장식이 유행하다가 그 뒤에는 두 개의 새 대가리가 마주 대하고 있는 모양의 촉각식(觸角式)으로 바뀌었고 마지막에는 고리 모양의 환두(環頭)로 바뀌었다.
그러나 비파형동검은 이것들과는 달리 검신, 칼자루, 칼자루맞추개를 따로 만들어 조립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칼코는 없으며 칼날은 독특한 곡선을 이루었고 검신의 한가운데에는 세로로 등에 대가 있다. 이와 같이 비파형동검은 동주식 동검이나 오르도스식 동검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여 준다. 비파형동검문화와 주변문화와의 차이는 동검 자체의 차이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동검이 출토된 유적이나 동검과 함께 출토되는 유물 등에서도 확인된다.
3. 돌무덤은 고조선 지배층의 대표적 무덤이다
동검은 대개 무덤에서 출토되는데, 동주식동검이 출토되는 고대 중국의 무덤은 덧널무덤[木槨墓]와 움무덤[土壙墓]인데 덧널무덤이 보편적이다. 당시의 중국 질그릇 가운데 특징적이고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회색의 세발단지인데 몸체에는 한결같이 멍석무늬가 있다. 그리고 장식품으로서 동주식 동검문화권에서는 띠걸이가 유행하였으나, 오르도스식 동검문화권과 비파형동검문화권에서는 띠걸이 장식품을 전혀 볼 수 없다.
오르도스식 동검이 출토된 북방 지역의 무덤은 모두가 움무덤인데, 말·소·양 등이 부장되어 있다. 이 문화권에서는 질그릇이 그리 많이 출토되지 않는데, 출토된 것들을 보면 무늬가 없는 회갈색이 많고 형태는 통 모양의 바리나 그와 비슷한 것으로 매우 단조롭다. 장식품은 말·사슴·양·호랑이 등을 형상화하였거나 조각한 장색패쪽이 많다. 이러한 동물장식은 동검자루 끝의 장식에서도 보인다.
그러나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무덤은 돌무지무덤·돌상자무덤·돌곽무덤·고인돌무덤 등 돌을 이용한 무덤이 대부분이고 움무덤은 극히 드물다. 특히 돌무지무덤·돌상자무덤·돌곽무덤·고인돌무덤 등 돌을 이용한 무덤은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만 보인다. 비파형동검문화권의 질그릇은 단지, 굽접시, 바리 등이며 갈색의 간그릇이다. 무늬가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가끔 삼각무늬, 그물무늬, 선무늬 등이 있을 뿐이다. 무늬를 새기고 중심을 벗어난 곳에 꼭지가 두 개 이상 있는 둥근 모양의 청동거울이 사용되었으나 이러한 형태의 청동거울은 중국 고대문화나 북방계문화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상과 같이 비파형동검문화는 동주식 동검의 중국 고대문화나 오르도스식 동검의 북방계문화와는 분명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중국의 고고학자 임원(林沅)은 비파형동검의 특징과 그 분포 지역 등을 세밀하게 검토한 뒤, 이것은 하나의 독립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중국 문헌의 기록을 가지고 볼 때, 그것을 만든 사람들은 예·맥·고구려·부여·진번·조선 등의 종족일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고조선의 거수국이었으므로 비파형동검은 고조선 사람들이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비파형동검문화는 그것과 함께 출토되는 유물에서도 공통성을 드러내고 있다.첫째로 질그릇의 공통성을 들 수 있다. 비파형동검과 함께 출토되는 질그릇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갈색 간그릇이 그 기본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보여 준다. 둘째로 청동도끼의 공통성을 들 수 있다. 비파형동검과 함께 출토된 청동도끼는 모두 그 형태가 부채 모양이며 날부분의 양쪽 끝이 버선코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보여 준다.
문화는 민족을 특정짓는 기본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민족을 규정하는 기본요소로서 일반적으로 귀속의식·핏줄·언어·종교·거주 지역·문화 등의 공통성을 드는데 문화가 그 기본요소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은 그것이 민족 공동의 노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형성 배경과 동검이 지배계층의 독점물이었다는 점을 연결시켜 생각해 볼 때, 비파형동검문화는 하나의 겨레, 하나의 나라 사람들이 만든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4. 고조선의 강역은 유적 분포보다 넓게 잡아야 한다.
그러면 이러한 비파형동검문화의 분포범위는 어디까지였는가? 과거에는 이 문화가 중국의 요령성(遼寧省)을 중심으로 하여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학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 문화를 ‘요령식 동검문화’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의 발굴결과에 따르면 이 문화는 한반도와 만주 전지역에 분포되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북쪽은 장춘(長春)과 길림(吉林) 지역의 송화강(松花江) 유역에 이르고, 남쪽은 한반도 남부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해안 지역, 서쪽은 중국의 하북성 동북부, 동북쪽은 우수리강[烏蘇里江] 유역에 이르렀다. 특히 하북성 지역에서는 서남쪽으로 북경과 천진을 훨씬 지난 망도(望都) 지역에서까지 비파형동검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고조선의 통치력이 때에 따라서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중남부에까지 미쳤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그런데 비파형동검은 대부분 지배계층의 무덤에서 출토되기 때문에 그것이 국경지대에서 출토될 수도 있지만, 대개 국경보다는 다소 안쪽에서 출토된다고 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지배계층들이 바로 국경 지역에 살았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조선의 국경은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지역보다 약간 밖으로 잡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말해 두고자 하는 것은 동북부 끝의 흑룡강성 지역에서는 비파형동검이 출토되지 않았는데도, 필자는 그 지역을 고조선의 강역에 포함시키려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첫째로 그 지역은 동부여의 영토였는데, 부여는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지금까지 그 지역에서는 고고학적인 발굴이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비파형동검이 출토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셋째로 지형을 보면 동북평원이 동북쪽으로는 요하를 따라 북상하여 눈강[嫩江]·목단강(牧丹江)·흑룡강·우수리강 등의 유역을 지나 연해주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해안을 따라 한반도의 서부평야와 연결된다. 따라서 당시의 농경인들은 이 선을 따라 이동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특히 동북 지역에서는 비파형동검의 뒤를 이은 고조선의 동검인 세형동검(細形銅劍)이 연해주 지역에서까지 출토된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종래에는 세형동검이 한반도에서만 출토되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나 근래의 출토상황을 보면 길림성의 장춘과 길림 지역은 물론 연해주 지역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조선의 세력이 때에 따라 연해주 지역까지 미쳤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검토로 분명해진 것은 비파형동검문화의 유물과 유적의 분포범위는, 앞에서 한국과 중국의 문헌기록으로 확인된 고조선의 강역과 대체로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비파형동검의 출토상황을 참고하는 데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각 지역에서 나온 비파형동검의 숫자나 그것이 발굴된 유적의 숫자를 바로 고조선시대에 그 지역이 가지고 있었던 중요성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물이나 유적은 발굴작업을 거쳐 확인되기 때문에 발굴이 행해지지 않은 지역에서는 유물이나 유적이 확인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 비파형동검이 가장 많이 출토된 지역은 지금의 요서 지역이다. 반면에 흑룡강성에서는 출토되지 않았다. 그리고 요동 지역은 가장 이른 시기의 비파형동검과 전형적인 비파형동검이 출토되는 지역인데도 지금까지 출토된 수량은 요서 지역보다 적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동안 요서 지역에서는 발굴이 다른 지역에서보다 훨씬 활발하게 이루어진 반면에 흑룡강성에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둘째로 요서 지역은 대체로 지대가 높지만 요동 지역과 흑룡강성 지역은 동북평원으로 지대가 낮고 요하·송화강·모란강·눈강·흑룡강·우수리강 등을 끼고 있다.
이 지역은 이러한 강들이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범람하여 유적이 지하 깊이 묻혀 버렸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요서 지역의 유적은 쉽게 노출되거나 발굴될 수도 있지만, 요동 지역과 흑룡강성 지역은 유적들이 요서 지역보다 지하 깊숙이 묻혀 있어 쉽게 발굴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고조선과 같은 시대인 중국의 상(商)나라 유적이 황하 하류 유역에서는 범람으로 말미암아 몇 미터 깊숙이 덮여서 찾기 힘들다는 사실은 참고가 될 것이다.
5. 고조선은 초기부터 한반도와 만주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비파형동검은 서기전 16세기~14세기 무렵부터 사용되었기 때문에, 비파형동검문화가 분포되어 있는 지역은 정확히 말하면, 고조선 중기 이후의 강역이다. 그 이전의 고조선 강역은 어디까지였을지가 문제로 남는다.
이 문제에 접근할 때,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사람이 정착해 살면서 정치세력을 형성한 것은, 고조선 건국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며 그보다 훨씬 전부터였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다만 고조선 이전에 형성된 정치세력이 국가단계의 수준에 도달했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 하는 점이 문제가 될 뿐이다.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에 따르면,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는 지금부터 70만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는데, 1만년 전 신석기시대부터는 정착생활에 들어가 마을을 이루었고, 그 뒤 후기 신석기시대에 이르러서는 각 지역에 있던 여러 마을이 서로 모여 마을연맹체 즉 고을을 이루었으며, 다시 이러한 고을들이 모여 고조선이라는 국가를 출현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이라는 넓은 강역을 가진 국가가 출현하기까지는 고조선이 건국되기 훨씬 이전부터 오랜 기간에 걸친, 거주민들의 세력통합이 줄곧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의 세력성장이나 영역확장을 고조선시대로 국한하여 고조선 초기부터 잡는 것은 잘못이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고조선아 건국되기 훨씬 전인 신석기시대부터 난하 유역을 경계로 하여 그 서쪽과 동쪽은 다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난하 동쪽의 한반도와 만주는 난하 서쪽의 황하 유역과는 전혀 다른 새김무늬(빗살무늬)라는 공통성을 지닌 질그릇이 요하 중류 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연해주와 한반도 남부까지 분포되어 있다. 신석기시대 후기에 이르면,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는 황하 유역의 움무덤과는 전혀 다른 돌무지무덤이 나타나고 그 뒤를 이어 돌상자무덤·돌곽무덤·돌널무덤·고인돌무덤 등 돌을 사용한 무덤들이 지배세력의 무덤으로 보편화된다.
그리고 서기전 2500년 무렵에 이르면, 지금의 난하 동부 지역에는 황하 유역과는 전혀 다른 청동기문화인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가 시작되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문화 유적은 아직까지는 지금의 요서 지역에서만 발굴되었기 때문에 그 분포범위나 기원지 그리고 중심부를 말하기는 어렵다.
하가점하층문화와 비파형동검문화를 이질적인 문화로 보는 학자도 있지만 그것은 고조선의 강역을 대릉하까지로 보는 그들의 견해를 유지하기 위한 주장일 뿐이며, 동일한 지역에 있었던 시대를 전후한 두 청동기문화를 서로 계승 관계가 전혀 없는 문화라고 주장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 것이며 청동 기술이 부분적으로 이어진 문화로 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비파형동검 같은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청동제품은 오랜 기간에 걸친 기술 축적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비파형동검은 동일한 지역에 있었던 전시대의 하가점하층문화의 청동기 제조 기술이 발전되어 생산한 새로운 제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제품의 차이는 부분적인 것이며 그 기본이 되는 청동기 제조 기술은 계승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고조선이 건국되기 전부터 난하 유역은 황하문화권과 한반도·만주문화권을 나누는 경계선이었다. 따라서 고조선은 초기부터 난하를 그 서쪽 국경으로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조선 초기에 황하 유역의 정치세력은 아직 난하 유역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러한 정황과 고고학 자료 등에서 볼 때 고조선 초기의 강역도 중기 이후의 강역과 별로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