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영어로는 배다(Baeda)라고 표기되던 이름이
현대 영어에서는 Bede로 표기되는데,
이 이름은 ‘기도’를 뜻하는 단어 bed와 관련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성 베다는 수도자로서 일생 동안 기도하고 노동하며
단순하게 살려고 노력했으나,지혜와 학문이 워낙 뛰어나서
8세기 당대에 가장 박학한 인물로 존경을 받았다.
영국 가톨릭교회의 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교회의 박사’로 선포된 그는
영국의 자로우에서 태어나는데,
그의 거룩함으로 인하여 널리 존경받아 오고 있다.
일곱 살이 되던 해에 그는 교육을 받기 위해
자신의 부모들에 의하여
북 움브리아 지방의 위어마우드에 있는
성 베드로와 바오로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베네딕토 아빠스의 돌봄을 받으면서,
특별히 라틴어 성서교육을 받는다.
그의 태생 언어는 옛 영어였지만,
그가 공부한 책들은 라틴어 책들이었던 까닭에
그는 후일 성서를 번역하는데
기여하게 될 탁월한 라틴어 실력을 얻는다.
그는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는 부제품을 받는데,
사제품은 서른이 되었을 때 받았다.
그는 다른 이웃 수도원들을 방문하는 일 외에는
자신의 수도원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내는데,
그의 주된 즐거움은 오로지 ‘
공부하고 가르치며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는 지역교회가 낳은
성인들에 대한 공경심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로마 교회에 대한 애정과 충실성은
지역교회에서 강조하는
그 어떤 것들보다도 더 우선적이었다.
그는 앵글로 색슨 지역교회에 애정이 많았어도,
그의 마음과 사랑은 언제나
라틴 언어와 로마교회와의 일치 안에 있었다.
그의 관심들은 시대적인 어떤 탁월한 방법들과
역사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사목적인 것들에도 많아서,
그는 매주 혹은 매일 거룩한 성체를 모시며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흠 없이 살아가는 많은 평신도들을 보았다.
그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
주님의 기도와 마음으로 외우는
사도신경’을 알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그의 시대에 가장 많이 공부한 사람으로 알려지는데,
그는 성서적이고 역사적인 탁월한 많은 책들을 썼다.
그는 자신의 생애 40년을 통하여,
요한복음을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하였다.
그의 죽음은 자신의 학생이었고
후일 자로우의 아빠스가 되는
커드베르트에 의해 기록되는데,
그의 마지막 병고는 매우 짧았다.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가르치고
시편을 외우며 묵상하는 일로 바빴다.
예고도 없이 그에게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가 쓰던 작업을 서둘러 마무리해야 했다.
그는 마지막 쓰기가 마쳐졌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것을 다 마쳤다.”
그 날은 승천축일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몸을
침대가 아닌 마루 바닥에 옮겨달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가 영광송을 외우는 동안
그의 영혼은 그의 육신을 떠나 하늘로 올라갔다.
그는 어느 날 이렇게 기도하였다.
“사랑이신 나의 예수님, 당신은 이 몸으로 하여금
당신 지식의 말씀들로 맛들이게 하시고
당신께 나아갈 수 있는 선물을 주셨음에 감사하나이다.
당신은 지혜의 샘이시니
이 몸 언제까지나 당신 현존 안에 살게 하소서.”
성 베다는 일생 동안 기도하고 노동하며
단순하게 살고자 노력한 수도자였으나
그의 학문적 업적으로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그의 지혜와 학문을 높이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존자’라는 칭호를 덧붙였고,
이 칭호는 853년 아헨의 교회회의에서 공식화되었다.
그는 뛰어난 학자이면서도 겸손하였으며,
‘영국 역사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1899년 교황 레오 13세가 교회학자로 선언하였고,
성 보니파티우스는 성 베다를 일컬어
‘성령의 빛이자 교회의 빛’,
‘우리 스승이신 베다 존자’라고 하였다.
그는 단테(Dante)의 “신곡”(La Divina Commedia)의
‘천국 편’에 등장하는 유일한 영국인이기도 하다.
비드(Bede)로도 불리는 그는
1100년 이전까지 영국 전례력에서 5월 26일에 기념되다가
1969년부터 5월 25일로 확정되어 기념되고 있다.
오늘의성인
천주교부산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