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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學思想 및 傳統思想을 硏究, 承繼, 普及하고
現代化, 生活化하여 先賢의 崇高한 理念을 오늘에 되살리며
道德社會를 具現하는 靑壯年들의
2024년 9월 선현유적답사
안동과 의성의 선현(先賢) 유적
2024年 9月 22日
社團法人 博 約 會
大邱廣域市支會 靑壯年委員會
24년 9月 22일 안동과 의성의 선현(先賢) 유적
예정 시간 | 답심지 | 주소 |
08:00 | 반월당 현대백화점 앞 | |
08:20 | 성서 홈플러스 앞 | |
09:30 | 타양서원(陁陽書院) |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본길 55-11 |
10:10 | 후산정사(后山精舍) | 안동시 일직면 송리리 300[현마을길 28-5] |
11:40 | 소호헌(蘇湖軒) | 안동시 일직면 소호헌길 2 (망호리) |
12:10 | 점심 식사 | |
13:20 | 대산 이상정 종가 (大山 李象靖 宗家) | 안동시 일직면 일직점곡로 11-12 |
14:00 | 니산정(泥山亭) | 안동시 일직면 귀미리 707 |
14:40 | 고운사(孤雲寺) | 의성군 고운사길 415 |
15:30 | 사촌 만취당(沙村 晩翠堂) | 의성군 점곡면 만취당길 17 |
18:00 | 성서 홈플러스 앞 | |
18:20 | 반월당 현대백화점 앞 |
2024년 6월 선현(先賢) 유적 자료집 목차
일정 ------------------------------------------------------------- | 2 | |
目次 ------------------------------------------------------------- | 3 | |
1 | 정평공 손홍량(靖平公 孫洪亮)과 타양서원(陁陽書院) --------------- | 4 |
1) 타양서원(陁陽書院) ------------------------------------네이버지식백과 | 4 | |
2) 정평공 손홍량(靖平公 孫洪亮) ------------------------향토문화전자대전 | 4 | |
3) 손홍량 유허비(孫洪亮 遺墟碑) ------------------------향토문화전자대전 | 5 | |
2 | 후산 이종수(后山 李宗洙)와 후산정사(后山精舍) -------------------- | 8 |
1) 후산정사(后山精舍) ----------------------------------향토문화전자대전 | 8 | |
2) 후산 이종수(后山 李宗洙) ---------------------------향토문화전자대전 | 8 | |
3 | 함재 서해(涵齋 徐嶰)의 소호헌(蘇湖軒) ---------------------------- | 10 |
1) 소호헌(蘇湖軒)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10 | |
2) 함재 서해(涵齋 徐嶰) --------------------------------향토문화전자대전 | 10 | |
3) 율곡 문하에서 공부한 성장한 약봉 서성 ------------------ 여행작가 서명수 | 11 | |
4) 소호헌, 앞 못 보는 아내와의 러브스토리 깃들어 ---- 이영숙, 경북스토리 기자단 | 13 | |
4 | 소(小)퇴계로 불리는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 | 16 |
1) 대산 이상정 ----------------------------------------향토문화전자대전 | 16 | |
2) 영남 학파의 거목, 대산 이상정 ------------------ 월간중앙 2021년 4월호 | 18 | |
5 | 황제를 꾸짖은 의병장 ----------------------------------------- | 22 |
1) 척암 김도화(拓庵 金道和) ----------------------------향토문화전자대전 | 22 | |
2) 폐하! 무엇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시는 겁니까? -------- 매일신문, 엄재진 기자 | 23 | |
3) 니산정(泥山亭) -------------------------------------향토문화전자대전 | 24 | |
6 | 고운사(孤雲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25 |
7 | 사촌(沙村) 마을과 만취당(晩翠堂) -------------------------------- | 27 |
1) 의성 만취당(義城 晩翠堂) ----------------------------향토문화전자대전 | 27 | |
2) 의성 사촌 마을 김사원 만취당 종가------------------- 경북일보 오종명 기자 | 28 | |
◆ | 답심 후기 --------------------------------------------- 이정운 | 30 |
1. 정평공 손홍량(靖平公 孫洪亮)과 타양서원(陁陽書院)
1) 타양서원(陁陽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에 있는 조선후기 손홍량 등 3인의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 1741년(영조 17)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손홍량(孫洪亮), 김자수(金子粹), 유중엄(柳仲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어, 유적지에 설단(設壇)하여 향사를 지내왔다. 그 뒤 1948년 유림에 의해 복원되어 손홍량·김자수·유중엄을 다시 배향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상현사(尙賢祠), 8칸의 성경당(誠敬堂), 2칸의 전사청(奠祀廳), 3칸의 동재(東齋), 주소(厨所) 등이 있다. 사우(祠宇)인 상현사에는 손홍량·김자수·유중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인 성경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매년 3월 중정(中丁)과 9월 중정에 향사지내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재산으로는 전답 3,000평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타양서원[陁陽書院]
2) 정평공 손홍량(靖平公 孫洪亮)
① 정의 : 고려 후기 안동 출신의 문신.
② 가계 : 본관은 일직(一直). 호는 죽석(竹石). 아버지는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낸 손방(孫滂)이다. 본래의 성은 순씨(筍氏)였으나 현종의 이름을 휘하기 위해 5대조 손응(孫凝) 때 손씨(孫氏)로 고쳤다.
③ 활동사항 : 손홍량은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태어났다. 충선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충숙왕과 충혜왕 양조에 벼슬하고 1348년(충목왕 4) 첨의평리(僉議評理)로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1349년(충정왕 1)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功臣)에 봉해지고,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거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이듬해 복천부원군(福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351년 치사(致仕)하였다.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의 난으로 공민왕이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지역)로 피난할 때 중도에서 평복으로 공민왕을 맞아 치하를 받았다. 1364년 난의 평정을 축하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가서 공민왕으로부터 궤장(几杖)과 자신의 초상화를 받았다. 고향으로 돌아올 때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목은(牧隱) 이색(李穡) 등 여러 학자들이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고 한다.
④ 저술 및 작품 : 『정평공실기(靖平公實記)』가 남아 있다.
⑤ 상훈과 추모 : 시호는 정평(靖平)이며,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에 있는 타양서원(陀陽書院)에 제향되었다. 1744년 9월 타양서원에서 조금 떨어진 일직면 송리리 입구에는 손홍량 유허비(孫洪亮遺墟碑)가 건립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3) 손홍량 유허비(孫洪亮遺墟碑)
① 정의 :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송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석비.
② 개설 : 손홍량은 호는 죽석(竹石)이고, 본관은 일직(一直)이며, 시호는 정평(靖平)으로 일직손씨의 중시조이다. 고려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1349년(충정왕 1) 추성보절좌리공신이 되고 판삼사사에 올랐으며,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왕에게서 ‘일직(一直)한 사람’이란 칭찬과 함께 궤장(机杖)과 초상(肖像)을 하사받았다.
③ 건립경위 : 1748년(영조 24) 안동 사림이 발기하여 고려 명신인 손홍량(1287~1379)의 유허(遺墟)에 건립하였다.
④ 위치 : 손홍량유허비는 일직면 송리1리 마을 어귀의 도로변에 인접한 마을회관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⑤ 형태 : 크기는 높이 2.3m이고, 너비 60㎝이다. 귀부(龜趺)로 된 좌대(座臺) 위에 비신(碑身)과 이수(螭首)를 얹은 구조이다. 비각은 단칸 기와집이다.
⑥ 유허비 한글 번역문 : 비문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 조현명(趙顯命)이 짓고, 글씨는 영조 때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제액(題額)을 썼으며, 생원 권서(權紓)가 비문을 썼다. 비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고려 좌리공신 삼중대광 판삼사사 직성군 시정평손공 홍량유허비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쓰다. 숭정(崇禎) 재갑자(再甲子) 9월일 세우다. 공의 휘(諱)는 홍량(洪亮)이니 복주(福州) 타양현(陀陽縣) 사람이다. 복주는 지금의 안동부(安東府)이다.
본성은 순(荀)이요, 시조 간(幹)은 신라의 왕을 따라 일직군(一直郡)에 갔다가 일직 사람이 되었다. 그 후 고려 현종의 이름자와 음이 같다 하여 성을 손씨로 할 것을 나라에서 명하였다. 증조인 세경(世卿)은 상의직장이고, 조부 연(衍)은 전객령이며, 부는 방(滂)인데 합문지후로 금자광록대부 문하평리상호군에 추증되었고, 모는 안동조씨로 밀직전사(密直殿使) 상호군(上護軍) 송(松)의 따님이다.
충렬왕 정해년(1287)에 공이 일직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장대하면서 영리하였고 장성해서는 더욱 꿋꿋하면서 자상하여 세상을 경영할 청운의 뜻을 품었다. 충선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서 충숙왕·충혜왕·충목왕을 섬겼다. 충목왕 때 상공(相公)에 임명되어 충성을 다하여 정무를 처리함에 너그러움을 기본으로 했기에 대신의 체통을 지켰다. 충정왕 신묘년(1351)에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인 영가(永嘉, 안동)에 돌아갔음은 산수의 낙을 따른 것이다. 그때의 연령이 60세를 넘으셨다.
공민왕 임인년(1362)에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공민왕께서 복주에 피난을 가셨다. 이때에 공이 평상복으로 길가에 나가 알현하였더니 왕은 반갑게 가상히 여겼다. 갑진년(1364)에 공이 도성에 가서 국왕께 평난(平亂)을 하례드렸다. 왕께서 즐겁게 하례를 받으신 다음 사례로 공의 초상을 그려서 안석(案席)과 지팡이를 함께 내리시고 두 아들 득수(得壽)·득령(得齡)에게 명하여 부축하여 대궐문을 나가게 하니 이 모두가 유례없는 특전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에는 조정 백관들이 전송을 하였으며 특히 명망 높은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초은(樵隱) 같은 분들은 공을 위하여 시를 지어 세상에 알렸다.
신우(辛禑·禑王) 5년 기미년(1379) 7월에 공이 돌아가시니 나이 93세였고, 관직은 추성보절 좌리공신 삼중대광 판삼사사 상호군(推誠保節 佐理功臣 三重大匡 判三司事 上護軍)으로 직성군(直城君)에 봉했으며 시호를 정평(靖平)이라 받으셨다. 공은 높은 덕망과 거룩한 공훈을 세우고 육조에 걸쳐 중추가 되는 명신이요, 고령의 향수를 누리셨다. 본가에 소장된 문헌이 전하지 못하였고 동사(東史)에 기록된 사덕이 대략 이와 같았다.
공의 배위(配位)는 타양군부인(陀陽郡夫人) 양성이씨(陽城李氏)로 개성부윤 정(挺)의 따님이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셨는데, 장남은 득수니 관이 밀직대언이고, 차남 득령은 관이 전서이다. 두 따님은 흥해군(興海君)인 배전(裴詮)과 통례문전사인 김오(金悟)에게 출가하였다. 내외 자손 중에 명현(名賢)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니 모두 다 기록할 수 없다. 공의 초상은 병란 중에 잃어버리고 공의 유지(遺址)만이 일직 송동(松洞)에 남아 있음을 알았다. 사림들이 공을 추모하는 마음이 무궁하도록 간절하여 비를 세워 기념하고자 한다.
아! 공이 늙어서 고향으로 돌아간 지 12년 만에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고, 공이 세상을 떠나신 지 14년이 되던 해에 고려의 운명이 끝나게 되었다. 공이 재직하고 퇴직하는 것과 생존하고 별세하는 데 따라 국가의 안위가 좌우될 만큼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도다. 무릇 공의 연세가 퇴직할 만큼 고령이 되지 않은 때에 관직에서 물러났음은 혹시 나라 운이 기울어질 조짐을 먼저 아셨던가. 또한 오래 사심을 알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목은 이색 등 제현(諸賢)보다 먼저 일신(一身)을 감추어 명과 몸을 보전한 것일까? 『시전(詩傳)』에 말하기를 ‘슬기롭고 사리에 밝아서 그 신명(身命)을 보전한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현명하고 착한 군자는 올바른 판단에 힘썼도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을 두고 말한 것이다.
수충갈성분무공신(輸忠竭誠奮武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겸영경연사감춘추관사 풍원부원군 조현명이 글을 짓고, 생원 영가(永嘉) 권서가 쓰고, 두연씨(斗淵氏)가 동엽(東燁)으로 하여금 족후손(族後孫) 병두(炳斗)에게 유래를 쓰게 하고 이어서 음기(陰記)를 잇게 했다. 외손 진성(眞城) 이수걸(李秀杰)이 삼가 쓰다. 무자년 3월일 다시 세우다.”
⑦ 현황 :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주변은 관리가 잘되어 비교적 깨끗하게 보존되고 있으며, 시멘트 담을 설치하여 보호하고 있다. 유허비에서 약 450m 떨어진 곳에 보물 제57호인 안동 조탑동 오층전탑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 后山 李宗洙(후산 이종수)와 후산정사(后山精舍)
1) 후산정사(后山精舍)
① 정의 :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송리2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정사.
② 개설 : 안동 후산정사는 진성이씨 일직파 이종수(李宗洙, 1722~1797)가 건립한 정사이다. 이종수는 안동부 일직현에서 처사 이덕삼(李德三)과 의성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종수는 평생을 향리에서 학문 생활로 일관하였다.
③ 위치 : 경상북도 안동에서 국도 5호선을 따라 의성 방향으로 13㎞ 정도 가면 중앙고속도로 인터체인지 진입 도로가 나오는데, 진입 도로를 따라 약 2㎞ 정도 가면 안동시 일직면 송리리가 나온다. 안동 후산정사는 송리2리 산 중턱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④ 변천 : 2001년 사당을 새로 짓고 후안정사 곳곳을 보수하였다. 2011년 6월 2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8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⑤ 형태 : 후산정사는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의 건물이다. 온돌방은 각 1칸씩 3칸이고, 누마루는 우물마루이며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중앙의 온돌방은 앞문이 사분합문이고 뒷문은 쌍띠살문이다. 좌우 온돌방의 문은 정면이 쌍띠살문이고 옆면은 띠살문이다. 누마루 좌우에도 쌍판문이 설치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 후산 이종수(后山 李宗洙)
① 정의 :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유생.
② 가계 :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학보(學甫), 호는 후산(后山). 아버지는 이덕삼(李德三)이며, 백부 이기삼(李起三)에게 입양되었다.
③ 활동사항 : 이종수는 19세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의 문하에 들어가 43년 동안 돈독한 사제지의를 맺었다. 대·소산의 후란 뜻으로 이상정이 후산(后山)이라는 호를 지어주었고 이종수도 평생 스스로 이상정과 이광정의 후배로 자처하였다. 이상정 사후에는 안동 지역의 강회를 주도하였고 북부 지역 사림들의 문헌을 교정·간행하는 일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이상정이 주도했던 『주서강록간보(朱書講錄刊補)』의 교정·보완에 적극 참여하여 간행을 주도하였다.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송리리에 후산정사(后山精舍)를 짓고 독서하며 후진을 양성하고, 당대의 학자인 권구(權榘)·권덕수(權德秀)·김낙행(金樂行)·권상일(權相一) 등과 교유하였다. 이종수는 호문삼종(湖門三宗: 이종수·김종덕(金宗德)·정종로(鄭宗魯))과 호문삼로(湖門三老: 이종수·류장원(柳長源)·김종덕)의 한 사람으로 퇴계학의 정맥을 계승하였다.
④ 저술 및 작품 : 문집으로 『후산집(后山集)』이 있다. 이밖에도 저술로 『주자감흥시제가집해(朱子感興時諸家集解)』, 『근사록어류집록(近思錄語類輯錄)』, 『수사전습록도설훈의(洙泗傳習錄圖說訓義)』, 『퇴계선생시집차의(退溪先生詩集箚疑)』, 『가례집유(家禮輯遺)』 등이 있다.
⑤ 묘소 ; 묘소는 안동의 증수동(增修洞)에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3. 함재 서해(涵齋 徐嶰)의 소호헌(蘇湖軒)
1) 소호헌(蘇湖軒)
① 정의 :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에 있는 조선전기 학자 서해가 거처하던 건물.
② 내용 : 196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앞면 4칸, 옆면 2칸의 단층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조선 중종 때에 학자로 활동하였던 서해(徐嶰, 1537∼1559)가 거처하였던 곳이라고 전한다.
③ 형태 :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이 대청이고, 앞면 1칸, 옆면 2칸은 누마루로 배치되었다. 누마루에 붙은 대청은 ‘ㄱ’자로 꺾였는데, 앞면 2칸, 옆면 1칸 규모의 온돌방이 붙어 ‘T’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주 건물의 지붕은 팔작지붕이지만, 옆에 붙은 온돌방의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건물은 높이 쌓은 기단(基壇) 위에 자리하고 있다. 주춧돌 위의 기둥은 귀틀을 짜돌리고 그 위에 세운 모습이어서, 전북특별자치도 장수향교(長水鄕校) 명륜당(明倫堂)의 그것과 비슷하다. 건물은 기둥 위에 대접받침처럼 생긴 주두(柱頭)를 놓고서 도리와 장여를 받친 익공이 하나인 초익공(初翼工)의 모습이다. 가구(架構)는 5량(樑)으로, 앞뒤의 평주(平柱)에 대들보[大樑]를 걸고서, 그 위에 공포(栱包)를 짜 맞춘 포작(包作) 모양의 동자기둥을 놓아 종보[宗樑]를 받치게 하였다. 종보 위에는 네모난 접시받침인 소로[小累]와 첨차(檐遮)를 짜넣은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두어 종도리를 받치고 있으며, 종보 위에서 아름답게 휘어진 솟을합장은 쭉 뻗어 종도리를 결구(結構)하고 있다.
누마루와 온돌방 뒤의 툇마루쪽 앞면에는 닭다리 모양의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고, 대청과 누마루 사이에는 4분합(四分閤)을 달고서 나머지 벽에는 가는 나무인 가시새를 넣어 보강하여 이채롭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동 소호헌 [安東 蘇湖軒]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 함재 서해(涵齋 徐嶰)
① 정의 : 조선 전기 포천 출신의 학자.
② 가계 : 본관은 대구(大邱). 자는 정지(挺之), 호는 함재(涵齋). 할아버지는 사헌부 장령을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된 서팽소(徐彭召)이고, 아버지는 예조참의를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된 서고(徐固)이다. 어머니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이인 찰방을 지낸 안사전(安嗣全)의 딸이고, 부인 고성 이씨는 청풍 군수를 지낸 이고(李股)의 딸이다. 아들은 판중추부사를 지낸 서성(徐渻)이다.
③ 활동 사항 : 서해(徐嶰)[1537~1559]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고, 상사(上舍) 이중립(李中立)과 매우 친하였다. 그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장차 학문을 크게 이룰 것이라고 촉망을 받았으나 1559년(명종 14) 23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장인인 이고가 사위와 딸을 위해 경상북도 안동에 소호헌(蘇湖軒)을 지어 주었는데, 현재 보물 제475호로 지정되어 있다.
④ 학문과 저술 : 저서로 『함재집(涵齋集)』이 있다.
⑤ 상훈과 추모 : 영의정에 추증되고, 1757년(영조 33) 대구의 구암 서원(龜巖書院)에 제향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해 [徐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3) 율곡 문하에서 공부하고 성장한 약봉 서성
1392년 태조 이성계의 개국부터 1910년 순종까지 조선은 27명의 왕이 이어받아 519년간 존속했다. 그 오백년의 시간은 왕의 시간이었을까, 대신의 시간이었을까, 혹은 백성의 시대였을까?
여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은 왕의 나라도, 신하의 나라도 아니었다. 조선은 성리학의 기반 아래 완비된 과거제도 등에 의해 선발된 엘리트들이 관리하는 통치 체제가 구축된 나라였다. 왕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왕의 나라는 더더욱 아니었다. 영의정과 좌의정 우의정 등 삼정승과 육조판서의 '삼공육경'(三公六卿)이 있었지만 고위관리인 내, 외직의 임명과 파직은 이조(吏曹) 전랑(銓郞)의 권한이었다. 이조는 오늘날의 총무처 그리고 인사혁신처의 역할을 다 갖고 있었다.
왕도 신하도 독단적인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절묘한 상호 권력 견제장치였다. 어느 시대에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세력 간의 갈등은 있게 마련이었고 조선시대는 당파싸움, 즉 당쟁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파는 조선의 통치철학인 성리학의 해석을 둘러싼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서인과 동인'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 그리고 '대북과 소북'으로 당파는 사안에 따라 분화돼 나갔다. 당파싸움의 시작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으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한명회가 대표적인 훈구파의 거두라면 사림파는 훈구파에 의해 사화를 겪으면서도 살아남아 조정에 진출한 선비들이었다. 사림파는 서인과 동인으로 분화되고 대표적인 동인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었다. 즉 초야에 묻혀있던 선비들이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에 진출해서 사림파가 되었고 그들의 노선 차이가 다시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서게 한 것이다.
안동은 동인의 태두인 퇴계학파의 본산이었다. 조선에서 주자학을 최초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가르친 이가 퇴계였다. 퇴계는 인간의 존재를 이(理와) 기(氣)로 구분하고 '이기이원론'을 폈다. 여기에 고봉 기대승은 반론을 폈고 율곡은 고봉의 주장을 이어받았다. 그것이 '이기일원론'이었다. 조선의 당쟁은 이처럼 주자학을 해석하는 예송논쟁과 '이기'를 둘러싼 해석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퇴계는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하기 전의 사림이었지만 스스로 당쟁의 주역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퇴계의 제자들은 대부분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서인과 대립했고 그래서 조정에 나아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사림파의 일원이었던 동인과 서인이 늘 적대적인 관계였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율곡은 벼슬에서 물러나 계상(溪上)서당에 머물고 있던 퇴계를 만나기 위해 1558년 봄 안동에 찾아온 적도 있다. 58세의 퇴계와 약관 23세의 율곡의 세기적인 만남이었다.
대구에서 의성을 지나 안동 경계에 들어서게 되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마을이 일직이다. 일직면 소재지에 도달하기 전, 소호리 국도변에 오래된 고택 한 채가 고즈넉하게 있다. '소호헌'(蘇湖軒)이다. 안동에서 '소호헌'은 국가가 지정한 보물 이상의 각별한 의미를 갖는 공간이다. '소호헌'은 퇴계 문하가 아닌 율곡 문하에서 공부하고 성장한 약봉 서성의 태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퇴계학파의 본향에서 서인 계열의 소호헌이 홀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인식하던 사화를 밥 먹듯이 벌이는 적대적인 당쟁과는 거리가 먼 듯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약봉 서성의 부친인 서해가 퇴계의 제자였다면, 어쩔 수 없이 어린 나이에 한양으로 올라가게 된 약봉이 율곡 문하에서 공부함에 따라 서해, 서성 부자는 각각 퇴계와 율곡에게 사사받아 동인과 서인을 넘나들게 된 집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소호헌은 조선전기 문신 서해(徐嶰 1537~1559)가 서재로 쓰던 별당이었다. 우리 독립운동의 산실인 임청각을 지은 고성 이씨 집안의 이명(李洺)이 자신의 다섯째 아들 이고(李股)가 결혼을 하게 되자 분가시키면서 지어준 집이었다. 그런데 대구 서씨인 서해가 이고의 앞을 못보는 딸과 결혼하자, 선물로 이 소호헌을 내어준 것이다. 서해는 당대 안동 최고의 가문에 장가를 들었다. 대구 서씨 또한 서거정과 같은 가문으로 서해의 부친 서고(徐固)가 예조참의를 지내는 등 당당한 명문가였다. 안타깝게도 서해는 2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서해의 아내는 소호헌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 서성(徐渻 1558~1631)을 데리고 한양으로 가서 술과 약과를 만들어 팔면서 아들을 공부시켰다. 이 소호헌 왼쪽 건물이 바로 약봉(藥峯) 서성의 태실이다.
약봉은 안동에서 태어났지만 한양으로 올라가 율곡 문하에서 공부를 한 덕에 벼슬길에 올라 승승장구했다. 약봉은 경상, 강원, 황해, 평안, 함경, 경기 등 6도 관찰사와 도승지, 대사헌,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서성의 네 아들도 모두 입직해서 높은 벼슬에 올랐다. 첫째는 우의정에 올랐고 둘째는 종친부전첨, 셋쌔는 현감, 넷째는 선조의 사위가 됐다. 셋째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거느리고 안동 소호헌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소호리 태생 서성이 서울로 올라가서 집안을 크게 일으킨 셈이다. 지금의 소호헌은 대구 서씨 종중 소유로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소호헌에 도착한 때는 노을이 지기 직전이었다. 오백년이 더 지난 고택이었지만 관리가 잘 된 덕분인지 지금도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와서 낯선 손님을 맞이할 것 같았다. 소호헌 뒷뜰 목련은 봄 햇살을 받아 작열하듯 꽃을 피우고 있었다. 바야흐로 봄의 절정이었다. 그 옆 작은 정원에 '소호헌 보물 제 47호'라고 장난스럽게 장식을 해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소호헌은 앞면 3칸, 옆면 2칸이 대청이다. 앞면 1칸, 옆면 2칸은 누마루가 놓여있다. 누마루에 붙은 대청은 'ㄱ'자로 꺾였는데 앞면 2칸 옆면 1칸 크기의 온돌방이 붙어 'T'자 모양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이 소호헌의 지붕 모서리를 장식한 기와에는 용 두 마리가 새겨져 있는데 민가나 여염집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용 문양이다. 누마루의 숫막새에는 봉황문양이 있다. 용과 봉황을 새겨넣은 기와로 집을 짓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사치를 부린 건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조선 후기에 일반 민가에서 용문양이 들어가 있는 기와를 사용해서 집을 지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면, 아마도 역모의 죄를 범하였다며 삼대가 멸문지화를 당했을 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집을 지은 이고가 99칸짜리 임청각을 짓는 등 민간에서는 최고의 집을 지은 것과 마찬가지로 소호헌을 지으면서도 나름 최고의 집을 꾸민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당시로서도 왕실에서만 쓸 수 있는 용과 봉황 문양을 기와 문양으로 쓴 것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건축을 실제 담당한 대목수의 실수가 아니라면, 용 문양을 쓸 수 있는 큰 인물이 이 가문에서 나기를 기대하는 보다 큰 뜻이 담겨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유추해 볼 수 있지만 근거는 없다.
'소호헌'에서 국도를 따라 6.5km정도 안동으로 가다가 낙동강의 지류인 미천이 구비도는 암산유원지 바로 옆에는 고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고산서원은 퇴계학파의 대학자로 인정받으며 '소퇴계'로 불리는 대산 이상정이 강학한 서원이다. 퇴계학파의 고산서원과 율곡 이이에게 사사받은 약봉의 소호헌이 지척 간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조선 당쟁의 격화라기 보다는 '탕평(蕩平)의 정치'가 이곳에서도 소박하게 이뤄진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여행작가 서명수의 글 발췌. 2023.10.06. - 월간조선.
4) 안동 소호헌, 퇴계제자 함재와 앞 못 보는 아내의 러브스토리 깃들어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는 보물 제475호로 지정된 소호헌이 위치해 있다. 조선 중기 별당 건물인 소호헌은 퇴계의 제자인 함재 서해가 사용한 서재였다. 소호헌 지붕 용마루 망와(望瓦)에는 승천하는 용의 모습이 표현돼 있다(원 안 사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소호리)에는 보물 제475호인 조선중기 별당 건물 소호헌(蘇湖軒)이 있다. 소호헌의 이름은 ‘소호’라는 지명에서 비롯됐다. 고려시대 정4품 벼슬을 지낸 소씨가 살았다는 뜻의 ‘소(蘇)’, 서쪽에 큰 호수가 있다는 뜻의 ‘호(湖)’가 합쳐져 생겨난 이름이다. 현재 소호헌 앞 도로가 풍광 일부를 가리고 있지만, 과거 소호헌 주변은 자연경관이 빼어났으며 시원한 전망을 자랑했다. 소호헌은 ‘丁’자형의 단층 팔작지붕의 목조 기와집으로 조선 중기 퇴계의 제자인 함재 서해가 서재로 사용했다. 함재는 비록 가난했지만 온화한 성품과 더불어 학식이 뛰어났기에 퇴계가 특별히 아낀 제자였다. 특히 그의 아내 이씨 부인은 시각장애인 임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훌륭히 키우고 집안을 일으켜 현모양처로 존경을 받았다.
소호헌은 주춧돌 위에 바로 기둥을 올리지 않고, 평방(平枋) 모양의 귀틀 위에 기둥을 올린 것이 특징이다.
① 소호헌에 깃든 가문의 역사
원래 소호헌은 고성이씨 임청각 이명공의 다섯째 아들이자 청풍군수를 역임한 무금정 이고의 분가주택이었다. 이고의 딸은 무남독녀다. 함재는 그런 그녀에게 측은지심을 느끼고 아내로 받아들인다. 비록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단아한 인품에 이끌려 반려자로 삼았다. 함재의 인품과 인간적인 면에 끌렸던 이고는 사위인 함재에게 소호헌을 선물로 주었다.
소호헌은 여느 집과 다른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당시 건축물은 주춧돌 위에 바로 기둥을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소호헌은 주춧돌 위에 바로 기둥을 올리지 않고, 평방(平枋) 모양의 귀틀 위에 기둥을 올렸다. 또 하나의 특징은 용마루 망와(望瓦·처마 끝에 달린 기와)에 자리한 승천하는 두 마리 용이다. 대개 용은 상서로운 동물로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왕을 상징하는 용은 일반적으로 아무나 쉽게 쓰지 못했다. 쌍룡이 들어간 망와는 명문가를 세우고 자손만대 번성하기 위한 수호신으로 보인다.
망와에 깃든 쌍룡의 상서로움 때문인지 함재와 이씨 부인의 자손들은 명성을 떨쳤다. 함재의 아들 약봉 서성은 판중추부사로서 사후 충숙공 시호를 받으며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함재의 손자 서경우 또한 인조 때 우의정을 지냈다. 서경우의 아들 서문중 역시 영의정을 지냈을 정도로 소호헌 주변의 사람들은 대를 이어 높은 벼슬을 지냈다. 소호헌 동편에는 함재의 아들 약봉 서성의 태실이 있다. ‘약봉태실(藥峯胎室)’이라 적힌 현판은 수백 년 전의 얘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듯하다.
소호헌 주변 은행나무 뒤에는 순국지사 서상부의 기적비도 있다. 서상부는 한말 의병장으로 1896년 의성 봉산전투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애국지사다. 일본군의 신무기에 대항해 혈전을 펼치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서상부의 애국 행적에 절로 숙연해진다.
② 소호헌의 안주인, 집안을 일으키다
소호헌의 주인이었던 함재의 생은 짧았다. 아내와 어린 아들을 두고 23세 때 병으로 요절했다. 지아비를 일찍 잃은 이씨 부인은 가산을 정리한 후 젖먹이 서성을 데리고 서울 약현(서울시 중구 중림동)으로 떠난다. 서성의 호인 ‘약봉’은 이씨 부인과 서성이 살았던 서울의 ‘약현’이라는 지명에서 비롯됐다.
이씨 부인은 서울에서 약주와 약식, 약과를 팔아 아들의 학비를 대는 등 자식 교육에 특별한 애정을 쏟았다. 교육열이 남달라서 조선 최고의 사상가인 이율곡 아래에서 아들을 공부시켰다. ‘현명하고 장한 어머니상(像)’으로 부족함이 없었던 이씨 부인은 아들 서성을 훌륭한 인물로 키웠다. 서성은 알성문과 급제 후 판중추부사를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는 선조를 의주까지 모셨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도 인조와 강화도 피란길을 함께했다.
이씨 부인의 음식 솜씨와 관련한 일화도 유명하다. 이씨 부인이 음식을 잘 만든다는 소문은 당시 조선의 국왕인 선조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이씨 부인의 음식맛에 감탄한 선조는 그녀가 만든 음식에 약봉가의 ‘약(藥)’자를 붙여 약과, 약식, 약주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씨 부인이 만든 음식은 오늘날 강정 등 여러가지 전통과자로 변형돼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이씨 부인은 어진 사람이기도 했다. 지아비가 없는 상황에서 아들을 인재로 키웠으며 집안을 일으켰다. 앞을 볼 수 없어도 약과·약식 등 음식을 맛있게 만들어 널리 알리는 등 재능과 덕을 두루 갖췄다. 악조건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훌륭한 삶을 살아온 그녀는 후대에 길이 전해질 현모로 손색이 없다. 때때로 쉽게 좌절하고 안락함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모습을 볼 때 이씨 부인의 행적은 귀감으로 남는다.
글·사진=이영숙<경북 스토리 기자단> leeys9989@hanmail.net
4. 소(少)퇴계로 불리는 대산 이상정
1) 이상정(李象靖)
① 가계 : 본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 고조부는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 증조부는 이효제(李孝濟), 할아버지는 이석관(李碩觀), 아버지는 이태화(李泰和), 어머니는 재령이씨(載寧李氏)로 밀암(密庵) 이재(李栽)의 딸이다. 고조부 이홍조가 광해군 때 외조부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있는 안동으로 피신해 오면서 그 후손들이 안동에 세거하게 되었다.
② 활동사항 : 이상정은 1711년 1월 29일 안동부(安東府) 일직현(一直縣) 소호리(蘇湖里, 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서 태어났다. 남달리 총명해서 5세 때 글자를 배웠는데 이때 벌써 편방(偏傍)과 점획(點劃)을 다 알고 구별했다고 한다. 6세 때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그 슬퍼하는 모습이 마치 어른 같았다고 한다.
윤리에 독실하여 자제로서의 도리를 다하며 혹시라도 어기는 일이 없었고, 동년배들에 대해서도 낯빛을 바꾸거나 모진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또 율려(律呂: 음악), 역법(曆法), 산수(算數)에 모두 통달했으며, 선기옥형(璇璣玉衡: 혼천의), 심의(深衣), 상복(喪服) 등의 제도에 대해 깊이 연구하지 않고도 바로 손 가는 대로 만들어 내어 늘 스승인 이재의 칭찬을 받았다.
1735년(영조 11)에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 전적, 병조정랑, 사간원정언, 사헌부감찰, 병조참지, 예조참의를 역임하였으며 외관직으로는 연일현감, 강령현감(康翎縣監) 등을 지냈다. 이상정의 치적으로는 1753년(영조 29) 연일현감 재임시, 연일은 풍속이 교화되지 않아 현민이 소송을 일삼아 다스리기 어려운 지역이었으나 이상정의 노력으로 한 때라도 아이와 여자들이 굶주리지 않게 되었다.
또 연일현감 부임 당시 연일은 날이 가물어 민심이 어지러웠으나 부임하자마자 비가 내려 현민들이 그 비를 사군우(使君雨)라 불렀다 한다. 1780년(정조 4) 병조의 낭관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자 다시 예조참의에 제수되었고, 이듬해에는 형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이와 병을 이유로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1781년 향년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③ 학문과 사상
이상정은 퇴계학맥의 중요한 계승자인 이재(李栽)의 외손으로 일찍부터 그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여 이황(李滉)-이현일(李玄逸)-이재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남한조(南漢朝), 김종덕(金宗德), 류장원(柳長源) 등에게 전수하였다. 이재의 문하에서는 김익한(金瀷漢), 권정택(權正宅), 김낙행(金樂行) 등과 교유하였다.
20대부터 고향의 문중 부로들이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세운 대산서당(大山書堂)에서 학문에 잠심하여 후학을 가르쳤다. 가난하여 나물밥 끼니조차 잇기 힘들었으나 오롯이 학문과 교육에 힘써서 때론 달 밝은 밤에 혼자 못가에 앉아 명상을 즐기고 때로 심신이 피곤하면 정관대를 거닐면서 성령(性靈)을 도야하였다. 당시 이상정은 30세가 못 되었으나 그 명성이 널리 퍼져 원근에서 배움을 청하기 위하여 찾아오는 선비들이 날로 늘어났다.
이상정은 학문함에 있어 공부를 정밀하게 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평소 새벽에 일어나 머리 빗고 세수하고 먼저 가묘(家廟)에 참배하고 나서 책상 앞에 앉았다. 독서는 공맹정주(孔孟程朱)의 글을 주로 하였고 때론 밤 새워 사색하고 혹은 여러 날을 침잠하여 반드시 깨우친 뒤에야 그쳤으며 마음에 체득한 바는 반드시 몸으로 행하였다. 남의 허물은 못 들은 체 했고 남의 착한 행실을 들으면 반드시 칭찬하였다.
벼슬길에서 물러나와 다시 서재의 문을 열자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선비들이 몰려들었다. 제자를 가르침에 있어서 그 자질에 따라 함양했으며 심술(心術)을 밝혀 기질을 변화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당시 영남의 선비로 언행이 겸손하고 공경스러우며 눈매가 단정한 이는 묻지 않아도 대산 문인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상정은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 주리설(主理說)을 확립하였다. 이(理)는 무력한 정지체가 아니요, 스스로 능히 발하여 운용할 수 있는 활물(活物)이라고 하여 이(理)의 운동성을 인정하였다.
즉, 이는 비록 기(氣)를 타고 동정(動靜)하나 그 발휘운용(發揮運用)하는 묘가 있어 하지 않음으로서 행하니 진실로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주재하지 않더라도 주재하는 바가 있으니 아주 주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에 반해 기는 이(理)가 동정할 수 있도록 하는 바탕[資]이 된다고 보았다. 이상정의 이기설은 이(理)의 능동성을 부정한 율곡의 주기설(主氣說)에 대한 비판의 성격을 갖는다.
④ 저술 및 작품 : 문집으로 『대산집(大山集)』이 있다. 저술로 『이기휘편(理氣彙編)』, 『사칠설(四七說)』, 『제양록(制養錄)』, 『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 『주자어절요(朱子語節要)』 등이 있으며, 25세 때의 시권(試券)도 전해진다. 문집은 1802년(순조 2) 간행되었다.
⑤ 상훈과 추모 : 1816년(순조 16) 이조참판에, 1882년(고종 19)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910년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상정 [李象靖]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 영남학파 거목 대산(大山) 이상정
지난해 11월 19일 경북 안동에선 ‘유명’ 서원 건물이 준공돼 사당에 위패를 모시는 행사가 열렸다. 영남 유림이면 한 번쯤 들었을 호계서원(虎溪書院)의 복설(復設, 없앤 위패를 다시 설치)이다. 그동안 안동 임하댐 아래 있던 호계서원은 습기가 차는 등 문제가 발생해 안동시 도산면 한국국학진흥원 오른쪽 언덕에 다시 지어졌다. 호계서원은 유림이 400여 년 논쟁을 벌인 이른바 ‘병호시비(屛虎是非)’가 일어난 곳이다. 이 서원은 본래 퇴계 이황 선생을 모신 여강서원이었다. 이후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을 추가 배향하면서 두 제자 중 누구를 더 높은 자리에 둘 것이냐는 위차(位次, 서열) 논쟁이 벌어졌다. 이후 정경세가 나서 영의정을 지낸 서애를 더 높은 자리에 두는 것으로 정리했다. 그러나 학봉의 후학들은 나이로나 학문으로나 학봉이 선배라고 보았다. 논쟁의 본질은 누가 퇴계의 적통(嫡統)이냐는 것이었다. 시비는 1676년(숙종 2) 여강서원이 사액을 받아 호계서원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격화됐다. 그 뒤 대원군까지 중재에 나섰으나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호계서원은 결국 훼철되고 만다.
그 호계서원이 이날 위패를 다시 봉안하게 된 것이다. 경상북도는 복설을 앞두고 논쟁을 종식해 화합을 이룰 방안을 유림과 함께 모색해 왔다. 그 결과가 처음 공개되는 행사였다.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초헌관으로 나섰다. 위패의 순서에 시선이 모아졌다. 위패는 가운데 퇴계를 모시고 양쪽에 제자를 배치하는 종향이 아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차례로 배치한 열향이었다. 순서는 ‘퇴계 선생-서애-학봉-대산(이상정)’이었다. 이전과 달리 학봉 오른쪽에 대산을 추가로 배향했다. 서애를 앞에 두는 대신 학봉의 학통을 이은 대산을 함께 배치해 비중을 조정한 것이다. 그 위패엔 ‘大山先生李公(대산선생이공)’이라 쓰여 있었다. 새로 모셔진 인물에 새삼 관심이 모아졌다.
3월 13일 안동시 남후면 고산서원(高山書院)을 찾았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 선생을 기리는 곳이다. 대산이 생전에 후진을 양성한 고산정사(高山精舍)가 함께 있었다. 기다리던 이방수 종손이 서원 동재(東齋)인 청림헌(淸臨軒)으로 안내했다. 널찍한 방 두 개에 가운데 마루가 있는 건물이다. 인사를 나누면서 호계서원 행사가 먼저 떠올랐다. 이번 호계서원 복설에서 조상이 추가 배향된 소감을 물었다. 종손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후손으로서 물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른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종손은 선조의 학문을 알리고 싶어 했다. “서원이 들어선 이 일대가 고산입니다. 생전 주변을 지나시다가 노년에 이 터를 발견했다고 전해져요. 57세에 강변에 띠집 3칸 고산정사를 세워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① 가계와 학통이 겹치는 학문 바탕
물론 고산정사가 대산이 강학을 시작한 곳은 아니다. 그는 학문을 정립한 고산정사에 앞서 대산서당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대산은 학문 연원(淵源)이 깊고 두텁다. 대산은 1711년(숙종 37) 안동 일직현 소호리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 대학자인 목은 이색이 그의 선대다. 조선 시대 들어 선대는 서울에서 살았다. 광해군 시기 인목대비 폐모론이 일어난다. 대산의 고조 이홍조는 외할아버지 서애 류성룡의 권유에 따라 안동으로 내려왔다. 일찌감치 퇴계 제자인 서애의 외손이 된 것이다. 퇴계 학맥과 이 집안은 대산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 관계가 더 굳건해진다. 혼맥을 통해서다. 대산의 어머니는 재령 이씨로 갈암 이현일의 손녀이자 밀암 이재의 딸이었다. 갈암은 이조판서를 지내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붕괴한 사회를 재정비하려는 [홍범연의]를 지었다. 또 율곡학파의 거세지는 비판에 맞서 퇴계학파를 옹호했다. 밀암은 갈암의 셋째 아들로 가학을 이어 퇴계의 주리설(主理說)을 정밀하게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갈암은 다시 위로 올라가면 퇴계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과 학봉의 학통을 이은 경당 장흥효를 거쳐 퇴계학의 정맥(正脈)을 이어받는다. 경당은 또 갈암의 외할아버지였다. 갈암의 어머니는 현존 최고(最古)의 한글 고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 안동 장씨다.
이상정은 이런 집안에서 태어나 7세에 벌써 [십구사(十九史)]를 읽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어린아이가 글공부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병이 날까 걱정해 밤이 깊어서는 책을 읽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이상정은 14세에 외할아버지인 밀암 이재에게 나아가 공부를 배웠다. 이때부터 매년 영양 외가를 찾아 4~5개월씩 머물렀다. 그곳에서 [시경] [서경] 등 경전과 [태극도설] [가례] 등 성리학과 예학을 다졌다.
② 낙동강 지류 미천에 고산 7곡 경영
1735년(영조 11) 이상정은 25세에 과거시험에 응시한다. 그는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다. 대산은 대과에 합격한 다음해 외교 문서를 다루는 승문원 권지부정자 벼슬을 받아 관직으로 나아갔다. 얼마 뒤 가주서(假注書)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27세에 대산서당(大山書堂)을 짓는다. 지역 7개 문중이 그에게 자제들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서당 이름을 대산으로 한 것은 주변 산 이름이 대석산(大夕山)인 데서 따왔다. 대산은 이후 그의 호(號)가 된다.
이상정은 서당에서 교육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28세에 다시 연원 찰방에 제수된다.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사직서를 낸다. 이후 32세에 승문원 정자, 41세에 예조 정랑, 43세에 연일현감, 52세에 사헌부 감찰, 67세에 사간원 정언, 70세에 병조 좌랑 등에 잇달아 임명된다. 1781년(정조 5) 71세 대산은 마지막 벼슬인 형조참의를 제수받는다. 그는 병으로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산은 다시 군왕이 갖춰야 할 덕을 논한 9개조 상소를 올리고 사직을 청한다. 정조는 상소문을 읽고 “말마다 참되고 절실하니 이를 좌우명으로 삼아 반성하는 자료로 삼으려 한다”며 “병이 차도가 있기를 기다려 직무를 수행토록 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해 선생은 세상을 떠나고 만다. 돌아보면 대산은 43세를 전후해 고향에 내려와 신병(身病)을 이유로 수차례 벼슬을 사양한 뒤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몰두했다. 그의 출처(出處)는 140여 회 벼슬을 권유받고 79차례 사직을 반복하며 도산에 머무른 퇴계 선생을 닮았다.
종손의 안내로 먼저 고산정사를 둘러봤다. 띠집 3칸은 이후 기와 건물이 됐다. 정사 앞에 서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미천(眉川)이 흐르고 그 뒤로 병풍처럼 둘러선 해발 300m 절벽이 펼쳐진다. 절벽에는 바위 틈에서 자란 측백나무 300여 그루가 숲을 이룬다. “천연기념물 측백나무는 조팝나무가 꽃필 무렵 장관을 이룹니다.” 대산이 노래한 고산7곡 중 4곡의 모습이다. 주변은 암산유원지로 지금은 안동의 명승지가 됐다.
대산은 많은 저술을 남겼다. 20세엔 공자 등을 모사한 뒤 글을 붙인 [성현유상권서(聖賢遺像卷序)]를 지었다. 29세엔 자신이 과거시험을 준비하면서 느낀 여러 모순을 지적하고 개선책을 제시하는 [과거사의(科擧私議)]를 집필했다. 그는 과거를 사장(詞章) 중심에서 의리(義理) 중심으로 바꿔 특정 가문의 급제 독점을 없애야 한다고 봤다. 31세엔 퇴계가 편찬한 [주자서절요]를 본따 퇴계가 문인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을 모아 [퇴계서절요]를 엮었다. 34세에는 성현들의 궁구한 뜻을 뽑아 자신의 견해를 밝힌 [이기휘편(理氣彙編)]을 쓰고, 39세엔 성정(性情)의 바름을 논한 [약중편(約中編)]을 펴냈다.
③ 퇴계를 통해 주자(朱子)로 들어가다
대산의 학문에서 눈에 띄는 것은 퇴계가 간 길을 그대로 따르려 한 방법이다. 대산은 일찍이 벼슬에 뜻을 접고 학문에 전념했다. 퇴계가 [주자서절요]를 편찬해 성리학의 핵심을 제시한 방법을 빌어 대산은 [퇴계서절요]를 엮어 퇴계학의 핵심을 제시했다. 퇴계가 도산서당 주변 자연을 소재로 [도산잡영]을 지은 것을 본받아선 [고산잡영]을 남겼다. 퇴계 선생이 학봉에게 지어 준 [병명(屛銘)]에 주석과 풀이를 붙여 [병명발휘(屛銘發揮)]를 썼다. 대산이 꿈에 퇴계를 뵙고 깨어나 시를 지은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낙천(洛川)은 동쪽으로 흐르나 지난 일 공허한데/ 퇴계 고을 서당에는 서서히 바람이 부네/ 백년 지난 세상이라 미혹한 길 한이 되었는데/ 어젯밤 꿈속에서 어렴풋이 뵈었노라”
국역 [대산집]의 해제를 쓴 전성건 고려대 연구교수는 이를 두고 “퇴계 입장에 상반되는 견해의 한계를 규정하고 퇴계학파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해석도 폭넓게 검토해 퇴계학의 표준을 정리했다”고 적었다. 이(理)가 주(主)가 되고 기(氣)가 자(資)가 된다는 이른바 ‘이주기자설(理主氣資說)’을 통해 율곡학파와 퇴계 학파의 과도한 해석을 균형 있게 조화시키려 했다. 대산이 퇴계학맥의 적전(嫡傳)을 넘어 ‘소퇴계(小退溪)’로까지 불리는 까닭이다.
종손은 우연 하나를 소개했다. 퇴계 선생은 12월 8일 돌아가시고 대산은 하루 뒤인 12월 9일 세상을 떠났다. “한때는 퇴계 선생 불천위 제사를 마친 제관들이 바로 우리 집으로 오곤 했습니다.” 또 대산은 퇴계보다 1년 하고 하루를 더 살았다고 한다. 대산은 “문집을 낼 때는 퇴계문집을 넘지 말라”는 당부를 남기기도 했다. 대산 사후 아우 이광정과 아들 이완, 제자들은 대산의 유문(遺文)을 모아 1802년 52권 27책으로 [대산집]을 간행했다.
고산정사 뒤로 고산서원이 널찍하게 배치돼 있다. 고산서원은 1781년 대산이 세상을 떠난 3년 뒤 사림의 발의로 건립이 추진돼 1789년 모습을 드러냈다. 고산서원 서재(西齋)에는 백승각(百承閣)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대산집] 등 목판 2700여 점이 보관돼 있던 곳이다. 대산종가가 2002년 한국국학진흥원에 목판 등을 기탁하면서 지금은 비어 있다. 고산서원 편액이 걸린 강당은 이름이 호인당(好仁堂)이다. 호인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도산서원 전교당보다 규모가 컸다. 강당 앞뜰은 2011년 대산 탄신 300주년 행사를 치렀을 만큼 널찍하다.
방대한 저술과 함께 대산은 고산정사를 중심으로 많은 문인을 배출했다. [고산급문록]에는 제자 273명의 이름이 나온다. 그의 예학은 동암 류장원에게로 이어져 [상변통고]라는 조선 후기 기념비적 예서를 탄생시킨다. 대산의 학문은 남한조·류치명·정종로 등으로 계승돼 한말까지 이어져 꽃을 피운다. 또 사상의 한 가닥은 기와 이상원으로 전해진다.
제자들 이야기를 나누다가 동학(東學)을 창시한 최제우가 37세 득도 이전 대유(大儒)였던 아버지 최옥의 영향을 받았다는 글이 떠올랐다. 김용옥 교수의 [도올심득 동경대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최옥은 14세에 대산을 찾아뵙고 “주자와 퇴계의 양서(兩書)에 힘을 기울이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최옥의 [근암집]에는 그가 주렴계의 [태극도설]을 읽은 뒤 소감이 적혀 있다. “나는 주렴계의 [태극도설]을 접하고 퇴계의 학설에 더욱 신념을 갖게 되었다.” 김용옥 교수는 이 책에서 ‘퇴계 이황→학봉 김성일→경당 장흥효→갈암 이현일→밀암 이재→대산 이상정→기와 이상원→근암 최옥→수운 최제우’로 이어지는 학맥을 그림으로 그렸다. 종손에게 그 부분을 보내 주었다. 최제우의 중요한 사상적 바탕은 퇴계학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동학의 대척점에 있었던 서학(西學) 역시 퇴계를 사숙한 다산 정약용 등 근기(近畿) 남인이 중심이 돼 펼쳐졌다. 조선 말기 동학과 서학이라는 사상의 양대산맥이 퇴계학에 닿아 있는 셈이다.
- 월간 중앙 2021년 4월호,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5. 황제를 꾸짖은 의병장 척암 김도화(拓庵 金道和)
1) 척암 김도화(拓庵 金道和)
① 정의 : 조선 말기 안동 출신의 의병장.
② 개설 : 김도화는 본관이 의성, 자는 달민(達民), 호는 척암(拓庵)이며, 한말 안동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③ 활동사항 : 김도화는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귀미리에서 아버지 김약수(金若洙)와 곡구처사(谷口處士) 정상관(鄭象觀)의 딸인 어머니 진양정씨(晉陽鄭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893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김흥락(金興洛), 류지호(柳止鎬) 등과 더불어 안동의진 결성을 결의하고 「안동통문(安東通文)」 작성에 참여하였다. 1896년 1월 20일 안동의진이 구성될 때 여러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봉화 유곡(酉谷, 닭실) 출신 권세연(權世淵)을 의병장으로 뽑았다.
안동의진의 1차 대장 권세연이 물러나자 김도화는 3월 13일 안동의진의 대장에 추대되었다. 3월 14일 대장에 취임한 후 류난영(柳蘭榮)을 도총(都摠)에, 김흥락과 류도성을 지휘장에 선임하는 등 조직을 정비하였다. 또 의병을 일으킨 뜻을 왕에게 아뢰는 「창의진정소(倡義陳情疏)」를 올리고 각지로 격문을 발송하는 한편 인근 지역에도 의병을 모으는 소모관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태봉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기 위해 권문팔(權文八)을 대표로 삼아 안동의병 250여 명을 파견하였다. 3월 26일 예천에서 안동 지역의 6개 의진과 제천의 호좌의진(湖左義陳)은 연합전투를 다짐하였고, 3월 29일 태봉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격렬한 공방전 끝에 태봉 함락은 실패로 돌아갔다.
태봉 전투의 패배 이후 다시 병력을 보충하여 의진을 정비하고 전투 준비를 갖추었으나 8월 영남 지역 의병의 해산을 종용하는 고종의 칙령이 안동부에 도착하고 이어 9월 11일 관군이 안동부에 도착하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의진을 해산했다. 이에 따라 약 9개월에 걸친 안동의진 항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청파오조약소(請罷五條約疏)」, 「포고만국문(布告萬國文)」, 「포고각국공사문(布告各國公司文)」을 작성하였다. 1910년 끝내 일제 강점으로 나라가 망하자 “국가의 통치 권한이 폐하의 사유가 아니고, 한 치의 땅도 한 사람의 백성도 폐하 사물(私物)이 아닙니다. 폐하, 어찌하여 필부들이 자기 논밭을 매매하듯이 해버렸습니까?”라는 내용을 담은 상소문을 올리고, 1912년 8월 7일 세상을 떠났다.
④ 저술 및 작품 : 위기지학에 힘써 ‘숙흥야매(夙興夜寐) 온고지신(溫故知新)’ 여덟 글자를 벽에 붙여 놓고, 사서(四書)와 태극도(太極圖)·서명(西銘)·근사록(近思錄)·역번(易繁)·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등에 침잠하였다. 정재 류치명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을 하니, 류치명은 ‘전척(展拓)’ 두 글자를 써줌에 이로써 ‘척암(拓庵)’으로 아호했다. 문집으로 『척암집(拓庵集)』이 있다.
⑤ 묘소 : 묘소는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송천동 안동대학교 후문 근처에 있다.
⑥ 상훈과 추모 : 1983년에 대한민국건국포장이, 1990년에 대한민국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도화 [金道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 ‘폐하! 무엇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시는 겁니까?’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하자 안동 유생 척암 김도화(1825~1912)는 고종황제를 매섭게 꾸짖는 상소문을 올렸다. '절대 한일합방을 하면 안된다'(請勿合邦)는 상소였다.
"500년 역사의 왕위와 3천리 강토는 선대의 왕으로부터 이어받았습니다. 국가의 통치대권은 폐하의 사유물이 아니며 한 치의 땅도, 한 사람의 백성도 폐하의 사유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임금은 나라를 주고받는 일을 어찌 농사 짓는 자가 토지에서 난 곡식을 서로 매매하듯 합니까"라고 질타했다.
700자로 구성된 이 상소문은 고종과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에게 망국의 책임을 돌리며 욕설에 가까운 비판의 칼날을 휘둘렀다. 나라와 백성을 빼앗긴 임금은 더이상 임금이 아닌, 여염의 필부(匹夫)에 지나지 않는다고 통박한 것이다. 척암의 나이 86살이었다. 그리고는 집 앞에는 '合邦大反對之家'(합방대반대지가·합방을 크게 반대하는 집)이라는 현판을 걸고 스스로 가택연금 생활과 혹독한 감시 속에 살다가 2년 뒤인 1912년 88살을 일기로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척암 김도화는 국운이 기울어가던 시기에 일제의 침략에 맞서 항거한 대표적인 유림이자 문장가였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두 달 후에는 단발령까지 선포되자 이에 격분해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안동 유생들도 의병 봉기를 단행했다. 그 중심에 김도화가 있었다. 1896년 2대 의병장으로 추대됐다.
김도화가 이끄는 안동의진이 2차 거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종이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김도화는 강력히 항의하는 상소문을 올리며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척암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 이후에도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을사늑약을 당장 폐기하라는 상소문 '청파오조약소'(請破五條約疏)를 올렸다. "그들을 용서하지 못할 죄가 셋 있으니 첫째는 나라를 팔아먹은 죄요, 둘째는 외적과 은밀히 통한 죄요, 셋째는 군부(君父·임금)를 협박한 죄"라고 썼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10년 8월 결국 국권이 침탈되자 척암은 고종 황제를 지칭하면서 "대체 황제가 뭐하는 사람이야"고 사정없이 꾸짖은 것이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척암 김도화의 비분강개한 정서를 담은 많은 시와 서간, 상소문 등이 수록된 문집 55권 29책을 '국학진흥 청년일자리 창출사업'을 통해 국역을 완료하고 올해 E-Book 형태로 발간했다.
매일신문, 엄재진 기자 jinee@imaeil.com
3) 니산정(泥山亭)
① [정의] :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귀미리에 있는 조선 말기 정자.
② [개설] : 니산정은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 1825~1912)를 기리기 위한 정자이다. 김도화는 류치명(柳致明)의 문인으로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곽종석(郭鍾錫)·김흥락(金興洛)·권진연(權晋淵) 등과 함께 의거하여 일제의 침략 야욕을 분쇄하자는 통문을 각지에 보내고, 1896년 안동부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함창에 주둔한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여 여러 차례 격렬한 공방전을 펼쳤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척사 위정의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만년에 망국의 통한을 가슴에 안은 채 후진을 양성하였다. 저서에 『척암집(拓庵集)』이 있다.
③ [위치] : 경상북도 안동의 구안 국도를 따라서 대구 방면으로 가다 보면 좌측에 귀미리 마을이 나오는데, 니산정은 귀미리 마을의 남쪽 한천이 내려다보이는 야산의 완만한 경사지에 북향으로 앉아 있다. 바로 뒤편에는 김굉의 정자인 자운정(紫雲亭)이 있다.
④ [변천] : 원래는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구천리에 있었는데, 1969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⑤ [형태] : 니산정은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자연석 기단을 쌓았는데, 전면과 측면은 50㎝이고 뒷면은 20㎝로 시멘트도 사용하였다. 이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그 위에 각주(角柱)와 원주(圓柱)를 세웠다. 니산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총 6칸의 정자인데 우측 온돌방 2칸은 각주이고 마루에는 원주를 세웠다.
4칸의 마루는 우물마루이고, 상부는 5량가로 판대공(板臺工)을 사용하였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마루 전면은 사분합문이고 좌측과 뒷면의 문은 쌍골판문이며 벽은 판벽으로 되어 있다. 온돌방은 마루보다 30㎝ 정도 높으며 쌍띠살문과 띠살문을 달았으며, 벽은 흙벽이다. 마루 좌측 쌍골판문에는 각각 머름중방이 설치되어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홑처마이며, 정면에 ‘니산정(泥山亭)’ 현판이 있다. - 디지털 안동문화대전
6. 고운사[ 孤雲寺 ]
① 개설 :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이다.
② 역사적 변천 : 681년(신문왕 1)에 의상(義湘)이 창건하여 고운사(高雲寺)라 하였다. 그 후 최치원(崔致遠)이 승려 여지(如智) · 여사(如事)와 함께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羽化樓)를 건립하고 이를 기념하여 최치원의 자(字)를 따서 고운사(孤雲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헌강왕 때는 도선(道詵)이 약사여래석불과 석탑을 안치하였고, 948년 운주(雲住)가 중창하였다.
1018년(현종 9) 천우(天祐)가 대웅전 · 약사전 · 극락전 · 적묵당(寂默堂) · 설선당(說禪堂) · 동별실(東別室) · 서별실(西別室) · 관음전 · 금당(金堂) · 백련당(白蓮堂) · 회운당(會雲堂) · 청풍당(淸風堂) · 문수전(文殊殿) · 양로당(養老堂) · 백련암(白蓮庵) 등을 중창하였다. 극락전에 봉안한 관음상은 천해(天海)가 꿈에서 본 것과 똑같은 불상을 송도 대흥산(大興山)에서 찾아내어 고운사로 옮겨 봉안한 것이라고 한다.
1482년(성종 13) 석가여래불상을 안동 갈라산(葛羅山) 낙타사(駱駝寺)에서 옮겨 와 대웅전에 봉안하였으며, 1646년(인조 24) 소영(昭影)의 사리탑을 건립하였다. 1668년 극성(克成) · 승묵(勝默) · 덕종(德宗) 등이 가운루를 중수하였고, 처순(處淳)이 천왕문(天王門)을, 설행(雪行)이 봉황문을 신축하였다.
1670년(현종 11) 숭해(崇海) · 묘선(妙善) · 성준(性峻) · 인준(印峻) 등이 명부전을 신축하고 시왕상(十王像)을 조성하였으며, 종헌(宗憲)과 설휘(雪輝)는 영각(影閣)을 짓고 영정을 만들어서 봉안하였다. 1681년(숙종 7) 천왕문을 중수하였고, 1683년 관헌(灌憲) · 인잠(印岑) · 선초(善初)가 팔상전(八相殿)을 신축하였으며, 1686년 4월 명부전을 중창하였다.
1695년 도청(道淸)과 선조(禪照)가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상을 봉안하여 이전의 관음상과 함께 삼존불상을 구비하였다. 행옥(幸玉)은 설선당을, 태운(泰運)은 적묵당을 중건하였고, 선특(禪特)과 성담(性談)은 동별실을, 성관(性觀)은 서별실을 중수하였다. 또, 태눌(泰訥)은 청풍당을 중건하였고, 승하(勝下)는 응향각(凝香閣)을, 의율(義律)과 의잠(義岑)은 백련당을 중수하였다.
1724년(영조 즉위년) 법존(法存) · 지훈(智勳) 등이 운수암(雲水庵)을 창건하였고, 1729년 신유한(申維翰)이 사적비를 세웠다. 1744년 어첩봉안각(御帖奉安閣)을 건립하였으며, 1797년 의암(義巖)이 백련암을 중창하였다. 1803년(순조 3) 4월 적묵당과 서별실이 화재로 불타 없어지자 1804년 2월 문찰(文察)이 중건하였고, 1812년 의암이 운수암을 중건하였다.
1835년(헌종 1) 2월 백련당 · 금당 · 관음전 · 군포고(軍布庫) · 직사고(直舍庫) · 영전 등이 화재로 모두 불타 없어지자, 나라에서 홍종호(洪鍾浩)에게 명하여 만송(晩松) · 호암(虎巖) · 수열(守悅) 등과 함께 대웅전과 금당을 중건하게 하였다. 같은 해 12월 운수암이 불타 없어지자 1838년 함홍(涵弘)이 중건하였고, 1868년 눌암(訥庵) 등이 만성제(晩惺齊)를, 해송(海松)이 우의당(禹儀堂)을 건립하였다.
1899년 포운(抱雲) · 혜은(惠隱) 등이 가운루 · 우화루 · 동별실 · 적묵당 · 연지암(蓮池庵) · 천왕문을 중수하였고, 1901년 만선(滿船)과 추산(悉山)이 운수암의 해운루(海雲樓)를, 1902년 연수전(延壽殿)을 건립하였으며, 1904년 포운 등은 금당을 중수하였다.
1906년 안동 · 예안 · 의성 · 지례 · 선산 · 금산 · 용궁 · 비안 · 군위 · 의흥 · 청송 · 진보 · 순흥 · 봉화 · 영천군 등에 있는 사찰에 대한 관리를 종무원(宗務院)에서 부여받았다. 1912년 30본산(本山)의 하나가 되었으며, 1913년 2월 사찰령(寺刹令)에 의하여 고운사 본말사법(本末寺法)이 시행되면서 경상북도 내의 46개 사찰을 말사로 관장하였다.
1924년 주지 만우(萬愚)가 약사전을 중수하고 대정암(大定庵)을 창건하였으며, 1935년 주지 영호(泳鎬)가 대웅전을 중수하고 가운교(駕雲橋)를 만들었다. 1936년 명부전과 선열암을 중수하고 천왕문을 옮겨지었다. 또한, 1934년에는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였고, 안동 포교당 · 와룡 포교당 · 의흥 포교당 등을 두었다.
③ 내용 : 30본산 당시 논 6만 3,664평, 밭 17만 9,634평, 대지 942평, 사사지(社寺地) 4,189평, 산림 260정(町) 3반(反)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현재는 의성 · 안동 · 영주 · 봉화의 4개 시 · 군, 54개의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 극락전 · 관음전 · 명부전 · 금강문 · 가운루 · 적묵당 · 우화루 · 동별실 · 서별실 · 금당 · 회운당 · 고운대암(孤雲大庵) · 고금당(古今堂) 등 총 25동이 있다.
소장된 문화유산으로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의성 고운사 석조여래좌상과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고운사 삼층석탑, 1982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고운사 가운루, 2020년 보물로 지정된 의성 고운사 연수전, 사적비, 사보(寺寶)로 전해지고 있는 오동학촉대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여러 차례 화재로 불타 없어진 후 중수된 가운루나 각각 18세기, 20세기에 세워진 사적비나 연수전과는 달리 석조여래좌상과 삼층석탑은 도선이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층석탑은 현재 나한전 앞에 자리 잡고 있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으며, 아래층 기단에는 희미한 안상(眼象) 무늬가 보이고, 위층 기단에는 기둥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 급격히 줄어들고 있으며, 각 층의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약한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에서 치켜 올림이 크지 않고, 밑면에 1층은 4단, 2·3층은 3단의 받침을 각각 두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 머리장식받침돌), 복발(覆鉢: 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뒤집혀진 앙화(仰花: 활짝 핀 연꽃모양 장식) 등을 올린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석재가 많이 닳아 있고, 아래층 기단이 특히 심하다.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줄어든 규모나 지붕돌의 조각양식 등에서 시대가 조금 내려간 모습들이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운사 [孤雲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7. 사촌 마을과 만취당
1) 의성 만취당[ 義城晩翠堂 ]
① 정의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만취당길 17[사촌리 207] 사촌 마을에 위치한 누각형 가옥.
② 개설 : 퇴계 이황(李滉)의 제자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1539~1601]이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한 건물이다. 김사원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천성이 인자하여 자신의 재산을 털어 기민(飢民)을 진휼하여 지방민의 추앙을 받았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인 정제장(整齊將)으로 추대되었다.
③ 위치 : 의성 만취당은 점곡면 사촌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사촌 마을은 점곡면사무소에서 매봉산 방향으로 약 500m 정도 가면 점곡 초등학교의 우측에 자리 잡고 있다.
④ 변천 : 만취당 김사원이 1582년(선조 15)에 착공하여 1584년에 완공하였다. 건립 이후 김씨 종가의 대청 겸 문중 집회소로 사용하였으나 1727년(영조 3)에 거실(居室)로 사용하기 위해 복재(復齋)를 증축하였으며 1764년에는 서소익실(西小翼室)을 증축하였다.
⑤ 형태 : 의성 만취당은 현재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이다. 원래 안동 김씨 종실(宗室)로 사용하기 위해 정면 3칸, 측면 2칸 대청(大廳)으로 건립하였으나, 거실로 사용하기 위해 1727년에 복재 1칸을 증축하였으며 1764년에는 서소익실 2칸을 증축하여 현재와 같은 T자형의 평면을 이루게 되었다. 가구는 5량가의 초익공(初翼工) 건물로 대청은 팔작지붕이며, 좌우 익사는 맞배지붕이다. 의성 만취당 현판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
⑥ 현황 : 1983년 6월 20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로 지정되었던 의성 만취당은 2014년 6월 5일 보물 제1825호로 승격되었으며,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안동 김씨 만취당파 문중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⑦ 의의와 평가 : 조선 시대 특히 임진왜란 이전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건물 중의 하나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의성 만취당 [義城晩翠堂]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 의성 사촌(沙村) 마을 김사원 만취당 종가
① 3명의 정승 태어 날 형세 ‘사촌마을’
의성군 점곡면 사촌마을은 안동 김씨, 풍산 류씨들이 세거하는 유서 깊은 선비 마을이다. 조선 중기의 명재상 서애 류성룡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점곡면은 사과로 유명하다. 사촌(沙村)인 까닭은 모래가 많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 사과나무가 많은 것은 사촌은 모래밭에 사는 과일을 의미하는 사과(沙果)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600여년 내력을 지닌 마을에는 아름다운 숲과 30채에 이르는 옛 한옥들이 즐비하다. 마을 서쪽에는 천연기념물(405호)로 지정된 ‘사촌리 가로숲’이 마을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다. 사촌의 가로 숲은 고려말 안동김씨 중시조인 충열공 김방경의 5세손 김자첨(金子瞻)이 안동 회곡에서 이곳으로 오면서 만든 것이다. 그는 ‘서쪽이 허하면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풍수설에 따라 샛바람을 막아 삶의 터전을 보호해줄 숲을 조성했다. 작은 도랑 주위에 조성된 숲은 800여m에 달한다.
사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3명의 정승이 태어날 형세라고 한다. 신라 때 이미 ‘나 천업’이 나왔고, 풍수상 두 번째 정승인 류성룡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이어 정승 1명이 더 배출된다고 믿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의성의병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어 사촌마을이 겪은 고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② ‘만취당’의 기품
만취당은 김사원(金士元, 1539-1602)이 1579년(선조12)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당호는 한석봉의 글씨체로 알려져 있고, 만취당은 성리학자 김사원의 지조를 상징한다. 늙어서도 지조를 바꾸지 않는다는 ‘만취’는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선호한 당호 중 하나였다. 이 건물은 안동김씨 집성촌 사촌 문중의 상징물이자 자존심이기도 하다. 조선조 특유의 11칸 대청 건물로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에 이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의 목조 건물로 임란 이전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2014년 보물 제1825호로 지정돼 보수했다. 다행히도 임진왜란, 병자호란, 병신병란, 6.25전쟁 등 역사 전환기를 거치면서 불타지 않았다. 또 한 번도 해체 복원되지 않고 원형대로 보존해온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유가의 보물이다.
③ 수령 500년 된 ‘만송정’ 향나무
만취당 옆에는 수령 500년 된 향나무가 서있다. 송은처사 김광수가 심은 나무다. 절조를 지킨다는 뜻으로 ‘만년송’이라 이름 지었다. 그 뒤 의성지역에 군수나 현감이 부임하면 만연송의 안부를 물었을 정도였다고 하니, 높은 벼슬을 하지 않았던 만취당 주인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다. 서애 류성룡은 묘갈문에서 그를 한평생 온화한 마음을 가져 어진 자나 어리석은 자 모두가 존경했으며 ‘독행군자’라 하였다. 조선후기 눌은 이광정은 행장에서 그를 부귀와 명예를 버리고 고향에 돌아온 중국 진나라 도연명과, 고려 3은 중 한 사람은 길재에 비유했다.
④ 국난 땐 의병 일으키고 가난한 이 구제
만취당 종가 사람들은 600여 년 동안 터를 잡고 살면서 높은 벼슬을 한 이가 드물다. 하지만 한 집안에서 대과 13명, 소과 31명이 급제하는 등 영남에서는 학문을 숭상하는 명문 집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나라가 어려울 땐 만취당 사람들은 분연히 떨쳐 일어섰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만취당 3형제는 나란히 창의해 나라 위한 충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김사원은 의성정제장에 추대되었고, 전쟁 중 흉년이 계속되자 개인 창고를 열어 빈민을 구제했다. 그는 부녀자가 오면 꼭 의관정제를 한 다음 구휼했다고 전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김씨의창(金氏義倉, 김 씨의 의로운 창고)’이라 불렀다. 또 양식을 꾸러 오면 차용증을 쓰게 했는데 갚지 못하고 토지문서를 가져왔을 때는 그 자리서 차용증서를 찢어버렸다. 그러면서 “차용증을 쓴 것은 빌려간 곡식을 갚는데 게으르지 마라는 뜻이지 논밭을 뺏기 위함이 아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느냐”라고 위로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⑤ 사촌마을 입구 의성의병기념관
사촌마을은 임진왜란, 정묘호란,무신란, 한말 병신의병 등 수많은 역사 전환기 때 마다 의성의병의 중심지가 됐다. 1996년 문중에서는 만취당 남쪽 잔디밭에 ‘병신병란백주념비’를 세우고, 황산전투에 참여한 후손들은 2009년 마을 입구에 ‘병신창의기적비’를 세워 나라를 지키다 가신 님들을 추모하고 있다. 또한 의성군도 이 마을 입구에 ‘의성의병관’을 건립했다.
⑥ 만취당 14세 종손 김희윤 씨
만취당 김사원의 14세 종손 김희윤(66)씨는 선조들이 지켜온 유훈을 받들어 몸소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게 집안의 내력이라 한다. 지금은 의성에서 가까운 대구 딸네 집에서 잠시 겨울을 지내고 있다. 이틀간 만취당에서 문중회의가 있어 만날 수 있었다.
“무자기(無自欺) 즉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는 만취당 선조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종손은 마을 입구에 새겨진 ‘충의유향’이란 말처럼, 나라가 어려울 때 일어서고, 베푸고 나누는 삶을 사는 게 600여 년 지켜온 사촌 문중 선조들의 덕에 보답하는 일이라 말했다.
경북일보 오종명 기자, 2016.12.04.
◆ 답심 후기
송순의 면앙정을 둘러 보고
– 회장 이정운
학창 시절 면앙정가를 배웠던 기억이 전부인 상태로 이번 답사를 준비하며 배종찬 선생님이 정리해준 자료집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결혼하고 60주년이면 회혼례(回婚禮)를 하는 것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하고 60주년이 되면 회방례(回榜禮)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회혼례를 더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행사라 익숙한 말입니다만 회방례는 듣는 것이 처음인 데다가 그것도 선조 임금님이 베풀어 주시는 행사라 합니다. 회방례를 받으려면 조건이 있는데 과거급제하고 60년 이상을 살아야 하고 잔치를 주관하는 출중한 제자가 있어야 한답니다. 자료에 의하면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1520년(중종 15)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마친 뒤, 1524년(중종 19) 세자 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고 1527년(중종 22)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533년(중종 28)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잡자, 귀향하여 면앙정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답니다. 경상도 관찰사·사간원 대사간 등의 요직을 거치면서 벼슬길에 귀향도 가며 부침을 겪기는 하였으나 말년에 제자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은 분이라 여겨 집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송순 선생이 27세에 과거 합격하고 87세(1579)에 회혼례를 치렀는데, 그 행사장에 불혹의 나이 넘은 출중한 제자 정철 고경명 기대승(?) 임제 4명이 손수 스승을 위하여 대나무 가마를 매고 스승을 기쁘게 해주었다는 사실에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200년이 지나 1798년도에 아주 특별한 과거시험을 실시했다는 것입니다. 광주에서 실시하는 과거시험에서 정조 임금님이 직접 시제를 내렸답니다. 시제는 “하여면앙정(荷輿俛仰亭)”이였답니다. 면앙정 송순 선생은 천복을 누린 듯합니다. 그 당시 세수로 장수하셨으며 출중한 제자 배출하고 임금의 사랑까지 받은 복된 선비였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훌륭한 가사 문학을 남기신 선비로 전남의 보배요 한국의 자랑스러운 인물이라 추앙하여 마땅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담양지역 가사문학 관련 사실들을 많이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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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앙정가] 송순
無等山(무등산) 활기 뫼히 동 다히로 버더 이셔
멀리 쳐 와 霽月峯(제월봉)이 되여거
無邊大野(무변 대야)의 므 짐쟉노라
닐곱 구 움쳐 믄득믄득 버럿
가온대 구 굼긔 든 늘근 뇽이
선을 야 머리 안쳐시니
너바회 우
松竹(송죽)을 헤혀고 亭子(정자) 안쳐시니
구름 靑鶴(청학)이 千里(천리)를 가리라
두 래 버렷
玉泉山(옥천산) 龍泉山(용천산) 린 물히
亭子(정자) 압 너븐 들 兀兀(올올)히 펴진 드시
넙든 기노라 프르거든 희지 마나
雙龍(썅룡)이 뒤트 긴 깁을 폇
어드러로 가노라 므 일 얏바 – 부분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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