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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성현(成俔) |
생년 | 1439년(세종 21) |
몰년 | 1504년(연산군 10) |
자 | 경숙(磬叔) |
호 | 용재(慵齋), 부휴자(浮休子), 허백당(虛白堂), 국오(菊塢) |
본관 | 창녕(昌寧) |
시호 | 문대(文戴) |
그의 저술로 허백당시집(虛白堂詩集 : 시집(詩集) 14권ㆍ보집(補集) 5권ㆍ풍아록(風雅錄) 2권ㆍ습유(拾遺) 1권ㆍ문집(文集) 14권ㆍ행장(行狀) 합 8책)이 전한다.
성현의 좌우명
(敬天) 하늘을 공경한다
(愼獨) 홀로 있을 때 몸가짐을 삼간다
(正心) 마음을 바르게 가진다
(寡慾)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改過) 잘못이 있으면 고친다
(知恥) 부끄러움을 안다
(守約) 검소하고 절약하는 생활을 한다
(行簡) 간명하게 행동한다
(踐形) 사람다운 행동을 한다
(復禮) 예로써 산다
성현은 세종 21년(1439년)에 태어나, 세조 8년(1462년)에 문과에 급제, 홍문관 정자를 시작으로 대사간, 대사성, 평안 감사, 경상 감사, 예조판서 등을 거쳐 대제학을 지냈다.
문장에 능하여 이름이 중국에 떨쳤으며, 음악에도 밝아 거문고를 잘 탔고, '악학궤범'이라는 음악서를 남겼다.
성현이 세상을 떠난 것은 연산군10년(1504년)이었다.
그의 장례일이었다. 으레 호화로울 것으로 생각되는 장례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상여는 한 마리의 황소가 끌었다. 뒤에는 자손과 십여 개의 만장, 그리고 친척과 손님이 따랐다. 대제학까지 지낸 이의 장례로 보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간소한 장의 행렬이었다.
이것은 그가 죽음을 앞두고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기 때문이다.
"상례와 장례를 모두 간략하게 하고, 상여는 호화롭게 꾸미지 말고, 소로써 상여를 끌게 하라. 나는 덕이 있는 사람이 아니니, 표석이나 세우고 비석은 세우지 말라."
이에 무덤도 평범하게 만들고, 유언에 따라 비석은 세우지 않고 표석만 세웠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연산군은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사화는 죽은 성현에게까지 미쳤다.
연산군이 부관참시의 명을 내린 것이다.
지난 날, 그가 연산군이 사랑하는 여인에 관한 일을 앞장서서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연산군의 명을 받은 사람들이 성현의 무덤으로 찾아갔다.
무덤에 간 그들은 놀랐다.
벼슬자리에 있을 때 청렴·검소하기로 이름이 높았던 성현이 무덤조차 초라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성현의 청렴과 검소에 크게 감복한 그 사람들은 결국 무덤을 파헤친 것처럼 하고서 시체에는 손도 대지 않고 돌아왔다.
이리하여, 사화에 연루된 수많은 사람들이 화를 당한 가운데서도 오직 성현은 그 화를 면한 것이다.
성현은 호를 용재(용齎) 또는 부휴자(浮休子)라 했다.
부휴자라고 한 것은 "태어나서는 세상에 의탁하였으니 마치 뜬 것 같고, 죽어서는 세상을 버리고 가니 마치 쉬는 것 같다. 뜬 세상 무엇이 영화이며, 죽으면 쉬는 것이니 무엇을 상심할꼬." 라는 뜻에서 였다.
호에 나타난 뜻이 이와 같으니, 삶을 달관한 그의 유언 또한 세속을 초월하고 있었다.
그는 성품이 소탈하여 구애됨이 없고 순탄하여 남들과 경쟁하는 일이 없었다 한다.
그러면서도, 천성이 바르고 곧아 잘못된 일을 보고는 그대로 지나치지 못했다 하는데, 앞에 열거한 열 가지 계명을 지어 생활 신조로 삼아 실천함으로 후세 선비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고 하거니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절실히 요구되는 생활의 규범이다.
현대인이 풍요한 물질 문명의 혜택 속에 살지만, 이러한 삶의 자세가 없이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 어렵다.
과다 소비는 가정 생활을 어렵게 할 분만 아니라, 지구 자원을 고갈시킨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환경 파괴도 무절제한 물질적 욕망과 소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또한, 근검 절약하고 삼가는 생활 태도야 말로 인간이 헛된 욕심을 좇다가 일생을 그르치는 것을 막아주는, 소금과 같은 것이리라.
노자 또한, 자신이 누더기 옷을 입고 가슴 속에 세 가지 보물을 간직한 사람이라고 자랑(?)했다.
세 가지 보물이란,
어머니 마음처럼 따뜻한 사랑으로 살고,
근검하게 아껴 쓰며,
남 앞에 함부로 나서지 않고 겸손하게 산다는 것이다.
부휴자가 실천했던 생활의 신조와 함께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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