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당시 청이 천연두가 무섭긴 했나본데
1637년 1월 16일 이후로 청의 움직임이 예사롭지가 않음. 일단 청은 대릉하성 전투의 전훈을 가지고 남한산성을 공략하고자 했고 최소 70~80일 정도의 전투 기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홍이포 28문 등 신형 장비와 대규모 병력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조선군이 각지에서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 전략을 취했음.
대릉하성 공방전 때 청군이 약 70여 일 가까이를 작전 시간으로 소비하면서 결국은 출성 항복을 유도했으니 남한산성은 그 이상일 것으로 생각하고 장비와 병력, 그리고 군수물자를 준비해 온 것으로 보여짐.
동시에 한강의 결빙이 슬슬 풀릴 2월 말을 노리고 병력 일부를 분산해서 한강 일대에서 2월 15일까지 필요한 선박을 건조하게 하여 결빙과 함께 하류로 내려가 강화도 강습 상륙을 기획했는데 갑자기 청군 측 움직임과 함께 17일 하루 만에 모든 작전 계획이 변동됨.
게다가 협상을 하고자하는 조선 측의 제안을 16일까지는 국서 문제로 이리저리 트집을 잡다가 갑자기 17일 이후로 태도를 180도 바꾸어 적극적인 협상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갑작스럽게 먼저 남한산성으로 사람을 보내어 사신 파견을 요구하기 시작함.
조선 측은 이러한 청 측의 반응에 상당한 의구심을 보였으며, 13일에 보낸 국서에 대해서 직접 홍타이지가 반박하며 출성 항복을 요구하는 부분에서 조선의 수뇌부는 청 진영에서 무언가 사건 하나가 큰 게 터졌다는 것을 직감함.
전날까지만 해도 청은 회답 국서를 보낼 의사가 없었고, 조선에 대해서 고자세를 유지했으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대해서 직접 회담장에 나섰던 홍서봉은 조선군에게 청군이 대패했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으며 최명길도 청군의 전황이 갑작스러운 문제로 악화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을 정도.
18일에도 청은 먼저 사람을 보내어 접촉을 제안함과 동시에 19일 등의 날짜에 싸움을 벌이자고 제안했고 협상이든 싸움이든 청군 쪽에서 먼저 나서서 연일 접촉을 시도해 오자, 인조 역시도 청군 내부에 큰 일이 있는 것으로 인식했음.
심지어 20일에는 야심한 시각에 청군 진영에서 사람을 보내어 조선 쪽에 사신을 내보내라고 요청하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고 이러한 움직임에 상당한 의구심이 감. 1월 16일까지 만해도 협상 의사가 별로 없고, 그야말로 남한산성을 대릉하성마냥 말려죽이려고 했던 청이 태도를 180도 바꾼 것은 분명히 그만큼 자국 내부에서 큰 문제가 터졌음을 의미하기 때문임.
군사적인 측면에서 그들로 하여금 귀국을 서두르게 할 만한 요인이 있었다면, 그것은 명군의 본국 공격 가능성 뿐이었으나 실제적으로 명군이 군사활동을 시작한 것은 전쟁이 끝난 2월 중순이었으며, 그것마저도 청군과 마주치기도 전에 퇴각했고, 이 때는 이미 홍타이지가 압록강을 건너 심양에 도착할 즈음임.
조선군의 활동도 이쯤되면 거의 주요 요새에서 병력 집결시켜서 유사시를 대비하여 버티고 있을 뿐, 초반전처럼 적극적인 요격 작전에 나설 수가 없었고, 앞서 말한 우역 문제 등으로 군수물자 수송 등 보급 능력이 크게 떨어지고 기동성이 하락하면서 어쩔 도리가 없었던 상황임.
더 이상한 것은 “지체해서는 안 될 큰일과 긴급한 소식”에 해당하는 보고를 홍타이지는 이 기간동안 받은 일이 전혀 없었고 조선과는 사실 협상 의사가 없다시피함.
그리고 16일 심양에 보낸 서신에서 홍타이지는 강화도를 점령한 이후에도 조선의 왕이 투항하지 않으면, 그때 가서 남한산성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밝힌 바가 있는데, 실제 전장에서 청은 조선 조정에 강화도 함락 사실을 통고한 1월 26일이 되기도 전인 23일 밤부터 남한산성에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음.
이는 1월 16일 시점의 계획을 모종의 이유로 변경한 결과이며 이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알려진 바는 사실 많지 않음. 다만 추정을 하자면 16일 보호토 휘하의 '니루' 에서 천연두가 전염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하필이면 이 부대는 홍타이지가 머물고 있는 어영 인근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점이 16일 이후 청의 전쟁 방향을 바꾼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함.
그리고 청 실록을 보면 어느 정도 해답이 나와있기는 한데, 조선에 진주한 청군 내에서 전염병, 즉 천연두가 심각하게 돌기 시작하려는 징조가 있음. 병자호란 당시 참전한 청군 지휘관 중 4명이 천연두에 대한 공포로 전장을 탈주하는 사건이 있었고 1명은 자신의 부대에 천연두가 발병했음에도 그를 숨기려고 했다가 발각되어 처벌된 일이 있음.
그러나 인조의 출성 항복이 이루어진 1월 30일과 2월 2일, 한성에서 떠날 시점에는 천연두에 대한 기사는 거의 없긴 한데 이후 기록을 보면 홍타이지의 움직임이 천연두와 상당히 관련이 많음.
조선의 관헌들이 홍타이지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소 등을 진상하려고 했으나 마마, 즉 천연두 소식이 있다하여 알현을 거부한 적이 있었고, 누구보다도 조선 정벌을 꿈꿨고, 꿈 속에서도 '“朝鮮王宮”에 들어가 조선의 왕을 만났다.' 라는 꿈을 꿀 정도로 염원했음에도 왕궁은 커녕 기뻐하는 기색없이 너무나 빠르게 철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상당하게 의아하기도 함.
또한 심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위치한 조선의 크고 작은 도시에 입성한 흔적도 없으며, 굳이 조선의 관헌들을 만난다면 근거리 접촉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며 원거리에 이들을 두는 등의 행동을 보이고 있음.
게다가 2월 8일 도르곤과 함께 심양행에 올랐던 소현세자 일행은 4월 10일 심양에 입성하였는데, 홍타이지가 소현세자 일행을 처음 접견한 것은 그로부터 거의 한 달이 지난 윤 4월 5일의 일이었으며 홍타이지가 이처럼 오랫동안 소현세자 일행을 접견하지 않았던 것은 천연두의 대창궐과 상당한 연관이 있다고 추정 중임.
또한 숭덕 2년 7월 5일 홍타이지는 병자호란이 종결된 뒤에도 조선에 잔류하여 가도 공격에 참가했던 왕공들에 대하여 가도 작전 기간의 “失律”을 책망했는데, 이때 그는 2월 초에 있었던 자신의 귀국을 가리켜, '마마를 피해 먼저 귀국' 했다고 언급하면서 이러한 의구심에 대한 확신을 주고 있음.
지금까지 고찰한 바와 같이, 병자호란 당시 청군 진영에서는, 그것도 홍타이지가 머물던 어영 부근에서 천연두가 발병했고 전쟁이 끝난 이후 홍타이지가 전염병 문제로 운신의 제약을 받은 듯한 것은 사실임.
그러나 병자호란의 경우 사료로부터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청군 진영의 마마 발발 사실뿐인데...그 발발 시점은 사료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가 없음. 다만 천연두가 청군 진영 내에서 대규모로 발병할 징조를 보였고, 지휘관 계층들도 이탈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문제가 생각 외로 심각했음을 보여주고 있음.
청은 천연두 문제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했고, 순치제도 이에 감염되서 사망했을 정도. 강희제가 후계자가 된 것도 어릴 적 천연두를 앓아서 면역이 있기 때문에 선택되었으며 이전까지는 천연두에 대해서 면역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짐.
16세기 중반이나 되어서 만주인들 사이에 천연두가 돌기 시작했고, 6~7세기 경에 천연두를 접했던 조선이나 일본에 비해서 면역력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고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는 중임.
뭐...천연두 면역이 없는 몽골의 왕공 귀족에 대해서는 아예 북경 대신 열하에 와서 직접 인사를 드리도록 하는 정책도 내줄 정도니 천연두에 대한 청 황실의 공포가 어느 정도급이었는지는 대충 알 수 있을 듯.
오늘의 역사 상식
청의 준가르 정복 당시 청군보다도 더 많이 준가르 유목민을 사망하게 한 것은 바로 천연두라고. 청군에 의해서 준가르 유목민 30%가 사망했지만 천연두로 40%가 사망했고 이들의 지도자나 지휘관들도 천연두가 대규모 발병하면서 그야말로 끝장남.
1634년 차하르 정복 당시에도 홍타이지와 대결했던 차하르의 대칸 릭단도 천연두로 사망하면서 청이 이득을 보았다고.
출처
병자호란과 천연두, 구범진
병자호란 이전 조선의 對後金(淸) 방어전략의 수립 과정과 그 실상, 장정수
인조대(仁祖代) 수도방위체제의 성립, 노재민
인조대 대후금(대청) 방어책의 추진과 한계, 허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